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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01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2. 2015.05.2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3. 2014.05.0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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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 서울 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나들이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서울연등회 연등 ▲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일컬어진다. 꽃샘추위란 이름으로 4월까지 천하를
어지럽히던 겨울 제국의 잔여 세력이 봄에게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상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많은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나들이객을 참 바쁘게도 만드는데 그
중에는 서울연등회도 있다.

서울연등회(서울연등축제)는 봄 축제의 백미(白眉)이자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
일의 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주말에 열리는데 토요일에는 축제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이 장충동 동국대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종로1가)
까지 장엄하게 펼쳐지며, 일요일에는 우정국로를 중심으로 전통문화마당과 연등놀이가 열린다.
그래서 후배 여인네와 일요일 전통문화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런 좋은 축제는 꼭 봐야 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일요일 전통문화마당 일부와 조계사 주변에 전시된 연등,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북쪽 시작점(안국동로터리)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은 조계사와 우정국로(종각역~안국동로터리) 일대에서 열린다. 우정
국로는 4발 수레들로 늘 번잡한 곳이지만 연등축제만큼은 도로를 통제하여 콧대 높은 수레들의
바퀴를 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 대로를 4발 수레의 눈치 없이 두 다리로 마음껏 거닐 수 있는 1
년에 몇 안되는 날이다.
서울연등축제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 1주 전 주말에 열린다. 주말 전날인 금요일에 조계사
와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통교 구간)에서 전통등 전시회가 그 서막으로 열리
며, 보통 초파일 다음날까지 불을 밝힌다.

축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동국대(東國大)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열
린다. 이 마당은 연등행렬의 사전 행사로 관불의식과 법회,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열리며, 18시
부터 연등회의 갑(甲)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동국대 대운동
장을 출발하여 동대입구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4거리 직전까지 이
어지는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커다란 연등(장엄등) 상당수가 등장하면서 연등행렬의 분위
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행렬 진행시간은 3시간 정도로 조계사를 비롯해 서울의 상당수 사찰과 경기도와 지방의 일부 사
찰, 불교 종파와 단체/학교에서 보낸 사람들과 온갖 연등(燃燈)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
보이는 등은 5~10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2015년은 5만 개) 가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어 전혀 식상하지 않다. 게다가
행진 중에 사물놀이와 가벼운 춤 공연, 율동 등이 끊임없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빼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어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 시간에는 동대입구역에서 동대문, 동대문에
서 광화문4거리까지 도로를 통제한다.

연등행렬이 광화문4거리와 종로1가 사이에 다 모이면 보통 21시부터 회향(廻向)한마당이 펼쳐진
다. 종각역~광화문4거리 구간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큰 법회와 전통 공연이 펼쳐지며, 거리를
행진한 장엄등(연등)은 이들 구간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어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느라 분주하
다. 특히 몇몇 장엄등은 몸을 움직이거나 불, 연기를 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렇게 회향한마당은 23시경에 막을 내리고, 장엄등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 둔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우
정국로 전체가 온통 축제의 장이 되는데, 불교와 관련된 온갖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
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민속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떡이나 파전, 비빔밥, 식혜 등을 사먹으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 체험, 사찰/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도 많이 만
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전통문화마당은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19시쯤 되면 연등놀이의
몸풀기 행사인 연등행렬을 벌인다. 조계사 등 몇몇 절과 불교 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개량 한
복이나 공연에서 입는 고운 빛깔의 옷을 차려 입고 형형색색의 연등을 들며 커다란 장엄등을 이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과 종로2가, 종각역을 거쳐 조계사 인근 연등
놀이 행사장까지 돈다. 행진 중간에 사물놀이와 조촐한 춤 공연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천천히 이
동한다. (1시간 정도 걸림)
연등놀이 행사장에 이르면 연등회의 마지막 행사인 연등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 연등행렬에
참여한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연부터 현대식 공연까지 다채로운 공
연이 흥겹게 펼쳐지며, 공연 마지막에는 보통 강강술래를 하는데, 공연자와 관람객이 한데 어우
러져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이때 허공에서는 꽃비(분홍색 전통 종이)를 뿌려 흥겨운 분위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이 공연은 21시대에 끝나며, 이것을 끝으로 이틀 동안 펼쳐진 연등회는 아쉽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때는 마음이 뻥뚫린 듯 얼마나 허전하던지, 지나간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서울연등회는 단순히 불교 축제가 아닌 좁게는 서울, 넓게는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울리는 대축제로 천하 제일의 축제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다.


▲  우정국로 북부에 자리한 연등/연꽃장식 만들기 체험공간
이곳은 주로 외국 관광객들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유료임, 돈좀 쓰고 가라는 뜻)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렇다면 이 연등회는 언제부터 열리
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에서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세를 탄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중/후기에 이미 연등을 밝혔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열어 만백성이 즐겼고, 등을 며칠 동안 밝히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석가탄신일이 연관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석가탄신
일에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
를 연 것이 그 최초 기록이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
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조정의 불교 탄압으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
속 연등회를 즐겼다. 저녁에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
등은 한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은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각가지 연등을 만들어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시작이 되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
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후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도심 속 대로(大路)에서 펼쳐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배가 볼록 나온 아기부처가 빨간 일산(日傘) 밑에서 중생들의 시원한 하례를 받는다.

▲  멀리 해동(海東)까지 놀러온 태국 불상

5월(어쩔 때는 4월 말)만 되면 나도 모르게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연등회, 그 연등회의 전통문
화마당에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몽골, 네팔, 부탄,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이 서울연등회의 명성에 앞다투어 찾아와
공간을 하나씩 받아 그들의 불교 문화를 열심히 홍보한다. 이국적인 불상과 불교 용품은 물론
문화 체험과 다과 시식까지 가능하다.


▲  금박을 붙여서 만든 태국 불상의 위엄 ~~!
보시함에 돈이 참 수북하다. 저건 돌아갈 비행기 여비인가..?

▲  진지한 분위기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장

▲  북청(北靑)사자놀음 -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우정국로 공연장에는 온갖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북청
사자놀음(북청사자놀이)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 남사당놀이도 있음) 서울연등축제에 매년 등장
하는 단골로 우리 땅임에도 전혀 들어갈 방법이 없는 함경남도 북청의 오랜 민속 놀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놀이와 가면놀이의 일종으로 대륙계와 북방계의 사자춤이 민속화된 대표적
인 예이다. 함경남도에는 많은 사자놀이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이 북
청이다.
북청의 주요 사자놀이패로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
(英樂契),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가 유명했으며,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 사자라 하여 이촌
/중촌/넘은개/동문밖/후평/북리/당포 사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마을마다 사자의 모습을 달리
해서 놀았다. 그리고 북청 관내에 사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경쟁하면서 사자놀이 패들이 많
이 통폐합되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그 막을 올리는데, 대보름달이
만연하게 뜬 뒤에 사자놀음이 펼쳐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6일 이후에는 초청받은 집을
순회하며 노는데,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면 사자가 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
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이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며, 그 다음에 부엌으로 들어가 같
은 행동을 취하고 마당으로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집 주인의 요청이 있으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절을 한
다. 또한 아이를 사자 등에 태우면 오래 산다고 하며, 몰래 사자 털을 뽑아두면 장수한다고 하
여 사자 털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장수를 빌면서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
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먼 북청의 사자놀이가 서울로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북한의 핍박을 피하고
자 내려온 사자놀이 기능보유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놀이를 퍼뜨렸는데, 객지라 그런지 고향처
럼 하기에는 좀 힘들고 해서 내용이 좀 달라졌다.
우선 퉁소와 북으로 반주를 하며 애원성춤을 추고,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데리
고 나와 그를 조금씩 야골리면서 마당을 진행한다. 양반이 심심하다고 하니 꼭쇠가 악사(樂士)
, 무동(舞童), 꼽새 등을 불러 한데 판을 벌인 다음 끝에 비로소 사자를 소환한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용맹하고 무서운 동물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웃음을 머
금게 하는 귀엽고 해학적인 사자탈과 털이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며 어슬렁 나타난다. 보통 2명
이 1마리의 사자를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는 3인 1조가 되기도 한다. 사자는 상좌승(上座僧)과
계속 춤을 추며, 다양한 재주를 부리다가 잠시 쓰러진다. 이에 양반은 상좌승을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게 하지만 사자는 꿈쩍도 안한다. 그래서 의원을 소환해 침을 놓으니 그때서
야 일어난다. 이때 꼭쇠가 토끼(예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먹이니 사자는 먹는 시늉을 하며 굿
거리장단에 맞춰 극을 이끈다.
이에 양반은 기뻐서 사자 1마리를 더 소환하고 사자춤과 상좌승의 승무(僧舞)가 한데 어울린 다
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 그리고 악의 기운을 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능을
수반한 민속놀이로 그 흔한 양반과 파계승(破戒僧) 풍자는 없다.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1)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2)

공연이 끝나면 사자춤을 춘 사람들은 사자탈과 보기만 해도 찜통같은 가죽을 벗고 본모습을 보
인다. 중장년층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앳된 20대들. 수많은 옛 무형
자산들이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해 고사 직전에 놓인 것들이 허다한데, 북청사자놀음은 저들
로 인해 무척 든든함을 느낀다. 내가 백발이 되는 먼 훗날까지 길이길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남쪽 시작점(종각역4거리 북쪽)

▲  종각역4거리 북쪽에 마련된 외줄타기 현장
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의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에 임한다.

▲  어지간해서는 참 보기가 힘든 괘불(掛佛)도 칠흑같은 괘불함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왔다. 괘불 앞에서는 한참 승무가 벌어지고 있다. ▼


♠  서울연등축제 연등의 물결

▲  종각역4거리에 놓인 연등 (2013년)

조계사 북쪽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주변, 그리고 종각역4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은행
, 2015년에는 이곳에 연등을 두지 않았음)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연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날 연등행렬에 쓰인 장엄등도 몇 개 있음)
이들은 초파일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이곳에 있으며, 낮에는 햇님의 눈치로 조용히 색을 입힌 모
형물로 웅크리고 있지만 그가 없는 저녁에는 마음껏 몸을 밝히며 연등의 이름값을 한다.


▲  여의주를 문 푸른 빛깔의 목어 (또는 용)
뒤쪽에 두툼하게 솟은 푸른 빛깔은 꼬랑지가 아닌 바다 물결이다.
물결을 헤치며 자기 갈 길을 가는 목어의 위엄~~


▲  반토막난 생선 쪼가리 목어를 열심히 두드리는 승려

▲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거니는 물고기 (목어를 상징)

▲  연잎과 물고기(목어)를 든 남녀 동자들

▲  하얀 구슬을 품은 연분홍 연꽃

▲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연꽃(백련)

▲  귀엽고 상큼한 모습의 달마대사 연등

▲  요즘 똥개도 물고 댕긴다는 스마트폰 연등
스마트폰 화면을 연등축제에 걸맞게 목어로 채웠다.

▲  우정총국 북쪽에 조촐하게 연등터널을 세웠다.

▲  부엉이 연등

▲  반야용선(般若龍船)
관음보살 누님이 용머리 배의 선장이 되어 망자(亡者)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나중에 이승을 뜨게 된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꼭 타보고 싶은 배이다.

▲  귀여운 동자승이 탑돌이를 하는 연등과 신들린 모습으로
법고를 치고 있는 승려 연등

▲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연등

▲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칼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코끼리에 탄 보현동자 연등


♠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
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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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5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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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 서울 연등축제 야경 즐기기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연등거리) '

서울연등회 연등

▲  서울 연등축제에서 활약한 연등의 위엄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서울연등회 저녁 연등놀이 (조계사, 우정국로)

▲  연등놀이 행렬의 선봉인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
사천왕들이 중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국동4거리를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간다.
인사동에 잠입한 나쁜 기운들이 그날따라 똥줄 좀 제대로 탔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5월(4월 말 포함)에는 많은 축제와 볼거리가 천하 곳곳에서
열린다. 그중 단연 갑(甲)은 내 기준이긴 하지만 서울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연등회(연등축제)는 서울 및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단단히 자리
를 굳혔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금/토/일에 열리는데, 주말 전날인 금요일부터 조계사(曹溪
寺)와 강남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교4거리 구간)에서 연등 전시회가 그 서막
으로 열리며. 초파일 당일까지 오색영롱하게 불을 밝힌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이 되면 장충동 동국대(東國大) 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16시 30
분부터 18시까지 열리는데, 이 마당은 연등행렬을 위한 몸풀기 행사로 관불의식을 비롯해 흥겨
움을 유발하는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그 공연이 끝나면 19시부터 서울연등축제의 갑
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진행된다.
연등행렬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서
끝을 맺는데, 진행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며, 조계사를 비롯하여 서울과 전국 사찰, 불교단체
/학교에서 준비한 온갖 연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보이는 등은 무려 10만 개가 넘는다
고 하니 가
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여 전혀 식상하지가 않다. (연등행렬시간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터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함)
햇님이 지평선 너머의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행렬에 나온 연등은 어
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이 조계사에
모두 모이면 그 뒷풀이로 회향(廻向)한마당이 23시까지 펼쳐져 다시금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또한 그날 행군한 연등의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 종로1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
은행) 앞에 두어 자정까지 못다한 불을 밝힌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불
교와 관련된 갖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전통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곳곳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불교 음식과 떡, 음
료수 등을 사마시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茶道) 체험, 사찰/전통 음
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까지 두루 만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축제는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여 19시부터 다시 연등놀이를 연다.
이는 전날에 벌이는 연등행렬의 축소판으로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을 1바퀴 돌고 다시 조계사
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 진행되며, 조계사에 모이면 모두 함께 신명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가 21시에 모두 마무리를 짓는다.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
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연등축제가 열린다. 그
렇다면 이 연등회는 과연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련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
에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했던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말에 이미 절에서 연등을 밝혀 축제 비슷하게 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개최하여 만백성이 즐겼고, 연등을 며칠 동안 밝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에 본격적으로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
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를 연 것이 그 시초로 여겨지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 정권
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속 연등회
를 즐겼다. 저녁에는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등은 한
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을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연등을 만들어 종로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서막을 열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후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
(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제는 5월(4월 하순)만 되면 손
꼽아 기다리게 되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서울연등회 일정과 행사 내용, 연등은 매년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음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사천왕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전통문화마당의 후속편으로 진행되는 연등놀이는 19시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모두 신명나게 어울린 후 21시에 마무리를 짓는다. 이날 활약하는 연등은 전날
연등행렬에서 몸을 푼 연등으로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짧은 행군에 임한다.
햇님이 꽁무니를 뺀 시간이라 몸을 마음껏 불사르며 중생들의 환호 속에 도심을 누빈다.

연등놀이 시간이 저녁 때다 보니 시장기가 연등처럼 불타오른다. 자고로 부하들의 논공행상(論
功行賞)과 시장기는 미루지 말라는 명언이 있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두 뒷탈이 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연등놀이는 일단 관심에서 꺼두고 저녁을 먹고자 북촌(北村)으로 들어가 어느 기
와집 식당에서 떡국과 만두로 시장기를 잠재우고 슬며시 조계사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21시. 연등놀이 행렬은 마무리되고 거리를 달군 연등은 조계사와 우정국로 곳곳에
포진하여 중생들의 사진 모델로 다시금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우정국로를 장악한 긴 지느러미의 목어

▲  연등 빛깔에 황홀하게 물든 조계사의 야경

▲  극락을 향한 중생의 몸부림 ~ 반야용선(般若龍船) 연등
관음보살이 용머리 배에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극락으로 향한다.  

▲  노루, 소나무가 그려진 연등과 윤장대(輪藏臺) 연등

▲  두광(頭光)을 두룬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 연등

▲  푸른 피부의 범종 연등

▲  종로1가(종각역4거리)를 주름잡은 연등들 ▼


♠  서울연등축제의 마무리 ~ 청계천 연등거리 (전통등 전시회)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서울 도심의 어설픈 젖줄인 청계천(淸溪川)도 서울연등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참 연등빛으로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4~5월에는 서울연등회 전통등 전시회의 현장으로, 11월에는 서울등축
제의 현장이 되는 명실상부한 천하 등축제의 성지인데, 청계천 연등은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까
지로 조그만 연등이 청계천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고, 광통교(廣通橋)와 청계광장 사이에는 커
다란 등을 두둥실 띄워 연등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다.
특히 이 땅의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큰 등이 여럿 있으며, 그 옆에 관련 해설을 붙여
놓았다.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2가 방향)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광통교(사적 461호)와 석가탑(釋迦塔) 연등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오래된 다리는
광통교이다. 청계천이 한양도성 가운데를 가르
며 흐르다보니 그것을 경계로 자연히 북촌(北村
)과 남촌(南村)으로 나눠졌고 이를 왕래하고자
광통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많은 다리를 놓
았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수표교(水標橋)가
고작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청계천 다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광통교
'대(大)광통교','광교(廣橋)'라 불리기도 하
며, 다리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광통방에서 비
롯되었다. 원래는 광교4거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기존 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고 무교동(
무교동4거리~광교4거리 중간)에 재현되었으며,
다리 이름은 광교(광통교)지만 기존 광교4거리
와 햇갈릴 우려가 커 광통교로 거의 못박은 상
태이다.

이 다리는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만큼 기구한 사연도 적지않다. 연등축제 글에 맞지 않
게 광통교 보따리를 푸는 것이 좀 그렇겠만 기왕 이곳에 왔으니 간단하게 한번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太祖) 때 흙과 나무로 대충 지은 나무 다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홍수
때마다 거의 남아나지를 못하여 20년 가까이 도성(都城)의 우환거리로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돌다리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 우환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다리 석재(石材)는 어디
서 충당을 했을까? 그 석재는 정릉(貞陵)의 석물을 차출하여 충당했는데, 정릉은 비록 친어머니
는 아니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그렇다면 왜 의붓어미 능의 석물
을 불손하게도 석재로 썼을까? 이는 그들의 오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번째 아들이다. 한씨는
정종과 이방간(李芳幹) 등 6남 2녀로 두었는데, 좋을 날을 1년 앞둔 1391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의 후실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자연히 부인이 되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었다. 현비는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으로 거의 왕비(王妃)로 보면
되겠다.

신덕왕후는 곡산(谷山)강씨 집안으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은 많은 무공(武功)을 세워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李成桂)를 높이 평가하며 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딸을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일종의 정략 혼인인 셈이다. 이렇게 이성계
는 무려 21세 연하를 2째 부인으로 두며 개경(開京)에 머물 든든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강씨 집안은 토지도 넓고 재정도 풍족해 이성계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강씨는 이성계를 잘 내
조하며 한씨 소생의 자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조선 개국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후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총애를 믿
으며, 권력에 대한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앉
히고자 정도전(鄭道傳)고 남은(南誾) 등, 왕의 최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1396년 8월 이방원이 소란을 일으키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의 나이 40세였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강씨가 죽자,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를 한참 반석 위에 올리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
하고 강씨 소생의 이방석. 이방번 형제를 때려 죽인다. 이에 충격을 먹은 태조는 왕위를 내버리
고 함흥(咸興)으로 내려갔으며, 이방원은 2째 형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정종(靖宗)이다.

이어 1400년, 이방간이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아우인 이방원을
공격하나 오히려 손쉽게 진압된다. 애시당초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종은 이때다 싶어 그에
게 서둘러 왕위를 넘기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이다.

드디어 꿈꾸던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를 풀고자 그를 후궁으로 격
하시켰고, 강씨를 왕후로 인정하는 기록을 모두 없애거나 왜곡했다. 그리고 도성 안 정동(貞洞)
에 버젓히 자리한 강씨의 정릉을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키고 그것으로도 모
잘라 봉분(封墳)을 훼손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뒤엎으며 애궂은 석물을 생매장시켰다.
그러다가 상국(上國)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자 태종
은 정릉에 쓰인 나무와 석재를 동원하여 태평관 보수에 사용했다. 그리고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말썽이 많던 광교를 돌다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12지신상을 비롯한 정릉의 석물을 모조리 끌
어다가 광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그 이후 정릉의 존재를 영구히 은폐시킬 생각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
으며, 관료와 사대부들도 태종의 눈치로 스스로 강씨의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심지어는 족보에서
도 그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태종의 바램대로 강씨와 정릉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
혀져 간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시절, 선조가 수레를 타고 행차하던 중,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
)이 수레 앞에 엎드려 자신은 그의 후손이라며 군역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변
계량(卞季良)이 쓴 문서를 참조하여 능을 다시 찾았으며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
로 드디어 제대로 된 능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광통교는 이방원의 의붓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감정의 정도를 가늠
케 한다. 정릉을 때려 부시고 그 석재로 광통교와 태평관을 손질하면서 태종은 희열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반면 신덕왕후는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 역사의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몸소리치게 해주는 현장으로 강씨를 파멸시킨 승리자 태종은 후실(첩)의 소
생이 설치지 못하도록 적서(嫡庶)차별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정릉의 희생으로 돌다리로 거듭난 광통교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을 잇는 통로였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市廛)이 늘어서 있었고, 숭례문을 통
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제왕의 어가 행렬도 반드시 이곳을 건넜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도 이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제자리를 떠난 수표교와 더불어
매년 정월 보름에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의 축제가 펼쳐
졌고,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열려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영조
(英祖) 시절에 청계천을 크게 정비하면서 노원구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광통교를 크게 손보
았으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심의 골치꺼리인 청계천을 생매장시키면서 수표교를 장충단공
원으로 강제로 옮겼다. 허나 광통교는 옮기지 않고 그냥 생매장을 시킨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래서 40년 가까이 청계천 수레길 밑에 깔려 어둠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3년 청계천을 밖으로 끄
집어내면서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것이다.
긴 세월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가온 광통교는 창덕궁과 탑골
공원 등지에 흩어진 다리의 석재를 찾아내어 복원에 활용했으며, 부족한 부분은 새로 돌을 맞추
어 끼워놓았다. 허나 기존 자리는 이미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기존
광교4거리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을 했다.

다리의 모습은 수표교와 많이 비슷하며, 조선 초기 돌다리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인정
되어 2005년 수표교와 오간수교(五間水橋) 등 다른 돌다리 흔적과 더불어
사적 461호로 지정되
었다.
다리 기둥에는 계사년(癸巳年)에 다리를 보수했다는 글씨가 여럿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계사년
은 1413년이다. 그리고 능의 석물로 만든 탓에 다리 북쪽과 남쪽 밑에는 구름무늬가 많은데, 그
사이로 신장상(神將像)이 합장을 선보이며 단아하게 서 있고, 반면 거꾸로 박힌 인물상도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 인물의 정체는 불상이라고 한다. 왜 거꾸로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2003년 다리 복원을 대충해서 그리 되었다는 말부터 태종 시절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  신라 문무왕 시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을 격퇴했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 이야기 연등

▲  황룡사9층목탑과 원효대사 연등

▲  청게천 팔석담(八石潭)을 물들인 연등

청계천 연등거리를 유유자적하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넘었다. 이제 1시간만 지나면 그날은 재
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성황리에 열린 서울연등축제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조계사와 봉은
사, 청계천 연등은 초파일 당일까지 불을 밝히면서 연등축제의 대미(大尾)를 잡는다. 특히 청계
천 연등(전통등 전시회)은 달 밑에서 종일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정까지만 불을 밝히며, 연
등의 위엄에 눌려 뒤로 밀려난 달은 그 이후부터 제대로 어깨를 피며 천하를 비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연등축제 저녁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서울연등회 연등축제장 (조계사 주변, 청계천)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도보 5분
② 청계천 연등 거리(광통교)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도보 2~3분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2번 출구)에서 도보 3~4분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도보 4~5분
* 서울연등축제 홈페이지는 바로 아랫 사진(합장인과 법륜 연등)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 청계천 연등 거리, 광통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 중구 무교동
* 조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합장인과 법륜(法輪) 연등 (그 오른쪽에 승려가 춤을 추는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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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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