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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21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2
  2. 2020.04.28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독서당로40길 21 ☎ 02-2297-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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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 서울 개나리의 성지, 응봉산 봄나들이 (살곶이다리) '


▲  봄티가 물씬 풍기는 응봉산

▲  응봉산 꼭대기 응봉산정

▲  살곶이다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성동구 한복판에
자리한 응봉산(鷹峯山)을 찾았다.
서울숲을 먼저 둘러보고 중랑천에 걸린 용비교를 통해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응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는데, 응봉산은 응봉역(경의중앙선)이나 금호동 독서당로, 용비교
에서 접근하면 편하다.


▲  용비교 동측에서 바라본 응봉산의 위엄
(그 밑에 경의중앙선과 중랑천이 있음)


 

♠  응봉산 둘러보기

▲  용비교에서 바라본 중랑천(中浪川)과 응봉교

용비교 밑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동두천과 양주, 의정부,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물을 모두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긴 하천이다. 우리 동네 도봉동(道峰洞)을 지나는 하천이기도 한데 이
곳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폭이 왠만한 강 못지 않게 넓다.

중랑천 좌/우 옆구리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닦여져 있는데, 그의 우측(서쪽)에는 경의중앙
선 복선 철로가 있어 경의중앙선 전철(문산~용산~청량리~용문,지평)과 경춘선 ITX-청춘열차(
용산~춘천), 강릉선 고속전철(서울~강릉,동해)까지 수시로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종종 그들이
버벅대는 모습을 보인다. 선로는 겨우 2개인데 지나는 열차 종류는 허벌나게 많기 때문이다.
(관광열차와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지나다님)
그런 경의중앙선 바로 뒤에 펼쳐진 뫼가 바로 응봉산으로 한강을 향해 우람하고 잘생긴 암벽
을 아낌없이 내밀고 있다.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벼랑을 빼고 거의 노란 천하가 되지만 개나
리의 기운이 70% 이상 빠진 때에 왔기 때문에 녹색 비율이 더 높다.


▲  응봉산과 그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바위들이 우럭우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어 산의 경치를 크게 돋군다. 바위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한강, 중랑천과 맞닿은 산 남쪽을
입석포(立石浦)라 불렀다.

▲  응봉산과 경의중앙선, 중랑천 3박자가 어우러진 현장
오직 용비교에서만 그 매력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전철이나 각종 열차가
때맞추어 지나가면 더욱 금상첨화가 된다. 하여 이곳은 그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출사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  용비교 서쪽에서 응봉산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응봉산의 각박한 남쪽 벼랑을 극복하며 닦여진 길로 이쪽은 약간의 개나리와
하얀 벚꽃, 연분홍 진달래들이 봄의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  응봉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서쪽 능선이다.

▲  남쪽 계단길에서 바라본 용비교(왼쪽 다리)와 서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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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①
능선길 주변의 수풀은 거의 개나리이다. 개나리가 적지 않게 주저앉은 시기에
와서 실감은 덜하지만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완전 노란 개나리길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②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③ 정상 직전

밑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개나리들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상 주변
은 개나리들이 아직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래봐야 김옥균(金玉均)의 3일천
하처럼 고작 며칠 연장에 불과하다. 이래서 인생이나 세상만사가 참 부질없는 모양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④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①
서울숲과 용비교(바로 밑의 다리), 중랑천, 한강, 성수대교,
청담동과 압구정동 지역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②
한강과 중랑천 하류, 동호대교, 옥수동, 한남동, 압구정동, 신사동 지역

▲  응봉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응봉산정(鷹峯山亭)

응봉산의 나지막한 꼭대기에는 단아하게 생긴 2층짜리 응봉산정이 자리해 있다. 근래에 응봉
산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으로 그 주위로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응봉산 개나리축
제의 중심지로 공연과 먹거리 장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서울숲과 한강, 중랑천을 비롯하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
기, 옥수동, 한남동, 한강 너머로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봄
마다 찾아오는 중공산 미세먼지의 역한 내습으로 시야가 적지 않게 꺾여 보이는 것은 평소에
2/3 이하에 불과하다.


▲  옆에서 바라본 응봉산정

응봉산(응봉)은 성동구(城東區)의 한복판이자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급하게 솟은 해발
94m(95m)의 조촐한 뫼이다.
산의 이름인 응봉(鷹峯)은 매봉우리란 뜻으로 조선 때 제왕과 왕족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
다. 1395년에 응봉 기슭에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해 필요한 매를 충당했으며,
태조와 태종, 세종, 성종까지 여기서 자주 매사냥을 즐겨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
매사냥을 벌였던 곳이라 자연히 응봉, 응봉산, 매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산의 모양새가 마
치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응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중랑천과 한강과 맞닿은 산 남쪽은 각박한 벼랑으로 우럭우럭하게 생긴 암벽들이 많으며 그들
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보여 산 밑의 포구(浦口)를 입석포(선돌개)라 불렀다. 뒤에
는 응봉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도 잘 잡혀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에 이름있는 문인들
들이 서울(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선정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기며 격하게 찬양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의 낚
시)'이다.

응봉산은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막혀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옥수역 동쪽 달맞이봉
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대현산, 금호산, 남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
로 중간중간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가가 마구 들어서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엄연히 이어져
있으며, 서울숲에서 응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이들을 모두 엮은 도보길이 닦이면서 도시와 산,
숲을 아우른 서울 도심 속의 환상적인 지붕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단 대현산공원~응봉공원
구간은 부득이 번잡한 도로와 시내를 지나가야 됨)

응봉산에 안겨있던 옛 명소로는 관리들의 학습 장려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
書堂)이 서쪽 자락에 있었고, 양반사대부들이 지은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옥
수역 부근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국립 얼음창고인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또한 산 남쪽에는
앞서 언급했던 입석포가 있었다. (입석포를 제외하고 모두 세월이 잡아가고 없음)

허나 개발이 요란하게 칼춤을 추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렇게나 잘생기고 착했던 응봉산은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강제 성형수술을 강요 받게 된다. 응봉동(鷹峯洞)과 금호동 지역에 격하
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의 북쪽과 동쪽, 서쪽이 난도질을 당했고, 대현산과 이어지던 북쪽
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완전 절벽 수준으로 칼질을 당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1990년대 초반), 여기서 가까운 금호1가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다. 그때 응
봉산은 동네 우범지대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지. 하여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곳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만큼 20세기 말, 응봉산의 이미지는 참으로 우울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이 나날이 허약해지면서 모래흙이 자꾸 흘러내리자 그 대책으로 20만 그루의 개나리
를 심었는데 그 개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발의 칼질에 녹초가 다 된 응봉산을 되살려주었
고 그것이 글쎄 전화위복이 되어 도심 속 개나리동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동구는 1997년부터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여 이제는 서울의 주요 봄꽃 축제로 자리
를 잡게 되었으며, 금호동에 살 적에 단 1번도 오지 않았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사람
은 옷이 날개이듯, 산은 꽃이 날개인 모양이다.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성수동과 화양동, 송정동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차량들로 늘 버벅거리는 용비교와 서울숲, 성수대교 주변


응봉산은 매년 1월 1일 성동구청 주최로 해돋이행사가 열린다. 동쪽과 서쪽이 뻥 뚫려있어 일
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개나리가 크게 위엄을 부리는 3월 말~4월 초에는 '응봉
산 개나리축제'가 열려 상춘객들로 완전 시장통을 이룬다. (축제가 열리는 토,일요일에는 개
나리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임)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옛 저자도를 추억하다

윗 사진의 가운데 부분 한강(서울숲과 동호대교 사이)에는 저자도(楮子島)란 섬이 있었다. 그
는 한강의 주요 경승지의 일원으로 종이 제작에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이다. (섬의
이름인 저자는 닥나무를 뜻함)
그렇게 착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압구정동 아파트 조성에 필요한 흙을 충당하고
자 무식하게 폭파되어 인간의 시야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히 없어진 듯 보
였던 저자도는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조금씩 살아나 아주 작지만 섬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몇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지도에 다시 그를 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응봉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금호4가동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굉음을 울리며 응봉산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  응봉산 마무리

▲  개나리와 벚꽃이 아른거리는 응봉산 동쪽 능선길 ▼



▲  응봉산 출렁다리 (동쪽)

동쪽 능선길을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은 응봉산의 북쪽 자락을 돌아
응봉산정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출렁다리가 있다. (길 옆에 있음)
출렁다리는 응봉산정, 인공암벽공원과 함께 응봉산을 수식하는 조촐한 눈요깃감으로 벼랑 사
이에 짧은 허공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천하 출렁다리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청양 천장
호 출렁다리, 파주 감악산(紺岳山)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만은 못해도 복잡하기 그
지 없는 서울 도심에 거창할 것도 없이 저 정도의 흔들다리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리를 건널
때 조금씩 흔들거려 염통을 은근히 건드리니 다리의 이름값은 그런데로 하고 있다.


▲  응봉산 출렁다리를 건너다. (출렁다리 서쪽)

▲  개발의 칼질에 고통받는 응봉산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
절벽처럼 잘려나간 응봉산 북쪽 부분 (독서당로)


응봉산 서쪽과 북쪽은 개발의 칼질로 그의 살이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특히 대현산과 이어지
는 북쪽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아예 산줄기를 절단을 내버려 강제로 절벽이 되어버렸다. 흉
하게 깎인 동쪽과 북쪽에 인공암벽공원(동쪽 자락)을 설치하고 풀과 나무로 덮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과 너무 어색하다.

독서당로로 산줄기가 끊긴 북쪽 벼랑에는 나무데크길을 마치 고산지대의 잔도(棧道)처럼 아슬
아슬하게 걸쳐놓아 보기만 해도 참 아찔하다. 길 북쪽의 신동아아파트를 이어주는 육교가 설
치되어 응봉산 북쪽 산줄기(대현산)와 연결은 시켜놓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통행로이지 산줄
기는 아니다.
이 땅의 개발이 일찍 철이 들었다면 생태다리 터널 방식으로 도로를 뚫어 산의 피해를 최소화
시켰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하긴 이 땅의 개발지상주의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  응봉산 북쪽에 자리한 독서당공원

응봉산에서 독서당로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서쪽 길로 가면 독서당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겉으로 보면 응봉산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곳 역시 응봉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신동아아파트
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남북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공원 북쪽은 바로 대현산(대현산공원)
과 맞닿아있다. 또한 서울숲~남산을 잇는 둘레길이 이 공원의 신세를 지며 대현산, 금호산으
로 흘러간다.

공원 이름은 응봉산 자락에 있었다는 독서당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산뜻한 모습들을 드러
내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금호동과 옥수동, 응봉동에 달동
네 스타일의 집들이 마구 들어서 꽤 우울하고 어지러운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1973년 12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으며, 무허가 건물과 위험 건물이
마구 들어서 말썽이 자꾸만 늘자 2007년 10월 '공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주변을 모두 갈아
엎고 2009년 12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달동네 시절보다 다소 정비되고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나 공원도 좀 단조롭고 주변이 온통 성
냥갑 아파트 일색이라 지금의 풍경이 참 낯설고 재미가 없다. 기존 시내와 주택가를 싹 밀어
버리고 재개발이 된 곳들은 마치 같은 도장을 찍어낸 듯 다들 비슷한 모습 같다. 나도 서울이
고향이고 약수동과 금호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강제 성형을 당한 곳이 적지 않
아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 역시 모든 것을
지우기 좋아하는 심술쟁이 세월의 장난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37-7일대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①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②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③

▲  북쪽(대현산)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공원 산책로

▲  독서당공원 북쪽에서 만난 푸른 나무

▲  독서당공원 북쪽 입구 (금봉어린이집 옆)
공원 바로 북쪽에는 대현산을 등에 업은 대현산공원이 있다. 같은 지붕이지만
길(독서당로6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다른 것이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
- 보물 1,738호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한양대 남쪽 중랑천에 있는 살곶이다리를 찾았
다. (앞의 응봉산과 찾아간 시기는 틀리나 그곳과 가깝고 중랑천 라인이므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살곶이다리는 한자로 전곶교(箭串橋)라 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자 조선시대에
지어진 돌다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다리 길이가 수백m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
다. 길이 78m(256척), 너비 6m(20척) 정도로 기둥을 4줄로 하여 모두 64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려 대청마루를 올리듯 3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2줄 교각을 낮게하
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마름모형으로 다듬고, 다리
기둥에 무수하게 흠집을 내어 물살의 흐름을 배려했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꽤 들어간 것이다.

이 다리의 탄생 배경은 대략 이렇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은 서울 동부
지역으로 종종 외출을 나갔다. 하여 세종(世宗)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위해 1420년 5월, 그
길목인 살곶이에 다리를 지었다. 허나 중랑천 너비가 넓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를 이겨내
기 어려웠으며 때마침 태종도 승하하여 기초 공사 정도에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5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다리 가설의 필요성이 계속 제
기되면서 1475년 잠자고 있던 다리에 다시 손질을 가해 1483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뚝섬과 광진구, 송파, 경기도 동부와 동남부, 멀리로는 충청도 동부와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다리로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게다가 제왕과 왕족들이 화
양정(華陽亭)과 성덕정(聖德亭, 성수동)으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보러 가거나 여주 영녕릉(
英寧陵),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러 갈 때도 꼭 이곳을 거쳐갔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의 이
용이 높다보니 다리 폭을 넓게 잡았으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리기도 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하게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할 때, 애궂은 살곶이다
리까지 손을 대어 다리 석재를 절반씩이나 뜯어갔으나 대부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
다.
1920년대 대홍수로 다리가 크게 손실되었고 그런 상태로 방치되는 고통을 겪다가 1972년에 서
울시에서 복원을 했다. 허나 중랑천 폭이 그 사이 많이 넓어져 현재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
자 북쪽 구석으로 옮겼으나 너무 대충 복원하여 원래 모습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남
쪽에는 중랑천 물줄기 위에 시멘트로 연결다리를 엮으면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모두 살곶이다리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나 북쪽의 돌로 된 다리가 진짜이며, 중간에 돌로 두텁게 다져진 돌축대와 그 남쪽 다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살곶이다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살곶이다리는 보수공사로 다리 북쪽이 다소 어수선했다.
1972년에 서울시 철밥통들이 너무 날림으로 복원을 해서 손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행은 가능하며, 갈대와 온갖 수풀이 출렁이는 다리 밑도리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다리
높이가 낮고 물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가서 살피면 된다. 


▲  평지처럼 넓어 보이는 살곶이다리

돌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피부가 조금 거칠기는 하나 거닐기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이래뵈
도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크고 단단하며 제왕(帝王)들도 이용했던 비싼 다리이다. 다만 수
표교(水標橋)처럼 다리 양 모서리에 난간 같은 시설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
다.


▲  남쪽 돌축대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
돌다리와 시멘트 다리 사이에는 돌축대를 쌓았다. 그곳을 경계로 진짜 살곶이다리와
그를 접선하는 시멘트다리가 갈라진다. 돌축대 역시 1972년에 다져진 것이므로
원래 살곶이다리와는 관련이 없다.

▲  동쪽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다리 주변에는 갈대와 온갖 수풀들이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즐기고 있다.


다리의 이름이 되고 있는 살곶이는 이곳의 지명이다. 살곶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5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靖安大君)은 2차례(1398,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이방석, 이방번)을 때려죽이
고 친형인 이방간(李芳幹)까지 때려잡으면서 결국 1400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
한 태종이다.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이성계는 그의 본거지인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가 태종의 계속되는 설득에 못이겨 결국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부왕(父王)의 컴백
소식에 기뻐한 태종은 살곶이 부근에서 부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 하륜(河崙)이
혹시 모르니 연회장소에 큰 나무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즉 태조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못해
그의 주특기인 화살을 갑자기 날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 큰 기둥을 여러 개 세웠다.

태조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태종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는데 태조는 그를 보자 다시금
뚜껑이 뒤집혀 귀신같이 화살을 매겨 쏘았다. 태종 또한 무예를 조금 하는지라 잽싸게 큰 기
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했다. 이를 지켜본 태조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옥새를 내주었다고 하
며 태조가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1가지 이상
한 점이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오려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과 평강(平康), 철원(鐵原), 연천(漣川),
양주(楊州), 도봉구를 거쳐 동소문(혜화문)이나 동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런데 살곶이를
경유하는 것은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좁은 중랑천을 배를 타고 이동
했을 리는 없다. 다만 다리 남쪽인 성수동 성덕정은 군사 훈련을 했던 곳이라 다리 부근에서
제왕이나 귀족들,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살곶이의 유래가 되
지 않았을까 싶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성수동1가


▲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 (다리 남쪽 둑방길 터널에 있음)
저때 중랑천은 딱 살곶이다리 길이에 맞게 흘러갔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내부순환로
중랑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서식하는 도봉동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하천이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성동교와 2호선 철교

▲  늦가을에 물씬 잠긴 중랑천 둑방길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 남쪽에 길게 둘러진 둑방길로 들어섰다. 이 둑방은 성동교에서 송
정동주민센터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데, 둑방 위에 산책로를 닦고 긴 생머리의 버드나무와 여
러 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라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둑방 주변을 마치 네온사인마냥 화사하게
물들였다.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①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②

▲  둑방길 옆에 짧게 펼쳐진 은행나무 숲길
황금색 은행잎이 우수수 내려앉아 우울한 2글자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고 누워있다.

▲  중랑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너머가 송정동(松亭洞) 북부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산줄기는 고구려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 산줄기이다.

둑방길을 끝으로 봄의 응봉산+늦가을 살곶이다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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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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