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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7.19 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2.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경주 괘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서라벌의 옛 도읍, 경주(慶州)를 찾았
다.
경주는 그 유명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부터 이름 없는 문화유적까지 무려 160곳 이상
을 답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녔음에도 아직도 미답지(未踏地)가 상당하여 내 마음을 여
전히 두근거리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괘릉
을 찾기로 했는데, 그곳은 이미 1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곳으로 괘릉과 그 인근에 자리
한 미답지 절터 2곳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  신라 왕릉의 백미,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 사적 26호

▲  도로에서 본 괘릉 능역

괘릉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이하 안내소)가
있다. 주차장은 평일이라 공간의 여유가 넘치며, 안내소에는 괘릉을 맡은 해설사가 답사객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인근 문화유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괘릉 주변으로 길게 담장을 둘렀고, 삼문(三門)을 통해 괘릉 능역(陵域)으
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겨울은 17시)였으며, 관람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괘릉을 지키던 담장은 사라지고, 담장 대
신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푸른 철책이 도로와 화표석 사이에 둘러져 있다. 해설사
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주시청에서 관람 편의를 이유로 담장을 철거했다고 한다.

담장 철거로 그 안에 가려진 괘릉은 그 속살을 시원히 드러냈으나 그래도 신라 후기 제왕(帝
王)의 능인데, 능을 보호하고, 능역과 속세를 가르는 담장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특히 문화유
산 도난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물급의 지위를 간직한
괘릉의 석인(石人)과 석사자상, 화표석 같은 것은 아무리 무겁고 견고한 돌이라고 해도 방심
은 금물, 그들 또한 도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멋드러지게 우거진 송림(松林)에 둥지를 튼 괘릉은 북쪽에 능이 있고, 능이 바라보는 남쪽에
넓게 터를 닦아 좌우 2열로 석인 2쌍과 석사자 2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두어 서로 마주보
게 했다. 화표석 앞에는 도로가 굽이쳐 지나가는데, 이는 괘릉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키 작
은 철책을 둘러 경계로 삼았으며, 화표석과 도로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옥의 티를 진하게 풍
긴다.
도로를 길 남쪽 하천 너머로 밀어내고, 기존 도로에는 잔디와 소나무 등을 심어 능역을 확장
하고 담장을 두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안그
래도 경주시에서 그럴 계획이 있다고 그런다. (계획만 있는 모양임)


▲  서쪽 석물들 (왼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은 경주에 기러기처럼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이다. 그냥 커다란 봉분만 있던 신라왕릉이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최초로 능비(陵碑)가 생기는데, 이는 당(唐)나라 능묘(陵墓) 양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입했기 때문이다.
신문왕릉(神文王陵)에 이르면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르면서 무덤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덕왕릉(聖德王陵)에는 비어있던 호석 판석(板石)에 12지신상을 만들고, 무덤 주
변을 돌난간으로 두르며, 석상(石床)과 함께 석인 2쌍과 석사자 1쌍을 능 앞에 펼쳐놓는다.
거기서 더 발전한 모습이 바로 괘릉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그중에서도 괘릉이 신라 왕릉
의 백미(白眉)라 통할 정도로 완비된 능묘제도를 자랑하는데, 그래서 봉분만 달랑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다른 왕릉은 '~~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괘릉은 그런 이름 대신 괘릉이란 이
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유일하게 능호(陵號)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오래 전부터 흘러오
던 속설(俗說)에 따르면 무덤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원형을 살리면서 제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걸어놓는다는 뜻의 괘릉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은 신라가 망하면서 속세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누구의 능인지도 모른 채, 적당한
기록에 오르지도 못하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다가 1669년에 작성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동경
은 고려 때 경주의 이름)'에 괘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주부(慶州府) 동쪽 35리(당시 10리
는 5km)에 떨어진 주인을 모르는 능이라 나오면서 앞서 언급된 괘릉의 유래가 나와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석씨들은 앞다투어 경주 땅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조상묘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참조하여 묘를 찾았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기록에 나온 자리를
맞춰가면서 조상묘로 삼았다. 하여 그 시절에 이름 없던 신라 고분 20여 기가 졸지에 '~~왕릉
'이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중에 성덕왕릉, 흥덕왕릉, 무열왕릉 등은 99% 이상 맞음)

한편 경주김씨는 괘릉에 군침을 흘리며 신라 제왕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삼는 어거지성을 발휘한다. 어느 기록에도 이곳이 문무왕릉이라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
이다. 그들은 이곳이 문무왕릉의 허묘(墟墓)일 수 있다면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렸다
고 한다.
그렇게 문무왕릉이란 가면을 강제로 눌러 쓴 괘릉은 왜정(倭政) 때 이르러 정체성에 대한 중
대한 수정을 받게 된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인근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서
깨진 비석 조각을 발견했다. 하여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달려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
總覽)'과 대조하여 비석 조각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 결과 그곳은 원성왕과 인연이 깊은
숭복사터로 밝혀졌다.
또한 비문에 괘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원성왕릉 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허나 경주
김씨 측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으나 1968년 동해바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고 언론사에서 크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괘릉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괘릉<전(傳) 원성왕릉>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숭복사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
록을 토대로 완전히 원성왕릉으로 99% 이상 굳어진 모양이다. 해설사도 이곳이 원성왕릉이 맞
다고 그런다. 예전에는 아리송하다는 뜻의 전(傳)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전'도 쏙 사
라져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붕어(崩御)하자,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하며
, 삼국유사에는 능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
(崇福寺)라고 한다. 마침 숭복사가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마땅한 고분이 없으며, 최치원(崔
致遠)이 쓴 숭복사비에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동곡사)가 괘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원성왕에게 곡사 자리가 능 자리로 좋다고 추천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허나 신하들
의 계속되는 설득에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져 헌
강왕(憲康王) 때 대숭복사(大崇福寺, 지금의 숭복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왕의 땅
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기 때문
이다.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 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신라 38대 군주, 원성왕<元聖王 ?~798 (재위 785~798)>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
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
人, 혹은 지오부인<知烏夫人>) 박씨로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올렸다. 부인은 숙정부인 김씨(
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지정(志貞)의 난을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혜공
왕(惠恭王)이 살해되고 만다. 그래서 김양상에게 힘을 실어 재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라
37대 군주인 선덕왕(宣德王)이다. 그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上大等)에 올라 그 이름을 크게
떨친다.
한편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은 세력과 덕망을 키우며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
경신보다 서열도 높았고 세력 또한 컸다. 마침 선덕왕이 후사도 없이 붕어하자 중신(重臣)들
은 너도나도 김주원을 추대하기에 이르고, 김경신의 자리는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와 관
련해서 재미있는 설화가 한토막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선덕왕 시절에 김경신은 묘한 꿈을 꿨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던 두건를 벗고 소립(素笠, 갓)
을 썼으며, 12줄 거문고를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점쟁이에
게 물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잃는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목에 칼을 쓰는 것입니다. 12줄
거문고를 든 것은 포박되는 것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 좋지 못한 흉몽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제대로 토라진 김경신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있
었고. 그 와중에 그와 무척 가까운 여산(餘山)이 찾아왔다.

여산이 김경신의 주눅 든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던 김경신은 결국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자신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김경신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여산이
'그 꿈은 공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후일에 공이 출세하면 저를 잊지 마십시요!'
김경신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건 무슨 소리요?'

'두건을 벗는 것은 윗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삿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쓴다는 뜻입니다. 12
줄 거문고를 손에 쥔 것은 공이 왕의 12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은 내물대왕
의 12세손이 아닙니까? 또한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무열대왕의 6세손인 김주원이 떡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 그런 자리가 오겠소?'
'저와 공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요. 일단 물과 인
연을 두텁게 하기 위해 알천으로 나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산의 권유에 따라 매일 알천(경주 시내 북쪽에 흐르는 하천)에 나가 기도를 했다. 말은 기
도이지만 아마도 중신과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친분을 두텁게 쌓는 작업이었을 것
이다.

785년이 되자 선덕왕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귀족들은 서열이 제일 높고, 덕망
과 세력을 두루 갖춘 김주원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김주원은 알천 북쪽에 살고 있었고,
김경신은 남쪽에 있었다.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을 하
고 말았다. 중신들과 김주원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폭우는 7일이나 계속 되었다. (폭우라
고 하지만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길을 알천에서 막은 것을 비유한 듯 싶다)
상황이 이러자 중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늘만 쳐다보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하늘이 주원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홍수를 내린 것이 틀림없소! 상대등인 경신공은 선왕 폐
하의 아우로 덕망이 높고, 임금이 될 기상을 갖추고 있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논의가 나오자 다시 중의를 거쳐 결국 김경신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어지럽게
내리던 큰 비는 뚝 멈추었고,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반면 김주원은 알천을 건
너지도 못하고 김경신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말에 격분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다.
이에 김경신은 그가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 달랬으나, 나중에 김
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부친의 한을 갚는다며 웅진(熊津, 공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

이렇게 중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바로 그해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
자(太子)로 봉하고, 시조대왕<김알지(金閼智)인듯>, 태종무열왕, 문무왕, 조부(祖父)인 흥평
(興平)대왕, 부친 명덕대왕을 제사지내는 5묘를 세웠다. 또한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려
주고, 충렴(忠廉)을 상대등에,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총관(摠管)이란
이름을 도독(都督)으로 바꿨다.

786년 4월, 동부 지역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했으며, 김원전을 당나라에 보
내 조공(朝貢)을 건네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왕을 칭송하는 조서(詔書)와 함께 여러가지 선
물을 보냈다.
9월에는 도성에 기근이 심하자 곡식과 조 33,240석을 풀었으며, 10월에 33,000석을 더 풀었다
. 그리고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치자 굴압현령의 벼
슬을 내렸다.

787년 2월, 도성(都城)에 지진이 생기자 왕은 신궁(神宮)에 제를 지내고 죄수를 방면했다. 7
월에 황재(蝗災)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788년 봄,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
傳)과 예기(禮記), 문선(文選)에 정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까지 두루 섭렵한 자를 상
품(上品)으로 삼고, 곡예와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中品), 곡예, 효경만 읽은 자를 하
품(下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경(五經)과 삼사,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두 외운 사람은
특별히 등급을 초월하여 썼다. 그 이전에는 활과 무예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확 변한 것이다.
가을에 서쪽 지방에 한재와 황재가 들고 도적이 들끓자 사람을 보내 백성을 위무했다.

789년 1월, 한산주(漢山州)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조와 곡식을 보냈으며,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또 상했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경기도 양평) 소수(小守)로 삼자, 사람들
이 그는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며 반대했으나 시중(侍中)이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사
람이니 괜찮다고 권하자 왕은 그대로 시행했다.

790년 정월, 종기를 시중에 명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자 전주(全州)를 비롯한 7주의
백성을 징발해 공사에 들어갔다. 웅천주(熊川州, 공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으며, 3월에
일길찬(一吉粲) 백어를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5월에 곡식을 풀어 한산주와 웅천주
백성을 구제했다.

791년 태자 김인겸이 죽자 시호를 혜충태자(惠忠太子)라 했으며, 이찬 제공이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처단했다.
10월에 폭설이 도성에 내려 얼어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시중 종기를 면직시키고 혜충태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金俊邕, 이후 소성왕(昭聖王)>을 시중으로 삼았다. 손자를 시
중에 삼을 정도라면 원성왕도 제법 나이가 있었다는 소리이다.

792년 7월, 당나라 제왕에게 미녀를 보냈다. 8월에는 왕자 김의영(金義英)을 태자로 봉했으며
,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에 삼았다. 그리고 시중 김준옹이 병으로 면
직되자 이찬 숭빈을 시중에 삼았다.

793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794년 2월, 지진이 생겼고, 태자 김의영이 죽자 시호를 헌평태지(憲平太子)라 했다. 시중을
숭빈에서 언승으로 교체했으며,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한산주에서 하얀 까마귀를
진상했으며, 궁궐 서쪽에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795년 정월,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4월 한재가 들자 죄수를 친히 살폈으며, 8월에 서
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796년 봄, 도성에 기근이 심하고 전염병이 생기자 창고의 양곡을 풀어 구제했다. 4월에 동생
인 김언승(金彦昇, 나중에 헌덕왕)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 도성 동쪽에 황충(蝗蟲)으로 농사를 망쳤고, 홍수로 산이 무너졌다. 시중을 김삼
조로 갈았다.

798년 3월, 궁궐 남쪽 누교가 화재를 입었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월 한재
가 있었고, 굴자군(屈自郡, 경남 창원)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3남 1녀의 쌍둥
이를 낳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9일 왕이 붕어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
聖)이라 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
쪽 동곡사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원성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군(聖君)이자 막바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다. 비록 홍수와 한재
, 서리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 농사를 망치긴 했지만 수시로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했으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증축하여 농사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자식들의 명이 짧아 태자로 삼은 두 아들이 몇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끝내는 손자
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 동생 등 가족과 근친 가족을 주요 요
직에 앉혀 자신의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 덕에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는 괘
릉을 만들어 편히 발 뻗고 눕게 된 것이니 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심지어 미녀까지 보내면서 당나라에 아부를 떨었으나,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신라의 호국용(護國龍)을 몰래 물고기 3마리로 둔
갑시켜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려 한 것을 그들을 족쳐 빼앗아왔다는 설화가 있어 당나라와 적
지 않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호국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에서 무척 탐을 내거나 부담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으며, 그 이후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주목할 것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단순히 북국(北國, 발해)에 사신을 보냈
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름>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화엄종(華嚴宗) 승려 묘정(妙正)을 내전(內殿)에 두어 늘 곁에 부렸다
고 하며, 봉은사 등의 절을 창건했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허나 내용이
전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자식들로는 태자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두 아들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
) 등 두 딸이 있었다.


▲  귀여움이 돋보이는 석사자상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①
석인, 석사자 둘러보기 - 보물 1,427호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 앞이라고 하지만 봉분(封墳)과는 다소 거리를 두어 화표주 1쌍과 석인 2쌍, 석사자 2쌍
이 2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며 수식하는 석물들로 그 가치가
매우 상당하여 2009년 괘릉에서 분리하여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一括)'이란 이름으로
따로 국가 보물 1427호로 삼았다. 괘릉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 존재들로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괘릉의 존재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  무뚝뚝하게 서 있는 동쪽 화표석

괘릉 석물 중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화표석(華表石)이라 불리는 8각형의 돌기둥이다. 무
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주석(望柱石)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왕릉에서만 주로
쓰다가 점차 지배층과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역할은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의
기원은 인도 아소카왕의 석주(石柱)라고 한다.
이후 중원대륙(서토)으로 넘어가 왕릉의 화표석으로 절찬리에 세워지게 되는데, 보통 2개를
세웠다. 이후 당나라 따라하기에 분주하던 신라가 이를 가져와 괘릉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화표석을 갖춘 신라왕릉은 괘릉 외에 흥덕왕릉에도 있으며, 고려 태조(太祖)의 현릉(顯陵)에
도 등장한다.

화표석 위쪽에 얇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다른 조각이 있었던 듯 싶으며, 달리 두드러진 조각
이나 새김은 없다.


▲  서쪽 서역(西域) 석인

▲  동쪽 서역 석인

화표석 옆에는 이국적이면서도 조금은 무섭게 생긴 석인(石人)이 바닥돌 위에 서 있다. 서쪽
석인은 좀 덜하지만 동쪽 석인은 정말 우락부락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들은 예전에는 무
인석(武人石)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한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 땅에 흔한 얼굴은 아니며, 서역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로 서역 무역상이나 서역 출신 무인(武人) 또는 관리로 보고 있다. 근래에는 아랍인이나 위구
르인, 소그드인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이들 석인을 내세워 신라와 서역, 아랍과의 활
발한 교류를 증명하는 존재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처용(處容)의 예처럼 신라로 넘어와 관
리가 된 서역, 아랍인들이 많다고 함>

신라 왕릉에 석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성덕왕릉이다. 그 다음이 바로 괘릉인데, 괘릉 석인의
포즈를 가만히 보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좀 비슷해 보인다. 오른손은 거의 가슴 앞에 대고
싸움을 뜰 기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길다란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데, 그곳은 몽둥이라
고 한다. 머리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쓰는 듯한 터번을 쓰고 있으며, 허리에는 복주머니가 달
려 있는데, 산낭으로 보기도 한다.


▲  서쪽 석인의 얼굴
커다란 눈과 코, 다물어진 입은 약간 구부러져 있다.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는데, 마치 털을 보는 듯 하다.


서역인 옆에는 문인석(文人石)을 닮은 석인이 서 있다. 처음에는 문인석이라 불렸으나 칼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부른다. 즉 문무인(文武人)을 같이 표현한
것이다. 서쪽 석인은 제법 날카로운 맵시를 지닌 위엄 돋는 인상으로 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나 오른쪽 석인은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들은 앞에는 관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머리는 관을 쓰고
있는데, 벌이 새겨져 있으며, 벌은 용감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얼굴과 수염이 조금은 이국적
이라 이를 두고 위구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서쪽 문인석의 매서운 얼굴

▲  동쪽 석사자

석인을 지나 왕릉과 좀 더 가까워지면 석사자 2쌍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정말 귀엽게도 앉아
있는데, 봉분 주변에 있던 것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자하면 호랑이와 더불어 용맹의
대명사이지만 여기서만큼은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얼굴하며, 앉아있는 모습하며, 꼬랑지까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게다가 석인처럼 크지도 않고 조그만하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  동쪽 석사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완전 '씨익~'이다.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②
왕릉 봉분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

▲  난간석 주변에 놓여진 저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괘릉 능역 가장 뒤쪽에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 봉분이 주변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두툼
히 솟아 있다. 훍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봉분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
는데, 봉분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이 각 방향 별로 새겨져 있다. 신라가 당나라 왕릉을 적
지 않게 참조를 했지만 12지신상 만큼은 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무덤(경덕왕릉, 헌덕왕릉, 진덕여왕릉, 성덕왕릉, 김유신묘, 구정동 방형분 등)과 달리 조
각 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건강상태도 좋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꾸미는 역할을 하며, 각
자의 연장과 갑옷을 갖추고 있다.

봉분은 지름 23m, 높이 6m로 봉분을 받치는 호석은 바닥돌 위에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
)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우주석을 배치했으며, 2칸 간격으로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성덕
왕릉은 12지신상 상당수가 훼손되었으나 이곳은 거의 멀쩡하다.
호석 밖에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만
들었으며, 회랑 둘레에 높이 1.7m의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
되었다.


▲  12지신상 ①

▲  12지신상 ②

▲  12지신상 ③

▲  12지신상 ④

▲  12지신상 ⑤

▲  12지신상 ⑥

▲  12지신상 ⑦

▲  12지신상 ⑧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능역
몇몇 소나무들은 하늘로 곧게 솟지 못하고, 구부러지게 자라났다. 이들은
혹시 원성왕을 좌우에서 모시던 신하들의 화신(化身)은 아닐까?


괘릉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해설사가 있는 안내소로 갔다. 거기서 괘릉에 대해 이것저것 문의
하여 궁금증에 적지 않은 단비를 뿌렸는데, 그 사이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햇
님의 근무시간이 가장 긴 6월이라고 하지만 괘릉 후식거리로 2곳의 절터 유적(감산사, 숭복사
)도 준비되어 있어 그들도 오늘 모두 봐야만 된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며
, 오로지 두 발로 찾아가야 한다.
하여 해설사에게 궁금증 해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괘릉을 뒤로 하고 괘릉의 후식거리를
찾으러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감산사와 숭복사 관련 부분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경주 감산사, 숭복사 관련글 보기)

* 원성왕릉(괘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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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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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8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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