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2.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3.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4.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5.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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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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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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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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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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