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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4.16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2. 2020.03.01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3. 2016.10.06 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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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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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 마을, 성북동 나들이 '


▲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가옥)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북악산 동쪽 자락에 감싸인 성북동은 20대 중반부터 1년에
여러 차례 답사나 나들이로 찾는 편이다. 그렇게 질리도록 갔음에도 돌아서면 또 안기고
싶은 곳이 또한 성북동이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가는 얄미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
외에도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서촌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들
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곳의 풍수지리적 지형이다. 이곳은 호
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즉 '밝은 달빛 아래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이니 그 자리가 오죽하겠
는가? 바로 그 기운을 받고자 돈과 권력을 꽤나 주무르던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 선생은
빼자~!)들이 몰려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스레 이 땅 최고의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여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강하게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깃든 명
소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거대하고 대문
이 성문처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러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과 빌라를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
것들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
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이나 답사객의 입장으로 성북동을 살펴보자. 졸부들에게 집중될
명당의 기운도 조금씩 챙길 겸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빛낸 20세기 초/중반 인물, 만해 한용운(심우장)과 상허 이태준(수
연산방), 혜곡 최순우(최순우옛집)의 흔적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들은 모두 성북길 주변
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동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
동네 언덕을 150m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문화유산 안내문을 내민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득하여 대궐 같은 집들로 도배가 된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
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겨우 80년 밖
에 숙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산뜻하게 손질된 탓에 고색의 내음도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으
며,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심우장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만해 한용운
심우장'임)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
(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號)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하였다.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만
주와 연해주를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언
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을 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
장섰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
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
으며,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 유씨(兪氏)가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
한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건물 왼쪽 부분에 '심우장' 현판이 걸려있는데, 독립운동가 겸 서예가이자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의 정신적인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쓴 것이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
본대사관저가 건방지게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나
부녀간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심우장은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 있음)
그런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 든다. 왜국이 싫어
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성북구청에서 집을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천하에 공개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 - 글씨의 기품이 느껴진다.

▲ 만해가 머물던 조그만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
을 지킨다. 햇볕이 별로 들지 않는 곳이라 한여름에도 시원하여 방바닥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
에 좋은 곳이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머물거나 벌렁 누워 잠을 청하거나,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는 말자. 시민 모두가 공유해야 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글씨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사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오도송(悟道頌)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산중암자인 오세암(五歲庵)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문(詩文)이다. 목판에 쓰여진 하얀 글씨는 그의 친필이다.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담긴
가운데 방

◀ 심우장 뜨락에 심어진 향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46호
나무의 나이 약 80년


▲ 심우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
나무의 나이 약 90년

심우장 뜨락에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아름다운 수관을 자랑하는 소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이전
부터 있던 존재로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심우장을 수식하는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매일마다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
풀던 존재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빈 집을 지키
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서울다원학
교) 종점에서 하차,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성북로29길 24)


▲ 심우장 앞에 자리한 붉은 벽돌집
심우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집으로 만해사상연구소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은 관람객 통제구역임~~

▲ 심우장 앞 골목길 -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비슷한 분위기의 골목길이다.
저 골목길의 끝에서 혹여 나의 꼬마 시절과 마주치는 것은 아닐까?


심우장 골목길은 서울 시내에 흔히 있는 조그만 골목길이지만 심우장과 그를 꾸미는 소나무의
위엄 때문인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저 골목길을 오르면 달동네인 북정마을이 나오며, 그
마을 역시 성북동의 일부이다. 분명 같은 성북동인데, 졸부 동네와 서민 동네가 한 하늘 아래
공존하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북정마을에서 한양도성 산책로로 진입이 가능하며, 암문(暗門)으로 도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
다.


 

♠ 월북 문학가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 지금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성북동 제일의 전통찻집으로 거듭난, 상허 이태준 가옥
(尙虛 李泰俊 家屋)-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수연산방(壽硯山房)의 바깥 풍경

송미술관과 심우장 중간인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전통 기와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
이 머물고 있다. 그 집이 바로 성북동의 주요 명소이자 이곳의 굵직한 전통 찻집으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월북작가로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의 집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배꼽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도 완사명월형의 기운을 듬뿍 받
고 싶었는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을 1933년에 매입하여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채
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가 가득해 산속의 별
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
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
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자
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방 앞
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에는 1
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20세
기 초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
로 손질하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
던 시절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
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가득해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거쳐 찾는 이가 늘었으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동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하여 성북동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리고 있다.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라린 기
억이 있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
마저 해칠 수 있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
두에게 좋다.

▲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인
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
파에 밀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썩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岐
)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거름
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게
돈을 충당하면서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년
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성북동에 집을 구입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으며, 바로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
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장
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표
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동광,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삼천리,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신동아, 1933
,3)','달밤(중앙, 1933.11)', 손거부(孫巨富/신동아, 1935.11)','가마귀(조광, 1936.1),'복덕방
(조광, 1937.3)' 패강냉(浿江冷/ 삼천리문학, 1938.1)','농군(문장, 1939.7)', '밤길(문장,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춘추, 1942.6)','돌다리(국민문학,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문
학,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
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돌연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와 우경
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
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의 섬
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抒情性)
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
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
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
년 이후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면서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용
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
발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쥐가 날 정도로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고, 자연
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수연산방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쌍다리(성북구립미
술관) 하차, 여기서 서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성북구립미술관
이 나오는데, 바로 옆에 돌담을 두른 기와집이 있다. 거기가 수연산방이다.
* 운영시간은 10시부터 20시까지로 다양한 전통차를 판매한다. (가격은 인사동보다 조금 비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중앙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간
이 없다. 이곳은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 했으며, 세
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깃든 유물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담겨져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2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소나무 분재와 여러 화분들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주변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아마도 그의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두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
라 고미술 연구에 크게 헌신했던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현장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성북동의 차세대 명소로 존재감을 드러낸 지는 몇 년 되지 않
았다. 이제는 간송미술관, 길상에 버금가는 성북동의 주요 명소로 단단히 자리를 닦았는데, 자
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최순우(1916~1984)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는데, 당
시 개성박물관장인 고유섭()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만 북
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
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운이 좋게도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씨란 사람은 어벙벙하고 무식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 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
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 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
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다행히 추궁은 면하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 땅의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
문으로는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흔쾌히 매입
하면서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혜곡이 살았던 시절의 사진과 그의 지인들의 자문을 참고하여 사랑방과 집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전시공간 확보를 위해 바깥채 2칸을 증
축하는 등의 변형이 좀 있음)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
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 등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과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내부 진입/촬영이 가능하
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
로운 오아시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
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대원각)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 선물
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
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
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쪽마루
에 걸터앉아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2, 03번
을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 또는 5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
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추석 당일은 휴관)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다.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성북로15길 9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애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푹 숙인 현장이다.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뜰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그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이 고인
석구(石臼, 돌통)

▲ 표정이 앳된 보이는 조그만 동자상
몸집이 너무 작아 딴 마음(?)을 품기에 매우
좋겠지만 그도 엄연한 돌이다.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
나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어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자리한 둥그런 탁자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뒤쪽 쪽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장문의 안내문


▲ 마루에 놓인 커다란 함지박

▲ 개성만두집인 인사동 궁에서 먹은 떡만두국

이렇게 성북동을 둘러보고 시내로 나와 인사동(仁寺洞)을 찾았다. 어느덧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는 저녁밥 생각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라 무엇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경인미술관
맞은편에 있는 개성만두집 궁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인사동에 딱 어울리게 한옥으로 되어있다. 다행히 자리가 널널하여 방으로 들어가 자리
를 폈는데, 나는 떡만두국을 먹고 여인네들은 조랭이떡만두국을 먹었다. 만두국만 먹으면 허전
할 듯 싶어서 전을 하나 시켰는데, 가격이 그새 세월의 무게가 단단히 더해져 죄다 1만원을 호
가한다. 녹두전을 먹을까 하다가 가격이 그나마 낮은 김치전을 주문했다.

제일 먼저 배추김치와 무김치, 나박김치로 무장된 밑반찬이 펼쳐졌는데, 나박김치가 이곳의 자
랑으로 김칫물이 매우 달콤하고 시원하다. 그래서 거의 3덩이나 비웠다. 그리고 본 메뉴인 떡만
두국이 나타나 우리의 심판을 기다린다. 만두는 경기도 개성식으로 왕만두처럼 매우 두텁다. 육
수도 꽤나 숙성시킨 듯, 맛이 얼큰한 것이 좋았고, 떡과 소고기도 입맛에 맞는다. 일행들도 조
랭이떡만두국을 먹느라 정신이 없어 이내 그릇을 비운다.


▲ 떡만두국의 위엄

▲ 김치전의 위엄

만두국을 입에 대기가 무섭게 김치전이 앞에 차려진다. 김치전은 동그란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데, 조금 맛이 짠 것 같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인지 만두국과 함께 전도 말끔히 비워 어느 것도
남기지 않았다. 만두국의 가격은 인사동이란 프리미엄 때문인지 시중보다는 조금 비싸며 물가가
오른다는 핑게로 계속 가격을 올리고 있으니 이러다가 10,000원을 주고 만두국을 먹고, 파전 하
나에 2만원을 호가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만두국 주제에
1만원이나 주고 먹기에는 좀 아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5월 성북동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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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9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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