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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2. 2016.02.27 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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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 북촌 겨울 나들이 '

▲  기기국 번사창


 


겨울 제국이 차디찬 위엄으로 천하를 꽁꽁 얼리던 연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을 찾았
다.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였지만 옷만 두둑히 챙겨 입으면 낮에는 햇님의 보우에 힘입어 그
런데로 다닐만하다. 날씨가 춥다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못하지. 당당하게
겨울 제국에 대항하며 바깥 바람을 많이 쐬야 건강에도 좋고 추위에도 잘 적응이 된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북촌(북촌한옥마을)은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
각산),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매년 적어도 10번 이상 발걸음
을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그곳에 나만의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북촌한옥마을 자
체가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나만의 꿀단지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다
만 북촌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꿀단지의 질도 틀려지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꿀단지
라도 빈 단지가 되고 만다.
북촌 답사의 갑(甲)은 본인이 늘 강조하지만,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북촌8경이나 정독도서
관, 삼청동길 등의 유명 장소와 맛집, 까페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골목 곳곳에 숨겨진 한
옥과 박물관, 공방, 문화유산, 그리고 북촌을 거쳐간 옛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의 삶과 향기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과 삶터를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뒤집지는 말자. 적당하게
선을 지키며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북촌은 껍데기만 남은 민속마을이 아닌 사람들이 살
며 삶을 꾸리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
원서동 고희동 가옥(高羲東 家屋) - 등록문화재 84호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고희동 가옥 외경

창덕궁길이 2갈래로 갈리는 원서동 빨래터 정류장에 붉은 피부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곳이 바로 2012년 11월에 개방된 고희동 가옥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희동, 그는 누구일까?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 수표동(水標洞)에서
구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9년 한성법어학교(
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다. 바로 그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서양화
를 처음 접했고,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04년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등
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主事)가 되었고, 전주 조경단(肇慶壇) 공사를 담
당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6년 궁내부주사 판임관(判任官) 4등으로 승서되었고,
1907년에는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자 그 시절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
진(趙錫晉)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허나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일색이었다. 그런 동양화에 금세 진절머리가 난 고희동은 서양화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장례원(掌禮院) 예식관 주임관 4등을 지내던 1909년에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왜열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이 땅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서양화를 배웠다.
당시로는 생소한 서양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그림 수업을 마치고 귀국해 신미
술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자매','정자관을 쓴 자화상(현재
동경예술대학에 있음)'을 출품했고, 이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그를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면서 이 땅 최초의 서양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가야금
을 타는 미인'을 출품했고,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중동고보, 휘문고보 등 서울 장안에서 꽤 잘
나가던 중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켰다.

1918년에는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과 서화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바로 그해에 지금의 집을
설계하여 만들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 있던 왜인 화가와 연합해 고려화회(高麗畵會)를 발족하
여 고문이 되었고, 1921년에는 중앙고보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해 자신의 서양화를 천하
에 선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뜰에서'란 그림으로 입선했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
람회 유채수채화 부문에서 4등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조선화단 칼럼과 제15회 협
전(協展)을 기고했으며, 1940년 중원대륙 북경(北京)에서 조선미술관이 개최한 '십대가산수풍경
화전'에 출품해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이 되자 조선문화
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 회장
도 겸했다.

1946년 10월에는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출품했고, 동
화화랑에서 조선미술협회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했다. 1947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으로 천거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1바퀴 둘러보고 왔다.
1948년에는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해 정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했는데,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및 초
대작가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이 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54년에 예술원의 종
신회원 겸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는 민주당의 고문이 되었고, 1956년 국립박물관 국보
전 선정위원이 되었는데, 고희동 외에도 그의 열성제자로 간송미술관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澗
松 全鎣弼)과 서양화가로 유명한 배렴이 그 위원에 선정되었다.
1957년 홍익대 명예교수가 되어 중앙공보관에서 '화필 50년 기념전'을 가졌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부인 조씨가 별세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천주
교에 귀의했고, 1965년 10월 22일,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붓을 놓고 만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새로운 조형 방법을 가르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다. 화단
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해 서양화적 수법을 동양화
에 가미했다. 또한 휘문고보 재직시 제자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해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그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명성에 비해
그만의 그림 화법을 이루지 못했고, 많은 그림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생생히 기억은 하지만 정작 그의 그림을 별로 모르는 실정이다.
 
* 고희동 가옥
1918년에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것으로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 기와집이다. 서양과 왜열도 주거문화의 장점을 반영하여 지었으며 이후에 사랑
채 겸 화실(畵室)을 추가로 증축했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여러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벗들이 안주 1
그릇씩 가져오면 주량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일기회(一器會)를 1주에 1번씩 열었다고 하며,
종종 흥취에 젖으면 즉석에서 벗들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시(漢詩)에도 관심을 가져
한시 창작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의 집을 들락거리던 그의 벗으로는 1907년 같이 그림 공부를 했던 이도영(李道榮), 1918년 서
화협회를 함께 조직했으며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그리고 노수현(盧壽鉉)과 이용우(李
用雨),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 등 이름만 들어도 거진 알 것 같은 현대화가들이 주류
를 이룬다. 그 시절 문학가의 모임 장소가 성북동(城北洞)에 있는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었다면, 미술가의 모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속세의 계속되는 무관심으로 폐가처럼 변해갔고, 2002년에는 한샘이
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무실과 연구소를 두면서 주차장을 만든다며 이 집을 매입해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했다. 그 회사의 부질없는 야욕 앞에 현대미술의 산실이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
가온 것이다. 다행히도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나서면서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
게 좌절되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가루가 되는 꼴은 면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집을 보수해 비공개로 두다가 2012년 11월 비로소 속
세에 개방했으며, 그 기념으로 2013년 1월 중순까지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란 테마로 오픈
기념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북촌의 새로운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성지(聖地)로 북촌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들 정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면 북촌의 주요 성지가 될 것으
로 기대된다.

※ 고희동 가옥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린다. 허나 거리
  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4분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0분
* 관람시간 : 10시~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
  에 무료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활짝 열린 고희동 가옥 대문


▲  고희동 가옥

복원된 고희동 가옥은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이지만 왜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의 일종이
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이 나타나는데, 가옥 내
부에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사랑채와 화실,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옥 북쪽 부분은
통제구역이다.
왜식으로 이루어진 현관에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
면 된다.


▲  뜨락 서쪽에 자리한 대나무의 위엄
겨울 제국의 압제로 푸른 기운을 찾기 힘든 시절이지만 대나무밭만큼은
겨울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제국에 저항하며 독야청청을
유지하는 대나무의 위엄 앞에 잠시 엄동설한을 잊어본다.

▲  뜨락에 놓인 동그란 나무 의자와
길쭉한 돌덩이

▲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둔 돌확으로
고희동 일가와는 관련이 없다.

▲  화실 방향 복도 (중간 문이 사무실)

▲  전시실 방향 복도


▲  예술 문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
왜정 때 미술가의 모임 장소로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으로 고희동이 쓰던
물품과 가옥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갖다둔 물품이 섞여 있다.

▲  문방사우가 갖춰진 탁자에 걸쭉하게 그려진 난초 수묵화
저들은 고희동과는 관련이 없다. 사랑방의 분위기와 고희동의 문향(文香)을
더해주고자 복원 이후에 갖다둔 장식품이다.

▲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저고리 - 옷의 때깔이 무지 깨끗해 고희동의
체취가 담긴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장식용~~

             ▲  고희동 가옥 화실
사랑방과 이웃한 화실은 고희동의 여러 그림이
앞다투어 눈을 뜬 곳이다. 하지만 그의 화실과
관련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그가 활동했던 왜
정 때와 1950~60년대 화실 스타일을 참조해 어
림짐작으로 재현했다.

 


◀  사랑채와 화실 복도


▲  전시실에 진열된 고희동 관련 문서들

가옥 서쪽 부분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좌측에 자리한 전시실은 고희동과 관련된 문서와 사
진, 신문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문서 중에는 복제품이 여럿 있다. 그리고 우측 전시실은 고희
동과 그의 벗들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진품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처럼 섞여있지만, 어느 것이 진품인지 설명문에 표시가 없어 관계자도 아리송할 정도
이다.


▲  위에 있는 문서는 1905년 고희동을 9품 종사랑(從仕郞)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이다. (복제품)
밑에 있는 것은 그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장(1915년 졸업)이다. (복제품)

▲  고희동의 빛바랜 사진과 1901년 한성법어학교 재학 시절에
학업 우수로 받은 상장 (이것도 역시 복제품)

▲  고희동과 그의 가족 사진들
윗줄 가장 왼쪽 사진은 그의 부모 사진이며, 중간줄 왼쪽은 왕년의 그의 사진이다.
그 오른쪽은 간송 전형필 집에서 찍은 것으로 부채를 든 이가 간송이다.
오른쪽 그림들은 고희동이 그린 그림이다.

▲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란 이름으로 실린 고희동 (미술 1964년 6월호)
밑에는 왜정 때 이 땅의 화가들이 조직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발간한 서화협회회보

▲  고희동 관련 신문기사와 사진들

윗줄 왼쪽은 춘곡의 개인전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기사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고희동의 화필생애50년을 기념하는 작품전시회 목록(복사본). 그 오른쪽은 1940년에
서울부민관에서 찍은 개인전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상허 이태준도 있음)
아랫줄 왼쪽은 1957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곡의 변(辯)이란 신문기사로 '춘곡'이란 호
는 이름 희동에서 동(東)을 의미하는 춘(春)과 양곡(暘谷)이란 고문자에서 곡을 따서 지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양화 수입의 선구자라며 고희동을 소개한 1940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  왼쪽부터 한국인물화전 팜플렛과 고희동을 소개한 한국현대미술사
서적(동양편 1976년, 서양편 1977년), 오른쪽은 '현대미술 100년
춘곡 고희동'이란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 한국일보 신문기사

▲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고희동의 그림들 (복제품)

◀  고희동 가옥의 뒷모습
붉은 벽돌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있다.


▲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난 어느 갤러리

북촌에는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전시관, 공방이 있어 북촌 나들이의 꿀맛을 더해주는데, 공예
품이나 장식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갤러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만난 갤러
리(윗 사진)도 그 중 하나로 한국금융연수원 남쪽 언덕배기에 있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갖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이 좀 야박하다. 굳이 구매가 아니더라도 북촌이나 인사동
에 이런 공간이 즐비하므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갤러리에서 만난 이쁜 공예품들


 

♠  구한말에 지어진 무기 창고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1호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나온다. 이곳은
북촌 명소가 아닌 한국은행 소속의 연수원이라 많은 나들이객들은 '삼청동에 왠 연수원?' 고개
를 갸우뚱하며 지나갈 뿐이다. 허나 그 안에 조선 후기 무기 공장 겸 창고인 기기국 번사창(이
하 번사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뚱맞은 한국금융연수원이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번사창은 연수원 내부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연수원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허가를 받아
야 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18시(겨울에는 17시) 이후가 아니면 거의 통과시켜주니 관람에
는 별 문제는 없다. 상황에 따라 번사창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수원 북쪽에
벽돌로 꼼꼼하게 무장된 번사창 건물이 듬직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건물 주위에는 공원용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져 있으며, 번사창 바로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번사창 남쪽 연수원 건물 바깥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커피가 공짜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음)
이곳에 들어온 연수생이나 직원, 기타 업무로 찾은 이들을 위해 공짜로 한 것인데, 시중 자판기
보다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뽑아 마시며, 추위를 녹였지. 근데 상황에 따라 커피를
뽑지 못하도록 매정하게 잠궈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 번사창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격동의 시절인 구한말, 근대식 무기를 만들고자 세운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무기 공장
겸 창고이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6월에 준공된 것으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를 벌일
때 이응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나와 건물의 탄생 시기와 성격을 알려주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 칼과 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
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건물 이름인 번사(飜沙)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한 용기에 화약을 넣고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
는 뜻이다. 근대식 무기가 화약
무기 중심이니 딱 그에 걸맞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창(廠)은 공장을 뜻한다.

1876년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단단히 털린 조선 조정은 신식 무기를 만들고자
기기국이란 관청을 세웠으나 정작 무기 공장은 1884년에야 만들었다. 부국강병을 향한 조선의
꿈이 대단했는지, 기기국과 번사창의 위치를 삼청동 명당(明堂)에 세웠음을 상량문에서 밝혔다.
허나 조선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부 시절을 제외하면 늘 약소국을 면치 면했던 나라라 부국강병
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이후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1910년을 끝으로 기기국
의 역할은 강제로 마감되고 만다.

번사창은 장대석(長臺石)과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다지고 바로 그 위에 검은색과 회색 벽
돌로 사방을 꽁꽁 둘렀는데, 이는 청나라 건축과 서양 건축을 적당히 섞어서 지은 청나라 양식
의 기와집이다. 이렇게 지어진 것은 1881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조선 조정에서 파견
한 영선사(領選使) 출신이 공사를 지휘,감독했기 때문이다.
1883년 번사창을 지을 때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청나라 장인
4명을 잡아와 5월부터 건물 공사에 들어갔는데,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하여 박정
양(朴定陽), 윤태준(尹泰駿) 등이 감독을 했고, 김명균이 상해 험취소(驗取所)에서 무기 제조
기기를 구입해서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건물 준공이 늦어지자 인부들을 독려했으며, 이때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철모자 만드는 곳, 고방(庫房) 등을 만들
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띄고 있으며, 기존 조선의 건물과는 다른 청나라식 건물이라 조금은 이국적
이다. 허나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무기고(武器庫)이다 보니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저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건물의 길이는 33m, 폭 8.5m, 연면적은 217.58㎡에 이른다.

건물 정면 중앙에는 홍예 다리처럼 아치를 튼 붉은색 문을 내었고, 우측 부분에 조그만 문을 두
고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었다. 내부 환기를 위해 5개의 창을 냈는데, 창문은 녹색이다. 측면에
는 문을 1개, 창문을 2개 냈으며, 지붕에는 무기 제조 및 수리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고
자 조그만 창틀을 냈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 지었다.

번사창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저히 군사용으로 쓰인 곳으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별창(別
倉)이 있었다. 군기시 관청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창(北倉)이라 불렸으며, 화약무기를 제조했기
때문에 화약고(火藥庫) 터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에 기기국에 통합되어 이
일대는 기기국 소속이 되었으며, 500여 년 이상 군사용으로 쓰인 이곳의 전통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에 끊기고 만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기국 관청은 왜정에 의해 죄다 사라지고 겨우 번사창 하나만 목숨을 건졌는
데, 왜정은 조선의 관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거나 어정쩡하게 1~2개만 남겨 망국(亡國)을 철저
하게 우롱하였다. 그 이후 기기국 자리에 엉뚱하게 한국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번사창은 그 뜨
락의 장식물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북촌의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생각이지만 한국금융연수원을 외곽으로 쿨하게 옮기고 북촌과 삼청동을 위한
문화/쉼터 공간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던 국군수도병원도 이전
되어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왔는데, 은행 연수원이 북촌 핵심에 굳이 있을 필요는 없
다. 청와대나 국무총리공관, 주변 군사시설 등 국가에 예민한 시설은 어쩔 수 없지만 연수원만
큼은 꼭 옮겨 북촌과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연수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이런 곳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딱 제격이다.

※ 기기국 번사창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2번 출구),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금융연수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국금융연수원 정문이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4번 출구)에서 광화문과 삼청동길을 따라 도보 25분
* 공개시간 : 9시 이후부터 18시 이전(겨울은 그보다 일찍), 연수원 사정으로 개방이 안되는 경
  우도 종종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1 (삼청로 118)

▲  우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좌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북막골

겨울 제국에 저항하며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햇님은 커텐을 치고 사라졌고, 달님이 검
게 탄 천하를 갸날프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꽤나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6시인 걸.
제아무리 태양계에서 제일 크다는 햇님이라 할 지라도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모양이다.
본글에 언급한 명소 외에도 여러 곳을 덧붙여 둘러봤지만 상당수는 이미 지겹게 가본 곳이라 제
대로 사진을 남긴 고희동 가옥과 번사창만 다루었다. 본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고희동가옥이
며, 번사창은 조연, 나머지는 엑스트라로 보면 된다.

세상이 검게 타들어가니 햇님의 눈치에 잠시 움츠려들던 추위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게다가 모락
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라 시장기도 추위와 앞다투어 나를 괴롭힌다. 삼청동을 비롯한 북
촌 일대에는 북촌의 오랜 전통만큼이나 괜찮은 식당이 꽤 많은데, 이번에는 안가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악골도 아닌 북막골, 삼청동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자
리한 식당으로 입구에 식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요란하게 서 있다.
북막골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발을 감싼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
어가서 방에서 식사를 해야 된다. 보온을 따스하게 했는지 방이 매우 따스하며, 천정에는 대들
보를 비롯해 한옥의 선이 우아하게 빛나 있고, 방에는 여러가지 전통 장식물이 달려있어 밥이
나올 때까지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 달래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은 바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방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떡국, 전골, 보쌈, 막국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격은 시중보다
조금 얹혀진 편. (삼청동과 인사동은 괜찮은 식당은 많지만 가격이 좀 있음) 떡국 가운데 겨울
별미라는 굴떡국(한시적 메뉴임)이 있길래 그것을 함 먹어보기로 했지. 어렸을 때는 굴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냥 퍼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잠시 뒤 밑반찬이 차려지고 떡국이 나오는데, 국물도 제법 숙성이 되어있었고 굴과 떡, 김, 파
가 어우러져 괜찮은 떡국을 자아내고 있었다. 밑반찬 가운데는 물김치(나박김치)가 있는데, 맛
이 시원해서 좋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니 방의 온기와 배부른 뒤에 찾아오는 식곤증이 나를 희롱한다. 추운 곳에
서 오래 있다가 따스한 곳에 들어앉아 뜨끈한 것을 먹으니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겠다.


▲  북막골에서 먹은 굴떡국의 위엄

▲  북막골 툇마루에 있는 달덩이 같은 하얀 백자

▲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에서 먹은 십전대보탕과 팥죽

저녁을 배불리 먹었으니 후식으로 차 1잔의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 더군다나 북촌에 왔으니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청동에는 맛집도 많지만 닭의 털처럼 찻집/까페도 많이 있다. 허나 북촌의 성격을 망각한 장
사치와 행정당국의 그릇된 생각으로 한옥 찻집이 줄어들고, 서구 스타일의 거의 획일적인 까페
와 양식당,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적당히 있으면 상관은 없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참 좋
은데, 그 바람은 북촌 곳곳을 들쑤시고 있으며, 삼청동길은 북촌인지 서구의 어느 구석인지 햇
갈릴 정도로 변해버려 뜻 있는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한다.
일반 대중들이야 삼청동길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던 이런 모습도 좋다고 찬양을 하겠지만 상술로
인해 지나치게 상업/서구화 되어 북촌의 성격과 개성에 크게 도전하는 것은 썩 좋지가 않다.

삼청동길이 서울 도심 이상이나 요란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지닌 찻집이 하나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찻집인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다. 찻집 이름치고는 너무나 긴 편
인데, 첫째로 잘하는 집도 아닌 둘째를 칭한 것이 참 이채롭다. 그렇다면 첫째로 잘하는 집도
있어야 되는데, 그 집은 아직 없는거 같다.
첫째를 칭하지 않고 둘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좀 겸손해 보이기도 하고, 1등을 향해 열심히 장
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이며, 자칭 서울 2위라는 우월의식과 자부심도 느껴지기도 한다. 어
쨌든 이름부터가 확 눈에 띄는 이 집은 현란한 분위기의 까페와 달리 1960~70년대 빵집이나 다
방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찻집 내부도 그렇고, 의자와 탁자도 그렇지. 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찻집으로 20대는 물론 중장년층도 많이 찾는다. 삼청동의 다른 까페/찻집은 거의
20~30대 위주인데 반해 여기는 전 연령층을 소화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집에 걸맞게 손님도 많아 평일과 휴일 저녁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찻집 관
계자도 알아서 손님들이 와서 매출을 올려주니 조금은 배부른 모습이고, 내부를 조금 늘렸다고
는 해도 좁은 것은 마찬가지. 삼청동을 숱하게 들락거린 나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다. 이곳을 몰
라서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별로라서 그리 내키지가 않았고 늘 사람들로 가득하니 들
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지(冬至)도 코앞에 다가오고 해서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어서 덥썩 물었다.

이 집은 십전대보탕과 녹각대보탕, 팥죽이 유명한데, 슬슬 건강을 생각할 때라 나는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을, 여인네는 팥죽을 먹었다. 둘다 가격은 6~7천원선, 십전대보탕은 밤과 죽을 비
롯해 온갖 한약제가 뒤섞여 있는데, 차가 아닌 거의 한약이다. 찻집에서 먹는 한약, 이거 먹고
몸 좀 좋아졌으려나 모르겠네. 팥죽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너무 달콤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하여 북촌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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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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