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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2. 2016.07.06 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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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 서울에서 즐기는 선사시대로의 여행, 암사동 선사유적지 '

▲  암사동 유적 움집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인 5월이 저물고 여름의 초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6월이 밝았다.
이제 6월 한복판임에도 여름 제국은 벌써부터 철통같은 무더위를 드러내며 천하의 숨통을
조인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부터 꽤 당차게 나와도 즐길 것은 즐기고 살아야 된다. 특히 여행이나
나들이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간단하게 어디로 갈까? 눈동자를 굴
리다가 서울 지역 선사 유적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
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유년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2번 정도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사시대가 썩 재
미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구석기(舊石器)와 중석기(中石器), 신석기, 청동기 관련 유
적은 덜 가는 편이다. 가봐야 하품만 나오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났
는지 그곳 생각이 간절하여 20여 년 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5,8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3411번으로 환승, 선사4거리 남쪽인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정류장
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4거리를 건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북쪽(서원마을)으로 8분 정도 가면 암사
동 유적 정문이 나온다. 정문 동북쪽에는 썩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있어 사람들의 호주머
니를 간절하게 바라보는데 입장료가 무려 500원이나 한다. (옛날에는 무료였는데 ㅠㅠ)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는 애당초 없는지라 입장권을 구입하고 단촐하게 생겨먹
은 정문을 들어서니 여름 녹음에 잠긴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정문은 2개의 나무
기둥을 양쪽에 두고 그 위에 길쭉한 목재를 얹혀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 마을의 정문처
럼 꾸몄는데 이곳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은 모두
나무로 목책 비슷하게 둘렀다. 


▲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로 인도하는 타임머신, 암사동 유적 정문

▲  신석기시대의 상징,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확대되어 재현된 빗살무늬토기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음)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의 성지, 움집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유적) -
사적 267호

▲  나무가 무성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

서울 동쪽 암사동 한강변에 자리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 암사동 유적)는 신
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사회/국사책과 국사 관련 교양서적, 공무원 수
험서에 눈과 귀가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신석기 이전인 구석기시대 하면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동굴, 웅기 굴포리가 대표적이고 신석기시대 하면 암사동
이 딱 떠올릴 정도로 신석기 유적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억겁의 세월 동안 땅 속에 강제로 묻혀있다가 1925년 그 악명 높은 을축년(乙丑年) 대
홍수로 한강 주변이 죄다 떠내려갔을 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수천 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흥분한 왜정(倭政)은 학자 요꼬야마(橫山將三朗)와 후지타
등을 보내 땅을 뒤집게 했는데,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천하를 놀라게 했으며,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발굴 범위가 좁았고 그 이후 별다른 조
사를 벌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다시 경작지가 되고 만다.

논밭이 되버린 암사동 유적을 다시 깨운 것은 1957년으로 경희대가 조사팀을 보내 조촐히 발굴
을 벌였고, 1967년 서울대와 경희대 등이 대학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합동발굴을 하였다. 그러
다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서 주변을 모두 뒤집기 시작했고,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가세하여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1979년 7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받게 되엇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1981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유적을 정화하고 이곳
의 명물인 움집을 복원하여 1988년 8월 30일 속세에 개방했다.

1997년 1월 20일에는 '97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했고, 1998년에는
제2전시관을 만들고자 주변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건져냈다. 2000년 1월 제2전시관이 완공되
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적지 일대를 정비하여 나무를 심었으며, 2010년 9월 선사체험마을
을 조성하여 살아있는 선사시대 체험의 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2011년 7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암사동 유적'으로 변경됨)

▲  복원된 움집

▲  재현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모습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에 흔하게 널린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큰 마을 단위 유적으로 그 이
름과 가치를 크게 드높였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측정 결과 약 6,400년부터 3,500년 전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드러나 멀리 잡아도 약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귀
띔해준다.
이곳 땅 속에서는 3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상징물인 빗살무늬토기
가 발견된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와 청동촉 등이 나온
청동기 문화층, 그리고 백제(百濟) 초기 이음식 독널무덤과 승석문(繩席紋)목단지, 쇠토끼 등
이 나온 백제 문화층도 조금이나마 나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 중기(한성백제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크게 나무가 울창한 남쪽 구역과 움집과 제1,2전시관이 있는 중앙 구역, 그리고 체험마
을과 체험교실이 있는 북쪽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남쪽 구역은 숲이 삼삼하여
돗자리를 피고 간식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보내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으며, 전시관과 움
집이 있는 중앙 구역은 이곳의 핵심이다. 북쪽 구역은 짜투리 땅을 닦아서 만든 선사체험마을
로 딱딱하고 재미가 떨어지는 선사시대 나들이에 약간의 감칠맛을 더한다.

▲  선사박물관 전시관

▲  선사체험마을 움집군락

암사동 유적의 명칭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로 많이 불리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암사동 유적'이다. 허나 명칭이 무슨 대수랴,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선사유적지로 비록
복원하고 재현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文明)시대 이전의 향기가 담겨져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
하게 목숨을 건진 선사유적지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암사동 외에도 면목동(面牧洞) 구석기유적, 도곡동(道谷洞) 청동기 유적, 고
덕동(高德洞) 고인돌, 원지동(院趾洞) 고인돌, 우면동(牛眠洞)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있으나
제대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암사동이 유일하다. (원지동과 우면동, 고덕동 고인돌은 살아있긴
하나 상태가 고르지 못함)

그럼 지금부터 암사동에 서린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흔쾌히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
가 생기기 이전 시대를 일컫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덧무늬토기들

▲  암사동 선사유적지 산책로

※ 암사동 선사유적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1번 출구)에서 강동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암사동 유적 하차
* 지하철 8호선 암사역(2번 출구)이나 5,8호선 천호역(3번 출구)에서 340, 3318, 3411번 시내버
  스를 타고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하차, 도보 10분

★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500원 (30인 이상 단체 4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300원 (단체 200원)
* 7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무료
* 관람시간 : 9:30~18:00 (입장은 17:30분까지 /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 동네 주민들을 위한 아침 운동시간 무료개방시간 : 5:30~9시까지 (10~3월은 6시부터임)
* 주차비 : 경차 1,000원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이용시간 9:30~18시)
* 매년 10월 상반기에 금,토,일 3일 일정으로 선사문화축제가 열린다. 원시생활 체험과 소망등
  달기와 강동 락페스티벌과 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 강동구 지역의 오랜 민속놀이인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0호), 원시퍼포먼스, 그림 그리기 대회, 직거래 장터
  등이 열린다.
* 초등학생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러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움집만들기, 토기만들기, 선
  사인의 겨울나기, 수렵체험, 원시인 여름 즐기기, 채집체험, 어로체험, 어린이발굴체험 등이
  있으며, 운영기간은 프로그램마다 모두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 (올림픽로 875) <☎ 02-3425-6520)
*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의 위엄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 주변

▲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3거리와 함께 짙게 우거진 수목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숲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움집과 전시관, 선사체험마을로 이어진다.

▲  신석기시대에 신석기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았던 동물들의 모형

노루와 맷돼지, 말 등 지금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허나 몇몇 사람들은 왜 공룡이 없지?
의아해한다. 선사시대하면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공룡과 신석기 원시인의 공존, 허나 공룡은
여기에 없다. 왜냐? 그들은 공존하지 않아 서로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공룡은 빙하기로 죄다 씨가 말랐다.


▲  움집터 입구

▲  움집터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소와
선사시대 어린이의 귀여운 모형

▲  태풍으로 날라간 남쪽 움집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들

움집터 일대에서는 30기의 집터와 돌무지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동그란 모양과 네 모서
리를 약간 줄인 구조<어려운 말로 말각방형(抹角方形)>로 모래땅에서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그 위에 짚 등을 엮어서 거의 길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형태이다. 집터 중앙에는 강돌을 둘
러 만든 화덕시설이 있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주로 남쪽에 두었다.
기둥 구멍은 한 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 기둥과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
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집터 밖에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음식을 저장하던 저장구덩이, 돌무지시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의 기운을 받은 흔적이 역력
하다. 그리고 돌무지 밑에는 불에 탄 흙과 부식토와 함께 목탄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많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토기를 굽던 가마터 또는 마을 공동의 화덕시설로 보
인다.

토기는 바닥이 뽀족한 것과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 그리고 무늬가 있는 것들이 주
류를 이루며 나왔다. 그리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의 석기류도 같이 나왔는데, 뗀석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석기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 등이 있으며, 갈돌과 갈판, 괭이, 보습, 돌낫 등
도 있다. 그외에 새뼈와 도토리 등이 조금 출토되었다.

집터에는 고증하여 복원했다는 움집 10기가 있는데, 이들은 기존 집터에서 2m 정도 흙을 엎고
그 위에 만든 것이다. 동쪽에 있는 체험용 움집을 빼고는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  움집들도 비가 마구 새는지 땜질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  더운 여름에 하루나 이틀 정도 원시인이 되어 머물고 싶은 움집
원시인처럼 옷은 중요한 곳만 걸치고 움집에서 며칠 지내보면 어떨까? 물론 취사는
현대식 도구로 해우소나 간단한 세면은 정문이나 전시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말이다. 아무리 선사체험이라고 해도 현대의 이기에 단단히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한 원시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  수수한 모습의 움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 단위로 살았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집을 짓는 기술과 집의 모습이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대부분 저런 집을
짓고 수수하게 살던 평등한 사회였다. (물론 가족간의 서열은 있었다)

그랬던 사회가 이른바 청동시기대에 접어들면서 돌로 모든 것을 때우던 시기는 그 막을 내렸으
며, 청동을 비롯한 광물의 등장으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일부 이루
어지던 농경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자연히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들은 점차 신분제
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유일하게 공개된 동쪽 움집 (움집 생활 체험장)

암사동 10기의 움집 가운데 유일하게 속살이 공개된 동쪽 움집은 기존 움집 규격의 1.5배 정도
를 더해서 만든 것으로 움집 높이 4.5m, 가로 8.5m, 세로 12m에 이른다. 내부에는 4명의 원시
인 가족을 배치했고, 석기 등의 생활용품은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약간
이나마 이해를 돕게 만들었으니 한번 둘러보자.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동쪽 움집 대문

▲  동쪽 움집에 재현된 원시인 가족 4인

동물 가죽 옷을 입은 원시인 가족들이 화덕 주위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각자 일에 여념들이 없
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선 이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아버지로 사냥을 할 창을 손
질하고 있고 그 옆에 아줌마 자세로 앉은 사람은 어머니로 돌판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다.
아들은 물고기를 굽고 있으며, (어머니나 아들이나 겉모습이 비슷하게 생김) 제일 덩치가 작은
꼬마는 막내딸로 어미와 오라비가 해준 음식을 한참 섭취하고 있다.
움집 중앙에 자리한 화덕은 불을 피우던 공간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때워 안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능을 했다. 또한 화덕의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천정에
구멍을 냈다.

재현된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내부를 살폈다.


 

♠  암사동 유적 전시관

▲  제1,2전시관 (왼쪽 현관이 1전시관, 오른쪽이 2전시관)

암사동 유적 전시관은 모두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1988년에 문을 열었
는데, 유적 발굴터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문화, 유물 등
을 머금고 있다.
제2전시관은 기존 전시관을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어 1999년에 그 옆에 이어서 만든 것으로 기
존 전시관의 내용을 바탕으로 암사동 유적의 발굴과 선사시대 개관, 서울과 경기도 지역 신석
기 유적 및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었다. 그리고 2곳의 체험코너와 정보검색코너, 영상실
을 갖추어 전시관의 유물과 신석기시대의 이해를 최대한 돕게 했다.

유물들이 모두 선사시대 것이다 보니 화려함과는 극히 거리가 멀어 식상할 수도 있다. 죄다 토
기와 석기 투성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
)가 싹틀 수 있었고, 인간은 너무 쓸데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의 옛 원초적인 모습도 한번 살펴줘야 된다. 그 토기와 석기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소장 유물은 408개로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복제품(169점)이거나 다른 데서 빌려온 것(167
점)이며, 순수 암사동 산은 고작 72점에 지나지 않는다. 태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이곳 발굴
에 나선 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복제품은 그만 치우고 그곳에 있는 유물을 건네 받아
암사동 유물과 서울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로 꽉 채웠으면 좋겠다.


▲  움집터 발굴 현장 - 움집터 8기와 저장공간 1기를 그대로 경화처리하여
보존한 것으로 이곳 전시관의 백미라 할 만하다.

▲  가지무늬토기와 붉은 그릇, 민무늬토기들

▲  빗살무늬토기와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아마도 학창시절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
이다. 이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과실, 채소를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구
덩이를 파고 500~600도의 온도에서 따끈하게 구워서 붉은 색이나 누런 색을 띄게 되었다. 토기
피부에는 빗살무늬(빗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를 내기 위해 생선과 동물 뼈를 주로 사
용했으며, 이들 토기를 어려운 말로는 즐문토기라고 한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토기이지만 원시 수준의 인간이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기
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돌살촉

▲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과 마제석촉 - 이들은 부여 송국리와
화순 대곡리, 창원대에서 빌려온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비로소 광물을 다루게 되었다.

▲  전국 곳곳에서 집합시킨 빗살무늬토기와 온갖 토기들

▲  물고기 잡이에 쓰던 어망추와 낚시추바늘

겉으로 보면 주위에 흔한 자연석처럼 보여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저런 돌 하나하
나에 원시인들의 사연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판별하기 어려운 저들을 밝히는데 많은 역사,고고학 교수/학자들의 노고가 참 컸다.


▲  타제석기(打製石器)들

▲  돌망치로 쓰인 돌맹이들

▲  제2전시관 한복판에 재현된 움집

▲  세월의 태클에 조각이 나버린 빗살무늬토기 파편들

▲  불에 탄 도토리(가운데)와 갈판과 갈돌, 석기들
탄화된 곡식과 과실 등은 절대로 분해자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도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먹는데,
신석기 사람들도 도토리를 채취해서 양식으로 썼던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의 무덤

신석기 사람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이야 평균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 기껏 길어봐야 40~50 정도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라 불리는 돌무덤들
이 많이 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적당한 무덤 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근래에 남해안 지역에서
조개더미유적과 함께 무덤이 발견되어 조금씩 정답을 풀어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키 정도 길이로 얕게 땅을 파고 관곽(棺槨)도 없이 시신을 안치
했다. 시신은 대부분 곧게 안치했으나 쭈그린 상태로 묻힌 경우도 일부 발견되었다. 시신 위에
는 작은 돌을 덮어 봉분으로 삼았으며 아주 드물게 동굴이나 바위 틈의 구덩이를 파고 묻은 경
우도 있었다. 죽은 이는 목걸이와 팔찌 등의 꾸미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디 저
세상에 가서 쓰라며 토기와 석기,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두어 사후세계 관념을 가지
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추앙받는 암사동에서는 아직 그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못해 약간은 허전
한 감을 준다. 무덤도 발견되면 아주 완벽한 성지감이 되는데 말이다.


▲  돌살촉과 석기들

▲  암사동 주거지 모형도


 

♠  암사동 유적 마무리 ~~ 선사체험마을

▲  선사체험마을 정문과 시간의 집

선사유적지 전시관 북쪽에는 2010년 9월에 조성된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선사체험마을을 알리
는 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조그만 또랑을 건너면 선사체험마을 구역인데, 시간의 집을 시작으
로 기억의 물길과 어로체험장, 움집마을, 수렵체험장, 발굴체험장, 선사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발굴체험장과 백제주거지 표석이 있다.
다른 선사유적지나 박물관과 달리 선사시대 체험장을 매우 넓게 닦아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여흥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굳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당시를 재현한 여러 볼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과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언덕, 여름 제국
의 기운을 약화시켜주는 개울까지 갖추고 잇어 전시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쥐가 난 머리
를 잠시 식히기에는 아주 좋다. 단 그늘이 시간의 집과 개울 건너편 외에는 별로 없어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강렬한 햇빛으로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  시간의 집

시간의 집은 동굴 형태로 구성된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마치 길고 굵직한 뱀처럼 보인다. 이곳
은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곳곳에 설치
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동굴의 길이는 약 60~70m 정도 된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바로 움집군락으로 이어진다.


▲  시간의 집과 그 옆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개울(기억의 물길)

▲  움집군락에 재현된 움집들 - 이제는 움집도 지겨워진다.
그만큼 암사동 유적에서 차지하는 움집의 비율이 크다는 소리다.

▲  맷돼지 통구이 현장 - 저기서 불만
붙이면 바로 100% 통구이 재현이다.

▲  돌무더기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모형 -
집으로 가져와서 그릇으로 쓰면 안될까..?

▲  바쁘게 살아가는 신석기 사람들

▲  신석기 사람들의 취락 모습


▲  기억의 물길이라 불리는 서쪽 개울
장대하지만 무심하기도 한 세월이 물처럼 꾸준히 흐른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기억의 물길로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움집군락 서쪽 산책로

▲  수렵체험장 - 맷돼지와 사슴 모형이 체험을 준비한다.

▲  사슴 1마리 월척하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는 원시인의 위엄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일 사슴이 좀 가련해 보인다.
나의 전생이 혹 저 사슴은 아니었을까..?

▲  발굴체험장

어린이 2명이 한참 흙을 파헤치며 오래된 보물을 꿈꾼다. 하지만 저기서 나오는 것은 흙 밖에
없으니 괜한 헛된 망상은 버리도록~~ 정식 발굴체험을 하는 경우 저 안에 토기와 석기 모형을
여럿 묻는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정말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기분이 정
말 환희(歡喜) 그 자체일 것이다.


▲  발굴체험장 동쪽에 있는 백제주거지터 표석

2003년과 2008년 11월에 6각형 모양의 백제 집터 1기와 여러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이곳이 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까지 주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 강동/송파구로 여겨지는 도읍(위례성) 북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이 살았다. 귀족들은 이곳과 명일동, 고덕동 일대에 큰 농장을
소유하여 굴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와 관련된 유적(창고나 귀족 저택)일 가능성도 크다.


▲  백제주거터 인근에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개망초의 위엄

▲  선사체험교실

▲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는 체험마당

▲  선사의 숲 사이로 난 산책로 - 선사의 숲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  전시관 맞은 편에 마련된 농촌 체험 현장

답사 본능에 충실하며 1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선사시대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옛날의 암사동 유적만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처럼 많이도
변해있어 조금은 놀랬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명소나 관광지나 적당히 변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속세의 생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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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6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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