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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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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7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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