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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8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4
  2.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혜화동~명륜동 나들이 '

▲  송시열 집터에 남아있는 증주벽립 바위글씨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겨울 제국(帝國)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월의 한복판, 후배 여인
네와 대학로 북쪽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을 찾았다.
이번 겨울은 제대로 약을 먹었는지 툭하면 강추위에 폭설이 강림해 며칠 전 내린 눈이 아
직도 세상을 덮고 있었다. 하여 햇님의 반격에 겨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14시에 혜
화동로터리에서 그를 만나 장면총리 가옥을 찾았다. 그곳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과학고
, 성북동 방향으로 3~4분 정도 가면 된다.


 

♠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 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俗世)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귀찮은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은 외우기가 참 쉬운 이름이었다
는 것인데 그것도 외우기 어렵다면 대중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자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을 뽑아서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自由黨)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개혁 의지
를 기리고자 함이다.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장면 가옥 등록문화재 필증

▲  장면의 흉상(胸像)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진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으로 사랑
채(56.2㎡),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
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클 줄 알았더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썩은 내가 진동
하는 권력층과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
대를 누볐던 자유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급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아파트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고,
좌측 기둥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혹 문
을 두드리면(초인종은 없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해 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왼쪽,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
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
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을
했으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
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
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며, 우익의 일
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
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 을(乙)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
국 맨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고,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득
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러났
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 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이나 대통령을 해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야망이 쓸데없이 컸던 이기붕이 부통
령 후보로 나섰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
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최
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해 정권교체의 기
회를 잃었으며 장면은 또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
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
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허나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욕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했고, 그렇게 1년을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모두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
葬)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장면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
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
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사망하고 12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억지로 나왔고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
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선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
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자리해 있고, 안방 북쪽에
는 부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으며, 2013
년 4월 19일 금지된 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어 신발
을 벗고 그것으로 갈아신으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
을 아련히 알려준다.


▲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
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그러니 눈여겨 보기 바란다.(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대한민국 최
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 (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반대한 쓰레기들은 주로 공산주의 국가임)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담겨져 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선사한 훈장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선물로 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1960년대 초까지 단기를 많이 썼음)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진품임)
 
2년 동안 주미 대사를 지냈을 때 이용했던 타
 자기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
 에는 정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뛰었다.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진품)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진품)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서 위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았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어째 안될까?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
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이제는 그 껍데기만
남은 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녔던 동그란 도시락통 (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와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 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숙면을 인도해
주었다. 국정(國政)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의 가족 사진

▲  안채 뒤쪽에 자리한 비좁은 수행원동

▲ 수수하게 보이는 안채 뒤쪽


▲  눈으로 햐얀 지붕을 이루고 있는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
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
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
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 (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 (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을 받아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했다. 이에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
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범인(凡人)은 감히 따라하기 어려운 그 넓은 마음을 말이다. 물론 정
치적인 다른 이유도 조금은 섞여 있겠지. (자세한 것은 당사자만 알 뿐임)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 (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 (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 (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장면이 서거한지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장면 가옥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대학로를 따라 2분 정도 걸으면 혜화동로터리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우체국을 끼고 북쪽으로 난 2차선 도로(혜화로)를 3분 정
  도 가면 길 왼쪽에 장면 가옥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혜화초교에서 내리면 길 건너로 장면 가옥이 보인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까지) /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장면박사 기념관 ☎ 070-8239-
  1063)
* 장면박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명륜동 구석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골목길(성균관로17길)을 들어서면 북묘 하마
비와 함께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한다.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데이터가 없던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그의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
서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았으며 왕실의 사찰로 번영을 누렸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탱화들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
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
에 도중에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뻐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1883년 이곳에 그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허접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주요 인물로 촉(촉한)을 세운 유비
(劉備)의 의제이자 부하이다. 유비(劉備), 장비와 돈독한 의형제의 의리를 보이며 대륙을 누
빈 장수로 무예도 뛰어나고 머리도 좀 있었으나 워낙 교만한 성격 탓에 219년 조조와 손권의
공격에 크게 털려 형주(荊州) 지역을 말아먹고 끝내 손권(孫權)에게 잡혀 처단되었다. 그때
관우 사냥에 나섰던 장수는 조조 수하로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던 조인, 서황과 뛰어난 전략가
인 손권의 부하 육손, 여몽이었다.

손권은 유비의 창끝을 돌리고자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으나 관우에게 호감이 있던 조조는
오히려 크게 은혜를 베풀어 관우의 묘와 사당을 지어주었다. 이후 관우 신앙이 백성들 사이에
서 싹트기 시작했고 그게 들불처럼 쓸데없이 번져나가 문(文)에 공자(孔子), 무(武)에 관우라
고 할 정도로 대륙의 대표 민간신앙으로 흥하게 된다.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구하자 명은 수
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 관우 열성 신자가 많
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蔚山城) 전투
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쉬고 있었다. 그
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
며 금 4,000냥을 보내와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이 국립 관우 사당 1
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83년에 지어진 북묘는 그 이듬해(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
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은 왜
군과 협조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
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
과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쳤고, 그들과
작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장교 7명과 왕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
씨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우니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
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
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
광학교(東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
서 넘어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
었으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 동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서울 장안동에 있
음)도 그 자리의 일부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
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과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닥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
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
시에서 관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세워져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더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
(曾朱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얼마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
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서울과학고 교정에 '금고일반(今
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골로 간 이후, 증주벽립 드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렸
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다. 특히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
렸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참으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
설처럼 사라지고 글씨가 깃든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
도 정말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
하게 자행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
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불의(不義)가 판치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지도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 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을 갈았다.


▲  증주벽립 바위글씨의 위엄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로 1607년 충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바로 때려치웠으며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
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
게 도망쳤으며, 결국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보기좋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
나라 조정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 이른바 북벌(北伐)을
도왔으나 아쉽게도 1659년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
題)가 발생하자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
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
(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
나 좌의정(左議政) 허적(許積)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허나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
했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
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
면서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며, 1683년
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
과 감정 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 패거리
로 분열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
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
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 등
참으로 많은 곳에 서식지를 짓고 살았다. 개다가 유교(성리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
자가 쓸데없이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
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
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
언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개미친 유언을 남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
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에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
준으로 커진 탓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
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적
지 않은 세금을 축내며 제사를 지내니 참으로 할말을 잃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백제와
부여국(夫餘國) 관계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 사람이라는 설이 있긴 함, 그의 어머니도 고려 출신이라는 설이
있음>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
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주구장창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 우리의 옛 속방인 왜국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밀리기 시작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
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제삿밥도 아까운 조상들이 많아서
후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님)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
재라 감히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 북묘 하마비, 우암 송시열 집터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민생활관 정류장에서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서쪽 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쪽으로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서울과학고에서 바라본 명륜동 증주벽립(송시열집터) 방향
정면에 보이는 주택가 속에 증주벽립이 숨어있다. 이 일대에 흥덕사와 송시열 집,
북묘 등이 있었고, 도심 경승지로 앵두꽃이 유명했다고 하니 정말 상전벽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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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2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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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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