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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 2018.02.12 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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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겨울 산책 '

▲  길상사 관음보살상


 

묵은 해가 천하만물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저물고 따끈따끈한 새해의 햇살이 천하를 막 보
듬던 1월의 첫 주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년에 4~5회 이상 찾을 정도로 지겹게 발걸음을 한 곳이다. 허나 도심 속의 별천
지 같은 그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져 질리기는 커녕 자꾸만 손과 발이 간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있는 사찰 중,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몸이 길상사의 열성 신도나 법정스님의 팬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길상사를 그렇게도 많이 찾았건만 모두 봄과 여름, 늦가을에 갔을 뿐,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설경(雪景)을 보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그저 다짐으로만 끝난 채 벌
써 여러 해의 겨울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갈리는 시점에 큰 눈
이 내렸는데 이때다 싶어 새해 첫 주말 나들이 메뉴로 그곳을 택했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2차선 골목인 선잠로를 따라 12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면 됨~) 그 짧은 구
간은 권력층과 졸부들의 번쩍번쩍한 금입택(金入宅)이 덥수룩하게 펼쳐진 현장으로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나날이 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거의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
(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지나가는 선량한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고
급빌라와 저택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다.

비록 나같은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
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구중궁궐의 저택이라 하여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
고 당당히 가슴을 펴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
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에 우리나라의 0.1%
서식한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 따위들이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
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김영한)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녹아든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극락전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로 가득한 성
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의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를
흐르고 있어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거니와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다른 절에서는 접하기 힘
든 이채로운 볼거리도 여럿 있어 두 눈에 적지않게 흥분감을 던진다.

길상사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法燈)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
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시절 권력실세와 졸부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
지하고 찾을 수 있는 절로 변신한 전대미문의 현장이자 무소유(無所有)의 저자로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고급요정을 흔쾌히 기증했던
김영한(길상화)의 인생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법정은 201031113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날 순천 송광
(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위치는
변경 가능)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
  의 영화와 같은 탄생과정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날
렸던 대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세들과 졸부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이가 바로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1916년 부유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허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났고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여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신랑은 몸이 매우 허
약했고,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곁에 있던 남편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과부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물 부근에서 놀다가 빠진 듯함)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이성 잃은 구박이 나날이 드쎄지자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집을
나왔으나 정작 정처(定處)는 없었다. 하여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
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때 나이 16)

그는 가무와 궁중무, 시문 등 기생의 기본 소양을 익혔는데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문학, 예술
적 소질까지 넘쳐나 금세 서울 권번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삼천리 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대단했음)
흥사단(興士團)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1933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나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그가 있다는 함경도 함흥(咸興) 감옥을 찾았다. 허나 만나
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는데 거기서 영어 교사로
있던 백석(白石, 1912~1996)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둘은 급 가까워진다.

김영한에게 퐁당퐁당 빠진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 부르며 그녀의 하숙에서 함께 지냈다.
거기서 거의 출퇴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자 교사직까지 내
던지고 그를 따라 상경, 조선일보에 취직했다. 그리고 청진동(종로1)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
과 함흥을 오가며 3년 동안 동거에 들어갔다.
허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의 혼인을 쌍수들고
반대했고 극기야 다른 여자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른다. 허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에
도망쳐 김영한을 찾았고, 이후에도 그런 행위는 계속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과 부모 사이에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갈등하다가 아예 만주로 도망치자고 김영
한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이곳에 있자고 하였고 서로가 조금
씩 갈등의 골을 보이다가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비운
에 빠트렸다며 늘 후회했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서 활동했음)
혼자가 된 김영한은 그 외로움을 돈벌이로 풀었다. 돈에 대한 강인한 집녑을 보이며 적지 않
은 재산을 긁어모았고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그녀의 나이 불과 35세에 거금 650만 원
을 들여 현 길상사 자리를 매입해 대원각의 전신이 되는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내었다.
그는 계곡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났던 그곳에 좋은 예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 명당 기운에도 적지 않게 욕심을 냈을 것이다.
또한 사업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몇 편의 수필과 '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쓰기도 했다.

잠시 식당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대원각의 명성에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
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함)
대원각 단골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잘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
도 였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
을 드날렸다.

허나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하
고 악착같이 살았지만 나이를 강제로 먹으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닫던 중, 법정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미대륙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렀
1987년 그곳으로 설법을 하러 온 법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법문에 다시 감동의 파도를 느낀 그는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증하기
로 했다. 당시 대원각은 면적 7,000여 평, 건물만 40여 동에 이르렀으며 시가는 무려 1,000
을 헤아렸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바로 받
으면 그것 또한 모양새가 좋지 않음) 허나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법정은 1995년 그곳을 받아 일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갑자기 큰 보물단지를 얻게 되어 싱글벙글이 된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갈아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이자 법정이 김영한에게 지어
준 법명인 길상화(吉祥花, 吉祥華)를 따서 길상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그해 1214일 개원
법회를 열어 길상사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개원법회에는 천주교의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몰렸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 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
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염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
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인생의 끝 무렵을 보내던 그는 1999111483세의 나이로 외로
운 삶을 놓게되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중생의 통곡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었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
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 태반의 졸부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대원각을 기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래봐야 그 사람(
백석)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
며 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
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감동의 싹과 눈물을 선사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이 점거하여 진흙탕이 되버린 성북동
부촌(성북로 북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겨났다.

▲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던
길상헌

▲  조촐한 모습의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정 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30동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라서 딱히 문화유산은 없
으나 20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절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 법회 때는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
들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
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은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못지 않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들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벌이는 1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여하거나 3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면 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원 출입시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침묵의집 -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
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시간은 10~17시이며, 일요
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짧게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1달에 2(매월 3/4째주 토~일요일
12일 일정) 정도 열린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 차담, 자유포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려 5만원으로 이곳
템플스테이에 1회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3만원으로 깎아준다. (여름선수련회와 3~4시간 일정
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 길상사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길상사 하차, 또는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앞에 템플스테이의 링크된 부분이나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을 들어설 때면 다들 정면에 보이는 풍경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있어 천정을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 문을 들어서는 중생의 99.9%는 그냥 앞만 보고 갈 것이다. 그게 사람의 본능
이니까. 허나 여기서 잠시 목운동을 해보자. 고개를 90도 올려다보면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이 두 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
지를 가진 새 2마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새의 모습을 보니 거의 봉황(鳳凰)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
이다보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보여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가 아닐까도 싶다. 그림이 꽤 수작(秀作)으로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어서 지나가는 중
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길상사를 30번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2012년 봄이었으니 진정한 숨바꼭질의 종결자가 아닐 수 없다.

   ◀  이국적으로 생긴 길상사 관음보살상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상사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
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
이건 무슨 스타일의 관음보살인가?'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아
소탈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머
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며,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
왔다.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 그 자체
라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
취했고, 왼손에는 관음보살의 필수 아이템인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
런 조각이 없다.

이 이국적인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
로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428일에 봉안
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긴 하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겨울 제국의 핍박에 물까지 끊긴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
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봄과 여름, 가을에는 늘 물로 가득했다.
나 지금은 겨울 제국 시절이라 물이 끊겨 연꽃무늬의 석조(石槽) 안에는 물 대신 눈이 가득하
. 그러다보니 바가지들도 딱히 소임거리가 없어 찬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들 있다.


▲  설법전 앞뜨락 (범종각과 샘터, 관음보살상)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의 모습이 꽤 이채롭다. 그는
예전에는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허나 겨울 제국
에게 모든 걸 빼앗겨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신세로 몰래 봄을 잉태하여 쏟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
m, 둘레는 2.5m이다.


▲  느티나무 그늘 쉼터에서 만난 법정스님 어록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무지 넓은 설법전 내부

▲  해맑은 표정의 금동석가불좌상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
)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825,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아로새겨진 기단부와
기단과 탑신의 경계를 이루는 석사자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
등이 바라보인다.


 

♠  길상사 극락전과 지장전 주변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
이나 안방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법정의 영정 (영정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극락전 뜨락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대원각 초창기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황토색과 하얀색(눈),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극락전 뜨락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 3.2m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덩치를 갖추었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
10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5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내부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있으며, 붉은 색
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종일 잔잔히 울러펴지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
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무덤 석실(石室)처럼 모
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
.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삼존불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
보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눈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지장전 뜨락과 연못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깊은 숲속의 절을 보는 듯 하다.

▲ 계곡 건너에 자리한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다리와 길상헌 뒤쪽 담장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하며 조그만 폭포도 2
정도 있는데, 눈과 얼음에 갇혀 나래를 펼치
지 못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거추장스
러운 얼음을 박차고 졸졸졸 깨어나겠지.


 

♠  길상사 마무리 (진영각, 침묵의집)

▲  경내 서북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나무그늘 쉼터
경내 서북쪽 언덕에 2012년에 새롭게 터를 다진 낭만적인 이름의 나무그늘이 있다.
이곳은 좌선을 위한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나무 그늘로 가득해
여름 제국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단 겨울 제국이 손을 대는 경우,
이곳 사용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됨)


▲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37(음력 126)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
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진영각 중앙에 자리한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3월부터 1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린 것이다. 전 문화재청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는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
올 것 같다며 격찬을 했는데 진영의 글씨와 진영각 현판은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의 제자
, 승려 기현(奇玄)이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문서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  극락전 뒤쪽 자비실
승려의 생활 및 참선 장소로 지붕이 유난히
크다. 절집보다는 거의 별장 같은 분위기로
길상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
부터 17(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목조
3존불감의 모조품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나누는 기쁨'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곱상
하게 생긴 작은 찻잔에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둥둥 띄워 제공하는데 (나는 매실차를 마
셨음) 차의 가격은 3,000~5,000원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좀 저렴하며 대신 리필이
안된다. (상황에 따라 되는 경우도 있음)
전통차 외에 커피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그런데로 착한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사
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길상화(김영한)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던 부
처와 관음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수행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면서 한겨울에 찾아간 길상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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