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2.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3. 2016.07.13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3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 서울에서 가까운 그림 같은 섬, 그리고 그림 같은 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눈썹바위)
▲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봄이 슬슬 기지개를 켜던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화도(江華島) 서쪽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를 찾았다. 원래는 강화도 1박 2일 여행으로 토요일 낮에 가서 일요일 오후에 오는
일정이나 나는 개인 사정으로 토요일에 같이 가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새벽 이슬을 맞
으며 완전 후발대로 그들이 있는 강화도 황청리로 넘어갔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道峰洞)에서 황청리(외포리 서북쪽 동네)까지 그 장대한 거리
를 대중교통에 의지하여 9시 정도에 황청리 종점에 이르렀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종점
바로 뒷쪽 언덕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어 찾기는 쉬웠다.
펜션에 들어서니 몇몇은 해장술이란 명목으로 아침부터 곡차(穀茶)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
분은 안에서 아침을 먹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전날 밤샘의 위엄으로 아직도 깨어나
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게 했다.
11시가 넘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석모도로 가고자 외포리(外浦里)로 이동을 했다. 일행
들 차량 6대 중 1대만 외포리에 두고 나머지 5대에 나눠 타서 석모도로 넘어갔는데, 일요
일이라 석모도 나들이 수요가 상당하여 외포리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외포리와 석모도(석포리)를 오가는 여객선은 휴일 만선(滿船)의 기쁨을 톡톡히 누리며 수
시로 두 곳을 악착같이 이어준다. 이 여객선은 소형차량은 물론 대형버스, 화물차에 이르
기까지 수송이 가능하여 나들이객들이 가져온 차량을 꾸역꾸역 넣어 섬으로 보낸다.
사람이야 아무리 미어터져도 배 1척에 거의 다 실을 수 있지만 차량들은 수송능력에 한계
가 있고 섬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어 4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가 크긴 해도 차량 10대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간
이란 공간을 다 활용하여 차량을 구겨넣으니 거의 30대 정도 실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차에 있거나 2층 객실에 있으면 되며, 석모도까지는 소리를 지르면 흔쾌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 불과 10분이면 도착한다.


 

♠ 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 입문

▲ 외포리 포구와 잠시 작별을 고하다.

사람과 차량을 가득 머금은 배는 미련 없이 포구를 출발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섬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도 엄연한 섬이므로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다. 다만 강화도가
2개의 다리로 한반도와 너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보니 착각하기가 쉽다.

포구 주변에는 서해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갯벌이 진하게 펼쳐져 여러 생명들이 삶을 의지
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갯벌은 기후 변화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의 칼
질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으로 강화도 지역 갯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계적 희귀종인
저어새(가리새)가 서식하고 있어 지구에서 매우 우수한 갯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여 강화도
를 비롯하여 석모도, 볼음도(乶音島) 지역의 갯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천연기념물 419호로 삼
았으며 단일 문화유산 지정 구역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넓다.
(면적은 약 1억 3,600만평,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


▲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화도,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갈매기들

배가 출발하니 인근 갯벌에서 망을 보던 구공(鷗公, 갈매기)들이 몰려와 배를 포위한다. 날카
롭게 끼룩끼룩거리며 통행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준비해 온 새우깡을 던지며 그들을 달랜다.
허나 구공들이 입맛들이 변했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터졌는지, 아니면 둔해졌는지 좀처럼 새우
깡을 잡지 못했다. 바다에는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떨어진 새우깡이 두둥실 무리를
이루며 떠있었다.


▲ 어느 양이(攘夷) 여인이 팔을 뻗어 새우깡으로 구공을 유혹하지만
낯설은 피부색 탓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통행세를 요구하며 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구공들

▲ 하늘이 온통 구공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거니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뿐~~ ▼

외포리를 출발한지 겨우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포구에 닻을 내린다. 배로 이동한
구간이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喬桐島) 등에 빙 둘러싸여 있어 마치 소양호, 대청호(大淸湖)
등의 너른 호수를 건넌 기분이다.
배에 담긴 사람과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
찾고 강화도로 나가려는 사람과 차량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메우면서 배는 왕복으로 만선의 기
쁨을 재현한다. 아마도 그날 여객선 회사는 소고기 회식을 거창하게 했을 것이다.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는 잘 닦여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0~15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보문사에 이르니 주차장은 그야말로 초만원. 간신히 공간을 찾아 바퀴를 접고 보문사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비슷하게 보문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막은 나물튀김과 동동주를 미끼로 호객행위를 벌인다. 덕분
에 튀김과 동동주 몇 잔을 무료로 챙겨 마시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운다.


▲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보문사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된다. 일주문 옆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고, 문 앞에는 매표소 사람이 철통같이 입장권을 검
사하고 있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입장료가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의 무게가 억지
로 더해져 무려 2,000원씩이나 뜯는다.
후덜덜한 입장료 앞에 경악하며 단체 할인을 요구하였으나 적정 인원(30명)이 안된다며 거절당
했다. 우리 일행은 딱 20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구워삶아 단체 할
인으로 표를 끊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 현판에는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 쓰여 있는데, 이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이다.


▲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급해진다. 허나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므
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보문사가 조금씩
모습을 끄집어내고, 담장에 둘러싸인 보문사 사적비와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 보문사 은행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63호

사적비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
년에 이른다. 겨울이 저 멀리 물러가고 봄이 왔
건만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거
리고 있다. 하루 빨리 파릇파릇한 은행잎을 펼
쳐보여야 될텐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를
못하니 보는 입장에서도 좀 안따까울 따름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0m, 둘레는 3m에 이르며 보
문사의 정성과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
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천하 3대 관음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보문사 경내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보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 서해바다를 품은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의 중심을 이루는 낙가산(洛迦山) 서쪽 자락,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
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
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절은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
화도 지역으로 들어와 보문사와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
시 강화도와 석모도는 고구려(高句麗)와 신라의 팽팽한 접경 지역으로 절을 지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강하게
회의감을 품게 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나 유물도 없다.
다만 전국에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되거나 경내에 600~7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절을 지은 이는 창건설화에 나오
는 회정(懷正)으로 보인다. 그는 석모도 어민들과 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 부호(富豪)들의
지원으로 절을 세운 듯 싶으며 지역 어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도우며 공
존하고 있다.

절이 창건된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으며,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800년 선방(禪房)을 조성해 한영 등 여러 승려가 수행을 했
으며, 1812년 유생 홍봉장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했다.
1867년 경산이 석굴이 나한전을 지었고, 1893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관음전과 객실
을 지었다. 1919년 보경이 관음후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 현왕탱을 제작해 봉안했으며,
1920년 대원이 관음전법당(극락보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1928년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
의 이화응과 함께 경내 뒷쪽 눈썹바위에 그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을 조성해 절의 듬직한 명물로
삼았다.
1935년 나한전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58년 나한전 석굴을 손질하고 1972년 관음전을 중건했
다. 1982년 동각이 석실을 확장해 여러 성상(聖像)을 봉안했으며, 1987년부터 18년 동안 와불
조성 공사를 벌여 2005년 5월 완공을 보았다. 1996년 관음전을 중창해 극락보전으로 이름을 갈
았고, 2006년 5월부터 3년 동안 오백나한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계속 추가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선방, 석실, 삼성각, 와불전 등 10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석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석불좌상과
석실, 맷돌, 향나무 등 지방문화재 4점을 품고 있으며,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 수백 년 묵은 나
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다.

보문사는 관음성지의 명성에다가 석실 나한상의 영험, 배를 타고 가야되는 섬 산자락에 있다는
특성, 바다가 가깝다는 매력과 서해 일몰지,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으로 1960년 이후 수도권의
명소를 뛰어 넘어 천하 명소로 성장했으며, 강화도에 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관광
지가 되었다. 이렇듯 석모도의 든든한 후광이자 꿀단지로 보문사가 없는 석모도는 순대가 없는
순대국밥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석모도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90%를 먹고 들어간다.

바다를 겯드릴 수 있는 수도권 당일 나들이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이 땅에
서 몇 안되는 절로 조망 또한 일품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로 관음보살의 인자함과 시원스런 조망이 속세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잠시나마 보듬어 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관음성지 외에도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명성이 높다. 석실에 봉안된 18인의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관련 전설이 몇 개나 전해온다.

※ 석모도 보문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수도권에서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역(2호선/1,4번 출구) 정류장과 홍대입구역(2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전철/2번 출구) 중
앙차로 정류장, 합정역(2,6호선/5,10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종점 하차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마두역(4번 출구), 3호선 백석역(4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대화역(4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에서 97번 시내버스를 타고 장기4거리 이후 아
무 정류장에서 강화행 시내버스로 환승 (88, 96, 3000, 90, 800번 등)
* 부평역(1호선, 인천1호선) 국민은행 앞 정류장과 부평구청역(7호선, 인천1호선/1번 출구)에
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종합터미널 건너편이나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1번 출구), 인천시청역(인천1호선/3번
출구)에서 800번 좌석버스 이용
② 강화도에서 보문사까지
* 강화터미널에서 외포리행 군내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외포리터미널에서 도보 3분)에서 석모도행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는 10~20분 내외 간격으로 오간다. 마지막 배는 3~11월은 21
시, 12~2월은 19시 정도이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문의 삼보해운 ☎ 032-932-6007)
*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
는 20~30분 간격으로 증회 운행한다.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서울 → 48번 국도 → 강화터미널 → 인산3거리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인천 → 검단 → 대곶 → 강화초지대교 → 온수리 → 화도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
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보문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일반 2,000원(30인 이상 단체 1,6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200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800원)
* 주차비 : 대형 5,000원 / 소형 2,000원 (문의 ☎ 032-933-8271)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삼산남로 828번길 ☎ 032-933-8271~3)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낙가산, 하얀 바위가 뭉쳐있는 곳에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 보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문사 와불전(臥佛殿)

경내로 들어서면 범종각과 와불전, 500나한상 등이 제일 먼저 중생을 맞는다. 범종각(梵鍾閣)
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범종과 운판(雲版), 법고
(法鼓), 목어(木魚) 등이 자리를 메운다.
와불전과 오백나한(五百羅漢)은 2006년 이후에 닦여진 보문사의 새로운 명물로 와불전에는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가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와불전의 존재를 몰라 내부를 살피지 못
했지. 그런 와불전 옆에는 하얀 피부의 500나한이 그들의 스승 부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우리나라 5,000만 인구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새롭게 만든 500나한상과 3층석탑

▲ 극락보전에 바라본 와불전(오른쪽)과 오백나한(왼쪽)

▲ 보문사 석실(石室)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7호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석실이다.
이 석실은 나한상을 봉안한 공간으로 나한전(羅漢殿)으로 불리기도 한다. 649년 회정대사가 어
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12년
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경산(京山)
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春城)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靜守)가 내
부를 확장하고 불단 뒤와 옆에 석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로 넓게 자리를 닦아 18나한
과 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송자관음보살, 관음보살 등을 봉안했다.


▲ 석실을 가득 메운 중생들

석실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 보문사 측에서 649년이라 주장하는 어느 멀고 먼 옛날, 석모도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평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것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
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사람 모습
과 비슷했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에 허탈해하며 죄다 바다에 내던지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허
나 거기서도 그 석상들이 그대로 걸려들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육
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 꿈에 노승(老僧)이 나타나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에서 왔다. 나와 함께 22명의 성인(聖人)이 돌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
데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잠수해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2번 씩이나 우
리를 버렸더구나. 우리는 부처의 법문과 중생의 복락(福樂)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대들의 후손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며 어부들을 인도해 보문사 앞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곳
에 쉬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는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이른 아침 바다로 나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나누니 글쎄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이 아
닌가?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끌고 석상을 버린 곳으로 달려
가 그물을 치니 그 석상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어부들은 그 석상을 가지고 보문사로 가져와 꿈에서 본 석굴에 봉안했다. (또는 석상을 낙가산
으로 옮겼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서 그들이 갑자기 무거워져 꼼짝도 하지 않자 그 석굴에 봉안
했다고 함)
석굴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했는데, 누가 다듬은 듯 석상이 앉을 좌대
(座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석상을 앉히니 신비한 기운이 가득찬 듯 하였고 마을 사
람들은 일제히 그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부들은 그 공로로 후손들까지 잘먹고 잘살았다
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나한상은 바다에서 발견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
람들의 물건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운반이나 약
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
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를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
비추는 것 같다. 또한 근래 절에서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닌 인도
에서 산출되는 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석실 내부는 마침 단체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나한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하나 덧붙여 전해오니 내
용은 대략 이렇다. 아마도 나한도량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불공을 드리고자 이른 아침
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불을 일으킬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
어서 도저히 팥죽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
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 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
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 맛있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문사 주지승이 고씨 집에 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보냈습니까?'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라고 시키지도 않았구요'

그 말에 고씨는 발끈하여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절에 불씨가 꺼져서 팥죽 공양을 못하게
되자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어요~~!'

고씨 집에서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
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았다. 그러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
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동짓날이 되면 팥을 가지고 절로 올라와 팔죽을 쑤어 올리고 기도
를 했다고 한다. 그 일이 100년 동안 연례 행사처럼 계속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바로 앞에는 푸른 내음을 자랑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석실 나한상의 법력(
法力)을 받아서 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서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으
로 그의 나이는 약 600~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문사가 최소 600년은 넘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겨우 3.2mㄹ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렸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생명력 하나는 정말 끈질기다.


▲ 보문사 맷돌 - 인천 지방민속문화재 1호

향나무 앞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큰 맷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
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
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供養)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이 맷돌은 조선 후기에 화
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름 69cm, 두께 20cm이며, 웃돌과 아랫돌이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현
대화된 조리기구에 제대로 밀려나 이렇게 손잡이를 잃은 채, 돌절구 등과 한가로이 남은 여생
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다.


▲ 맷돌 옆에 놓인 돌절구
조선 후기부터 쓰인 보문사의 음식 조리 도구로 지금은 전시/관상용이 되어
향나무 주변을 수식한다.

▲ 석실과 극락보전 사이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1960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4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이었다.

▲ 삼성각에 봉안된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으로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

▲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보문사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옥(玉)으로 조성된 조그만 3,000불이 봉안되어 장엄함
을 더해주고 있다.


▲ 극락보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과 3천불의 위엄

▲ 'ㄱ'자 모습의 요사(寮舍)
보문사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요사 건너편에 자리한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나한을 위한 공간은
이미 석실과 야외 500나한상이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른 것일까? 오백나한전까지
지어 올려 3대 관음성지 외에 나한도량 성지의 인지도를 더욱 견고히 했다.


 

♠ 보문사의 상징,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오색영롱한 연등이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을 격려하고 인도한다.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눈썹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펼쳐져 있다. 눈썹바
위와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에서 꼭 봐야되는 이곳의 얼굴로 오르기 귀찮다고 통과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는데, 이는 천지(天池)를 안보는 백두산(白頭山) 관광과 같다. 계단길이 좀 가파르
긴 해도 보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누리고 있는 존재인만큼 꼭 올라가 보는 것이 보문사에 대
한 예의가 될 것이다.

경내에서 눈썹바위까지는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이 이어져 있다. 왜 418계단인지는 모르겠다.
오르는 길이 좀 각박해 보여도 노공(老公)들도 거뜬히 오를 정도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 있듯이 열심히 길을 임하면 눈썹바위 마애불이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앞에 훤
히 펼쳐진 서해바다는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트이게 할 것이다.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9호

418계단 끝에 이르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거대
한 마애석불좌상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약 9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
을 해주니 덕분에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과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
선주(裵善周)가 관음성지의 명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의기투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나이는 고작
90년 정도 밖에 안된 팔팔한 석불이다. 어둠의 시절 당시에 조성된 여러 불상 중 하나이자 가
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우울해 보이
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중생들의 근심어린 얼굴을 모델로 한 듯 싶다.

마애불의 정체는 관음보살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높아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
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불상 앞에 닦여진 예불장소에도 언제나 중생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서
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
(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
랑한다.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자연은 저곳에 저런
멋드러진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이 땅의 인간들은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
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눈썹바위의 모습은 신기하여 절
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이다.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
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으며, 선정인 아래 다리는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
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석불이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
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 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는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놓여져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지그시 감은 눈, 커
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석불의 우산 역할을 하는 눈썹바위에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를 더 장엄하게 연출하고자 저곳까지 손을 댄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 같다.


▲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바위글씨

불상 옆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했던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
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글씨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화엄회상필부사왕중), 南無華嚴會上欲色
諸天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 華嚴會上護法善(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쓰여 있다.


▲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천하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마애관음보살)을 둘러보고 3배를 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향만 키고 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썹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하다.

절을 등지고 주막촌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적당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 데 와서
파전에 도토리묵도 먹어줘야 되지만 아침을 많이 먹은 탓에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마
무리했다.
점심을 먹으니 식곤증이 살짝 등을 두드리며 한숨 주무시라고 부추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
피를 마시며 식곤증의 압박을 덜면서 잠깐이지만 석모도 보문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석포리 포구까지 가는 길은 썩 순탄치 않았다. 포구 1km를 앞두고 섬을 나
가려는 차량들로 대도시 못지 않은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1km가 마치 1,000km
로 마냥 늘어진 듯, 강화도로 나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던지 속히 이곳을 탈출하기를 희망하며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행히 잠이 금방
와주어 기다림의 시간을 좀 덜어주었다.
허나 한참을 잔 듯 싶은데 겨우 100m 이동.. 배 2~3척이 대박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열심히 실어나르지만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게 간신히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석모도와 작별을 고하며, 10여 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외포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비록 배로
왕래하지만 석모도를 한반도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참 연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7
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배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게 된다.
여객선 회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말이다.

정말 번개처럼 날아가 짧지만 재미지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석모
도 보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6년 7월 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