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2. 2012.12.18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1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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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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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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