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사'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4.03.22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2. 2021.07.23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3. 2020.12.21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2
  4.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5.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김포공항을 굽어보는 강서구의 대표 지붕,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둘레길, 개화산자락길, 개화산 봉수대, 미타사석불입상, 신선바위>

강서구 개화산(약사사, 개화산둘레길, 미타사)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


▲  개화산둘레길 (강서둘레길1코스, 개화산 숲길)

▲  약사사 석불입상

▲  미타사 석불입상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강서구(江西區)의 대표 지붕인 개화산(開花山)을
찾았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인 도봉산 그늘에 있고 개화산
은 서울의 서쪽 끝으머리인 개화동과 방화동에 있다. 서로 끝과 끝에 있어서 거리도 거
의 40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 이상이 걸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많이 가지 않는 편이다.

개화산은 즐겨찾기급 명소는 아니지만 매년 1번 정도는 가는 편이다. 자고로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찾는 법, 이번 나들이는 방화역(5호선)에서 시작하여 약사사와 개
화산전망대, 개화산둘레길(강서둘레길1코스), 미타사, 하늘길전망대를 거쳐 방화근린공
원에서 끝을 맺었다.



 

♠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로 인도하는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
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하여 풍경도 아름답다. 산 동북쪽에
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
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어느 시절에 주룡(駐龍)이란 도인(
道人)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죽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
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
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도 산 모
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주산
(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고 서울에
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아주 알찬 개화산에는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늙은 석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 상사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 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
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 3.35km)이 닦여져 있는데,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가 설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  약사사 방면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개화산자락길(금낭화로17길)로 들어서 약사사로 가다 보면 길 중간과 약사사 표석 전에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이 간만에 보고 가라
며 손짓을 보낸다. 허나 이번에는 그들에게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아서 오직 정면에 보이는 먹
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고양이처럼 바로 약사사로 넘어갔다.

약사사 표석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이
어지고, 오른쪽은 약사사와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봉화정과 강서둘레길1코스 서쪽 구간
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약사사 경내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개화산의 오랜 상징인 약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
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 내세우고는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
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으나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현령)으
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주고 있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
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곁드린다면 아주 영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약사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17길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있음)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범종각(梵鍾閣)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로 탑 높이는 4m이다. 땅에 바닥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
한 것들이다.

▲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3층석탑
마치 하늘이 움푹 낮아진 듯, 자욱하게 낀 오색 연등이 탑의 머리와 하늘을
앗아가 버렸다. (이때가 석가탄신일 며칠 후였음)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
은 존재로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
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아주 조그만 금동석가여래상이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
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많은 후배급 불상/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조성된 미륵불(彌
勒佛)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
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바로 앞에 있는 금동석
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약사사 돌담길
약사사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통해 개화산전망대로 이동했다.


 

♠  개화산전망대와 개화산둘레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5~6분 오르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하여 난지도, 은평/서대문/마포구, 남산, 북
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가 높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천하에서 제일 작은 고을인 양천현(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고촌읍)의 주요 명소를 그림으로 남겼
다.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
이 변해버린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긴 것이
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
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德陽山, 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
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재현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허나 그래봐야 순수 자연산이던 예전만은 못하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너른 공터와 헬기장
공터 주변에 널린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 및 예비군 훈련지로 활용되고 있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전쟁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에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幸州山城), 양천고성(陽川古城, 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에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
로 보인다. 6.25때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
속 이어간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鞍山) 봉수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
월 재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
앉은 관계로 부득이 북쪽으로 250m 떨어진 봉
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1코스)

도보길이 천하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산과 숲, 한강, 철새도래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둘레길로 총 3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개화
산숲길로 개화산을 1바퀴 도는 3.35km의 산길이다. 개화산 둘레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오르
락내리락이 다소 반복될 뿐, 딱히 힘든 구간은 없으며 가볍게 걸으면 60~70분 정도면 충분하
다. 중간에 여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과 약사사 등의 늙은 문화유산도 만날 수 있다.
개화산숲길 외에도 '개화산자락길'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
사 표석~개화산전망대/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金浦市)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아라뱃길전망대는 이름 그대로 아라뱃길이나 바라보라고 만든 곳이다. 아
라뱃길은 서해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1년 완성을 보았는데, 여객선
과 유람선, 화물선을 서울까지 들어오게 해야 물류비용도 절감되고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바람
직하지 못한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억지로 만들었으나 그 기대치에 1%도 안되는 놀라운(?) 실
적을 보이며 서울과 인천의 아주 저주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었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해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누워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산신이 과연 이곳을 거쳐갔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신선
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호국충혼위령비(호국충혼비)와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곱게 단장된 푸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호국충혼위령비(이하 충
혼비)가 나타나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충혼비는 천하에 매우 흔한 6.25 관련 기념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6.25가 터지
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이었음)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
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 부근까지 후퇴했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설상가
상으로 탄약과 식량보급까지 끊겼다. 결국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1사단 12연
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해 1,100여 명이 전사하
고 말았다.
이후 호국(護國)의 신이 된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에 충혼비를 세웠으
며, 매년 6월에 지역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이 위령제를 지낸다. (11월 가을걷이 이후에도 지
낸다고 함) 바로 이 충혼비 밑이 미타사이다.



 

♠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집,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 서쪽 자락에 살짝 둥지를 튼 미타사는 조그만 절이다. 서울
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절로 예전에는 약사사와 함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이 고려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계점과 삼국시대 창건설을 입
증할 존재가 전혀 없어 이제는 쏙 들어갔다.
또한 19세기에 '김대공'이란 사람이 석불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
찰(願刹)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역시나 구전에 불과하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1924년 창건설로 절 밑에 있는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
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그 이전에는
애당초 절이 없었고, 미륵불로 숭상을 받던 석불만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후 자리
를 조금 달리하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린다.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2기의 노천 석불, 그리고 5층석탑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절이 조촐하고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시내와 가깝지만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다. 김포공항을 수시로 드나드는 비거(飛車)들의 소음을 빼면 정말 고즈넉한 곳으
로 개화산숲길과도 가까워 개화산 나들이 때 이곳을 곁드리며 숲길을 1바퀴 돌면 나름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미타사란 이름을 지닌 오래된 절이 3곳 있음, 보문동 미타사(☞ 관련글 보
), 옥수동 미타사(☞ 관련글 보기), 그리고 이곳 개화동 미타사>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여염집 스타일의 미타사 법당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서쪽을 굽어보는 석불좌상


전형적인 불전(佛殿) 스타일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미타사 법당은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
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마련된 것으로 왜정 때 석고로 조성된 지장보살입
상도 있다. (그는 친견하지 못했음)
그 보살상은 경내에서 석불입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는 원래 옛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
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지고 있다가 경주의 어
느 사찰로 넘어간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와 봉안했으니 무려 40년 이상 타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마도 6.25시절에 개화산을 점거한 북한군이 불상에 화풀이를 하며 우물에 버
린 것으로 여겨진다.


▲  미타사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국제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돌탑과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왼쪽 탑)
석불입상 뒤쪽에 경내의 유일한 석탑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했는데,
그로 인해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이 석불은 미타사에서 미륵불로 받들고 있는 존재로 고려 후기,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모습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만 근래 것이지 석
불 자체는 순수 오래된 불상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천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
러 번 땅속에 들어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24년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그를
위한 집이 지어졌으니 그것이 미타사의 시초로 여겨지며 요사 자리에 미륵당이란 조그만 건물
을 지어 봉안했으나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넣었고, 예전의 헌 대좌는 석불 윗쪽에 있는 바위 밑에 있다.

석불의 모습은 개화산 동쪽 약사사의 석불좌상과 좀 비슷하다. 그는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리에 동그란 갓돌을 쓰고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서 그리 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시대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가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과 함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석불입상과 그 주변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국제공항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개화산둘레길(개화산숲길)로 다시 진입하여 남쪽으로 조
금 가니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아주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 그런 이름
을 지니게 되었는데, 정말로 공항 내부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공항뿐 아니라 주변 김포평
야와 인천 동북부(계양구), 부천 지역이 덩달아 두 눈으로 달려오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
가 5분이 멀다 하고 공항을 들락거려 김포공항의 위엄을 보여준다.


▲  솔내음이 그윽한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짙은 숲속을 가르는 개화산둘레길 서쪽 구간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로 갈아탔다. 자락길 서쪽 구간
은 하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까지로 이중 개화산둘레길과 겹치지 않는 북까페 주변 숲
길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칭송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
못지 않은 편안함과 느긋함을 보여준다.
이런 나무데크길은 통행편의도 있지만 인간의 발길로부터 나무와 흙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
다. 그러다 보니 나무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길을 닦았고 부득이 길 복판에 자리하게 된 경우
는 그냥 그 자리에 둔 채로 길을 내었다. 물론 나무가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내어 그를
배려했으며, 개화산둘레길 나무데크길도 같은 방법으로 길을 내었다.


▲  시원하게 뻗은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개화산자락길 무장애숲길을 모두 거닐고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둘레길(개화산 숲길)로
갈아타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시간은 거의 19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고 나 역시 피곤한 상태라 여기서 출사를 마치고 쿨하게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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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 개화산 (강서둘레길, 미타사, 치현산)



'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 나들이 '
(강서둘레길, 미타사, 꿩고개산)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미타사 석불입상

▲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미타사 석불입상

▶ 개화산 호국공원(호국충혼비)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서울 서쪽 끝에 솟은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강서구(江西區)의 상큼한 지붕이자 김포국
제공항의 뒷동산이다.
동쪽에 솟은 치현산(꿩고개산)까지 개화산의 영역으로 북쪽은 한강과 맞닿아 있으며, 동
/서/남은 평지로 비록 산은 작으나 평지 속에 홀로 솟은 잇점으로 낮은 키에 비해 조망(
眺望)이 아주 좋다. 게다가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해 거닐기에 좋으며, 약사사와 미
타사 등의 오래된 절과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바위, 봉화대, 개화산호국공원, 치
현산(꿩고개산) 등의 다양한 명소들, 그리고 강서둘레길과 개화산자락길 등의 일품 숲길
까지 넉넉히 품은 알찬 뫼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매력에 일찌감치 녹아들어 매년 1번 이
상은 꼭 발걸음을 한다.

개화산의 옛적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고 한다. 신라 때 주룡이란 도인(道人)이 이곳
에 살았는데, 매년 9월 9일에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
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워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라 했으며, 그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
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그리고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궁산 양천고성(陽川古城)터와 더불어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로 개화산 정상과 꿩고개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변경의 소식을 남산으
로 전달했으며, 6.25때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
산이 코끼리, 행주산(幸州山, 행주산성)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
는 액운을 막고, 서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으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계절의 여왕 한복판에 찾은 이번 개화산 나들이는 약사사(
藥師寺)에서 시작해 개화산자락길과 강서둘레길1코스, 신선바위, 미타사를 거쳐 치현산(
꿩고개산)까지 싹 둘러보며 개화산을 철저히 복습했다.



 

♠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  서울에서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개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해 김포공항과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미타사는 서울에서 가장 서
쪽 끝에 자리한 절이다. 약사사와 함께 개화산에 안긴 늙은 절로 19세기에 '김대공'이 석불입
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찰(願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1924년 절 아래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는데, 이때를 절의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고 있다.

그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후 자리를 조금 달리하
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
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숲에 감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석불, 5층석탑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금의 미타사를 있게 한 오래된 석불입상이 있다. 바로 그를 보고자 이
곳에 온 것이다.

▲  여염집 모습의 미타사 법당
겉은 이래도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  법당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산신탱과 칠성탱


이곳의 법당은 그 흔한 기와집 불전(佛殿)이 아닌 여염집 스타일의 집으로 1970년대에 중건되
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여래3존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며, 산신과 독성, 칠성 식구들도 법당의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왜정(倭政) 때 석고로 만든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도 있는데,
그는 석불입상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은 존재로 원래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절이 파괴
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
지고 있다가 경주(慶州)의 어느 절로 넘긴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왔다. 무려 40년 이상 타
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그는 개화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화풀이용으로 괴롭히다가 우물에 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석불좌상
커다란 바위에 들어앉아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김포공항 비행기들이 늘 무탈한 것도 그의 묵묵한 가피 덕이
아닐까 싶다.

▲  미타사 석불입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

석불입상 뒤쪽에는 경내의 유일한 돌탑인 5층탑이 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탑으로 석탑은 보통 법당 앞이나 경내 안쪽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자리가 여의
치 않아서 석불입상 뒤쪽 산자락에 두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한 것인데,
그로 인해 미타사는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석불입상은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로 여기서는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
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근래 교체된 대좌(
臺座)을 제외하고 석불 자체는 순수 늙은 석불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러 번
땅속에 묻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세기에 김대공이 그를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석
불 옆에 절을 세웠다고 전하며, 1924년에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 현 요사 자리에 미륵
당을 지어 봉안했다. 즉 미타사는 석불의 후광(後光)으로 지어진 절이다.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석불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교체했
고, 옛 대좌는 석불 주변에 두었다.

석불 머리에는 동그란 갓돌이 씌워져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
한 삶을 살아서 그리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
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 때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
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도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입상과 함
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석불입상의 옛 대좌
커다란 석불입상이 사용했던 늙은 대좌로 근래 새 대좌로 갈아탔다. 하여
옛 대좌는 옆으로 물러나 막연히 허공을 이고 있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강서둘레길1코스(개화산숲길)로 돌아와 남쪽으로 조금 가
면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나무데크 형태로 닦여진 전망대로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과 그
곳을 오가는 비행기 구경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여 전망대 이름도 하늘길이다. 여기서는 김포
공항 뿐 아니라 김포평야와 인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 부천 북부 지역, 김포 고촌읍 지역
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수준도 괜찮은 편이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가 5분이 멀다하고 공
항을 들락거려 김포국제공항의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평야와 개화동, 계양산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나무데크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 서쪽 길로 갈아탔
다.
개화산자락길은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사 표석~개화산전망대' 구간의 동쪽 길과 '하
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구간의 서쪽 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 길은 북까페 주변
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찬양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을
긴장시킬 정도로 큰 편안함을 보여준다. 북까페 주변을 제외하고는 흙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가 느긋해 거닐기 좋으며, 길 중간에 근래 세운 개화산 정상 표지석이 있다.


▲  방화근린공원 방면 개화산숲길
개화산 자락길 무장애숲길을 지나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 숲길로 갈아타고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치현산이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개화산 동쪽에 솟은 작은 뫼, 치현산(雉峴山, 꿩고개산)

▲  치현산 공원길 입구

개화산 동쪽에는 꿩고개(70.5m)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있다. 개화산의 일원으로 방화동
(傍花洞) 시내와 한강 사이에 자리하여 강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존재로 동서로 짧게 이
어져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꿩고개(또는 꿩고개산), 한자로는 치현산이라 부른다.
이곳이 꿩과 관련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2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실감이 별로겠지만 옛날
에는 꿩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꿩사냥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꿩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 치(雉)가 꿩 외에도 성곽에 달린 방어시설도 뜻한다.
아무래도 개화산이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정상에 개화산
동봉수대가 있다보니 방어시설을 뜻하는 치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이름 꿩
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꿩고개에는 강서둘레길 2코스인 공원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하나로 이루어진 1코스(개화산숲
길)와 달리 2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작점은 개화산숲길과 만나는 방화근린공원이며,
여기서 산길과 벚꽃길(수레길)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길은 마곡서광아파트 부근에서 잠시
만나지만 여기서 서남환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2갈래로 갈려 공원을 1바퀴 돈다. 총 길
이는 4.5km로 서광아파트 서쪽은 산, 동쪽은 평지 공원이라 길은 거의 느긋하다.


▲  주민 혐오 공간에서 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방화근린공원 벚꽃길

방화택지 북쪽이자 개화산과 꿩고개산 사이에 넓게 터를 다진 방화근린공원은 1996년에 조성
되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이 땅의 흔한 시민공원이나 수목이 울창하고 연못과 분수대, 광장, 물레방아 등이 공원 곳곳을 수식하고 있으며, 쉼터가 많아 소풍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
다.
산책로가 개화산과 꿩고개산으로 핏줄처럼 이어져 있고, 불법주차와 덤프트럭의 통행으로 꽤
나 시끄럽던 공원 북쪽 길을 손질하면서 100여 그루의 벚꽃을 심어 상큼한 벚꽃길을 닦았다.
하여 이제는 서울의 어엿한 벚꽃 명소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숲이 무성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짙은 녹음 속으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치현산 북쪽 벼랑에 매달린 치현정(雉峴亭)

치현산에 왔다면 꼭 가봐야 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산 북쪽 벼랑에 깃든 치현정이란 팔각형
정자이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존재는 아니지만 강서구에서 한참
강서둘레길을 닦던 2012년, 강서구새마을금고협의회에서 만든 것으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벼랑
에 자리한 탓에 조망도 제법 괜찮아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야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여 겸재의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대판 버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말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결코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행주대교, 일산신도시
치현정 바로 앞으로 올림픽대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펼쳐져 차량의 굉음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소음을
감안하고 이곳의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 건너에 길게 누운 뫼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현장인 행주산이다.
행주산 앞 한강을 예전에는 행호라 불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③
방화대교와 고양 화전 지역, 앵봉산~봉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 노고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산은 작지만 숲이 생각 외로 짙어 마치 깊은 산골에 푹 묻힌 기분이다.

▲  치현산을 정리하며,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치현산 능선을 완전히 가로질러 산 동쪽 끝에 자리한 치현둘레소공원으로 내려갔다. 마곡서광
아파트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원으로 치현산을 중심으로 한 꿩고개근린공원의 일원이다. 강
서둘레길2코스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을 서남물재생센터와 서남환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치현산까지 겯드린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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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7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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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독서당로40길 21 ☎ 02-2297-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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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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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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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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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3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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