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대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4.12 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2. 2013.05.1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 광양 동백꽃 나들이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

▲  동백숲에 둘러싸인 광양 옥룡사터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를 파릇파릇 수놓던 4월 첫 무렵에 전남 광양(光陽)
땅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광양행 직행버스를 탔는데, 광양과 동광양(東光陽)으로 출
근이나 출장, 통학하는 사람들로 만석을 이룬다. 그렇게 자리를 몽땅 채우고 남해고속도로를 질
주해 섬진강휴게소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동광양을 거쳐 부산 출발 약 2시간 20분 만에 광양터
미널에 이른다.

광양 땅은 나와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곳으로 2001년 이후 10여 년 만에 와본다. 오랫동안 눈길
조차 주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지만, 서울과도 거리가 멀고 인연 또한 잘닿지 않으니 나
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이번에 옥룡사터와 동백림을 목표로 왔으니 광양 땅도 서운
함을 어느 정도 잊어 줄 것이라 믿는다.

터미널 바깥 시내버스 정류장(옛 광양역 앞)에서 옥룡 방면 시내버스를 타면 되는데, 마침 옥룡
면 논실로 가는 버스가 1분 뒤에 온다고 정류장 전광판에 뜬다. 읍내에서 추동 방면은 거의 50~
60분 간격으로 다녀 시간표를 따로 확인하지 않고 왔는데, 이처럼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니 이보
다 기쁜 것이 없다.
이윽고 논실로 가는 광양시내버스 21-3번이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광양5일장의 영향으로 버스
는 오전부터 노공(老公)들을 가득 태워 만차의 기쁨을 누리며 읍내를 벗어나 옥룡면으로 달린다.

백운산 남쪽에 펼쳐진 옥룡면(玉龍面)의 산하를 가로질러 어느덧 추동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
로 가면 옥룡사터 입구와 백운산자연휴양림이며,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동곡계곡과 백운산(白
雲山)으로 이어진다. 나야 목적지가 옥룡사터이니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 천연기념물 489호

▲  운암사 입구에서 바라본 백계산
(중앙에 보이는 금빛 물체가 운암사 약사여래불)

추동마을에서 북쪽으로 6분 정도 걸으면 운암사 입구이다. 여기서 동북쪽을 보면 금빛을 비추는
커다란 불상이 두 눈을 놀라게 하는데, 바로 그곳에 운암사가 있다. 그곳을 거쳐 동백림과 옥룡
사로 가도 되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운암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운암사 입구에서 5분 정도 올라가니 옥룡사터 입구이다. 여기서 이정표의 지시로 오른쪽으로 들
어서면 주차장과 해우소(解憂所)가 나오고, 그 뒤로 옥룡사터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은 수레가 마음 놓고 절터까지 들어갈 수 있게끔 잘 닦여져 있지만 중간에 볼라드를 설치하여
4발 수레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절터까지 거리도 얼마되지 않고, 문화유산 보호 및 동
백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100번 지당하다.

근래에 둘레길 유행에 따라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 입구인 금목재까지 이어지
는 산길에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이란 이름을 붙었다. 옥룡사에 딱 어울리도록 말이다.


▲  봄에 완전 물들어진 옥룡면의 산하 (옥룡사터 입구 주변)
고요하고 목가적(牧歌的)인 시골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는
싹 정화되고 마음도 조금씩 평안을 누린다. 봄이 한참 붓질을 하고
지나간 천하는 싱그러운 녹색의 세상이다.

▲  옥룡사터 입구 주차장에서 만난 벚꽃

▲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봄에게 보답하는 배꽃의 위엄
광양 땅이 오랜만에 찾은 나에게 보답 차원에서 봄꽃 구경을 시켜주는 모양이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바로 직전 (수레의 통행을 막는 볼라드의 위엄)

주차장에서 별로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7분 정도 가면 속인(俗人)들의 농가가 끝나면서 푸르
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혹여 건방진 수레의 발길
을 막고자 길 가운데를 버티고 선 철기둥(볼라드)을 지나면 본격적인 동백나무 숲에 들어서게
된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1)
동백나무와 속인들의 경작지가 숲길을 사이에 두고 팽팽히 경계를 이룬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2)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3)
이제 완전하게 동백나무 숲에 들어섰다. 친겨울 성향이 강한 동백은 겨울부터
4~5월까지 순홍(純紅)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4)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5) - 옥룡사터를 코 앞에 둔 지점

옥룡사터를 넓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꽁꽁 둘러싼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백계산(白鷄山) 남쪽 자
락에 자리한다. 옥룡사터 주변과 운암사 북쪽까지 펼쳐진 이 숲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동백나
무 군락지로 옥룡사를 세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하고자 비보풍수(
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동백을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허나 도선대사 시절만큼 오래된 동백나무가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아 그가 과연 조성했는지는 의
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메운 동백은 100년에서 수백 년 이상 묵은 것들로 초창기 동백들이 계속
후손을 뿌린 것으로 보이며, 계속해서 씨를 주변에 내려 보내 7,000여 그루의 나무가 15만㎡의
장대한 숲을 이루었다. 나무의 높이는 5~6m, 줄기는 20~40cm에 이른다.
남부지방 사찰 동백나무숲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숲'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89호
의 지위를 얻었으며, 산림청에서 정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함께
나누고픈 1,000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아름다운 공존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동백숲의 성지(聖地)로 동백이 전성을 누리는 3~4월에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어 속
인들의 눈과 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돌려줄 생각을 않는다. 제아무리 어여쁜 미녀라 한들 순홍의
동백 앞에서는 두 다리 달린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  옥룡사터 샘터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옥룡사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절터 밑에는 약수터가 있어 이곳을 찾은
속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백계산이 베푼 약수로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언제나 물이 넘쳐
흐르는데, 가뭄 때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샘터는 옛 옥룡사의 샘터로 근래에 정비되었으며, 옛날 광양고을의 사또가 즐겨 마셨다고 전
한다. 그만큼 물맛이 좋다는 뜻인데, 동백의 향기나 기름이 첨가되서 그런 것일까? 허나 마셔보
니 딱히 다른 맛은 없어 보이며, 옛날에는 약수에서 숯가루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연꽃들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현장 - 옥룡사터 연못
동백의 향연이 끝나면 연꽃이 그 자리를 대신해 9월까지 화려한 연(蓮)의 향연을 펼친다.
그 이후에는 늦가을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것이 끝나면 바로 동백의 시대가 열린다.
옥룡사터는 1년 내내 대자연이 베푸는 향연(饗宴)의 장인 것이다.


♠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머물던 유서 깊은 고찰, 지금은 동백나무 속에
터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아련히 들려주는 백계산 옥룡사(玉龍寺)
- 사적 407호

광양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백운산(1228m), 그의 남쪽을 이루고 있는 백계산(505m) 서남쪽 자
락에 동백숲에 감싸인 옥룡사터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옥룡사는 864년에 도선국사(827~898)
가 창건한 것으로 그가 세운 것이 100% 확실한 천하에 몇 안되는 절로 의미가 대단한 곳이다.

그는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혜철대사(惠徹大師)에게 선종(禪宗)
을 배웠고, 운봉산(雲峯山)과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불도를 닦다가 백계산에 들어오게 되었
다. 이곳에 오니 풍경이 그야말로 그윽한지라 '지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국이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극찬하며 여기서 평생 머물기로 작정하고 864년에 옥룡사를 짓고 정
착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룡자(玉龍子)라 칭하며 절 이름도 옥룡사라 했는데, 여기서 34년을
머물다가 898년 71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열반에 들자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요공선사(了空禪師)란 시호를 내렸고, 고려 태조(太祖
) 왕건의 스승이었던 인연 탓에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대선사(大禪師)에 왕사(王師)의
호를 추가했다. 그리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했으며,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그의 비석까지 세웠다.

도선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절터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 9마리(또는 2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절을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용 8마리는 <2
마리 전설에서는 황룡(黃龍)이 응해줌> 별말없이 응하려고 했으나 백룡(白龍)이 크게 반발하며
대들자 열받은 도선이 활을 쏘아 그의 왼쪽 눈을 맞추니 (또는 지팡이로 두들겨 팼다고 함) 백
룡은 인근 구룡소(九龍沼)로 도망쳤다. (다른 전설로는 용 9마리가 이곳에 머물며 인근 백성들
을 괴롭히자 도선이 그들을 몰아냈다고 함)
이들 전설을 통해 옥룡사 자리에는 토착신앙이나 다른 종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걸
도선이 들어와 그들과 일종의 싸움을 벌여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그들을 설득하여 불교의 일원
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백룡으로 상징되는 존재가 비협조로 일관하자 일종의 폭력으로 그를 강제
로 추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걸 적당히 전설로 다듬어서 창건설화로 삼은 것이다.

용을 몰아낸 도선은 연못을 메우고자 속세에 안질(眼疾)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연못에 숯 한
덩이를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사람들이 몰려와 숯을 넣고 눈을
씻으면서 금세 연못이 메워졌다고 하며, 바로 그 자리에 옥룡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당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신라 후기 상황을 이용해 창건 시주를 하면 복을 받는다
는 식으로 말을 퍼뜨려 얻은 재원으로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숯을 넣어 눈을 씻는다
는 것은 시주금이나 집을 지을 때 땅 속에 묻는 숯을 제공하면 도선이 법문을 주거나, 예불 관
련 의식을 제공하거나, 절을 하고 소망을 빌었다는 뜻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참고로 예전 옥룡
사 샘터에서 숯가루가 종종 섞여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옥룡사를 세운 도선은 차밭을 일구어 차(茶)를 참선 수행에 사용토록 했고, 절터의 기운
이 약한 것을 채워주고자 동백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이곳에 머물며 명
성을 떨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제자 되기를 청했으며, 이때 '옥룡사파(玉龍寺派)'란 지파(
支派)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그들을 수용하고자 동백림 동쪽에 별
도로 운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898년 도선이 입적하자 부도와 탑비를 만들어 모셨는데, 그의 제자인 경보대사(慶甫大師, 동진
대사)가 도선의 법맥(法脈)을 이어 옥룡사를 지켰고 그 또한 이곳에 뼈를 묻었다.
도선은 죽음에 임할 때 '백(白)씨 성을 가진 애꾸눈 중을 들여서는 안된다' 유언을 남겼다고 한
다. 19세기까지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던 옥룡사는 1878년에 화재를 만나 완전히 망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 당시 백암(白庵)이란 애꾸눈 승려가 들어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절이 망할 때 용케도 살아남았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와 비석도 1920년을 전후하여 장대
한 세월의 태클과 무지한 이들의 테러로 모두 파괴되어 넘어졌으며, 비석의 내용마저 크게 훼손
되어 내용을 알기가 어려워졌다. (조선금석총람에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있음)

이후 순천대 박물관에서 절터 일대를 조사하면서 도선과 경보대사의 부도 자리와 비석 자리, 건
물터, 석탑의 부재(部材), 깨진 비석 조각 90여 점을 발견했으며, 도선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과
그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石棺)이 발견되어 신라 후기 고승(高僧)의 장례 풍습을
알게 해주었다.
발굴을 마치고 절터에 풀을 입혀 산듯하게 정비했으며, 약수터 동쪽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안내소를 만들어 필요할 때는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탑의 부재
등이 남아있고, 운암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근래에 복원된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또한 그 남쪽에는 운암사가 있어 옥룡사터를 지키고 있다.

절은 없고, 전설과 역사, 황량한 절터만 남아 속인들의 상상을 무한대로 살찌우는 옥룡사터, 동
백의 그윽한 향기가 절터의 허전함을 보듬어주며, 내가 가본 수많은 절터 가운데서도 꽃밭에 둘
러싸인 천하 제일의 동백꽃 명소이자 행복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 옥룡사터, 옥룡사 동백나무숲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① 광양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1일 7~8회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사상)에서 광양행 직행버스가 4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부천, 수원, 성남, 안산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 대구(서부), 광주, 진주, 마산, 여수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전역, 창원역, 마산역, 진주역, 광주송정역에서 경전선 열차를 타고 광양역 하차, 운행횟수
  가 별로 없으며(편도 1일 4회 이내) 역에서 광양터미널까지 버스나 택시로 나와야 된다.
* 순천시내(삼산동, 순천대, 순천터미널, 순천역)에서 77, 777번 시내버스를 타고 광양터미널
  종점 하차
② 현지 교통
* 광양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2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룡사 입구 하차 (1일 5회 운행) 옥
  룡사터까지 도보 15분 / 21-2, 21-3번 버스를 타고 추동 하차 (1일 13회 운행), 추동에서 옥
  룡사터까지 도보 25분
③ 승용차 (옥룡사터와 운암사에 주차장 있음)
* 남해고속도로 → 광양나들목을 나와서 광양읍내로 우회전 → 우시장4거리에서 우회전 → 옥룡
  입구에서 우회전 → 옥룡면사무소 → 추동에서 직진 → 옥룡사터 또는 운암사

*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은 옥룡사터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과 금목재를
  지나 백운산자연휴양림에 이르는 약 7km의 산길이다. (백계산 정상은 둘레길 범위 아님)
* 옥룡사터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304-1 (백계1길 71 ☎ 061-762-3578)

▲  복원된 도선국사, 경보대사 탑/탑비

▲  언덕 너머로 보이는 운암사 약사여래불


♠  전설의 옥룡사터 둘러보기

▲  잡초에 묻힌 옥룡사터 앞부분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옥룡사터는 제법 넓은 규모이다. 찬란했던 절이 화마(火魔)의 좋은 먹
이가 되어 끔찍하게 유린당했던 1878년의 대혼돈을 간직한 절터에는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는 주춧돌과 석축이 고개를 내밀며 세월을 원망한다. 봄의 기운을 받아
성장한 잡초들은 옥룡사의 그 아픔을 덮고자 절터를 푸르게 수놓으며 그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절터는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형태로 남쪽에는 천왕문이나 중요성이 낮은 건물이 포진해 있
었을 것이고, 중간 부분에 법당(法堂)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삼성각(三聖閣)이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일종의 영각(影閣)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터
만 앙상하게 남았을 뿐, 건물터의 구체적인 정체는 밝혀지지 못했다. 그저 상상 속에서 '이곳은
이 런 건물이 있었고, 이렇게 생겼겠구나?' 스케치 할 수 밖에는 없다. 그 가운데 정답은 있겠
지만 어느 누구도 100% 정답은 알 수 없다. 그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라~~!


▲  절터 뒤쪽 석축 - 절터와 동백숲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  절터 한복판에 있는 이것은 무엇인고?

예전 시골에서 김치나 숙성을 요하는 음식을 담던 공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허나 사람들이 떠나
간 절터에서 그런 공간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옛날
절터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샘터의 흔적이 아닐까 여겨진다. (절터 남쪽에 있는 샘터의 조상으로
여겨짐) 이럴줄 알았으면 문화유산 해설사에게 물어보는 건데, 그만 깜박했네..


▲  붉은 주춧돌이 3열 종대를 이룬 건물터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  붉은 주춧돌의 위엄 - 주춧돌의 피부가 유난히 붉다. 저들은
1878년 이곳에서 일어난 기억 밖으로 꺼내기 조차 껄끄러운
대재앙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  유난히 넓은 건물터 - 법당과 그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는 아닐까?

▲  절터에서 가장 높은 부분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나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주면 안될까?

▲  절터에 버려진 기와 조각들 - 기와조각을 맞추며 잃어버린
옥룡사의 모습 맞추기 퍼즐을 해보고 싶다.

▲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옥룡사터 전경
옥룡사터가 동백숲에 단단히 묻혀 있어 속세에서는 절터의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  절터에서 수습된 석탑 부재와 여러 석재(石材)들

옛 석탑의 일부를 이루던 돌(지붕돌과 탑신 부분)과 건물 주춧돌 등으로 쓰인 석재를 이곳에 수
습했다. 절이 그리 곱지 않게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증인들로 절이 파괴되고 절터에 대한 도굴과
속인들의 석재 절도 행위, 장대한 세월과 자연의 괴롭힘으로 형편없이 뜯겨져 초췌한 모습이 되
고 말았다. 보금자리를 잃은 저들을 도와줄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버림을 받은 그들은 이곳에 모여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왼쪽에 세워진 돌기둥은 석
련(石蓮)이나 그릇 형태의 석물을 받치던 기둥으로 여겨지며, 조금의 힘만 가해도 흔들거린다.
그러니 괜히 때려 눕히지 말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석탑의 부재들
그 모습이 마치 파괴된 지 수백 년이 넘은 탑 같다.

▲  절터에서 수습된 기와조각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절터 동쪽 부분

▲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절터 전경
속세를 바라보며 자리했을 옥룡사의 모습은 자못 웅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머리처럼 빈 자리만 요란하니 그 실감이 적을 뿐이다.

▲  절터 동쪽에 있는 토굴

절터 동쪽의 동백림을 보면 동백림 밑에 조그만 토굴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암석을 깨고 뚫은
토굴은 완전 몸을 반으로 접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입구가 좁다. 내가 들어가다가는 굴이 무너
질 것 같아서 몸도 사릴 겸 바깥에서 내부를 살폈으나, 내부가 어두워 보이는 건 거의 없다. 그
런데 절터에 왠 생뚱 맞게 굴이 있는 것일까? 설마 북한이나 왜열도 애들이 여기까지 굴을 파고
내려온 것은 아니겠지?
언제 생긴 굴인지는 모르겠으나 옥룡사 시절부터 있었다면 식량을 보관하던 창고나 독한 수행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몇몇 고승들은 절 부근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수행하면서 1주 정도에 1
번씩 음식을 들이는 것 외에는 바깥에서 굴을 막게 했다.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인 효봉(曉峰, 1888~1966)이 있다.


♠  동백나무숲 산책

▲  옥룡사 동백숲 서쪽 산책로

옥룡사터에서 동백숲 산책로는 2갈래가 있다. 연못을 거쳐 동백숲 서쪽으로 가는 산책로는 나무
로 신작로를 내어 경사도 완만하다. 허나 5분 정도 가면 철조망 앞에서 길은 끊어지고 만다. 마
치 휴전선 철조망처럼 말이다. 철조망 너머는 어느 개인의 땅으로 그 구역에는 동백나무는 없고
그냥 숲과 초원만 있다. 예전에는 동백숲까지도 개인 소유였으나 이제는 광양시청에서 관리하며,
관람객들은 여기서 길을 180도 돌아 다시 옥룡사터로 나와야 된다. 굳이 철조망을 넘어봐야 볼
것도 없으니 괜히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  순홍의 아름다움으로 천하를 매혹시킨 동백꽃의 위엄

▲  동백숲 동쪽 산책로 고개

옥룡사터에서 오르막으로 된 동쪽 산책로(운암사 방면)를 오르면 바로 고개 중턱이다. 길은 여
기서 2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내리막으로 가면 운암사이며, 왼쪽으로 가면 도선국사 천년숲길로
백계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정상까지는 2.7km, 금목재는 3.7km이다. 나는 절터와 동백숲을 보러
온 터라 등산은 하지 않았다.

고개 갈림길에는 동백나무 밑에 쉼터를 만들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게 배려했다. 쉼터에는 고
개가 꺾여 떨어진 동백꽃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어 한폭의 멋드러진 수채화를 자아낸다.


▲  고개에서 바라본 천하 - 삼삼한 동백숲 너머로 하늘과 천하가 보인다.

▲  복원된 도선국사탑/탑비와 경보대사 탑/탑비

고개에서 동백숲을 가로질러 운암사 방면으로 내려가면 부도 2기와 비석 2기를 만나게 된다. 처
음에는 근래에 지어진 운암사 관련 승려의 탑/탑비로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
다. 바로 옥룡사를 세우고 꾸리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복원된 탑/탑비였다.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탑/탑비는 1920년대에 처참하게 파괴되어 쓰러졌으며, 탑비의 비문(碑文)
도 훼손되었다. 다행히 1919년 왜정(倭政)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비문의 내
용이 있어 도선과 경보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려준다. 이후 순천대에서 절터를 조사할 때 탑과
탑비의 조각을 수습했고, 도선/경보의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견되어 화재가 되
기도 했다.
지금의 탑과 탑비는 옥룡사터를 정비하면서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의 부도/비석 양식에 맞게 복
원된 것이라 원래 모습과는 좀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  선각대사 도선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

▲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 보운탑(寶雲塔)

도선국사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설명은 필요없을 듯 싶다. 그가 898년에 세상을 뜨자 효
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와 함께 징성혜등(澄聖慧燈)이란 탑 이름을 내렸으며, 탑비
는 고려 의종 때 세워졌다.

경보대사(869~948)는 도선과 고향이 같은 전남 영암(靈岩)에서 알찬(閼粲) 김익량(金益良)의 아
들로 태어났다. 19세에 팔공산 부인사(符仁寺)로 출가했으며, 옥룡사에 들어와 도선의 1등 제자
가 되어 선율(禪律)을 익혔다.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고
보령 성주사(聖住寺)와 강릉 굴산사(掘山寺)에서 선종(禪宗)을 배웠다.

892년 당나라로 건너가 이름 있는 절을 돌아다니다가 무주<撫州, 강서성(江西省)> 소산에서 조
동종(曹洞宗)의 광인(匡仁)을 만났다. 광인은 '가자미 바다에서 온 용'이라고 하면서 선법(禪法
)을 전했다. 이후 광인의 소개로 강서 지방의 노선(老善)을 찾아갔는데, 그가 '흰구름에 가리어
길이 막혔네' 운을 띄웠다. 그러자 경보가 '본디 푸른 하늘 길에 흰구름이 어찌 있나?' 답을 하
니 노선이 감동해 곁에 있게 해주었다.

거기서 얼마 동안 있다가 노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나라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921년 귀국하여
임피군(臨陂郡, 전북 군산)에 발을 내리니 후백제(後百濟)의 군주 견훤(甄萱)이 남복선원(南福
禪院)에 머물게 하면서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후 다시 옥룡사에 들어왔다가 936년 견훤이 숨을
거두자 태조 왕건(王建)이 왕사(王師)로 삼았다.

943년 태조가 붕어(崩御)하자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의 왕사가 되었으며, 정종의 명으로 개경
(開京)에 머물다가 옥룡사로 다시 내려와 상원(上院)에 머물렀다. 948년 열반에 임하면서 제자
들에게 '옷차림을 바로 하고, 음식을 평등히 하고, 선열(禪悅)로써 맛을 삼아라'는 임종게(臨終
偈)를 내리며, '탑과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당부하고 눈을 감으니 그때 나이 79세 법랍(法臘)
62세였다.

그가 입적하자 정종은 옥룡선화상(玉龍禪和尙)이라 부르고, 동진대사란 시호와 보운(寶雲)이란
탑 이름을 내렸다. 비석은 958년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비문은 제자인 현가(玄可)가 썼으며,
계묵(繼默)이 새겨서 옥룡사에 세웠다.

나말여초 시절에 크게 활약한 그들의 탑/비가 잘 살아있었다면 정말 국보급에 대접을 받았을 것
이고, 우리나라 미술사/역사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그래도
그 유명한 도선국사가 고이 잠든 승탑(僧塔)을 보니 유명인사를 만난 듯 감개가 무량하다.


▲  운암사에서 도선/경보대사 탑으로 인도하는 동백숲길


♠  동백나무숲 동쪽 끝에 자리한 옥룡사의 이웃 사찰
백계산 운암사(雲岩寺)

▲  1칸 크기의 단촐한 운암사 산신각(山神閣)

도선/경보대사 탑에서 동쪽으로 3분 정도 내려가면 새집 냄새가 물씬 진동하는 운암사가 나온다.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운암사에서 더 이상 가지를 뻗지 못하고 길을 멈추는데, 여기가 바로 동백
숲의 동남쪽 한계선이다. 

운암사는 겉으로 보면 아주 최근에 지어진 역사도 거의 없는 절집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
각을 했으니까. 게다가 절을 알리는 안내문도 없으니 그런 생각을 더욱 키우게 한다. 하지만 겉
보기와는 달리 옥룡사와 관련이 있는 오래된 절로 도선국사가 옥룡사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
하고자 865년(옥룡사는 864년에 창건)에 창건했다고 한다. 옥룡사와 동백숲을 사이에 두고 이웃
한 절로 도선은 두 절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 이후 쭉 옥룡사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을
것이다. (옥룡사의 부속 사찰로 생각됨)

17세기까지 법등을 이어왔으나 차차 기울다가 18세기(또는 1878년)에 망하고 말았다. 망한 이유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 옥룡사마저 망하니, 도선이 세운 두 절은
100년 간격(또는 비슷한 시기)으로 사라져버렸다.

옥룡사와 달리 터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것을 1969년에 승려 박득수가 이 자리를 매입해 절을 짓
고 운암사라 했다. 한때 옥룡사 재건을 위해 절터에 조그만 건물도 들어섰으나 운암사의 탄생으
로 말미암아 그곳에 모두 통합되었다. 어차피 동백림에 있는 절이고 역사도 거의 같으니 옥룡사
까지 무리하면서 지을 필요는 없다. 운암사가 옛 운암사와 옥룡사의 뒤를 이어 지금의 자리를
지키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태어난 운암사는 옥룡사와 동백숲 덕분인지 짧은 시간에 벌써 많은 건물을 지어올렸다. 특
히 2007년에 완성된 황동(黃銅) 약사여래입상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무려 40m에 이르며, 속리
산 법주사(法住寺)의 청동미륵불보다 13m가 높다. 허나 아래 10m는 약사전(藥師殿)으로 쓰이고
있어 실질적인 불상 높이는 30m이다. 그래도 법주사보다는 키다리이다. 황동이 자그만치 75톤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도선국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도선비기의 내용
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내에는 대웅전과 조사전, 약사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古
色)의 내음은 전혀 없다.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건물도 모두 새것이라 새집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고 돈을 꽤나 들인 듯, 장엄하고 화려하다.


▲  산신각 산신탱 -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2명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인다.

▲  조사전(祖師殿) -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된
삼성각

▲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똥배와 축쳐진 귀가 매력인
포대화상(布袋和尙)


▲  운암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3불 2보살이 봉안된 대웅전 불단(佛壇)

▲  정면에서 본 약사전과 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 주변

운암사의 명물인 황동 약사여래불은 2006년 여름에 짓기 시작하여 2007년 5월에 완성을 보았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무려 30m의 장대한 키를 자랑하며, 불상 밑에는 약사전이 있는데,
그 건물 높이가 10m로 일종의 대좌(臺座) 역할을 한다. 그 높이까지 합치면 40m에 이르는 거구
이다.

불상이 큰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높이에 연연하다보니 약사불의 표정이 영 어색하다. 보는 이
의 눈에 따라 얼마든 달리 보일 수 있겠으나 그 흔한 미소도 없고, 표정도 그리 밝아보이진 않
는다. 게다가 지나치게 크다보니 그리 정감도 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느라 애궂은 고개만 아
프다. 그냥 외형만 중시하는 그런 분위기인 것이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21세기 초반 불
상 양식을 잘보여준다며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의 왼손에는 그의 필수품인 약합이 들려져 있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비슷
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  절 남쪽 언덕 너머로 본 약사여래불
마치 언덕 위에 서 있는 듯 시각을
혼란시킨다.

▲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
약사전 앞에 2기의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들도 장대한 규모인건 마찬가지~~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보니 자연히
코끼리가 많이 등장한다. (부처의 법을 상징)


▲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된 약사여래불과 후불탱화

▲  운암사 연못

경내 남쪽이자 약사전 동쪽에는 동그란 모습의 큰 연못이 기를 질리게 한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는 무슨 수영장인 줄 알았다. 절에 왠 수영장 같은 것이 있나 싶었는데, 물 속을 살펴보니 물이
잔뜩 오른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순찰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연못인 줄 알았다.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닌 완전 새로운 형태의 연못으로 그 동쪽에 기도를 하고 물고
기를 방생(放生)하는 공간이 있으며, 연못 주위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철난간을 빙 둘러 삼
엄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연못을 짓더라도 전통 양식에 맞춰 정겹게 만들었으면 좋으련만 지
나치게 옥의 티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연못을 순찰하는 물고기의 위엄
다양한 피부의 잉어들이 회, 매운탕 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오늘 저녁은 정말 매운탕 1그릇 먹어야겠다.

▲  옥룡사터, 운암사를 뒤로 하며~~

운암사를 둘러보고 약사전에 들어가 3배를 올리며 일종의 신고식을 마친 다음, 절을 나섰다. 이
제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옥룡사터와 동백나
무 숲, 거기에 덤으로 운암사까지 둘러보고 나오니 어언 3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제자리로 돌아
가야 될 시간이 이르면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이제 4월이건만 여름의 제국이 벌써 도래했는지 날씨가 초여름 수준이다. 그래서 동백숲 적당한
곳에 자리 피고 한숨 자고 갈려고 했으나 그런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했다.

추동으로 나와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20분 뒤에 있다고 한다. 마땅히 쉴 공간도 없어서 버스정
류장 옆인 보건지소 부근에 머물며 차를 기다리는데, 무려 15분씩이나 늦게 온다. 장날 때문에
늦은 것이라고 한다. 그 버스를 타고 광양읍내로 나와 순대국으로 점심을 먹고 광양터미널에서
순천시내버스 77번을 타고 순천시내로 이동했다.

순천(順天)도 정말 오랜만에 오는 곳인데,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날씨가 시간 개념도 없이
덥다보니 지치기도 하고, 전날 잠을 적게 자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애매하고, 거기에 오늘 너
무 많은 곳을 둘러보면 탈이 날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지만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순천
역으로 이동하여 용산(龍山)행 무궁화호를 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광양 동백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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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곡성 태안사(泰安寺) '

▲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겨울 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1달 넘게 천하를 어지럽히던 꽃샘추위가 봄에게 말끔히 꼬리가 잡
히면서 비로소 진정한 봄의 세상이 도래했다. 하늘 아래 세상을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로
부터 해방시킨 봄을 찬양하며 연초부터 가고자 했던 곡성 태안사를 찾았다.

전국에 널린 미답지의 하나로 베일의 가려진 곡성에 첫 발을 내리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
침 곡성 5일장이었다. 터미널 근처에 마련된 5일 장터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서울에선 아
직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 벚꽃이 여기서는 한참 절정을 누리며 순백의 미를 자랑
다.

태안사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넉넉해 그 사이에 점심을 먹고자 읍내로 들어섰다. 허나 장터
와 달리 읍내는 썰렁함이 감돈다.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읍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니 삼기국밥
이란 국밥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순대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살피
니 암뽕순대국밥이란 특이한 국밥이 있어 주인 아지매에게 뭐냐고 물어봤다.
이에 아지매는 암뽕은 암돼지를 잡아서 만든 순대국밥이라면서 이 집의 주메뉴라고 설명을 한
다. 그래서 이름도 재밌고 해서 그것을 주문했다.

얼마 뒤 내 앞에 차려진 암뽕순대국밥, 밥은 양이 좀 적었지만, 순대국은 순대와 파, 여러 고
기가 버무려져 정말 풍성했다. 순대는 함경도 순대처럼 꽤 두꺼운데 몇 개를 집어먹으니 뱃속
에서 용량이 초과되었다고 신호가 날라올 정도다. 파가 많아서 맛을 더욱 띄워주며, 팔뚝만한
순대에는 무려 21가지의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며, 고기들도 입 속에서 살살 녹아 목구멍이 즐
겁다. 밑반찬은 김치와 송송(깎두기), 양파, 양념장과 고추장이 나왔다.


▲  한상 차려져 나온 암뽕순대국밥의 위엄

이렇게 점심을 먹고 맛있다고 운을 띄우니 주인 아지매는 커피 1잔을 타주며 환송해준다. 커피
를 마시니 시간은 버스 시간 10분 전, 서둘러 터미널로 뛰어가 태안사행 군내버스를 탔다.

5일 장의 후광으로 상당한 손님을 태운 버스는 읍내로 바로 가지 않고 장터로 갔다. 장터 남문
에 이르니 장을 본 노공(老公)들이 우루루 몰리면서 차는 그야말로 가축수송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그 많은 승객 가운데 나를 빼면 모두 노공들, 지방 인구 감소와 농촌 고령화 현상의 심
각함이 버스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 인구를 계속해서 빨아먹어 점점 비대해
지는데 지방은 빨대 끝에 있는 쥬스처럼 사람 수가 나날이 홀쭉해지니 이도 참 큰일이다.

곡성역을 지나 오지리까지 노공들은 계속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지 못한 노공들은 장터에서
사온 물건에 몸을 의지하며 주변 사람들과 사투리로 구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런 풍경은
서로 인상이 쓰고 경계나 품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정겨운 광경이지. 그래서 지
방에 가면 가급적 군내/시내버스를 탄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향기가 담긴 풍경이 그립기 때문
이다. 비록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런 현장 속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
겁다.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달리며 레일 바이크(Rail Bike)로 수입이 쏠쏠한
옛 전라선 철로와 나란히 달리기를 20분, 호남의 대성리/청평으로 일컬어지는 압록에 이른다.
압록에서 오른쪽 18번 국도로 꺾어 보성강(寶城江)을 따라 달리는데, 한참 벚꽃과 보성강에 시
선을 둔 사이 버스는 태안3거리를 지나친다. 다리를 건너야 태안사인데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의문을 품고 있으니 곧바로 죽곡면주민센터가 있는 태평리에서 차를 돌려 다시 태안3거리로 돌
아와 그제서야 보성강을 건넌다.
이제 다왔구나 안심을 하고 있으니 버스는 그 안심에 먹칠을 하는 듯 태안사가 있는 동쪽을 놔
두고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버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1차선 크
기의 농로를 한없이 비집고 들어가 비봉에서 바퀴를 돌린다. 알고보니 곡성 장날에만 특별히 1
일 2회 운행한다는 비봉 경유 차였다. (장날 이외에는 들어가지 않음)
덕분에 생각치도 못한 곳을 강제투어 당하고 다시 태안교로 나와 동남쪽으로 10분을 달리니 비
로소 태안사입구에 도착했다. 곡성에서 5일장과 비봉 경유의 여파로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
다.
(보통은 40분 정도 걸림)


♠  태안사 숲길 (태안사입구 ~ 능파각)

▲  태안사 입구

태안사입구에는 다른 고찰(古刹)과 비슷하게 주막촌이 둥지를 트고 있다. 허나 태안사는 입구에
뿌리를 내린 주막 3~4곳이 전부라 그리 번잡하지는 않다. 게다가 평일이니 그 한적함은 자연히
배가 된다. 속세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며 주막을 지나면 대자연에 잠긴 오솔길이 나타난다.


▲  태안사 입구 벚꽃길

태안3거리에서 태안사 입구까지는 벚꽃가로수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제국의 오랜 시련
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트린 그들에게 어느새 마음을 내주고 만다. 허나 저들의 천
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은 무상한 모양이다.


▲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

주막촌을 들어서면 조촐하게 생긴 비각(碑閣)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절을 찾은 사람들은 다들 무
시하고 넘어가기 일쑤지만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그를 기
웃거렸다. 무슨 사연이 있으니 비석이 있지 않겠는가?

비각에는 '장절공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라 쓰인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처음에는 태안사나 마을에 공적이 있는 사람의 비석으로 여겼으나 장절공이란 낯익은 이름이 계
속 마음에 걸려 조사를 해보니 곡성 출신으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開
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영적비였다. 여기서 신선생은 신숭겸을 뜻한다.

그는 927년 후백제의 빛나는 승리, 고려의 무참한 패배로 마무리 된 대구 공산(公山)에서 전사
했다. 그때 그의 말이 잘려진 주인의 머리를 물고 태안사 뒷산으로 달려와 3일 동안 구슬피 울
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 승려가 신숭겸의 머리와 말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경내에 제단을 두어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절 입구에 세워
진 영적비는 절과 고을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신숭겸에 대한 고장 사람들의 강한
긍지가 묻어나 있다.

▲  비각에 새겨진 동물 장식
비각 좌우에 하얀 동물 장식이 평방(平枋)을
받치고 있다. 토끼로 보이면서도 기지개를
켜는 개로도 보이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다리
자유교(自由橋)


주막촌을 지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솔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2km 거리로 총 4개의 다리를
거쳐야 되는데, 그 1번째가 자유교다.
보통 절에 갈 때 만나는 계곡과 다리는 번뇌를 떠내려 보내고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허나 그 번뇌란 것은 쉽사리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태안사는 계곡을 따라 1개도 아닌 4개
의 다리를 놓아 인내를 가지고 번뇌를 내던질 것을 중생에게 주문한다.

자유교는 번뇌와 속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다리를 건너면 옛 매표소와 주차장이 나오
고, 길도 비포장길로 변신한다. 대부분의 절은 절 앞까지 포장길을 뚫었는데 반해 이곳은 여전
히 비포장길을 고수하고 있다. 수레들에게는 다소 불편할진 몰라도 그 덕분에 산사로 가는 고적
한 분위기가 진하게 우려져 오히려 정감이 가고 좋다. 길의 폭이 산길처럼 작았다면 그런 느낌
은 더욱 컸겠지만 절도 먹고 살아야되고 수레 편의도 고려해야되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것이다.


▲  자유교 건너의 동리산 태안사 표석의 위엄

▲  늘씬한 전나무 숲길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전나무 숲길을 닮은 아름다운 길이다.

▲  겨울에서 느리게 깨어나고 있는 태안사 오솔길

태안사 오솔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한 오르막길도 없고 그냥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속인
(俗人)의 집은 절 입구에만 있을 뿐, 절까지는 단 1채도 없다. (중간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전부임) 숲이 삼삼하고 계곡이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산새의 지저귐이 오솔길의 적막을 살포
시 깨뜨리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산사로 가는 길의 진수를 보여준다. 절까지 2km에 이르는
적지 않은 거리지만 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자연과 동화되어 걷다보면 '어머나 벌써
다왔어?' 싶을 정도로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아직까지 겨울에 잠겨있는 숲길이 처량하기까지 하지만 곳곳에 봄의 기운이 싹트고 나무들도 서
서히 살을 불릴 채비를 한다. 새소리와 물소리에 속세의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잔잔히 불어오
는 산바람에 속세의 때가 싹 가시는 듯 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해탈의 경지로 다가서는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하면서 속세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이대로 들어가 다시는 속세에
얼굴을 내밀지 말까? 아 갈등된다~~. 허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겠는가? 나는 절과 자연에 영원히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닌 답사를 온 나그네일 뿐이다.

태안사는 볼거리도 풍부하지만 오솔길과 계곡도 태안사의 매력을 수식하는 아름다운 존재이자
얼굴이다. 부디 개발의 난도질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봄의 서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태안사 오솔길
비포장길의 위엄이 영원하길 고대한다. 괜히 방문자와 수레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  3번째 다리인 반야교(般若橋)
다리 난간에는 12지신상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의 위엄
내가 말띠다 보니 ~~~


▲  마지막 다리인 해탈교(解脫橋)

4개의 다리를 필터로 삼아 철저히 번뇌를 거르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해탈
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허나 그 경지에 이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리 다리를 4
중, 10중으로 둬도 속세에 길들여진 중생은 물론 승려 상당수도 그것을 맛보기 힘들다. 번뇌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떠내려가겠는가?


▲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물길을 재촉하는 태안사계곡


♠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凌波閣)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2호

지루하지 않는 오솔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주차장과 절 안내문이 나오고, 바로 계곡 위에 사뿐
히 걸린 아름다운 능파각이 마중을 나온다.

능파각은 태안사의 얼굴이자 모델로 누각(樓閣)의 역할과 금강문(金剛門)의 기능까지 도맡고 있
는 누각식 다리이다. 그러니까 다리와 문, 누각 3개의 역할을 지닌 셈이다. 주변 풍경이 빼어나
아름다운 여인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뜻한다는 능파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850년(신라 문성왕 11년)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지었다고 하며, 941년(고려 태조 23
년)에 광자대사(廣慈大師)가 보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년)에 다시
지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특히 일주문과 더불어 6.25전쟁 때도 살아남
은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다리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보통 옛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걸치지
만 능파각은 교각도 없이 지은 나무 다리로 이 땅에선 매우 드문 케이스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동물상을 천정에 조각했으며,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수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  계곡 양쪽에 양 다리를 걸치고 계곡을 굽어보는 능파각

▲  능파각 천정에 매달린 용머리 장식
귀여움이 묻어난 용머리가 눈을 부라리고
입을 벌리며 중생을 검문한다.

▲  능파각의 늘씬한 뒷모습


▲  충의문(忠義門), 문 너머로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능파각에서 절로 가는 길은 2갈래로 갈린다. 능파각을 건너 신선의 세계로 통할 것 같은 오솔길
로 가도 되고,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 큰 길로 가도 된다.

능파각을 오른쪽에 두고 길을 오르면 베이지 색이 입혀진 충의문과 함께 경찰충혼탑이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6.25의 뼈아픈 현장으로 그 당시 이곳을 지키다 산화한 우리 경찰의 충혼
이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잠시 숙연하게 한다.

때는 1950년 여름,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지 겨우 1달 만에 전라도 상당수를 점령했다. 당시 곡
성경찰서장 한정일은 부하 경찰과 함께 곡성을 지키기로 마음 먹고 태안사 보제루를 작전지휘소
로 삼아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29일 북한군 603기갑연대가 하동에서 남원으로 이동하고자 곡성 압록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압록교 부근에 매복하여 기습을 가해 북한군 55명을 생포하거나 죽
이고, 트럭과 싸이카 및 총 70여 점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뚜껑이 뒤집힌 북한군은 경찰의 근거지가 태안사임을 알아내고 8월 6일 기습 공격을 했다. 우리
경찰은 그들과 맞섰으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48명 전원이 전사했으며, 이때 태안사
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절 옆에 자리를 마련해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8
월 6일에 유족과 지역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다가 나라에서 1985년 현재의 충혼탑과 호국관
을 세워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2000년에는 그들이 승전했던 압록에 승전탑(勝戰塔)
을 세워 그날의 함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보통 절에는 나라를 지키다 호국(護國)의 신이 된 이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있지만
이렇게 충혼탑까지 둔 곳은 태안사가 거의 유일하다.


▲  1985년에 세운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
그들의 함성과 충혼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6.25와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부디 저들의 피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호국관(護國館)

▲  충혼불멸(忠魂不滅) 표석


▲  충혼탑 뒤쪽에 둘러진 병풍석
1950년 당시 어둠에 저항하며 산화한 경찰들의 전투 장면을 어설프면서도
약소하게 처리한 얕음새김의 조각품이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양쪽에는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시(鎭魂詩)가 장엄하게 자리를 차지고 있다.

▲  경찰충혼탑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목에 심어진 커다란 돌탑


♠ 연못에 심어진 태안사3층석탑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70호

▲  북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탑이 있는 섬까지는 조그만 나무다리가 놓여져 그에게 인도해준다.

경찰충혼탑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향
하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길 왼쪽
에 잔디가 깔린 언덕이 나온다. 언덕 너머로 3
층석탑이 작게 바라보이는데, 그 언덕을 오르면
둥그런 넓은 연못이 나오고, 3층석탑은 연못 중
앙에 두둥실 뜬 동그란 섬에 단아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 연못은 일주문 서쪽에 자리해 있다. 능파각
과 더불어 태안사의 백미(白眉)로 주변 만물들
이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
념이 없다.
섬에 자리한 석탑은 이전에는 광자대사탑 앞에
있었다. 그때는 기단부 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층 탑신(塔身)이 사라진 상태였지. 그러다가
연못과 섬을 만들어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라진
부분을 보충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혔으며, 그 위에 머리장식을 두었다. 탑을 옮기
면서 바닥돌을 넓게 깔아 탑이 제법 커 보이며, 탑신부는 옛 석재와 새 것을 적당히 섞었고 머
리장식은 노반(露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붙였다.
신라 말 석탑 양식을 갖춘 고려 초기 석탑으로 여겨지며, 광자대사탑 부근에 옥개석이 하나 더
있고 금강선원 앞 축대에도 옥개석이 있어 쌍탑(雙塔)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4.17m로 연못을 굽어보는 탑의 위엄이 자못 넘쳐보인다.


▲  연못 동쪽 바위에 얹혀진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조그만 돌탑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계를 이룬다. 바위 오른쪽
에는 석탑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데, 연못에 있는 3층석탑의 일부거나 씽탑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  태안사 일주문(一柱門)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3호

▲  고색의 무게가 서린 일주문의 위엄
동리산은 태안사를 품고 있는 봉두산(鳳頭山)의 옛 이름이다. 산이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여 동리산이라 불렸으며,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라고 한다.


연못을 지나면 능파교에서 갈라진 길이 다시 합쳐지면서 절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속
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문으로 절의 정문인 능파각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문은 937년 광자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1683년 각현선사가 다시 지었다. 1917년 영월(映月
)선사가 중수하고 1980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능파각과 더불어 격동의 6.25시절에
도 살아남은 건물로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문 정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뒤쪽에는 '봉황문(鳳凰門)'
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민흘림으로 이루어진 일주문 기둥은 중심기둥 외에 각각 2개의 기
둥이 더 있는데, 이는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보조용 기둥이다. 문을 보면 현판이 걸린 평방 위
쪽 공포(空包)와 지붕이 육중해 기둥 2개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도로 2개씩을 더
두어 중심 기둥을 돕게 한 것이다.
천정 좌우에는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이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어 촘촘히 박힌
공포덩어리와 곱게 입혀진 단청과 더불어 문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 준다.

▲  일주문 천정 좌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 천정 우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에서 속세로 가는 길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은 길이다.

▲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인생처럼 짧긴 하지만 전나무 숲길이 푸르게
펼쳐져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지 ~ 태안사의 내력
동리산이라 불린 봉두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태안사는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안사(大安寺)라 했다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 '有舍名曰 大安其寺也'란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대안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시절에는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태안사
로 이름을 갈았다. 그는 이곳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열어 선
종(禪宗) 보급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이곳을 택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고 속세와 어느 정도 거
리를 두고 있어 수행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시조
인 도선국사(道詵國師)도 20대 시절 이곳에서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선종은 교종(敎宗)에 대항하여 신라 말에 유행했던 불교 종파로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
종과 달리 참선(參禪)을 중시하여 경전을 어려워했던 백성과 지방세력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고려 태조 시절에는 혜철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중창을 벌였는데,
그 규모가 건물 40여 동, 110칸에 이르렀다고 하며, 법당에는 1.4m 높이의 철조약사여래(鐵造藥
師如來)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말사(
末寺)로 두었다고 하니 왕년의 위엄이 한때나마 호남 하늘을 가리고도 남았음을 보여준다. (지
금은 화엄사의 말사임)

1223년(고종 10년)에는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우(崔瑀)가 왕명을 받들어 중건을 했고, 조
선 세종(世宗) 때는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곳에 머물며 왕실의 복을 빌고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바라를 남기기도 했다.
1684년에 중창된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해 오다가 6.25전쟁 때 이곳에 숨어 곡성 수
비를 꾀하던 곡성경찰서 경찰을 치고자 북한군이 기습을 가하면서 능파각과 일주문을 제외한 모
든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당시 화마(火魔)에 사라진 건물이 15동에 이른다.

1969년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계속 복원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을 중심으로 약사전, 삼성각, 보제루, 해회당, 적묵당, 천불전 등 15~16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채우고 있으며, 적인선사탑, 광자대사탑, 광자대사탑비, 청동 대바라, 동종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고색의 무게를 진하게 간직한다. 또한 절 전체는 전남 지방문
화재자료 23호
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속세의 기운이 범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있고 찾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아 한
적한 편이다. 게다가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으며, 절로 인도하는 오솔길도 사색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로 신선의 세계로 여겨질 정도이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을 때 마냥 묻혀
지내고 싶은 절집으로 속세에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담긴 승탑(僧塔)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서린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가 있다. 광
자대사탑을 비롯하여 고려부터 조선까지를 망라한 승탑 7기와 광자대사탑비, 탑의 옥개석 등이
보금자리를 가득 메우는데,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자대사탑과 탑비이다.


▲  아찔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 - 보물 275호

광자대사비는 태안사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새와 용머리, 보주(寶珠), 구름
무늬 등 다양한 문양이 비석의 수려함을 크게 돋보이게 한다. 아쉽게도 비신(碑身)은 오래 전에
도괴되어 우측에 따로 자리해 있으며, 비신이 빠진 것을 빼면 고려 초기 비석의 으뜸급임은 분
명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자대사 윤다는 혜철의 손제자로 864년에 태어나 8살에 출가했다고 한다. 태
안사에 들어와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고 돌아와 태안
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다.
945년(혜종 2년) 81세로 입적하자 혜종(惠宗)은 '광자(廣慈)'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행장을 적
어 950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41년 태안사 사적기에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  발을 움직이며 입에서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은 광자대사탑비 귀부

▲  광자대사탑비의 이수 부분

▲  이수 중앙에 새(극락조?) 문양

▲  광자대사탑비의 뒷모습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의 비석 귀부는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별다른 상
처 없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이 벌려져 있고, 목에는 주름무늬가
세세히 표현되어 적당히 색칠을 가한다면 정말 거북이의 목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비석이 심어
진 비좌(碑座)에는 구름 무늬가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빼곡히 자리를 채우며, 그의 등에는
등껍데기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져 있다.

비석 꼭대기를 장식하는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대신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눈길
을 끄는데, 극락조(極樂鳥)로 일컬어지는 가릉빈가(迦陵頻伽)로 여겨진다. 파괴된 얼굴을 제외
하면 발톱부터 목부분까지 정교하게 박혀있어 하얀 새가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날라갈 것 같
다. 새 조각 밑에는 탑비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파손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이수 양쪽 끝에는 용머리가 달려있으며, 새 뒤쪽과 좌우에 3개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이
수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가득 수놓여 있고,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하여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했다.

▲  이수 모서리에 용머리와 보주

▲  탑비에서 떨어져 나온 비신(碑身) 부분

광자대사탑비 옆에 나란히 놓인 비석은 원래 광자대사탑비의 비신으로 파손이 심해 판독하기가
거의 어려운 상태다. 허나 다행히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비
문의 내용이 실려있어 그 내용을 알게 해준다. 내용은 광자대사의 생애와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
한 대우를 받았던 일, 불가에 입문한 것 등이다.


▲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 보물 274호

광자대사비 옆에는 광자대사가 잠들어있는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탑비를 닮아 수려하기는
마찬가지라 바닥돌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8각의 탑신을 차례대로 얹혔으며,
그 위를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8각원당형 부도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부 밑 받침돌 위에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으며, 윗받침에
는 16잎씩 연꽃을 2줄로 나열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은 앞,뒷면 모두 향로 모양을
새겼고, 그 옆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의 추녀는 너무 얇게 올려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과 보주를 비롯한 머리장식이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조화로워 고려 초기 부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  광자대사탑 옆에 자리한 조선시대 승탑
한참 선배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의 높은
명성에 눌려 거의 무명의 부도로 살아간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들이 아늑하게 숲길을 이루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태안사 대웅전 주변

▲  경쾌하게 추녀를 들어올린 대웅전(大雄殿)

일주문 전나무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태안사 중심부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 뜨락에는 곧 다가올 불교의 경축일 석가탄신일을 대비하여 동서로 길게 줄을 치고 연등
을 달고 있었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태안사의 법당으로 광자대사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 6.25때 파괴된 것을 1969년에 다시 세웠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아
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태안사를 빛낸 혜철국사와 광자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물
론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影幀)이다. 그리고 부처의 10대 제자의 영정을 비롯해 석가불의 본생
도(本生圖)로 내부 벽을 장엄했고, 내부 좌측에 조그만 동종(銅鐘)이 놓여있는데, 자칫 지나치
기가 쉽다. 하지만 그 종은 1457년에 주조되어 1581년에 다시 만든 조선 초기 종으로 태안사의
주요 보물 중 하나이니 꼭 살펴보자.
이 종에는 제작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시대 동종의 변화 과정을 담은 점이
인정되어 보물 1349호로 지정되었다. 그 종을 사진에 담으려는 찰라 갑자기 인천(仁川)에서 단
체로 온 신도들이 대웅전을 빼곡히 점거하는 통에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아미타불, 그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갖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전 정면에 자리한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 조선시대 절은 보통 법당 앞에 누(樓)를 두어 그 아랫도리
로 경내를 오르도록 했다. 허나 이곳은 아랫도리 대신 옆구리에 길을 내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
으며, 6.25때는 곡성 경찰이 이 건물을 작전지휘소로 삼아 북한군에 항전했다.

         ◀  보제루에 걸린 목어(木魚)
파란 피부를 지닌 목어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
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보통 절은 사물(四物
)이라 불리는 목어, 범종, 운판(雲版), 법고(法
鼓)를 갖추고 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목어가 유
일하며 그 흔한 범종각도 아직 없다.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허공을 헤엄치는
커다란 목어의 자태가 꽤 인상적이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그의 등을 타고 가볼까..?

▲  종무소의 역할을 겸하는 적묵당(寂默堂)

▲  어처구니를 상실하며 옛 추억에 젖은 맷돌


▲  해회당(海會堂)

해회당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태안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라가 있는데, 바라란 불교의식(불교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이나 설법, 큰 행사 등) 때 쓰는 접
시 모양의 악기로 2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놋쇠로 만드는데, 놋쇠판 중앙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매어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
 
태안사 바라는 지름이 92cm, 둘레가 자그마치 3m에 이르는 규모로 효령대군이 남긴 것인데, 별
다른 손상이 없어 지금도 별무리 없이 쓰인다. 허나 워낙 무거워 두 사람 이상이 같이 들어서
사용하며, 바라 피부에는 정통(正統) 12년(1447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효령대군이 아우인
세종 내외와 왕세자<훗날 문종(文宗)>의 복을 빌고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대바라는 태안사 일급의 보물인만큼 속세에 공개를 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적묵당에 문의
를 했으나 역시나 안된다고 그런다. 대바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 앞에선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무덤의 육중한 석물도 아무렇지 않게 훔
쳐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깊숙한 곳에 두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그외
에 1770년 고흥 능가사(楞伽寺)에서 만든 금고(金鼓)가 내부에 있는데, 지름이 1m가 넘는다고
한다. 금고는 반자(飯子)라 불리기도 한다.


▲  태안사 청동 대바라 - 보물 956호 (문화재청 사진)

▲  물이 없는 것처럼 나를 속인 석조(石槽)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석조는 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도꼭지
로 물을 통제하기 때문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종일 물이 나와 석조를 메우는 형태가 아니다. 그
래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은 물이 없구나 싶어서 넘어간다. 나 역시 속았지. 허나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오니 신도 1명이 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정말 한대 맞은 기분
이었다. 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을 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근래에 만든
건물로 약사불의 거처이다. 정면 가운데 칸이
좌우 협칸보다 크게 설정되어 있다.


▲  삼성각 좌측에 봉안된 독성도(獨聖圖)


▲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약사전의 주인인 약사불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며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치료할 약이
담겨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그시 굽어보는 그의 뒤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는데, 이는 벽에 받친 그림이 아닌 유화(油畵) 그림판이다. 임창수(林昶壽) 화백(畵伯)이 그
린 것으로 전통 안료를 쓰지 않고 유화로 한 것이 특징이며, 닫집이나 불상을 수식하는 장식물
이 없어 대웅전 불단보다 다소 허전하다.

◀  고참 승려의 공간인 염화실(拈花室)과
적인선사탑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보물 273호


▲  적인선사탑 앞에 마련된 배알문(拜謁門)

선원 북쪽,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안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 할 수 있는 혜철대사의
승탑이 넓게 터를 닦았다. 절을 세운 이는 3명의 신승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혜철을 태안사의 시조로 여긴다. 그의 승탑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
照輪淸淨塔)'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어 외우기도 좀 어렵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태안사 적인선사탑')

부도에 잠들어 있는 혜철(惠哲)은 성이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으로 785년 경주에서 태어
났다. 16세에 출가하여 806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14년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
堂地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에 들어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어 선종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861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경문왕(景文王)은 적인(寂忍)이란 시호
를 내렸다.


▲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위엄

872년에 조성된 적인선사탑은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이곳에 서린 다른 보물과는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절을 개창한 시조에 걸맞게 규모가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나 아찔한
아름다움에 두 눈이 마비될 정도이다. 승탑은 네모난 넓은 기단 위에 심어져 있는데, 거의 석가
불의 세존사리탑에 버금가는 대우로 위엄이 철철 넘쳐 흐른다.
탑 앞에는 높은 어른을 뵌다는 뜻의 배알문이 있는데, 높이가 다소 낮다. 하여 키가 큰 사람은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머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하라는 의미다.

적인선사탑은 광자대사탑과 마찬가지로 8각원당
형의 승탑이다. 2중의 바닥돌 위에 8각 하대석
(下臺石)을 두어 각 면마다 방향과 형태를 달리
한 사자 1구를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높이
가 낮으나 격을 잃지 않았으며, 상대석(上臺石)
에는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친 앙련(仰蓮)이 3
중으로 조각되어 탑신부를 우러르는 것 같다.

탑신 전면에는 문비(門扉)라 불리는 네모난 문
짝이 새겨져 있고, 탑신 위쪽 지붕에는 지붕선
이 세세히 표현되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相
輪)에는 복발과 앙화(仰花), 보륜이 차례대로
장식되어 있고, 보주로 꼭대기를 마무리 했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오래된 승탑임에도 근래 만든 것처럼 정정하며 탑의 피부는 조금 회색 빛
깔을 띌 뿐, 장대한 세월의 때와 상처는 전혀 없다. 온후한 기품이 돋보이고 거의 완전히 보존
되어 신라 후기에 가장 우수한 승탑으로 칭송을 받는다. 특히 6.25 때 북한군이 이곳까지 습격
해 절을 죄다 불질렀음에도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적인선사탑과 동백나무 (승탑 오른쪽 나무가 동백나무)

▲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청정탑 우측에는 혜철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청정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며 자리한다. 이 비석은
오래 전에 비신(碑身)이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비신을 새로 만들어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귀부와 이수는 옛날 것이며 비신에 적힌 비문은 다행히 탁본한 것이 경내에 전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나 광자대사탑비에 비하면 조금은 수준이 떨어진다. 또한 1928년 절
을 중건할 때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를 옮겨와 청정탑비의 이수로 썼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뒤바
뀌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 (일주문에서 능파각으로 가는 길)

▲  솔내음이 충만한 오솔길 (성기암 입구)

태안사 곳곳을 사진에 담으며 머문 시간이 거의 1시간, 시간이 집으로 갈 시간이라며 자꾸 나가
자고 보챈다. 나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속세에서 살아갈 운명이기에 마음만은 능파각 기
둥에 살짝 걸어놓은 채, 속세로 길을 떠났다.

절을 나오면서 계곡 동쪽에 있다는 천불전(千佛殿)과 산왕각(山王閣)은 가지 않았으며, 태안사
의 부속암자인 성기암은 가려다가 귀찮아서 통과했다. 이렇게 다음에 다시 찾을 구실을 남기며
자연과 벗삼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태안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 곡성 태안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
  라선 열차를 타고 곡성역 하차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곡성행 고속버스가 1일 1회(15시) 떠난다.
* 광주에서 곡성행 직행버스가 15~40분 간격. 전주에서는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곡성터미널에서 태안사입구 경유 원달리행 군내버스가 1일 7~8회 다니며, 곡성역을 경유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능파각까지 진입 가능, 능파각과 조태일시문학관에 주차장 있음)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황전나들목을 나와서 곡성방면 17번 국도 → 압록교를 건너 좌회전 →
   태안3거리에서 좌회전(다리를 건넘) → 태안사입구 → 태안사
② 남해고속도로 → 석곡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석곡에서 압록 방면 우회전 → 죽곡 → 태
   안교3거리에서 우회전 → 태안사입구 → 태안사
*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
061-362-4906,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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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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