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3.21 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2. 2016.06.14 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금강 상류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 향수바람길 나들이 (독락정)

옥천 둔주봉, 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금강 상류에 숨겨진 비경,
옥천 둔주봉(한반도지형)~향수바람길 '
옥천 한반도지형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대전 옆에 자리한 충북 옥천(沃川)을
찾았다. 옥천 땅에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그를 찾고자 추
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것이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 한강 건너 영등포역에서 경부선(京釜線) 무궁화
호 열차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2시간을 내달려 옥천역에 이르렀는데, 금강산도 식후경
(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명언에 따라 옥천역 부근에서 따끈하게 순대국 1그릇 말고
둔주봉에서 먹을 김밥 2줄을 구입하여(옥천버스 종점에 가격이 저렴한 괜찮은 김밥집이
있음) 안남으로 가는 옥천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옥천읍에서 둔주봉이 있는 안남면 중심지<연주리(蓮舟里)>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중
간에 장계에서 금강을 건너가는데, 그는 내가 찾아갈 둔주봉과 한반도지형 옆구리도 지
나간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 종일 금강을 지켜봐야 된다.

안남(연주리) 종점에서 남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안남초교로 그 직전에 한반도지형을 굽
어보는 둔주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경사도 거의 완만한 그 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둔주봉의 북쪽 입구인 비들목재(점촌재)로 여기서 왼쪽(남쪽)으로 틀어 둔
주봉의 품으로 들어섰다. (길을 그대로 직진하면 피실나루터로 이어짐)


▲  서서히 솟구치는 비들목재(점촌재) 고갯길


▲  비들목재를 넘으면서 바라본 안남면 연주리 지역

▲  둔주봉 능선길과 만나는 비들목재 갈림길 (둔주봉 북쪽 입구)
여기서 직진하면 금강이 있는 피실나루터로 이어진다.



 

  ♠  둔주봉 한반도지형 (둔주봉정)

▲  둔주봉정 북쪽 소나무숲길

둔주봉(屯駐峰, 384m)은 안남면 연주리의 듬직한 뒷산으로 등주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동/서/
남 3면이 금강(錦江)에 접해있고 북쪽만 육지로 이어져 있는데 이 일대는 뫼가 첩첩히 둘러진
산악지대라 강이 곧게 흐르지 못하고 구불구불 굴곡미를 보이며 흘러간다. 그러다보니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속칭 반도(半島)식 지형이 많다.
둔주봉 역시 그런 지형의 하나로 동남쪽 금강 건너에도 비슷한 지형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둔
주봉의 상큼한 양념인 한반도지형이다. 한반도지형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강원도 영월(寧越)의
한반도지형을 시작으로 천하 곳곳에서 그런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고 있는데 옥천에서도 하나
발견되어 괴산 산막이옛길의 한반도지형(☞ 관련글 보기)과 함께 충북 속의 조그만 한반도를
이루고 있다.

이곳도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던 숨겨진 곳이었으나 다녀간 사람들의 글과 사진, 입
소문을 통해 찾는 이가 늘자 옥천군청이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지형이 잘 바라보이는
둔주봉 2번째 봉우리에 전망대(둔주봉정)를 닦고 산길을 정비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정성을 들
여 옥천 제일의 꿀단지로 키우고 있다. 한반도 비슷하게 생긴 지형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동네 뒷산이 전국적 수준의 뒷산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음)

둔주봉 유래에 대해서는 연주리 일대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의 자리로 일
컬어져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한국지명총람'에 '둔주봉'으로 나와있어 꽤 오래된
이름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유적
인 둔주봉산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둔주봉정 (한반도지형 전망대)

둔주봉 나들이는 접근성도 좋고 오르기도 편한 비들목재(점촌재)에서 시작하면 편하다. 거기
서 산길을 따라가면 둔주봉정(0.8km), 둔주봉 정상(1.6km)과 무리없이 이어지며 정상에서 다
시 비들목재로 나오거나 고성(1코스), 금정골(2코스), 피실(3코스)로 내려가도 된다. 그 3곳
으로 내려가면 둔주봉을 3면으로 포위하여 흐르는 금강과 만난다. <반대로 고성, 금정골, 피
실에서 올라가도 되나 경사가 각박하여 조금 힘듬>

고성이 둔주봉의 제일 남쪽 끝으로 비들목재에서 3.5km 거리이며 둔주봉과 금강 경계에는 좁
은 비포장길이 펼쳐져 있어 산골 벽지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 길은 피실에서 금정골, 고성을
거쳐 연주리 남쪽의 독락정마을까지 이어진다.

▲  둔주봉정 현판의 위엄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동쪽(연주리 지역)

비들목재에서 느긋하게 펼쳐진 능선 숲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조촐하게 생긴 둔주봉정이 마중
을 한다. 이곳이 둔주봉의 2번째 봉우리로 금강 건너에 펼쳐진 한반도지형을 속시원하게 바라
볼 수 있는 현장이다. 하여 2007년 여름, 옥천군청에서 둔주봉정과 전망데크를 닦아 한반도지
형 전망대로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는 한반도지형과 그 지형을 감싸며 구비쳐 흐르는 금강, 둔주봉 남쪽 능선이 시야에 쏙
들어오며 동쪽(연주리 방향)도 바라보이기는 하나 수목이 적지 않게 시야를 가려 조망은 별로
이다. (북쪽과 서쪽은 산으로 거의 막힘) 그러니 이곳은 오로지 한반도지형을 위한 곳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옥천 한반도지형

옥천 한반도지형은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아주 기가 막힌 작품으로 금강과 주
변 산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주 걸쭉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속세(俗世)의 때가 거의 느껴
지지 않는 이곳 풍경에 세상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과 마음이 제대로 위로가 된다.
허나 그가 아무리 한반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도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나의 침침한 두 눈에는
양말이나 버선처럼 보인다. 하여 나 같은 사람의 그런 시각을 잡아주고자 둔주봉정 안에 동그
란 볼록거울을 설치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 거울로 보면 맨눈으로 보는 것과 완전 반
대로 다가와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인간의 눈과 특수 효과를 넣은 거울의 미묘한 차이
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렌즈의 장난일 뿐이다.


▲  볼록거울의 시각 농간, 둔주봉정 볼록거울로 바라본 한반도지형
이렇게 보니 정말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다.


▲  얼어붙은 금강에 감싸인 한반도지형의 위엄

한반도지형에는 경작지를 비롯하여 백사장과 숲, 산이 있다. 지형 남쪽에는 뫼들이 칼처럼 솟
아있고 그 좁은 산골에 집들이 여럿 깃들여져 있으며, 지형 북쪽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금강의
푸른 물줄기와 스킨쉽을 즐긴다.
동/서/북 3면이 금강에 막혀있고 남쪽 또한 높은 산에 막혀있으니 영월의 청령포(淸泠浦)처럼
육지 속의 외로운 섬이자 하늘의 감옥 같은 곳이다. 동이면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으나 길이
험해 보통 연주리 독락정마을이나 고성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게 훨씬 접근성이 편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겨울의 한복판이라 강이 얼어붙어 나룻배 또한 강제 휴업에 들어간 상태이
다. 그러니 저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실상 막힌 셈이다. 얼어붙은 강을 두 발로 건너가는 방
법이 있지만 설익거나 틈을 보인 얼음이 적지 않아 그건 무모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둔주봉정 밑에서 바라본 한반도지형

현재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전부이다. (그마저도 2개로 형편없이 쪼개
져 있음ㅠ) 그러다보니 이 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한반도를 닮은 지형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다소 있는 것 같다.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더한 거 같음~) 그래서 그런 지형을 찾거나
일부로 만들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요란하게 키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역을 누비고 살던 사람들이다. 만주와 요동(遼東),
요서(遼西), 하북(북경), 산동반도, 대마도, 왜열도, 연해주 등이 싹 우리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를 너무 한반도로 국한해서 보거나 그 좁은 땅으로 만족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반드시 주변 오랑캐들을 때려잡고 그동안 잃어버린 땅의 그 몇 배를 회복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을 흡수하고 옛 땅을 되찾는 그날이 찾아오면 케케묵은 한반도지형
은 싹 내다 버리고 그에 걸맞은 지형을 찾아 키워야 될 것이다.


▲  둔주봉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산줄기
오른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정상, 왼쪽에 하얀 존재는 얼어붙은 금강


둔주봉정에 올라 한반도지형과 그림 같은 주변 풍경에 한참을 심취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둔주봉정 관리아저씨가 살짝 다가와 잘 구경했냐며 말을 건넨다. 그는 9시부터 17~18시(
한겨울에는 일몰 직전까지)까지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둔주봉정 서쪽에 그가 일을
보는 조그만 초소가 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한반도지형이 양말, 버선 같다고 하니 빙그레 웃으며 둔주봉정 안에 있
는 볼록거울로 한번 보라고 그런다. 하여 그 거울을 바라보니 과연 한반도 비슷하게 바라보인
다. 나 같은 사람에 대비해서 볼록거울까지 설치하여 어떻게든 한반도지형처럼 보이게 하려는
옥천군청의 치밀함에 정말 혀를 내둘렀다.

둔주봉정에서 고성까지 소요시간을 물으니 족히 2시간은 걸린다고 그런다. 원래는 둔주봉 정
상을 찍고 고성으로 내려가 금강 강변길을 따라 연주리로 나오려고 했는데 그 말에 경로를 바
꾸어 정상에서 바로 독락정으로 내려가는 빠른 길을 문의했다. 그러니 정상에선 길이 없고 한
반도지형전망대 남쪽에 그곳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
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  둔주봉의 지붕을 거닐다. (둔주봉 정상)

▲  솔내음이 그윽한 둔주봉 북쪽 능선길 (둔주봉정 남쪽)

둔주봉정에서 뻔히 바라보이는 둔주봉 정상까지는 약 0.8km이다. 허나 체감거리는 거의 2배가
넘으니 이정표의 농간에 속지 말자~~!
한반도지형전망대를 나오면 바로 내리막길이 펼쳐지는데 그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왼쪽(동쪽)
으로 내려가는 길이 살짝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는 없음) 그 길이 둔주봉정 관리원이 알려준
샛길이다. 일단 그 샛길은 접어두고 능선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하늘과 한층 가까워졌는지 지금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눈이 크게 존재감을 보이며 하얗게 길
을 덮는다. 게다가 산길도 흥분기를 보이며 낭떠러지 비슷한 곳까지 내놓으면서 긴장과 함께
체감거리를 증가시킨다. 다행히 아이젠을 챙겨와 신발에 씌우고 조심조심 다리를 움직였다.


▲  둔주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쪽 능선길

▲  겨울 제국이 깔아놓은 하얀 카페트 길을 거닐다~!
눈이 쌓인 둔주봉 북쪽 능선길


▲  둔주봉 정상 밑에 자리한 둔주봉산성 표석

둔주봉 정상 직전에 이르니 '둔주봉산성'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이 마중을 한다. 거의 한반도
지형만 생각하고 온 터라 '이런 곳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이곳에도 비록 희미하
지만 옛 사람들이 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었던 둔주봉산성은 정상 주변에 다져진 약 150m 규모의 토성(土城)이다. 삼국시
대에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위치상 백제(百濟)로 여겨지며, 지금은 그 윤곽만 흐릿하게 남아있
다. 바로 뒤에 있는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훤히 바라보여 큰 산성(山城)이나 요새는 아니어도
조그만 보루(堡壘)를 둘만한 군사적 요충지의 자격이 충분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을 지켰던 옛 백제 군사들도 금강 동쪽 건너편의 한반도지형을 봤을 것이다. 허나 그 시
절 한반도지형은 천하 사람들을 홀릴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저 금강이 굴곡을 보이며 빚
은 지형의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몇 배의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면 결코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 옥천의 꿀단지로 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나
명승지나 시대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훤칠한 존재라도 결코 뜨지
못한다.


▲  둔주봉 정상에 둘러진 둔주봉산성의 흐릿한 흔적
토성의 흔적이 봉우리의 일부로 녹아든 채 얇게 남아있다.

▲  드디어 도착한 둔주봉 정상 (384m)

둔주봉 정상은 정상을 알리는 표석 외에는 완전한 대자연의 공간이다. 여기서는 둔주봉의 존
재를 천하에 일깨워준 한반도지형은 보이지 않으나 북쪽과 서쪽의 산하가 훤히 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특히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금강과 그를 둘러싼 뫼들이 생생히 다가와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 같으며 그 서쪽 산하 너머로 멀리 대전 외곽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①
구불구불 흐르는 금강과 옥천군 동이면, 안남면 지역 (멀리 대전 외곽의 산들까지)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②

▲  둔주봉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 (옥천 안남면, 안내면 지역)

정상에서 10분 정도를 머물며 아무도 없는 자연의 한복판을 마음껏 누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
비규환의 세상에서 잠시 나를 지우며 이곳에 더 묻히고 싶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아닌지
라 그러지를 못한다. 하여 아쉽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둔주봉정 방향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지형
전망대 남쪽에 숨겨진 독락정 방향 샛길로 들어섰다.

둔주봉 안내도에도 투명 취급을 받는 샛길이라 사람들 왕래가 적어 잡초가 좀 많았고 경사 또
한 급하여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내려왔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니 산 밑에 아득하게만
보였던 독락정마을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270m 고지에서 순식간에 아랫 세상(해발 100m)
으로 내려왔으니 마치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안남천과 금강이 만나는 곳 (독락정마을 앞)



 

♠  금강 거닐기 (독락정, 향수바람길)

▲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섬이 빚어져 있다.

독락정마을은 금강과 안남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해 있다. 연주리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지어
진 독락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경작지로 쓰이는 섬이 있
으며 한반도지형으로 넘어가는 나루터가 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독락정(獨樂亭)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23호

독락정마을의 유래가 된 독락정은 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다. 금강과 안남천이 하나가 되
는 현장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는 이곳은 둔주봉 주변에서 둔주봉산성터 다음으로 오래된 명소
로 절충장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를 지냈던 주몽득(周夢得)이 1607년(또는 1630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주몽득은 이곳에 정착하여 만년을 지냈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書堂)으로 쓰이기
도 했다. 또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역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1668
년 옥천군수 심후(沈候)가 방문 기념으로 '독락정' 현판을 남겼으며 대청에는 송근수(宋近洙)
가 쓴 율시기문(律時記文) 등 10개 정도의 현판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1772년 정자를 중수했고, 1888년과 1923년 다시 수리를 했으며, 1965년 주몽득의 후손인 초계
주씨 문중에서 다시 고쳐지어 지금에 이른다.

독락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금강을 바라보고자 약간 비스듬하게 동남향
을 취하고 있다.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쌓아 자리를 닦고 그 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다져 정자
를 올렸으며, 정자 양쪽 측면은 툇마루를 설치하고자 내부를 4칸으로 지었다. 동,서,북 3면은
돌담을 둘렀고 동쪽에 출입문을 냈으며, 남쪽은 금강을 보는데 지장이 없게끔 담장을 두지 않
고 앞을 완전히 트이게 했다. 대신 서서히 낮아지는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2m 정도로 다져 담
장을 대신했다.


▲  단출한 모습의 독락정
정자의 이름처럼 자연을 벗삼아 혼자 놀기에 딱 적당한 크기이다.


▲  초계주씨의 시조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주황(周璜)의 위령비(慰靈碑)와
영모각(永慕閣, 뒤에 보이는 기와집)


독락정은 초계주씨의 조그만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다. 독락정 북쪽에 후손들이 사는 영모각
과 주몽득에게 제를 지내는 영모사(永慕祠)가 있으며, 주몽득을 시작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을
기리고자 초계주씨세거비(世居碑)도 한쪽에 세워두었다.
또한 이곳과는 인연이 없지만 초계주씨의 시조인 주황의 위령비까지 세워 시조를 기리고 있다.
주황은 당나라 사람으로 후삼국시대인 907년에 신라로 넘어와 합천 초계(草溪)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고 전한다.

▲  정겨운 모습의 독락정 동쪽 돌담과
맞배지붕 대문

▲  1668년 옥천군수 심후가 썼다는
독락정 현판의 위엄

▲  독락정의 역사를 머금은 독락정 추모기

▲  붉은 피부의 현판, 송근수가 썼다는
'율시기문'일까? 잘 모르겠다.


▲  독락정에서 바라본 둔주봉 정상
방금까지 나는 저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떠보니 독락정
툇마루에서 정상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보면
세월도 그렇고 인생도 정말 무상한 모양이다.

▲  독락정마을에서 바라본 금강과 한반도지형

독락정을 지나면 금강과 둔주봉의 경계를 따라 비포장 흙길이 정겹게 펼쳐진다. 얼어붙은 금
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 둔주봉정에서 바라봤던 한반도지형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강변에서 보니 그냥 숲이 우거진 언덕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굽이굽이 요동치는 금강과 거의 절벽 수준의 둔주봉 사이에 놓인 비포장길(금강 강변길)은 1
차선 크기로 고성을 지나 피실까지 이어진다. 둘레길과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옥천군청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혀 '향수바람길'이란 도보길을 내놓았는데, 그 이름은 옥천이
낳은 현대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대표 작품 '향수'에서 따온 것으로 그 코스 중 전설바닷길(
4.5km, 피실나루터~독락정)이 바로 이곳의 신세를 진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금강과 산, 숲, 흙길이 어우러진 두멧골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주 아
름다운 길로 바다를 지나지도 않는데 왜 '전설바닷길'로 간판을 달았는지 의문이다. 차라리 '
전설의 강변길'이나 '한반도지형길','둔주봉길'이 낫지 않았을까? 이름이야 어쨌든 둔주봉정
에서 한반도지형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꼭 금강 강변길도 거닐어보기 바란다. 나는
한반도지형보다는 이 길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  비포장 흙길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강 강변길 (전설바닷길)
가끔 차량들이 오갈 뿐 인적도 매우 드물다. (휴일에는 좀 있는 편) 산바람과
강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길로 처음에는 조금만 가려고 했으나 주변
풍경이 너무 고와 그 풍경에 취한 나머지 그만 고성까지 가버렸다.

▲  독락정과 한반도지형을 갈라놓은 얼어붙은 금강
얼핏 보면 얼음이 단단해 보이지만 중간에 설익거나 비리비리한 부분이 있으니
괜히 온몸을 던져 건널 생각은 하지 말자.

▲  한반도지형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나룻배 (독락정 나루터)
이곳에서 배를 타고 옥천 속의 섬, 한반도지형으로 들어갈 수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얼음을 꽁꽁 씌워놓으면서 배는 강제로
겨울 휴가에 들어간 상태이다.

▲  강 건너로 보이는 한반도지형과 백사장

▲  한반도지형(왼쪽)과 금강, 그리고 둔주봉(오른쪽) ▼


 
▲  한반도지형의 잘생긴 서쪽 옆구리

▲  독락정마을과는 저만큼 멀어지고..

▲  시야에서 사라진 독락정마을
햇님이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지형과 맞닿은 동쪽 강변길은
벌써부터 어둠에 잠겼다. 강변길이 거의 벼랑처럼 펼쳐진 둔주봉의
바로 동쪽 밑이라 바깥보다 일찍 컴컴해지는 것이다.

▲  고성나루터 직전 (강 건너는 여전히 한반도지형)

▲  둔주봉의 남쪽 끝이자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어주는 고성나루터

고성은 둔주봉 남쪽 끝이자 독락정에서 피실로 이어지는 길 중간이다. 한반도지형 남쪽을 이
어주는 나루터가 이곳에 있는데, 겨울 제국에게 완전히 굴복당한 독락정 나루터와 달리 고성
나루터는 사람들이 얼음에서 강을 해방시켜 뱃길을 내고자 강 건너편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얼
음을 깨뜨린 흔적이 있다. 저 정도로는 제대로 건너가기도 어렵겠지만 겨울 제국에게 조금이
나마 단죄를 하였으니 겨울도 조금은 긴장을 했을 것이다.

고성을 지나면 강변길은 둔주봉 서쪽으로 넘어가게 되며, 둔주봉이 있는 지형도 한반도지형과
비슷한 반도형 지형으로 그 남쪽 끝이 바로 고성이다. 마음 같아서는 피실까지 가서 점촌고개
를 통해 연주리로 원점회귀하고 싶었지만 그 거리가 길고 일몰이 코앞이라 여기서 그만 발걸
음을 접고 독락정마을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천근만근처럼 무겁고 섭하던지 몇 번
이나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  다시 가까워진 독락정마을

금강 강변길이 길이 좋다보니 고성까지 갈 때도 그렇고 다시 연주리로 나올 때도 그 적지 않
은 거리(3km)가 매우 짧게 느껴졌다.
연주리 중심지(안남면사무소 주변)에 이르러 읍내에서 사온 김밥으로 출출함을 잠시 달래고
17시에 옥천읍내로 나가는 옥천군내버스에 고된 몸을 실었다. 나가는 길에 장계국민관광지에
있다는 청석교를 잠시 보고자 했으나 달님이 햇님을 쪼아대며 일몰을 재촉하니 불투명한 다음
으로 흔쾌히 미루고 옥천읍내로 나왔다.

이리하여 늦겨울에 찾아간 옥천 한반도지형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2월 2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 옥천(沃川) 늦겨울 기행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구읍 명소들) '

▲  정지용문학관 로비에 재현된 정지용의 모습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의 대표 작품인 '향수'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겨울 제국(帝國)의 패기가 슬슬 수그러들던 2월 한복판에 대전 동쪽에 자리한 충북 옥천
을 찾았다.

옥천은 지금까지 여러 번 발을 들였지만, 거의 잠깐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옥천 땅에
도 굵직한 명소가 참 많건만 이웃 동네 떡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된 듯 싶다. 하여 이번
에는 옥천의 명소를 둘러보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읍내에서 가깝고 볼거리도 풍부한
구읍 일대를 답사지로 정했다.

옥천 읍내는 지금의 읍내인 신읍(新邑)과 읍내 북쪽인 구읍(舊邑)으로 나눌 수 있다. 원
래는 구읍(교동리, 죽향리, 하계리, 문정리)이 옥천 고을의 중심지로 관아(官衙)를 비롯
해 향교(鄕校)와 객사(客舍) 등이 있었다. 게다가 양반이 많이 살던 고을이라 그들의 기
와집도 즐비했다. 반면 신읍은 거의 농경지에 백성들이 드문드문 사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신읍과 구읍의 처지가 정반대가 되버렸으니 그 사연은 대략 이렇다.

때는 바야흐로 황성(皇城,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선 철도를 한참 닦던 1901년. 경부선
의 원래 옥천 구간은 '마달령~증약~문정~동안~매화~구일~칠방'이었다. 옥천역은 구읍의
일원인 문정에 둘 계획이었으나 그 소식을 들은 읍내 양반들이 크게 발끈하였다. 괴상한
철마가 고을을 지나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거니와 철도 건설로 인해 그들의 토지가 줄어들
고 소음과 위험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천 양반들의 강렬한 반대에 꼬랑지
를 내린 철도 건설 사업자는 급히 옥천 구간을 수정했다.

드디어 1905년 경부선(京釜線)이 개통되자, 역세권인 옥천역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면
서 자연히 새로운 읍내, 즉 신읍을 이루게 되었고, 기존 읍내에 있던 관청, 시장, 민가
들도 역 주변으로 우루루 몰려가 신읍을 무럭무럭 살찌우니, 그것이 지금의 옥천읍이다.
반면 기존 읍내는 인구가 감소하여 나날이 쇠퇴를 거듭하니 결국 변두리로 전락되어 구
읍이란 우울한 이름의 시골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부자와 양반들은 많이 남았음)

그후로 오랫동안 뒷방 마님 신세가 되버린 채 잊혀진 구읍은 2000년대 이후 구읍 출신인
정지용에 힘입어 다시금 기지개를 켜며 옥천의 새로운 꿀단지로 서서히 도약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현대 문학의 성지로 키우고 있으며, 육영수 여사
의 고래등 기와집을 복원하여 박정희 향수에 젖은 이들의 순례지로 만들었고, 이곳에 유
일하게 남은 조선 후기 기와집을 한정식 및 한옥 체험의 장인 춘추민속관으로 단장했다.

또한 구읍을 지나는 도로를 정지용의 시를 상징하는 '향수길'이라 이름 짓고 마을 식당
과 가게, 민가 외벽에 정지용의 시를 달게 했으며, 개발의 칼질을 제한하고 옛 읍내와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유지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옛 시골에 대한 향수에 젖게 배려했
다. 그렇게 하여 옥천 관광의 새 중심지이자 문학, 전통의 중심지로 새롭게 거듭났다.
비록 신읍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옥천의 행정, 경제, 교육의 중
심지였던 탓에 역사와 전통, 자부심이 짙게 배여있으며, 이를 입증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깃들여져 있다.

이렇듯 옥천의 과거가 서린 구읍에는 정지용 생가와 그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육영수생가,
옥주사마소, 옥천향교, 죽향리사지3층석탑, 죽향초교의 옛 교사(校舍)가 있으며, 한정식
및 한옥 민박을 할 수 있는 춘추민속관이 있다. 또한 한정식, 비빔밥, 짜장면, 묵밥, 올
갱이국으로 유명한 맛집이 다수 포진해 있어 눈과 코, 귀, 입 등 오각(五覺)과 마음, 정
신을 두루두루 즐겁게 해준다.


 

 

♠  현대문학의 새로운 성지이자 옥천의 굵직한 명소,
지용문학공원 <정지용 생가(鄭芝溶 生家), 정지용문학관>

▲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된 정지용 생가 (왼쪽에 누워있는 표석이
생가터 표석, 가운데는 시 향수를 머금은 비석)


구읍 한복판에 자리한 정지용 생가는 그의 동상과 시비를 포함하여 지용문학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공원이나 기념관, 장소는 인물의 호를 따거나 성씨를 포함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곳은 그냥 이름만 적용하여 친숙함을 배가시켰다.

정지용 생가는 그가 태어나 소년 시절을 지낸 곳으로 1918년까지 살았다. 그가 상경하여 서울
에 자리를 닦자 1929년 효자동(孝子洞)에 집을 마련하여 부인과 아들을 불러 같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부모도 올라와 3대가 같이 살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가면서 집은 다른 사람
에게 넘겼고,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는 동안 집의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가 1974년 철거
되어 새 집이 들어섰다.
이후 정지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자 옥천군청에서 1996년 7월 원래 자리에서 약간 동쪽
인 지금 자리에 생가를 복원했는데, 원래 집은 초가 옆 우물 서쪽과 향수 표석 옆에 누운 생가
터 표석 일대로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계와
옥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는 인물인만큼 작은 모습으로 복원하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아 제자리
보다 동쪽에 초가 1동과 헛간 1동을 크게 짓고, 보기만 해도 정겨운 토담을 둘러 관광객을 맞
게 되었다. 그러니까 생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크게 부풀리고 가상까지 듬뿍 첨
가하여 완전히 민속촌 초가집이나 민속박물관이 되어 버렸다.


▲  활짝 열린 서쪽 사립문

초가에는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기존 초가의 방식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방과 부엌 안
에 담긴 물건들은 새로 만들거나 다른 마을에서 수습한 것으로 정지용 일가가 쓴 것은 단 하나
도 없다. 집은 재현했으나 정작 그들이 쓰던 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니 시골에서 쓰던 물건이나
오래된 생활도구를 사들여 궁색하게나마 집 안팎을 꾸민 것이다.
초가의 방문과 부엌문은 모두 열려있어 내부를 훤히 구경할 수 있으나 그저 눈으로만 구경하기
바란다. 비록 근래에 지어진 초가이나 엄연히 정지용의 생가를 칭하고 있으니 부엌이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통제되어 있다. 단 툇마루에 잠깐 앉는 것은 가능하다.

▲  뚜껑이 닫힌 우물과 장독대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면서 갖다놓은
빈껍데기들이다.

▲  정지용 생가터
우물 서쪽 공터와 담장 너머 생가터 표석
일대에 조촐하게 생가가 있었다.


▲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초가 3간
부엌과 방 3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초가이다. 정지용의 생가가 아닌
정지용이 살고 싶었던 큰 초가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지용유적 1호 현판
정지용을 사모하는 단체인 '지용회'가 1988년에 달아놓은 것으로 그들은
복원된 생가를 지용유적 1호로 삼았다.

▲  정지용의 사진이 걸린 초가 우측 방
정지용이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추억의 풍물시가 되버린 부뚜막을 갖춘 옛 부엌
옛날 단양(丹陽) 시골 외가집 부엌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의 소중한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시켜 준다. 부뚜막에 장작을 떼서 지어먹은 밥과
누룽지의 맛은 참 예술이었지...

▲  부엌문 옆에 고된 몸을 기대어
선 돌절구

▲  초가 좌측 방 - 정지용 부모가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초가 옆에 마련된 헛간 - 창고와 뒷간을 재현했다.
정지용 생가와는 애당초 관련이 없는 장식용임

▲  헛간 가운데 칸은 농기구 창고로 재현했다.

▲  정지용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남쪽 사립문과 생가


▲  남쪽 사립문 앞에 놓인 청석교(靑石橋)

남쪽 사립문을 나오면 조그만 개천과 물레방아가 있는데, 개천 위에는 넓직한 반석(盤石)이 벌
러덩 드러누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청석교'라 불리며 원래는 생가 앞에 흐르
는 개천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이야 개천이 정비되어 폭이 좀 넓어지고 반듯해졌지만 예전에는
폭이 좁아 저 돌다리로 개천을 건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구읍을 가르는 개천 위에 걸쳐져 구읍의 동,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구읍 출신인 정지용과 육영수도 저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고 서울에 가고 했다. 어찌
보면 민속촌 초가처럼 재현된 정지용 생가보다 유서가 깊은 다리지만 마땅한 이정표가 없어 그
냥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정지용문학관 해설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돌다리에 대한 이야기
를 한 토막 들려주니 꼭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다리가 되어 드러누운 이 돌은 매우 단단하고 두꺼운데, 이런 넓은 돌은 옥천에
서만 나온다고 하며, 현재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인 금강(錦江) 상류 장계유원지에도 청
석교라는 오래된 다리가 말년을 보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지어졌다고 함)


▲  정지용 생가 동쪽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 동상

정지용 생가 동쪽에 터를 닦은 정지용문학관은 2005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정지용의 생애와 작
품, 문학 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2층 규모이며, 내부는 그리 넓지는 않다. 딱 하나 뿐인 전시실
인 문학전시실은 정지용의 인생과 그가 살았던 시대, 문학(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
문...)을 설명하고 있으며,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 현대 시의 흐름과 거기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소상히 다룬다. 또한 그의 시집과 산문집, 그의 손때가 담긴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유품은 그게 전부라 아직은 좀 빈약하다.

눈으로 보는 전시실 외에 문학체험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자신의 손이 스크린이 되어 시를
직접 읽어 보는 '손으로 느끼는 시' 코너와,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낭송을 듣는 '
영상시화' 코너,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하는 '향수영상', 컴퓨터로 직접 시
어(詩語)들을 검색하는 '시어검색', 노래방처럼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의 시를 직접 부르는
'시낭송 체험실'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시낭송체험실은 이곳의 백미(白眉)로 다른 문학
관이나 기념관에는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 외에 정지용의 삶과 문학 등을 다룬 다큐멘터
리를 상영하는 영상실과 시/문학 토론, 학습, 문학동아리 활동공간으로 쓰이는 문학교실이 마
련되어 있다. (문학교실은 사전 예약 요망)

관람료는 물론이고 시낭송실 사용까지 모두 공짜이며,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
어서면 안내데스크 좌측에 옛날 복장을 갖춘 사람 하나가 실감나게 앉아 있어 깜짝 놀라게 만
든다. 그 사람은 실제 사람이 아닌 정지용을 재현한 인형으로 기념촬영용이다.


▲  문학전시실 내부 - 정지용의 생애와 시대상이 간략하게 기록된 공간

※ 정지용(鄭芝溶)의 생애 <1902 ~ 1950(?)>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 5월 15일) 한약상을 하던 정태국(鄭泰國)과 부인 정미하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자 이름은 지용(池龍)으로 이는 그의 생모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
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지용(芝溶)으로 이름을 갈았다. (천
주교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그의 부친은 고향에서 한약상을 개업해 제법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가산을 죄다 말아먹고, 고향을 떠나 이곳 구읍으로 넘어와 새 보금자리를 꾸렸으며, 처가 친척
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목구멍에 간신히 풀칠을 했다. 정지용은 당시를 회상하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말해 유년 시절
에 가난으로 인한 고초가 매우 심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11살에 나이로 동갑인 송재숙
과 혼인을 했다. (헐~~ 부럽다) 1918년 휘문고보(서울 안국동)에 입학했으며, 성적이 우수하고
교우관계가 좋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 시절부
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문학적 소질을 발견하고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
인지 요람(搖籃)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면서 이선근과 1년 무기정
학을 받았다. 그해 12월 서광(瑞光)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의 유일한 소
설이자 첫 발표 작품이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을 했다. 또한 첫 시작품인
풍랑몽(風浪夢)을 썼다. 1923년에는 휘문고보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되
었으며,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왜열도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교토에서 시 '석류','민요풍 시편','새빨간 기관차','바다' 등을 썼으며, 학조 창간호에
'까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
을 시작했다.
1927년에는 '갈매기','갑판우','향수'등 30여 편의 시를 냈으며, 1928년 2월(음력)에는 장남인
'정구관'이 태어났다. 이후 동지사문학 3호에 '마(馬)1,2'를 발표하고 1929년 대학을 졸업, 귀
국하여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일했으며, 옥천에 있는 부인과 장남을 서울로 불러들여 효자동에
집을 마련했다. 12월에는 '유리창'이란 시를 썼다.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여 '조선지광','시문학','대조','신생' 등에 '겨울','유리창' 등
의 시를 발표했으며, 1933년 3남 정구인이 출생했다. 또한 그해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
의 편집고문을 지냈으며, 해협의 오후 2시, 소묘1,2,3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종로구 재동(齋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이때쯤 딸 정구원이 태어났다. 1935년에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냈으며, 그동안 발표된 89편이 수록되었다.


▲  1935년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

1936년에는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해 3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
광','소년' 잡지에 '옥류동','별똥이 떨어진 곳'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와 삼천리문학, 여성,
청색지 등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우상' 등 수필 30여 편을 발표하는 한편, 천
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의 시부분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 박목월(朴木月) 등을 등단시켰다.

1940년에는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을 냈고, 문장 22호 특집으로 '진달래' 등 10여 편의 시
가 실리기도 했다. 1944년에는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현 부천시 소사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1945년 휘문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이대) 교수가 되어 한국어
와 라틴어를 강의했다.

1946년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고,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다. 이는 정지
용 시집과 백록담 등 기존의 낸 시집 가운데 25편을 가려 낸 것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
과위원장에 위촉되었으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7년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이대 교수로 복귀했으며,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출강을 했다. 그리도 이듬해 이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碌磻洞)에서 서예를 하며
지냈는데, 박문출판사에서 문학독본을 냈으며, 1949년 시문과 수필 55편이 수록된 산문을 출간
했다.

그리고 비운의 1950년이 밝아오자 그해 2월 '문예'에 '곡마단','사사조오수(四四調五首)'를 발
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문단 발표였다. 4달 뒤, 6.25가 터지자 미처 피신을 가지 못했
는데, 북한군에 잡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고 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
로 이감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폭사 당한 것으로 여겨
지며, 월북을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가 사라지자 이승만 정권은 그가 월북한 것이라 단정짓고, 그의 작품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982년 장남 정구관을 비롯하여 48명의 문학인과 각계 인사들이 정지용의 문학을 통제에서 풀
어줄 것을 요구하며 정지용 문학 회복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88년 3월 31일 통제에서 해금
되었으며, 그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 제1회 지용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고, 그의 문학세계와 작품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옥천군
청에서도 그의 생가터를 매입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성지로 꾸몄다.


▲  문학관 로비에 마련된 정지용 인형

정지용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등장한다. 특히 '향수'가
약방의 감초 같이 자주 나오는데, 그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현실은 다 까먹음)
학창 시절에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시와 시조, 시험을 보면 시 부분은 많이도 틀렸고 외우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었고, 그런 시를 쓴 시인들을
무척 원망했었지~~ 허나 이제는 시 때문에 머리 아픈 시험을 봐야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나
이를 먹어감에 따라 시의 내용을 저절로 음미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향수도, 윤동주(尹東柱)의
서시도 보면 볼 수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시임이 틀림 없다.

정지용은 50평생 동안 1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바다와 산, 신앙(천주교), 고향이 중심 소재
였다. 향수 또한 고향을 표현한 시로 노래나 가곡으로도 나와있다. 1988년 통제에서 풀린 이후
왜정(倭政) 시절에 활약한 대표적인 시인이자 천재 시인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옥천을
빛낸 위인의 하나이자, 옥천의 든든한 후광(後光)이자 제일의 관광지로 또한 문학의 성지로 점
차 몸값을 높이고 있다.

문학전시관을 1바퀴 둘러보고 나오니 문학관 해설사가 구경 잘했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렇다고
답을 하면서 여러 질문을 넌지시 던졌는데, 거기서 생가 복원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과 사립문
앞에 누운 청석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점심을 먹고자 부근에 30여 년 묵었다는 짜장면집(문정식당)에서 간단
하게 간짜장을 먹었다. (자장면이 유명하다고 함) 별다른 맛은 없으나 밀가루 음식으로 덥수룩
하게 배를 채우고 구읍에 널린 명소들을 마저 둘러보았다.

※ 정지용 생가(정지용 문학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① 옥천까지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조치원역, 김천역, 구미역, 동대구역, 밀양역, 부산역,
  마산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옥천역 하차 (옥천역 정차 열차를 타야 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옥천, 영동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옥천행 직행버스가 1일 20회, 청주시외터미널에서 1일 17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 앞, 대전역(중앙시장), 판암역(대전 1호선, 1번 출구)에서 60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종합상가 하차
② 현지교통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직진하면 우체국 너머로 4거리가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면 옥천버스종점(군내버스터미널)이 있는데, 거기서 보은, 안남, 안내, 장계, 청산 방면 군
  내버스를 타고 구읍4거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3~4분 (석탄리나 수북리 방면 군내버스를 탔을
  경우 구읍3거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계속 직진하면 구읍이다. 도보 35~40분 거리
* 옥천시외터미널에서 갈 경우에는 구읍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 택시를 이용하면 5~7분 정도면
  가며, 걸어갈 경우는 대전 방면으로 걸으면 삼양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
  들어 도보 30분
* 옥천종합상가(607번 정류장)에서 옥천군청 정문을 경유하여 도보 30분, 또는 택시 이용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문학관 앞에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옥천나들목을 나와서 향수공원4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3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4거리에서 우회전 → 정지용 생가

★ 정지용 생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매년 5월 중순에는 정지용생가와 상계체육공원에서 정지용을 추모하는 지용제가 열린다. 지
  용문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행사와 공연, 공예품 전시, 음악회, 야시장 등이 열리며,
  행사기간은 보통 3일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39 (향수길 56 ☎ 043-730-3408)
* 정지용문학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옥천 제일의 명당이자 고래등 기와집, 박정희 전대통령의 처가집이자
현 정권의 임시 성지(聖地)로 거듭난 육영수(陸英修)생가 -
충북 지방기념물 123호

▲  솟을대문과 대문채

옥천 구읍 북쪽 끝에는 정지용생가(문학관)과 더불어 구읍의 대들보 명소인 육영수생가 기와집
이 있다. 교동리에 있다고 하여 '교동집'이라 불리기도 하고, 3정승이 살았다고 하여 '3정승집
'이란 체통 있는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이 고색의 때가 넘치는 묵은 기와집이었
다면 그 가치가 정말 남달랐을텐데, 아쉽게도 2011년 봄에 옛터에 복원된 새집이다.

교동집은 17세기에 정승을 지낸 김씨(이름은 모르겠음)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송씨에게 집
이 넘어갔는데, 그 집안에서 정승이 나왔으며, 다시 민씨에게 넘어가 거기서도 정승이 나왔다.
그런 연유로 3정승집이란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옛 사람들이 신봉하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르면 이 집터가 명당(明堂) 중의 상급이라고 하
니, 땅의 기운을 제대로 받은 모양이다. 3정승에 대통령 부인까지 이 자리에서 나왔으니 말이
다. 허나 이곳에 살던 집안들이 대대로 살지 못하고 다른 데로 가버리거나 끝이 좋지 못한 걸
보면 이 자리가 끝은 영 별로인 모양이다.

1918년 육종관(陸鍾寬, 1893~1965)이 민정승의 후손인 민영기에게서 구입하면서 육씨(陸氏) 일
가로 주인이 바뀐다.
육종관은 대지주(大地主) 육용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금수저로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물
려받았다. 친일 대지주로 악명을 떨치면서 지역 소작농을 달달볶아 재산을 크게 불렸으며, 돈
이 너무 썩어나자 씀씀이도 엄청나 아내인 이경령(李慶齡) 외에 무려 18명의 첩을 두었다. (왜
인 첩도 있었고, 서울에도 첩을 두었음) 아내에게는 육영수를 비롯한 1남 3녀를 두었고, 나머
지 첩에게서 18명을 두어 총 12남 10녀, 무려 22명의 자식을 거느렸다.


▲  육영수 일가의 사진
사진 왼쪽 구석에 아들을 안은 이가 육종관이며, 가운데 자리한 할머니의
왼쪽(왼손 쪽)에 있는 꼬마가 육영수이다. (틀릴 수도 있음)


1925년 안채에서 육영수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으며, 1969년 생가를 전면 뜯어고치면서 조
선 후기 한옥 양식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 겉모습을 그냥 두고 내부만 손질했으면 좋으련만 그
것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후 가족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면서 집은 무늬만 남게 되었고,
1979년 이후 상속 분쟁으로 인해 도깨비집 수준으로 망가진 것을 1999년에 다 밀어버리면서 그
장대했던 고래등 집은 주춧돌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집터만 남았을 당시의 사진을 보니 터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어지러웠다. 철거 이후에도 관리
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 9월, 옥천군청에서 구읍을 살려 관광지로 키우려는
목적으로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
하여 2001년 3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생가 복원프로젝트에에는 육영수의 회고록이 크게 도움
이 되었으며, 2002년 생가터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업비 37.5억원을
쏟아부어 2011년 5월 11일 복원을 마쳤다.

복원된 생가는 99칸 기와집으로 13동의 건물을 갖춘 대저택이다. 후원과 과수원까지 합치면 무
려 26,400㎡의 면적으로 그중 집은 10,000㎡에 이른다.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비롯하
여 안채와 사랑채, 위채, 아래채, 연당사랑, 정자 등 주인 일가의 생활공간과 아래대문채, 중
문채 등 하인들의 거주 공간. 그리고 연자방아, 뒤주, 곳간채, 아래채 창고, 대문 등의 부속
건물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  솟을대문

▲  안채

육영수의 회고에 따르면 대문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마방(馬房)이 있고, 대문과 마
주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사랑채 왼쪽에 건너채가 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집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
로 돌면 별당, 후원에는 사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오른쪽에는 뒤채가 있었으며, 바
깥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
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부엌 등이 있었다.
안채의 안방은 웃방과 아랫방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위의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영이 거처하였
고, 안방 아랫방에는 작은 아씨로 불리던 육영수 여사가 거처했다. 안방 뒤쪽으로 골방이 있고,
골방을 건너가면 침방이 웃방과 안방으로 나눠져 있는데, 육영수의 동생 육예수가 안채 중에서
도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침방 안방에 살았다고 한다.
사랑채는 마치 관아(官衙)의 동헌(東軒)처럼 꾸몄다고 하는데, 대청마루 옆에는 심부름꾼의 방
이 있었고, 전화기를 둔 전화방과 사진현상용 암실(暗室)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사랑과 안
채를 잇는 마루 복도는 단아한 지붕을 얹어 정취를 더했다고 한다. 연당(蓮塘)이란 연못은 여
름이 되면 연꽃으로 덮여 장관을 이루었고, 겨울에는 무려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니 정말로 없
는 것이 없는 조그만 궁궐이었다.

2011년 생가가 복원되면서 정지용 생가와 더불어 구읍의 주요 명소로 자리매김했는데, 특히 박
정희 내외에 대한 향수에 젖은 중장년층(특히 이웃 경상도)이 많이 온다.
육영수는 내가 태어나기 4년 전까지 살았고, 박정희는 내가 태어난 이듬해까지 살던 터라 나와
는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다. 그들을 좋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많고,
이 2개의 상반된 여론이 지금도 티격태격하고 있다. 나는 현대사에 관심도 없고, 박정희 내외
도 관심 밖인지라 오로지 생가 한옥에만 열중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본글에 적는다면 자칫
이상한 댓글을 주렁주렁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연못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연당 사랑채

▲  사랑채 - 박정희가 방문했을 때는
임시 집무실로도 쓰였다.

그럼 육영수(1925~1974)는 누구일까?
육영수는 1925년 11월 29일 바로 이 고래등 기와집에서 육종관의 2녀로 태어났다. 죽향국민학
교(죽향초교)를 나와 서울로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했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옥천여중
교사로 일하다가 6.25가 터지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머물던 중, 당시 육군중령이던 박정희와 가까워져 1950년 12월 혼인을 했는데, 아버지
의 반대가 아주 극심했다. 하여 딸의 혼인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에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5년 병석에 누워 골로 가기 직전. 병문안을 온 사
위에게 자신이 부덕해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3년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며,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영부인(令夫
人)이 되었다.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는 한편 양로원과 고아원을 비롯한 영세/취약계층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사회복지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민생 현장과 재해/재
난 현장을 수시로 찾아가 살피면서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야당/재야 인사들의 여
론에도 귀를 기울여 필요한 것은 남편에게 건의하는 등, 청와대 안의 야당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  박정희와 육영수의 혼인 사진 (1950년 12월)

드디어 그의 마지막 날인 1974년 광복절, 그날 광복절 행사는 서울국립극장(장충동)에서 열렸
다. 청와대를 나서기 전,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오늘은 왠지 행사장에 가고 싶지 않네
요'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는 무슨 소리냐며 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달랬다고 한다. 그 말
에 만약 부인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박정희 자신이 피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재
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에 육영수는 힘없이 쓰러지고, 행사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육영수가 피살되자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하며, 애도 물결이 청와대를 뒤덮었다.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10시 중앙청(中央廳, 경복궁 남쪽)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날 오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육영수는 거론하기 조차 껄끄러운 1남 2녀를 두었으며, 당시 매우 미인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의 아내임에도 거만함이 별로 없었고, 부드럽게 남을 배려했으며 유머가 풍부해 주변을 늘 웃
음바다로 만들었다. 또한 국내외 안팎으로 동분서주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영부인이다.(이승만
의 아주 젊은 부인은 제외, 한 것이 없으니)

▲  땅에 누운 석빙고(石氷庫) <오른쪽은
위채로 넘어가는 문> 음식과 식재료,
술을 보관하던 공간이다.

▲  위채 - 연당 사랑채 뒤쪽에 독립적으로
자리한 공간으로 일반적인 사랑채나
안채와 비슷한 곳이다.


육영수와 관련된 일화는 참 많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1966년 2월 박정희 내외는 동남아 태국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의 두목인 푸미폰 왕은 만찬회를
열었는데, 그때 푸미폰은 육영수와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푸 - 영부인께서는 평소 자녀에 대해 어떤 교육관을 갖고 계시나요?
- 쓸모있고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우월감이나 의타
심을 갖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정서적인 면과 도의적인 면을 강조하는 편입니다.(근데 그의 자
식들은 왜 한결같이 삐뚤게 놀까??)
- 대통령께서는 자녀 교육에 다른 의견을 안 가지셨나요?
- 저는 엄하게 가르치려 하는데 대통령은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 순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대통령이 저보다 인기가 많아요. 근데 투표권도 없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어봐야 뭐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푸미폰은 근엄한 표정을 포기하고 자빠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고 한다. 평소 근엄
함이 쩔어 별로 웃지 않았는데, 그의 요란한 빵터짐에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고 하며, 만
찬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  연당(蓮塘)사랑채와 연못
연당은 연꽃이 있는 연못을 뜻한다.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이 대단했다고 하며,
희귀한 나무와 꽃이 주변에 가득했다. 또한 겨울에는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육영수 가족이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벌써 스케이트라...?

▲  위채 뒤쪽에 펼쳐진 후원
후원은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예전에는 나무와 꽃, 과수(果樹)들이 가득했다.


육영수 생가는 현재 집만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생활의 향기와 사람의 냄새가 나
질 않는다. 그냥 육영수의 생가라는 의미에서만 머물고 있으며, 이렇게 빈 집으로 놀려두는 것
보다는 전통문화 체험 및 한옥 민박이나 요즘 유행하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2011년에 복원된 것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래된 건축물처럼 제약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 집과 방이 모두 새것이니 민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시설만 갖추면 휼륭한
한옥 체험의 장의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  대나무 소리가 귀를 들쑤시는 후원 산책로

▲  높이 들어앉은 사당(祠堂)

▲  쌀을 보관하던 2개의 뒤주

▲  육영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안채 뒤쪽 방


▲  후원 높은 곳에 자리한 초가 정자
정자 주변은 사과, 밤, 배, 포도 등을 기르던 과수원이다. 육영수는 어린 시절 여기서
알밤을 주었다고 하며, 집에 과수원까지 있었다니, 그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  현대식 차고(車庫)

육영수 생가의 아주 독특한 요소이자 그의 일가가 매우 부자였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존재
가 바로 차고이다. 차고는 차량을 주차하던 공간으로 육종관은 자동차에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
아 왜정 시절부터 외국산 자동차를 소유했다. 이 차고는 4대까지 주차가 가능했으며 보통 2~3
대를 굴렸다. 게다가 그는 손기술도 뛰어나 차량도 직접 수리를 했으며, 라디오도 직접 수리하
고 주파수를 조정하여 다양한 라디오 방송도 들었다. 그 시절(20세기 초/중반) 일반 사람들은
어림도 없던 것을 넘치도록 소유하고 즐겼던 것이다.

★ 육영수 생가터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정지용 생가에서 동쪽(향수길)으로 도보 9분
* 옥천버스 종점에서 금암리, 수북리, 석탄리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교동에서 하차, 도보 2분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313 (향수길 119, ☎ 043-730-3417)


 

♠  구읍에서 만난 여러 명소들

▲  37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정지용생가와 육영수 생가터 중간)

옛 옥천고을에 선선한 그늘을 드리웠던 정자나무로 나이가 무려 370여 년이라고 한다. 아무리
우걱우걱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자라난 그는 키가 16m
, 허리둘레 5.2m에 이르며, 그의 밑둥에는 마을의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금줄을 쳐놓아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


▲  2열로 배열된 옛 비석들
옛 옥천 고을 사또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허나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또는 과연 몇이나 될까?

▲  죽향초교 구교사(舊校舍) - 등록문화재 57호

옥천 구읍 남쪽에는 죽향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이 학교는 1909년 10월 사립 창명학교(彰明
學校)로 문을 연 옥천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1910년 9월 공립으로 개편되어 옥천공립
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이후 1938년 4월 옥천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9월에는 옥천죽향
공립국민학교, 1945년 이후 죽향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46년 7월 삼양국교(삼양초교)가 분리되었고, 1966년에는 군동국교(군동초교)가 분리되어 몸
집을 줄였으며, 1978년 12월 본관 교사를 신축하고 1981년 병설유치원을 두었다. 그리고 1996
년 죽향초교로 이름을 갈아 지금에 이른다. 정지용과 육영수도 이곳을 나왔으며, 50대 이상 옥
천읍내 사람들 상당수가 이 학교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향초교 후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처럼 보이는 1층짜리 붉은색 목조 건물이 눈길을 부여잡
는데, 그 건물이 바로 죽향초교의 옛 교사로 1936년에 지어졌다.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3개의 교실을 지녔으며, 벽체를 가로로 댄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한 편복도형 건물로 초기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본관 교사가 신축된 이후, 방과후 활동 공간으로 쓰이다가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삼으면
서 옥천 지역 교육사를 담은 옥천교육역사관으로 변신했다.

* 죽향초교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83 (향수1길 26, ☎ 043-732-0054)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30분
* 옥천버스종점에서 수북(석탄), 안남, 보은, 청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죽향초교 하차
* 옥천교육역사관은 사전에 전화로 예약을 해야 된다. (관람 당일 이용허가 신청서 제출)


▲  죽향리사지 3층석탑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1호

죽향초교 교정 내에 특이하게 생긴 3층석탑이 서 있다. 멋드러진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아 자리
한 이 탑은 죽향리148-1번지 탑선골에 깃든 이름 모를 절터에 있던 것으로 왜정 때 죽향초교로
가져왔다. 탑이 있던 탑선골에는 현재 태고종(太古宗) 사찰인 탑산사가 있는데, 절 주변에서는
고려시대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발굴조사가 절실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마감한 형태로 3층에는 문비
로 보이는 네모난 창이 있다.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한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층마다 모습
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으나 뒤쪽이 좀 떨어진 상태이며, 탑신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하얀 편으
로 근래에 때를 민 듯 보인다.
탑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지
금은 그저 교정의 장식물로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함께 하며 나이를 잊고 있을 뿐이다.


▲  옥천성당(沃川聖堂) - 등록문화재 7호

구읍은 아니지만 신읍 북부인 옥천군청 남쪽 언덕에 푸른 피부를 지닌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
올 것이다. 특이하게도 엷은 파랑색을 띄고 있어 조금은 고색의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성당은 1945년 무렵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의 페티프렌(R, Petipren) 신부가 세운 1층짜리
시멘트 벽돌 건물로 지붕은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3각형 지붕틀을 하고 있다. 1966년 종탑
부(鐘塔部)의 부식된 함석마감을 기와로 대체하면서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尖塔)이 철거되었
고, 1991년 10~11월에 증축공사를 벌여 성당 뒷쪽을 트랜셉트<transept, 익랑(翼)>와 제단앱
스<apse, 후진()>를 증축해 직사각형 형식에서 십자가형으로 평면이 바뀌었다. 이후 보수
공사를 벌여 기와지붕 마감재를 함석 마감재로 갈았다.
1940~50년대 현대식 성당 건축물로 이후 성당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전하며, 충북의
유일한 1940년대 성당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언덕을 올라서 가까이서 성당을 대하니 밑에서
본 것만큼이나 웅장해 보인다. 성당 내부는 예
배를 보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평상시에도 입
장이 가능하다. (정면 현관이 잠겨 있으면 성
당 옆구리 문을 이용하면 됨)

정지용생가에서 시작된 옥천 나들이는 옥천성
당에서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구읍에서
둘러본 명소가 더 있으나 내용 분량상 쿨하게
생략했다.

▲  성당 내부

* 옥천성당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중앙로 91 ☎ 043-731-9981)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15분 거리
* 옥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 15분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6년 6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