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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2.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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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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