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2. 2019.07.16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3. 2014.07.11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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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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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 경북 영주, 봉화 나들이 (오전약수터, 석천계곡) '

▲  오전약수터

▲  석천계곡

▲  석천정사


 

 

여름 제국의 한복판인 7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몸에 좋은 탄산약수와 시원한 계곡
생각이 간절하여 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고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내려가는데, 죽령(竹嶺) 이전까지만 해도 장마의 기운이 여전했으나 죽령을 지나
면서부터 차창 밖은 완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단지 고개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중
부 지방에서 남부로 지역이 지역이 바뀌었고 장마가 죽령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남은 벌
써부터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영주역에 도착해 두 발을 내리니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
다. 장마로 조금은 선선한 서울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에는 좀 난감했지.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벗삼아 컵라면과 삼각깁밥 등으로 조촐하
게 이른 점심을 때우며 더위에 흥분한 몸을 달랬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편의점을 나와 무더위를 뚫고 영주여객 종점으로 이동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휴천동 주택가를 기웃거렸다.


 

 

♠  이 땅에 흔치 않은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 현장
영주 휴천동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 -
경북 지방기념물 24호

휴천동(休川洞) 주택가 속 조그만 공원에는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과 선돌(입석) 형제이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이들은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허전한 돌이 여럿 자리해 있어 고
인돌이 더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고인돌과 선돌은 학창시절 교과서부터 요란하게 등장하는 존재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대
표적인 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역과 마을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 선돌은 세력이나 마을
간의 경계 표시나 기념비,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선돌이 나중에 장승
으로 변했다고 함)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遼東), 만주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우리 역
사의 특허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돌 분포지를 옛 조선의 영역으로 보기도 함)
이렇게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널려있지만 정작 그들이 같이 있는 현장은 매우 희귀한데, 이곳
휴천동 유적은 바로 그 흔치 않은 두 존재의 흥미로운 공존 현장이다.

2그루의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드러누워 여름 제국을 잊고 사는 이들 고인돌은 조
그만 돌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넓직한 뚜껑돌을 올렸는데, 아직 학술조사를 벌이지 않아
땅 속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을 주름잡던 고인돌 주인의 시신이 담긴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인돌 곁에 서 있는 선돌은 남자 성인 키의 절반 정도의 높이
로 예전에는 치성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고인돌 형제

▲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선돌

오랜 세월을 탄 고인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선돌도 비슷하나 남쪽 면은 제법 하얗다. 이
곳은 무려 20여 년 전에 와본 인연이 있는데, 보호 난간과 공원이 조성된 것 외에는 고인돌과
선돌 자체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많이 변해 버렸지. (그때는 파릇파
릇했던 10대 시절, 지금은 그저 눈물만 ㅠㅠ)
고인돌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일군 조그만 텃밭도 있어 도심
속의 소소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휴식처는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선돌 형제가 시민
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진작에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693-1,-2


 

휴천동 지석/입석을 오랜만에 인연 짓고 영주여객 종점(영주시내버스 차고지)으로 이동해 봉
화(奉化)로 가는 영주좌석버스 33번을 탔다. 날씨도 허벌나게 무덥고 가격도 비싼 좌석버스이
건만 무정하게도 냉방을 틀지 않아 창문을 열어 자연산 바람에 의지해 더위를 쫓았다. 
영주시내와 봉화읍내는 30리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 약 30분 만에 봉화읍내에 진입, 읍내 한복
판에 자리한 봉화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봉화터미널로 들어가 그날의 주메뉴인 오전약수터행 시간표를 확인하니 40분 뒤에 차가 있다.
하여 그 시간을 억지로 죽이다가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로 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북쪽
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2차선 도로를 쌩쌩 질주하며, 석천계곡과 북지리 마애여래
좌상, 계서당(溪西堂) 입구를 지나 어느새 물야(物野)에 이른다.
물야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나와 운전사 둘만 남은 상태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북쪽
으로 더 들어가니 물야저수지가 물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그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그 호수를 지나 2분 정도 더 가니 오전약수터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북쪽 가게에서 버스는
심장 소리를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오전약수탕 종점이다.


 

 

♠  탄산 약수의 정석, 봉화 오전약수(梧田藥水)터 <오전약수관광지>

▲  오전약수터 주차장에 세워진 오전약수관광지 표석

선달산(先達山, 1,236m) 동남쪽 자락 450m 고지에 자리한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는 일반적인
약수와 달리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藥水)이다. 이런 약수는 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춘천, 양구, 인제, 평창, 홍천, 정선)과 경북 산간지대(봉화,
청송)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교통이 불편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있다.

오전약수터의 오전은 점심 이전의 오전(午前)이 아니라 쑥밭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 성종(成
宗) 때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보부상은 서벽장과 오전리 후평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산을 넘다가 너무 피곤하여 쑥밭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만병통치(
萬病通治)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약수가 솟는 것이 아닌가. 그
약수가 바로 오전약수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추천하게 했는데, 오전약수가 그 으뜸으로 뽑
혔다고 전한다.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중종(中宗) 시절에는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즐겨 찾았으며, 그가 남긴 4편의
약수터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남 북부 제일의 약수터로 오랜 인기를 누렸으며, 탄산과 철분이 강해 피부병과 위장병에 아
주 좋다고 전한다. 이런 약수는 사이다처럼 톡쏘는 맛이 나고, 맛이 일반 약수보다 쓴 편으로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거의 사이다가 된다.
약수의 성분은 탄산과 철분이 거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며, 마그네슘이 1/3정도 된다. 그래서
약수터 주변이 온통 시뻘겋다. 또한 이런 물로 몸을 씻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약수터 부근
에 목욕탕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탕을 약수탕(藥水湯)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오전약
수탕이라 부름) 

오전약수 같은 탄산/철분 약수는 일반 약수와 맛이 틀리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약수
를 가장 기피하여 입에 대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런 약수로 지은 밥은 밥이 파랗게 물이 오르
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았다. 물은 싫었지만 그 물로 지은 밥은 좋았던 것
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에 탄산약수의 하나인 설악산 오색약수(五色藥水)를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약수터가 마르도록 본전을 뽑았다. 소시(少時)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물맛이 이제
는 달콤한 물맛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몸에 좋다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지, 맛은 좀 쓰지만
몸에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제 슬슬 몸을 생각할 나이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런 약수를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전약수를 찾게 된 것이다.

약수터에는 거북이 석상이 물을 졸졸 내뱉고 있는데, 몇 바가지를 마셨는지 모른다. 위장병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나 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하던 뱃속이 조
용해진 거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오전약수터(왼쪽 6각형 정자)와 보부상 석상

▲  탄산 약수의 정석, 오전약수터

오전약수탕 종점에서 무성한 숲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6각형 정자에 자리한 오전약수터가 활
짝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들어가야 나올 것 같은 신비의 약수가 싱겁게 나와버려 이게 정
말 오전이 맞나? 오후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오전은 맞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약수터 주변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물을 이
용하여 닭백숙을 내놓고 있다. 탄산 약수로 고아 만든 닭백숙은 맛도 일품이고, 몸에도 좋다
고 하여 이곳의 든든한 별미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혼자 온 탓에 백숙은 먹지 않았다.

식당은 대부분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평일이라 다들 한산하다. 약수터도 덩달아 한산하여 혼
자 거의 전세를 내다싶이하여 물을 섭취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 약수터를 집으로 가져와 혼자
두고두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권한과 힘은 나에게 없었다. 선달산 산신령을 뇌물을 구워삶아
약수터를 내게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산신령이 약을 빨지 않는 이상은 이곳의 꿀인 약수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전약수터는 바로 이곳에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다른 데로 가면
죽은 약수가 된다.

오전약수터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많은 식당과 민박집이 생겨났으며, 약
수터 동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약수탕이 조성되어있고, 북쪽에는 근래에 인공폭포와 조그
만 공원을 닦았다. 또한 도보길 유행붐을 타고 봉화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외씨버선길이 이
곳을 지나간다.
인공폭포와 공원은 약수터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조성한 것 같은데
, 솔직히 오전약수와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약수터에는 샘터과 계곡, 적당한 양의 편
의 시설(식당, 숙박업소)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며 이런 어설픈 것까지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99-5, 1212 (오전약수탕길 18-24, 문수로 1601)


▲  오전약수터 옆을 흐르는 오전계곡 (내성천 상류)

▲  오전약수터 북쪽에 조성된 인공폭포
인공폭포 위쪽에는 넓게 공원을 조성하여 정자와 연못, 공연장을 두었다.


오전약수터와 인공폭포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종점으로 나갔다. 외
씨버선길을 타고 두내약수탕(두내약수터)으로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 그건 포기
했다. 하여 일단 읍내로 나가면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
이 갈대라 이내 변심하여 예전에 갔던 석천계곡(석천정사)으로 메뉴를 바꿨다. 한여름에는 뭐
니뭐니해도 계곡과 바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봉화읍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석천계곡 입구이자 읍내 직전인 삼계에서 내렸다. 계곡으
로 들어가려던 찰라에 문득 마을 쪽에서 오래된 기와집 하나가 크게 눈빛을 보낸다. 하여 그
눈빛에 일부러 홀리며 가보니 삼계서원이란 오래된 서원이다.


▲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417호

석천계곡 입구 북쪽에 자리한 삼계서원은 석천계곡과 닭실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
~1548)을 배향한 서원이다.
1588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우옹(金宇顒)이 권벌을 기리고자 석천계곡 입구에 조촐하게 세
웠는데, 1601년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건물 이름을 지어주었고, 1660년 삼계란 사액(賜額)
을 받아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 큰 서원 정리 사업으로 사당과 환성문(喚惺門), 관물루(
觀物樓)가 철거되었으며, 1951년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을미의병(乙未義兵)이 한참 일어
나던 1895년 안동 유림들이 권세현(權世賢)을 의병(義兵) 대장으로 추대하며 격문(檄文)을 작
성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의 구조는 앞에 공부를 하는 강당(講堂)을 두고 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태로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2층 누각인 관물루가 서원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칸
에 문을 두어 환성문이라 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환성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해 있는데,
서원 철폐 당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서 고색
의 기운이 진하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고, 서재 좌측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이 있으며, 동재 옆에는 1906년 사림(士林)에서 세운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서원 주위로 돌담을 길게 둘렀는데,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고 푸근한 모습이다. 서원
서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나 어차
피 밖에서도 사당을 제외하고 보일 것은 다 보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기도 귀찮
고,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석천계곡에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생기마1길 24)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  1906년에 세워진 권벌 신도비(神道碑)


 

 

♠  봉화 제일의 경승지, 석천계곡(石泉溪谷) - 명승 60호

▲  석천계곡 입구

삼계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석천계곡으로 이동했다. 이 계곡은 봉화 제일의 경
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봉화의 꿀단지로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도 아니고 그
날이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한적한 것이 더 좋
지, 덕분에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참 아늑하고 마음 편하게 둘러보았다.

석천계곡은 가계천(駕溪川)의 일부로 닭실마을<달실, 유곡(酉谷)마을>에서 내성천(乃城川)이
합류하는 삼계교까지 약 1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권벌이 터를 다지고 그의 큰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석천정)가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기암괴석,
계류(溪流)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예로부터 봉화 으뜸의 경승지로 찬양이 대단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한 닭실은 권벌이 개척한 곳으로(또는 권벌의 조상이 1380년대에 개척했다고
함)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1520년 집을 짓고 닭
실을 일구었다.
지금은 석천계곡이 자연/답사 탐방로가 되었지만 읍내에서 계곡 남쪽에 신작로(다덕로)를 내
기 이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는 이 계곡을 거쳐서 갔다.

석천계곡과 닭실 일대는 '내성유곡 권충재(乃城酉谷 權沖齋) 관계 유적'이라 하여 사적 및 명
승 3호
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명승에 통합되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석천계곡 하류 (주차장 남쪽)
멋드러진 풍경에 계곡 수심까지 얕은 편이라 피서의 성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석천계곡 (석천정사로 가는 계곡길)

석천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계곡길이 나온다. 길이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
만 너무 깔끔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포장길보다는 운치가 있고 정겹다. 길도 오로지 계곡길
뿐이라 두 다리에 의지하여 갈 수 밖에 없는데, 송림(松林)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계
곡에는 온갖 바위가 계류의 희롱을 즐긴다.


▲  청하동천(靑霞洞天) 바위글씨

석천계곡 주차장과 석천정사 중간 정도에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중간 도
리에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청하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청하동천은 석천계곡의 다른 이름으로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만큼 이곳이 신선(神仙) 세계와 가까울 정도
로 경승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동천(洞天)은 빼어난 경승지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
름으로 아무 명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이 바위글씨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權斗應, 1645~1732)이 쓴 것으로 그의 호는 대졸자(大
拙子)이다. 여기서 대졸자는 요즘 흔한 대졸자가 아니라 크게 어리석은 작자라는 뜻으로 자신
을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호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가 살던 시절에 석천계곡의 명성
을 듣고 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다
고 한다.
그래서 권두옹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여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를 쫓아내니 이
후 계곡에 평화가 찾아와 유생들의 공부가 더 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한 토막 전해
온다.
과연 도깨비가 이곳까지 놀러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도깨비도 흥분시킬만큼 이곳이 대단한 경승
지임을 강조하고자 적당하게 지어낸 설화라 하겠다.


▲  청하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구렁이가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필체이다.

▲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소나무 숲길

▲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장차 석천계곡의
중심을 꿈꾸는 돌탑 무리들

▲  싱그러운 석천계곡 (청하동천 바위글씨와 석천정사 중간 지점)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정(石泉亭)>

▲  석천계곡의 백미(白眉) 석천정사(석천정)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계곡 건너에 자리한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
러낸다. 석천정은 석천계곡의 상징이자 이 계곡에서 가장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권벌이 1526
년에 세우려고 축대까지 쌓았으나 거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대신 청암정을 지었다. 이후 축대
만 남은 이곳을 큰아들 권동보가 춘양목(春陽木)으로 산뜻하게 집을 지었다. 그의 후손과 지
역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배움터이기도 했으며,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계곡 동쪽에 돌로 석축을 단단히 다지고 돌담을 두룬 다음 팔작지붕의 석천정을 세워 계곡을
바라보게 했고, 그 옆구리에 익랑(翼廊)을 덧붙여 공간을 넓혔으며, 담장 양쪽에 외부로 나가
는 문을 내고, 북쪽 문 옆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을 두었다.

계곡길에서 석천정을 가려면 계류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물살의 패기가 조
금 있을 뿐, 수심이 얕아서 폭우로 계곡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누구든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
다.


▲  석천정으로 인도하는 외나무다리 (다리 건너의 기와집은
석천정의 딸린 건물로 관리인이 머물고 있음)

▲  외나무다리와 무성한 숲을 이룬 계곡 상류

▲  서쪽에서 바라본 석천정의 위엄


▲  석천정에서 바라본 계곡

▲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주차장 방향)
이곳은 계곡이 굽이치는 곳이라 물살이 제법 급하다.

▲  석천계곡 상류 방면 (닭실 방향)

석천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바깥에서도 왠만한 것은 다 보
이니 굳이 홍길동을 따라하며 월담을 할 필요는 없다. 예전 석천계곡에 왔을 때도 딱 여기까
지만 갔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조용히 난 샛길을 따라가면 권벌의 후손이 사는 닭실마을이 나온다. 기왕 석
천계곡에 발을 들였다면 샛길을 쭉 따라가 닭실까지 모두 살펴보기 바란다. 닭실과 석천계곡
은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글 분량상 닭실마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석천정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충재길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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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6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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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작품 ~ 예천 회룡포 (내성천, 회룡포마을, 비룡산, 장안사)

 

' 자연이 빚은 대작품 ~ 예천 회룡포(回龍浦) '

▲  회룡포

 


가을이 저물고 겨울 제국이 서서히 용솟음치던 11월 끝 무렵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아
침 10시에 예천읍내 남쪽에 있는 개심사지(開心寺址) 5층석탑에서 머나먼 남쪽에서 온 일행들
과 만나 개심사지5층석탑과 초간정(草澗亭). 용문사(龍門寺)를 둘러보고 회룡포입구인 용궁으
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용궁(龍宮)은 예천읍과 점촌(문경) 사이에 자리한 고을로 예전에는 독자적인 고을이었으나 지
금은 예천군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이곳은 순대국과 한우고기로 매우 유명한데 우리는
한우구이와 전골을 먹었다. 한우구이는 불판에 야들야들 구워서 상추에 쌈을 싸서 먹거나, 참
기름에 찍어서 먹는데, 입과 목구멍이 간만에 좋은 거 먹는다고 아주 흥분들을 한다. 단 조금
질긴 것이 흠, 거기에 밥이 있으면 정말 밥도둑이 따로 없을텐데, 밥은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를 않다가 전골(채소와 된장 등이 버무려진 전골)이 등장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상당수는 한우구이로 이미 배가 다져진 상태라 그들의 밥을 지원받으며 전골과 밥그릇을 말끔
히 비웠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회룡포로 이동했다. 용궁에서 회룡포는 동남쪽
으로 약 7km로 향석리에서 내성천(乃城川)에 걸린 회룡교를 건너 그 길의 끝에 이르면 회룡포
주차장인데, 여기에 수레를 세우고 다시 내성천을 건너면 그 유명한 회룡포 심장부에 발을 들
이게 된다.


▲  회룡포와 속세를 가르는 내성천, 그 위에 걸쳐진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이다.


♠  대자연이 빚은 거룩한 작품, 예천 회룡포(回龍浦) - 명승 16호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예천 굴지의 명소로 성장한 회룡포는 대자연이 장대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이다. 어떻게 저
런 작품이 나왔을까?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대자연의 거룩
한 작품 앞에 경외심이 크게 용솟음 치고,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도 싹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만들지는 못하며, 대자연의 작품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자로 이러쿵 저러쿵 표현한다는 것이 어쩌면 큰 실례일지도 모른다.

육지 속의 섬이자 벽지로 불리는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내성천이 휘감아 흐르는 길목
으로 내성천과 낙동강(落東江) 상류에서 많이 나타나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백미(白眉)
와 같은 곳이다. 각박한 속세살이를 상징하듯 구불구불 흘러가던 내성천이 회룡포에 이르러 더
욱 굴곡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려 350도나 돌아간다. 직선으로 약 100m면 갈 거리를 무려 30배
인 3km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성천도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보다
빨리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심에 육지와 회룡포를 가늘게 이어주는 부분을 열심히 쪼아대
고 있지만 그 지형이 보기와 달리 무척 단단하여 그 100m 밖에 안되는 부분을 아직까지 처리하
지 못하고 하염없이 멀리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저런 지형은 물의 성미 때문에 결국 얇은 부분이 깎여져 물길이 되고 회룡포
같은 지형은 섬이 된다고 배웠다. 허나 회룡포 형님 앞에서는 그 진리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니
자연 계열 교과서의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성천의 지름길 만들기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소리 없이 그 지형을 쪼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
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내성천도 지겨운 우회 운행을 안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이 아닌 진정한 섬이 될 것이다.

내성천이 회룡포에서 크게 휘감아 돌면서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모래가 회룡포 강변에 차곡차곡
쌓여 곱고 너른 모래사장(백사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굴곡을 피려는 내성천의 필사적인 노력으
로 강 건너 산자락은 자연히 가파른 벼랑을 이루어 되었다. 또한 상류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흙
이 강변에 퇴적되어 자연히 영양가 높은 농경지를 이루었고, 옥토의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이곳
에 들어와 터전을 닦으면서 지금의 회룡포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회룡포는 분명 육지가 분명하나 속세(俗世)에서 들어가려면 무조건 내성천을 건너야 된다. 거의
4면, 350도가 강에 접해있고, 겨우 동쪽에 10도 정도로 아주 가늘게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
문이다. 정말 삽 한번만 뜨면 섬이 될 것 같은 특이한 지형 때문에 육지 속의 섬(섬마을)이 되
어버렸다.

이곳은 산과 강이 휘감아 흐르면서 거의 태극 모양의 조화를 이루며, 내성천의 하성단구(河成段
丘)와 하성도, 범람원(氾濫原)을 확인할 수 있어 침식과 퇴적지형 연구의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
다. 게다가 회룡포 건너에 병풍처럼 늘어선 비룡산(飛龍山)에는 신라 후기 사찰인 장안사(長安
寺)와 백제(百濟)가 세웠다고 전하는 원산성(圓山城), 그리고 봉수대 등이 있어 회룡포의 명승
적 가치를 더욱 북돋아준다.


▲  목가적인 풍경의 회룡포마을 (서쪽 부분)

회룡포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예전에는 내성포(乃城浦)라 불렸다. 세상에 드러내기
를 꺼려하던 예천에 숨겨진 속살이자 평범한 시골 마을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조
그만 나룻배를 타고 속세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직접 건너기도 했다. 내성천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또한 동쪽으로 가느다란 부분을 통해 개포면 쪽으로 나가기도 했으나 생활 권역이 용
궁이라 대부분 강을 건너 용궁이나 점촌으로 나갔다. 하지만 일일이 배로 건너기가 귀찮아 외나
무 다리를 놓았지만 여름만 되면 떠내려가기 급하여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예천군청에 민
원을 때려 1997년에 예천군에서 강관(鋼管)과 철발판으로 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다리가
바로 회룡포의 명물인 뿅뿅다리이다.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그게 속세에서 뿅뿅으로 와전되
었음)
또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산물이나 필수품을 실어 나를 통로가 필요했
다. 아무리 뿅뿅다리가 생겼다고 해도 다리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행용으로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가느다란 동쪽에 길을 내어 수레의 접근과 운송 편의를 도모했으며, 이 길은 개포면 중
심지로 이어진다.

이곳이 속세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얼마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예천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고
자 우선 회룡포 둑방에 왕벚나무를 심고, 공원과 산책로를 닦았다. 그리고 없어진 봉수대를 복
원하는 한편, 철쭉군락지를 조성해 마을을 수식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드라마 '가을동화' 촬
영지가 되면서 급속도로 뜨기 시작했고, 회룡포의 묘한 지형에 단단히 매혹된 사람들의 입소문
과 언론매체의 끝임없는 찬양으로 이제는 예천 제일의 명소이자 이 땅의 굵직한 명승지로 순식
간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말 이곳 이름 그대로 가출한 용이 되돌아 올 정도로 잘나가는
명소가 되버린 것이다.

휴일과 휴가철만 되면 많은 관광/답사객들이 몰려와 회룡포 주변은 늘 활기를 누리고, 내성천의
깨끗한 물과 은빛 모래사장으로 피서의 성지로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팜스테이(Farm
Stay) 체험장소로도 인기를 다지고 있고, 강 건너의 비룡산과 하나가 되어 회룡포권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쏘가리와 은어가 뛰어놀고 있어 그들을 잡아 매운탕을 해먹으면
그 맛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회룡포 관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비룡산(240m)에 마련된 회룡대 등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참모습이다. 그냥 회룡포마을을 둘러보고 강변을 거니는 것과 높은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어떤 일이 있어도 비룡산에 올라 이곳의 전경을 꼭
보기를 권한다.
비룡산에 오르려면 비룡산 북쪽 자락에 안긴 장안사에서 오르는 길과 회룡포마을에서 강을 건너
오르는 길이 있는데, 수레를 가져왔다면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수레를 세우고 오르는 것
이 좀 편하며, 회룡대를 비롯한 산등성이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그야
말로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회룡포마을은 뿅뿅다리부터 강변 산책까지 포함하여 짧으면 30분,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충분
하다. 마을과 경작지, 강변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강을 건너 비룡산에
올라 회룡포의 전경을 살펴보고 산에 깃든 장안사와 원산성까지 겯드리면 3~4시간 정도 걸린다.

▲  회룡포 백사장

▲  회룡포 둑방 산책로(올레길)

※ 회룡포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궁 경유 예천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 이용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1일 5회) 이용
* 김천, 구미, 상주, 영주, 안동에서 용궁, 예천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역과 구포역, 밀양역, 동대구역, 구미역, 김천역, 영주역에서 경북선 열차를 타고 용궁역
  하차 (1일 3회, 휴일은 4회)
* 용궁정류장(용궁역 부근)에서 회룡포를 경유하여 예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1일 3회 운행한다.
  예천터미널에서 회룡포 경유 용궁으로 가는 군내버스도 1일 3회 운행 (예천발 8:10, 12:10,
  16:40)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지체말고 택시를 이용하기 바란다. <예천군내버스 시간 문
  의 예천여객 ☎ 054-654-4444>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점촌시내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②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 → 예천역 → 용궁 → 향석리 → 회룡포주차장
- 회룡포 전망대(회룡대)와 장안사로 갈 경우에는 회룡교를 건너서 우회전한다. (좌회전하면 회
  룡포주차장과 회룡포마을) 단 길이 좁고 커브가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퀴를 굴려야 된다.

★ 회룡포 관람정보 (2014년 7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없음
* 회룡포마을에서 민박과 오토캠핑,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자세한건 회룡포마을 홈페이지 참조
* 회룡포마을은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 회룡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395외 (회룡포길 362)
* 회룡포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들을 클릭한다.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  회룡포를 굽어보는 회룡대


♠  회룡포마을 둘러보기

▲  회룡포 뿅뿅다리 (마을쪽에서 바라본 모습)

룡포 주차장은 수레들로 거의 만원이다. 간신히 적당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그렇게나 만나고
싶던 유명 인사를 만나러 가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회룡포로 향한다. 주차장 주변은
마을 아지매들이 그들이 재배한 갖은 채소와 과일을 비롯하여 참기름과 막걸리, 동동주 등을 진
열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동동주 2잔 얻어마시고 회룡포로 가니 내성천에 걸린 뿅뿅다
리가 우리를 마중한다.

뿅뿅다리는 이름부터가 참 재밌지만 그 생김새도 옛날에 그 흔한 외나무 다리처럼 정겨운 모습
을 하고 있다. 속세와 회룡포를 이어주는 관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유일한 다리까진 아니다.
마을에서 외지로 잇는 다리는 이거 말고도 서쪽에 뿅뿅다리가 하나 더 있고, 동쪽 가느다란 부
분에 수레를 위한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회룡포의 상징인 이 다리는 앞서에 이른 데로 강관과 구멍이 뚫린 철발판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1997년 예천군청에서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부실한 외나무 다리가 있었
다. 내성천의 수심이 얕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그냥 나무와 철을 이용해 간단한 모습으로 만
들었는데, 다리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전 외나무 다리보다는 튼튼하여 마을 사람들이 편히 
건너고 다닌다. 그들은 다리 발판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라고 불렀는데, 1998
년 회룡포를 다룬 어느 신문 기자가 난청증세가 있는지 퐁퐁다리를 그만 뿅뿅다리라 잘못 듣고
이를 기사에 내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뿅뿅다리로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퐁퐁보다는 뿅뿅이 더 정감이 간다 하여 뿅뿅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뿅뿅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의 작은 다리로 다리를 건널 때 흔들다리처럼 조금씩 꿈틀거
릴 뿐 그런데로 건너갈 만하며, 다리에 안전 난간이 없고, 바로 옆이 강이므로 건널 때 주의를
하기 바란다. 물론 강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수심이 무척 얕기 때문이다.


▲  회룡포의 자랑, 백사장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의 자랑인 백사장에 발을 디디게 된다. 속세에서 온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진풍경으로 이는 굴곡 노선의 직선화를 꿈꾸던 내성천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작품이다.
마치 바닷가 백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대자연의 위대함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며, 백사장의
폭은 거의 100m, 길이도 2km가 넘어 왠만한 바닷가 백사장 못지 않다. 게다가 내성천이 속세의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탓에 수질이 청정하여 은어와 여러 민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지금은 겨울이라 모래사장을 거니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피서철에는 많은 도시인들이 몰려와 백
사장을 가득 메운다.


▲  회룡포 표석

▲  회룡포 표석에서 바라본 너른 백사장과 내성천

백사장에 열심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보면 회룡포를 알리는 표석이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바라
다. 그 표석을 지나 경작지를 5분 정도 지나면 회룡포 서남쪽에 자리한 회룡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은 이 땅에 흔한 농촌마을로 대략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시집을 온 여
인들은 울면서 왔다고 한다. 교통도 안좋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벽지였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지금은 교통도 조금 좋아지고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안해
도 될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공(老公)들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은 작지만 그를 둘러싼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을 이룬다. 또한 회룡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면서 민박이나 팜스
테이를 하는 집도 많이 늘었다.


▲  정겨운 풍물시 ~ 곶감을 꿈꾸며 열심히 일광욕을 즐기는 감들의 행렬

▲  회룡포마을 돌담길

회룡포 마을길은 뿅뿅다리 남쪽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으로 이어진다. 마을에는 근래에
손질한 돌담길이 길게 이어져 마을의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너른 경작
지는 삶에 지친 도시인들의 안구와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다.
그런 경작지를 구경하며 목가적인 풍경에 취하다보면 금세 서쪽 강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길
은 3갈래로 갈리는데, 용처럼 꿈틀거리는 비룡산이 보이는 북쪽은 마을 올레길로 불리는 둑방길
이며, 남쪽은 마을의 얕으막한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은 백사장과 제2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데, 그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보통 회룡포마을 나들이는 뿅뿅다리를 건너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강변 갈림길에서 북쪽 둑방길
을 거쳐 다시 뿅뿅다리로 이어지는 반원 모양의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추가 옵션으로 마
을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둑방길과 제2뿅뿅다리를 건너 비룡산으로 가는 코스가 있으며, 회
룡포에서 비룡산은 필수로 꼭 가봐야 한이 안생기는 곳으로 이곳에 올라야 진정한 회룡포의 위
엄을 누릴 수 있다.


▲  회룡포 경작지 너머로 둑방길(올레길)과 비룡산이 보인다.

▲  서쪽 강변 갈림길 - 우리네 인생에서 갈림길은 무척이나 많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하고 이익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가 않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장거리 게임처럼 저장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을까?

▲  갈대가 출렁이는 서쪽 강변 백사장 너머로 제2뿅뿅다리가 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용포마을과 비룡산으로 이어진다.
 

▲  마을 올레길로 쓰이는 둑방길
그냥 흙길이었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꼭 저런걸 깔아야 했을까..?

▲  가을 추수를 마치고 겨울잠에 들어간 회룡포 경작지 ▼
황금들녘의 흔적이 아직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  소나무가 가로수를 자처하는 회룡포 둑방길 (올레길)

▲  여름에 꼭 안겨보고 싶은 회룡포 백사장

관광객은 많지만 그래도 조용한 풍경을 지닌 회룡포마을과 둑방길(올레길)을 거닐고 뿅뿅다리를
건너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회룡포의 속살을 둘러봤으니 이제는 회룡포의 진수를
봐야 한이 없겠지. 그래서 비룡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  비룡산 회룡대(回龍臺)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다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
길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의 물결이 바로 장안사이다.


회룡포 주차장에서 수레를 타고 회룡교에서 다리 대신 서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길이 너무나
가늘고, 굴곡도 심하고, 한쪽에는 벼랑까지 있어 덩치가 큰 버스가 안심하고 바퀴를 굴리기에는
매우 버겨운 길이었다. 다행히 그 길을 벗어나 장안사 밑에 마련된 주차장에 바퀴를 접었다. 장
안사까지 바퀴를 굴려도 되지만 버스가 마음을 놓고 바퀴를 접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
터 부득이 걸어가야 된다. 길이 제법 각박하여 은근히 숨이 차긴 하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회룡포를 굽어볼 생각에 그 힘든 길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작은 수레들이 모여있는 장안사 주차장을 지나면 장안사(長安寺)가 조촐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759년에 운명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전국 3곳의 명산(名山)에 장안사를 세우니, 그것이 금강산(金剛山) 장안사와 기장(機張) 장안사,
그리고 이곳 장안사라고 한다. 허나 신빙성이 많이 떨어져 믿을 바는 되지 못하며, 금강산이나
기장(부산)의 장안사와 달리 고색의 내음이 거의 없다. 다만 고려 중기 문인(文人)으로 동명왕
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李奎報)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잔잔히 전하고 있어 적어도 고
려 초기에 문을 연 듯 싶다.
이후 고려 명종(明宗) 때와 1627년, 1755년에 중창을 했으며, 1984년 두타화상(頭陀和尙)이 전
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장안사의 사세가 말이 아님을 보고 지역 신도들과 힘을 합쳐 지
금의 가람을 일구었다. 고색의 때는 진작에 날라간 상태이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지만 이규보의
시를 통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대충 가늠어 볼 수는 있겠다.
2000년 이후 회룡포가 대중적인 명소로 뜨면서 회룡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비룡산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회룡대를 세웠는데, 수레로 회룡대까지 올라갈 경우에는 무조건 장안사를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곳까지 이익을 보게 되면서 회룡포 관광권의 일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고적한 절이었다.

장안사는 예천 사람들이 공부를 하거나 소망을 기원하던 도량(道場)으로 예전에는 극락전(極樂
殿)이 법당(法堂)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이곳에서 지
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더구나 고명하신 지도림 스님을 친견했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날 때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1잔 차로 서로 웃으니
오래된 친구의 마음이라

맑은 날 북쪽 개울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서쪽 성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술과 국화는 꿈속에서 찾아드네


장안사는 회룡포에 단단히 정신이 팔린 탓에 경내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솔직히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볼거리도 부실한 절로 여겨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당연
히 사진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
* 장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산54 (☎ 054-655-1401)


▲  회룡대에서 장안사로 내려가는 계단길

장안사를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비룡산의 산능선이다. 여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 등산로
는 약간 진정을 되찾는 듯 보이나,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나타나면서 잠깐의 안도
감도 금세 사그러든다. 소나무 숲을 가르며 올라가는 계단길은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
며 그런 계단길을 오르면 길은 서서히 완만해지면서 잠시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을 잠시 내려가면 회룡대 전망대인 회룡대가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


▲  조촐한 모습의 팔각정인 회룡대

회룡대는 회룡포의 전경을 보여주고자 비룡산 능선에 닦은 정자이다. 회룡포 답사의 백미(白眉)
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자연이 만들고도 스스로 놀랬다는 작품, 회룡포가 기
가 막히게 연출되어 속인들의 정신줄을 제대로 놓게 만든다. 밑에서 거닐면서 보는 회룡포와 이
렇게 위에서 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정말 천지 차이이다.


▲  명필이 분명한 회룡대 현판의 위엄

▲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사람들 말대로 삽 한번만 뜨면 정말 섬이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회룡포의 모습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 뿐이다.

▲  회룡대 동쪽 부분
내성천이 무려 350도나 구비구비 돌아가야 했던 것은 바로 사진 가운데 부분을
뚫지 못해서이다. 그것도 정말 삽 한번 뜨면 그만일 듯한 두께임에도 말이다.
내성천의 집요한 굴곡 노선 직선화 프로젝트를 막아선
동쪽 부분이 정말 패기가 돋는다.

▲  회룡대 서쪽 부분
회룡포가 넓긴 하지만 대부분은 경작지로 쓰이며, 마을은 서남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

▲  숨은 그림 찾기
사진을 잘 살펴보면 하트(♥)처럼 생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난이도는 하


회룡대에 올라 회룡포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실컷 굽어보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어
느덧 17시, 이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도
겨울 제국의 눈치 탓에 슬슬 꽁무니를 뺄 채비를 한다. 
회룡대로 올라갈 때는 길이 각박하여 제법 멀게 느껴졌는데 내려갈 때는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
는데 금세 장안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미끄럼을 타듯 쑥 내려가면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
차장에 이른다.

졸고 있는 버스를 깨워서 회룡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회룡교까지 난이도가 강
한 길을 비집고 내려와 회룡교를 건너 향석리(옛 용궁 고을 중심지)를 지나 용궁면 중심지에 이
르러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직행버스를 타고 영주(榮州)로 넘어가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남쪽 일행
들은 인근 삼강주막(三江酒幕)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씩 들고 내려갔다고 한다. 나도 그들을 쫓
아갈 껄 그랬나? 괜히 용궁에서 작별을 고한 것이 후회가 된다. 허나 이미 지나간 거 따져서 무
엇하리, 거기는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겨울 맞이 예천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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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7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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