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4.01 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2.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세종시 비암사 '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2월의 마지막 주말, 세종시 제일의 고찰(古刹)인 비암사
를 찾았다.

비암사가 있는 세종시(世宗市)는 옛 충남 연기군(燕岐郡)으로 2005년 국가 주도의 행정중
심복합도시를 조성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조선 세종의 묘호(
廟號)를 따 세종시로 간판을 갈았다. 이때 공주시 장기면과 청원군 부강면이 세종시의 일
원이 되었다. (세종시의 정식 이름은 '세종특별자치시')

주말 오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 간만에 근성도 테스트할 겸, 1호선 전철을 타고 천안(天
安)까지 쭈욱 내려갔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 방학역(1호선)을 기준으로 무려 115km에
달하는 그 장대한 거리를 딱딱한 전철 의자에 의지하여 가야 되는 고행(苦行)의 길이지만
버스와 전철에 최적화된 뼛속 깊은 서민인지라 별 어려움 없이 근성 시험을 마쳤다.

천안역에서 천안시내버스 700번(안서동↔전의)을 타고 소정면과 함께 세종시의 북부를 이
루고 있는 전의면(全義面)으로 이동하여 전의의 중심인 전의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
서 다방리로 들어가는 세종시내버스 82번으로 환승, 전의면의 남쪽 산하를 비집고 들어가
비암사입구에 하차했다.


 

♠  비암사 입문 (도깨비도로)

▲  인간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비암사 도깨비도로 (서쪽에서 본 모습)

비암사입구에서 비암사를 향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는 인
간의 두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현장으로 내리막길을 마치 오르막길처럼 보이게
하는 신기한 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제주도의 '1100도로'를 비롯하여 속칭 도깨비도로가 여럿 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런 길을 직접 겪으니 눈이 요상하게 홀린 듯, 신기하다. 내리막길이 분명한데 올라가는 것처
럼 반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 도깨비도로(Mysterious Road)는 좁고 구불구불했던 비암사 길을 2005년부터 2007년 11월까
지 크게 손질하면서 나온 것으로 출발점(시작점 표시가 있음)에서 보면 꽤 오르막길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120cm 낮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눈을 믿지 말자.


▲  동쪽에서 본 도깨비도로
이렇게 보면 정말 내리막길처럼 다가오지만 현실은 오르막길이다.

▲  해와 달, 나무의 조그만 거울, 다비숲공원 연못
도깨비도로를 지나 3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부터 경내 주차장 직전까지 다비숲공원 영역으로 연못과 3층석탑,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  다비숲공원 표석

▲  비암사 부도<浮屠, 승탑(僧塔)>

다비숲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면 왼쪽(북쪽)에 고색이 짙은 석종형(石鐘形) 승탑 2기가 눈
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승탑 형제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노란 때가 입혀진 오른쪽 탑은 피부에 '청한당
성정탑(淸閑堂性淨塔)'이라 쓰여 있어 탑의 이름은 성정, 탑의 주인은 승려 청한당임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대한 정보와 탑 조성 시기는 드러난 것이 전혀 없어 한 곡절 아쉬움을 건
넨다.
그리고 왼쪽 승탑은 오른쪽 것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단부에 '강희갑
오입탑(康熙甲午入塔)'이라 쓰여 있어 1714년)에 탑이 세워졌음을 살짝 귀뜀해주며, '施主俊
祂(시주준야)'란 글씨도 추가로 새겨져 있어 시주자가 '준야'임을 알려준다.


▲  왼쪽 승탑 기단부에 선명하게 새겨진 '강희 갑오 입탑' 6글자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비암사


※ 세종시 제일의 고찰이자, 백제의 마지막 종묘(宗廟)사찰, 운주산 비암사(雲住山 碑岩寺)
운주산의 한참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비암사는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로 일컬어진
다. 매년 4월마다 백제 제왕과 대신들에게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 대제로
비암사는 천하에 조금씩 이름 3자를 알리고 있다.

비암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
(五鳳) 원년인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니
100% 맞지가 않는다. 다만 3층석탑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이라 불리는
석불비상(石佛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상에는 계유년(癸酉年)인 673년 4월 혜명대사
(惠明
大師)가 전씨(全氏)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모아 백제왕과 대신들, 법계중생들의 안녕
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이를 근거로 673년 창건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호령하며 천하의 바다를 름잡았던 백제, 허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660년 7월 나당연합군과 웅진성주(熊津城主)를 비롯한 매국노에 의해 허망
하게
멸망의 비운을 당하자 백제 유민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왜열도에서 치열하게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왜왕(倭王)상국(上國) 백제의 멸망에 크게 곡소리를 내며 서둘러
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비암사를 품은
세종시 지역은 백제의 국도(國都)웅진(熊津, 공주) 바로 동쪽 동네로 백
제 부흥군은 세종시 도처에 웅거해 나당연합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허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663년 거진 진압되고 만다.

백제 부흥이 물거품이 되자 비암사 주변에 살
았던 전씨를 중심으로 한 유민들은 망국(亡國)
한을 달래고자 673년에 비암사 자리에 백제 왕실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석불비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비상이 완성되자 제사를 올리니 그것이 비암사의 상징이자 백제를 그리
워하는
이들의 가슴을 치는 백제대제(百濟大祭)이며, 그 연유로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이란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이후 4월 15일마다 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역사가 무려 1,300년이 넘
는다. 지금은 편의상 양력에 지낸다.

673년 창건설 외에도 후삼국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물증은 없다. 다만 경
내에 고려 때 조성된 3층석탑과 8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 때도 법등
(法燈)을 유
지했음을 보여주며, 그 이후 뚜렷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
(全域
誌)'에 비암사가 나오고, 경내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극락보전과 괘불 등이 있어 그런데
로 절을 꾸렸음을 보여준다.

1960년에 3층석탑에서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 보물 367호)','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368호)' 등
이 발견되어 천하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제자리를 떠
나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다.
1991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
사 2동을 지었다. 그리고 1996년 범종각을 세우고, 2007년에는 절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때
도깨비도로가 태어남)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설선당, 명부전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보전과
3층석탑,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괘불탱화 등의 지방문화재와 800년 묵은 느티나무, 조선
후기 승탑 2기 등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매년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가 성황리에 열리는데, 이때 영산회괘불탱화(세종시 지방유형문화
재 12호
)가 외출을 나와 대제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일
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비싼 존재임)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비암사길 137 ☎ 044-863-0230)


▲  비암사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둘러보기 (느티나무, 극락보전 주변)

▲  비암사 느티나무 - 세종시 보호수 8-17호

주차장에서 비암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느티나무 옆에 늘어진 돌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윗
쪽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느티나무가 천하를 굽어보며 중생을 검문하고 있는데, 비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이 없어 돌계단과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주고 있다.
허나 느티나무가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들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영혼까지 몽땅 털린 가련한 존
재에 불과하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간절히 봄의 해방군을 열망하는 모습이 석불비상을
만들며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했던 백제 유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느티나무는 세종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197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81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이 얹혀져 대략 850살 정도 되었다. 지방기념물
이나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으나 아직까지 보호수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래
도 관련 철밥통들의 보는 눈이 없나 보다. 도깨비도로에 홀린 탓일까?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7.5m로 방대한 나이에 비해 덩치는 작은 편이며, 잎이 밑에서 피어
나 윗쪽으로 올라가면 흉년, 위에서 아래로 피면 풍년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올해는 과연 잎
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사람의 심리상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이
니 매년마다 바람직한 곳에서 잎이 시작되어 주변 농민들의 마음에 늘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
면 좋겠다. 그것이 비암사와 느티나무의 중생들을 위한 소임일 것이다.


▲  중생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비암사 느티나무
호랑이가 담배를 빨다가 폐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하여 산에 호랑이가 없는 거라고??
이유야 어쨌든 담배는 백해무익한 존재이니 비암사를 찾거나 본글을 접한
흡연 중생들은 다들 금연에 동참해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잘 다듬어진 돌계단

▲  계단의 끝에 등장하는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3층석탑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정면에 3층석탑과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설선당, 왼쪽에는 범종각과 요
사 등이 경내를 메운다.
극락보전 뜨락에 단정하게 자리한 3층석탑은 땅바닥에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
과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 등을 지니고 있다. 1982년에 탑을 손질하면서 기단부를 보완하
고 뒤집어져 있던 석재를 바로 잡았으며, 탑신 지붕돌은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고, 밑면에
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 1층은 2층보다 2배 이상 커서 균형이 그리 맞아보이질 않으며,
밑면의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960년 탑 꼭대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기축명아미타불비상','미륵보살반가사
유비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몰라 애태우던 비암사의 한줄기 단비를 뿌렸으며, 비상과 느
티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세종시 출범으로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19호였음)

▲  비암사 설선당(設禪堂)

▲  범종각과 우측 선방(禪房)


▲  비암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호

3층석탑이 있는 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
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공포(空包)가 평
방(平枋) 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다포(多包)양식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도깨비도 모르는 실정
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법당의 역할을 대웅전에게 넘겨주고 2인자로 밀려났지만 법당 건물의 품격을 잘 간직하
고 있으며, 내부에는 소조아미타불좌상과 화려한 닫집,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민화 스타일의
산신탱, 독성탱,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탱 등이 걸려있다.
이 건물은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79호였으나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지
방유형문화재 제1호란 큼직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지붕에는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아 경내를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고
살짝 올려진 추녀는 마치 새의 경쾌한 날개짓을 보는 듯 하다.

▲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3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우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좌상이 홀로 자리하여 중생을 맞이한다. 이 불상
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도금을 입힌 소조상(塑造像)으로 높이 196cm, 어깨 폭
89cm, 무릎 폭 132cm에 이르는 큰 불상이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아주 두툼하게 솟아있고, 중간에 반원 모양의 중간계주
(繫柱)가 있다.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로 꼽슬이 꽤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큰 덩치
에 맞게 푸짐하고 듬직한 인상인데, 볼에 살이 두툼해 거의 사각형에 가깝다. 눈썹은 직선으
로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박혀있으며, 두 눈은 가늘게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두 귀
는 중생의 조그만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
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양 어깨부터 다리까지 이어져 있고, 어깨는 딱 벌어져 듬직하다. 손
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데, 불상의 생김새를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민화(속화)처럼 그려진 독성탱과
산신탱

▲  극락보전의 지킴이, 신중탱



♠  비암사 마무리

▲  대웅전(大雄殿)과 괘불석주,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1991년에 지어진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극락보전을 대신하여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1년에 딱 1번 백제대제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산회괘
불탱화가 담긴 함이 있다.
이 괘불은 1657년에 화승 신겸(信謙)이 그린 것으로 도상(圖像)의 내용이 그가 1652년에 제작
한 청주 안심사(安心寺) 괘불과 비슷하여 그것을 참고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괘불은 대웅
전 앞에 놓인 붉은 피부의 괘불석주(掛佛石柱)에 몸을 기대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데, 괘불이
그때만 외출을 하여(석가탄신일에도 외출 가능성 있음) 만나기가 꽤 까다롭듯이 석주 역시 그
때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외에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불을 이룬다.

▲  석가3존불 옆에 있는 검은 피부의 '기축명 아미타불 비상' 모조품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비상 가운데 하나로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고
모조품이 덩그러니 앉아 진품을 닮아간다.

▲  비암사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보살입상

대웅전 우측 옆구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거처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꽤 컬러풀한 스타
일로 그의 좌우에 서 있고, 색채가 고운 지장탱이 그들의 뒤를 받쳐준다.


▲  비암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과 대웅전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1칸짜리 건물로 1995년에 지어졌다.

▲  산신각 산신탱과 산신상

산신각에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호랑이를 옆에 품은 산신상과 산신탱 2점이 걸려있다. 산신탱
은 보통 1점만 걸려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려 2점이나 걸어두어 산신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기대감을 표시했다. 산신상과 산신탱에 묘사된 호랑이는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마냥 귀엽게 다
가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비암사 경내 (바로 앞 건물이
극락보전의 뒷통수)


비암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
로 생각했으나 직접 와보니 이게 전부야? 싶을 정도로 조촐한 모습이었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주변이 전부기 때문이다. 허나 지나치게 겉모습만 추구하며 으리으리함을 강조하는 절보다는
이런 아담한 산사가 적지 않게 정감이 가며, 거기에 고색의 내음도 무척 진하니 정말 금상첨
화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하여 비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제대제를 알았다면 그때를 맞춰서 찾
아와 괘불탱화까지 몽땅 챙겨보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다시 와야 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아마도 다시 인연을 짓자는 비암사의 지극한 뜻인가 보다. 비암사에 간다면 백제대제가 열리
는 4월 15일이나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9~10월에 가는 것을 권한다. 그래야 괘불탱화를 비롯한
비암사의 숨겨진 끼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3월 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