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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 부산 금정산(金井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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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의 상징, 금샘


 

차디찬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3월 첫 무렵에 부산(釜山)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금정산을 찾았다.
바로 전날 부산 광안동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穀茶)를 마시며 간
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그날의
목적지인 금정산 산행을 떠났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49번(노포역↔광안동)을 타고 금정산 기점의 하나인 범어사 입구
에서 내리니 시간은 벌써 정오를 가리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을 먹기로 하
고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으로 뱃속을 위로하고 범어사입구 종점에서
등산객들로 미어터지는 부산시내버스 90번에 간신히 매달려 범어사 턱밑에 발을 내린다.

범어사(梵魚寺)는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자 경남권 3대 사찰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
번 발걸음을 했다. 2002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았지만 별로 땡기지 않아 그냥 항아리 겉
돌 듯 바로 통과해 버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원효암과 금정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상징이자 천하에 널린 일주문(一柱門)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계문(曹溪門, 보물 1461호)을 지나 왼쪽 산길로 진입, 북문 쪽으로 조금 가
다가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로 진입했다. 여기서 원효암까지는 대략 1km이다.


▲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


♠  금정산에 묻힌 도심 속의 산중암자 원효암(元曉庵)

▲  꾸밈 없는 소박함, 원효암 정문

해발 500m 고지에 자리한 원효암은 범어사의 부속암자로 금정산 동쪽 자락에 안긴 아담한 산중
암자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숲속에 숨은 듯 자리해 있어 바깥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보이지를 않
는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지나가는 새 조차도 이곳에 절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원효암은 절 이름 그대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정산에서 미륵사(彌勒
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원효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부산 앞바다에 무려 5만 척의 왜군이 밀
려오자 도술을 부려 물리친 곳이라 한다. 허나 신라 왕실의 측근으로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교를 이끌었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바쁘게 살던 그가 과연 이곳까지 내려와 절을 지을 여유
가 있었는지 과연 궁금할 따름이다. 그가 세웠다는 일말의 증거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기에 활약했던 원효와 의상은 3살짜리 아이도 줄줄 욀 정도로 유명하여 신라 후기 이후
창건된 많은 절들이 앞다투어 그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창건했다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창건 설
화를 꾸민 것이다. 어떤 절은 아예 그들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 원효사, 의상암(義湘庵)을 칭하
고 있으니 극락에 가있을 원효와 의상이 '엥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을 절을 지었나?' 놀랄지도 모
른다.

그러면 원효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절과 관련된 역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내 동쪽에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에 문을 연 것
으로 여겨진다. 즉 탑이 있으니 절이 있는 것이다. 원래 위치는 동편3층석탑 일대로 언제부터인
가 터만 남아오던 것을 조선 중/후기에 지금에 자리에 다시 지었으며, 1906년에 성월선사(聖月
禪師)가 1906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무량수각을 비롯하여 요사와 심검당 등 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
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와 목조관음보살, 아미타3존도(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41호)
를 비롯해 오래된 부도, 방광탑(放光塔) 등이 있다. 또한 1950년대에 우물에서 원효대사가 쓰던
것이라 전하는 옥돌의 도장이 발견되어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의 땅을 구분짓고자 경내을 둘러싼 숲 주위로 촘촘히 철조망을 둘러 휴전선 철책 마냥 은근히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는데, 철조망 사이로 2~3개의 문을 내어 조촐하게 일주문으로 삼았으며,
이들 문은 범어사와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진다.


▲  원효암동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호

하늘과 나무만 보이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암자로, 원효암을 가려면 철조망 정문을 거쳐야 된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 내리막 길로 가면 운치가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전나무 그늘에 오래된 3층석탑과 부도(浮屠) 3기가 뿌리를
내렸다.

3층석탑은 원효암 동쪽에 있어서 원효암동편3층석탑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원효암동3층석탑이라
불렸으며, 이는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이다.


동편3층석탑은 높이 약 1.9m로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효암
은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이 탑을 통해 절이
적어도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귀뜀해주며,
원효암의 옛 금당(金堂)터를 알려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을 세운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기단은 없고 바
닥돌 바로 위에 탑신이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는데, 2층과 3층은 돌의 재
질이나 비례로 보아 나중에 손질된 것으로 보인
다. 제법 두터워 보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어 곡선의 미를 선사하
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세
월의 검은 때가 낀 것을 빼면 대체로 상태는 양
호하나 탑의 기본 요소인 기단이 없어 다소 어
색해 보인다. 기단이 있었다면 제법 볼만했을텐
데 말이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 3형제

3층석탑과 마주한 부도 3형제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 석종형 스타일이다. 위의 사진
을 기준으로 왼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 받침 위에 방금 피어오른 연꽃 봉오리처럼 탑신이
얹혀져 있고, 오른쪽 부도는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  원효암의 백미, 전나무 숲길

원효암의 백미는 경내로 인도하는 전나무 숲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잠깐의 짧은 거리이지만 전
나무가 늘씬한 몸매로 하늘을 가리며 늘어서 있어 동화 속의 풍경처럼 정겹기 그지없어 마치 순
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이 아닐까 싶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  옛 사람들이 바위에 남겨놓은 바위글씨

▲  경내 직전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은 절과 가까워지면서 녹음(綠陰)이 서린 대나무 숲길로 변화한다. 푸르름의 한복판
에 서 있으니 늦겨울은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대나무들이 앞다투어 잎을 피우며 경내 앞
쪽을 가득 메우니 말이다. 바람이 스치는 대나무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마음
속에 가득한 번뇌도 잠시나마 와해되는 듯 하다.

     ◀  원효암 경내로 오르는 계단과 문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경내로 오르는 계단이 나
온다. 계단 끝에는 허름하게 생긴 기와문이 있
는데, 문 좌우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돌로 축대
를 쌓아 터를 다졌다. 바로 저 문을 들어서면
절간 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숲속에 없는
듯 자리한 원효암 경내가 펼쳐진다.


▲  아늑하고 조용한 원효암 경내 (정면에 기와집이 법당인 무량수각)


▲  무량수각 툇마루와 단청이 곱게 입혀진
기둥과 천정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넓고 잔잔한 뜨락
이 펼쳐진다. 뜨락 너머에는 이곳의 법당(法堂)
인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뜨락을 굽어본다.
무량수각은 조선 중기 이후 원효암이 이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지은 건물로 여겨지며, 적어도
200년 이상 묵은 듯 고색의 때가 넘친다. 현판
에는 '無'가 '天' 비슷하게 쓰여있어 천량수각
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그는 엄연히 '無'이다.
'無'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나중에
법당 우측에 'ㄱ'자 모습의 건물을 붙이면서 지
금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속은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우측과 좌측은 엄밀
히 다른 성격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좌측은 법
당이고 우측은 공양간 및 종무소로 쓰인다. 법
당에는 원효암 현판과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
으며, 특이하게도 툇마루를 가지고 있어 잠시
두다리를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퇴색한 마루에
는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으나 아직은 튼튼하다. 기둥 윗부분과 천정에
는 환하게 단청이 칠해져 건물을 수식한다.

▲  다소 빛이 바랜 원효암 현판의 위엄

▲  글씨가 꿈틀거리는 듯한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무량수각은 허름해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깔끔하여 오래된 티가 별로 풍기질 않는다. 불단
은 2개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목조관음보살이, 좌측에는 지장보살이 한 자리씩 차지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건물 이름은 분명 아미타불의 거처인 무량수각인데 아미타불은 온데간
데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이들이 대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무량수각 좌측 불단에 자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지장탱화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그 크기가 작아 유리막 안에 특별히 봉안했다.
지장보살의 뒤를 받쳐주는 지장탱화는 색채가 다소 바래 보여 적어도
100년 정도는 묵은 듯 싶다.

▲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6호

무량수각 우측 불단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18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범어사에 있는
여러 불상과 비슷하게 생겨 범어사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띄우며 중생을
맞는다. 볼살은 두텁고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듣고자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몸에는 두꺼
운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고, 왼손은 다리 위에 대고 오른손은 아미타9품인과 비슷한 수인(手
印)을 취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 몇 안남은 17~18세기 보살상으로 한때 도난을 당하여 왜열도로 넘어갔다가 현몽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영험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하며, 그의 신변보호를 위
해 짙게 유리막을 봉했다.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이해는 되지
만 폐쇄된 공간에 갇힌 듯 그도 꽤 답답할 것이다.


▲  무량수각 우측 샘터
금정산이 중생에게 베푼 소중한 선물로 그 뒤로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무언가를 담은 장독대들이 늘어서 있다.

▲  원효암서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2호

원효암에는 2기의 오래된 석탑이 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동편3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경
내 서쪽에 자리한 서편3층석탑이다.

서편3층석탑은 높이 2.33m로 경내에서 서북쪽으
로 30m 떨어진 공터에서 수습해 온 것이다. 2중
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것으로 대자연
과 세월의 괴롭힘이 상당했는지 성치 않은 부분
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바닥돌은 거의 파괴되
었고 아래층 기단은 옆이 뭉개졌으며, 탑의 머
리장식 일부도 날라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은 탱주가 사라졌고, 탑신 역시 1층만
남아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과 3층 탑
신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 각층 옥개석에는 밑
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모서리는 세월
의 거친 흐름에 죄다 휩쓸려나갔다.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동편3층석탑과 더불
어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서편3층석탑 부근에 자리한 부도

서편3층석탑 부근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맵시가 고운 석종형부도가 서 있다. 기단에 검
은 이끼가 끼어 있고, 돌의 피부가 제대로 바래 있어 제법 묵은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조관음보살상과 더불어 원효암의 조선 후기 유물이다.

이렇게 원효암를 말끔히 둘러보고 경내 서쪽에 가늘게 난 산길을 타고 금정산으로 향했다. 산성
북문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는 원효암 뒷쪽에 자리한 의상대(義湘臺)와 원효봉에 가
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고당봉과 금샘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 금정산 원효암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 5,7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범어사로 올라가는
  길(청룡예전로)이 나온다. 그 길을 오르면 삼신교통 종점이 있는데 거기서 범어사행 90번 시
  내버스를 타고 범어사 하차, 범어사를 거쳐 40분 정도 오르면 된다. 90번 버스는 평일에는 15
  ~20분 간격, 휴일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운행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원효암까지 찻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범어사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올라가야 된다.
* 원효암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25 (☎ 051-508-4008)


♠  부산의 지붕 거닐기 ~ 금정산성(金井山城) 북문에서 고당봉까지

▲  금정산성 북문(北門) - 사적 215호

금정산 지붕에 길게 둘러진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山城)으로 왕년에는 길이가
18km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약 9.5km) 허나 지금은 ¼도 안되는 4km 정도의 성벽만 간
신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성은 17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67년 경상좌수영 통제
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으며, 아마도 신라나 고려 때 왜구
(倭寇)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707년 성이 너무 넓어서 성의 중간 부분에 남북을 가르는 중성을 쌓았으나, 1774년에 성이 너
무 커서 수비가 어렵다며 폐지했다. 1806년에 성을 다시 손질했으나 왜정 때 철저히 파괴된 것
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동문(東門)과 서문, 남문, 수구문(水口門)을 복원하
고,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마치 사극 세트장의 성문처럼 간결하게 생긴 북문은 해발 590m에 자리해 있는데, 문의 높이가 3
m 정도이다. 문은 동그랗게 구부러진 모습이 아닌 네모난 형태로 문 위쪽에는 여장을 쌓고 조그
만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문의 규모는 서문(西門)에 비해 상당히 왜소하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야 고당봉이다. 직진하면 미
륵사와 금성동, 왼쪽은 성곽길을 따라 원효봉과 의상봉, 동문으로 이어진다. 북문에서 고당봉까
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며,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급해진다.


▲  북문에서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는 금정산성 성곽 (북문 북쪽)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고당봉이다.

▲  북문에서 동문 방면 금정산성 성곽 (북문 남쪽)

▲  부드러운 곡선의 원효봉~의상봉 능선

▲  고당봉 밑에 자리한 고모영신당(姑母靈神堂)

고당봉을 2분 정도 앞둔 지점에 이르면 돌담을 두른 붉은 벽으로 된 고모영신당이란 사당을 만
나게 된다. 이 사당은 고당봉에 깃들여진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신 일종의 산신당(山神堂)과
같은 곳으로 1920년대에 범어사 신도인 밀양박씨 할머니의 유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
제(姑母祭)를 지내달라. 그러면 고당봉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지켜주겠다'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범어사 승려들은 그 유언을 받들어 고당봉 밑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음력 1월 15일,
5월 5일) 제를 지내니 범어사가 나날이 흥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제사를 지냄)

우리의 토속 사당인 산신당이나 성황당은 기와나 나무로 만든 집이 딱 어울리는데 이곳은 근래
에 새로 지은 붉은 시멘트 집이 신당(神堂)의 역할을 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허나 이곳은
고지대라 거센 바람과 눈,비에 자주 시달려 안전과 관리를 위해 시멘트 집을 지어 고모영신을
봉안한 것이다. 신당 옆에는 어린이 키높이 정도의 관리실이 있으며, 신당에는 누구나 절을 올
릴 수 있다.


▲  고모영신당에 봉안된 산왕대신(山王大神, 산신)과 고모영신 위패
활짝 웃는 두 송이의 꽃을 비롯하여 여러 문양이 그려진 단청이
 식상한 신당 내부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정상으로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바위 봉우리로 이
곳에 올라서면 금정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두 눈
아래 들어오고, 금정산 분지에 둥지를 튼 금성
동을 비롯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梁山),
김해 대동면, 기장군(機張郡) 서부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다.

이 봉우리는 범어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
나 왈
'폐하, 태백산에 의상(義湘)이란 승려가 있습니
다. 그는 항상 3,0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화엄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제신(
諸神), 천왕(天王)이 그를 따라다니며 수행을
합니다.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에 이르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시 금색이
며, 사시사철 마르지를 않습니다.

▲  고당봉(故堂峰) 표석의 위엄

 

그 우물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五色)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고 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가시어 7일 밤낮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불
이 금색신으로 화현하시고 동해에 임하되 왜구가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문무왕은 아침에 바로 의상대사를 소환하여 그와 금정산에 들어가 7일 밤낮을 일
심으로 독경하니 그 장소가 바로 고당봉이란 것이다. 고당(姑堂)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화
엄일승(華嚴一乘)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뜻으로 금정산 꼭대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중생을 위해 법문을 강설했다는 의상대
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범어사에서 그럴싸하게 다듬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  등산객들로 가득한 고당봉

고당봉에는 많은 산꾼들이 진을 치며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에 젖어있다. 고당봉 표석은 그들의
인기 사진모델로 정상에 올랐다는 인증 사진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두 사람이나
한 단체가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 낙동강(落東江), 김해
대동면, 기장군 서부 일대가 두 눈에 박혀 눈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린다. 간만에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속세살이에 상처 받은 마음이 쾌유가 된 듯, 속이 시원하다.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김해 대동면과 낙동강, 양산 남부(물금, 범어, 양산신도시) 일대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2)
금정산 남쪽 줄기(원효봉, 의상대)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부산 동래(東萊)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3)
금정산 동쪽 줄기와 금정구, 기장군 서부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4)
금정산 북쪽 줄기(장군봉)와 양산시 동면, 덕계 지역


♠  금정산의 유래가 된 금정산의 성지(聖地)
금샘<금정(金井)> - 부산 지방기념물 62호

▲  금샘을 품은 바위
여러 바위를 디딤돌로 삼은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금샘이 있다.


정상에 올랐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가야 되는 법, 10분 정도 머물며 천하를 바라보다가 금샘
으로 넘어갔다.
금샘은 고당봉에서 동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데, 고당봉 동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빙글빙글
머리를 환장하게 만드는 빙글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몇 개 넘으면 금정산과 부산의 성지인 금샘
이 그 영롱한 모습을 비춘다.

금샘은 고당봉 동쪽에 솟아난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 패인 웅덩이로 범어사 창건설화의 현장이
다. 바로 금빛이 나는 물고기(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그래서 금
빛 물고기가 놀았다는 뜻에서 금샘(金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 이름도 자연히 금정
산이 되었다. 물론 그런 물고기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바위 꼭대기에 저렇게 묘하게 물이 안착
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백악기 말인 8,000만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
들어진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으로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으로 데워지고, 데워
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흡수하는 작용으로 금샘 물이 차가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10
월 해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있는데, 저녁노을과 단풍빛이 반
사되어 금빛 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마치 마치 금빛물고기가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금샘에 모인 물은 바깥으로 나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물
맛은 어떨까? 금샘이란 말 그대로 수질도 그에 버금가야 적당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무늬만 샘
이다. 물이 고인 웅덩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비와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은 물이
들어올 때가 없고, 그곳에서 마를 때까지 고여있기 때문에 물은 속세처럼 썩는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면 물 속에 여러 부양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수질이 좋지 않으니 금샘이라 하여
괜히 물을 섭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수질만큼은 독샘인 것이다.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범어사에서 믿고 있으나, 물이 마르기가 무섭게 또 비가
내리니 물은 늘 마를 날이 없다. 금샘까지는 접근이 가능하나 주변이 험해 사고 위험이 도사리
므로 괜한 오만을 부리지 않도록 한다.

※ 금정산 고당봉, 금샘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범어사에서 북문을 거쳐 고당봉까지 약 60분, 금샘은 70분 소요
* 금성동주민센터<①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 길 건너편에서 203번 좌석버스 이용 / ② 2,3호
  선 덕천역 10번 출구와 2호선 화명역 6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 이용>에서 북문까지
  70~75분, 고당봉까지 90~95분, 금샘은 100~105분 소요

* 금샘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산2-1


▲  가까이서 본 금샘의 위엄
백두산(白頭山)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漢拏山)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다면
금정산에는 그들의 축소판인 금샘이 있다.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구, 기장군 철마면 지역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산 동/남쪽 줄기와 북문(움푹 들어간 부분)

▲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내려가는 길

금샘을 둘러보고 남쪽 샛길을 거쳐 북문으로 내려왔다.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미륵사를 찾아 그곳의 청정한 약수를 먹고 싶었으나 몸이 지친 상태로 그
냥 통과했다. 거기까지는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미륵사입구를 지나 10분 정도 가면 산길을 둘러싼 숲의 삼삼한 물결은 잠시 멈추고 잡초와 조그
만 나무가 무성한 벌판이 잠시 펼쳐진다. 이곳은 예전 농장과 마을이 있던 곳으로 금정산 정화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예전에는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수풀에 묻혀 버려져 있더만 그 역시
말끔히 철거되어 흔적조차 없다.


▲  옛 마을과 농장이 있던 곳(왼쪽 바위 봉우리 밑에 미륵사가 있음)

▲  산내음이 가득 깃든 금성동 가는 숲길
숲길은 대체로 평탄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 좋으며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솔솔나부끼는 바람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  금정산성 중성 - 사적 215호

금정산의 허리를 가르는 중성은 의상봉 남쪽 제4망루에서 국청사 북쪽을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
는 약 2km의 성곽으로 여장과 성문은 사라지고 성벽만 일부 남았다. 성벽 위로 수풀이 무성하여
인간의 건축물은 자연 앞에선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도토리묵과 산성막걸리

등산을 하면 도토리묵, 파전을 겯드린 동동주나 막걸리 1잔이 간절해진다. 금성동에는 등산객과
도시인을 상대로 한 주막들이 즐비한데 이곳의 명물인 산성막걸리와 염소고기를 비롯하여 도토
리묵과 파전, 백숙 등을 취급한다.
간만에 등산으로 몸이 무거워진 우리는 어느 주막에 들어가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물론 산성막
걸리도 마셨지, 얼마나 콸콸 잘 흡입이 되던지 우리는 순식간에 막걸리 3명을 마셨다. 배추김치
와 당근 등이 잘 어우러진 도토리묵도 맛이 괜찮아 목구멍이 신난다고 쾌재를 부른다. 도토리묵
말고도 다른 것도 먹을까 했으나 시내로 나가 먹기로 하고 자리를 훌훌 털고 나왔다.
이렇게 소소하게 등산 뒷풀이를 마치고 금성동의 중심인 금성동주민센터에서 시내로 나가는 부
산좌석버스 203번을 타고 한계령(寒溪嶺)만큼이나 험준한 산성고개를 넘어 온천장역(1호선)으로
나왔다.

이리 하여 부산의 지붕 금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제
대로 된 금정산 본전 종주를 하고 싶다.


▲  국청사 입구에서 바라본 파리봉과 상학산
그 아래로 금성동 마을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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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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