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03.01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2.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3. 2018.04.02 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4. 2014.07.11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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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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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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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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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 경북 예천 나들이 '
(개심사지5층석탑, 초간정 일대)

▲  예천 초간정


 

 

겨울 제국(帝國)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 지배의 반석을 다지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짙게 감돌던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예
천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용궁(龍宮)에 두 발을 내렸다. 거기서
20분 정도를 기다려 안동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예천터미널 다음 정류장인 남본
교차로에서 하차했다. (예천터미널에서 남본교차로까지 약 1.2km, 거기서 환승하거나 걷
기도 애매하여 용궁에서 갈아탔음)

남본교차로 북서쪽에 안면이 2번 정도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길을 일부러 더디게 왔음에도 일찍 도착하여 30분 정도를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니 남쪽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랜만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척에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으로 다가섰다.
(그때 시간 대략 10시)


 

♣  너무나 곱게 늙은 단아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남본교차로 서북쪽 벌판 한복판에 맵시가 도드라진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초에 창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개심사(開心寺)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基壇)에는 아주 감
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記)>이 새겨져 있어 그의 신상명세를 조금이나마 알려
준다. 다만 그 글씨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닳고 깨져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석탑기에 따르면 그는 1010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려 3대 제왕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이 거란(요나라)과의 전쟁에 대비코자 조직한 광군
(光軍)에 대한 내용이 짧게 깃들여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개심사터와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길

고려 초에 세워진 석탑답게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랫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지신
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존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는데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佛法) 대신 이 탑을 지킨다. 개심사는 이미 오래전에 녹아 없
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 덕에 1,000년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너무 온전하고 생동
감 있게 살아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탑이 심어진 시기에
고려 군사의 모습으로 불상의 얼굴도 그렇고 의복(衣服)이나 보살상,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
습은 왕족이나 귀족, 승려, 여인들을 모델로 많이 삼았다. 그러니 무인(武人) 계통의 팔부중
상은 당시 늠름했던 고려 군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나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습과 의복 등은 딱히 정형화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  12지신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기단부 ▼
제일 밑에 3인 1조로 자리한 존재가 12지신상, 윗부분에 무기를 들고
2인 1조로 지키고 선 존재가 팔부중상이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탑의 특징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
를 딸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과 개심사의 정체를 흔쾌히 밝혀줄 존재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어 저 문고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안정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으며 예천
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되는 이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또한 2011년 가을에는 탑 주변 논을
갈아엎고 주변 정비 및 개심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 생긴 탑을 보니 절의 모습 또한 대단했을 듯 싶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것
이 없다. 다만 절터의 위치가 한천(漢川) 가에 있어 아주 오래 전에 홍수로 망한 듯 싶다. 어
째서 산에 세우지 않고 평지인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예천에서 안동(安
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목이고, 안동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려면 이곳
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 예천 토박이 세력에서 그 길목의 절을 세워 지역간의
교역과 길손들의 숙식 제공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절이 너무 일찍 사라져버
려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면 흠이다.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이는데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탑의 나이를 의심케 만든다.

▲ 석탑기가 새겨진 1층 탑신 피부
심술쟁이 자연이 석탑의 피부를 마구 건드리면서 글씨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북부정류장과 동대구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교차로(
  보통 삼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이 보인다. (대구북부에서 1일 6회, 동대구에서
  1일 7회 운행)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거리(남본교차로)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
  차
* 예천터미널과 예천역(경북선)에서 영주 방면 4차선 길(충효로)을 따라 한천을 건너 17분 정
  도 걸으면 남본교차로이다.
* 승용차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좌회전
   → 남산교차로에서 우회전 → 남본교차로에서 직진 → 개심사지5층석탑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 이름 없는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신라 후기 석불과 석탑
예천 동본리(東本里) 3층석탑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  동본리3층석탑 - 보물 426호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427호

개심사지5층석탑을 둘러보고 예천읍의 젖줄인 한천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나란히 우리를 마중한다.
이렇게 잘생긴 석탑과 석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절과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없고, 절터의 흔적도 딱히 나오지를 않아 현재로써는 그 절의 정
체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절터의 흔적을 제대로 캐내려면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주변을 싹
뒤집어야 그나마 좀 나올 것이다. 다만 이곳이 한천변인지라 홍수의 흥분으로 강제로 문을 닫
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절의 이름 석 자도 세상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내려
간 모양이다.

절이 읍내에 있고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가 신라 후기라고 하니 예천 토박이 세력의 지원으
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세력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오
래전의 일이라 속시원한 정답은 없다. 석불이 흔쾌히 입만 열어준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너무
머나먼 시기의 일이라 기억도 흐릿할 것이며. 집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입 밖에 드러내는 것
조차 싫어할 것이다.

절이 사라진 이후,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들이 차곡차곡 주변에 쌓여갔으며, 그 흙에 논과 밭
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탑과 석불은 마을 사람들이 신
앙 대상으로 삼아 정성으로 살펴주면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을 모르니
석탑과 석불은 속 편하게 동네 이름을 따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살
아가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본리3층석탑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의 뒷모습

우선 동본리3층석탑을 살펴보면 땅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기단을 두었는데 그
밑 부분에 가운데돌을 두어 기단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윗층 기단에는 무슨 존재를 새겼는
데 이는 탑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그런데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이다. 1층이 윗층들보다 피부가 하얀데 이는 후대에 손질을 가한 듯 싶
으며,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1층은 그 비율을 깨고
조금은 육중해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고
색의 때가 적어 1층 탑신을 손질할 때 새로 끼워놓은 듯 싶다.
탑신 지붕돌 밑면의 수가 줄어들고,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으로 신라 후기 탑으로 평가받고 있
으며, 개심사지5층석탑만큼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양호한 편이다.

3층석탑과 나란히 한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키 3.46m의 석불이다. 머리를 보면
꼽슬인 나발(螺髮)로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주렁주렁 달아놨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肉髻)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후덕함이 묻어난 둥근 넓쩍한 얼굴에는 좌우로 길다란 눈이 지
그시 감겨져 있는데 왼쪽 눈이 오른쪽에 비해 너무 희미하고 존재감이 떨어져 마치 애꾸눈을
보는 듯 하다. 코는 끝부분이 두툼하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은 옛날의
일을 감추고 싶은지 다물어져 있다. 귀는 중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의 몸통을 보면 얼굴과 상반신의 비율이 너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얼굴을 크
게 만들어 신체비례가 많이 떨어진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이 꽤 두꺼우며, 어깨가 좁
고 팔이 짧아 다소 기죽은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옷자락을 붙들고 있고, 왼팔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의(通肩衣)
로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것 같으며 이런 옷주름 표현은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 예천 동본리3층석탑/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시외터미널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동본리정류
  장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보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그 3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2분 가면 동본교란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1분 정도
  가면 왼쪽에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다.
* 개심사지5층석탑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남본교차로에서 북쪽(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예천교
  를 건너 오른쪽 한천 둑방길로 12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3층석탑 앞에 조그만 공터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 직진 → 동본
   교를 건너서 우회전 → 바로 보이는 왼쪽 길로 내려가면 동본리3층석탑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대부의 별서(別墅)이자 예천 제일의 경승지
초간정(草澗亭)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143호

예천읍에서 용문사(龍門寺)로 가는 길목인 죽림리에 초간정이라 불리는 경승지가 있다. 간장
의 하나인 초간장과 겨우 받침 하나 사이로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여 나도 모르게 초간장이라
불리게 되는 이곳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예천 출신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 별서(別墅, 별장)이다.

권문해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878호)'을 쓴 인물로 조
선과 요동(遼東), 만주, 명나라에 전해오는 수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옛 조선부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절(조선 명종 시절)까지 이 땅의 역사와 지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집대성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책의 이름인 대동(大東)은 '동방대국(東
方大國)'으로 조선을 뜻하며,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은 초간이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던 1589년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3벌을 정
서해두었다. 허나 1벌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다른 1벌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개념
없게도 실수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겨우 1벌만 남아 초간의 외아들인 권별(權鼈, 1589~
1671)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정서하여 그 서원에 보관했으며, 1812년 간행
을 시작해 1836년 완료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복판(腹板)을 했다.

초간은 1582년 집 부근인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서 초간정이라 하였다. 그는 계
곡이 크게 굽이쳐 흘러 기암절벽과 소(沼)를 이루는 지금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바위 위에
돌을 쌓고 터를 다져 조촐하고 정자를 지었다. 지금은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이는 1870년에 다
시 지은 거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여기서 휴식과 독서를 하였고 벗들과 어울려 곡차(穀茶) 1잔의 여유를 즐겼으며 별서 주
변에 소나무를 잔득 심어 이곳의 운치를 한껏 부풀렸다.
허나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왜군에 의해 부질없이 파괴되었으며, 161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636년 불에 타 없어졌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불에 탔다고 나온다. 허나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군은 경기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전란이 아닌 불을 잘못
취급하거나 우연히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봐야 된다. 이후 오랫동안 터만 전해오다가 1870년 후
손들이 초간의 서적을 보관하고자 조그만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담장과 부속건물을 갖추니 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 되겠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4
칸은 대청마루로 삼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끔 난간을 둘렀다. (그래봐야 난간의 높이가 낮음
) 또한 1636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초간정 현판 또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느 날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피어오르자 종손(宗孫)이 이게 뭔가 싶어 그곳을 파보았더니 글쎄 현판
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정자 앞 늪에서 현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현판이 오색무지개를 발
산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지만 전설 내용이 다소 불교틱하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조촐하게 숲을 이루고 기암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소를 이루어 절경을
자아낸 예천 제일의 경승지로 용문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여행꾼과 답사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다행히 초간정은 일반에 개방을 하고 있어 신발을 벗고 정자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서쪽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기와집(초간정 부속 건물)은 민박으로 1박
머물 수 있다. 또한 초간정 주위로 심어진 나무들은 '초간정 원림(園林)'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1호로 지정되었다.


▲  초간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초간정과 소나무들
소나무가 초간정을 향해 거의 30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초간에
대한 일편단심의 표현일까?

▲ 바위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둥지를 튼 초간정의 모습
자연에 거스르며 무식하게 크기만 한 현대식 별장보다는 소박하지만 저런 전통 기와집도
나름 정감이 많이 든다. 나도 나중에 경관이 적당한 곳에 조촐하게 전통식 정자나
한옥을 짓고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과연 뜻대로 될련지? ㅠㅠ

▲  초간정 옆에서 90도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
초간이 바로 저 풍경에 반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높이는 낮지만 나름대로
기암절벽을 이루며 소소하게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  초간정 상류 개울
초간정 원림의 서쪽 끝으로 소나무들이 개울을 향해 한결같이 30도로 구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개울 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  초간정 옆구리에 자리한 부속 기와집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그 곁에 부속 건물을 지어 초간의 서적
보관 및 정자 관리인의 숙소로 삼았는데, 현재는 민박으로 쓰이고 있다.

▲  초간정 부속 기와집 내부

▲  초간정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이 초간정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문으로 문이 좁고 낮다. 왠만한 성인 남성은 고개를 숙이
고 들어가야 되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문이 꽉 찬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키와 덩치가 반영된
탓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추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짊어진 초간정
좌측에 마련된 섬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 오르면 된다. 단 섬돌과
대청마루까지는 높이가 좀 있으므로 주의요망

▲  초간정에 걸린 초간정사(草澗精舍) 중수기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초간정사 중수기는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세웠을 때 작성된 것으로 초간정사는 초간정의 예전 이름이다.

▲  초간정 내부 대청마루
겉으로 보면 좀 부실해보여도 속은 현대식 건물 이상으로 매우 견실하다.

▲  초간정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편

초간정은 동쪽을 향한 건물로 정자를 받치는 기둥 중의 도끼 자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자
국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판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비스므리한 일이 일
어났던 현장이라고 하며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 인근에 살던 선비가 과거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간을 100바퀴 돌면 과거 급제한
다는 전설을 믿고 난간을 돌았다. 허나 100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어지럼증과 체력 고갈로 그
만 쓰러지면서 정자 밑에 있는 소(못)에 떨어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뚜껑이 폭발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을 했다고 한다. 그 도끼자국이 바로 그때 찍힌 자국이라는 것이다.
선비가 빠져 죽었다는 소는 옛날에는 매우 깊어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
다. 허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날의 명성은 많이 죽은 상태이다.

이런 경승지에 전설이 하나만 있으면 초간정도 초간 선생도 매우 섭할 것이다. 그래서 옵션으
로 전설이 더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864년경, 초간정을 소유한 예천권씨 집안에서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
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초립동이가 나서서 99바퀴까
지 돌았으나 나머지 1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화
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설로는 옥매(玉梅)라는 예천 제일의 기생이 초간정에서 장고춤을 추다가 그
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
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곳에 왠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도끼질 자국이 있는지 참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실수로 떨어져 죽어도 그렇지 죽은 이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
인들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끼가 보기와
달리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정
자를 새로 지을 때 목수의 실수로 도끼 자국이 생긴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
고, 19세기 중/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이 극에 달한 시절에 인근 백성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흔적일 수도 있겠다.


▲  초간정 바로 밑에서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소(못)

초간정 관람시 반드시 유의해야될 점이 있다. 문이 봉해진 온돌방은 통제구역이므로 애써 들
어가서는 안되며 그걸 어기면 자칫 속세에 개방한 초간정의 문이 쾅 닫혀질 수도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난간 부분에서 장난을 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난간 너머는 바로
초간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로 정자와 개울까지는 높이가 약 6~7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낭떠
러지이다. 게다가 난간의 높이도 난쟁이 반바지를 반 접은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낮고 오래
된 탓에 조금 부실하다. 괜히 난간에 기대거나 아찔하게 장난을 치다 소로 떨어져 사고를 당
할 수 있다.
소의 깊이가 예전보다는 온순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는 소이다. 정자 위에서 소를 바라보
면 여전히 밑바닥이 보이질 않으니 깊은 것은 여전하다.


▲  초간정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
개울 주변에 대자연이 빚은 기암절벽이 심심치 않게 늘어서 초간정의 정취를
더욱 돋군다.

▲  하늘을 받치고 선 초간정 소나무
초간정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초간정의 구수한 상징이다.

▲  초간정의 새로운 명물, 구름다리
초간정 동쪽 개울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닦았다. 초간정으로 들어갈 때는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진입하고, 나올 때는 초간정 동쪽 소나무 숲을 거쳐 구름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가면 된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방향
개울이 조그만 협곡을 그리며 연주하는 물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동쪽
초간정 방향과 달리 평범한 개울로 흘러간다. 개울 양쪽에는 소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속세로 흘러가는 개울을 배웅한다.

▲  떠나기가 몹내 아쉬워 잠시 뒤돌아본 초간정

초간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
을 알게 되었다. 개울 북쪽에 신작로(용문경천로)가 생긴 것과 현대의 이기(利器)들이 들어온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옛 모습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
淡彩畵) 같은 절경을 자아내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사뿐히 앗아간다.
겉으로 보면 작고 수수해 보여 누구나 쉽게 만들겠지 싶지만 조선시대에 저 정도의 별장을 소
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즉 지배층의 전유
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큰 별장과 달리 소소한 모습에 정감이 많이 가며, 정자를 둘
러싼 풍경과 소나무 숲(초간정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드
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간정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여기서 가까운 용문사로 길을 향했다. 이후는 본글의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초간정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터미널(예천역 북쪽)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용문사, 두천, 사부리로 가는 군내버스(1
  일 7회 운행)를 타고 원류(초간정)에서 내린다.
* 승용차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우회전
→ 우계교차로에서 좌회전 → 백전3거리에서 우회전 → 용문 → 초간정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8시까지 (겨울에는 16~17시까지)
* 초간정에 딸린 기와집(초간정민박)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 관련 문의는 ☞ ☎ 054-655
  -9233
)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166 (용문경천로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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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3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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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 자연이 빚은 대작품 ~ 예천 회룡포(回龍浦) '

▲  회룡포

 


가을이 저물고 겨울 제국이 서서히 용솟음치던 11월 끝 무렵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아
침 10시에 예천읍내 남쪽에 있는 개심사지(開心寺址) 5층석탑에서 머나먼 남쪽에서 온 일행들
과 만나 개심사지5층석탑과 초간정(草澗亭). 용문사(龍門寺)를 둘러보고 회룡포입구인 용궁으
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용궁(龍宮)은 예천읍과 점촌(문경) 사이에 자리한 고을로 예전에는 독자적인 고을이었으나 지
금은 예천군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이곳은 순대국과 한우고기로 매우 유명한데 우리는
한우구이와 전골을 먹었다. 한우구이는 불판에 야들야들 구워서 상추에 쌈을 싸서 먹거나, 참
기름에 찍어서 먹는데, 입과 목구멍이 간만에 좋은 거 먹는다고 아주 흥분들을 한다. 단 조금
질긴 것이 흠, 거기에 밥이 있으면 정말 밥도둑이 따로 없을텐데, 밥은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를 않다가 전골(채소와 된장 등이 버무려진 전골)이 등장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상당수는 한우구이로 이미 배가 다져진 상태라 그들의 밥을 지원받으며 전골과 밥그릇을 말끔
히 비웠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회룡포로 이동했다. 용궁에서 회룡포는 동남쪽
으로 약 7km로 향석리에서 내성천(乃城川)에 걸린 회룡교를 건너 그 길의 끝에 이르면 회룡포
주차장인데, 여기에 수레를 세우고 다시 내성천을 건너면 그 유명한 회룡포 심장부에 발을 들
이게 된다.


▲  회룡포와 속세를 가르는 내성천, 그 위에 걸쳐진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이다.


♠  대자연이 빚은 거룩한 작품, 예천 회룡포(回龍浦) - 명승 16호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예천 굴지의 명소로 성장한 회룡포는 대자연이 장대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이다. 어떻게 저
런 작품이 나왔을까?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대자연의 거룩
한 작품 앞에 경외심이 크게 용솟음 치고,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도 싹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만들지는 못하며, 대자연의 작품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자로 이러쿵 저러쿵 표현한다는 것이 어쩌면 큰 실례일지도 모른다.

육지 속의 섬이자 벽지로 불리는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내성천이 휘감아 흐르는 길목
으로 내성천과 낙동강(落東江) 상류에서 많이 나타나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백미(白眉)
와 같은 곳이다. 각박한 속세살이를 상징하듯 구불구불 흘러가던 내성천이 회룡포에 이르러 더
욱 굴곡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려 350도나 돌아간다. 직선으로 약 100m면 갈 거리를 무려 30배
인 3km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성천도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보다
빨리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심에 육지와 회룡포를 가늘게 이어주는 부분을 열심히 쪼아대
고 있지만 그 지형이 보기와 달리 무척 단단하여 그 100m 밖에 안되는 부분을 아직까지 처리하
지 못하고 하염없이 멀리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저런 지형은 물의 성미 때문에 결국 얇은 부분이 깎여져 물길이 되고 회룡포
같은 지형은 섬이 된다고 배웠다. 허나 회룡포 형님 앞에서는 그 진리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니
자연 계열 교과서의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성천의 지름길 만들기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소리 없이 그 지형을 쪼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
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내성천도 지겨운 우회 운행을 안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이 아닌 진정한 섬이 될 것이다.

내성천이 회룡포에서 크게 휘감아 돌면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모래가 회룡포 강변에 차곡차곡
쌓여 곱고 너른 모래사장(백사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굴곡을 피려는 내성천의 필사적인 노력으
로 강 건너 산자락은 자연히 가파른 벼랑을 이루어 되었다. 또한 상류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흙
이 강변에 퇴적되어 자연히 영양가 높은 농경지를 이루었고, 옥토의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이곳
에 들어와 터전을 닦으면서 지금의 회룡포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회룡포는 분명 육지가 분명하나 속세(俗世)에서 들어가려면 무조건 내성천을 건너야 된다. 거의
4면, 350도가 강에 접해있고, 겨우 동쪽에 10도 정도로 아주 가늘게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
문이다. 정말 삽 한번만 뜨면 섬이 될 것 같은 특이한 지형 때문에 육지 속의 섬(섬마을)이 되
어버렸다.

이곳은 산과 강이 휘감아 흐르면서 거의 태극 모양의 조화를 이루며, 내성천의 하성단구(河成段
丘)와 하성도, 범람원(氾濫原)을 확인할 수 있어 침식과 퇴적지형 연구의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
다. 게다가 회룡포 건너에 병풍처럼 늘어선 비룡산(飛龍山)에는 신라 후기 사찰인 장안사(長安
寺)와 백제(百濟)가 세웠다고 전하는 원산성(圓山城), 그리고 봉수대 등이 있어 회룡포의 명승
적 가치를 더욱 북돋아준다.


▲  목가적인 풍경의 회룡포마을 (서쪽 부분)

회룡포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예전에는 내성포(乃城浦)라 불렸다. 세상에 드러내기
를 꺼려하던 예천에 숨겨진 속살이자 평범한 시골 마을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조
그만 나룻배를 타고 속세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직접 건너기도 했다. 내성천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또한 동쪽으로 가느다란 부분을 통해 개포면 쪽으로 나가기도 했으나 생활 권역이 용
궁이라 대부분 강을 건너 용궁이나 점촌으로 나갔다. 하지만 일일이 배로 건너기가 귀찮아 외나
무 다리를 놓았지만 여름만 되면 떠내려가기 급하여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예천군청에 민
원을 때려 1997년에 예천군에서 강관(鋼管)과 철발판으로 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다리가
바로 회룡포의 명물인 뿅뿅다리이다.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그게 속세에서 뿅뿅으로 와전되
었음)
또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산물이나 필수품을 실어 나를 통로가 필요했
다. 아무리 뿅뿅다리가 생겼다고 해도 다리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행용으로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가느다란 동쪽에 길을 내어 수레의 접근과 운송 편의를 도모했으며, 이 길은 개포면 중
심지로 이어진다.

이곳이 속세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얼마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예천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자 우선 회룡포 둑방에 왕벚나무를 심고, 공원과 산책로를 닦았다. 그리고 없어진 봉수대를 복
원하는 한편, 철쭉군락지를 조성해 마을을 수식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드라마 '가을동화' 촬
영지가 되면서 급속도로 뜨기 시작했고, 회룡포의 묘한 지형에 단단히 매혹된 사람들의 입소문
과 언론매체의 끝임없는 찬양으로 이제는 예천 제일의 명소이자 이 땅의 굵직한 명승지로 순식
간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말 이곳 이름 그대로 가출한 용이 되돌아 올 정도로 잘나가는
명소가 되버린 것이다.

휴일과 휴가철만 되면 많은 관광/답사객들이 몰려와 회룡포 주변은 늘 활기를 누리고, 내성천의
깨끗한 물과 은빛 모래사장으로 피서의 성지로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팜스테이(Farm
Stay) 체험장소로도 인기를 다지고 있고, 강 건너의 비룡산과 하나가 되어 회룡포권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쏘가리와 은어가 뛰어놀고 있어 그들을 잡아 매운탕을 해먹으면
그 맛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회룡포 관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비룡산(240m)에 마련된 회룡대 등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참모습이다. 그냥 회룡포마을을 둘러보고 강변을 거니는 것과 높은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어떤 일이 있어도 비룡산에 올라 이곳의 전경을 꼭
보기를 권한다.
비룡산에 오르려면 비룡산 북쪽 자락에 안긴 장안사에서 오르는 길과 회룡포마을에서 강을 건너
오르는 길이 있는데, 수레를 가져왔다면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수레를 세우고 오르는 것
이 좀 편하며, 회룡대를 비롯한 산등성이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그야
말로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회룡포마을은 뿅뿅다리부터 강변 산책까지 포함하여 짧으면 30분,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충분
하다. 마을과 경작지, 강변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강을 건너 비룡산에
올라 회룡포의 전경을 살펴보고 산에 깃든 장안사와 원산성까지 겯드리면 3~4시간 정도 걸린다.

▲  회룡포 백사장

▲  회룡포 둑방 산책로(올레길)

※ 회룡포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궁 경유 예천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 이용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1일 5회) 이용
* 김천, 구미, 상주, 영주, 안동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역과 구포역, 밀양역, 동대구역, 구미역, 김천역, 영주역에서 경북선 열차를 타고 용궁역
  하차 (1일 3회, 휴일은 4회)
* 용궁정류장(용궁역 부근)에서 회룡포를 경유하여 예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일 3회 운행한다.
  예천터미널에서 회룡포 경유 용궁으로 가는 군내버스도 1일 3회 운행 (예천발 8:10, 12:10,
  16:40)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지체말고 택시를 이용하기 바란다. <예천군내버스 시간 문
  의 예천여객 ☎ 054-654-4444>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점촌시내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②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 → 예천역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 회룡포 전망대(회룡대)와 장안사로 갈 경우에는 회룡교를 건너서 우회전한다. (좌회전하면 회
  룡포주차장과 회룡포마을) 단 길이 좁고 커브가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퀴를 굴려야 된다.

★ 회룡포 관람정보 (2014년 7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없음
* 회룡포마을에서 민박과 오토캠핑,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자세한건 회룡포마을 홈페이지 참조
* 회룡포마을은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 회룡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395외 (회룡포길 362)
* 회룡포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들을 클릭한다.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  회룡포를 굽어보는 회룡대


♠  회룡포마을 둘러보기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룡포 주차장은 수레들로 거의 만원이다. 간신히 적당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그렇게나 만나고
싶던 유명 인사를 만나러 가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회룡포로 향한다. 주차장 주변은
마을 아지매들이 그들이 재배한 갖은 채소와 과일을 비롯하여 참기름과 막걸리, 동동주 등을 진
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동동주 2잔 얻어마시고 회룡포로 가니 내성천에 걸린 뿅뿅다
리가 우리를 마중한다.

뿅뿅다리는 이름부터가 참 재밌지만 그 생김새도 옛날에 그 흔한 외나무 다리처럼 정겨운 모습
을 하고 있다. 속세와 회룡포를 이어주는 관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유일한 다리까진 아니다.
마을에서 외지로 잇는 다리는 이거 말고도 서쪽에 뿅뿅다리가 하나 더 있고, 동쪽 가느다란 부
분에 수레를 위한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회룡포의 상징인 이 다리는 앞서에 이른 데로 강관과 구멍이 뚫린 철발판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1997년 예천군청에서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부실한 외나무 다리가 있었
다. 내성천의 수심이 얕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그냥 나무와 철을 이용해 간단한 모습으로 만
들었는데, 다리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전 외나무 다리보다는 튼튼하여 마을 사람들이 편히 
건너고 다닌다. 그들은 다리 발판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1998
년 회룡포를 다룬 어느 신문 기자가 난청증세가 있는지 퐁퐁다리를 그만 뿅뿅다리라 잘못 듣고
이를 기사에 내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뿅뿅다리로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퐁퐁보다는 뿅뿅이 더 정감이 간다 하여 뿅뿅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뿅뿅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의 작은 다리로 다리를 건널 때 흔들다리처럼 조금씩 꿈틀거
릴 뿐 그런데로 건너갈 만하며, 다리에 안전 난간이 없고, 바로 옆이 강이므로 건널 때 주의를
하기 바란다. 물론 강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수심이 무척 얕기 때문이다.


▲  회룡포의 자랑, 백사장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의 자랑인 백사장에 발을 디디게 된다. 속세에서 온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진풍경으로 이는 굴곡 노선의 직선화를 꿈꾸던 내성천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작품이다.
마치 바닷가 백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대자연의 위대함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며, 백사장의
폭은 거의 100m, 길이도 2km가 넘어 왠만한 바닷가 백사장 못지 않다. 게다가 내성천이 속세의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탓에 수질이 청정하여 은어와 여러 민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지금은 겨울이라 모래사장을 거니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피서철에는 많은 도시인들이 몰려와 백
사장을 가득 메운다.


▲  회룡포 표석

▲  회룡포 표석에서 바라본 너른 백사장과 내성천

백사장에 열심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보면 회룡포를 알리는 표석이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바라
다. 그 표석을 지나 경작지를 5분 정도 지나면 회룡포 서남쪽에 자리한 회룡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은 이 땅에 흔한 농촌마을로 대략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시집을 온 여
인들은 울면서 왔다고 한다. 교통도 안좋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벽지였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지금은 교통도 조금 좋아지고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안해
도 될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공(老公)들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은 작지만 그를 둘러싼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을 이룬다. 또한 회룡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면서 민박이나 팜스
테이를 하는 집도 많이 늘었다.


▲  정겨운 풍물시 ~ 곶감을 꿈꾸며 열심히 일광욕을 즐기는 감들의 행렬

▲  회룡포마을 돌담길

회룡포 마을길은 뿅뿅다리 남쪽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으로 이어진다. 마을에는 근래에
손질한 돌담길이 길게 이어져 마을의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너른 경작
지는 삶에 지친 도시인들의 안구와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다.
그런 경작지를 구경하며 목가적인 풍경에 취하다보면 금세 서쪽 강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길
은 3갈래로 갈리는데, 용처럼 꿈틀거리는 비룡산이 보이는 북쪽은 마을 올레길로 불리는 둑방길
이며, 남쪽은 마을의 얕으막한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은 백사장과 제2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데, 그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보통 회룡포마을 나들이는 뿅뿅다리를 건너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 갈림길에서 북쪽 둑방길
을 거쳐 다시 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반원 모양의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추가 옵션으로 마
을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둑방길과 제2뿅뿅다리를 건너 비룡산으로 가는 코스가 있으며, 회
룡포에서 비룡산은 필수로 꼭 가봐야 한이 안생기는 곳으로 이곳에 올라야 진정한 회룡포의 위
엄을 누릴 수 있다.


▲  회룡포 경작지 너머로 둑방길(올레길)과 비룡산이 보인다.

▲  서쪽 강변 갈림길 - 우리네 인생에서 갈림길은 무척이나 많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하고 이익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가 않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장거리 게임처럼 저장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을까?

▲  갈대가 출렁이는 서쪽 강변 백사장 너머로 제2뿅뿅다리가 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이어진다.
 

▲  마을 올레길로 쓰이는 둑방길
그냥 흙길이었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꼭 저런걸 깔아야 했을까..?

▲  가을 추수를 마치고 겨울잠에 들어간 회룡포 경작지 ▼
황금들녘의 흔적이 아직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  소나무가 가로수를 자처하는 회룡포 둑방길 (올레길)

▲  여름에 꼭 안겨보고 싶은 회룡포 백사장

관광객은 많지만 그래도 조용한 풍경을 지닌 회룡포마을과 둑방길(올레길)을 거닐고 뿅뿅다리를
건너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회룡포의 속살을 둘러봤으니 이제는 회룡포의 진수를
봐야 한이 없겠지. 그래서 비룡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  비룡산 회룡대(回龍臺)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
길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의 물결이 바로 장안사이다.


회룡포 주차장에서 수레를 타고 회룡교에서 다리 대신 서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길이 너무나
가늘고, 굴곡도 심하고, 한쪽에는 벼랑까지 있어 덩치가 큰 버스가 안심하고 바퀴를 굴리기에는
매우 버겨운 길이었다. 다행히 그 길을 벗어나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바퀴를 접었다. 장
안사까지 바퀴를 굴려도 되지만 버스가 마음을 놓고 바퀴를 접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
터 부득이 걸어가야 된다. 길이 제법 각박하여 은근히 숨이 차긴 하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볼 생각에 그 힘든 길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작은 수레들이 모여있는 장안사 주차장을 지나면 장안사(長安寺)가 조촐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759년에 운명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전국 3곳의 명산(名山)에 장안사를 세우니, 그것이 금강산(金剛山) 장안사와 기장(機張) 장안사,
그리고 이곳 장안사라고 한다. 허나 신빙성이 많이 떨어져 믿을 바는 되지 못하며, 금강산이나
기장(부산)의 장안사와 달리 고색의 내음이 거의 없다. 다만 고려 중기 문인(文人)으로 동명왕
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李奎報)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잔잔히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
려 초기에 문을 연 듯 싶다.
이후 고려 명종(明宗) 때와 1627년, 1755년에 중창을 했으며, 1984년 두타화상(頭陀和尙)이 전
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장안사의 사세가 말이 아님을 보고 지역 신도들과 힘을 합쳐 지
금의 가람을 일구었다. 고색의 때는 진작에 날라간 상태이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지만 이규보의
시를 통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대충 가늠어 볼 수는 있겠다.
2000년 이후 회룡포가 대중적인 명소로 뜨면서 회룡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비룡산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회룡대를 세웠는데, 수레로 회룡대까지 올라갈 경우에는 무조건 장안사를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곳까지 이익을 보게 되면서 회룡포 관광권의 일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고적한 절이었다.

장안사는 예천 사람들이 공부를 하거나 소망을 기원하던 도량(道場)으로 예전에는 극락전(極樂
殿)이 법당(法堂)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이곳에서 지
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더구나 고명하신 지도림 스님을 친견했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날 때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1잔 차로 서로 웃으니
오래된 친구의 마음이라

맑은 날 북쪽 개울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서쪽 성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술과 국화는 꿈속에서 찾아드네


장안사는 회룡포에 단단히 정신이 팔린 탓에 경내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솔직히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볼거리도 부실한 절로 여겨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당연
히 사진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
* 장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산54 (☎ 054-655-1401)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계단길

장안사를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비룡산의 산능선이다. 여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 등산로
는 약간 진정을 되찾는 듯 보이나,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나타나면서 잠깐의 안도
감도 금세 사그러든다. 소나무 숲을 가르며 올라가는 계단길은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
며 그런 계단길을 오르면 길은 서서히 완만해지면서 잠시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을 잠시 내려가면 회룡대 전망대인 회룡대가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


▲  조촐한 모습의 팔각정인 회룡대

회룡대는 회룡포의 전경을 보여주고자 비룡산 능선에 닦은 정자이다. 회룡포 답사의 백미(白眉)
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자연이 만들고도 스스로 놀랬다는 작품, 회룡포가 기
가 막히게 연출되어 속인들의 정신줄을 제대로 놓게 만든다. 밑에서 거닐면서 보는 회룡포와 이
렇게 위에서 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정말 천지 차이이다.


▲  명필이 분명한 회룡대 현판의 위엄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사람들 말대로 삽 한번만 뜨면 정말 섬이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회룡포의 모습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 뿐이다.

▲  회룡대 동쪽 부분
내성천이 무려 350도나 구비구비 돌아가야 했던 것은 바로 사진 가운데 부분을
뚫지 못해서이다. 그것도 정말 삽 한번 뜨면 그만일 듯한 두께임에도 말이다.
내성천의 집요한 굴곡 노선 직선화 프로젝트를 막아선
동쪽 부분이 정말 패기가 돋는다.

▲  회룡대 서쪽 부분
회룡포가 넓긴 하지만 대부분은 경작지로 쓰이며, 마을은 서남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

▲  숨은 그림 찾기
사진을 잘 살펴보면 하트(♥)처럼 생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난이도는 하


회룡대에 올라 회룡포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실컷 굽어보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어
느덧 17시, 이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도
겨울 제국의 눈치 탓에 슬슬 꽁무니를 뺄 채비를 한다. 
회룡대로 올라갈 때는 길이 각박하여 제법 멀게 느껴졌는데 내려갈 때는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
는데 금세 장안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미끄럼을 타듯 쑥 내려가면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
차장에 이른다.

졸고 있는 버스를 깨워서 회룡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회룡교까지 난이도가 강
한 길을 비집고 내려와 회룡교를 건너 향석리(옛 용궁 고을 중심지)를 지나 용궁면 중심지에 이
르러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직행버스를 타고 영주(榮州)로 넘어가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남쪽 일행
들은 인근 삼강주막(三江酒幕)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씩 들고 내려갔다고 한다. 나도 그들을 쫓
아갈 껄 그랬나? 괜히 용궁에서 작별을 고한 것이 후회가 된다. 허나 이미 지나간 거 따져서 무
엇하리, 거기는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겨울 맞이 예천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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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7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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