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8.0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2. 2013.03.18 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 괴산 산막이옛길 봄나들이 '

▲  등잔봉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운해

▲  괴산호

▲  산막이옛길


 

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4월의 한복판에 괴산(槐山) 지역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는 산막이옛길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산막이로 가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
날까지는 마음이 싹 정화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는데, 불과 하루만에 날씨가 안면을 바
꾼 것이다. 하여 비의 대한 불안감을 약간 품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결지인 신도
림역(1,2호선)으로 이동했다. 물론 우산은 챙겼다.
신도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관광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동남쪽으로 길을 향했다.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나를 쫓아왔는데, 안성(安城)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열심히 육중한 바퀴를 굴렸고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산막이옛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어 우산을 펼치고 산막이옛길 우중(雨中) 산책에 들어갔다. 비는 조
금 내리다가 잠시 그치면서 '이제 날씨가 개인 모양이다' 희망을 주더니만 얼마 가지 않
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기를 수 차례~! 하늘은 그야말로 우리를 희망고문을 시켰다.
나들이와 답사, 등산에서 비가 오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다.


 

♠  산막이옛길 입문

▲  산막이옛길의 마스코트
옛날 복장을 한 할머니와 손자 도령, 선비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자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삿갓을 쓴 할아버지 옆에는 경찰청 마스코트인
포돌이, 포순이 형상이 있다. (사진에는 짤림)


괴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산막이옛길은 괴산호(槐山湖)와 어우러진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이곳은 원래 연하9곡(煙霞九曲)이라 불리던 명소로 계곡(달천 상류)을 따라 10리 정도의 산길
이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졌다. 허나 1957년 우리 기술로 지은 최초의 댐, 괴산댐이 마을 북쪽
사은리에 지어지면서 계곡 일대가 강제 수몰되었다. 그래서 산중턱에 새로 길을 내었으니 그
것이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옛길이란 명칭은 수몰된 산길 윗쪽에 다시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산막이옛길(이하 옛길)은 3.9km로 괴산호 서쪽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흙길이었으나 2011년에
천하에 개방되면서 나무데크길을 내었다. 숲과 호수,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늘면서 그 존재감이 미치도록 커졌고, 이제는 괴산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옛길에는 소나무동산, 노루샘, 호랑이굴, 앉은뱅이약수, 얼음바위골, 괴
산바위, 진달래동산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으며, 유람선이 옛길의 시작점인 차돌바위 나루
터에서 환벽정나루를 거쳐 산막이나루까지 운항한다.

옛길의 종착지인 산막이마을에는 노수신(盧守愼)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적소(謫所)가 있으며,
그곳에는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세운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그리고 괴
산호가 자연스럽게 빚은 한반도지형에는 환벽정이란 정자가 둥지를 틀었다.

옛길 서쪽에는 국사봉(477m)과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550m)이 산막이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데, 옛길에서 등잔봉과 한반도전망대, 진달래능선, 진달래동산을 거쳐 옛길로 내려가도 되고,
(출발점→등잔봉→한반도전망대→산막이마을, 2.9km) 한반도전망대에서 더 욕심을 부려서 천
장봉, 삼성봉을 찍고 '신령참나무'와 '시련과 고난의 소나무'를 거쳐 산막이마을로 내려가도
된다. (출발점→등잔봉→천장봉→산막이마을, 4.4km) 그리고 산을 타기가 귀찮다면 호수를 따
라 이어진 옛길을 이용하면 되며, 그것도 귀찮다면 돈 몇푼 주고 배를 타면 된다.

싱그러운 나무와 풀의 향기, 산에서 낭랑하게 불어오는 산바람과 괴산호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즐거운 곳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옛길만 살피지 말고, 등잔봉과
천장봉 등의 산도 같이 겯드리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둘러봐도 길어봐
야 4시간 이내(천장봉을 경유할 경우 5시간 이내)면 충분하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일대


▲  세모로 솟은 산막이옛길 표석

▲  산막이옛길로 들어서다

궂은 날씨임에도 산막이를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비가 크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
이나 우의, 모자만 걸쳐도 별탈 없이 움직일 수가 있다.
주차장을 출발해 밤, 옥수수 등의 자연산 간식과 지역 특산물을 파는 가게촌을 지나면 본격적
인 산막이옛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소나무동산이 곧 모습을 드러내고 유람선
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가 걷기의 귀차니즘과 문명의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것을 타면 산막이까지 10분 정도면 간다. (옛길로 걸어갈 경우 1시간 소요) 하지만 우리는 등
잔봉과 천장봉, 삼성봉을 찍고 산막이마을로 내려가 옛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그야말
로 산막이옛길 본전 코스로 돌기로 했다.


▲  괴산호 유람선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
적정인원이 차면 바로 배가 출발한다. (따로 시간표는 없음)

▲  고인돌쉼터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가 여럿 널려 있다. 이곳은 옛 사오랑 서당에서
한여름에 야외 학당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  가파르게 이어지는 소나무동산 옛길

▲  솔내음이 코와 마음을 찌르는 소나무동산
40년 묵은 소나무가 넓게 군락(약 1만 평)을 이루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막이옛길의 자연산 거울, 괴산호
나무와 꽃, 산, 구름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소나무 출렁다리를 타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  소나무 출렁다리 (1)

소나무동산 남쪽에는 산막이의 명물인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다. 이름 그대로 출렁이고 흔들거
리는 다리로 다리 밑판의 간격이 성인 발 크기 정도로 벌어져 있어 좌우 난간을 잘 붙잡고 밑
판도 잘 챙기며 움직여야 별탈이 없다. 자칫 방심하여 그 틈으로 발이 빠지면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반복되고, 지그재그 형태로 여타 관광지의 그저 그런 흔들다리
와 완전히 차원이 틀린 거의 훈련/유격용 흔들다리 버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
니 다리가 짧은 사람이나 어린이, 알콜이 좀 들어간 사람은 출렁다리를 피하기 바란다. 보기
와 달리 다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어 체감 거리를 더욱 늘려준다.


▲  소나무 출렁다리 (2)

▲  소나무 출렁다리 (3)

▲  변덕스런 하늘과 대조적으로 고요함에 잠긴 괴산호


 

♠  산막이옛길의 지붕을 거닐다 (등잔봉, 한반도전망대)

▲  등잔봉으로 올라가는 길

소나무출렁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등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호수 옛길만 거
닐면 싱거울 수가 있으니 산막이의 지붕인 등잔봉~천장봉 능선을 거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
다.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은 세상살이만큼이나 다소 각박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하늘
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하게 이어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그 각박한 산길은 등잔봉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냥 오르는 것도 힘든 마당에 봄비의 희롱으로 산길이 흥분하여 진흙
탕이 되버렸으니 은근히 질퍽이고 미끄럽다. 게다가 산길 밑 경사는 60도 이상으로 아찔하여
더욱 조심을 기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  등잔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주변

▲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

▲  조그만 등잔봉 정상 표석 (해발 450m)

등잔봉은 국사봉과 더불어 산막이의 북쪽 지붕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천장봉과 삼성봉
이, 동쪽으로는 산막이옛길과 괴산호가 바라보이는데, 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그 풍경을 모
조리 앗아가버려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구름 뿐이다.
궂은 날씨로 인해 내가 기대했던 환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이 진
하게 그것도 발 밑으로 가득 깔려 있어 고작 해발 45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1,500m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기분이다. 그야말로 3배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 게다가 천상(天上) 세계의
신선이나 그의 식구가 된 기분까지 교차하니 화창한 날 풍경에 못지 않은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雲海) ①
하늘 세계도 세력 확장을 하는 모양이다. 구름이 해발 400m까지 쑥 내려왔다.
이러다 밑 세상까지 하늘의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 구름이 거대한
하얀 도화지를 이루며 밑 세상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②
저 하얀 구름을 거닐고 싶다. 물론 신선이나 손오공이 아닌 이상은
위험하겠지..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③
운해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산이 있다. 그 자태가 마치 신선이나 천상 세계의
지체 높은 존재만 접근이 허락되는 신비로운 산처럼 보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④
대자연이 그린 장대한 수묵담채화,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해도 저 그림을
100% 그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천장봉(437m)
엷은 구름을 걸친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보인다. 혹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닐까?

▲  한반도전망대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한반도지형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바로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괴산호의 걸출한 작품,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현장으로 괴산호가 빚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리 걸출하면 무엇하나? 자연이 단단히 시샘을 했는지 비구름과 안개로 싹 가려버렸
으니 말이다. 다행히 구름이 조금 틈을 보여 그 사이로 한반도지형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한반도지형이란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담겨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영월(寧越)의 한반도지
형이 대표적이다.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하에 많은 한반도지형이
발굴되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아주 조그만 축소판
이라 그렇다.
허나 우리는 그 조그만 한반도에서 안주하면 안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다스렸던 수많은 실지
(失地, 만주와 요동, 요서,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을 되찾아 과거의 광영을 되찾아야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면 한반도지형은 과감히 버리고 그에 걸맞는 지형을 키웠
으면 좋겠다.


 

♠  산막이옛길 마무리

▲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괴산호 (고공전망대 주변)

한반도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굽이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천장봉, 왼
쪽으로 가면 진달래능선인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산길 상태도 좋지 못해 천장봉과 삼성
봉을 빼고 바로 진달래능선으로 내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나 날씨가 계
속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쿨하게 부리고 코스를 좀 줄이
는 것이 좋지.

진달래능선은 천장봉 북쪽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길로 경사가 조금 패기가 있다. 진달래가 무
리를 이루고 있어 진달래능선이라 불리는데, 진흙이 되버린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괴산호
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동산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잠시 떨어졌던 옛길과 만났다.

진달래능선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괴산호를 따라 출발점으로, 남쪽은 가까이에
보이는 산막이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왔으니 산막이마을도 봐야 당연한 도리이지만 코스 단
축에 따라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어 거기를 경유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마을에서 배를 타
고 돌아가면 충분하나 배까지는 생각을 안했음)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단체로 온 것이니 시간을 어길 수는 없
다. 게다가 일행들이 가져온 행동식과 간식을 먹느라 중간중간 눌러 앉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작 필요한 것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다. 하여 노수신적소가 있는 산막이마을을 저 앞
에 두고 단장의 마음으로 길을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오라는 산
막이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아쉽다.


▲  산막이옛길의 잔잔한 거울, 괴산호

▲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괴산호 유람선
산막이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발이다. 마을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15~20분 정도 걸리며, 인원이 차면 출발한다.

▲  나무데크길로 무장한 산막이옛길

▲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를 지나면 얼음바람골이라 불리는 조촐한 계곡이 나온다. 돌 피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여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불린다.
그래서일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밀양(密陽) 얼음골의 바람처럼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 제국도 염통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피해가는 피서의 성지인 셈이다.


▲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샘터, 앉은뱅이약수

옛날에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마셨는데 물의 효험을 받아 무려 걸어서 나갔다고 한
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몸에 좋은 무언가가 깃든 물로 명성이 자자
했으며, 수질도 양호하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괴산호의 물을 채워주는
수원(水源)의 하나이기도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받아 마시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다. 내 마음
이 마치 앉은뱅이에서 정상 다리로 된 기분..


▲  귀여운 호랑이 형상이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은 바위에 뚫린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1968년까지 호랑이(표범)이 살았던 굴이라 전
한다. 그 이후 주인 없는 굴이 되었으며, 호랑이가 살던 것을 기리고자 그 앞에 색채가 진한
모형 호랑이상을 두었으나 예전 호랑이의 매서운 기운은 커녕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
기만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며, 옛길에는 이곳 외에도 여우비바위굴도 있
는데, 그곳은 산막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여름 소나기)와 한낮 더위를 피하던 곳이다.


▲  연화담(蓮花潭)
이곳에는 예전에 벼를 키우던 논이 있었다.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의존해 모를 심었는데, 옛길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연화담으로 삼았다.


촉박해진 집결시간 때문에 옛길의 많은 명소를 사진에 싹 담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담는데 그
쳤다.
진달래동산에서 연화담 사이에는 다래숲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괴산바위, 호수
전망대, 얼음바람골, 앉은뱅이약수, 풀과나무의 사랑, 옷벗은 미녀참나무, 여우비바위굴, 매
바위, 호랑이굴, 노루샘 등의 명소가 있는데, 이중 얼음바람골과 앉은뱅이약수, 연화담만 사
진에 담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둘러보긴 했으나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쳤다.

어쨌든 주차장으로 돌아와 부근 식당에서 버섯소고기전골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곡차(穀茶)
도 다수 겯드리며 뒷풀이를 하다가 오후 4시에 잠시나마 정든 산막이옛길을 뒤로하며 다시 서
울로 돌아갔다.
분명 보긴 했으나 많은 것을 놓쳤던 산막이옛길과의 첫 만남, 그야말로 벌처럼 날라가고 돌아
왔던 단체 등산 나들이로 놓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 허나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된다
면 그 아쉬움을 모두 풀 것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은 잠시 미래에 맡겨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산막이옛길 봄비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7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 겨울맞이 괴산(槐山) 나들이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접수한 11월 하순 주말에 충북 괴산
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창원)에서 온 일행분들과 같이 갔는데, 그들이 괴산(槐山)으
로 답사를 온다고 하여 간만에 그들도 볼 겸, 미답지를 하나 지워볼 겸해서 답사에 동참했다.
사는 곳이 서로 반대라 괴산의 첫 답사지인 원풍리 마애불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괴산은 창원보다는 서울이 더 가깝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나 역시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된다. 그래서 찬란한 여명(黎明)이 비추기 전인 5시에 대문을 나섰다. 원풍리는 교통편이 매
우 얄미운 수준이기 때문에 차 시간을 딱 맞춰야 된다. 다행히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20분에
충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은 충주터미널에서 원풍리까지 시내버스
로 딱딱 이어진다.

충주행 고속버스는 1시간 24분 만에 나를 충주(忠州)로 실어주었다. 충주터미널에서 8시 5분
에 수안보로 가는 충주시내버스 240번을 타고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깃들여진 충주의 산하를
달려 8시 50분에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도착했다.
수안보에서 연풍으로 넘어가는 군내버스가 9시 정도에 있는 것 같던데 시간표를 보니 9시 10
분에 차가 있다. 그 시간이 되자 버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어
촌버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듯 승객은 달랑 나 혼자 뿐이다. 운전사에게 원풍리 마애불을
문의하니 마애불과 원풍리는 모른다고 그런다. 다만 신풍에서 내리면 될 것 같다고 그런다.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우회도로로 많이 한가해진 옛 3번 국도를 경유한다. 라면보다 더
꼬불꼬불한 소조령(小鳥嶺, 작은새재)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개의 정상인 문경3관문입구
에 이르고, 고개를 넘자 얼마 뒤 원풍리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운전
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치자 서둘러 일어나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마애불까지 얼마나 들어가야되나 왼쪽
을 살피니 들어가고 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바위에 조그만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그들이 바
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9시 20분, 그로부터 약 40분 뒤인 10시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
버스가 도착했다.

 


♠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이불좌상(二佛坐像), 거대한 바위 중앙에 둥지를 트고
다정히 들어앉은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院豊里 磨崖 二佛並坐像)
- 보물 97호

수안보에서 연풍(延豊)으로 넘어가는 소조령 고갯길 우측 큰 바위에 괴산의 명물이자 우리나라
에는 거의 없는 2불좌상, 원풍리 마애불이 자리해 있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원풍리 마애2
불병좌상인데, 예전에는 원풍리 마애불좌상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들 성격에 맞춘다고
이름을 고친건데, 그 명칭이 좀 어렵다. 그냥 속편하게 '원풍리 마애불'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그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가만히 있는 자신들의 명칭을
두고 속세에서 계속 왈가왈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쉽지만 도로보다 한층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
에 이정표가 없던 시절에는 아무리 길가라고 해도 길 우측 위쪽 부분을 잘 살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  도로에서 바라본 원풍리마애불

▲  수레의 왕래가 뜸해진 원풍리마애불 입구
우회도로와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2001년 이전)에는 자주 차가 막힐 정도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했다.
 

마애불은 수레의 왕래가 많이 뜸해진 옛 3번 국도와 고속질주가 벌어지는 3번 우회국도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에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6.5m 높이에 둥지를 트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마애불은 아무리 커
도 발이나 다리까지는 사람의 손이 닿는다. 허나 이 불상은 허공에 떠있는 듯, 도저히 만질 수
없게 높은 곳에 만들었다. 아마도 속세(俗世)에 찌든 속인(俗人)의 오염된 손길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고자 그런 모양이다.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서 저런 불상은 뚝딱 만들지만 옛날에는 어떻
게 새겼을까? 나무로 불상 위치까지 대(臺)를 만들고 그곳에 올라 조각을 했을 것이다.

▲  남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  북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불상의 높이는 5m로 약 6x5.5m 크기의 네모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큰 불상을 돋음
새김으로 새긴 다음 별도로 2구의 보살상(菩薩像)을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이들
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이불좌상이자 이 땅에서 유일한 이불마애불(二佛磨崖佛)로 그 가
치가 높다. 이불좌상은 병립불(竝立佛), 병좌상(竝坐像), 이불병좌상으로도 불리며, 중원대륙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크게 유행했던 불상 양식이다.

이렇게 2명의 불상을 나란히 새긴 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법화
경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渤海)에서 크게 유행했던 법화신앙으로 그 주인공은 석가불(釋迦
佛)과 다보불(多寶佛)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는 속시원한 정답은 없는 실정이다. 이들은 12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설에는 신라 후기에 여상조사(呂尙祖師)가 조성했다고 하고,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인근에 상암사(上庵寺)를 세우고 몸소 새겼다고도 한다. 허
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  노부부처럼 다정하게 들어앉은 원풍리마애불

불상의 얼굴은 도드라지고 넓적하다. 머리는 민머리로 보이며, 눈은 좌우로 가늘고 길다. 코는
왼쪽 불상은 온전하나, 오른쪽은 파여서 흔적만 있다. 눈 위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이 드리
워져 있으며, 입가에는 은은하게 미소가 번져 자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통견의(通絹衣)를 걸친 불상의 몸은 반듯한 어깨와 평평한 가슴이 표현되었으며, 옷 주름이 선
명하다.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불상 뒤로는 광배(光背)가 있다. 광배에는 5구의 화불(化佛)
이 있는데, 채색과 장식을 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불상에는 전쟁과 관련된 몇 가지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불상 앞을 지나다가 부처의 모양이 장사처럼 생긴 것을 보고
발끈했다. '근처에서 장사가 많이 나오겠구나. 혈을 끊어야겠다'
그래서 불상 뒤에 있던 혈(穴)을 칼로 찌르고 오른쪽 불상의 코를 베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도 명나라를 지극히 숭모하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일환으로 나온 전설인 듯 싶다. 또한 불상
몸 곳곳에 나 있는 검은색은 총탄의 흔적으로 6.25시절에 근처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것이
라고 하며, 혹은 양키 미군이 불상을 사격물로 삼고 표적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  기도처가 마련된 마애불의 아랫쪽

불상 앞에는 조촐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다. 기도처에는 마애불을 관리하는 인근 절에서 갖다
둔 복전함이 있는데, 함 옆에는 제발 돈을 빼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걸려있다. 함(函)을
보니 자물쇠가 무려 3개나 달려있다. 오죽 도난이 잦았으면 그리했을까 싶지만 너무 돈에 집착
하는 것 같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애불상은 돈과 관련없이 중생 걱정에 잠을 못이루
는데, 그런 불상을 관리하는 절은 그의 마음과 달리 복전함 걱정에 잠을 설치는 모양이다.

마애불이 깃들여진 암벽의 왼쪽에는 조그만 샘터가 있다. 수량이 적고 바가지가 없어서 마시진
않았지만 이 지역에서 이름난 샘터라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한쪽 구석에는 불공 때 쓰는 초
와 성냥, 청소도구 등이 담긴 함이 있는데, 돈은 복전함에 알아서 넣어달라고 쓰여 있다. 그 문
구를 보니 초를 쓰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린다.

불상 주변으로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마땅한 흔적은 없다. 왜 이
곳에 불상을 새겼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연풍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으로 하늘재보다
비중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인근 절이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승
려나 상인, 또는 충주 지역의 토착세력인 충주유씨 집안이나 연풍의 유력한 지방세력이 나그네
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마애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그네들은 불상 앞에 절을 올리
며 안녕과 소망을 빌었을 것이며, 그들이 시주한 돈으로 마애불을 관리하거나 자신들의 배를 채
웠을 것이다.

※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① 수안보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상주에서 연풍, 수안보 경유 충주행 직행버스가 다닌다.
* 동서울터미널이나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인천, 수원, 성남, 대전, 원주에서 충주
  행 고속/직행버스를 타고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로 갈아타거나 충주터미널 밖 시
  내버스 정류장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15~30분 간격으로 운행)
* 수안보에서 괴산행 군내버스가 1일 8회 운행한다. 버스를 타고 원풍리마애불에서 세워줄 것을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앞에 세워준다. 원풍리마애불은 정식 정류장은 아니며, 마애불 이정표
  가 나올 때 세워달라고 하면 된다. 만약 정차를 거부하면 새터에서 내려가 버스가 가는 방향
  으로 도보 12분, 신풍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도보 15분
② 괴산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 부근 군내버스(아성관광) 종점에서 수안보(1일 8회), 수옥정행(1일 2회) 군내버스
  이용 (마애불 앞 또는 신풍에서 하차)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부내륙고속도로 → 연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연풍면사무소를 지나서 수안보 방면으로
  좌회전 → 원풍리마애불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원풍리마애불을 친견하고 다음 답사지인 각연사(覺淵寺)로 이동했다. 각연사는 연풍에서 괴산가
는 길목인 태성리에 자리한 산중고찰로 속리산국립공원 북단에 고요히 묻혀있다. 이곳은 오른쪽
에 링크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괴산 각연사 보러가기)

약 2시간에 걸쳐 각연사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괴산읍으로 길을 잡는다. 각연사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다들 시장기가 강하게 맴돈다. 시간은 어느덧 2시를 훌쩍 넘긴 상태, 점심은 매운탕으
로 이름난 괴강매운탕에서 매운탕을 먹었다.
나는 매운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꽤 입맛이
맞는다. 쏘가리와 피라미, 메기 등 3~4종류의 민물고기가 수제비와 갖은 진한 양념과 어우러져
매운탕이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밑반찬도 그런데로
깔끔하고 정갈하며, 무척 시장해서인지 반찬도 금방 동이 나 여기저기서 더 갖다달라며 아우성
이다. 밥을 2그릇이나 먹은 사람도 나를 포함하여 상당하다. 이 집은 80대 할머니가 무려 60년
가까이 꾸린 집으로 지금은 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딸들도 와서 일을 거
들었다.

이렇게 점심을 배불리 마치고 괴산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우리가 문을 두드린 곳은 홍범식
고가와 개심사란 조그만 절이다. 이들은 한곳에 뭉쳐 있어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洪命憙) 일가의 기와집
홍범식 고가(洪範植 古家) - 충북 지방민속문화재 14호

괴산읍내 북쪽 동부리에는 홍범식 고가가 있다. 정남향(正南向)을 하고 있는 이 집은 1730년경(
또는 1861년)에 지어진 풍산홍씨 일가의 집으로 면적은 1,200평, 왕년에는 50여명이 살았다. 좌
우대칭의 평면 구조를 지닌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로 사랑채는 2고주 5량가의 납도리집이
며,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 모양으로 '一'자형 광채를 합쳐 'ㅁ'자형을 하고 있다.

속세에서 이 집을 주목하는 이유는 괴산이 낳은 위인, 홍범식과 홍명희 부자(父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이다.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으로 참
판(參判)을 지낸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광무 6년)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
서(惠民署參書)가 되었으며, 1907년 전북 태인(泰仁)군수로 부임하여 의병을 보호했다. 1909년
충남 금산(錦山)군수로 전임되어 백성들에게 아낌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910년 8월 경
술국치(庚戌國恥)가 이루어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 그는 아들에게 절대로 왜
(倭)에 협력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지킨 이가 바로 홍명희이다. 나머지는 아
비의 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악덕 친일파가 되었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1888~1968)는 홍범식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가인
(假人, 可人), 백옥석(白玉石), 벽초(碧初) 등으로 보통 벽초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왜국 다이
세이(大成)중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귀국하여 집에 머물던 중, 3.1만세운동이 터지자 바로 이
집 사랑채에서 은밀히 만세운동을 준비해 1919년 3월 19일 괴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으로 왜정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가 감방에 있는 동안 왜정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팔고 인근 제월리로 이사갔다.

출옥 이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휘문고보 교사와 오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연세대) 교수를 지내고,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
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에서 주최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했다. 임꺽정은 1928
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
로 파악하지 않고 천민계층을 이상화(理想化)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역사의식을
표출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나 38선 이남이 점점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
되어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중,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남북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
(平壤)에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 같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완전히
월북(越北)을 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며 문학활동을 하다가 1968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홍범식 고가의 솟을대문

▲  창고

홍씨 일가가 떠난 이 고가는 60여 년 동안 그런데로 모습을 유지하다가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
속자료 146호
<당시 지정명칭 '괴산 이복기 가옥(槐山 李馥基 家屋)>로 지정되었다. 허나 집주인
이 집을 변형시키면서 말썽이 생겼고, 결국 집주인의 요구로 1990년 9월 중요민속자료에서 정리
되고 만다. 그 이후 원형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크게 망가져 끝내는 폐가 지경에 이르게 되었
고, 괴산군에서 홍범식,홍명희 부자를 기리고 관광지로 키울 생각에 이 집을 매입해 지금의 모
습으로 말끔히 손질하였다. 손질한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부분도 마구 덧붙이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고색의 때도 거의 사라져 고가(古家)란 이름이 정말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집을 복원할 때 괴산 지역 노인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바로 월북한 홍명희의 집이란
이유 때문이다. 6.25를 뼈저리게 겪은 노인들에게 북한과 북한에 협조한 이들이 좋아 보일리는
없겠지. 그래서 괴산군청은 그들을 달래며 간신히 집을 복원했으며, 집의 명칭을 '홍명희 생가'
로 하려고 했으나 역시 그들의 눈치로 '홍범식 고가(한때는 동부리 고가)'로 이름을 변경했다.

비록 홍명희는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민족지도자이자 문학가
로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6.25이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북한도 언젠가는 우리가 흡수하고 포용해야 될 존재인데, 그곳으로 넘어갔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몰아세워 복원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행위이다. 지금
은 반공(反共)을 내세우던 1950~80년대가 아니다. 만약 그가 월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집이 크
게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높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창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  홍범식 고가의 사랑채
홍명희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빈집이다.
신발을 벗어놓던 섬돌은 신발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여
신발로 가득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홍범식 고가의 안채 외곽 -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안쪽을 가렸다.

▲  뜨락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
장독 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저들은 이곳을 복원할 때 갖다둔 빈 장독들이다.


※ 홍범식 고가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청주와 증평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계탑4거리이다. 여기서 직진하여 7분 정도 걸으면 괴
  산대교가 나오며,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동부리고가가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괴산나들목을 나와서 괴산방면 19번 국도로 우회전 → 감물 → 괴강3거
   리에서 우회전 → 동진교를 건너 대덕4거리에서 직진 → 동부교차로에서 괴산읍으로 좌회전
   → 괴산대교북단3거리(역말3거리)에서 직진 → 동부리고가

* 고택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와 관람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18시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괴산읍내를 앞뜰로 삼은
작은 절집 ~ 개심사(開心寺)

▲  개심사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홍범식고가에서 뒤쪽 언덕을 보면 절집 하나가 바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번 답
사의 마지막 장소인 개심사이다. 

개심사는 역사가 매우 짧은 절로 1935년에 지어졌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35년 괴산군 칠
성면 두천리에 있던 도덕암(道德庵)이 문을 닫자 괴산읍 서부리에 살던 김경림이란 여신도가 도
덕암에 있던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옮겨와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 불상 2구는 조
선 후기 불상으로 199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장
본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정말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1998년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새로 만든 극락보전으로 옮겼으며, 요사채와 삼성각, 명부전을 지
어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절의 역사가 80년 남짓이고 지금 있는 건물은 모두 1998년 이후에 세운 때깔 고운 것들이라 고
색의 내음은 없다. 극락전 뜨락에는 자갈돌이 정갈하게 깔려져 있으며, 절이 바라보는 남쪽으로
괴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절은 작지만 읍내를 앞뜰로 품으며 열심히 미래를 꾸려간
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개심사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
(開心寺 木造如來坐像 / 木造觀音菩薩坐像) - 충북지방유형문화재 173호

려함이 배여난 극락보전 불단에는 도덕암에서 옮겨왔다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에 앉
은 이는 3존불의 본존불(本尊佛)로 나무로 만든 목조여래좌상이다. 그리고 그 우측에 화려한 보
관(寶冠)을 쓴 보살상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좌측에 있는 것은 근래에 만든 것이다.

이들 목조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
양의 머리칼을 붙였으며, 얼굴에는 그만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양 어깨를 가린 옷을 걸치고 있다. 양 손목과 무릎
에 걸쳐 두껍게 표현된 옷주름은 조선시대 불상 양식이며, 그의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여래좌상 못지않은 자비로운 인상이 풍긴다. 3존불
뒤로 붉은 색채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 벽에는 신중도(神衆圖)가
자리하여 법당을 지킨다.

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를 넘었다. 개심사를 끝으로 그날의 답사일정은 별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쉽지만 여기서 남쪽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
게 하여 겨울맞이 괴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개심사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28-1 (☎ 043-832-2633)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3년 3월 11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사각 박스 안에 담긴 손가락 모양의
   View on을 꾹꾹 흔쾌히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도 환영합니다.


★☆ 손가락 안에 있는 숫자를 꼭 눌러주세요 ☆★

Copyright (C) 201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