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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 2013.05.30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산사, 북한산 본원정사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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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산사, 북한산 본원정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목 보살좌상)


매년 5월마다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
키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 밑에서 안길만한 절집을 물색해 보았다. 나는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정문화유산을 품은 100년 이상 묵은 절집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조건에 맞는 고찰 태반을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지배층이 서민을 쥐어짜듯 없는 거 열심히 쥐어짜고 흔들어보니 집에서 가까운 수유리
의 본원정사가 걸려든다. 이 절은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발걸음은 아직이다. 역사는 짧지
만 지방문화재인 지장보살상도 있고 집에서도 가깝고 해서 그곳을 찾기로 했지. 그래서 순례(
巡禮)를 가장한 이번 초파일 나들이는 본원정사를 시작으로 정릉에 있는 경국사(慶國寺)와 우
이동 도선사(道詵寺)를 돌기로 하고 12시 반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본원정사까지는 10리 미만의 거리이고 무척이나 가까워 보이지만 바로 가는 차편이 없
어 체감거리는 길다. 우리 동네에서 1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동아아파트에서 1161번 버스로
환승하여 우이동에서 다시 151번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에서 내린다. 소요시간은 기다리
는 시간을 포함해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여기서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삼각산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초파일 분위기로 한참 들떠있는 본원정사가 자리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는 국립재활원
과 영어 사대주의의 아주 몹쓸 현장인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가 있으며 우리나라 도보 여행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도 잠시 마주친다.


▲  본원정사로 가는 길 (자비정사 부근)
고운 빛깔의 연등이 물결을 이루며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러 온 중생들을 인도한다.

▲  삼각산로 끝에 자리한 본원정사
본원정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해 정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지장보살상을 후광으로 삼아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는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연등의 물결이 출렁이는 대적광전 뜨락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냉골에 둥지를 튼 본원정사는 화계사(華溪寺)와 4.19국립묘지 중간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저 조그만 절인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었다. 속인(俗人)들의 주거지와 북한산의 푸른 숲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해 있
지만 숲이 절의 상당수를 둘러싸고 있어 산사(山寺)의 멋은 그런데로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왜정(倭政) 초기에 손덕선(孫德善)이 창건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청암(淸庵)을 스승으로 받들며 수행을 했다고 하며,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절을 지
었다. 처음 이름은 도성암(道成庵)이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말부터 도성암이란 암
자가 있었다고 하며, 왕년에는 도선사보다 신도가 더 많았다고 전한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도성암을 손덕선이 중창을 한 셈이 되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
어 확인은 어렵다. 아마도 100년도 안되는 짧은 법등(法燈)을 좀 만회하고자 지어낸 것이 아닐
까 싶다.

손덕선은 여기서 50여 년을 머물다가 1973년에 입적했다. 6.25전쟁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
에 있던 태고사(太古寺)가 잿더미가 되자 그곳의 지장보살상(목보살좌상)을 업어와 중심 불상으
로 삼고 열심히 절을 꾸렸다. 허나 인근의 도선사와 화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상황은 좋지
못했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거의 문닫기 직전까지 흐르다가 1980년대 초반 원성이 주지가 되면
서 절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법당에 봉안된 지장보살의 본원(本願)을 따르고자 본원정사로 절의 이름을 갈아 이미지 변
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을 건립했는데, 그만
1996년 5월 22일 불의의 방화사건으로 애써 지은 대웅전과 나한전이 그만 전소되고 말았다. 이
때 가까운 삼성암(三聖庵)과 화계사에도 연쇄방화사건이 터져 나란히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에
모두 불을 지른 한심한 자는 기독교 광신도였다.
이후 1999년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2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워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약사
전과 나한전, 삼성각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적당한 크기의 경내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삼성각, 약사전, 나한전 등 7~8동의 건물
이 있으며, 대적광전 1층은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쓰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목보살좌상이 있
는데, 이곳에 유일한 보물이다. 비록 본원정사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든든한 후광(後
光)이자 밥줄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본원정사도 없었을 것이요. 내가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
았을 것이다.
그런 목보살좌상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는 현대 사찰이지만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자
리한 산사로 시내와도 가까워 적은 발품으로도 언제든 편히 찾을 수 있다. 또한 북한산 둘레길
의 동쪽 구간이 부근을 지나므로 둘레길 탐방 때 잠시 다리를 쉬어갈 만 하다.

※ 본원정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본원정사 종점 하차, 종점
  에서 2분만 걸으면 바로 본원정사이다.
* 지하철 4호선 미아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이나 미아3거리역(3/5번 출구)에서 151번 시
  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서울영어마을수유캠프)입구에서 하차 삼각산로를 따라 도보 12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인수동) 산125 (☎ 02-902-7337)


▲  본원정사 삼성각(三聖閣)

본원정사에 들어서니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무지 많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그에 비해 이곳 후
속으로 간 고려 후기 고찰, 경국사는 한산해 크게 대조를 보였지.
사람들은 대적광전과 명부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었는데, 그 혼잡함을 피하고자 제일 윗쪽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경내 변두리라
인적은 별로 없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9년 이후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토속신으
로 불교의 일원이 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창건주인 손
덕선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다.


▲  경내에서 삼성각으로 가는 길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이 요즘 장사가 안되서 며칠 밥을 안준 것일까? 호랑이의 인상이 꽤나 날카롭다.
너무 인상을 써서 주름선이 강하게 생겼을 정도. 그에 비해 산신의 표정은 여유롭다.
중생들이 초파일이라고 상다리 아작날 정도로 제물을 올렸으니 그 제물로
호랑이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

▲  독성(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  칠성이 그려진 칠성탱

   ◀  삼성각 우측에 자리한 조그만 공간
중생들이 놓고간 조그만 불상과 동자상, 나한상
등이 그들만의 조촐한 법당을 이루고 있다. 다
들 동전과 지폐를 하나씩 쥐어들며 초파일 고수
익의 기쁨을 누린다. 너무 재물을 밝히는 것도
절집의 도리가 아닌데.. 그 돈으로 가난한 중생
이나 도왔으면 좋으련만..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농작물이 무럭무럭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비닐하우스 너머로 연등으로 장식된
대적광전 주변과 나한전의 머리가 보이고 산 너머로 강북구 수유동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속세와 비슷한 높이라 조망은 그리 좋지 않다.

▲  약사전 앞에 놓인 5층석탑과 샘물을 제공하는 문수동자상

5층석탑은 1980년대에 만든 것으로 이곳의 유일한 석탑이다. 법당인 대적광전 앞이 아닌 약사전
앞에 바닥돌도 없이 둔 것이 이상한데, 아마도 기존의 대웅전과 나한전이 몰지각한 자에 의해
불에 타면서 임시로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석탑 옆에는 하얀 피부의 문수동자상이 물병을 쥐어들고 조그만 석조(石槽)에 물을 붓고 있는데,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그 작은 병에 도대체 얼마큼의 물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렇다
고 물을 더 나오게 하려고 물병을 쑤시거나 부시진 말자, 그러면 물은 안나온다. 마치 이 땅의
흔한 쌀바위의 전설처럼 말이다.


▲  거대한 유리온실 같은 약사전(藥師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기와를 얹힌 불전(佛殿)이 아닌 유리를 씌운 건물이다. 유리
온실 불전은 거의 처음 보는 터라 기와집 불전에 익숙해진 두 눈이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건물은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
처이다. 원래는 건물도 없이 불상만 있던 야외 법당이었으나 날씨와 온갖 외부 위협으로부터 불
상을 보호하고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해 건물을 구상했는데, 기와집으로 짓기에는 불상이 허벌나
게 크고 소요 예산도 적지 않아 생각 끝에 유리 건물로 짓게 되었다.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의 위엄
서울에서 가장 큰 약사여래불로 지장보살상과 더불어 이 절을 먹여살리는 밥줄이다.
길고 가늘게 뜬 눈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의 눈초리와 좀 비슷해 보인다.


♠  본원정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주변

▲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대신하는 오리연중(五里蓮中)의 현장인가?
연등 속에 몸을 가린 대적광전이 안개에 가려진 산봉우리 같다.

본원정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종무소(宗
務所)와 요사(寮舍), 공양간으로 쓰이고, 2층만 대적광전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자리에는 원래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허나 1996년 5월 22일 기독교 광신도의 불장난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주지 원성이 신도들의 시주에 힘입어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일대를 한데 묶어 지금의
대적광전을 지었는데, 옛 대웅전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2층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삼았으며, 건물 북/서/동쪽 벽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팔상도(八相圖), 신선도(神仙圖) 등을 그려 벽의 공백을 메웠다.


▲  대적광전 앞에 준비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적광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
灌頂臺)에 우뚝 서며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 바가지에 물을 담고 그에 머리
에 물을 껴얹는 관불의식<관정(灌頂)의식>을 행하는데, 때를 모르고 찾아온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이 무성한 날이라 그의 피서 현장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권하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번 해봐
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래서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그를 강제로 냉수마찰을 시켜준다. 물
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오늘이 지나면 그는 어두컴컴
한 창고에 들어가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
喜悅)이 대단할 수 밖에..


▲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적광전 내부

연병장처럼 넓은 대적광전 안에는 덩치가 큰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 석
가불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을 입상(立像)으로 배치해 불단(佛壇)을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니까 3불과 4보살상이
불단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 대신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한가득 두어
중생의 시주로 안치한 작은 관음보살을 원불(願佛)로 봉안했는데, 죄다 금동불(金銅佛)이라 일
제히 금빛을 쏟아내니 가히 두 눈이 흔들릴 지경이다.


▲  마애3존상

대적광전과 약사전으로 오르는 계단 서쪽에는 마애3존상이 자리해 있다. 이 마애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磨崖佛)이자 마애불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충남 서산 마애3존불을 그대로 본
떠서 만든 것으로 '山'처럼 솟은 돌에 돋음새김으로 조성했다.
이들은 1999년 이후에 만든 것으로 그들의 안식처인 돌은 흐린 때가 많이 끼어있는데 반해 본존
불(本尊佛)은 얼굴을 제외하면 죄다 피부가 깨끗해 대조를 보인다. 아직은 파릇파릇한 새 불상
이지만 100년 정도 지나면 저들도 지정문화재의 명예직을 받을 것이다.


▲  연등 구름에 지붕이 가려진 나한전(羅漢殿)

대적광전 맞은편에 자리한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적광전
자리에 있었으나 1996년 5월 방화사건으로 대웅전과 함께 쓰러지는 비운을 겪는다.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대적광전이 완성되자 그 맞은편에 지금의 나한전을 지어 옛
나한전의 뒤를 이었으며, 석가3존불을 중심에 두고, 제일 앞줄에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을
그 뒤로 500나한(羅漢)을 빼곡히 봉안했다.


▲  나한전 중앙에 봉안된 석가3존불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  나한전을 가득 메운 16나한과 500나한의 위엄
우리나라 4,800만 인구만큼이나 얼굴과 머리 스타일, 옷차림,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다.
특히 다른 곳의 나한과 달리 조금씩 색을 달리하고 있어 색채가 매우 컬러풀
(colorful)한데 이들은 주지 원성이 직접 색을 입힌 것이다.

▲  16나한 할배들 - 그들의 조촐한 경로당 같다.

▲  대적광전 뜨락
흑백 연등과 칼라 연등이 거대한 구름으로 피어올라 파란 하늘을 지운다.
그들은 또다른 하늘과 땅을 이루며(연등 아래는 땅, 위는 하늘)
초파일의 분위기를 진하게 수식한다.


♠  본원정사의 보물이 봉안된 명부전

▲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 뜨락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특별하게 푸른 기와를 입혔으며,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6.25시절 산 너머 태고사에서 업어온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그 덕분에 어
엿하게 지정문화재를 하나 보유하게 되어 전통사찰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품게 되었다.

1996년 5월 방화사건 때 명부전에도 화마(火魔)의 손길이 갔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면했다. 그
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지장보살상까지 유린을 당할 뻔했던 아찔한 현장으로 건물 왼쪽 합각
부분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조금 남아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명부전 앞에는 넓게 마루를 두어 중생들에게 조촐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건물 옆에는 의자
와 음료수 자판기를 두었다.


▲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이 봉안된 불단과 닫집)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목 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36호

명부전 불단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유물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앉아있다. 나
를 여기로 소환한 장본인으로 그가 없었다면 이곳에 굳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불상은 원래 북한산성 안에 있는 태고사(太古寺)에 있었다고 한다. 그 절은 고려 후기 고승
(高僧)인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세운 유서 깊은 곳으로 그의 승탑(僧塔)과 탑비가 굵직하
게 남아있는데, 그의 일대기가 적힌 원증국사탑비는 보물 611호, 그의 사리가 담긴 원증국사탑
보물 749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고사의 내력이나 관련 자료에는 본원정사로 넘어온 지장보살상에 대한 언
급이 전혀 없고 단지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본원정사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정말 거기서 넘어
온 것인지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다른 절집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 북한산 태고사 글 보러가기)

▲  지장보살 좌우로 색채가 고운 저승의 10왕과 그들을 담은 시왕탱(十王幀)이
명부전 내부를 마치 저승의 심판 현장처럼 장엄하게 수식한다.


나무로 만들어 금빛 도금을 입힌 지장보살상은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 후기 불상
이다. 머리는 지장보살답게 푸른 색의 승려 머리를 취하고 있고 이마는 무척 넓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길고 가늘게 뜬 눈초리가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의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이며, 코와 입 사이에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얼굴이 좀 넓고 표정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극락에 못간 중생들의 민원에 귀를
기울인다. 몸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가슴 가운데 부분을 노출시켰으며, 옷주름은 자
연스러운 모습으로 온몸을 감싸 아래로 흐른다. 특히 오른쪽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팔
에 걸쳐져 있다가 밑에 입은 옷 속으로 끼워져 있으며, 두 손은 불에 타서 망가진 것을 다시 만
든 것이다. 아마도 6.25때 상처를 입은 듯 하다.

불상의 형태와 옷자락의 표현, 양감표현, 목조 재질이나 다듬은 수법, 복장(腹臟)유물을 넣었던
구멍을 막은 기법에서 1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
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본원정사 목보살좌상'임>

불상 좌우에는 조그만 모습의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고, 그들 뒤에
는 지장시왕탱이 약간은 빛바랜 모습으로 있는데, 이들은 근래에 그려진 것으로 이곳에서는 목
보살좌상을 빼면 고색의 때는 전혀 없다.


▲  본원정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에 절에 왔으니 흔쾌히 절밥을 먹어야 되겠지. 그것이 바로 초파일 절 나들이의 주요 즐
거움이다. 공양은 대적광전 1층 공양간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방이 꽤 넓다. 그 방에는
공양에 임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본원정사에 있는 사람의 절반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공양밥을 주는 장소로 가니 여러 나물이 담겨진 큰 그릇을 준다. 그 그릇에 자기가 먹을 분량의
밥과 고추장을 담고 미역냉국과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하얀 피부의 떡을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절 공양밥이 다 그렇듯이 여기도 비빔밥이다. 콩나물과 시금치, 무채 등의 나물과 밥, 고추장을
잘 비벼 먹으면 되는데, 시장기가 너무 강하다보니 밥을 다른 사람의 2배 이상 담아가지고 왔다.
허나 그에 비해 고추장을 적게 가져와 완벽한 비빔밥을 구가하지 못하고 대충 있는 데로 비벼
먹었다. 허나 밥을 많이 가져와서 그런지 아무리 숟가락질을 해도 밥이 줄지 않는다. 이거 무슨
마법의 밥그릇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섭취를 하니 그릇은 이내 맨바닥을 드러낸다. 미역냉국은 맛이 시원하여 1그릇을
더 먹었고, 커 보이던 하얀 떡도 주섬주섬 먹고 보니 이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외에 커
피나 음료수는 연등 접수 장소에서 따로 돈을 주고 마셔야 되는데 종이컵 커피를 무려 2,000원
씩이나 받는다. 차라리 길다방 커피나 마트/편의점의 캔커피를 사마시는 것이 속편하겠다.

작지만 그런데로 볼거리가 있는 본원정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절집이 조촐하고 역사도 짧
아서 10분이면 다 보고 나올 분량이지만 목보살좌상을 비롯해 경내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공양까
지 겸하니 많은 시간이 금세 흘러간 것이다.

이렇게 잠시나마 정들었던 본원정사를 뒤로하며, 도심 속의 조그만 산사, 본원정사 답사를 마무
리하고 정릉동에 있는 경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내용은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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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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