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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0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2
  2. 2012.10.26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城北洞) 산책 '

▲  삼청각 편운정

 


서울 도심의 갑옷인 한양도성, 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북문에 해당되는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을 나서면 바로 성북동이 도심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서울의 주산
(主山)이자 영원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서울의 늠름한 진산(鎭山) 북
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인 성북동은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쎈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 분위기를 자랑하며 다소 예민한 지정학
적 위치상 개발의 물결도 잠잠하다. 하여 성북동에 오면 서울특별시 성북구가 아닌 교외(郊外
)로 나온 듯한 기분이 물씬 든다.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제단인 선잠단과 영성단(靈
星壇)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의 대부분은 왕실 소유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성락
원(城樂苑) 등의 사대부 별장(별서)이 나타났고, 구한말과 왜정 때는 부자와 문인들이 앞다투
어 들어와 집과 별장을 지으니 이종석 별장과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간송 선생의 보화각 등
이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왜정(倭政) 시절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머물면서 이 땅의 독립을
염원했고,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드넓은 땅을 프랑스 양이(洋夷)에게 사들여 북단장(北
壇壯)과 보화각(葆華閣)을 지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였다. 보화각은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거듭났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金珖燮)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들어와 성북동
의 아름다운 정취를 벗삼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고, 이 땅의 미술사학에 크게 이바지한 최순우
선생은 간송 선생을 도우며 성북동 한쪽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또한 청와대와 서울 도심과 가까운 이점으로 나는 새도 알아서 떨어지게 한다는 고위관료들도
많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북악산 아랫도리에 삼청터널이 뚫
렸고, 대원각과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뿌리를 내려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렸다. 그리고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의 북한 공비 패거리들이 성북동 북쪽 산자락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가 우리 군에게 토벌되는 등, 남북분단의 얼룩진 역사가 서려있기도 하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성북동을 둘러싼 북/서/남쪽 북악산 산줄기의 통행이 전면 통제되면서 성북
동은 도심 속의 막다른 섬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부유층과 권력층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통제 구역도 많았던 성북동은 1990년대 이후 변
화의 바람이 불면서 고급 요정을 모두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을 시켰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
수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로 단장했고, 대원각은 주인인 김영한(길상화)이 법정(法頂)에게
기증해 절(길상사, ☞ 관련글 보러가기)로 거듭났다. 또한 2006년 이후 북악산이 조금씩 개방
되면서 숙정문을 비롯한 북악산 주능선은 제한적이긴 해도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2009년
에는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 방면 산길이 거의 빗장을 열었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명
월형
(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 비
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은 제외)들이 밀고 들
어와 본의 아니게 졸부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수레가 없으면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도
안좋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차는 산동네인 성북동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괜히 땅값만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 꼬집기도 한다. (졸부들 집은 성북로 북쪽과 명수학교
주변에 몰려 있고, 성북로 남쪽은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음)
나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명소들이 많
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대궐만하고 대문이 성문(城門)
처럼 두터워도 위대하신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
러온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집들을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
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답사객의 신분으로 성북동
을 살펴보자. 더러운 졸부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명당의 기운도 좀 누리면서 말이다.

성북동은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나름 괜찮고 아름다운 명소도 즐비하다. 적어도 4
~5시간 정도의 발품으로 충분히 들러볼 수 있으며(간송미술관과 북악산은 별도) 발품을 팔 가
치도 충분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내세운 찻집과 까페, 맛집, 조촐한 미술관(갤러리)들이 산재
해 있어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이른바 5감의 재미를 덩달아 즐길 수 있다.

본글에서는 성북동 가운데서도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선잠단터와 심우장
, 삼청각을 소개한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북쪽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덮여있는
옛터와 근래에 세워진 선잠단터 표석, 홍살문만이 옛날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음을 아련히 귀뜀
해주고 있을 뿐, 제단의 흔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럼 선잠단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곳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공간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
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했던 400년 묵은 뽕나무 1그
루가 죽은 채 남아 서울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에서 키운 누에에게 먹였다. 1477년에는 창
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를 지
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종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의식은 순종 시절까지 이
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순종 황제가 '칙령(勅令) 제50호<향사리정(享祀
釐整)
에 관한 건>'를 발표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대거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
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를 모두 사직단으로 옮겼고, 선잠단은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왜정 때는 왜인(倭人)들이 원 모습을 알지 못하게끔 깔끔하게도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1939년 선잠단터
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인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부
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문화재로 지정하다니 망국의 제단을 아주 제대로 엿먹인 셈이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90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
입하여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단터에는 표석과 잔디를 입혔다. 그리고 1993년
부터 다시 선잠제를 여니 1908년 이후 85년 만에 부활이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대표 축제인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
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과 일부 행사/축제일을 제외하고는 문이 굳게 닫혀있으며, 굳이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미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를 한다. 허나 바깥
에서도 보일 것은 다 보이기 때문에 굳이 월담을 하면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슨지 오래건만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로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60~70년 묵은 아름드리 뽕나무들이 조촐하게 숲을 이룬다. 이들 뽕나무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었다.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에 묻
힌 이곳에는 그저 망국의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
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동쪽)으로 1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
  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 뒷쪽 언덕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
  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 선잠단터 내부를 보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인물,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고미
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근래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이다. 속
세에 이름을 떨친 지는 4~5년 정도로 나날이 답사객들이 늘고 있어 주말에 가면 늘 번잡하다.

최순우 옛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뜻있는 시
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
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집의 주인이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장
인 고유섭(高裕燮)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다리 폭파로 미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과 보화각이라 불림>에 있던 무수
한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그것을 포
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간송은 훈민정음과 일부 문화유산만 급히 챙기고
한강을 건너 피난감)
그들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똥개훈련을 시켰고, 손
재형은 일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감고 아픈 시늉까지 벌이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완전히 포
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했던 것이며, 그 인연으로 간송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  최순우 선생 왕년의 모습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
었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바로 이곳 성북동
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
世年代攷)','겸재정선론(謙齋鄭敾論)','한국의
불화(佛畵)','혜원신윤복론(蕙園申潤福論)','이
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
에 기대서서','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가 1976년에 구입하여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의지하던 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의 집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외로
운 신세가 되었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식을 접한
뜻있는 이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하여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발의 칼날
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치고 초췌해져 있었다. 하여
내셔널트러스트는 돈을 모아 2003~2004년에 복원 공사를 벌었고,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
여 나무와 풀, 꽃 등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꾸듯 동자상과 맷돌 등 다
양한 석물을 가져와 작지만 넓고 알찬 느낌을 준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
는 높은 담벼락이 있어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툇마루에 앉아 도심 속의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볼거리가 열려 늘 사람들
로 분주한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시민 곁에 다가서고 있다. 길상화가 길상사(吉詳寺)란 절을
속세에 선물로 안겼듯이 이곳 최순우옛집은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시민들
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인 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
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동네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나들이를 벌일 경우 가장 먼저 들러보는
것도 좋으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면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
트 삼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4년 11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최순우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은 소나무


▲  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를 비롯해 이 집을 거쳐간 이들의 목을 축여주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천하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과 꽃잎을 머금은 돌쟁반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안채 뒤쪽 툇마루 (4월 중순)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내부 접근은 통제되어
있으므로 문 밖에서 관람 요망)

▲  안채 뒤쪽 툇마루
서울에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뒷뜨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저들은 알맹이가 텅빈 장식용 장독이다.

▲  장독대 앞에 둥그런 돌탁자
탁자 주변에는 키 작은 7개의 돌의자가 머리에 방석을 쓰며 달처럼 둘러져 있다.

▲  돌이 박힌 뒷뜨락 산책로와 장승을 닮은 조그만 석상 2기

▲  다양한 석조물이 있는 뒷뜨락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권력실세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料亭)에서 시민들의 전통문화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 성북동 삼청각(三淸閣)

▲  북악산 한양도성 북쪽 산길에서 바라본 삼청각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하늘길이 지나는 북쪽 산줄기 사이 150m
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
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
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와 졸부들의 공간
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전통문화
의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개방되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산책과 전통문화를 즐
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
의 주인인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이곳은 북악산 등산의 기점으로 숙정문과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를 수 있으며, 2009년 개방된 북악하늘길, 속칭 김신조루트를 통해 북악산길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삼청터널을 통해 바로 서울 도심으로 이어지며, 한양도성 앞을 흐르는 산
길을 거쳐 말바위를 경유하여 삼청공원과 북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
의 높은 음식/차 가격, 시중보다 비싼 전통문화체험, 온갖 피로연, 가족행사 공간에 경악을 금
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삼청각 무료셔틀버스가 1일 12회(10~21시) 운행한다. (17~20시는 매시 20분, 그외는 정각에
  출발) 경유지는 종로1가 영풍문고(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을지로입구역(2호선/1번 출구),
  프레스센터(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광화문 교보문고(5호선 광화문역 3번 출구) 등이며,
  을지로입구역에선 삼청각 출발시간에 20분 정도를 더하면 된다.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
  차, 성북로를 쭉 따라가거나, 주암아파트 옆길로 11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으며, 삼청각 이용객에 한해 공짜)
① 광화문4거리 → 삼청동길 → 삼청공원 → 삼청터널 → 삼청각
② 한성대입구역 → 성북로 → 성북동종점 → 삼청각

★ 삼청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일화당 1층에는 고급한식당, 그 윗층에는 찻집 다원이 있다. (가격은 좀 비쌈)
* 매월마다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다래와 규방공예, 한복체험, 한국요리 등의 전
  통문화체험강좌가 열린다. (물론 유료임)
* 전통혼례와 가족연회, 세미나 공간도 갖추어져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30-115 (☎ 02-765-37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솟을대문 모습의 삼청각 정문 (그 옆에 삼청각 표석이 있음)
사람들은 기와집 정문으로, 수레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간다.


▲  지방의 시골길 같은 삼청각, 홍련사 앞길

▲  궁궐의 돌담처럼 기품이 돋보이는 삼청각 돌담길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는 유하정과 천추전이 있다.

▲  천추당(千秋堂)
고풍과 기품을 갖춘 전통 한옥으로 가족모임이나 돌잔치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34명 정도로 소나무가 둥지를 튼 주변 뜨락이 아름답다.


▲  유하정(幽霞亭)
삼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유하정은 팔각형 정자로 그 곁에 북악산 계곡물이
흐른다. 이곳은 전통문화 배움터나 기업 세미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3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  벚꽃나무 밑에 자리한 편운정(片雲亭)
유하정 뒤쪽에는 편운정이라 불리는 네모난 원
두막 쉼터가 있다. 여기서 편운(片雲)은 구름조
각이란 뜻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삼청각을 인수한
기념으로 지었다. 정자를 칭하고 있지만 원두막
에 가까운 모습이며, 그렇다고 화려함이 배여난
삼청각에 걸맞는 모습도 아니다. 그저 수수하고
조촐한 쉼터로 누구든 편안히 신발을 벗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편운정 곁에는 벚꽃나무 1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봄의 절정 때는 한송이 눈이 되어 대
지로 내려앉는 벚꽃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깃들
여진 현장이다.


▲  유하정과 편운정 곁을 흐르는 북악산 계곡

이끼가 낀 하얀 피부의 반석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그 사이로 서울의 허파, 북악산이 베푼 청
정한 계곡물이 큰 세상을 향해 졸졸졸~~♬ 흘러간다. 계곡의 내음과 숲의 맑은 내음, 솔솔 하늘
을 가르며 불어오는 산바람은 편운정에서 발길을 멈춘 나그네의 오염된 마음과 정신을 씻기기에
충분하다. 깊숙한 산골에서나 누릴 법한 자연의 향기와 풍경을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버젓히 박혀있는 것이 참 신선할 따름이다. 물론 이곳이 청정한 모습을 간직하게 된 것
은 국가의 예민한 곳을 두루 품은 북악산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  청천당(廳泉堂)
고즈넉함이 묻어난 양반가 별채의 모습으로 연회나 약혼식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60명 정도로 독립적인 앞뜨락을 갖추고 있다.

◀  일화당 뜨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5호로 70년을 묵은
소나무이다. 게다가 삼청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  삼청각의 중심 건물인 일화당(一和堂)

한옥의 당당함이 깃들여진 일화당은 삼청각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곳의 중심 건물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 대표단 만찬이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로 사진을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실
은 2층 규모(실제로는 3층)이다.

사진에 나온 2층은 각종 연회나 혼례식 장소로 쓰이며, 다양한 전통공연이 열리는 200석 규모의
공연장과 전통차와 커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다. 다원은 야외 테라
스가 있어 눈 앞에 펼쳐진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1층에는 한식당이 있는데 정갈한 전통한식을 먹을 수 있으며(가격이 비싼 것
은 함정). 일화당 앞뜨락과 전통놀이마당에서는 종종 전통놀이와 각종 행사가 열린다.


▲  일화당 다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천하 (동쪽 방향)
성북동과 북악산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그 너머로 동대문구, 성북구 지역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  일화당 1층 벽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일화당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추상화인 모양이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 한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 할까?

▲  모양도 가지각색인 일화당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 것이다.


▲  익한당으로 넘어가는 남천문(南天門)
궁궐 후원의 문을 보는 듯 기품이 돋보인다.

▲  일화당 동쪽 송림에 안긴 취한당(翠寒堂)
아담하고 편안한 모습의 별채로 가족단위의 소규모 행사 장소로 쓰인다.
취한당 서쪽에는 비슷한 모습을 지닌 동백헌(東白軒)이 있으며,
가족모임이나 다례, 전통요리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  쌍다리돼지불백에서 먹은 돼지불고기백반

▲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

성북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한정식과 한식 종류를 다루는 식당부터 누룽지백숙 등의 영양식,
칼국수와 만두, 돈까스 등의 분식을 다루는 집, 찻집과 까페 등 다양한 먹거리의 맛집들이 즐비
하다. 그중에서 돼지불고기백반과 돈까스집이 눈에 많이 띄는데, 돼지불고기백반집은 쌍다리정
류장 부근에 있고, 돈까스는 성북초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쌍다리 부근에 있다.
제일 위의 사진은 돼지불고기백반으로 이름난 쌍다리돼지불백(쌍다리기사식당)에서 먹은 돼지불
백인데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반찬과 상추, 상추쌈, 조개국이 백반을 이
룬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깃집이 1인 손님은 받지를 않으니 집이 아니면 해먹기가 그렇
다. 여기는 그런 점을 해소해준다. 그래서 1인 손님이 제법 많다. 가격은 7,000원으로 그런데로
그런데로 저렴하다. 이곳은 원래 택시기사들이 주로 찾던 기사식당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아랫 사진은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로 크기가 정말 왕만큼 크다. 성북동에 이런 왕돈
까스집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성북동 돈까스집은 특이하게 고추와 고추장이
나온다는 것, 특별한 맛은 없으나 양이 많아서 배불리기는 좋다. 돈까스 리필도 때에 따라 가능
하다. 가격은 8,000~9,000원으로 이 집 옆에는 같은 돈까스를 다루는 오박사네돈까스가 있어 서
로 경쟁이 치열하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음식점
* 추천 명소 - 최순우 옛집, 선잠단터, 간송미술관,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
  (家)>, 심우장, 북정마을, 삼청각, 성락원, 길상사, 한국가구박물관,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
  하늘길), 북악산(백악산) 산행, 숙정문, 와룡공원, 한양도성 등
* 음식점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돼지불백(돼지불고기 백반, 02-743-
  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
  까스(02-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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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0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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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城北洞) 나들이 '

▲  최순우 옛집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나의 시내 단골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성북동은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1년에 여러 번씩 들어가는 동네인데, 그렇게 질리도록 갔
음에도 돌아서면 또 가고 싶은 곳이 성북동이다. <부암동(付岩洞)과 북촌(北村)도 마찬가지>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
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돈 꽤나 주무르는 온갖 졸부(간송 전형필
은 제외)들이 몰려와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히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
다. 수레가 없으면 정말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이 좋지 않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턱까
지 오르는 산동네인 성북동에 말이다. 게다가 동쪽을 빼고는 모두 산으로 막힌 궁색한 지형
이다.
졸부들이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성북동을 선호하게 된 것은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땅값만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명소
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크고 대문이 성문처
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며, 나는 명소를 보고자 오는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 따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어깨와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답사객의 신
분으로 성북동을 둘러보자. 이곳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누리면서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거쳐간 2명의 위인,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
집, 그리고 조선시대 국가제단이던 선잠단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은 부촌과는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심적 부담은 크게 안가져도 된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간송미술관에서 삼청터널 방면 2차선 길을 10분 정도 가면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못
미쳐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동네 언덕을 150m정도 오르면 오
른쪽에 문화유적 안내판이 있는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
득하여 대궐 같은 집으로 도배가 되어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작 80년 밖
에 되지 않았고, 근래에 손질을 한 탓에 고색의 내음은 별로 없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
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다.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
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만해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하고 기리는 만해사상연구소가 소유하고 있다.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裕天)이며, 호(號)는 만해로 7살에 홍성읍 남문리로 이사를 갔다.
위대한 인물은 떡잎부터 확연히 다르다고 하더니만 어려서부터 천재, 신동이란 말을 많이 들었
고, 무슨 책이든 한번 보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4세에 전영주의 3째 딸인 전정숙(全貞淑)과 혼인했으며, 16세
에 뜻을 품고 집을 나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서 잠시 고용(雇傭)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설악산이 몹내 그리웠는지 다시 길을 떠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
갔다. 그리고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는데, 스승은 그에게 만화
(萬化)라는 이름을 주었으며, 법명을 용운(龍雲)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 했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
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의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에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최인(崔麟) 등이
몰래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긴밀히 연락을 취해 천도교(天道敎) 혼자서 할 것이 아
니라 각계 인사를 모아 거족적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민족대표 33인이 형성되었고 삼
일운동이 일어나던 그날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을 하고 낭독을 했다.
그 이후 왜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사식(私食)과 변호인을 거부했으며, 감옥에서
'독립의 서(書)'를 작성하여 독립선언서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47세에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국에 저항하
는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
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
년운동을 강화했으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
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만해를 평소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어느 날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집을 지을 자금이 없
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이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
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
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대
사관저가 뜬금없이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 부녀간
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사는 갔지만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있음) 그런
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왜국이 싫어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말끔히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공개
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88)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의 위엄

▲  만해가 머물던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진하게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을 지킨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글씨들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4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남국(南國)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이 없는 가
을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네. 은자
(隱者)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
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트는 듯 한데 헤
일 수 없는 짙은 가을 향기 선의를 때리누나~~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있는 가운데 방

▲  심우장과 한용운의 말년을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들 (왼쪽은 향나무, 오른쪽은 소나무)

심우장 뜨락에는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다. 왼쪽 사진의 나무는 향나
무로 수령(樹齡)이 80년이며,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 46호이다. 오른쪽 나무는 소나
무로 수령이 90년,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이다.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소
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전부터 살아오던 터줏대감으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며 심우장을 수식하
는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
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의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던 존재
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집을 지키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 하차,
  버스가 올라온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겨울은 17시 정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샛별로 속세에 이름을 날린지
는 이제 5~6년 정도이고 내가 여기에 처음 온 것은 2008년이다. 아직은 간송미술관이나 길상사
등 성북동의 이름 꽤나 굵은 선배 명소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짧은 시간 동안 크게 부상하여
이제는 성북동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최순우 옛집은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
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
장인 고유섭(高裕燮)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
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란 사람
은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
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게 했
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북한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
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世年代攷)','겸재 정선론','한국의 불화(佛畵)',
'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
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가 있다.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 왕년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안내문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
년 숨을 거둘 때까지 살던 곳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
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意氣)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
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
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
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
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
득해 시원하다. 아무리 여름 제국(帝國)의 강렬한 햇살도 여기서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툇마루에 앉아 한
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스이다. 또
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
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툇마루
에 걸터앉아 잔잔한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트로 삼으며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3번을 타
  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
  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 11월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는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으며, 관리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전통차를 판매
  한다. (가격은 그리 착하지는 않은 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대문 현판이 복잡한 한문대신 한글로
쓰여져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한줄기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여러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툇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을 머금은 석구(石臼, 돌통)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있
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킨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을 보
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탁자가 중심이 된 뒷뜨락 북쪽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탁자 주변에는 장독대와 조그만 돌통이 있는데,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
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 공간 안채 뒤쪽 툇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주말 오후에는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손님들로 툇마루가 무너질 지경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혜곡의 손떼가 묻어난 그의 유품들이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
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
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
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
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쪽 모퉁이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었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뒤
덮인 옛 제단터와 표석, 근래에 세운 홍살문,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난 뽕나무만이 이곳이 신성
한 장소였음을 보여줄 뿐, 장엄했던 제단의 흔적은 사라졌다. 마침 우리가 갔을 당시는 선잠제
례가 열렸던 날이 선잠단이 간만에 빗장을 열어 처음으로 내부에 들어갔다.

선잠단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
내던 제단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한신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하던 수령(樹齡) 400년의
뽕나무 1그루가 유일하게 남아있으나 오래 전에 숨을 거두어 지금은 몸뚱이만 남았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에게 먹였다. 1477
년에는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
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初四日)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조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의식은 순종 시
절까지 이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칙령(勅令) 제50호 <향사리정(享祀
釐整)에
관한 건>'에 의해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神位)는 모두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지고 선잠단은 그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허나 왜정 때 왜인(倭人)들이 사직단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던 선잠단을 말끔히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뒤늦게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면서 1939
년 그 터를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과 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60년대에 약 4만원의 돈을 들여 제단터를 정비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그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입해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무성하게 심었다. 특히 이곳 뽕나무는 나이가 60~7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로 지정되어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주요 축제,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은 굳게 닫혀있으며,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에 문의한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과 간만에 빗장을 연 정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아내린지 오래지만
근래에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가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로 초
라하게 사라진 이곳에는 그저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2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이 있는
  곳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문의는 ☎ 02-920-3048
* 선잠단터는 선잠제례 때만 공개한다. (가끔 랜덤으로 공개되는 경우도 있음) 관람을 원할 경
  우에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02-920-3413)에 문의하면 되며, 인근 선잠단 지킴이가 와서 문을
  열어 주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월담(?)도 허가해준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성북동집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

간송미술관에서 심우장으로 가는 길목에 '성북동집'이란 조그만 식당이 있다. 마치 시골이나 시
장의 어느 식당처럼 조촐한 인테리어로 자칫 지나치기는 쉽지만 여러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정도로 칼국수와 만두가 일품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주요 맛집의 하나로 칼국수는 양이 좀 많아 만두를 겯드릴 경우 하나만 주문하
여 나눠먹어도 된다. 반찬은 김치와 열무김치가 전부이며, 칼국수와 만두의 가격은 7,000~8,000
원 선으로 성북동에서는 그런데로 저렴한 편에 속한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맛집
* 추천 명소 - 선잠단터,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家)>, 심우장(尋牛莊), 삼
  청각, 길상사(吉祥寺), 최순우 옛집,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 산행(숙정문,
  백악마루, 촛대바위), 와룡공원, 정법사, 한국가구박물관, 성락원(城樂園, 관람 거의 불가),
  최사영 고택(십주원, 관람 불가)
* 맛집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식당(돼지불고기 백반, 02-743-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까스(02-
  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 성북동 관련 본인 작성 기행문들

① 간송미술관 ☞ 보러 가기  
② 길상사 ☞ 보러 가기
③ 삼청각 ☞ 보러 가기
④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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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0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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