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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26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2. 2013.10.15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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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음봉) 밑에 자리한 원통사(圓通寺)에 이른다.

원통사는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우이암(관음봉)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관음도량(觀音
道場)으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 정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짐) 절은 오래되긴 했으나 건물은 죄다 20세기 이후 것들이라 고색의 기운은 말
라버렸으나 대신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사찰 중 북한산(삼각산) 일선사(一禪寺) 다음으
로 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서울 사찰 조망 부분 2위임)
약사전(藥師殿) 거북바위에 깃들여진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뒤엎기 전, 여기서 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하늘나라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여 그것을 기
리고자 조선 말에 이곳을 찾은 사대부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원통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10여 분 정도 각박한 산길을 올라 드디어 우이암(
관음봉) 서쪽 봉우리에 이르렀다. (우이암 이전의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
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과 선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
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바라보인다.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
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암벽 등반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으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불교 성지로 격하
게 추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라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남아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
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
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과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 동쪽 자락 등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무려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햇님, 별님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
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가 추가로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
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
을까? (현실은 시궁창 인생 ㅠㅠ)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하여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더듬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
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
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으로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은 정
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우이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의 위엄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우이암능선과 문사동계곡(問師洞溪谷)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우이암을 중앙으로>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
듬히 기대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
댄 모습으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 누님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비뚤어진 주장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
의 눈이 비정상임을 보여준다. 빠른 시일 내에 제 이름을 회복한다면 우이암능선도 관음봉능
선으로 이름을 갈아야 될 것이다.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광진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무수골 등)

▲  우이암능선 조망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조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 위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되며,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북한산 북쪽 능선(상장봉)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우이암능선분기점이다. 여기서 직진하면 지붕
길을 따라 칼바위, 오봉, 도봉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동쪽은 보문능선으로 도봉산 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은 우이령(牛耳嶺)으로 이어지나 금지된 길인 비법정 탐방로이다. 그러
니 도봉산의 건강을 위해 아예 가지도 말자~~!
우리는 목적지인 우이암(관음봉)을 찍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붕길을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보
문능선으로 내려갔다.


▲  보문능선에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

▲  산악신앙의 현장,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돌탑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  경쾌하게 몸을 푸는 문사동계곡 상류

내려가는 길이긴 하지만 느낌상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산길에 연두연두하게 익은 나
무들과 진달래 등의 봄꽃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산바람이 종종 스쳐가며 조금씩 꿈틀거리는 땀
의 기운을 털어간다. 보이지 않던 계곡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살짝 다가와 낭랑한 물소리를 들
려준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상류로 전날까지 넉넉히 내린 봄비로 인해 물이 아주 넘쳐 흐
른다.

문사동계곡은 무수골(원통사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사동계곡이 단연 갑(甲)으로 상류 부분은 작고 조촐한 모
습이라 두드러지는 풍경은 별로 없지만 속세로 내려갈수록 일품 풍경이 펼쳐져 두 눈을 제대
로 호강을 시킨다. 주름지고 잘생긴 바위와 벼랑은 물론 폭포도 여럿 나타나 산행의 여흥을
제대로 돋구며 특히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과 구봉사 주변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 계곡은 용어천계곡과 합쳐져 도봉계곡으로 간판을 바꾸며, 도봉역에서 무수골에서 나온 무
수천과 하나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사동은 도봉계곡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동천(道峰洞天)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밑에 도봉서원이 자리해 있어서
서원 유생과 선비들의 피서지로 명성을 누렸다.


▲  문사동(問師洞) 바위글씨

문사동계곡의 이름표인 문사동 바위글씨는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든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문사동이란 '스승을 모시는 곳','스승에게 묻는 곳'이란 뜻으로 도봉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스승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경치를 즐기거나 팔자좋게 탁족(濯足) 등의 피서를 즐
겼던 현장이다. 그래서 계곡 이름도 교육에 걸맞게 문사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바위글씨는 초서체(草書體)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글씨 크기는 41x16cm으로 예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바위글씨전' 포스
터에 절찬리에 실렸던 명필이기도 하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후기에 서원 유생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글씨 주변은 문사동계곡에서 가장 아
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  가까이서 바라본 문사동 바위글씨의 위엄
동(洞)은 그런데로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글씨는 진짜 해독 불가 수준이다.
(초서체 글씨들이 그런 경향이 큼)

▲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풍경

계곡이 흘러가는 글씨 건너편에는 주름진 폭포와 벼랑이 펼쳐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이
런 절경에는 늘 신선(神仙)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고리타분한
유생들이 지겹게 찾아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이나 일삼고 있으니 신선 형과 선녀 누님들도 딱
히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  층층이 주름진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폭포

▲  문사동계곡 마당바위 갈림길
이곳에서는 자운봉, 윗마당바위(천축사 윗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  도봉산 마무리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문사동계곡 중류

문사동계곡의 절경은 도봉계곡까지 연거푸 이어진다. '과연 도봉산 3대 계곡의 위엄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며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 그 절경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장으로 감히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단어를 마구마구 갖다붙여도 이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
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와~~!' 탄성만 자아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  문사동계곡 중류 (보문능선, 성불사입구)

계곡을 옆구리에 낀 넓적바위가 지나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아직 봄이니까 그냥 지나쳤지, 한
여름이었다면 정말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온몸으로 풍덩은 하지 않더라도 냄새가 모락
모락 나는 두 발을 꺼내들고 계곡을 휘저으며 피서삼매를 즐겼을 것이다~~!


▲  돌과 계곡이 어우러진 문사동계곡 중류 (성불사입구 부근)

▲  문사동계곡 서광폭포
폭포가 귀신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굉음을 울리며 굵은 명주실 같은
하얀 물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내려온 폭포수는 폭포 밑에 닦여진
담(潭)에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긴 여정을 떠난다.

▲  옆에서 바라본 서광폭포의 위엄
폭포의 높이는 5m에 불과하지만 그 매력과 위엄은 어느 폭포 못지 않다.

▲  폭포가 여러 겹으로 펼쳐진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서광폭포를 지나면 구봉사(龜峰寺)라 불리는 절집이 나온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요
사(寮舍), 범종각, 커다란 금동미륵불을 지닌 조그만 현대 사찰로 이 주변이 '문사동' 바위글
씨 주변과 함께 문사동계곡의 대표적인 흥미거리로 꼽힌다. 구봉사는 아마도 이들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자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인데, 층층이 이루어진 암벽에 키 작은 폭포가 여러 개
걸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꽤 청아하다.


▲  주름진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이 주변 바위에 가득하다. 그만큼 도봉산도 늙었다.

▲  문사동계곡과 연등이 둘러진 산길 (구봉사 주변)
나무와 꽃들이 급하게 흐르는 계곡을 천연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온갖 바위들이 재주를 부리는 문사동계곡 산길 (금강암 주변)

▲  연등이 허공을 가르는 금강암 주변 문사동계곡

구봉사에서 1굽이를 지나면 비구니 절집, 금강암(金剛庵)이 마중을 한다. 이곳 역시 구봉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그곳을 지나면 천축사와 포대능선, 자운
봉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합쳐져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수월
해져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터에 이른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도봉산에서 가장 잘나갔던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으며, 조선 말
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임시로 단을 설치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72년 사당인 정로사(靜老祠)와 신문(神門)을 복원
했으나 왕년의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허나 서울 유일의 서원이라는 큰 매력 덕분에 서울시
가 39억의 돈을 들여 2011년 기존의 건물을 밀어버리고 2014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공사에 들
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 영국사 시절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와 이해관계가 제대로 얽히게
되었고, 그때까지 지어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계속 허전하게 터
만 남은 상태이며, 터 일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언제 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유교 쪽도
그렇고 불교 쪽도 영국사 복원을 계속 우기고 있는 실정이라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버렸다.
괜히 벌인 복원공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  거친 물살의 희롱을 받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터에서 잠시 앞 계곡(도봉계곡)을 살펴보자. 그러면 계곡에 반쯤 잠긴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 바위글씨가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 고산앙지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여 김
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서원이 조광조
를 배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글씨는 특이하게도 계곡물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새겨져 있어, 계곡 수량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천차만별인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물에 잠겨 있어 심한 가뭄이 아닌 이상
은 보기가 참 힘들며, '앙(仰)'은 물이 많으면 역시나 보기가 힘드나 보통 때는 절반에서 1/3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갔을 당시는 수량이 풍부해 '앙지' 2자는 강제 잠수 중이었다.
물의 희롱을 받는 '앙지'와 달리 '고산(高山)' 2자는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데 '산(山)'이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
가 새겨진 시기<경진 칠월(庚辰 七月)>가 쓰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바위
글씨들이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도봉계곡과 문사동계곡 일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
수증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월 도봉서원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동문(道峰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서원터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를 간직한 광
륜사(光輪寺)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2분 정도 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 부근 큰 바위에 깃들여
진 도봉동문 바위글씨가 마중을 한다.
이 4자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 받던 조선 중기 문인이자 멸망한 명(明)나라에 과한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인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전
한다. 도봉동문이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유명 문인이 쓴 글씨라
그런지 필체가 요란하게 율동을 부린다. 도봉서원 단골 고객 중에는 송시열도 있었다.


▲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쌈밥의 위엄

도봉산 종점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저녁 밥에 곡차(穀茶
) 1잔이 그리워질 시간이라 산행 뒷풀이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종점 부근에 있는 쌈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기를 겯드린 쌈밥집으로 우리는 삼겹살 쌈밥을 먹었는데, 삼겹살과 콩나물, 계란찜
, 무채, 김치, 된장찌개를 비롯해 상추, 양배추, 깻잎 등이 푸짐히 쏟아져 나왔다. 밥은 처음
에는 조금 주었으나 필요한 경우 더 제공해준다. 이들을 밥에 버무려 비빔밥처럼 해먹으면 되
며, 상추와 양배추에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1점 넣어 쌈을 싸먹어도 된다. 이런 풍성한 찬
에 곡차가 없으면 안되겠지? 하여 막걸리를 시켜서 2병 정도 겯드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
봉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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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 서울 도봉산(道峯山) 나들이 '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주변)

▲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험준한 도봉산 포대능선

▲  자운봉(紫雲峰)고개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봄이 한참 무르익던 5월 노동절에 옆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도봉구(道峰區)의 든든
한 뒷산인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산 141번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도봉서원과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산중턱에 자리한 천축
사(天竺寺)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마당바위를 거쳐 각박한 산길을 개미처럼 올라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직전에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
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가면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자운봉(740m)은 도봉산(道峯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데, 통행금지 안내문을 쿨하게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
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능선을 비롯한 주능선은 도봉산의
지붕으로 북쪽은 멀리 사패산까지, 남쪽은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牛耳洞)까지 이어진다.


▲  자운봉고개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 (건너편 산은 수락산)

◀  순도 100% 바위 봉우리인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고개에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
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
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
양이다. <그래봐야 북한산(삼각산), 용문산,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형님 앞
에서는 고개도 못듬>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 길이며, 왼쪽 길은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구간이다. 그래서 빨리 가려는 생각에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지금까지 보였던 순한 양에서 악한 이리의 모습을 보이며, 등산객을 당황하게 한다.
코스가 완전 지옥이기 때문이다.


▲  포대능선 남쪽 능선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남쪽 <칼바위와 우이암,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포대능선 남쪽 능선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
에 박힌 철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가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게 의지해 조금씩 움직
이는데, 완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 위를 갈 때는 발바닥도 아프다고 난리를 친다. '우악~~ 이런 길
이 다 있다니..? 지옥이 따로 없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716m 봉우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거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을 장식하는 바위 봉우리의 위엄
포대능선이란 이름은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산에 절이 유난히 많으니까 말이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서울 북부 지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를 비롯해 추억이 되버린 군부대 시설이 여럿 있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포대능선 남쪽 능선길을 간신히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
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道峰區)
와 노원구(蘆原區)를 비롯해 강북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
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고 상처받
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하늘 아래로 곱게 펼쳐진 의정부 남부와 서울 북부, 가운데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오봉(五峯)과 양주시 장흥면 지역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716m 봉우리에서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  만월암에서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길
경사가 워낙 미친 수준이라 나무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의 편의를 제공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일까? 끝없이 펼쳐진 계단길, 내려갈 때야 쉽지만,
올라갈 때는 그야말로 진땀을 빼게 한다.


♠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 ~ 도봉산 만월암(滿月庵)

▲  큰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 만월보전(滿月寶殿)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동쪽(도봉산역 방향)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바위 밑에 석굴 암자(庵子)인 만월암이 묘하게 둥지를 틀어 두 눈을 놀라
게 한다.

만월암은 자운봉 동쪽 약 50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중암자로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
한 절이기도 하다. (이곳이 서울의 최북단임)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의 변방으로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唐)이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게다가 의
상은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전에는 주로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연구 및 귀족 불교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왕경에서 1,000리 밖에 떨
어진 이곳 변방까지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의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2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그를 받치는 기둥 역
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등산
로와 이정표가 잘 닦여져 있어 찾기야 쉽겠지만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
러다보니 조용히 참선에 임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당초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봉산에는 천축사와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등의 크고 작은 오
랜 고찰이 많으니 그 절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밀 수행 장소로도 널리 쓰였을 것이다.

지금의 만월암이 생긴 것은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을 통해 17~18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불
상이 1784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1700년대(빠르면 1600년대)에 조성되었
을 것이다. 절이란 불상이 있어야 영업이 되니 17~18세기에 조촐하게 암자로 태어났음을 가늠케
하며, 암자의 이름인 만월(滿月)은 석불좌상이 약사여래불이라 그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
름이다. (신라 중기 창건설은 그냥 뽀송뽀송한 거품임)

불상을 봉안하고 번듯한 암자로 거듭났지만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동굴을 법당으로 다듬
어 사용한 듯 싶으며, 1940년에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건물을 짓고 중창을 벌였
다. 그러다가 2002년에 혜공이 만월보전을 지었고, 2004년에 산신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달랑 건물 2동이 전
부이다. 만월보전은 법당과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는데, 서쪽 칸은 법당, 동쪽 칸은 요사(寮
舍)와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며, 건물의 크기는 작고 투박하다. 아무래도 궁벽한 곳에 있다보니
불사(佛事)가 어려워 바위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산신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 주변을 밀어 건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절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그리 하려면 애궂은 숲
을 밀어야 된다. 내 바램이지만 만월암은 지금의 모습이 딱 좋다. 그냥 소박한 석굴도량으로 속
세 곁에 남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암자이건만 다행히 소장문화유산이 하나 있어 절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지는 않는
다. 바로 만월보전의 주인인 석불좌상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다 그를 보기 위함
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포대능선 지옥 체험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암자에는 승려 1명이 머물고 있으며, 그를 돕는 할머니보살 1명이 낮시간에 암자를 지킨다. 외
진 곳에 있어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에도 연등 수입이 적어 큰일이라고 한다. 이곳 외에도 주변
암자들도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하며, 이곳에서 가장 큰 절인 천축사도 연등 수입이 많이 줄었다
고 그런다.


▲  만월암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에서 바위 너머 북쪽 산자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만월보전에서 여기까지는 도보 2
분 거리로 법당과도 제법 떨어져 있어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이 건물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외벽은 갑옷처럼 돌로 둘렀고, 목조 지붕에는
동기와를 올렸다. 2004년에 혜공이 지었으며,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

하얀 수염에 하얀 바탕의 옷을 입은 산신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호랑이 2마리가 제법
성난 성난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산신이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산신탱 호랑이 가운데 가장 패기가 넘치는 모습임) 그리고 앳된 표정의 동자(童子
) 3명이 양쪽 가장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  만월암 바위 위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이 바위 밑에 바로 만월보전이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현판 - 글씨에 생기가 서린 듯 하다.

바위 밑에 자리한 만월보전은 만월암의 중심 건물로 예전 석굴 자리이다. 2002년에 혜공이 지은
건물로 한정된 자리를 활용하다 보니 정면 4칸, 측면 1칸의 'ㄱ'자 모습이 되었으며, 서쪽 칸은
법당으로, 동쪽 칸은 요사로 쓰인다. 요사에는 만월선방(滿月禪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법
당과 요사를 바로 이어주는 문은 없고, 툇마루를 통해 이동하면 된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인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1969년에 만든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신중탱, 사천왕탱, 산신탱이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만월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196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등장인물이 복잡해 정신을 다 빼놓는 다른 신중탱과
달리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만월보전 우측 벽에 걸린 산신탱

만월암은 산신탱이 2개나 있다. 이 그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각에 봉안된 것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앞서 산신각의 그것처럼 호랑이가 많이 성이 나 있으며, 꼬랑지는 산신의
머리를 칠 기세이다. 그리고 동자 2명은 산신의 지팡이와 여러 물건을 들며 산신 옆에 서 있다.


▲  만월암 석불좌상(가운데 큰 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만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소중한 밥줄이다. 포근한
인상을 지으며 속세를 굽어보는 그는 피부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원래는 금동불(金銅佛)로 근래에 호분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버린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빨간색의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으며,
약합 안에는 중생의 갖은 병을 치유하는 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약으로 여기까지 온 나부터
치료해주면 좋으련만 약합의 뚜껑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의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것인지 어깨까지 늘어졌다. 코는 오목하
고 눈은 지그시 떴는데, 눈동자가 진하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매우 붉다. 불상이 지나치
게 하얗다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전 석굴 석벽에 '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이란 명문(銘文)이 있어 건륭(乾隆) 49년
6월, 즉 1784년에 시주를 받아 개금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개금시기 이전이
확실하고 불상의 양식까지 고려한다면 최대 1600년대까지 가능하며, 참선용 석굴에서 암자로 태
어난 시기도 불상이 조성된 그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8cm로 좌우에는 근래에 만든 하얀 피부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
菩薩)을 협시(夾侍)로 두어 약사여래3존불을 이루었다.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와 단정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도봉산(서울 구역)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
으며(1999년에 지정됨), 만월암에 한줄기 빛으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듬직한 존재이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다. 샘터라고 해서 물이 늘 졸졸졸 나오고 석조에 마냥 물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이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의 지친 목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물은 마음껏 마셔도 되며, 반드시 꼭지를 잠그기 바람)
물을 마시고 절을 둘러보니 할머니보살이 커피 1잔 하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1잔 달라고 그러니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네준다. 커피를 마시며 석불좌상과 만월보전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으니
부처님을 찍으면 실례라고 잔소리를 건넨다. 그래서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하
고는 그냥 둔다.

만월암이 워낙 작다보니 외딴 산골에 묻힌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게다가 앉아
갈 수 있도록 툇마루도 있고, 석조약사불의 인자함도 깃든 곳이다 보니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
며 하룻밤 청하고 싶다. (단 해우소 상태는 장담 못함) 번뇌도 멋모르고 뒤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깊은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암자로 만약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면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만월암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
기 때문이다. 보살 할머니가 합장을 하며 '이제 망월사로 가십니까?' 그러니 내가 '아니요. 속
세로 내려갑니다'

※ 도봉산 만월암, 포대능선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 만월암까지는 1:40~50분, 포대능선은 2:00
  ~2:10 소요, <도봉산역(도봉산역 중앙차로 정류장) → 도봉산 141번종점 → 광륜사 → 도봉서
  원 → 도봉산장 → 만월암 → 716m봉우리 → 포대능선>
  포대능선은 거기서 20분 정도 추가>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줄일 수 있다.
* 만월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02-955-3719)


▲  밑에서 바라본 만월암 만월보전
만월암 석불좌상 문화재 안내판이 만월보전 앞이 아닌 밑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만월보전 주변이 협소하다.


♠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지정되었다.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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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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