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2. 2020.04.17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3. 2019.12.01 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2
  4. 2018.06.01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5. 2016.01.17 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2
  6. 2013.07.09 정릉 봉국사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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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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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수원 봉녕사 '


 

차디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4월의 첫 무렵,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찾았다.

화서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인 서호(西湖)를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후식거리를 물색하다가 수원시내 동북부에 자리한 봉녕사로
길을 잡았다.


  콘크리트와 개발의 산물에 둘러싸인 봉녕사 표석 (봉녕사입구)


 

♠  봉녕사 입문

▲  봉녕사 일주문(一柱門)

녕사입구에서 봉녕사를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동남쪽 오르막 길을 5분 정도 가면 봉
녕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과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는 문으로 1994년에 지어졌는데 문에 쓰인 목재는 영
천 백흥암(百興庵) 승려인 육문이 희사(喜捨)했다. 육중한 맞배지붕을 받치고자 돌로 기둥을
삼았지만 지붕의 위엄을 감당하기가 버겨운지 바로 옆에 보조용 목조 기둥을 두어 4개의 기둥
으로 지붕을 사이좋게 받쳐들고 있다.


▲  일주문 옆에 자리한 봉녕사 사적비

문 정면에는 '광교산 봉녕사(光敎山 奉寧寺)'
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 기둥에는
'봉
녕사 승가대학(奉寧寺僧伽大學)','봉녕사금강
율원(奉寧寺金剛律院)'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
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알려준다.

문 옆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 있고, 그 너머로 요즘 한참 난개발이 진행
되고 있는 광교(光敎)신도시가 바라보인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소나무와 함께 한참 물이 오른 연분홍 진달래꽃이 중생들을
환영한다. 이 언덕은 봉녕사 비구니들이 직접 가꾼 것으로 그 언덕 너머에 바로 봉녕사가 자
리해 있는데, 경내로 다가설수록 언덕의 높이도 낮아져 절 건물의 머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
낸다.
보통 평지나 낮은 곳에 자리한 절들은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거의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
면 경내 외곽부터 법당까지 줄줄이 나타나는데 반해 여기는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음에도 지
형상의 이유로 경내를 바로 언덕 너머에 두고 빙 둘러가는 구조를 취했다. 오로지 지름길과
직선을 선호하는 요즘 세상과는 맞지 않게 말이다. 물론 일주문을 지나 쭉 들어가면 알아서
경내가 나오기는 하나 중간에 서쪽으로 90도로 휘어져 경내로 이어지니 이는 부질없는 인생,
너무 빠른 길만 찾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돌아가는 삶도 즐기면서 살라는 봉녕사의 주문이 담
긴 것은 아닐까 싶다.


▲  길이 서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부분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 쓰인 2개의 돌기둥이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돌기둥을 지나면 나오는 오르막길
경사가 낮은 저 언덕길을 오르면 봉녕사 경내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  범종루 주변 (정면에 3층석탑과 '佛' 바위글씨가 있음)

조금 구부러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주차장이 있는 경내 외곽에 이른다. 바로 정면에는 범
종각과 우화궁, 불(佛)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등이 보이고, 왼쪽(남쪽)에는 늘씬한 숲길과
승려들의 보금자리인 육화료(六和寮), 그리고 오른쪽(북쪽)에는 불서각을 비롯해 경내 중심이
질서를 잡으며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법당인 대적광전까지 길(130m 정도 됨)이 곧
게 닦여져 있어 장쾌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게다가 길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문도 없으니
대적광전까지 속시원히 두 눈에 들어와 그런 기분을 더욱 돋구어 주며, 그 길을 척추로 하여
좌우에 향하당과 청운당, 소요삼장 등의 건물과 온갖 석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자리
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비추는 불서각(쉼터)에는 불교 용품과 서적, 공양미 등을 판매하
고 있는데, 옆 쉼터에는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 그리고 의자가 넉넉히 배치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봉녕사 범종루(梵鍾樓)
2002년에 조성된 범종(梵鍾)을 비롯해 법고
(法故),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의 4물
(四物)이 담겨져 있다.

▲  '佛' 바위글씨의 위엄
크고 단단하게 생긴 바위에 부처를 뜻하는
'佛' 1글자가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수원 우만동 뒷산에 자리한 봉녕사는 비구니 수행/교육도량으로 수원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광교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광교산 봉녕사'를 칭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광교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가 한참이나 떨
어진 금강산(金剛山)을 가져와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는 것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봉
녕사와 광교산 사이에 도로와 주거지, 경기대가 자리하여 서로를 떨어트려서 그렇지 이곳도
엄연한 광교산(582m)의 일부이다. 정확히 말하면 광교산의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해당된다.

봉녕사는 1208년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여 창성사(彰聖寺) 또는 성창사(聖彰寺)라 했다
고 전한다. 원각이 과연 세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경내에 고려 중기 석불이 있고, 800
년 정도 묵은 향나무가 있어 13세기에 창건되었음을 그런데로 받쳐주고 있다.
조선 초에는 봉덕사(奉德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1469년 혜각국사(慧覺國師)가 중수하여 봉녕
사로 이름을 갈았다. 혜각국사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世祖)
가 예우했던 신미
(信眉)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한자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로 해석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승려이다.

이후 1878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중반부터 조금씩 중창을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  돌다리와 계단 너머로 보이는 대적광전

1878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칠성탱, 현왕탱을 조성했고, 1891년에 신중탱을 조성했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하다가 1971년 묘전(妙典)이 주지가 되면서 우리나라 현대 비구니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묘엄(妙嚴)과 의기투합해 요사와 법당을 신축하고 선원을 개원했으며, 1974
년에 대웅전을 신축하고, 석가불을 봉안했다. 그리고 1975년에는 묘엄이 승가학원을 설립하면
봉녕사는 이때부터 비구니 수행/교육 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83년 육화당(육화료) 3층 건물을 지어 승가학원을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개칭하여 묘엄이
초대 승가대학장이 되었으며, 1989년과 1992년에 도서관(소요삼장)을 세우면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모두 지닌 비구니 수련도량으로 내실을 키웠다.

1994년에는 영천 백흥암의 육문이 희사한 나무로 일주문을 세웠고, 1998년 약사보전을 중건했
으며, 야외에서 고통받던 석조3존불을 위해 용화각을 그에게 씌우는 한편, 1998년에는 법당을
중건해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묘엄이 천하 최초로 비구니 율원(律
院)인 금강율원(金剛律院, 금강율원승가대학원)을 개원하여 수행도량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
높였다.
지금의 봉녕사와 승가대학, 그리고 비구니 최초의 율원을 만든 저력을 과시한 묘엄은 2011년
12월 3일 봉녕사에서 80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그는 큰 승려로 찬양받는 성철의 유일한 비
구니 제자로도 유명하다.

제법 너른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용화각, 약사보전,
향하당, 청운
당, 소요삼장 등 10여 동의 온갖 건물이 자리해 있는데, 용화각과 약사보전, 불서각 등을 제
외하면 허벌나게 크다. 그리고 대적광전과 용화각, 약사보전은 동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경내가 완전 북향도 남향도 아닌 동남향(東南向)이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석조3존불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신중
탱, 현왕탱 등 지방문화재 2점이 있으며, 대적광전 뜨락에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그 외에는 딱히 오래된 유물은 없으며, 건물도
1971년 이후에 죄다 으리으리하게 갈았기 때문에 고색의 향기도 싹 말라버렸다.

봉녕사는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깔끔하고 정갈하다. 어여쁜 꽃과 식물들이 구석구석 심
어져 자연과 여인의 향기를 그윽하게 베풀고 있고, 조금의 먼지도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피
부와 눈 색깔이 다른 외국인 비구니도 많은데, 서구에서 온 이들이 많다. 또한 다른 정통수행
도량과 달리 속세에도 개방적이라 나들이객과 속인들에게도 친절한 편이며, 템플스테이와 산
사음악회, 사찰음식대향연(매년 10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축제를 열어 속세와의 거리를 좁히
고자 애쓰고 있다.

* 봉녕사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창룡대로 236-54 ☎ 031-256-4127)

* 봉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 돌조각
연꽃이 그대로 돌로 굳은 것 같다. 저기에 색채만 입히면 정말 연꽃이
따로 없을듯~


 

♠  봉녕사 둘러보기

▲  3층석탑과 석불 (어디서 많이 본 모습들인데..?)

불서각(쉼터)에서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직선 길에 임하면 독특한 모습의 3층석탑과 석불을
만나게 된다. 다들 근래에 심어진 것들이라 하얀 피부가 봄햇살에 비쳐 더욱 빛을 발하고 있
는데, 그들의 모습이 왠지 옛친구처럼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것일까? 아 기억이 난다. 바로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복사(神福寺)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불과 석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과 석가탑,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3층석탑 등을 모방한 것은
많이 봤지만 인지도도 별로 없는 신복사터 탑과 석불을 모방한 것은 처음 본다. 마치 그들에
게 낀 오랜 세월의 때를 빡빡 밀어내고 윤을 낸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사람이 강릉이 고향이
거나 강릉이 고향인 고참 승려의 부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  다보탑(多寶塔)

신복사지 석탑/석불 맞은편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축소/재현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곳
다보탑보다 작아서 그렇지 영락없이 닮은 꼴로 신라 때 불국사처럼 수행도량의 대표 성지(聖
地)로 성장하고 싶은 봉녕사의 염원을 다보탑의 축소판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듯 싶다.


▲  봉녕사에서 만난 백송(白松)

신복사지 탑과 다보탑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적광전 계단 밑에 뿌리를 내린 하얀 피부의 소
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천하의 희귀종으로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백송이다.
백송은 원래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그곳을 오가는 조선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이 여럿 남아있
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서쪽 통의동(通義洞)에 있는 백송으로 천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백송이었으나 1990년 9월 폭우로 장렬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아직 남아있
음) 그래서 헌법재판소 안에 자리한 재동(齋洞) 백송이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타이틀을 쥐
게 되었다.
그 외에 조계사(曹溪寺) 백송과 이천(利川) 백송, 예산 추사고택 백송이 있는데, 이들이 오래
된 백송의 전부이며, (원효로 백송, 내자동 백송, 회현동 백송, 보은 백송, 밀양 백송은 사망
) 그들의 후예가 창경궁(昌慶宮)과 재동 백송 주변, 그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 백송의 부흥
을 꿈꾼다.
봉녕사에 백송이 들어온 것은 1999년 4월 기증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조계사와 더불어 백송을
간직한 이 땅에 흔치 않은 절이 된 것이다.

  대적광전 계단 밑에 자리한 샘터
자연이 베푼 샘물이 4개의 동그란 석조와
3개의 대나무통을 거쳐 내려온다.

▲  청운당(淸雲堂)

▲  향하당(香霞堂)

대적광전 1단계 밑 좌우에는 비슷하게 생긴 청운당과 향하당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정면 7칸
, 측면 4칸의 2층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청운당은 1999년에 지어졌는데, 콘크리트로 구성된
1층은 큰방과 율원 지대방이 있고, 나무로 된 2층은 금강율원, 율주(律主) 승려방, 강사 승려
방이 있다.
그리고 청운당과 마주보고 있는 향하당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다각실이, 2층에는 선방(禪房)과 주지실, 객실 등이 있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적광전은 봉녕사의 법당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운당, 향하당과 달리 1층이라 그렇지 우람한 수준은 그들에 못지 않다.
원래 이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조그만 대웅전(大雄殿)이 있었으나 1997년 1월에 부셔버리고 지
금의 건물을 지어 1998년 7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때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불단(佛
壇)에는 1998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과 노사나불, 석가여래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비롯
해 후불탱인 삼신불탱과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는 팔십화엄변상도(八十
華嚴變相圖)가 장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오래된 돌덩어리
돌의 뿌연 피부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묵은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돌덩어리 위에는 원래
있어야 될 존재 대신 꽃이 조촐하게 둥지를 틀었다.

▲  봉녕사 향나무 - 수원시 보호수 22호

적광전 뜨락 좌측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나이가 무려 800년
을 헤아린다고 한다. 800년이면 창건시기인 1208년과도 거의 맞아떨어져 봉녕사의 13세기 창
건설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절의 오랜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8m, 둘레 2.7m 덩치로 자라났으며, 2007년에 수원시 보호수
로 지정되었다.

▲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팔십화엄변상도의 위엄

▲  대적광전 앞 (대적광전에서 주차장까지
곧게 뻗은 길)


▲  봉녕사 용화각(龍華閣)

적광전 좌측에는 용화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인 석조3존불의 거처이다.
용화각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거처로 보통 용화전(龍華殿)을 칭하기 마련이
다. 허나 봉녕사는 미륵보살에는 썩 의미를 두지 않는지 전(殿)보다 1단계 낮은 용화각을 칭
하고 있다. 

이곳에 깃든 석조3존불은 고려 중기 석불로 1995년에 대적광전 뒤쪽을 손질하며 터를 닦다가
발견되었다. 하여 봉녕사 초창기 시절의 석불이 분명하며, 향나무와 함께 13세기 창건설을 입
증하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허나 그런 고마운 존재에게 번듯한 건물도 지어주지 않고 야외에
두는 우를 범하다가 1998년에 이르러 용화각을 씌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건물 이름을
용화(龍華)로 한 것을 보면 그들을 미륵불로 삼은 모양이다.

봉녕사 석조삼존불
▲  봉녕사 석조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1호
(문화재청 사진)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약사보전을 우선 살펴본 다음 용화각을 보려고 했다. 약사보전을 살피는
동안 시간이 18시가 되면서 비구니들이 이들 건물에 들어가 저녁 예불을 벌였는데, 약사보전
은 예불 전에 싹 사진에 담았으나 용화각은 예불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예불을 방
해하면서까지 내 욕심을 채우기는 싫었기에 예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6시 30분이 넘어
도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이제 곧 땅꺼미의 세상이 될 터인데, 배도 고프고 더 기다리기
도 어정쩡하여 문틈으로 소심하게 석조3존불을 보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나를 구경하지 못한 석조3존불은 대적광전 뒤쪽 야산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불상(본존불)
은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있고, 좌우 석불은 서 있다. 본존불은 왼쪽 어깨에 법의(法衣)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머리와 목이 지나치게 커 신체비례가
떨어진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씻겨 내려가 눈과 코. 입은 거의 닳았으며, 희
미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다. 수인(手印)은 손가락을 곧게 펴 왼손은 경례를 하
듯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위에 두었다.
좌우 석불도 본존불처럼 비슷한 스타일로 법의를 걸쳤으며 모두 머리 부분이 깎여져 있다. 이
들 모두 귀는 짧고 목이 매우 두꺼운데, 앉고 서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비슷해 같
은 사람이 조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또는 후기)로 여겨지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하는 증거물
이자 수원 토박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봉녕사는 초창기와 조선 중/후기 부분
에 많은 공백이 있는데, 불상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발견된 것을 보면 봉녕사도 우울한 시절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  봉녕사 마무리

▲  약사보전(藥師寶殿)

대적광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약사보전이 있다. 1998년에 중건된
것으로 1979년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해 석가모니후불탱과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밖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은 '
석문의범(釋門儀範)','가
사이운(袈裟移運)'의 가영(歌詠)에서 옮겨온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약사보전 앞에 있는 봉황(鳳凰)의 위엄 (봉황 맞나?)
왼쪽 봉황은 가만히 서 있고, 오른쪽 봉황은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봉황이긴 해도 조금은 어설퍼보여 봉황 흉내를 낸 닭처럼 보인다.


▲  약사보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

▲  신중탱(神衆幀)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2호

약사보전 내부에 자리한 신중탱과 현왕탱은 '봉녕사 불화(佛畵)'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신중단(神衆壇)에 자리한 신중탱은 1891년에
현조(現照), 돈조(頓照)가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68cm, 세로 178cm의 크기이다.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신의 무리
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래 중앙에는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용왕(龍王), 금강상(金剛像) 등을 그렸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빼곡하게 그려져 조금은 정신
이 없어 보인다.


▲  현왕탱(賢王幀, 왼쪽 그림)과 아미타후불탱(오른쪽)

현왕탱은 1878년에 완선(完善)이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31cm, 세로 104cm 크기이다. 현왕
이란 저승의 제왕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의 다른 칭호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그에게 소환
되어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현왕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인물이 그려져 있
는데, 이 그림은 보통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건다.

약사
보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서양인 비구니가 들어와 불단과 불화 앞을 정리하고 향내
로 진동하는 건물 내부를 정화하고자 문을 활짝 열고 저녁예불을 준비한다. 사진을 찍으며 서
성이는 나를 그리 경계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이따가 예불을 할테니 같이 하자고 그런다.
그래서 자연히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는 멀리 동유럽 체코에서 왔다고 한다. 요즘 불교가 서구에서 적지않게 주목을 받고 있다보
니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승려의 길을 택하거나 불교를 익히고 있는데, 그도 불교에
심취해 꽃다운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출가를 했다. 자연히 우리나라 말도 꽤 능숙해 의사 소
통에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현왕탱과 신중탱을 찍고자 양해를 구하니 상관없다면서 마음껏
사진에 담으라고 그런다.
그렇게 시간은 18시가 되고 건물 안에 있던 아줌마 신도 1명과 저녁예불에 들어갔다. 나는 용
화각에 볼일이 있어 이따가 참석하겠다고 나왔는데, 용화각은 비구니 1명이 한참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다시 약사보전으로 들어와 체코 비구니가 주관하는 예불에 참
여했다. (대적광전은 2명이 예불을 주관했음)


▲  주차장 남쪽에 늘씬하게 솟은 숲길

저녁예불에서 절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나와서 용화각을 노렸으나 여전히 예불 중이었다. 그
렇게 시간은 18시 반이 넘어가고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은 꽁무니를 숨기면서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게다가 저녁시간이라 배도 무지 고프고, 봉녕사에 발을 들인지 어언 1시간 반이
넘어 더 이상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봉녕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사찰음식대향연이 열리는 10월에 다시 인연을 지어 사진에 담지 못한 석조3존불을 사진에 담
고 사찰 음식으로 배를 실컷 채워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수원 봉녕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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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 (낙성대역에서 관음사까지)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음사국기봉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관음사국기봉

 


 

늦가을이 절정의 끝을 보이던 11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관악산(冠岳山)을 찾았다. 관
악산이라고 해서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戀主臺)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사당능선의 관음
사국기봉까지만 짧게 탔는데, 사당능선 북쪽에 숨겨진 봉천동 마애불 생각이 모락모락 피
어올라 오랜만의 그의 얼굴도 볼 겸, 간만에 관악산의 품을 찾았다. 봉천동마애불은 대학
교 재학 시절인 2004년에 2번 찾은 것이 끝이다.

오후 2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분식집에서 김밥과 만두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서울대로 들어가는 관악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인헌아파트까지 좀
편하게 가려고 했으나 밥을 먹는 사이에 그만 그 중요한 대중교통 환승할인시간이 초과되
고 말았다. 하여 편하게 갈 생각을 쿨하게 버리고 뚜벅뚜벅 걸었다. 어차피 걸으러 온 것
이니 1.6km를 더 걷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  관악산 입문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관악산 산길

인헌아파트는 낙성대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중간 산자락에 자리한 3동 규모의 조촐한 아파트
이다. 아파트의 이름인 인헌(仁憲)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姜邯贊)장군
의 시호로 이곳이 정녕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릴 정도로 산
속에 묻혀있어 마치 외딴 산골 아파트 같은 분위기이다.

아파트 가게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봉천동 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관악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산길도 예전과 달리 조금 정비가 되었고, 마
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도 산길 입구에 세워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길눈이 되어준다. 여기서
관악산 연주대까지는 대체로 1시간 40~50분 정도 걸리며, 마애불까지는 25~30분 정도이다.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주변과 관악구 지역)
이제 몇 걸음 시작한 상태라 보이는 범위는 매우 좁다. 첫술에 벌써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인헌동과 사당동, 강남 지역)

▲  울퉁불퉁 산길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은 상당수 느긋한 수준이다. 가끔 흥분한 산길도 튀어나와
숨을 헐떡이게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관악산의 푹신한 산줄기

▲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삼성산, 호암산 줄기)
하늘과 불과 100m 가까워졌을 뿐인데, 조망의 품질은 그만큼 높아졌다.

▲  봉천동 마애불 남쪽에 자리한 상봉약수터 쉼터

인헌아파트에서 25~30분 정도 오르면 250m 고지에 자리한 상봉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
수터 주변에는 온갖 운동 시설과 의자가 놓여져 있어 잠시 몸을 풀며 쉬어가기에 좋다 산속의
아늑한 쉼터로 인근 낙성대동과 인헌동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속세에 지친 심신을 달랜다.
약수터는 원래 봉천동 마애불을 품은 바위 남쪽에 있었으나 이번에 와보니 샘터가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수맥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듯 싶으며, 샘터 주변에 천막을 설치했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약수는 붉은 색의 부적합 판정 도장을 받은 상태.. 거기다가 늦가
을 가뭄으로 물도 말라버려 도저히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물이 풍부하게 나오고 수질만 보
장이 되었다면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100점짜리 안식처가 되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
러다가 이 약수터도 영영 목숨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물이 말라버린 상봉약수터

▲  상봉약수터에서 마애불로 가는 산길

상봉약수터까지 왔다면 봉천동 마애불은 다 온 것이다. 약수터 북쪽에는 큰 바위가 누워있는
데 그 서쪽 옆구리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있다. (찾기는 쉬움) 바위를 오른쪽에 바짝 두고
산길을 조금 더듬으면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문과 봉천동 마애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봉천동 마애불의 거처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磨崖彌勒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9호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으로 서울을 굽어보는 관악산, 그 북쪽 산자락에 관악산의 은자(隱者)
인 봉천동 마애미륵불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상봉약수터 북쪽에 있는 아주 큰 바위 서쪽 면
에 조용히 자리한 그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의 100년 이상 묵은 8개의 마애불(磨崖
佛) 가운데 유일하게 한강 이남에 있다.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으로 접근성이 영 좋지가 않고, 산길을 기본으로 30분 정도 타야 된
다. 다행히 산길은 느긋한 수준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외딴 곳에 있다보니 인지도도 밑바닥이
라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살짝 찾아오는 숨겨진 명소이다.

2004년에 2번 인연을 지은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새 나는 그만큼 나이가 누적되었으
나 마애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니 그의 정정함이 부러울 따름이
다. 그가 이토록 정정한 것은 자리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에는 추운 바람과 눈을, 여름
에는 비를 피하기가 좋으며, 서쪽에서 뜨는 햇님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기에 좋다.

이 마애불은 1630년에 박산회(朴山會)란 사람의 시주(施主)로 조성되었다. 아주 고맙게도 마
애불 옆구리에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 수가 있는데, 명
문에는 '彌勒尊佛 崇禎三年 庚午四月日 大施主 朴山會'라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마애불의 정
체가 미륵불이며, 1630년(숭정 3년) 경오년 4월 박산회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렇게 1630년이라는 절대 연대(年代)를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주며, 17세기 마애불을 대표하는 존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명문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한참이나 깎였을 것이다. 

대시주 박산회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앞에 관직이나 작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이나 양반으로 여겨지며, 멀리갈 것도 없이 관악산 밑 금천(衿川) 고을에 살던 사람
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관악산 외딴 산골에 마애불을 지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백성들의 산악신앙(山岳信
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은 아
무 바위에나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애불의 정체가 미륵불이라 미륵신앙(彌
勒信仰)이 그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당시 무능했던 인조(仁祖)와 서인(西人)패거리
의 잘못된 국정(國政)과 대외정책으로 나라가
아주 어지럽던 시절이라 이렇게 미륵불을 짓고
자신과 집안의 안녕을 빌며 의지했던 것이다.



   ◀
  미륵불 옆에 선명하게 새겨진 명문


▲  고독을 즐기는 봉천동 마애불

마애불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로 상투 모양의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아주 낮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길고 갸름한 편으로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
는 않는다. 당시 백성들의 원망이 담겨진 탓일까? 아니면 고독하고 적적한 삶에 지쳐서일까? 그런 얼굴에는 눈썹과 눈, 코, 입이 새겨져 있으며, 입술이 좀 두껍다. 그리고 두 귀는 어깨
까지 축 늘어져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다.
둥글게 깎인 어깨는 작은 편으로 가슴 위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데, 두 가슴이 크게 쳐진 모습
이다. 미륵불은 분명 남자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자인 것일까? 표정도 가만 보면 나이도
제법 깃든 비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어깨와 가슴 아래, 다리를 덮고
있으며, 얼굴 뒤에는 2겹으로 된 두광(頭光)이, 몸통 뒤에는 신광(身光)이 동그란 선을 보이
며 그를 비춘다. 불상 밑에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가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체 비율도 거의 맞아 떨어지고, 조각 수법도 제법 뛰어나 적지 않은 감동
을 선사한다.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허나 미륵불은 그런 시
시콜콜한 속세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이다. 56.7억년 이후에 온다는 자신이 중심이 되
는 미륵세계를 어떻게 구상할까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니 말이다.

미륵불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그의 신상이 적지 않게 염려가 된다. 불온한 자들이 마음만 먹
으면 무슨 짓을 벌이기에 좋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흉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전기를 가져와 CCTV를 달기도 어려울 것이고 참 난감하다. 그저 상봉약수터를 자주
찾는 사람과 마애불 단골 고객들, 그리고 달과 별이 지킴이가 되어 잘 지켜주기를 바랄 수 밖
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산4-9


▲  봉천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속세의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살며시 날라온다.


마애불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조촐한 공간이 있다. 돌바닥이 약간 경사가 있을 뿐, 절을 하
는 데는 그리 무리는 없으며, 성인 3명 정도 앉으면 자리가 거의 꽉 찬다. 그 앞에는 낮은 벼
랑과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에 발을 딛으면 서울대와 낙성대 등 관악구 지역이 훤히 바라보
여 조망도 제법 괜찮다.
봉천동 마애불과 오랜만에 상봉의 인사를 나누며 10분 정도 머물다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그를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스쳐
가는 수많은 존재의 하나일 뿐이며, 그도 나에게는 이번 나들이의 엄연한 중간 경유지일 뿐이
다.

상봉약수터에서 7~8분 정도 오르면 사당능선 능선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
로 1시간 정도 오르면 관악산 연주대, 북쪽 능선으로 가면 사당역으로 이어진다. 저만치 아른
거리는 연주대의 뒷통수를 보니 순간 '연주대까지 확 질러버릴까'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
지만, 시간도 어느덧 16시가 넘어 괜히 무리해서 좋을 것도 없다.


▲  능선3거리에서 바라본 천하 (관악구와 영등포구 지역)
능선3거리 북쪽에는 목재로 지어진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360m 고지라 앞서 봉천동
마애불보다 조망의 질감이 높다. 하늘과 100m나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  가까이에 보이는 선유천국기봉


 

 

♠  관악산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 헬리포트 (헬기 착륙장)

능선3거리에서 2분 정도 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능선길을 버리
고 북쪽 숲길로 가면 우리의 국기, 태극기가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이 모습을 비춘다.
이 봉우리는 해발 약 330m로 육중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악산과 삼성산(三聖山), 호암
산(虎巖山) 일대에 태극기가 심어진 13개의 국기봉이 있다. 국기봉이란 이름은 태극기가 있어
서 비롯된 것이다.
왜 관악산과 삼성산에 태극기를 지닌 국기봉이 이렇게 많은지 궁금할 따름인데, 이유가 어찌
됐든 평소 잊고 살던 태극기를 산에서 보니 하늘님이 내린 신성한 깃발 마냥 엄숙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태극기를 휘날리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는 이 좁은 땅에서만 휘날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국기가 분명하다. 이 땅을 넘어서 모
든 천하에 꽂힐 그날을 막연히 염원해본다. 미국 화이트하우스, 영국 버킹엄 궁전, 중원대륙
북경 자금성(紫禁城), 러시아 붉은광장에 그들의 꼬질꼬질한 토종 국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리
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 마음이 흐뭇해진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  바람 잘 날 없이 늘 분주하게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의 위엄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관악산
사진 중앙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의 뒷통수가 바라보인다.

▲  관악산 사당능선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센 서울이 눈 밑에 내려앉았네~~~
학의 등에 올라탄 듯, 조망이 제법 명품이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봉천동, 신림동)와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와 한강 너머로 남산,
마포구, 성동구,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사당능선과 사당동과 남현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줄기가 흔쾌히 바라보인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관악산 동부와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산줄기

▲  선유천국기봉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관악구와 동작구는 물론 한강 너머로 남산과 서울도심,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바위로 아기자기하게 이루어진 사당능선
경사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오가기는 편하다.

▲  거북바위
사당능선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며 자리한 탓에 선유천국기봉 못지 않게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용산구, 남산과 도심 지역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방배동 전원마을과 우면산(牛眠山, 293m)을 중심으로 서초구와 강남구,
우면지구(오른쪽), 대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거북바위 옆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 동부와 남태령,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  속세와 하늘을 이어주는 계단일까? 사당능선 철계단

유천과 관음사국기봉 구간은 바위와 벼랑이 즐비한 까칠한 구간이다. 하여 산꾼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철계단을 많이 깔았는데, 위에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보이고 밑
에서 보면 마치 하늘과 이어진 계단처럼 장대하게 보인다. 계단은 2명이 지날 정도의 폭으로
계단 밑은 구멍이 쏭쏭 뚫린 철판이라 계단 밑 땅바닥이 정말 아찔하게 보인다. 계단과 땅바
닥이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염통이 은근히 쫄깃해질 것
이다.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전망대

철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잠시나마 오르막길이 꿈틀거린
다. 그 바위를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관음사국기봉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관악산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최전방 봉우리로 서울시내에 아주 가깝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여 바로
밑으로 서울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조망이 제법 휼륭하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산 북쪽 자락과 서울대, 낙성대, 관악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의 힘찬 기운은 시내까지 파고들어가 관악구와 동작구의 경계를 그으며
까치산근린공원, 상도동 살피재를 지나 국립현충원과 노량진까지 이어진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서초구, 한강, 남산, 북악산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5)
사당동과 방배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  오늘도 바쁘게 펄럭이는 관음사국기봉 태극기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벼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철계단
을 밑으로 늘어뜨렸는데, 그 중간에 바위에 뿌리를 내린 태극기가 서울을 향해 부지런히 휘날
리고 있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태극기 밑으로 바위를 타고 오가는 지름길이 있으
나 다소 위험하므로 우회길을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2)
(사당동과 동작구, 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남산, 북한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초구와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시나마 가까워졌던 하늘을 등지며 관음사국기봉을 내려가면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을 되찾는
다. 단단하고 자잘한 돌이 많던 산길의 시대는 가고 조금은 촉감이 부드러운 흙길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도 흥분한 구간이 여럿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관음사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산이
란 자신을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까칠하게 굴기 때문이다.

산길을 직진하면 남현동(南峴洞) 흥화브라운빌아파트로 이어지는데, 관음사로 가려면 동쪽 산
길로 꺾어야 된다. 중간에 체육시설이 여럿 설치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관음사가 조그만 점처럼 모습을 비춘다. 그렇게 그를 향해 내려가면 절은 그만큼 정비
례로 커져 보이며, 절의 옆구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  관음사로 인도하는 산길
속세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완연한데, 산속은 벌써부터 겨울 제국(帝國)의
마수가 심술을 부린다. 벌거숭이가 된 나무가 도처에 보이고,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며, 화려한 윤회를 꿈꾼다.


 

 

♠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안긴 오래된 관음도량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의 '관음사 절경'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관음사는 절 이름 그대로 관세음보살을 내세운 관
음도량(觀音道場)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골 관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관음사는 89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활
약햤던 변계량(1369~1430)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 전해오고 있어 절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잠깐 소개되어 있고 1977년 극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
4월 21일 극락전을 개축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절 밑에 승방벌(승방뜰)이란 일종의 사
하촌(寺下村)이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컸음을 가늠케 한다.

1863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비
했으며, 1883년 봉은사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1924년 승려 석주(
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년 요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 1930년에 산신각을 짓고, 1932년에 용화전을 세웠
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했다.
허나 1950년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太古宗)간의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여 년 간 지루한 송
사에 휘말리게 된다. 승려들이 속세(俗世) 정화와 중생 구제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종교의 탈을 쓰며 보기 흉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동안 건물은 황폐화되고, 절은 거의 문 닫
기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대법원이 조계종의 손을 들어주면서 간신히 절의 목을 조르던 재산 다툼이 끝나자 1973년 진
산당 박종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임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허나 절의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市有地), 사유지가 뒤섞이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고, 거기다 개발제한구
역과 여러 가지 규제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중창의 길은 거의 쉽지가 않았다.
그런 시련을 간신히 극복하며 1977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다. 그리고 1992년 대웅전 밑에 지하 강당과 법당을 만들어 1
천불을 봉안하고, 1997년에는 명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지었다. 2001년에는 요사채를 신축하
고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脈)을 찾으면서 그들을 끌여와 석조를 마련했다.
2002년에는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관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 일주
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중창불사는 그런데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 불교방
송이 경내에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불교방송대탑)'을 조성하면서 절의 명성을 드높였다.

절의 규모는 거의 조촐한 수준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용왕각, 삼성각
, 요사 등 약 9~10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오랜 내력에 비해 고색의 내음은 맡기
가 힘들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파도가 관음사의 고색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다.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사당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충분히 닿는다. 사당역을 기
점으로 관악산을 오를 경우 반드시 지나쳐야 되는 곳이며, 시내와 지척이지만 숲속에 단단히
묻혀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그윽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승방1길 109-80 ☎ 02-582-8609)


▲  관음사 경내 (왼쪽이 불교방송대탑)
불교방송대탑은 1997년 불교방송국 기념대탑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거의 15m에 달한다.

▲  명부전(冥府殿)과 요사

경내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머금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
작지붕 건물로 1997년에 지어졌으며, 우측 옆구리에는 요사 1채를 익랑(翼廊)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건물 뒷쪽에는 대나무밭이 우거져 있는데, 중간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
다.


▲  명부전 불단 - 온후한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좌상과 저승의 식구들

▲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이 건물은 1929년에 태선이 칠성각으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삼성각으로 개축하여 관음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1988년에 조성된 칠성탱 앞에 1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관음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1호)이 있으나 그
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  용왕각(龍王閣)과 둥그런 석조(石槽)

성각 뒤쪽에 자리한 용왕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아주 단출한 맞배지붕 건물이
다. 이 집은 용왕(龍王)을 봉안하고 있는데, 바다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연관
성이 없어 보이는 용왕의 거처를 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바로 옆에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
고, 앞에는 관음사의 목을 축여주는 석조가 있으니 용왕을 배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물은 모두 용왕의 관리 대상이기 때문이다.
용왕각은 1930년에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으며, 내
부에는 1989년애 조성된 용왕탱과 비천상 1쌍이 자리를 메운다.

용왕각 앞에 자리한 석조는 관악산이 중생들에게 베푼 조촐한 선물이다. 이곳에서는 그를 수
각(水閣)이라 부르며 대우를 하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어여쁜 잎을 펼쳐 보인 연꽃이 새겨진
연화석조로 진짜 꽃을 보듯 아름답다. 석조 위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동자승이 두 손으로 거북
이를 들고 있는데, 거북이는 관악산의 옥계수를 졸졸졸 뿜어낸다. 이들 석조는 2001년에 지하
150m 지점에서 수맥을 발견하면서 닦은 것이다.


▲  관음사의 이름값을 하는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입상

삼성각과 대웅전 사이에는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연화대좌 위에 부드럽
게 서 있는 그는 2002년에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장만한 것으로 자태도 곱고, 조각 솜
씨도 걸작이라 1번 보고, 2번 보고, 자꾸만 보게 된다.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병(
政柄)을 들고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취했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세음보살입상 좌측에는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이 앉아있다. 이곳에는 원래 1942년에 지어진
극락전이 있었으나1977년에 밀어버리고 지금의 대웅전을 앉혔다. 그때 1716년에 극락전을 개
축했다는 상량문이 튀어나와 조선 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꾸렸음을 밝혀주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관음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불단에는 금
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3존불 뒤에 1990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건물 좌측 영
단(靈壇)에는 1974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범종이 자리해 있다.


▲  추억의 덤블링
관음사는 지하 강당에 어린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뜨락에 어린 시절 많이
봐왔던 정겨운 덤블링을 두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향수로 인도한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여장군 장승
지하대장군/여장군을 칭한 장승은 많이 보았지만 관음을 칭한 장승은 처음이다.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다보니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이름을 단 모양이다.


늦가을이 깃든 관음사에서는 약 20분 정도 머물렀다. 이곳은 예전에 여러 번 인연이 있고 구
미가 확 당길만한 유혹거리가 딱히 없다. 게다가 햇님도 퇴근 직전이라 서둘러 속세 귀환을
종용한다.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향하면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허나 내려가는 것이기 때
문에 눈과 얼음이 없는 이상은 별 무리는 없다. 길 옆에는 새하얀 석등이 주차장까지 이어지
는데, 석등의 모습이 왜열도 양식과 좀 비슷하여 모습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석등 중간에는
관음대장군과 여장군을 칭한 장승 1쌍이 뻐드렁니를 시원스레 드러내며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
을 환송한다.


▲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관음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이 문은 2007년에 새로 지어
진 것으로 높이가 상당하여 매우 장엄하게 다가온다. 허나 그 중요한 고색의 향기가 우러나오
질 않으니 나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절골이라 불리는 관음사계곡이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 가뭄 탓에
물이 넝실거리던 관음사 석조와 달리 계곡은 거의 타들어간 상태이다. 그런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남현동 주택가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  관악산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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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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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예산 금오산 향천사(香泉寺) '

▲  제각각의 모습을 지닌 천불전의 천불(千佛)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으면 온갖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올해는 잘될거야','돈
많이 벌겠지~!' 등의 바램 말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새해 첫 답사지로 어디를 갈까 궁
리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에 시선이 멈추어 그곳에 있는 향천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으나 급하게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느림의 미학(美學)이나 누릴 겸, 굼
벵이 1호선 전철을 타고 방학역에서 아산시 신창역까지 내려갔다. 거리는 자그마치 130km,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그것도 서울역에서 천안으로 가는 급행 전철(1일 3회, 평일만 운행)
의 노력 덕분이다.
그렇게 나의 근성을 오랜만에 테스트하며 수도권 전철의 최남단인 신창역에서 잠시 대기를
탔다가, 예산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분을 달려 예산읍내 동쪽 쌍송배기(쌍송
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쌍송배기는 아산이나 신례원, 삽교, 덕산 방면 예산군내버스의 종점이자 유구, 청양(靑陽)
방면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 향천사까지는 2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게다가 길도 잘
닦여져 있고 오르막도 거의 없어 산책 삼아 가볍게 거닐면 된다.


▲  향천사 가는 길
읍내를 벗어나도 일주문 직전까지 속인(俗人)들의 집은 계속 줄을 잇는다.


 

  향천사에 들어서다

▲  향천사 일주문(一柱門)

향천사입구인 예산초교에서 20분 정도 걸으니 일주문이 흔쾌히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의 정
문으로 대부분의 절이 필수로 갖추고 있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존재로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역할도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다듬고 절로 들어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일주문은 2003년 10월에 세워졌는데, 문을 받치는 2개의 기둥은 가운데가 좀 볼록하며, 기둥
위에는 양쪽으로 누런 꼬랑지의 용 2마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마치 견우와 직녀를 보는 듯
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평방(平枋) 앞에는 '금오산 향천사(金烏山 香泉寺)'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글씨가 좀 간결해보이면서도 필력이 넘쳐 보인다. 그리고 뒤쪽에도 현판이 있는데, '호
서가람천불선원(湖西伽藍千佛禪院)'이라 쓰여 있어 향천사의 성격을 쿨하게 알려준다.


▲  서로 마주보며 일주문을 수식하는 용 2마리

▲  기둥에 몸을 의지한 용과 그의 꼬랑지

▲  일주문의 뒷모습과 절의 성격을
담은 8글자 현판


▲  창건 유래비가 있는 계단길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 1분 정도 가면 넓다란 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향천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고, 오른쪽은 금오산 등산로, 정면에 보이는 계단길은 경내로 통
한다. 그러니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호젓하게 계단길로 가는 것이 좋다. 차량을 이용해 경내로
들어서거나 금오산 등산을 원할 경우는 오른쪽 길을 이용하면 된다.

돌계단 앞에는 절의 창건 유래를 머금은 창건 유래비와 붉은 글씨로 향천사라 쓰인 표석이 있으
며, 이들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던 향천사의 건물이 지붕부터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2번째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돌계단 ~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  2번째 돌계단 너머로 얼굴을 보이는 극락전

▲  잠시 물 1모금의 여유
둥그런 석조(石槽)에는 자연이 베푼 약수가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  1번 째 계단보다 조금은 각이 선 2번 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향천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향천사 경내 (극락전 주변)

※ 예산 향천사의 간략한 내력(來歷)
예산읍내 동북쪽 금오산(223m) 밑에 포근히 둥지를 튼 향천사는 예산 땅에서 수덕사(修德寺) 다
음가는 절로 655년(백제 의자왕 14년)에 백제의 고승 의각선사(義覺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의각이 세웠는지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 외에는 입증할 기록이 없어 그저 답답할 따름
이지만 경내에 있는 9층석탑이 7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 하므로 그것이 맞다면 대충 창
건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향천사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각선사는 백제 승려로 652년 백제의 별채인 왜열도로 건너가 백제
사(百濟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가 뜻한 것이 있어서 바로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3년 동안 오자산(五子山)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면서 석불 3,053개를 비롯하여 전단향(旃檀香
)나무로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16나한상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655년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따라서 귀국했는데, 귀국하면서 오자산에서 만든 석불을 바리바
리 싣고 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오산현(예산) 북포 해안에 이르렀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석불들을 계속 배에 방치했다. 이때 배 안에서 종소리가 나 해변에 진동했다
고 하여 부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각의 방황을 보다 못한 금까마귀 1쌍이 찾아와 지금의 절 자리를 알려주었다
고 한다. 그래서 의각은 그 자리에 향천사를 세워 석불을 봉안하고 까마귀에게 보은(報恩)을 하
는 차원에서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의각이 만들었다는 불상의 존재는 나오
지 않음)

그렇게 절이 창건된 이후, 승려 도장(島藏)이 잠시 절을 관리했다. 그러나 660년 가을, 백제가
허망하게 망하자. 백제의 속방(屬邦)인 왜국으로 건너갔다.
왜왕(倭王, 아마도 제명여왕이나 천지왕으로 생각됨)은 그에게 귀의(歸依)할 것을 부탁했고, 마
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 청을 받으니 왜왕이 기뻐서 동량지원수(棟梁之願袖)란 존호(尊號)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향천사와 송림사(松林寺)에 머물렀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년)
신라 왕실의 지원으로 동관음전과 서로전, 동선당, 향적전, 관음암 등 400여 칸의 건물과 암자
를 지었다고 하며, 그 이후 호서 제일의 명찰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840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840년 석
불 1,053개를 가지고 귀국하여 향천사에 천불전과 극락전을 지었다고 한다.

▲  천불선원 표석

▲  향천사 창건 유래비

1359년(공민왕 5년)에는 극락전에 아미타3존불을 봉안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것을
멸운(滅雲)이 1596년에 중건하여 100여 칸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는 승병 7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승려이다.

1702년에는 범종을 새로 만들었고, 1950년 6.25때 많은 건물이 파괴된 것을 보산(寶山)이 10년
동안 주석하면서 중건했다. 이후 1971년 극락전을, 1982년에는 서선당과 당월당을 새로 지었으
며,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고, 1986년 범종각을 짓고 부설(附設) 향천유치원을
만들었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나한전, 산신각 등 약 10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9층석탑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부도, 괘불도
와 오여래/사보살 팔금강도(국가 등록문화재 627호) 등이 있다. 그외에 1702년에 조성된 범종(
梵鍾,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71호)도 있으나 보호를 위헤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가있다. 또
한 천불전을 통해 천불선원(千佛禪院)을 강조하며 천불도량으로 절을 키우고 있다.

산사(山寺)이긴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읍내에서 무척이나 가깝고 일주문 부근
까지 속인들의 주택이 밀려와 산사의 질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허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는 여전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손색이 없으며, 서울 화계사(華溪寺)
처럼 서양인 승려들이 많이 머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이 괜찮다면 그를 품고 있는 금오산이나 관모산(391m)을 오르는 것도 괜찮다.
절에서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그들 정상에 이르며, 정상에서는 시내처럼 넓은 예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眺望)이 천하 명품급이다. 금오산은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로 향천사
주변 등산로에 의자와 체육시설,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다.

▲  향천사 부도군

▲  향천사 범종각

※ 향천사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열차나 전철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수도권 1호선 신창행 열차나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를 타고 신창역 하차
② 예산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3~4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 천안, 청주, 서산, 보령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 서대전이나 공주에서 예산행 직행버스를 이용할 경우 임성에서 내리면 된다. 임성에서 향천사
  까지 도보 25분. (임성 정차를 확인바람)
③ 현지 교통
* 예산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쌍송으로 들어가는 아무 군내버
  스나 타고 쌍송배기 하차 → 버스에서 내려 왼쪽(동쪽)으로 가면 쌍송3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아리랑로) 길로 가면 임성정류장을 지나서 향천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쌍송배기에서
  향천사까지 도보 30분 거리) 만약 예산초교를 경유하는 버스를 탔을 경우 예산초교 하차.
* 신창역에서 예산군내버스 420번(1일 8회 운행)을 타고 쌍송배기 하차
* 예산터미널 내부나 바깥 정류장에서 쌍송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쌍송배기 하차 (중간에 예산
  초교 경유하는 차도 있음) 또는 공주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임성 하차
④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예산수덕사나들목을 나와서 예산 방면 → 주교5거리에서 예산로로 진입
  → 쌍송3거리에서 좌회전 → 향천사 이정표에서 우회전 → 향천사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향천사로 117-20 ☎ 041-335-3556)

▲  향천사 천불전

▲  향천사 서래암(西來庵)


 

 

  향천사 극락전, 서선당 주변

▲  청기와가 입혀진 극락전(極樂殿)

향천사의 법당(法堂)인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1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원래는 그 우측 나한전 자리에 있었으며, 1983년 옛 극락전을 철거하면서 지금의 건물이
극락전이 되었다. 불단에는 단향목으로 만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1359년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또는 조선 초기나 중기라고 함)
아미타불은 양쪽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탱화를 비롯한
수많은 불화(佛畵)들이 내부를 곱게 수식한다. 이들 불화는 1993년에 제작된 것이다.
절의 중심 되는 건물이라 그런지 특별히 푸른 빛깔이 나는 청기와를 입혀 법당의 품격을 높였다.


▲  나한전(羅漢殿)과 9층석탑

극락전 우측에는 1983년에 옛 극락전을 부시고 만든 나한전이 자리해 있다. 나한전은 부처의 제
자인 16나한(羅漢)의 보금자리로 그 앞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9층석탑이 우중층하게
서 있다.

◀  위와 아래의 피부색 다른 향천사9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4호
향천사9층석탑은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3.75m이다. 이 탑은 이곳의 2번째 주지
를 지낸 도장(島藏)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하
며, 백제가 사라진 이후인 7세기 중/후반에 조
성된 백제 탑의 후예이다.
이렇게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지만 탑신(塔身
)과 기단(基壇) 부분의 피부 색깔이 너무나 틀
려 상당히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기단부는 그
래도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하여 까무잡잡하지
만 탑신은 그와는 상반되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기 때문이다.
탑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탑을 아작냈기 때문이다. 절에
는 원래 2기의 석탑(5층탑이라는 설이 있음)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모아서
하나의 탑으로 수습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
었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 9층석탑으로 보기도
어렵다.

새로 만든 2중의 네모난 바닥돌 위에 얹혀진 이 탑은 2중의 헌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9층탑을 얹힌 형태로 3층까지는 탑신이 잘 남아있으나 4층부터는 탑신이 없어지고, 여
기저기 깨진 지붕돌만 포개진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
을 두고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사각 받침돌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살짝 놓여있다.
비록 백제시대 탑은 아니지만(일부에서는 백제 탑이라고 함) 백제탑을 계승한 탑으로 온전하게
남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우물

▲  우물 좌측에 자리한 척화실(拓花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무척 낯설다.


▲  서선당(西禪堂)
극락전 뜨락 우측에 넓게 자리한 서선당은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寮舍)로 1982년에
새로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크다.


▲  서선당 옆에 놓인 나무 장작들

나무 장작들 참 오랜만에 본다. 옛날에는 정말 흔했지만 연탄과 가스, 석유에 밀려 이제는 찾아
보기 힘든 기억 속의 풍물시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방을 대펴주는 용도로 쓰
지는 않을 터이고, 아마도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쓰는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궁이에
서 지은 밥과 누룽지가 갑자기 간절해지는구나 ~~


▲  서선당 옆에 'ㄱ'모습의 요사 (북쪽에서 본 모습)
서선당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은 공양간을 갖춘 요사로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툇마루 앞뜨락에는 네모난 석조와 함께 세수를 하거나 설겆이나 빨래를 하는
공간이 있어 옛 한옥 생활을 느끼게 한다.


▲  서선당 옆 'ㄱ'모습의 요사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선당에 달린 조그만 종 (공양시간입니다. 땡땡땡~~)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소중한 종이다. 종이 기지개를 켜고 은은한 종소리를
베풀면 곳곳에 흩어진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공양(식사)시간을
갖는다. 먹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또 어디 있으랴~~


▲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흰 수염의 대머리인 산신을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산신의 사자(使者)인 호랑이는 용맹함보다는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으로 표현되어 거의 고양이 같다.


▲  잠시나마 하얀 지붕을 이룬 나한전(오른쪽)과 극락전(왼쪽)

▲  경내에서 천불전으로 넘어가는 다리


 

 

  향천사의 상징적인 공간, 천불전(천불선원)

▲  경내 서쪽에 따로 자리를 닦은 천불선원(千佛禪院)

경내에서 조그만 계곡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오르면 따로 담장을 두른 천불선원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천불도량(千佛道場)을 자처하는 향천사의 중심이자 성지와 같은 공간으로 천불전 주변에
부속 건물 2동을 만들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천불선원으로 삼았다. 예전에는 속인(俗人)들의 출
입을 통제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  활짝 열린 천불선원 문

천불선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문이 유일한데, 문의 높이가 좀 낮다. 키가 어느 정도 되는 사
람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높이를 낮게 한 것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 천불에 대한 예의를 표하게 하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천불전에
임하라는 의미이다.
문 양쪽에는 자연석을 차곡차곡 얹혀서 만든 기와 돌담이 정겨운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눈이 두텁게 입혀진 천불전 뜨락과 부속 건물들
천불전의 부속 건물들은 승려의 생활 및 수행 공간으로 좌측에 자리한 건물은
절의 여러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도 담당하고 한다.

▲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3호

천불선원의 중심인 천불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
물이다. 경내에서 극락전에 버금가는 건물로 현판에 쓰인 이름 그대로 1,000불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의각이 당나라 오자산에서 직접 만든 3,053기의 불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
지보살, 16나한을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하며, 840년에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1,053기의
불상을 가져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596년에 멸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옛날의 구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경내에서 9층석탑과 부도를 제외하고 고찰이라 내세울 만한 자취
가 사라진 것이다. 건물을 다시 지었음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 때문인 듯 하며, 천불의 조성시기는 전설과는 달리 조선 초기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 그대로 1,000기의 불상이 있어야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보다 1.5배 많은 1,515기의
불상이 불단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이는 이 땅에 널린 천불전의 불상 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로 그 흔한 이름 천불보다는 눈에 좀 띄게 천오백불(1,500불)이라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천불과 3천불은 많지만 1,500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들 천불은 미혼자의 혼인 대상자 인물을 점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우리나라 7천 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으로 개성들이 넘친다. 모두 하얀 불상으로 작은 불상은 대부분 석고상(
石膏像)이고, 큰 불상은 돌로 만들어졌다.


▲  천불전 천불 (천불상이라 쓰고 천오백불이라 부르면 됨)

문을 열고 적막이 깃든 천불전으로 들어서니 가운데 큰 불상을 비롯하여 1,500의 불상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정면으로 쏠리는 1,500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
울 정도이다. 마치 1,500의 관중 앞에 선 음악가나 연기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는 수줍게 향
로에 향을 피우고 3배를 올린 다음,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나의 깜짝 공연이 그들에게 썩 마음
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  똑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천불들

천불을 조성하던 당시 승려와 민중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것은 아닐까? 저 많은 불상을 만
드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얼굴 표정(즐거운 표정, 신나는 표정, 귀여운 표정, 우울한
표정,.)과 머리칼(나발과 소발), 덩치(큰 덩치, 작은 덩치, 키다리), 옷, 그리고 자리까지(연화
좌를 갖춘 불상도 여럿 있음) 모두 다르게 만들어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이는 투철한 장인
정신과 불심(佛心)이 빚은 정성 어린 작품들이라 하겠다.


▲  불단이란 관중석에 앉아 나의 공연을 구경하는 천불의 위엄

▲  흐릿한 눈빛의 불상
불상이 하도 많아서 슬쩍 하나 가져가도 모를 것 같다. 기분 같아서는 집에 하나
가져오고 싶은데, 내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해 마음 속으로만 그러고 말았다.

▲  천불선원 앞에서 바라본 향천사 경내
나무들이 시야를 좀 방해하긴 하지만 보는 데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천불선원 앞에 자라난 나이 350년의 느티나무
(예산군 보호수 8-13-1-252호)

너무 장대하게 오래 살아서 자신의 나이도 아마 모를 것이다. 추정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하며,
높이는 20m로 천불선원에 늘 그늘을 드리워준다. 장대한 세월을 먹고 자란 그의 허리 둘레는 약
3.1m이다.


 

♠ 향천사 마무리

▲  천불선원에서 부도, 서래암(西來庵)으로 가는 길

천불선원에서 서쪽으로 작은 계곡을 하나 더 건너면 금오산 등산로와 함께 'ㄱ'모양의 기와집이
눈에 진하게 들어올 것이다. 그 기와집은 서래암이란 건물로 별도의 암자가 아닌 향천사 소속의
불전이다. 그 서래암 옆에는 부도 4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들 가운데 고색이 좀 짙은 2
기를 주목하기 바란다.


▲  향천사 부도군(浮屠群)

▲  향천사 의각/멸운의 부도(가운데는 멸운의 탑비)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9호

부도 4기 가운데 왼쪽에 검은 때가 자욱한 부도는 절을 세웠다는 의각의 부도라고 전하여, 오른
쪽에 대추처럼 생긴 부도는 16세기에 활약했던 멸운의 부도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상당한 고색이 느껴지는 왼쪽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약간 동그란 탑신을 얹혔다. 그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꼭대기를 마
무리한 제법 수려한 모습이다.
기단부 아래 받침돌은 8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구슬을 이은 듯한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무늬를 새겼으며, 위에는 잎을 아래로 한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 받침돌은 8개 모서리에 기
둥을 새기고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지키는 이들을 조각해 부도의 건강을 기원했다. 윗쪽 받침
돌에는 잎을 위로 향한 연꽃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에 서까래를 표현했고, 윗쪽 면에는 모서리
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다움을 보탰다. 그리고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가
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에 근래에 새로 얹힌 새하얀 피부의 장식을 얹혀 놓아 아까 9층석탑처럼
약간의 어색한 조화를 선보인다.

절에서는 이 부도를 의각의 승탑(僧塔)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탑이 된다. 허나 해동(海東)에서 부도가 등장한 것이 신라 후기이므로 이는 전혀 근
거가 없다. 부도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승려의 사리는 그냥 자연에 뿌리거나 부도와는 다른 별도
의 시설에 봉안했다고 한다. 의각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신라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 같
은 경우는 사리를 석혈(石穴)에 봉안했다고 전하며, 그보다 이른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일
반적인 3층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 부도의 조각 수법을 볼 때 이르면 고려, 늦어도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지며, 향천사를
거친 이름 모를 승려의 탑을 의각의 것으로 둔갑시킨 모양이다.


▲  검은 피부의 왼쪽 부도
위에만 하얗고 나머지는 까무잡잡하여 마치 위에만 고양이 세수로 씻은 듯 하다.
위에 얹혀진 옥의 티가 아니더라도 제법 수려한 부도임은 분명하다.

▲  온갖 무늬로 정신이 없는 부도의 기단부

▲  부도의 머리 부분


▲  멸운당대사의 비석

오른쪽에 자리한 대추 모양의 부도는 멸운의 부도이다. 그 옆에 멸운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듯 싶다.
이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단을 두고 대추 모양의 탑신을 올렸으며, 그 위를 지붕
돌로 마무리한 형태로 일종의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에
는 면마다 2개씩의 액자 모양을 새기고, 윗쪽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지붕돌은 밑쪽에 서까래
를 새기고, 모서리마다 돌출된 조각을 두어 왼쪽 부도에 비해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부도의
조그만 화려함을 불어넣었다. 그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검은 부도와 멸운의 부도 사이에 솟아난 멸운당 비석은 뒤쪽에 '강희(康熙) 47년 무자월일립(戊
子月日立)'이라 쓰여있어 1708년에 세워졌음을 귀뜀해 준다. 비석의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해 멸운의 부도보다 더 고색의 기운을 풍긴다.

▲  멸운 부도 옆에 새롭게 자라난 부도

▲  향림당대용선사(香林堂大用禪師, 1921~
2006)의 부도


▲  겨울에 잠긴 향천사 동쪽 금오산 산길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러운 설피(雪皮)를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1시간 가량 향천사를 정신 없이 둘러보니 시간이 어느덧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내 곳
곳에 흩어진 승려들이 종소리에 공양간으로 우루루 몰려가면서 겨울 산사의 적막함은 더욱 진해
졌다. 혹여 공양(供養)에 낄 수 있을까 싶어서 새가슴마냥 공양간 주변을 조금 기웃거려봤지만
먹고 가라는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체념하고 향천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무거
운 발걸음을 하였다.
일주문에 이르니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던 번뇌(煩惱)가 반가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렇게 하
여 향천사 새해 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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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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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봉국사

* 정릉 봉국사 - 북한산 남쪽 정릉동에 자리한 봉국사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하여 약사사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현종 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고

다시 제를 지냄으로써 인근 경국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 벼랑에 자리한 독성각

* 천불전과 성북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 - 조선 후기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범종루와 천왕문 (2층은 범종루, 1층은 천왕문)

 

 

* 일주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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