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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2.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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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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