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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2. 2013.05.14 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3. 2013.01.21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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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北村)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안국동 일대)'

▲  북촌문화센터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은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을 이룬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
이 존재한다. 관람이 가능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해 공방(工房)과 박물관 등의 문화/
예술공간, 전통체험공간,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 정도이며, 북촌문화센터와 몇몇 공방과 문
화/예술공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정의 돈이나 연줄이 필요하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여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복잡해 길치들은 헤매기가 아주 좋으며 관광객 상당수는 북촌8경으로 꼽
히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의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길,
북촌길 등 널리 알려진 곳에만 잔뜩 몰려있을 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많은 명소와 미로처럼
얽혀진 조그만 골목길은 사람이 별로 없다. 별처럼 무수히 흩어진 수많은 박물관과 문화유적
/전통체험공간 상당수는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이를 놓치고 유명한 곳들만
둘러보는 것은 북촌의 겉만 도는 것과 같다. 본인이 강조하건데 북촌의 매력은 크고 작은 골
목길을 구석구석 돌면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며 술래에서 벗어난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城北洞)과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
십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
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네요?'말
을 꺼내지만 여태까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대부분은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
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태반이 주거용이며 공방 등의 작업실과
숙박시설로 쓰이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니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
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
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한옥은
후손들이 알아서 평가해 줄 것이다.

본글에서는 2013년 1월에 올렸던 북촌 글에 이어서 재동과 가회동, 정독도서관 주변 명소 일
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북촌 계동, 원서동, 창덕궁길 보러보기 (클릭)


♠  재동길 주변 (재동백송, 재동초교)

▲  재동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8호

헌법재판소 경내 북쪽에는 하얀 줄기의 큼직한 노송(老松)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
다. 바로 소나무의 일종이자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인 백송이다.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
밖에 자라지 않는 느림보 나무로 하얀 피부의 줄기로 인해 백송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이나 거기선 오래 전에 이미 씨가 말라버렸으며, 조선시대에 대륙에
서 넘어온 백송 일부가 살아남아 옛 기록이나 화석(化石)으로나 봐야되는 비운을 간신히 면하고
있다.
현재 목숨이 붙어있는 오래된 백송은 재동 백송을 비롯하여 조계사에 있는 '수송동(壽松洞) 백
송', 고양시에 '송포 백송', 이천에 있는 '신대리 백송', 예산 추사고택의 백송이 전부로 그만
큼 희소성이 매우 크다.

우리나라 백송의 으뜸은 경복궁 서쪽의 통의동(通義洞) 백송으로 천연기념물 4호의 지위를 가지
고 있었다. 허나 1990년 9월 가을 폭우의 괴롭힘에 결국 운명을 하고 말았다. 그가 비참하게 세
상을 뜨자(그의 죽은 몸뚱이는 남아있음) 그에게 주어진 천연기념물 지위는 소멸되었으며, 그의
후배인 재동 백송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재동 백송은 600년 가량 묵은 오래된 나무로 15세기에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
이다. 높이는 15m, 면적은 230㎡로 줄기가 2갈래로 갈라져 'V'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나무 껍
데기는 비늘처럼 벗겨져 얼룩무늬처럼 보인다. 특히 밑둥 빛깔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에서 제일 큰 백송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백송으로도 꼽히기도 한다.

백송은 그것을 가꾼 사람의 영화(榮華)에 비례해 껍대기 피부가 하예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속설
을 가지고 있는데, 재동 백송은 얼마만한 영화를 보아왔길래 저렇게 새하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백송이 있는 이곳은 조선 영조 때 풍양조씨의 우두머리인 조상경(趙尙絅)의 집이 있었다. 그는
영조 시절에 판서를 9번이나 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조돈(趙暾)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카
는 조고집과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趙嚴)이다. 그 이후 조대비(趙大妃)로 유명한 신정황후(神貞
皇后)까지 배출하면서 그야말로 안동김씨를 뛰어넘는 세도가가 되었다. 그러니 백송의 뽀얀 피
부는 더욱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  약간 옆에서 본 재동 백송의 위엄

▲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

▲  제중원(광혜원)터 표석

풍양조씨의 공간이던 이곳이 언제부턴가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넘어갔는데,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조부(祖父)는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으로 인근 계동 제
비바위 아래 외진 곳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박규수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선두적인 인물로 평양(平壤)에서 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을 계기로
서양 문물의 단물을 취하도록 설득하면서 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허나 흥선대원군(興宣大
院君)이 쇄국정책만을 고집하면서 그의 주장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만다. 우둔한 쇄국정책
의 결과 1876년 강화도(江華島)에서 왜국과 그것도 강제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는데, 바로
그해 박규수는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 인물을 비롯하여 개화사상에 관심이 많은 젋은 선비들
이 자주 찾아와 삼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가 세상을 뜨자 집은 친일파로 악명높은 이윤용(李允用, 1854~1939)에게 잠시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데, 형제가 쌍으로 비열한 매국노(賣國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옆집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역인 홍영식(洪英植)이 살았는데,
갑신정변이 그 유명한 3일 천하로 싱겁게 끝을 맺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은 패주하는 왜국
공사(公使)를 따라 왜국공사관을 거쳐 왜열도로 도망을 치고, 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을 호
위하며 북묘(北廟)까지 따라갔으나 거기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갑신정변으로 허벌나게 고생한 고종은 정변의 주역을 역적으로 간주하고 홍영식의 집을 몰수했
다. 그러다다 1885년 알렌에게 하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廣惠院, 제중원(濟衆
院)>이 들어섰다.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 개화당에게 제일 먼저 난도질을 당해 저승 코
앞까지 갔던 민영익(閔泳翊)을 살린 인물로 그 인연으로 광혜원 원장이 된 것이다.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은 1887년 을지로2가로 둥지를 옮겼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 학교는 1945년 10월 정동으로 이전되고, 1949년 창덕여중이 들어와
나중에 창덕여중/여고로 분리된다. 허나 그 학교는 강동 개발이 한참이던 1989년 땅값 차익을
두둑히 챙기며 둔촌동(遁村洞)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자리에는 1993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뒤쪽에 있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1882년 12월에 세워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
務衙門, 줄여서 외아문(外衙門)이라고 함>이란 긴 이름에 관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명성황
후 집안인 민태호(閔台鎬)의 집이 있었다. 외아문은 1886년 광화문 육조거리로 이전되었다.

백송을 둘러싼 집과 토지의 주인을 계속 바뀌었지만 백송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
고 있다. 명나라에서 건너온 백송이지만 이곳 토양에 적응해가며 저렇게 커 간 것이다. 게다가
세도가의 집안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집안이 두루 거쳐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
그리고 사법의 중심지, 헌법재판소까지 앞다투어 그의 그늘을 받았으니 참 대단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나오면 헌법재판소이다. 백송은 건물 북쪽에 있음 (정문 관
  리실에 허가를 받고 들어가면 된다. 낮에 가면 왠만하면 다 들여보내줌)
* 재동 백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35 (헌법재판소 내)


▲  재동 백송의 후예
재동 백송의 후예를 기르고자 1977년 그의 종자(種字)를 채집하여 문화재청 소속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30년 동안 관리하다가 2008년 3월 7일
이곳으로 옮겼다. 재동 백송의 유일한 혈손이자 희망과 같은 존재다.

▲  재동 백송 북쪽에 꾸며진 조그만 공원
헌법재판소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주는 공간이다.
공원 서쪽의 전통담장 너머로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들은 북촌 한옥의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윤보선가이다.

▲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재동초등학교

가회로와 북촌길이 만나는 곳에 재동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북촌 사람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던
초등학교로 1895년 7월 고종이 발표한 칙령(勅令) 145호 29조 '소학교령(小學校令)'에 따라 문
을 열었다. 처음에는 인근 계동에 자리하여 계동소학교라 불렸으며, 그해 9월 지금의 자리로 옮
겨져 재동소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1906년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의 공포로 4년제 관립 재동보통학교로 개명되고 1910년에 재동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38년 재동심상소학교, 1941년 재동공립국민학교로, 1946년
재동국민학교(현재는 재동초등학교)가 되었으며, 1969년 11월 인근에 있던 삼청초등학교가 폐교
되어 이곳에 통폐합되기도 했다. 초등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저 시골의 일로만 여겨졌는데, 서
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도심공동화(都心空洞化) 현상과 북촌의 쇠
락이 큰 원인이다.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와 함께 신입생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간신히 2자리
를 채우고 있다. 북촌과 종로구 도심에서는 아무리 쥐어짜도 신입생 수요가 신통치가 않으니 별
수 없이 타 지역으로 눈을 돌려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내걸며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유진오(兪鎭午), 백두진(白頭眞), 김상만(金相万) 등이 이 학교를 나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10 (☎ 02-763-1812)

◀  재동초교 교문 앞에 심어진 진단학회
(震檀學會)터 표석
진단학회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언어를 연구
하고자 1934년 5월에 설립된 학술단체이다.


▲  가회동 백인제(白麟濟) 가옥 바깥채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철문 너머로 백인제 가옥의 대문이 보인다.

정독도서관 동쪽에 자리한 백인제 가옥은 1874년 한상룡이 지은 집으로 압록강(鴨綠江) 흑송(黑
松)을 가져와 지은 상류 주택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한 동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왜정 때 우리나라 외과 의술(醫術)의 1인자였던 백인제(白麟濟)가 1920년대부터 6.25전
쟁 시절 납북되기 이전까지 살던 집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공익법인 백
병원을 설립했으며, 백병원과 그 계열인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현재 백인제의 후손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이 막힐 듯한 커다란 검은 철제대문을 설치하
여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물론 내부 관람은 연줄이 없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집터 표석
조선 후기 정치가이자 왜정 때 독립운동가로 신
간회(新幹會)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뤄졌다.


♠  가회동 11번지(북촌3경) 주변
북촌3경 골목길
▲  복촌3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복촌3경 골목길 (밑에서 바라본 모습)

▲  가회민화박물관(가회민화공방)

가회동 11번지에 자리한 북촌3경은 한옥이 밀집된 조그만 골목길이다. 이곳에는 여러 공방과 박
물관이 둥지를 틀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전에 가봤던 가회민화박물관(가회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백성들의 삶과 소망이 담긴 민화(民畵)와 부적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북촌에 뿌
리를 내린 박물관답게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2년에 문을 열었다. 250점의 민화와 750점
의 부적, 150점의 서적, 기타 민속자료 250점 등 1,500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에
서 100점 정도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다.

박물관이 작고 그에 반해 입장료가 미운 수준이라 처음에는 실망할 수 있으나 그런데로 둘러볼
만하다. 게다가 전시실 서쪽 공간에는 차를 즐기며 쉬어가는 공간이 있으며, 시원한 녹차를 무
한으로 제공한다. 또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이라 아무데나 털썩 주저 앉아 안내문이나 책을
읽으며 이야기 꽃도 피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103 (☎ 02-741-0466, Fax 02-741-4766)
* 관람료 : 일반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감사원 방면으로 500m 가면 전통병과교육원과 가회박물관을 알리
  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골목을 1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에 있다.

* 가회민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 , 박물관 답사기는 ☞ 이곳을 클릭


▲  가회민화박물관 내부

▲  한상수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

북촌3경 북쪽에 자리한 한상수 자수박물관(한상수 자수공방)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0호인 자
수장(刺繡匠) 기능보유자 한상수 선생이 운영하는 공방 겸 박물관이다. 한상수의 작품을 비롯하
여 조선 후기 자수품(刺繡品)과 복식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학습도 가능하다. 박
물관의 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가회민화박물관과 비슷하며,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관람에 임
하면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32 (☎ 02-744-1545)
* 관람료 : 일반 3,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 관람시간 : 10시 ~ 17시 (매주 월요일 휴관)
* 한상수 자수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옛 경기고등학교에 둥지를 튼 시민과 학생의 지식 쉼터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화동 구 경기고교 - 등록문화재 2호

감고당길과 북촌길이 만나는 화동(花洞)에 지식의 마르지 않는 샘인 정독도서관이 자리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
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과 서재
필(徐載弼)의 집이 나란히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당시에 건물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쪽
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해 평탄작업을 벌
여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 건물은 1938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강남 개발이 한참이던
1976년 청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겼다. 서울시의 권고라고는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땅값이 상당하며, 당시 청담동은 매우 저렴했다. 그
래서 쏠쏠하게 땅값 이득을 챙기고 쿨하게 강남으로 넘어간 것이다.
경기고가 떠나자 서울시에서는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1만 7천여 점의 비
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남쪽 건물을 손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꽤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다. 나 역시 여
러 번 이곳에 와 공부를 한답시고 책만 펴놓고 꿈나라를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정원이 깔끔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해 굳이 공부나 서적 대출이 아니
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도서관 동쪽에는 한때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친부의 옛 건물이 있었고, 3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와 본관 뒤에 정체가 묘한 오래된
우물과 여러 석물이 있어 소소하게 고색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북촌이 서울 관광의 성지의 부상하면서 그 한복판에 박힌 이곳 역시 그 후광을 입어 북촌 나들
이에서 필수로 가야되는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나 책 때문에 오는 사람보다 나들이/출사로
온 사람이 더 많을 정도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가운데 유일하게 관광지화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공부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북촌의 일부라 도서관 분위기도
차분하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만큼 건물 내부와 열람실에서 고성방
가를 자행하거나 공부/독서를 방해하는 행위는 마땅히 삼가해야 될 것이다.

※ 정독도서관 관람정보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안국동로터리에서 감고당길로 도보 10분
* 시내버스 이용시 안국역(종로경찰서)이나 안국동(조계사)에서 내려서 도보 10분
* 도서관 이용시간 : 평일 9시~22시 / 주말 9시~17시 (1,3주 수요일 휴관)
* 서적 대출은 정독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자료실에 신분증을 들고 찾아가면 대
  출회원증을 발급해준다. 대출 기간은 2주이며, 1회에 한해 연장 가능하다.
* 서적 대출 및 도서관 이용비는 공짜 (서울시 교육청에서 운영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 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나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정독도서관 4거리 - 이곳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다.

▲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서울교육사료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
돌의 중후한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옛날부터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의 이르기
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 학용품, 장난
감, 중/고등학교 명찰, 소풍 관련 디오라마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
현되어 있다.
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
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이
렇게 쓰면 내가 나이가 꽤 많은 것처럼 오인하기 쉽지만 난 아직 30대의 한참을 달리고 있는 중
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별처럼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손이 매우 후들거리는데 반
해 이곳은 시립이라 공짜다. 우리나라 교육 박물관의 성지로 이 땅의 30대 이상은 물론 아이를
둔 사람들도 꼭 들려볼만한 유익하고 영양가 높은 곳이다.

* 관람시간 : 9시~18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17시까지)
* 1,3째 주 수요일과 법정공휴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2 (☎ 02-736-2859)
* 서울교육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어린 시절에 절찬리에 쓰던 장난감들
요즘 애들도 저런거 가지고 노는지?

▲  초등학교 교과서
나도 저런 교과서로 공부했는데..

        ◀  김옥균(金玉均) 집터 표석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
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
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諡禮式)이 옛 집
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달라고 청원을 했
으나 거절당했다.


▲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 敬近堂/玉牒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

정독도서관 동쪽 구역에 고색이 창연한 기와집 2채가 익랑(翼廊)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들은 종
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가 있음)

종친부(宗親府)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옛 국군서울병원)에 있었는데, 조선 역대 제왕(
帝王)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혼상제와 봉
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에는 제군부(
)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고종 1년)에는 종부시(簿)와 합쳐
지고 1894년 종정부()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로
쓰였다가 1910년 이후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옮기고 건물
도 상당수 부셔버리면서 달랑 경근당과 옥첩당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면서 통제구역이 되었다가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
이 정독도서관으로 강제로 이전되었으며, 그들의 건강을 위해 주위로 얕은 철책을 둘러 속인들
의 출입을 막고 있다. 또한 우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은 뚜껑이 닫힌 채 종친부터를 지키
고 있다.
2011년 이후 국군병원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13년 11
월 개관 예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31년 동안 도서관에 얹혀살던 종친부 건물을 2012년 후반에
원자리로 옮겼으며, 도서관의 옛 종친부 자리는 현재 대머리처럼 텅 비어있다.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되면 우물과 같이 있게 될
종친부 건물을 보게 될 것이다.


▲  경근당(敬近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  옥첩당(玉牒堂)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정독도서관 동쪽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
300년 정도 묵은 지긋한 나무로 높이 11m, 둘레
3.6m에 이른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이나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
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속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자 애쓴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도서관 본관과 2관 사이에 있는 오래된 우물돌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외의의 유물이 하나 있다. 도서관을 찾
은 사람들은 그를 죄다 지나치기 일쑤인데, 그는 정독도서관 내부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동그
란 우물돌이다.
우물이 있는 이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그 꼬질꼬질한 이름을 떨친 평제 박제순(
平齊 朴齊純, 1858~1916)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1900년에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뜻밖에 이 우
물돌을 발견했는데, 의외의 유물이 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새겼다. 그때 새긴 24자가 진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뚝
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의 낀 고색의 때가 짙어보였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박제순의 글씨

매국노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
러져 보인다. 그렇다고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매국노 행위를 수치스
럽게 여겨 20살에 몸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
악가로도 유명했다.

▲  정체가 묘연한 네모난 돌덩이
어떤 구조물을 받치고 있던 좌대(座臺)로
여겨진다.

▲  디딜방아의 일부로 보이는 확돌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는 겨울의 제국이 내린
얼음이 진을 치고 있다.

우물돌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2개의 아리송한 돌덩이가 나온다. 하나는 디딜방아의 일부로 여겨
지는 확돌이며, 다른 하나는 네모난 돌덩이이다. 이들 모두 도서관 일대에서 나온 유물로 앞의
우물돌처럼 정체가 묘연해 은근히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참고로 이곳은 조선 세종(世宗) 때 청
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날린 맹사성(孟思誠) 집안의 살던 곳으로 맹씨들이 사는 언덕이라 하여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  서울에서 제일 큰 기와집, 안국동 윤보선가(尹潽善家) - 사적 438호

▲  굳게 입을 봉한 윤보선가 솟을대문의 위엄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오른쪽 골목길로 쭉 들어가면 커다란 솟을대문과 길다란
담장을 두룬 기와집이 나온다. 이곳이 북촌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한옥이자 한때 99칸
을 자랑했던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 지방민속자료 27호였다.

이 집은 1870년(고종 6년)에 민씨 일가에서 지은 조선 후기 한옥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
파로 더러운 이름을 날린 박영효(朴泳孝)가 왜정 때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10년경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가 매입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았다. 그는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국정(國政)을
살폈다.

서울 지역 상류층의 가옥으로 대지가 매우 넓으며, 양반가의 최대 칸수인 99칸을 자랑했으나 바
깥사랑채와 안사랑채, 안채, 대문, 행랑채, 창고만 남았다. 전통 한옥 양식에 청나라 건물 양식
을 더했으며, 서양식 가구를 갖추는 한편, 각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있는데,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란 현판은 김옥균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 뒤뜰에는 연못이 있고, 매화(梅花)와 향나무
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근대 조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원은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와 서양식 채양 등은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하였고, 1950년대부터 1970
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당의 중심지였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된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비록 개인 소유라고 해도 그런 뜻깊은 현장이 철저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어
그저 솟을대문과 담장을 넋빠지게 바라봐야 되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만 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
습도 참 상당한데, 그 속살을 직접 본다면 정말 고래등 기와집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
할 것이다.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언제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려나?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빈부격
차의 서러움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참고로 윤보선가는 동쪽으로 재동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재
동백송에서 담장 너머로나마 그곳에 들어있는 일부 기와집의 머리가 보이며, 서울시에서 이 집
을 매입하여 신익희(申翼熙) 가옥이나 고희동(高羲東) 가옥, 장면(張勉) 총리 가옥처럼 속세에
돌려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  윤보선가 (문화재청 사진)

▲  윤보선가 솟을대문 북쪽 담장길
담장 안쪽 나무들이 바깥에 조금씩 손을 내밀고 있다.

◀  윤보선가 솟을대문 남쪽의 옥의 티
대문 옆에 벽을 약간 허물고 수레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  윤보선가 북쪽에 자리한 갤러리 담 (☎ 02-738-2745)
담쟁이덩굴로 외벽의 절반을 치장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갤러리 현관에는 문인석(文人石) 2기가 나란히 손님들을 맞이한다.

     ◀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터 표석
왜정 때 우리 말을 지키고 연구하고자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이후 한글
학회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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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현재와 과거가 나란히 공존하는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北村)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북촌6경 골목길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이다.
이곳에 서린 한옥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살던 안국동 윤
보선가이며, 그외에 한옥들은 대부분 일반 여염집 규모로 작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마당
을 둘러싼 'ㄷ','ㅁ' 구조이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사람들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이
존재한다. 특히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박물관과 공방(工房),
예술/문화공간, 찻집과 음식점,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만 흔쾌히 개방을 하고 있으며, 북촌
문화센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분 개방이나 조건개방(숙박업소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는 전시공간)이 많고 그런 집들도 전체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며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조선이 망하고 왜인들이 남산 주변과 명동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 남쪽에 대거 말뚝을 박으며
시내를 개발하면서 서울의 중심으로 번화했으나, 서울 토박이와 조선 백성들이 주로 살던 청
계천 이북은 근대 건축물(중앙중고 건물, 천도교중앙대교당, 화신백화점 등.)이 몇개 지어진
것 외에는 개발이 별로 없어 남촌에 비해 낙후되었다.
게다가 왜정 이후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북촌 구석구석에 조그만 한옥을 수없이 깔
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배층과 부자들의 동네에서 점차 서민들의 동
네로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옥이 왜정과 해방 이후에 지어짐)
해방 이후 북촌은 도심 한복판에 있음에도 그 뒷전으로 밀려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90년
대까지 마땅한 개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날이 쇠퇴해갔다.

그러던 북촌은 2000년 이후 서울시의 홍보와 뜻있는 이들의 노력,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도
심 속의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줄어만 가던 한옥의 개체수가 다시 늘어가기 시작했다.
북촌이 다시 서울의 꿀단지로 떠오르자 북촌 주민들도 자신의 한옥을 개량하거나 손질하였고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도 다시 한옥으로 고치는 등 북촌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갖은 힘을 아끼
지 않았다. 거기에 종로구청과 서울시청도 북촌 가꾸기 사업을 벌여 흔쾌히 도와주고 있으니
나날이 관광객들이 폭주해 평일에도 국내/해외 관광객들로 북촌 골목길은 시장통을 이룬다.
특히나 북촌8경을 비롯한 북촌의 주요 명소들은 항시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게다가 북악산을
등지고 앞에 청계천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이고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졸부들과 공장(工匠)과 예술가 등이 앞다투어 들어오면서 누워있던 북
촌 땅값이 끝없이 치솟고 있다.

한옥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것은 북촌의 제일 가는 운치로 꼽힌다.
허나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문화/전시/체험공간, 문화유산들 거기에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북촌에 둥지를 튼 박물관은 약 10여 곳 정도로 대부분 규모가 작은 사립박물관이다. 그
러다보니 입장료는 시중보다 상당히 얄미운 수준이다.(성인 기준으로 2,000~6,000원선, 입장
료는 2~3년 간격으로 계속 오르고 있으니 해당 홈페이지나 전화로 문의 요망)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있어 헤매기가 딱 좋으며, 박물관과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이 대부분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북촌8경이라 불리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을 가르는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
길, 북촌길 일대에만 새까맣게 몰려있는데 북촌의 매력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큰 골목길과
작은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돌며 숨겨진 명소를 숨바꼭질하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
며 술래에서 벗어난 그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들락거렸
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구나~' 말을 꺼내지만 여태까
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거의 대부분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고 숙박시설로도 쓰이
므로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
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
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20~21세기 한옥 양식이라 하여 건축사나 미술사
에서 한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  조선 후기 한옥을 개량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거듭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 때 민씨 세도가(勢道家)
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때 '계동마님
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祠堂)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
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
으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문화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수선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舍廊房)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가지 자료로
다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
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는데, 서울 도
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
을 짐작케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茶
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북촌한옥센터 찾아가기 (2013년 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 못미쳐 골목길로 좌회전하면 된다. 안국역
  에서 도보 3분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은 9시 ~ 18시 (토,일은 17시까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 02-3707-8388, 8270)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안채 서쪽 (한옥문화과 사무실)

▲  안채 동쪽 (안방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 규모의 정자
원래 사당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강좌는 보통 3개월 과정으로 진행되며, 여기 외에도 안채와 사랑방에서도 강좌가 열림)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북촌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주변

▲  현대사옥 그늘에 가려진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사적 296호

안국역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다보면 하늘 높이 솟은 육중한 건물, 현대사옥을 만나게 된다. 그
앞에는 현대사옥에 짓눌려 초췌해 보이는 고색의 때가 낀 석조 건축물이 자리해 있다. 바로 조
선시대에 천문(天門)과 기상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상
을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바
로 이곳 관천대로 세종(世宗) 때 조성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관천대의
원로인 이곳을 관상감 관천대라 부른다.

이 관천대는 1434년(세종 16년) 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대사옥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가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
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기기를 올려 하늘의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애칭도 가지고 있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옛 천문시설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사라졌으며, 현대사옥 자리에 휘문고보
(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겼다. 이후 1978년 학교가 강남으로 건너감에 따라
1983년 지금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1984년 지금의 자리에 해체 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렸으며, 석축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허나 그래봐야 고작 3
층 높이 밖에는 되지 않으며, 바로 뒤에 현대사옥이 버티고 서 있으니 마치 해와 달의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 힘들다면 차라리 원서공원이나 고층 빌딩의 눈치가 적은 곳으
로 옮기면 좋으련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천문시설의 잊혀진 원로로 현대사옥의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
게 왔다갔다하며 천문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
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참고로 현대사옥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
(綏嬪朴氏)의 사당>이 사옥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궁<桂洞宮,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
載元)의 집>이 있었으며, 경우궁과 계동궁은 갑신정변 때 개화당 패거리가 고종과 왕족을 호위
하며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206-2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분)


▲  큼직한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 관천대, 돌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굳게 입을 봉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고택

사업가이자 교육가, 언론인으로 우리나라 2대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살던 집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을 위해 독립지사들이 왜정의 감시를 피해 모인 장소이자, 민주
화운동을 위해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진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촌기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택 내부를 꼭 보고 싶다면 억지로 대문을 열거나 월담을 하지 말고 바로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동세무고등학교로 달려가 서쪽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기 바란다.

◀  공방 겸 찻집을 겸한 봉산재(奉山齋, 봉산아
트센터)
북촌문화센터에서 중앙고교로 이어진 계동길 중
간에 자리한 봉산재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열었
다. 나성숙 교수가 옻칠, 황칠을 하는 공방(工
房)으로 전시실과 찻집도 겸하고 있어 전통차 1
잔의 여유를 누 수 있다. 차의 가격은 5~6천원
선, 봉산재 홈페이지는 옆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3-6 (개방시간 10시~18시
/ 매주 월요일, 명절 휴관 / ☎ 02-766-6649)


▲  북촌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한 계동 배렴(裵濂) 가옥 - 등록문화재 85호

봉산재 뒤에는 북촌한옥체험관(북촌게스트하우스)이 있는데, 동양화의 거목으로 명성을 날린 배
렴(裵濂, 1911~1968)이 살던 기와집이다.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3동의 건물이 'ㅁ'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배렴이 사라진 이후 SH공사가
인수하여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체험을 겯드린 숙박업소로 변신했다. 북촌게스트
하우스 관련 정보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2 (☎ 02-743-8531)


▲  이가(李家) 문화체험원
다도(茶道)와 예절을 비롯하여 전통 음식을 만드는 문화체험공간이다.
이곳은 왜인(倭人)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그들의 한국문화체험과
학습을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 서울 종로구 계동 50-1 (☎ 02-762-4900)
* 개방시간 10시 30분 ~ 20시 (1,3째주 일요일은 쉼)

▲  지금은 죽어버린 석정보름우물터

이가문화체험관 부근에 '석정보름우물'이라 불리는 동그란 우물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근래
에 만든 것처럼 보이고 안내문도 하나 없어 사연을 모르는 속인들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지만
오래 전부터 계동 지역의 식수를 담당하던 동네 우물이자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우물로 가치
가 높다.

이 우물은 보름마다 물이 차올라 15일 동안을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는 뜻에서 석정보름우
물이라 불리며, 예전에는 우물 위에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으나 도심이라
물이 마르고 오염되어 결국 우물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이후 1987년 돌과 시멘트로 우물을 복
원하면서 지금은 '석정보름우물터'라 불린다. 이제는 물도 나오지 않는 그저 형색만 갖춘 죽은
우물이지만 북촌의 소중한 옛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天主敎)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계동에 숨어살
면서 영업(?)을 했을 때, 이 우물에서 퍼온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전
한다.

◀  석정보름우물터와 나란히 있는 유심사
(惟心社)터 표석
유심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중앙학교
(중앙중고교) 학생들에게 3.1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일깨워주던 곳이다.


▲  고풍스런 분위기의 락고재(樂古齋) 한옥체험관 정문

재동초등학교 뒤쪽에 락고재라 불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한옥이 있다. 이곳의 이름인 '락고(樂
古)'는 '옛것을 누리는 맑고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옛 선비의 풍류를 즐긴다'는 풍류적
인 뜻이 담겨져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130년 묵은 오래된 집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翁)이 개조하여 전통체험 및 숙박을 할 수 있는 한옥체험
관으로 거듭났으며,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은 방마다 화장실
이 따로 설치되어 편의를 도모했고, 전통 음식과 국악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은 물론 천기토로
만든 장작 찜질방까지 갖추고 있다. (단 숙박비가 비쌈 20~25만원선) 특히 집을 에워싼 담장은
전통 토담으로 정겹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내 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고 싶은 충동
을 절로 일으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218 (☎ 02-742-3410)
* 락고재 홈페이지는 위와 밑에 있는 락고재 사진을 클릭한다.

▲  락고재 뒤쪽

▲  옻칠공방 칠원(漆院, 한국옻칠연구소)

칠원은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호 칠장(漆匠)의 기능보유자인 신중현씨가 운영하고 있다. 옻칠이
란 목기(木器)의 수명을 늘리고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액을 목기(木器)에
칠하는 것으로 이런 목기를 칠기(漆器)라고 한다. 옻칠에는 고무질이 있어 방수에 효과가 있으
며, 잘 썩지 않는다. 또한 옻칠은 오래될 수록 단단해지고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칠원은 오래된 한옥을 매입하여 목조를 개보수했으며, 옻칠 작품이 앞뜨락과 툇마루, 공방 곳곳
에 전시되어 있다. 옻칠과 관련된 유물 300여 점과, 국내 작가들의 옻칠 공예품 200여 점, 옻칠
화 3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옻칠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25 (☎ 02-764-5775)
* 개방시간 : 10시 ~ 18시 (월요일 휴관) / 칠원 홈페이지는 아래 칠원 내부 사진을 클릭한다.

▲  옻칠공방 칠원 내부

▲  옻칠공방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품
묘공(猫公)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가 방망이처럼
유난히 길고 굵직하다.

▲  골목 구석에 자리한 심화숙 한지공방

▲  심화숙 한지공방 내부

심화숙 한지공방은 우리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지화 공예와 색색의 종이를 붙여 그림을 만드는 한지 회화, 종이실로 직물을 짜
는 한지 섬유 공예, 종이를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잘라 기물에 붙이는 전지 공예 등 다양한 공예
가 적용된 가구와 옷, 모자, 항아리, 생활용품을 전시/판매하며, 공방 체험도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32-10 (☎ 02-394-6534)
* 개방시간 : 10시 ~ 17시 (월요일 휴관)


▲  중앙중고 동남쪽의 작은 골목길 ▼
북촌의 조그만 골목길을 거니는 것은 북촌의 백미와 보석을 캐는 것과 같다.
큰길이나 사람들이 많은 길만 다니지 말고 반드시 작은 골목길도
둘러보기 바란다.


♠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쪽 끝, 원서동과 창덕궁길 주변

▲  북촌 주택가와 창덕궁의 경계선인 창덕궁 돌담길 (창덕궁길)

▲  시골 읍내 같은 원서동과 창덕궁길

창덕궁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원서동으로 이어지는 북
촌의 주요 간선로이자 북촌의 동쪽 경계선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속세를 구분짓는 높다란 돌담
과 나란히 이어진 길로 동쪽은 궁궐 돌담, 서쪽은 백성들의 주거지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다. 그래서 덕수궁(德壽宮)이나 경복궁, 창경궁 돌담길보다는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돌담길은
요금문을 지나서부터 집들로 인해 돌담과 조금 멀어지게 되며 빨래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거
기서 길은 끝나버린다.

북촌의 동쪽 변두리이자 창덕궁길이 지나는 원서동(苑西洞)은 창덕궁 후원(後苑)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때는 원동<苑洞, 원동(園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왜정 때 창
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그 서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돈화문에서 창덕궁돌담길을 따라 원서동 쪽으로 들어가면 창덕궁과 바깥을 이어주는 조그만 궁
문(宮門), 요금문이 모습을 비춘다. 문 앞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속인들의 집이 있고 쓰레기봉지
도 가까이에 널려있어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돌담길 일부 구간은 이렇게 민가들이 돌담과 무책
임하게 붙어 있는데, 돌담길 주변 정화가 무척 절실해 보인다.

요금문은 창덕궁 서쪽에 뚫린 3개의 문의 하나로 후원과 매우 가깝다. 이 문은 궁녀와 내관, 상
궁(尙宮) 등이 드나들던 통로로 상궁과 내관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
창덕궁이 지어진 태종(太宗)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
다가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에게 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서거정이 '요금문'
이란 이름을 올리면서 그것이 문의 이름이 되었다.

그저 평범해 보여 지나치기 쉬운 이 문에는 2개의 옛 이야기가 서려 있다.
1623년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갈고 반란을 일으킨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이 된 얼떨떨
하고 통이 작은 인조(仁祖),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보기 좋게 당
한 이후, 그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살았는데, 그 후유증을 달래고자 창덕궁 후원에 경치 좋
은 곳을 골라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
허나 신하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하자 몰래 공사를 진행시켰다. 매년 12월에는 요금문을 통해 얼
음을 궁내(宮內)로 운반했는데, 그 문이 마침 후원과 가깝고 숲이 무성해 인적이 드물었다. 그
래서 내관에게 몰래 일러 문을 닫는 시기를 늦추게 하면서 공사에 쓰일 나무와 돌을 몰래 궁으
로 들여와 정자를 지었다. 이를 발견한 신하들은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중단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유념하여 채택해 사용하겠다'고만 할 뿐, 끝내는 정자를 완성시켰으니, 과연 부국강병(
富國强兵)에는 관심은 없고 허울뿐인 대의명분에 휩싸여 나라를 망친 임금다웠다.

또 하나는 숙종 때에 일이다. 조선을 통틀어 민중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사랑을 받
았던 인현왕후(仁顯王后), 그녀가 숙종(肅宗)에게 폐위되었을 때, 흰 옥교(玉轎)에 실려 이 문
을 통해 추방되었다. 이때 많은 관료들과 선비, 백성들이 옥교를 따라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킬 때 이 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현재 요금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창덕궁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고 무조건 돈화문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  요금문 현판의 위엄
요금문은 입장료, 요금을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빛나다와 일월(日月), 오성(五星)을
뜻한다고 한다.


▲  수레 1대 다닐 정도로 좁은 원서동 골목길

▲  궁중음식연구원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38호)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곳으로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궁중음식으로 유명한 황혜성, 한복려 선생 모녀가 운영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34 (☎ 02-3673-1122~3)
*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창덕궁 후원 물이 졸졸 흐르는 빨래터

창덕궁돌담과 이어진 원서동 북쪽 끝에 창덕궁 후원 물이 속세로 나오는 공간이 있다. 담장 밑
에 수구(水口)를 뚫어 후원(後苑)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도심 속 청정지대인 후원에서 나온
물이라 제법 차고 깨끗하다. 수구 앞에는 발을 들일 수 있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빨
래터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던 공간이다.

담장 안쪽은 태조(太祖)와 제왕들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던 신선원전(新璿源殿)이 있다. 창덕궁
가장 서쪽 구석에 자리한 신선원전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비공개구역으로 남아있는데, 중앙
중고교 운동장에서 철조망 너머로 그곳을 굽어볼 수 있다. 운동장 축대 바로 밑이 바로 신선원
전이기 때문이다. 그곳 주변을 흐르는 계곡이 바로 빨래터로 흐르는 것이다.

이곳이 빨래터가 된 것은 옛날 궁녀들이 이 물에 세수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를 많이 사
용했는데, 그것을 쓰면 물이 뿌연 색을 띄었다.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하여
장안 아낙들이 몰려와 빨래를 하면서 빨래터가 된 것이다. 궁궐 내를 흐르는 계곡이나 금천(禁
川)이 바깥으로 흘러가는 통로는 여럿 있지만 이곳은 숲이 우거진 후미진 곳이고, 담장 너머로
바로 민가들이 있기 때문에 여염집 처자들이 빨래를 하기에는 제격이다. 게다가 궁궐에서 나온
물이니 그 물로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는 긍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통해 세상 구경을 나온 계곡은 창덕궁길을 따라 청계천으로 흐르는데, 도시화란 이유로
죄다 콘크리트로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의 속살을 속시원히 드러내면 좋으련만 정녕 어둠의 경
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일까?


▲  강제로 어둠의 경로로 흘러야 되는 빨래터 물의 비애

▲  굳게 닫힌 창덕궁 신선원전 외삼문(外三門)

▲  원서동 백홍범(白鴻範)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3호

빨래터를 지나 돌담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면 높다란 담장과 굳게 닫힌 문으로 일관하는 한옥이
있다. 그 집이 바로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백홍범 가옥이다. 이 집은 원래 안채의 별채로 '
ㄱ'자 모양을 띄고 있는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있으며, 동남쪽에 작은 방 1채가
있다.
191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선 황실(皇室)에서 은퇴한 상궁들이 주로 기거했으
며,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지만 여기서 더 이상 길은 열리지 않아 왔던 길로 다시 되
돌아나가야 된다. 창덕궁에 단단히 막히고 길도 좁은 빨래터 일대는 도심 속의 외로운 벽지 같
은 곳이다.

* 백홍범 가옥, 빨래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9-5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2분 거리
*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고희동 가옥)에서 내리면 된다. 허
  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걸어가기를 권한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7분 거리이다.


▲  고희동(高羲東) 가옥 - 등록문화재 84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 왜국 유학을 마치고 1918년에 돌아와 직접 설
계하여 만든 한옥이다.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집으로
서양 주거문화와 왜열도 주거 문화의 장점을 취해 한옥에 적용했는데, 그는 이곳에 41년을 살면
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휘문고보 미술 스승
으로 그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하며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2002년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한샘'이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
무실과 연구소를 만들면서 주차장을 만들고자 이 집을 매입하여 싹 밀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발벗고 나서자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낡은 집을 보수했으며, 2012년 11월부터 속세에 개방되어 2013년 1월
15일까지 오픈 기념 특별전(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을 조촐하게 열었다.


* 관람시간 : 10시 ~ 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비원손칼국수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북촌에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먹을거리와 맛집도 풍부하다. 특히 삼청동에는 청와대나 국무
총리공관 등의 고위 관료들이 단골로 찾는 식당들이 많다보니 다른 곳보다 맛의 질과 가격이 높
은 편이다. 거기에 찻집과 까페도 즐비하니, 구경 잘하고, 거기에 1끼 잘 먹고, 차 1잔의 여유
까지 누릴 수 있다.

현대사옥 뒤쪽 북촌1경 부근에 자리한 비원손칼국수는 칼국수 전문 식당이다. 잘 우려낸 국물에
국수사리와 파 등을 넣은 것으로 국수도 괜찮지만 국물 맛이 단연 일품이다. 반찬은 부추와 김
치 2종류로 칼국수의 찬으로는 적당하나 별도 메뉴인 만두는 높은 가격에 비해 양도 적고 맛도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맛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원(秘苑)이란 말도 왜정이 창덕
궁 후원을 깎아내리고자 쓴 말인데 그걸 식당 이름으로 쓰고 있으니 이 또한 함정이면 함정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름을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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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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