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공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2.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10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9월 2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