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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3.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4. 2016.05.28 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부암동 늦가을 산책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홍지문과 탕춘대성

▲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세검정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세검정

 



 

종로구 북부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포
근히 감싸인 산골 분지이다. 전원(田園) 분위기가 진하여 여기가 과연 서울 한복판이 맞
는지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늙은 경승지(세검정, 홍지문. 백
석동천 등)는 물론 미술관 등의 문화공간(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등)도 풍
부하여 나들이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한참 전인 20대의 한복판에 부암동과 백석동천(백사실계곡)에 퐁
당퐁당 빠져버렸고, 이후 1년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늦가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던 11월 한복판에
어느 볕 좋은 날, 늦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자연산 망막에 하나라도 더 담고자 간
만에 부암동을 찾았다. 이때가 지나면 가을 단풍은 90% 이상 지게 된다. 하여 후회가 없
도록 열심히 늦가을의 바퀴자국을 남겨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늦가을 풍경은 4계절 가운데 으뜸이다.



 

♠  서인 패거리들이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도성 밖
경승지이자 서울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던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동3거리에서 상명대,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큰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弘濟
川)을 바라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나온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
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前
身)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
)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
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
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
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
생긴 바위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
러다보니 도성 밖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와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구한말(舊韓末)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나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
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
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
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
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
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
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
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
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
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
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
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
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  세검정 동쪽 산책로(세검정성당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 너머로 상명대와 탕춘대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세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한옥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세검정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너편으
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집이 석파정별당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馨, 1903~1981)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6.25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
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냈으
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글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전의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닌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온 것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동(玉仁洞) 집을 1958년에 매입하여 가져왔다. 이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이자 바로 근처에 자리한 석파정(石坡亭)에서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과 덕수궁(경운궁)에서도 돌담과 한옥을 사들였으니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았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해방되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
소로 성장하여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나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답사와 출사를 한답시고 별당 등 건물 내부로 마구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석파랑 본채 북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서로 소유자가 달라서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
이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은 석파랑 소유>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석파
랑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 옆구리에는 홍지동 산신당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당
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이곳에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진쟁이와 답사객들에게 석파정 별당과 뜨락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다. 허나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던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
양한 석물, 꽃,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랑 본채 뒤쪽에 숨겨진 붉은 장독대들
저들 속살에는 무엇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한번 들춰보고 싶다.
한정식당이니 고추장이나 김치, 간장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  석파랑 뒤쪽에 자리한 홍지동(弘智洞) 산신당

석파랑 뒤쪽이자 스톤힐 옆에는 붉은 피부 벽에 푸른 기와를 지닌 조그만 집이 있다. 얼핏보
면 창고처럼 보여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 위에 걸린 '산신당' 현판이
보여주듯 홍지동의 안녕을 오랫동안 지켜주던 산신당이다.

세검정 주변 동네(신영동, 홍지동, 부암동)에는 4개의 산신당이 전하고 있다. 그중 석파랑 뒤
쪽 산신당은 홍지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8월 1일 동네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나머지 산신당도 같은 날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당집 안에는 산신 부
부가 그려진 그림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로지 제사날과 일부 날(청소하는 날 정도)에만 잠깐
씩 열어두고 있어 평소에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산신당 주변은 나무와 풀만 있었으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랑이 산신당 바로 옆에 스
톤힐을 지으면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한때는 동네 성지(聖地)나 다름 없던 산신당의 존
재감이 크게 하락한 지금의 세태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허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
다고 스톤힐 덕분에 계단이 닦이면서 접근성 하나는 좋아졌다.

* 석파정별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2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
  2500)


▲  세월 속으로 사라진 부침바위를 추억하는 표석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한때 북새통을 이루
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 땅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
시화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으
니 실로 안따깝기 그지없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
(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
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 신완(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
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
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
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
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
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
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
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의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
에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그래서 홍
지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
대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  홍지문의 당당한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탕춘대능
선에 있는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
데, 200년 이상 별탈 없이 살아왔으나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
하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겨우 남아오다가 1977년
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향 성곽 300m
정도가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
고 문 남쪽으로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잠깐 단절되어 있으나 그 길을 넘으면 성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변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
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의 뒷모습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  오간대수문 북쪽 끝 홍예문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두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근래 홍제천 산책로
가 닦이면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보니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
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를 가면 홍제
천변 커다란 바위에 깃들여진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普渡
閣 白佛)'로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
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인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작은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
운 현장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자리
한다.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늙은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
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한 고려 후기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
(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
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고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완전히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보도교에서 바라본 보도각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보도교 끝에 자리한 맞배지붕 일주문


백불의 높이는 5m 정도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동전은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
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앞에는 나무데크로 지어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
어지면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칠했고,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바뀌었음) 오른손에 걸린 팔
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
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
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 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다소
맞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
을 접수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
하며 소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

백불 동쪽에는 그를 후광으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히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남해 보리
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부심
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을 뜻하는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
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 일대에 있었음)가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 이성계의 도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
(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인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닦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붙어있고 뒤쪽(북쪽)과 서쪽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옥천암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백불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인연을 지었던 곳이고 경내는 백불 외에는 딱히 나를 흥분시킬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끝으로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늦가을 만행(漫行)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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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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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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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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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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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로 나오
   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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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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