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숲'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2. 2018.01.12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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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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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호야나무(회화나무)

▲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에 우리나라 읍성의 성지로 추앙받는 서산 해미읍성을
찾았다.
해미읍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나 눈을 감고 답사를 했는지 미답(未踏)
의 공간이 적지 않다. 하여 그 공간을 싹 지우고자 날씨가 조금 풀린 틈을 이용해 다시
인연을 지었다.


▲  해미읍성 서쪽 망루


 

♠  조선 초기에 축성된 읍성,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서린
해미읍성(海美邑城) - 적 116호

▲  해미읍성 서남쪽 망루(望樓)

서산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름도 이쁜 '해미'란 고을이 있다. <'해뫼'라
고도 불렸음~> 해미(현재 해미면)는 서산시(瑞山市)의 일원으로 서산 제일의 명소인 해미읍성
을 품고 있다.
천하가 해미읍성을 격하게 주목하는 이유는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과 더불어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평지 읍성(邑城)이며 또한 제대로 남은 몇 안되는 읍성이기 때문이다.

서산의 필수 답사지로 꼽히는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太宗) 때 축성되었다. 1416년 2월, 태종
은 3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과 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산 도비산(島飛山)
에서 사냥을 했는데 사냥을 마치고 서산과 태안 일대를 둘러본 다음 해미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왜구(倭寇)의 침범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충청병
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 크게 줄여서 병영(兵營)이라고 함>을 서해바다와 가까운 이곳
으로 옮기기로 마음 먹고 1417년 해미읍성 축성을 지시했다. 그래서 충청도를 비롯하여 멀리
제주도까지 정남(丁男, 16~60세의 남자)을 징발했고 콩볶듯이 공사를 벌여 1421년 완성을 보
았다.

성이 완성되자 병영을 해미로 옮겼으며 종2품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주둔하여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했다. 해미는 지금은 비록 서산에 속한 고을에 불과하나 1421년부터 1651년까지
230년 동안 역모 이상의 죄인을 처벌하고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충청도 제일의 군사
도시였다.
1491년 성을 보수했으며, 성 주변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탱자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79년에는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훈련원(訓練院)의
군관(軍官)으로 파견되어 10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1651년 병영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으로 이전되면서 해미현 관아가 그 자리에 들어왔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겸영장(兼營將)을 파견해 충청도 서쪽 13고을을 담당하는 호서좌영(湖西
左營, 충청좌영)으로 삼아 여전히 군사 행정을 담당했다. 정조 시절에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
若鏞)이 잠시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  청허정

해미읍성이 본격적으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정조 이후이다. 전국적으로 천주교도가 폭
발적으로 늘어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는데, 이때 해
미는 관할구역인 13개 고을에서 잡아들인 천주교도를 처리했다. 여기서 처형된 교도는 확인된
수만 1,000명을 훌쩍 넘었으며, 그중에는 이 땅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조부 김진후
(金震厚)도 있었다.

관리와 군인들은 그들에게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교인 대부분은 거절했다. 그래서 옥사 앞
회화나무(호야나무)에 철사줄로 대롱대롱 매달거나 곤장과 온갖 형벌로 고문을 가했으며, 끝
내는 서문 밖 돌다리로 끌고가 자리개질(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것)로 쳐죽이
거나 화살을 쏴서 죽였다.
허나 잡혀 들어오는 교도가 계속 늘면서 감옥은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렀으며, 처리 능력은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아무리 죽이고 고문을 해도 별무신통. 하여 여럿을 눕혀 놓고 돌기
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물에 던져 죽였고, 그것도 힘에 부치자 해미천(海美川)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 많은 사람을 한줄로 대롱대롱 엮어 생매장까지 자행하게 된다.

▲  해미읍성 북쪽 성곽

▲  해미읍성 호야나무

1914년 왜정(倭政)은 해미현을 서산군의 일부로 통합시키면서 충청좌도를 담당했던 해미읍성
의 위엄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왜정에 의해 관아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해미면사무소와 학교, 민가가 들어섰다. 다행히 읍성은 목숨을 보전했으나 이미 알맹이를 잃
어버린 상태라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읍성이었다.

1973년 발굴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성내를 가득 메운 관공서와 학교, 민가를 성밖으로 내
보냈으며, 그 자리에는 사적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성 안에는 호야나무와 언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이후, 발굴조사를 벌이
면서 옛 관아의 흔적들이 쏙쏙 빛을 보게 되었고 차근차근 복원공사를 벌여나가 동헌과 내아,
옥사(獄舍), 객사, 민속가옥이 지어졌다. 허나 여전히 풀만 돋아있는 공백이 넓어 다소 허전
하게 다가온다.

읍성의 둘레는 1.8km, 내부 면적은 약 20만㎡로 남문과 동문, 서문 등 성문 3개와 암문(暗門)
1개를 지니고 있다. 읍성 구조는 중앙에 동헌이 있고, 주변에 내아와 객사, 옥사 등이 포진해
있으며, 동헌 동쪽에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는 청허정과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 성
곽 밖에는 해자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 서/남쪽은 평지이고 동쪽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읍성이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성 밖에서 생활했고, 성 안은 동헌과 병영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타운이었다.

천하에 온갖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2004년 이후 서산시청은 이 땅 유일의 병영테마 체험
축제인 '해미읍성 병영체험축제'을 내놓았다. 그 축제는 이후 '서산 해미읍성축제'로 이름을
갈았는데 태종대왕 강무행렬, 병영훈련체험, 병영음식체험, 전통공예체험, 전통공연과 연극
등이 열리며, 2008년에는 충남 지정 관광 유망축제로, 2017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리
나라 유망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는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하던 품격 높은 군사도시이자 충청좌도를 담당하던 고을로, 천
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두루두루 살아온 살아온 해미읍성, 비록 읍성을 제외하고 모두 근래 복
원되었지만 낙안읍성, 고창읍성(高敞邑城)과 더불어 이 땅에 대표적인 읍성 관광지로 다시금
명성을 누리고 있다.

▲  민속가옥 초가

▲  남문에서 동헌까지 곧게 이어진 길

※ 해미읍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해미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서산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산시외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있으며, 직행버스도 자주 있다.
* 예산읍(예산터미널, 예산역)에서 해미행 군내버스가 1일 5회 운행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도보 5분
* 승용차
① 서해안고속도로 → 해미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해미읍성

★ 해미읍성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주차장은 읍성 남쪽에 있으며,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5시 ~ 21시 / 동절기(11~2월) 6시 ~ 19시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40-1 (남문2로 143 ☎ 041-660-2540)
* 매년 10월에 서산 해미읍성축제가 열린다. (서산 해미읍성축제 추진위원회 ☎ 041-669-5050
  , 해미읍성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온갖 연이 펄럭이는 해미읍성 서남쪽 성곽


 

♠  해미읍성 둘러보기 (1) - 진남문, 호야나무, 민속가옥

▲  해미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의 속살로 들어서려면 진남문(남문)을 지나야 된다. 읍성 성문이 3개나 있지만 속세
에 속시원히 개방된 문은 오직 진남문 뿐이다.
진남문은 읍성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지녔는데 비록 읍성
의 기능은 옛날에 상실되었지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왕년의 위엄을 잃지 않으며 읍성을 찾은
나그네를 굽어본다.

천주교 박해가 극성이던 19세기, 충청좌도 지역에서 잡힌 천주교도들은 이 문을 거쳐 해미관
아로 압송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문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입 같은 문이었지만
천주교도 상당수는 천당으로 가는 관문으로 삼으며 성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  해미읍성의 나이와 조선의 우울한 꼬라지를 알려주는
진남문 안쪽의 붉은 글씨 9자


진남문을 들어서면 아직까지는 공백이 많은 읍성 내부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허나 읍성의 중
심인 동헌까지는 조금의 비뚤어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 있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
는데 문을 들어설 때 무작정 정면 돌진하지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목운
동도 할 겸 고개를 180도 돌려 문루로 살짝 시선을 올리면 붉은색으로 쓰인 한자 9자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글씨가 크고 또렷해 장님이 아닌 이상은 보는 데 별 지장이 없으며, 한자도
쉬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 붉은 글씨는 무엇일까? 그들은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로 여기
서 황명은 조선 정부와 지배층이 꼴사납게 지극 정성으로 받들던 명나라를 높인 말이다. 홍치
는 명나라 군주인 효종(孝宗)의 연호로 홍치 4년은 1491년이며, 신해조는 신해년(辛亥年)에
만들었다는 뜻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읍성을 중수했음을 진하게 보여준다.
500년이 넘은 글씨이건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건재함을 과시하나 천하 제일의 호구 국가
로 비루한 목숨을 500년 씩이나 이어온, 심지어 왜열도에게도 역전 당한 조선의 한심함이 돋
보이는 글씨라 하겠다.


▲  진남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과 봉황무늬
색채가 고운 오색영롱한 구름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는 가운데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다.

▲  진남문을 지나면 동헌까지 큰길이 곧게 펼쳐져 있다.

▲  해미읍성의 새로운 조형물, 프란치스코 해미읍성 방문 기념 조형물

해미읍성은 거의 5년 만에 와본다. 10년이면 정말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나처럼 크게 변하
여 낯선 존재들이 여럿 생겨나면서 예전 해미읍성에 익숙해진 나의 눈을 귀찮게 학습을 시킨
다. 그 낯선 것들 중에는 귀엽게 그려진 프란치스코 방문 기념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은 2014년 8월 17일 카톨릭교의 대장이자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연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이다. 흰머리의 프란치
스코 할배가 오른손으로 아이를 안고 왼손으로 다른 아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정겹게 다가
오는데, 그 옆에는 선녀를 닮은 어린 천사가 손짓을 한다. 그들 옆에는 녹색 피부를 지닌 'A'
와 'Ω' 마크가 있는데 이들은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의미하는 마
크라고 한다.


▲  남문 안쪽에 조성된 여러 초가들 (제일 왼쪽 집이 전통주막)

남문 바로 안쪽은 예전에 공터였다. 허나 그새 여러 초가들이 뿌리를 내려 조촐하게 초가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전통주막과 전통체험장으로 쓰인다.
전통주막은 소머리국밥과 부침개, 두부, 도토리묵, 막걸리, 동동주 등의 식사거리를 판매하며
간식거리로 호떡도 팔고 있다. 가격은 시중과 거의 비슷한 편, 음식은 따뜻한 방에서 먹어도
되고 바깥 평상에 앉아서 먹어도 된다.


▲  동헌으로 가는 길목에 재현된 옛 무기들
한때 천하를 풍미했던 천자총통(天字銃筒)을 비롯한 온갖 화포와 화차(火車),
검차(檢車), 운제 사다리 등이 재현되어 있다. (모두 모조품)

▲  수십 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던 화차
(왼쪽), 로켓포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크게 쓰인 천자총통(天字銃筒)

▲  기병을 때려잡는데 효과적인 검차(檢車)
고려 때 많이 쓰인 무기로 귀신 문양이
새겨져 있다.


▲  호야나무라 불리는 해미읍성 회화나무 - 충남 지방기념물 172호

남문과 동헌 사이에는 해미읍성의 상징이자 천주교 박해 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초췌한 몰골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겨울 제국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린 그는 앙상한 가지를 높이 쳐들며 애
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나무의 사연을 안다면 그 모습이 정말 오싹하게 다
가올 것이다.

호야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그의 나이는 약 300년 이상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해미현감이 기념
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그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
는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착한 인상이었던 그는 19세기에 들어서 공포의 나무로 둔갑하여 수많
은 천주교도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역을 강제로 맡게 된다.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호야나무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으며, 나무에 매달아 화살을 쏴 죽이
거나 목을 매어 죽이는 등, 그들의 비명소리가 수십 년 동안 그치질 않았다. 그 시절 철사줄
이 박힌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아련하게 전해준다. 한낮이라 그리
실감은 나지 않지만 한밤중이었다면 나무에서 죽어간 원귀(寃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듯, 소
름이 끼쳐 염통이 쫄깃해질지도 모른다.

1940년대에 동쪽 가지가 부러지고, 1969년 가운데 줄기가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받았으
나 재차 부패하면서 2004년 4월 외과수술과 토양개량을 통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살아있
는 천주교 박해 현장으로 천주교에서는 그를 순교 기념물로 삼아 애지중지 하고 있으며, 1950
년대 지어졌다가 철거된 해미공소 강당터에 세운 순교기념비와 근래 만든 순교 조형물을 달아
놓았다. 그러고보면 나무의 팔자가 참 변덕스럽기도 하다.

▲  호야나무 옆에 있는 순교기념비

▲  순교기념비

천주교도들은 어째서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순교라 불리는 죽음을 택했을까? 그들
의 목숨이 한참 지던 19세기는 안동김씨 세력이 권력을 휘어잡고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
절이다. 권력층과 지방관리들은 서로 백성들을 들들 볶았으며, 그들의 고혈을 짜내느라 정신
이 없었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흉년과 엄청난 조세, 공납(貢納), 역(役)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버겨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민심이 흉흉하거나 나라가 그야말로 개판일 때는 종교나 신앙이 크게 유행하기 마련으로 17세기 중반 청나라에서 건너온 천주교가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
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새로운 종교와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주교가 관심을 받았으나 평등을 강조한 천
주교 교리에 빠져든 양반과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유학에 위배되는 행동이 나타났다. 이
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그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하며 천주교 때려잡기에 나서게
된다.

해미읍성을 비롯한 천주교도 처리 장소로 끌려간 천주교도들은 이미 권력층에게 뜯길데로 뜯
기고 시달릴데로 시달린 사람들이라 고통스런 삶을 천주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관리들은 그들
을 고문하면서 은근슬쩍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대부분 배교(背敎)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
했다. 그들로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고통스런 세상을 떠나 천주교의 내세(來世)라는 천
당에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행복을 누리고자 소망했던 것이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옥사(獄舍, 감옥)

이곳은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으로 남녀 구별하여 2동으로 재현되어 있다. 충청도 서부 지역(
내포) 곳곳에서 잡아들인 천주교 신자들로 넘쳐났던 현장으로 왜정 때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 약사(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2004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1950년대에 해미 공소(公所) 신자들이 돈을 모아 감옥터 일대 1,800여 평을 구입하여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에서 해미읍성 관리를 위해 그 터를 사들여 공소 강당을 철거했으며, 대
신 순교기념비를 지어주어 이곳이 공소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서쪽을 바라보는 여자 옥사

 ▲  옥사 안에 재현된 죄수 디오라마

     ◀  옥사 죄수들이 볼일을 보던 뒷간
감방 안에 볼일을 보는 공간이 있는 줄 알았더
만 알고보니 밖에 별도의 뒷간을 두었다. 죄수
들은 옥사를 관리하는 군사에게 부탁하여 저기
서 볼일을 보았던 것이다.

    ◀  옥사와 죄인을 관리하는 포졸(捕卒)
천주교 박해 시절 저들은 제대로 쉬는 날도 없
었을 것이다. 급여는 정말 쥐꼬리보다 더 못했
는데 처리해야될 업무는 나날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  옥사 남쪽의 복원된 우물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현실은 껍데기만 남은 죽은 우물이다.

▲  읍성 남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속가옥(초가) 3채

▲  민속가옥 ① 서산 지역 부농(富農)의 집
방 1칸, 부엌 1칸을 기본으로 필요에 따라 칸을 덧붙인 형태로 대청은 없으며
농기구와 농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와 부속채를 거느리고 있다.

▲  김이 모락모락 풍길 것 같은 가마솥을
2개나 지닌 부농의 집 부뚜막

▲  부농의 집 뒷쪽에 자리한 토끼와 닭의
보금자리 (토끼와 닭이 살고 있음)

▲  닭장 안을 서성이는 닭
벼슬(관직)이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어느 사극의 명언이 생각난다.

▲  뒷간에서 볼일 보는 아이
한참 볼일에 열중하다가 사람들이 쳐다보니
앗 뜨거워라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


▲  민속가옥 ② 텃밭도 갖춘 상인의 집
조선 후기 민가의 보편적인 형태로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초가 3간이다.
장사가 주업이지만 약간의 텃밭과 농기구도 갖추고 있다.

▲  상인 집 텃밭

▲  전통 윷놀이 체험장
조그만 윷과 엄청 큰 윷이 준비되어 있다.


▲  민속가옥 ③ 말단관리인 서리(書吏)의 집
방 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진 서산 지역 초가이다.

▲  독서삼매에 빠진 서리 아저씨

▲  집 뒤쪽 장독대


▲  초가 사이에 닦여진 돌담길


 

♠  해미읍성 둘러보기 (2) - 동헌, 청허정 주변

▲  굳게 닫힌 읍성 동문

▲  해미 관아 (정면에 2층 문루가 동헌 내삼문)

진남문에서 정면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에 담장을 두른 해미읍성 관아가 있
다.
이들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것들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쓰인 2층 문루 내삼문
(內三門)을 지나면 관아 중심인데 그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 나
무는 원래 성 안에 있다가 성 밖으로 반출된 것으로 1977년 3월 이곳을 방문한 최규하(崔圭夏
) 국무총리(國務總理)가 그 나무를 매입하여 이곳에 심게 했으며, 나무 앞에는 그때의 사연이
적힌 표석이 멀뚱히 세워져 있다.

▲  해미 관아 내삼문

▲  동헌 부속건물과 닫혀진 우물


▲  해미읍성 동헌(東軒)

동헌은 지금의 시청, 군청 등의 행정기관과 경찰서, 군부대 기능까지 포함된 관청이다. 해미현
감은 이곳에서 행정, 치안, 군사, 사법 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동헌 서쪽에는 해미현감의 생활공간인 내아(內衙)가 있는데, 내아는 다른 말로 서헌(西軒)이라
고도 한다.


▲  해미동헌에 모여 회의중인 충청좌도 고을 수령들
해미는 충청좌도의 군사 중심지로 좌도에 속한 13고을의 수령(首領)들이
모여 군사, 행정 관련 회의를 하였다.

▲  적막이 감도는 객사(客舍)

동헌 정문 우측에 자리한 객사는 조정이나 출장나온 관원의 숙소이다. 건물 가운데 정청(政廳
)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여 1달에 2번(초하루, 보름) 제왕에 대한 예를 올
렸는데 그 의식을 어려운 말로 향궐망배(向闕望拜)라고 한다. 이때 현감은 금관조복(金冠朝服
)을 갖추고 의식에 임했다.
현재 해미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통해 1999년 7월에 복원된 것이다.


▲  청허정 언덕에서 바라본 읍성 관아 (동헌, 내아, 객사)

▲  읍성 동부에 봉긋 솟은 청허정 언덕
동헌 뒤쪽이자 읍성 동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계단을 통해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에 단아한 모습을 지닌 청허정이 마중을 나온다.

▲  해미읍성 언덕 정상에 자리를 편 청허정(淸虛亭)

해미읍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청허정이 자리해 있다. 청허(淸虛)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1491에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숙기(曹淑沂)가
세웠다.

해미현감과 병마절도사의 휴식 및 연회 장소, 문인들의 팔자좋은 시회(詩會) 장소로 널리 쓰
였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읍성 내부가 훤히 바라보여 수시로 여기에 올라 읍성을 점검했을 것
이다.
청허정과 관련된 시로는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청허정기'와 조위(曺偉, 1454~1503)
가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올린 '청허정'이란 시가 있으며, 이경전(李
慶全, 1567~1644)의 시와 '청허정연회도'란 그림이 전한다.
허나 1872년 해미 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나와있어 그 이전에 이미 녹아 없어진 것
으로 보이며, 왜정 때는 이곳에 외람되게 신사(神社)가 들어앉아 미관을 적지 않게 말아먹기
도 했다.
오랫동안 터만 아련히 남아오던 것을 2011년 복원했으며, 정자 주변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
고 있다.


▲  해미읍성 장승동산

청허정 주변에는 붉은 피부의 장승과 나무색 피부의 장승 20여 기가 옹기종기 모여 장승동산
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예전에는 없던 존재들이라 그저 낯설기만 한데, 그들이 지어진 이유
는 이렇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천하를 징하게 어지럽혔을 때, 청허정 언덕의 100~200년 묵은 소
나무들이 적지 않게 쓰러졌다. 이들 중 가망이 없는 나무를 수습해서 만든 것이 바로 장승이
다. 그냥 장승만 지어올리면 재미가 없으니 이 땅의 역대 대통령 10명을 모델로 하여 붉은 피
부의 장승 10기를 앞줄에 세웠는데 그들 얼굴의 특정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얼굴을 새기고 그
들의 국정지표를 몸통에 새겼다. 그리고 그 뒷쪽에 토속/해학적으로 지어진 장승을 병풍처럼
포진시켰다.


▲  왼쪽은 이승만 장승, 가운데는 윤보선 장승, 오른쪽은 박정희 장승

▲  솔내음이 가득한 청허정 뒷쪽 소나무숲

예전에 왔을 때는 소나무숲이 상당히 짙었는데, 머리의 탈모 현장 마냥 빈 틈이 많아 보인다.
이는 태풍 곤파스가 요란하게 다녀간 탓이다. 그나마 숲을 복원한 것이 이 정도이다. 부정비
리에 얼룩진 상류/권력층, 나라를 좀먹으며 높은 자리에 들어앉은 친일파 후손들, 나에게 전
혀 도움이 안되는 밥버러지들이나 좀 날려버리지 왜 엉뚱하게 애궂은 나무와 서민들만 건드
린단 말인가? 그러고보면 하늘님(환인) 등의 신이나 정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스
럽다.


▲  고개를 푹 숙인 소나무
하늘이 무서웠던 것일까?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옆으로 자라나 짧게 그만의 그늘을 드리운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해미읍성은 안쪽은 흙으로, 바깥은 돌로 쌓은 내탁(內托) 공법으로 축성되었다.
그래서 안과 밖이 모두 돌로 이루어진 낙안읍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해미읍성 동북쪽 성곽과 해자(垓子)
읍성 동쪽에는 방어력을 높이고자 해자를 팠다. (해자는 근래에 복원됨)

▲  읍성 동북쪽에 소리 없이 자리한 암문
(暗門) - 암문은 비상용 문으로 보통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둔다.

▲  굳게 입을 봉한 암문


▲  운치가 깃든 소나무숲 산책로 (성 안쪽)

▲  읍성과 성 밖 해자

읍성을 지키던 여장은 오래전에 없어진 상태라 성곽길을 거닐 때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성
의 높이가 3~4m라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여장이 없는 성곽길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다소 어색함을 주며, 성곽과 바깥에 탐방로가 나있어 남문을 기준으로 삼아 안으로 1바퀴, 밖
으로 1바퀴 돌면 적당하다.


▲  읍성에서 바라본 해미 동쪽 (해미향교 방면)
오늘도 해미 고을은 평화롭다.

▲  읍성 북쪽 성곽 - 성곽길을 따라 옛 깃발이 펄럭인다.

▲  해미읍성 서문인 지성루(枝城樓)

서문(지성루)의 성문 홍예와 문루는 근래 복원된 것이고, 홍예문 좌우 성돌은 옛날 것 그대로
이다. 하여 고색이 깃든 성돌과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서문 밖은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리하던 현장으로 순교 현양비와 자리개질을 치던 넓적
한 돌다리(자리개돌)가 놓여져 당시의 우울했던 상황을 아련히 귀뜀한다. 자리개돌은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1989년 순교현양비를 세웠
으며,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해미순교성지로 옮겨졌고 서문 밖에는 모조품을 두었다.


▲  서문 밖 순교성지에 세워진 순교현양비와 자리개돌(왼쪽에 너른 돌판)

▲  서문 안쪽 활터와 소나무숲

▲  서문 성 바깥 부분

이렇게 하여 2시간에 걸친 해미읍성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 남겨놓은 미답 공간도 말
끔히 처리했다. 다만 성 바깥 탐방로는 귀찮아서 서문 밖 순교지를 포함한 일부만 거니는 선에
서 쿨하게 마무리 짓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인근 미답지인 해미순교성지로 이동했다.
해미읍성에 왔다면 후식거리로 이곳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19세기 읍성에서 자행된 천주교
학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천주교 박해의 현장
~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  해미천에서 바라본 해미순교성지(여숫골)

해미읍내 서쪽, 해미천 건너에 우리나라의 주요 천주교 성지이자 충청도 굴지의 천주교 성지
인 해미순교성지가 자리해 있다. 이곳이 천주교 성지의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천주교 박해 시
절, 신자들을 생매장해서 죽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179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해미에서 처단된 천주교 신자는 기록으로 남은 것만 약 1천여 명
이다. 그중 천주교측 기록 67명, 해미관아측 기록 65명 등 겨우 132명의 이름만 전해오고 있
으며 기록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아 처단된 사람은 족히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는 해미현감과 관리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단했기 때문이다.

해미 관리와 병사들은 관아와 호야나무, 서문 밖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리했는데 서문 밖은 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으며, 1866년부터 1868년
까지 생매장 방법을 써서 지금의 성지 자리에 큰 구덩이를 파서 죽였다. 이때 십여 명씩 데리
고 나가 적당한 곳에 구덩이를 파게 하여 모두 밀어넣은 다음 흙과 자갈로 묻었다.
또한 여름에는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신자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꺼꾸로 던져 죽이기
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 현장을 둠벙이라 불렀고, 그것이 변해 '진둠벙이'가 되었다.


이렇게나 잔인했던 생매장 학살 현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로운 경작지가 되었는데, 현장이
현장인지라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해골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
견된 해골도 적지 않아서 생매장의 증거를 보여준다. 허나 사연을 모르던 농부들은 그 해골을
죄다 버렸고, 그나마 홍수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935년 서산 본당의 범베드로 신부가 해골 발견 소식을 접하고 이곳을 싹 뒤집어 수
많은 유해와 유품을 발견,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치했다가 1995년 9
월 20일, 해미순교성지에 봉안했다.
 
1975년 유해가 나온 자리에 순교기념탑을 세웠으며, 그 부근에 1985년 으리으리한 본당을 지
어 '해미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 2000년 8월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3년 6월 기념 성전
을 세워 순교자의 유해를 봉안했다.
2014년 8월에는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 여기서 처단된 순교자 3명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김대건의 친할아버지)
을 시복(諡福)했으
며, 다음 날 시복기념비를 제막했다.

이곳 일대를 '여숫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중얼거리던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지역 사람들은 '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차 '여숫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 측은 해미읍성 감옥터와 호야나무(회화나무), 서문밖, 한티고개를 천주교 성지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매년 10만여 명 정도가 찾고 있다.

▲  해미순교성지 표석의 위엄

▲  기와를 얹힌 해미순교성지 정문

▲  우람하게 지어진 해미순교성지 대성당
('소성당'도 같이 있음)

▲  초가로 이루어진 '이름없는 집'
순교자를 기억하며 '성경이어쓰기'를
하는 곳이다. (누구든 참여 가능)


▲  유해발견지 비석 -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순교자 유해를
발견한 곳에 조촐하게 비석을 세웠다.

▲  서문 밖에 있던 자리개돌(돌다리)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단하던 현장으로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되었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다. 허나 도로 확장으로 200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서문 밖 자리에는 대신 모조품을 두었다.

▲  해미읍성 주변에서 수습해온 조선 중~후기 비석 10기
이들은 해미 고을을 다스렸던 병마절도사와 수령의 선정비와 공덕비이다.
허나 저들 가운데 진정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  십자가가 있는 노천 야외 성당

▲  연못으로 이루어진 '진둠벙이'


▲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순교기념탑

이 무덤은 1935년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해를 담은 것으로 인근 상홍리 공소 뒷산의 백
씨 문중 묘역에 봉안했다가 1995년 이곳으로 유해를 담았다. 그 뒤로 1975년 지어진 높이 16
m의 순교기념탑이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특이하게도 문인석(文人石) 1쌍이 홀
을 꼭 쥐어들고 자리해 있다.
이곳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들이 묘를 지켜서고 있는 것이 참 이채롭기 그지 없는
데 그들 몸에 자욱한 때를 봐서는 1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이며, 처음 봉안했던 백씨 문중
묘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순교기념전시관

해미순교성지 가운데 자리에 무덤 봉분처럼 생긴 순교기념전시관이 자리해 있다. 위에는 봉분
(封墳)처럼 하고 밑에 돌로 다져 전시관을 닦았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과 해미
일대에서 수습된 천주교와 박해 관련 유물, 그리고 이 땅의 천주교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엄숙
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관람은 자유이다.


▲  순교기념전시관에 전시된 칼과 뿔나팔
피부가 꼬질꼬질 녹슨 칼은 천주교 신자를 처단할 때 쓰던 칼이라 전한다.

▲  생매장 현장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들
사람은 죽어 덧없는 해골이 되고,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은 살아남아
순교기념전시관과 우리나라 천주교의 소중한 유물이 되었다.

▲  해미읍성으로 끌려오는 천주교 신자를 형상화한 조각품

천주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내 마음을 앗아갈만한 존재도 없는지라 바깥에 풀어진 존재만
둘러보고 일찍 관람을 마무리 지었다. 하여 본글에서도 해미읍성과 다르게 아주 간단하게 다
루었다.

해미에서 죽어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1급 존재는 썩어빠진 나라와 권력층이다. 나라가 평안
하고 백성들의 삶이 넉넉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종교
에 너무 의존하려는 나약한 정신과 무지함, 삶을 포기하고 빨리 천당이나 가려는 마인드도 문
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 시절은 그만큼 고달펐던 시대였으니
까. 그리고 시대가 바뀌려는 일종의 격한 통증이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넘어가면 좋을 것이다.

현재 이 나라 꼬락서니도 왠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과 비슷해 보이는데, 더 이상 백성들
을 격한 궁지에 몰아넣어 저런 사태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단단히 썩어문드러
지고 첫단추부터 잘못된 이런 나라에 그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겠지만...

이렇게 하여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는 미답지 지우기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해미순교성지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해미까지 교통편은 앞의 해미읍성 교통정보 참조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남문5로를 따가라면 해미천이다. 다리(조산교)를
  건너서 오른쪽(서쪽) 둑방길을 쭉 따라가면 해미순교성지가 나온다. (십자가를 머금은 커다
  란 탑과 성당이 보임) 해미정류장에서 도보 12분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성지1로 13 ☎ 041-688-3183)
*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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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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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12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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