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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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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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