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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29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2. 2017.01.07 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3. 2015.07.15 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4. 2015.03.16 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5. 2013.07.09 정릉 봉국사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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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서남부)

▲  호압사 8각9층석탑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울 시흥동과 독산동,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석수동)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
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
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옛 금천(衿川) 고을(현재 서울 금천구)의 주산
(主山)이라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
성)에서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글쎄 한강 남쪽
에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나란히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
이다.
하여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호압사를 세우
고, 관악산 정상 밑에 연주암(戀主庵)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
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세운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
래된 옛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성, 흔적만 남
은 제2한우물터,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기도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
(己亥迫害) 때 처단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
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절의 흔적들이 존재하여 이곳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
워준다. 게다가 조망 또한 알품으로 서울의 절반 정도와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
(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며, 호압사 남쪽에는 넓게 잣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으로 꾸몄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2012년 8월에 닦여진 호암산폭포가 있으며, 호암산 서남쪽 끝자락에는 시흥계곡이 펼쳐져
있는 등, 볼거리도 풍년이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대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벽산5단지, 시흥계곡, 석수
역 등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까지 이어진다. 또한 사당역
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
(13km)이 닦여져 있다.

호암산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1년에 여러 번씩 찾아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나
들이는 호압사입구에서 시작하여 호압사, 호암산 정상, 한우물(불영암)을 거쳐 벽산5단지
에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수십 번 인연을 지은 곳이라 호압사만 보고 빠지려고 했으나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여기까지 온 거 더블로 싹 둘러보았다.


▲  호압사 뒤쪽에서 바라본 호암산
늦가을이 지른 단풍불로 산이 매우 화사하다.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는 절, 호압사(虎壓寺)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호압사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면 바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팔작
지붕 머리를 한 그는 2000년에 금천구청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구가 서울시 25개 자
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구로 선정돼 시상금을 받자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호압사에 만들어준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 사찰,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이 뻥 뚫려있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
원이 자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중생의 마음을 잔뜩 주눅들게 만든다. 절까
지 걸어서 10분 거리로 차량들이 편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콘크리트 길이 닦여져 있는데, 경사
의 패기가 짙어 아무리 차량이라 한들 조심스레 바퀴를 굴린다. 특히 눈이 쌓인 날은 울면서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좀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진
다. 주차장을 지나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마치 솟아나듯 보이기 시
작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단풍나무 (경내 바로 밑부분)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
으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곳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는 개경을 버리고 현재 서울을 도읍으
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
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
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하여 풍수지리적
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1394년에 태조가 무학대사에게 명해 호암산 밑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호압사
라 했다고 한다. 과연 태조와 무학대사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호암산의 기운을 잡
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에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고,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웠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을 싹 소
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
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
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
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
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
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
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山寺)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
는데 아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또한 절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
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
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중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을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인다. 또한 매주 일요일 점심시간에 국수 공양을 제공하며, 12월
31일 밤에는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
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약사전에 있는 약사불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산
증인들로 늦가을도 호압사가 좋은지 나무에 오래도록 머물며 알록달록 작품을 빚었다.
계단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키가 7m, 허리둘레가 4.2m이다. 반면 계
단 동쪽 나무는 비슷한 나이에 키 11m, 허리둘레는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은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500년 묵은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9층석탑이 조촐하게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
도 건물로 건물 이름인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8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
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허전함이 달래고자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약사전)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
게도 좌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탑 뒤쪽이자 약사전 옆구리의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
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삼성각 산신탱(山神幀)

▲  삼성각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
단에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자 상징인 석불좌상이 협시보살을 주렁주렁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우에 붙여주어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
는 귀여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해 보이는 약사불은 연꽃 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15세기에 조성된 그는
얼핏 보면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
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
습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
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의 일광/월광보살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고 있
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이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
료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피부의 원
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범종각과 쉼터

범종각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4가지의 물건,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
판(雲版)이 담겨져 있다. 그 옆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쉼터가 닦여져 있어 누구든 다리를 접고
쉬어갈 수 있다.


▲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
은 호압사에서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독서
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
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
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
리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또한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호암산 정상과 석구상 주변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석수역과 서울대 방면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길(서울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 능선길은 난곡(蘭谷)과 목골산으로 연결되며,
서쪽은 호압사와 벽산아파트, 석수역(서울둘레길)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나는 호암산 정상으로 길을 잡았는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뛰어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그런 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
구이며, 거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정상이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리에 해당된다.
서울의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
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서북부와 도심부, 동북
부, 강남,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
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
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와 동작구, 여의도를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강북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 중앙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부천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도덕산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부천 지역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과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
다가 고색의 명소들도 호암산의 매력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수리산(修理山, 489m)과
그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안양(安養)시내

▲  청정한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과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
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
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으
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이 0.9m, 높이가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
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  석구상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니다. 긴 꼬랑지의 고양
이나 호랑이의 그것과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
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
들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잔뜩 굳은 표정에서 웃음이
넘쳐나게 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식지않는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호암산성(虎巖山城)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남쪽 능선길로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된 채 현역에서 물러난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
적을 만날 수 있다. 석구상 북쪽에서 호암산성의 북문터로 여겨지는 성터 흔적이 있는데, 능
선길 산성터는 성돌과 흙이 섞인 1~3m 높이의 각도가 다소 진 성의 윤곽이 전부로 산길에 이
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고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다져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
이는 약 1,547m, 산성 면적은 약 133,790㎡에 이른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
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1990년 봄, 한우물과 호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
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기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
련 기록을 통해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672년에 신라
가 당나라군을 막고자 세운 요새라는 설도 있음>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
런데로 구실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
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慄) 장군
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
(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이곳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
울 수복 작전을 전개했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수백 년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져 뭉개져 갔
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어 버
린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성곽이나 건물을 지어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
난감에 불과하다.


▲  호암산성 건물터

석구상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
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오른쪽(동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왼쪽(서쪽)에는 호암산
성 건물터가누워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터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고,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하게 덮어주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암산
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등의 시설,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힌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터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가 2m에 이르
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
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우제, 기타 여러 의식들이 거행된 곳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
으며, 우물터 곳곳에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귀신도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
우물이 있으니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  호암산 마무리 (한우물과 칼바위)

▲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
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인데 천
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이곳은
물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지 늘 물이 넉넉히
고여 있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며, 신라 중기인 7~8세기 경에 축조되었다
고 한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
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구축했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
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
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
國輿地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 (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에 따라 서울의 화재를 막으
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무늬만 우물로 그의 보존을 위해 그 주위
로 돌난간과 철제 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벼랑에 조망대가 터를 닦고 있어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천하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
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5단지와 시흥동, 독산동, 광명시, 구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구로구, 관악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호암산 북부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용산구,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  불영암 대웅전(佛影庵 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그만 기도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호압사 승려가 늘 머물며 기도를 올린 모양이다. 보통 100
여 년 이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50년대 이후 기도처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
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
러니 한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바탕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
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
2한우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잠시 돌탑 앞에 두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내에 있음)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시내를 넓은 뜨락
으로 삼아 절의 규모는 눈송이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
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火田
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인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한 나그네를 대상으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도 팔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그래서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저들의 보관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處士)가 발견한 것들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저들의 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늘어져 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에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듯 하다.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호암로 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한우물에서 불영암을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
쳐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
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
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
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
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
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왜장이 시흥 장사와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겠다고 제
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왜군 장사는 99번을 하고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졌고, 그
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결국 시흥 장사가 이기자 왜군은 약속대로 후퇴를 하였고,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
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한다.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에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아파트와 시흥동,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과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이렇게 하여 늦가을 호암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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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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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  호암산 (사진 밑부분에 보이는 기와집이 호압사)


 

천하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변해가던 11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
인 호암산을 찾았다. 호암산에 안길 때는 시흥2동 호압사입구에서 보통 출발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삼성산성지에서 첫발을 떼었다.

신림역(2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화계사↔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를 가로질
러 삼성산성지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호암산의 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성당과 삼성산
청소년수련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오른쪽 산중턱에 천주교 성
지인 삼성산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성산성지 동쪽 삼호약수터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의 무덤 (유해 일부가 묻힘)

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1970년에 지어진 삼성산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 형상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겨울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 남쪽)

▲  삼성산성지에서 호압사로 이어지는 산길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호암산 서쪽에 자리한 호압사로 길을 옮긴다. 지도로 보면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바로 호압사의 뒷통수인 호압
사 분기점에 이른다.


▲  호압사 채소밭에서 바라본 호암산(虎巖山)의 위엄
알록달록 익어가는 늦가을 단풍이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서울을 위협하는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어진 오래된 산사 - 호암산 호압사(虎壓寺)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호압사 경내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
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
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
하니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여 두 산의 기운을 잡고자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세웠으며, 호암산에 호압
사를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대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
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
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빚은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
을 싹 소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
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殿下),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
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
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
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른
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
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함>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일주문

▲  호압사 범종각과 원두막 쉼터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는데 아
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호압사입구에서 도보 10분이면 끝) 절
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
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원두막 쉼터를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1년에 2~3번 정도 방문함)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
인다. 특히 중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등을 마련하는 등
호압사의 배려가 돋보인다. 범종각 우측 쉼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으며, 종무소에서 물과 음료
수, 염주 등의 불교용품을 판매한다.

호압사는 내가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불
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호압사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삼성산성지
  에서 내려서 25분 정도 올라가도 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5517번(서울대↔중앙대), 6515번(양
  천차고지↔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 매주 일요일 12~13시에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안주는 경우도 있음)
* 매년 12월 31일 밤 10시 이후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있다.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
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 겸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
용도 건물로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심검당 옆에 솟아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  쉼터 옆에 자리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심검당과 범종각 옆에는 500년 숙성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하는 산증인들로 오랫동안 뜨락에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들이
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떠나가려는 늦가을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늦가을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겨울 제국의 이빨이 커지면서 뜨락에는 벌써부터 맥없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낙엽이란 꼬리표를 달며 산바람과 사람들의 빗자루질, 발질에 이
리저리 흩날려 속절없는 삶을 정리한다.

심검당 옆에 자리하며 천하를 굽어보는 느티나무는 키가 7m, 가슴둘레 4.2m이며, 범종각 옆에서
나란히 천하를 바라보는 느티나무는 키 11m, 가슴둘레 3.6m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성장했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절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유난히도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
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 안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
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게도 좌
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약사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
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995
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치성광여래(칠성)가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山神幀)

▲  푸른 두광(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불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단에
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
이자 상징인 석조약사불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석약사불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
불)'>이 협시보살을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
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
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
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
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과 일광, 월광보살좌상

15~16세기 조성된 이 불상은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
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에는 새로운 식구인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를 지킨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
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료시킨다.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훤하게 만든다.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
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
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리
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벌러덩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

▲  새롭게 마련된 호압사 샘터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지만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지
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물을 제공했다. 그
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제공한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호암산 정상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까지는 해발 160m 정도만 오르면 끝난다. (절 바로 윗봉우리가 정상임)
허나 그 길이 다소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다행
히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입구 갈림길
이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꼭대기(393m, 또는 385m)에 이른다.

호암산은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산림욕장에서 남쪽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른다면 구름 위를 거닐
듯 편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93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다
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
리에 해당된다.
서울에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
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光明)과 안양(安養),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
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적지않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1)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2)
서울 금천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단지, 광명, 도덕산, 소래산 등이 보인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구름처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
이다. 하여 능선을 따라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
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
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부와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
가 오래된 명소들도 풍부하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우리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 가지 않고 호암산산림욕장을 거쳐 시흥동(始興洞) 시내로 내려
왔다. 넓게 퍼진 벽산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바로 시흥2,5동 시내인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걷던 중, 솔향기란 식당이 진하게 손짓을 한다. 날씨도 쌀쌀하여 다들 뜨끈한 해물칼
국수를 먹자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  시흥동 솔향기에서 먹은 돌솥비빔밥과 조개 국물의 위엄

솔향기는 해물칼국수와 돌솥비빔밥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다. 다들 칼국수를 몇 그릇씩 먹을 기
세로 들어왔지만 정작 시킨 것은 돌솥비빔밥이었다. 갖은 나물과 고추장, 그리고 돌솥에 바짝
익혀진 밥이 잘 버무려져 그런대로 섭취할 만 했고, 밑반찬으로 깔린 김치도 잘익어 맛이 좋았
다. 특히 하얀 조개 국물이 일품이라 비록 비빔밥의 부속물로 나왔지만 오히려 주물로 봐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빔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듯 싶어 손만두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니 조그만 만두 10개(1인
분)가 각 테이블에 수줍은 듯 차려져 나온다. 만두를 집어먹으니 뱃속은 말끔히 채워졌고, 그
렇게 저녁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근데 이 집은 특이하게도 소주나 맥주 등의 곡차(穀茶)
를 팔지 않는 이 땅에 흔치 않은 무알콜 식당이었다. 산행도 했으니 곡차 1잔 걸쳐야 마땅하지
만 술이 없으니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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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나들이 '

▲  회룡사 동자상

회룡사 극락보전

▲  회룡사 극락보전

▲  석굴암 석굴



봄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5월 첫 무렵에 20년 이상 숙성된 오랜 친구와 도봉산 회룡사를 찾았

다.

집(도봉동)에서 의정부로 가는 서울시내버스 106번(의정부 가능동↔종로5가)을 타고 북쪽으로
15분 정도를 달려 회룡역에서 두 발을 내린다. 우선 회룡역 인근 편의점에서 조촐하게 삼각김
밥, 음료수를 사들고 아파트단지를 지나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회룡역 서쪽 동네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시골이나 다름 없었는데, 이제는 인구 40만을 지닌 의정부(議政府)시내의
일부가 되어 건물과 주택, 아파트가 즐비하다.

호원동 주거지를 어느 정도 지나면 도봉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회룡골(회룡사 계곡)이 모
습을 드러내는데, 그는 여기서 회룡천(回龍川)으로 간판을 바꾸고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하늘을 향해 치솟던 키다리 아파트와 빌라 대신 조그만 시골집들이 조촐히 마을을 이루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의정부 보호수 제1호로 지정된 450여 년 묵은 회화나무가
아직도 겨울 제국(帝國)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20년)

이 나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450여 년 전 회룡골을 지나던 도인(道人)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심은 나무라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애지
중지 살핀다. 만약 나무를 괴롭히거나 보살핌이 소홀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그
런다. 그들은 매년 3월과 9월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부정이 없는 사람을 제관(祭官)으로 추대
해 제를 지내며 마을의 전통 풍속과 결속을 지키고 있다.


▲  회룡골 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회화나무 - 의정부 보호수 1호
400여 년 묵은 나무로 높이 25m, 둘레 4.6m에 이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참 봄의
절정임에도 그 혼자서만 잎 하나 피우지 못한 채, 벌거숭이로 방황하고 있다.
하긴 우리네 인생도 저 방황하는 회화나무와 다를 것이 없겠지..


회룡탐방지원센터(옛 매표소)를 지나면 속인들의 집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완연한 자연의 공
간이 펼쳐진다. 한때 등산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던 옛 매표소를 지나 10분 정도 오르
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석굴암이고 직
진하면 회룡사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회룡사로 간다.


♠  회룡사를 끼고 흐르는 회룡골(회룡사계곡)

▲  회룡골 중류 (석굴암입구 주변)

도봉산(사패산 포함)에는 여러 계곡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회룡골이 단연 일품이 아닐까 싶다.
회룡골 하류는 다른 계곡과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 수록 그의 숨겨진 매
력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런 회룡골의 백미(白眉)는 석굴암입구 갈림길에서 회룡사 사이의 계곡
으로 그곳에 회룡폭포가 숨겨져 있으며, 멋드러진 바위들이 계곡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계곡을
따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속인(俗人)들의 번뇌를 흩날리기에 충분하고 온갖 잡념에 오염
된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곳의 진한 옥의 티가 있다면 계곡 옆에 회룡사로 오
르는 길을 시멘트로 높게 발라버려 회룡골에 대한 감동을 크게 반감시킨 점이다.


▲  회룡골의 찬란한 꽃, 회룡폭포

▲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멋드러진 반석들 (회룡폭포 위쪽)

▲  바위를 따라 내려오는 회룡골, 그 곁에 회룡사 접근을 이유로 시멘트를
높이 발라 어울리지도 않는 옥의 티를 선사해버렸다.

▲  회룡사로 오르는 길
길은 힘들지만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연등의 안내를 따라
묵묵히 오르다보면 금세 회룡사 산문이 마중을 한다.

▲  드디어 도착한 회룡사 정문
회룡사는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며, 이곳이 그 역할을 대신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회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도봉산 굴지의 오랜 산사(山寺),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도봉산 회룡사(回龍寺)
도봉산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사패산(賜牌山, 552m) 동쪽 자락 회룡골에 비구니 사찰, 회룡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사패산은 조선 선조(宣祖)의 6번 째 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가 유정량(
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회룡사는 681년(신라 신문왕 원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했다고 한
다. 930년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고, 1070년(고려 문종 24년)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
을 했으며, 1384년(우왕 10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년)에 회룡사로 이
름을 갈았다고 한다.
허나 무학대사 이전은 이를 입증할 자료와 흔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권상로(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하권 회룡사 부분에는 무학대사가 1384년 또는 1395년에 창건했
다고 나와있으며, 1881년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는 1384년 무학이 지은 것
으로 나와 무학대사 창건설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사실 의상대사의 창건설은 이 땅의 많
은 오래된 절들이 창건주로 팔아먹는 유명한 승려를 그를 절 창건주로 내세워 내력을 윤색시키
고자 함이다. 정작 그가 창건한 절은 부석사(浮石寺) 외에 몇 개 되지도 않는다.

'회룡사중창기'에는 1384년 창건설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384년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가 도봉산에서 같이 창업 성취 기도를 올렸는데, 이성계는 회
룡사 뒤쪽 석굴암에서, 무학대사는 무학굴(지금의 회룡사)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1388년
이성계는 최영(崔瑩) 장군과 우왕(禑王)의 명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정벌하러
가자 무학은 작은 절(회룡사)을 짓고, 손수 만든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봉안하여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요동을 코앞에 둔 위화도(威化島)에서 딴 뜻을 품고 군사를 돌려 고려 조정을 뒤엎은 이성계는
이후 왕위에 오른 뒤 무학을 찾아가 회룡사란 절 이름을 내렷다고 한다. 회룡(回龍)은 용이 돌
아왔다는 뜻이니 즉 용으로 상징되는 제왕, 이성계가 돌아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회룡사중창기'에는 '회룡'의 연유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1403년(어떤 기록
에는 1398년) 2차례나 일어난 아들들의 권력 싸움, 왕자의 난에 뚜껑이 폭발한 태조(太祖) 이성
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갔다가 서울로 환궁할 때 회룡사에 있던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태조
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며 그와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무학은 그의 환궁을 크게 기뻐했는데, 태
조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자신이 환궁했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연
스레 1384년(또는 그 이후)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정답일 듯 싶으며, 15세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이 있어 이를 더욱 입증해준다.

▲  회룡사 5층석탑

▲  회룡사 석조

무학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1630년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된
듯 싶다. (이때 비구니 절로 전환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 1878년 혜봉 최성(慧峯 最性)이 상궁(尙宮) 박씨의 지원으로 절을 크게 중수했고, 1881
년 경해당 원삼(慶海堂 圓三)이 잘나가는 장인들을 모아 당우와 요사를 새로 지었다. 이때 채사
(彩師)들을 초빙하여 지장탱과 신중탱, 현왕탱, 무학대사의 진영을 조성했는데, 시주자는 상궁
하씨와 조씨 등이었다. 비록 왕실의 지원은 아니지만 왕실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상궁들의 지원
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사라진 이후, 1938년 순악(順岳)이 요사를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절은 잿더미가 되었
다. 전쟁이 끝나자 도준(道準)이 1954년부터 중창불사를 벌여 승당(僧堂)과 대웅전, 약사전, 선
실, 요사 등을 다시 지었으며, 197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87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
으며, 1988년에 범종각을, 1996년에는 극락보전과 삼성각, 노전채를 새로 지었다. 거기서 멈추
지 않고 2000년에는 선원인 취선당(聚禪堂)을 개축하고, 2001년에는 성견(性見)이 삼성각을 증
축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삼성각, 설화당, 취선당, 범종각 등 8~9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조선 초기 석탑인 5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조와 신중도 등 지방문화
재 3점을 품고 있다. 건물들은 죄다 6.25이후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씻겨 내려갔
지만 3점의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도봉산을 아우른 북한산(北漢山)국립공원 일대의 대표적인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
하며, 석조관음보살상을 통해 나름대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고 있다. 멋드러진 회룡골을
옆에 품고 있고,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로 고즈넉한 산사의 멋
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끈질긴 번뇌라 한들 회룡골과 도봉산의 청정한 기운 앞에 꼬랑
지를 내리고 도망을 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절을 구경하고 회룡폭포나 회룡골에서 발을 담구며, 피서를 즐기
는 것도 괜찮다. 게다가 회룡사 바로 뒤에는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석굴암이란 조그만 암자
가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다만 석굴암은 바로 질러가지 못하
고 석굴암입구 갈림길로 내려와서 다시 10분 정도를 올라가야 된다.

※ 도봉산 회룡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5분. 회룡탐방지원센터까지는 수레가 들어갈 수 있
  도록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후는 수레 1대 다닐 정도의 산길이다. 회룡폭포를 지나서 경
  사가 좀 급해질 뿐,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수레로 회룡사까지 접근 가능)
* 서울 종로5가, 동대문, 혜화역, 돈암동, 미아4거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06, 108번을 타고 회룡
  역 하차, 회룡역 밑을 지나 도보 40분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전좌로 155번길 262 ☎ 031-873-3391)
* 회룡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회룡골재 정상이다. 여기서 서쪽은 송추, 북쪽은 사패산
  정상과 안골로 이어지며, 남쪽 능선을 타고 망월사나 포대능선, 자운봉으로 넘어가도 된다.


▲  삼성각에서 굽어본 회룡사 경내


♠  회룡사 둘러보기 (1) 석조, 설화당 주변

▲  회룡사 취선당(聚禪堂)

회룡사 정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작고 조촐한 회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회룡사의 역사를 머금은
안내문과 푸른 옷을 걸친 부채꼴 모양의 나무가 제일 먼저 마중을 하며, 그 주변은 주차장이다.
주차장 뒤쪽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취선당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선원(禪院)
으로 쓰이고 있다.

▲  회룡사 설화당(說話堂)

▲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네모난 연못

취선당을 지나면 설화당이라 불리는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설화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
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승려와 신도의 생활공간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회룡사 범종각(梵鍾閣)

설화당 맞은 편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아리가 담긴 4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
각이 자리해 있다. 대웅전과 더불어 청기와를 입혀 단연 돋보이는 범종각은 1989년에 지어진 것
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규모이다. 범종각의 알맹이인 4물은 2층에 담겨져 있으며, 1층
에는 회룡사의 오랜 보물 중 하나인 석조가 옥계수를 뿜으며 누워 있다.


▲  회룡사 석조(石槽)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7호

범종각 1층 그늘진 곳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3개가 있는데, 제일 위쪽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존
재가 바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이다.
이 석조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오래된 유물로 높이가 90cm, 가로 폭이 1.53m,
세로는 2.44m의 화강암 수통이다. 석조 한쪽에는 홈통을 두어 물이 가득 차면 아래로 흘러가게
끔 하여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걸 경계했다.

산사에 왔으면 물은 한 모금 마셔줘야 되겠지? 그래서 석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파란 바
가지로 물을 떠서 마시니 이른 더위에 갈증을 호소하던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

범종각 옆에는 짜투리 공간을 닦아서 만든 관음보살의 보금자리가 있다. 1987년 등산객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8각의 기단(基壇) 위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된 2단의 연화대좌(蓮花臺
座)를 자리로 삼아 정병(政柄)을 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어여쁜 표정과 수려한 외모로
경내를 굽어보는 관음보살 누님 주변에는 석등 2기와 동자상 등의 여러 석물을 두어 그를 수식
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돌난간을 둘렀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범종각


♠  회룡사 둘러보기 (2) 대웅전, 극락보전 주변

▲  회룡사 대웅전(大雄殿)

범종각에서 한단계 오르면 5층석탑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웅전이, 북쪽에는 극락보전이 자리해
있다. 바로 회룡사의 중심 부분으로 석탑 주변에는 깔끔하게 돌을 깔아 터를 닦았다. 탑 주변에
는 돌난간을 둘러 탑을 보호하며, 대웅전과 극락보전이 탑이 있는 뜨락을 굽어본다. 가람배치는
탑 하나의 법당이 하나인 1금당(金堂) 1탑 형식이다.

회룡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71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모습의 팔작지
붕 건물이다.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봉안하고 있으며,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를 간직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금빛 찬란한 닫집
온후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이한다.


▲  회룡사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8호

대웅전 서쪽 벽에 걸린 신중도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1883년에 조성된 것이다. 조금
의 여백도 없이 가득 그려져 있어 다소 번잡해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그림 윗부분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배치하고 아래쪽에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권
속(眷屬)들을 배치한 2단 구성을 하고 있으며, 범천과 제석, 천룡을 역삼각형 구도로 배치하여
이들이 그름의 중심임을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은 화승(畵僧) 배출지로 유명한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그림을
그린 이는 응석(應碩)이며, 시주자는 상궁 신씨와 그의 부모이다.


▲  5층석탑 인근에 자리한 괘불석주(掛佛石柱)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을 거는 받침대이다. 지금처럼 한가한 때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조그만 동자상과 돌하르방, 불상의 보금자리가 된다.

▲  회룡사 5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6호

대웅전, 극락보전 뜨락 한가운데에 자리한 5층석탑은 15세기에 조성된 조선 초기 석탑으로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높이 약 4m의 조그만 탑으로 기단부(基壇部)는 높직한 1매석의 바
닥돌 위에 괴임대를 돌출시키고 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괴임대에 5구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
다. 기단은 1층으로 괴임대와 기단면석이 같은 돌로 되어 있는데, 괴임대에는 4구의 안상이 있
으며, 위쪽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1층에서 3층까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별개의 석재로 했고, 4층 이
상은 탑신과 옥개석을 같은 돌로 만들었다. 2층과 3층 탑신은 유독 피부가 하얀데 이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낀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하며, 5층 옥개석은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가 진하
게 남아 안타까움을 전한다.

탑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탑이고 무학대사가 창건한 마당에 이는 말이 되질 않는다. 현재 의상대사의 부도탑은 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  대웅전 방향으로 바라본 5층석탑

▲  5층석탑 좌우에 자리한 노주(露柱)들 - 연화대 위에 신장상이 놓여 있다.

5층석탑 좌우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는 돌(혹은 연화대의 일부)과 조그만 연화대(蓮花臺),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두터운 돌이 하나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은 원래 이곳에 있
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회룡사의 유물인지 아니면 주변(마땅한 절터는 없음)에서 가져온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석탑이나 어느 석물의 일부를 이루던 일부분으로 이곳으로 수습해 왔다.
신장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신장상은 칼을 들고 서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알 수 없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과 극락보전 뒤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1955
년 대웅전으로 건립되었다가 나중에 지금의 대웅전을 만들면서 삼성각으로 변경되었으며, 1996
년에 새로 짓고 2002년에 증축했다. 삼성(三聖) 즉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들이 그려진 칠성탱과 산신탱은 1954년, 독성탱은
1956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 내부 - 제일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  회룡사 극락보전(極樂寶殿)

3줄로 된 계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궁궐의 정전(正殿)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극락보전은 서방
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한 건물이다. 1996년에 조성된 것으로 아미
타불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을 봉안했으며, 1,000상의 조그만 금동불을 좌우
로 빼곡히 배치하여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후불탱화
후불탱화는 극락전 벽화로 그 유명한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아미타3존벽화를 모사했다고 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좌우를 화려하게 받쳐주는 천불(千佛)

극락보전 불단 좌우에는 1,000기의 금동불을 빼곡하게 배치했다. 과연 천불이 맞는지는 모르겠
지만 오백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여 아마도 천불이 맞을 것이다. 조그만 금동불이 마치 단
체 사진을 찍듯 정신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 두 눈을 그야말로 놀라게 만든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20년 만에 문을 두드린 회룡사는 나처럼 많이도 변해 있었다. 1시간 정도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회룡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속세로 나가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는지 계곡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아쉬운 마
음을 살짝 띄워 날려 보낸다.

회룡폭포로 내려와 속세에서 사들고 온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먹으며, 잠시 허기진 뱃속을 진정
시킨다. 하늘과 조금은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맛이 매우 좋다. 작지만 수량이 풍부한 폭
포의 시원한 물줄기 앞에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는 나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이렇게 배를 채우
고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으로 길을 잡았다. 회룡사 바로 뒤에 석굴암이 있지만 일반인은 못가
게 한다. 그래서 천상 석굴암입구로 나와서 힘겨운 산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석굴암 가는 길은 토함산(吐含山)의 석굴암처럼 무지 가파르다. 회룡사는 회룡골이라도 옆에 품
고 있어 시원하기라도 하지 여기는 그냥 경사가 급한 산길과 산림이 전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회룡사로 갈 뿐, 석굴암은 인적이 거의 없다. 회룡폭포이 위엄에 줄행랑을 친 더위가 다시 찾아
와 우리는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급한 길을 오르니 어느덧 회룡사 뒤쪽이다. 회룡사에서 바로
가면 1분이면 될 것을 20분이나 걸릴 정도로 돌아가야 하니 참 딱할 따름이다. 허나 인내력을
가지며 계속 발을 재촉하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석굴암이 돌문을 시작으로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석굴암 가는 길

▲  석굴암 돌문(불이문)


♠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조그만 산중암자,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도봉산 석굴암(石窟庵)

▲  돌문(불이문)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천하, 석굴암

석굴암하면 속인들은 보통 경주에 있는 석굴암을 떠올린다.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佛國寺)는 3
살짜리 애도 다 알고 있는 이 땅의 대중적인 명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의 이름으로는 그만
한 좋은 이름이 없다. 석굴암은 말그대로 바위에 굴을 판 암자나 석굴사원을 뜻하며, 불국사는
불국토(佛國土)를 상징한다. 이렇게 좋은 이름을 경주의 그곳만 누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겠지?
불국사 같은 경우 서울 대모산(大母山, 대모산 불국사글 ☞ 보러가기)을 비롯해 여러 곳이 있으
며, 석굴암은 도봉산 일대에만 2곳이 있다. 하나는 우이령 고개에 자리한 양주시 교현리의 석굴
암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회룡사 뒤에 자리한 이곳 석굴암이다.

사패산 범골능선 밑인 회룡사 북서쪽 높다란 곳에 둥지를 튼 석굴암은 회룡사의 부속 암자로 법
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석굴과 산신각,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작고 아늑한 산중암자이다.
1384년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도봉산에 들어왔는데, 이성계는 지금의 석굴암 자리에서 기도를 올
렸다고 한다. 그가 나라를 갈아치운 이후, 무학대사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처음부터 석굴
암은 아닌 듯 싶으며, 그 이후 구체적인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절을 이루는 건물도 모두 1960
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고, 석굴도 비슷한 시기에 새로 단장을 하여 딱히 고색의 기운은 없다.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절의 하나로 절 이름만 경주 석굴암 덕분에 낯이 좀 익을 뿐, 마땅한 매
력거리가 없을 듯 싶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흔적이
서린 암자이기 때문이다.

김구는 중원대륙 상해(上海)로 망명하기 전, 왜경(倭警)을 피해 이곳에 잠시 은신했는데, 해방
이후 그 당시를 회상하며 종종 들렸다고 한다. 1948년 남상도를 비롯한 언론인 7명에게 '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 김구(石窟庵 佛戊子 仲秋 遊此 金九)'란 친필을 써주었는데, 이에 감명 받
은 그들은 1949년 3월 그의 친필을 이곳에 가져와 석굴 바위에 3개월 동안 새겼다. 그 바위글씨
'김구선생필적 암각문(巖刻文)'이란 이름으로 의정부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김구가 새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현실은 다른 사람이 그의 친필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49년 6월 백범이 안두희에게 불의의 암살을 당하자 의정부 사람들은 크게 애통해하며 그와 인
연이 깊던 석굴암에 사당을 지어 매년 봄, 가을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해발 210m 고지에 자리한 석굴암에 이르면 2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두툼한 성곽 같은 모습으
로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들은 자연스레 석굴암과 속세의 경계선 역할을 하며, 번뇌와 악의
기운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는데, 가운데 머리 부분이 서로 맞물려 있고. 그 밑에 삼
각형 모양으로 돌문이 뚫려 있어 경내로 인도하는 정문의 역할을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신묘하
고 특이하여 두고두고 잊혀지질 않는다. 석굴암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돌문에
는 딱히 인위적인 부분이 보이질 않아 자연이 빚은 문인 듯 싶으며, 사실상 속세에서 유일하게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 양쪽에 시멘트로 기둥을 만들고 한글로 된 절의 현판을 가로로
달았다.
그리고 돌문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문짝까지 달았는데, 석굴암이 속세에 미련이 없다고 문짝
을 닫아버리면 꼼짝없이 그 바위를 넘어야 된다. 석굴암에서는 이문을 불이문(不二門)이라 부르
며, 문 앞에는 수레들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돌문(불이문) 위쪽에 새겨진 바위글씨들

▲  돌문(불이문)에서 바라본 석굴암 경내 (정면에 극락전이 보임)

돌문(불이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석굴암 경내가 펼쳐진다. 연등이 대롱대롱 허공을 메운 요사(
寮舍) 앞뜰을 기준으로 정면에 극락전과 산신각, 오른쪽에 석굴이 자리해 있는데, 그것이 석굴
암의 전부이다.

▲  돌문(불이문)의 뒷모습
두툼한 문짝까지 달려 있다.

▲  석굴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


▲  석굴암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극락전 앞에 놓인 오래된 부도(浮屠)

극락전 앞에는 높이 1m 정도의 정말 조그만 부도가 놓여져 있다. 이 부도는 석굴암에서 가장 오
래된 유물로 바닥돌과 기단부, 탑신, 지붕 부분이 죄다 8각형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짐작될 뿐,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어쨌든 석굴암의 오랜 역사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로 지붕과 꼭대기 부분에는 장대한 세
월이 입혀준 때가 가득하여 작지만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단촐한 건물로 산신의 보금자리이다.

▲  산신할배와 동자, 호랑이 등이 그려진 산신각 산신탱
꼬랑지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산신 곁에 앉은 호랑이는 용맹함은 온데간데 없고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도봉산 줄기

▲  석굴(石窟)과 김구선생필적 암각문(의정부 향토유적 8호)

석굴암 석굴은 이곳의 백미이자 든든한 밥줄이다.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석굴로 겉
으로 보면 3개의 돌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의 같은 바위이다. 아랫쪽 두 바위의
틈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고, 석굴로 들어가는 문을 내었으며, 바위의 머리 부분이 자연히 석굴
의 지붕 역할을 하는데, 머리가 아래보다 지나치게 비대해 다소 어색해 보인다.
왼쪽 바위 피부에는 한자로 김구(金九)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있는데, 1949년 백범의 친
필을 받은 남상도 등이 3개월 동안 새긴 것이다. 문 위쪽 바위에는 석굴암이란 바위글씨가 새겨
져 있으니 이는 나중에 새겨진 것이다.

바위 사이로 난 석굴은 자연 동굴을 개조한 것으로 근래에 손질을 가해 불단과 불상을 두었으며,
내부는 밖과 달리 시원하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유래된 것이다.


▲  조촐한 모습의 석굴 불단(佛壇)
불단에는 석가불이 홀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촛불들이 자신을 밝히며 석굴에서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조명시설이 없음에도
석굴 내부는 그런데로 밝다.

▲  그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나오다.

석굴 석가불에 예를 올리면서 슬쩍 소망을 들이밀고 회룡사와 더불어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석
굴암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석굴암은 의정부시내와 무척이나 가깝지만 번뇌가 따라오다 졸도
할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박힌 산중암자로 복잡한 마음과 머리를 가다듬기에는 그런데로 괜찮은
곳이다. 게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절이니 친일파에
단단히 더럽혀진 이 땅의 참담한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 석굴암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2번 출구에서 도봉산을 향해 도보 40분. 절까지 수레 접근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89 (☎ 031-873-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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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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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나들이 '

▲  인왕산 선바위의 위엄


 

겨울의 제국이 슬슬 고개를 들던 11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간만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오후 2시에 독립문역에서 그들을 만나 회색빛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무악동(毋岳洞) 동네
를 가로질러 선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 밑에 자리한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  한 지붕 다가족의 특이한 절집,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주
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기둥을
휘감게 했다. 그리고 지붕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 이름을 담은 현판을 내걸어 이곳
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
위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빼곡히 건물을 심은 인왕사 경내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각 건물마다 별도의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
히 갸우뚱하게 한다. 분명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
로 인왕사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결점이다.

인왕사는 8개 종단에 15개(절집 수는 변경될 수 있음)의 절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이룬 절이
다. 그러니까 인왕사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각 절마다 달라 제각각 따로 놀았다.
이는 마치 13개의 연맹국(聯盟國)으로 이루어진 옛 가야(伽倻)와 비슷하다. 가야 역시 가야란
테두리 안에 무려 13개의 나라가 따로 놀지 않았던가.
이렇게 각 절들이 따로국밥처럼 되버리니 서로 갈등이 심해졌다. 하여 4년에 1번씩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절 전체의 살림과 행정을 맡기면서 조금씩 통합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하게 이루어진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와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는 이
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된다.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사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역사가 이제 103년 밖에 안된다. 그러다보니 아직 내력(來歷)을
알리는 안내문도 갖추지 못했으며, 죄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인왕사와는 관련이 없던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었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
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자료에는 대부분 쾌쾌묵은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에 개경(開京)을 버리고 서울
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머물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으며,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하
였고, 산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가늠케 한
다. 게다가 태조가 창건한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도 가끔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인왕산에 안겨있던 인왕사와 복세암(福世庵), 금강굴(金剛窟)이 경복
궁(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와 함께 부셨
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군주로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
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절을 다시 일으켰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선바위 밑에 절을 세우고, 선바위를 뜻하는 선암정사(禪巖精舍)
라 하였다. 기도처로 유명한 선바위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세운 듯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취하지 않았으며,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
(大願庵)을 지으면서 인왕사의 한 지붕 다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에는 극락전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왜정의 태클로 인왕사 위쪽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에는 극
락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러다가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
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 및 아들을 비는 기자신앙(祈子信仰) 등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
地)였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도심 속의 무속 현장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 인왕산 서남쪽 자락은 대자연이 빚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고 선바
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약수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
다. 게다가 매일 굿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민가(民家)와도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거리낌없이 한데
어우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로 오르다보면 인왕사 경내 가장 윗쪽에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티가 풍기질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
기부터 존재한 서울을 지키던 신당(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
러 무속신(巫俗神)을 모시고 있으며, 무학대사를 모신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南山) 꼭대기 현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1396년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했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별탈없이 지내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시절에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다. 때는 1925년 왜정이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
宮)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
라고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라 전하는 지금의 자리
로 급하게 이전되었다.
이전할 때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
하 기초는 없다. 그리고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
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드리러 온 이들
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해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드
러나 있으며, 당시 서울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거의 매일 굿이 열려 굿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
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으며, 특히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나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
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고, 김형재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
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이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
과 10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을 소유한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
를 올리는데,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거의 잊혀진 서울 무속
인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성지로 서울 무속신앙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장이다. 또한 국사
당과 선바위 주변은 굿판과 기도장소로 명성이 높아 무속인들과 기도를 하려는 속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 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
되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
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
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
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
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태조 이성계가 그려진 아태조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고 전하며,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보기도 한다. 허나 태조의 그림이 있으니 그 왕후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에 더 큰 무게가 쏠리고 있으며, 그림 이름도 강씨부인이니 신덕왕후와 성씨도 같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면 태조는 조금 멍해보이고, 강씨는 뭔가 불만이 많은지 인상을
잔뜩 쓴 것 같다.

우리가 국사당에 이를 때는 건물 내부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굿과 관련된 사람들
이 협칸에 머물러 있어서 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가슴처럼 잠깐씩 열려진 문을 통해 안을
살짝 보는 선에서 그쳤다. 기분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무신도를 마음껏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그러다가 크게 안좋은 소리나 들을 듯 싶어서 그만두었다. 무신도와 관련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으니 알아서 참조하기 바란다.


▲  선바위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국사당과 인왕사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자리한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바위,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오랜 성지,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인왕산 중턱 해발 14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자 산악/기자신앙의 성지
로 2개의 커다란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禪岩)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그리고 바위 뒤나 옆에서 보면 판초의나 우비,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를 많이 봤다면 그런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 떠오를 수도 있
겠다. (난 선바위를 정면에서 볼 때 마다 만화나 오락에서 나왔던 새 대가리 괴물이 떠오름)

대자연이 인왕산에 기가 막히게 빚어놓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 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준수한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 임을 실감케
한다. 이 산에 기암괴석이 많은 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이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
왕사가 밑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불상으로 대우를 받아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
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 부르며, 인왕사의 든든
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하다.

이 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산악신앙 및 아들을 기원
하는 기자(祈子)신앙 및 민간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바위
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바위 밑에 둥지를 틀면서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었고, 국사당까지 이곳으로
와 무속 신앙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에 '민간신앙+
불교+무속'이 되버린 셈이고, 선바위부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 상, 무학대사 상, 석불
님, 관세음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속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바위는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
를 피우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
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시멘트로 바른 제단이 있으며, 제단 좌우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촛
불을 가득 지닌 기와집 모양의 함이 있다.


▲  선바위의 깜찍한 뒷태
판초의나 모자 달린 우비를 쓰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보는 것 같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鄭道傳)
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학대
사는 전국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는 크게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살펴보
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 못갈 팔자였다. 그래서 선바위에서 1,000일 기도
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
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國都)가 되는 데에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바위는
그 밖에 있었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으로 짐작하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
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
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눈이 쌓인 자리에 도성을 만들었
다 하여 설성(雪城), 설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울이 되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
징되는 불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
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교 위에 들
어앉게 되는 것이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
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고, 나라의 중심
이념이 된 것이며, 불교는 점차 힘을 잃고 밀려
났다. 그래고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
는 혹독한 억불숭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도성 밖으로 밀려나 졸지에 조선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셈이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
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
는 사람들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
는 공간으로 조그만 건물을 지었으며, 바위 주
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러 성역으로 삼았다.

▲  측면에서 본 선바위 -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옛 국사당 자리에 솟아난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중앙에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선바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다진 인왕사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송림 속에 우뚝 솟은 해골바위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은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
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고마운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바가지를 대진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터 많이 쓰였으나 행정기관에서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
변에 조촐하게 파라솔 등으로 머물 자리를 만들어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바로 밑,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 인왕산 선바위(국사당, 인왕사) 찾아가기 (2015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를 나가면 선바위, 국사당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 무악동주민센터를 지나 인왕산현대아이파크아파트 옆
  길을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독립문역에서 일주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
  에서 선바위까지는 도보 4~5분 거리
* 독립문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새마을금고가 나온다. 여기서 오
  른쪽으로 보이는 골든팰리스 앞을 지나면 통일로14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직진하면 무악동주
  민센터이다. 이후는 앞 내용 참조
* 독립문역을 경유하는 시내버스(471, 701, 702, 703, 704, 705, 706, 720, 752, 7019, 7021,
  7025, 9701, 9703, 9709, 6005(공항버스), 서대문마을11번)번을 타고 독립문역 정류장에서
  하차, 독립문역 1,2번 출구를 찾는다.
* 승용차로 인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일주문 윗쪽에 주차장 있음
* 매년 5~6월에 국사당에서 인왕산 산신대제가 열린다.

* 인왕사(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 (통일로18가길 20 ☎ 02-737-4434)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3-4 (통일로18가길 26)


♠  인왕산 마무리

▲  선바위에서 인왕산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약수터

선바위약수터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약수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수질 적합 판
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뭄 탓인지 물이 실처럼 가늘게 나와 바가지 하나를 채우는데 많은 인내
력을 요한다. 물을 받는 바가지도, 그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그저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지친 두 다리의 불만을 잠시 달래주었다. 배가 고
파서 그런지 과자에 자꾸 손이 가서 금세 가루만 날리는 빈 봉지가 되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
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모자바위(왼쪽)와 인왕산 성곽능선

▲  소나무 너머로 흐릿하게 다가오는 서울 도심

▲  해골바위 (선바위 동쪽 산자락)

선바위 동쪽 산자락에 해골바위라 불리는 괴상한 모습의 바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 윗
부분에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어 마치 손상된 해골바가지를 보는 듯 하며, 화생방훈련 때 쓰는
방독면 마스크와도 비슷해 보인다. 구멍에는 치성의 흔적과 술판의 흔적, 속인(俗人)들이 남긴
하얀 글씨들이 흉물스럽게 화석처럼 박혀 바위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내고 있다.


▲  동쪽에서 본 해골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독립문역 주변과 안산(鞍山)
바로 저 장소에서 1623년 이괄의 반란군과 장만의 관군이 충돌했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뿌연 천하

▲  모자바위 (오른쪽은 한양도성)

검은 때가 적당히 낀 매끄러운 벼랑 위에 어설프게 쓴 모자처럼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모자바위,
줌을 최대한 땡겨 확대해서 보면 마치 고개를 든 개나 동물로도 보이니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
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례가 될 정도로 대자연의 숭고한 작품에 그저 탄사만 나올 뿐이다.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북←종로구→남)
콧대 높은 서울 도심이 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나는 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여유롭게 굽어본다. 하늘 아래의 저 세상이
이대로 나의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무악동과 종로구, 중구)

▲  범바위와 그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매바위와 인왕산 정상
산 곳곳에 터를 닦은 각종 바위와 기암괴석들은 대자연이 인왕산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인왕산의 모습은 낙산이나 남산처럼 그저 그랬을 것이고
우백호의 완장마저 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내려가면서 담은 독립문역 주변 (가까이에 보이는 기와집이 인왕사)

해골바위에서 성곽이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양도성 안으로 인도하는 철계단길이 나온다.
정상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어차피 나와 인왕
산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인연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하여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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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봉국사

* 정릉 봉국사 - 북한산 남쪽 정릉동에 자리한 봉국사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하여 약사사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현종 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고

다시 제를 지냄으로써 인근 경국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 벼랑에 자리한 독성각

* 천불전과 성북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 - 조선 후기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범종루와 천왕문 (2층은 범종루, 1층은 천왕문)

 

 

* 일주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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