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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6.13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2
  2.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3.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4. 2013.05.30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산사, 북한산 본원정사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회기동 연화사, 청량리 청량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동대문구 연화사, 청량사 '

천장산 연화사

▲  천장산 연화사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청량사 동별당

▲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  청량사 동별당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중심으
로 열심히 절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이번 초파일에는 예전에 1번 찾았던 연화사와 그 부
근에 미답(未踏)으로 버젓히 남아있던 청량사를 주메뉴로 정했다.
청량사는 연화사보다 더 오래된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나를 몸살 나게 만들
정도의 늙은 유물이 없어 계속 발걸음을 미루다가 이번에 그를 꺼내 들었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1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
에서 내려 경희대 옆에 자리한 회기동(回基洞) 연화사를 찾았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
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2층) 내부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청량리 뒤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청량사 대웅전(大雄殿)

연화사를 나와서 빼곡히 들어찬 회기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삼육초등학교 남쪽
이자 영휘원 동남쪽에 자리한 청량사가 뒷통수를 보인다. 담장 너머로 청량사가 기와집 머리
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를 잠시 답답하게 만든다
. 그래서 골목길(제기로31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그제서야 문이 모습을 비추었고
,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청량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번에 처음 인연을 지은 청량사는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 북쪽이자 영휘원 동남
쪽으로 천장산 남쪽 끝자락에 안겨져 있다. 연화사가 경희대에 감싸여 있다면 청량사는 주택
가와 삼육초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간신히 경내 동쪽과 남쪽에 숲 일부가 남아있어 산
사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무려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허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처음에는
북한산(삼각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최근까지 '삼각산 청량사'를 칭했다. 고려 예종(
睿宗)이 1117년 9월 학자이자 승려인 식암 이자현(息庵李資玄, 1061~1125)을 불러 청량사에
머물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데, 그가 머문 절이 과연 이곳인지도
심히 의문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71년 부분에 삼각산 청량사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삼각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조선 초기 문신인 김정
(金淨)이 1504년에 청량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이후 절은 홍릉수목원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 자리를 물색했
는데, 공교롭게도 청량사 자리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그곳에 능을 쓰기로 했다. 상황이 그
리 되자 절은 강제로 제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어 현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일부에서는 돌곶이승방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나 김정호(金
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릉수목원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임업시
험장 쪽에 석관사(돌곶이절)가 따로 나와있어 별개의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허나 홍릉을 조성
하면서 절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돌곶이절도 청량사에 합쳐지면서 자연히 돌곶이승방의 역사
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돌곶이승방은 서울 주변 4대 비구니 승방의 하나이다.
그렇게 두 절이 합쳐지자 비구니 남채백(南彩白)이 1895년 석관사에서 법당과 칠성각을 가져
와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연화사처럼 완전 숲속의 절이었다. 주변 풍경이 고와서 왜정(倭政) 때는 서울 근교 경
승지이자 휴양지, 집회 장소로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특히 애국지사와 고승들의 발걸
음이 많았다.
별건곤(別乾坤) 제23호(1929년 9월)에는 청량사 절밥이 명물이라는 내용이 있고, 개벽(開闢)
에서도 청량사에 소풍을 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며,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는
'청량사라고 하면 시원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청량하지 않고 인근 홍릉의 수림(樹林)이 있고
교통이 편해서 군중이 몰리는 것이다'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는데, 1929년 왜경은 청량사를 수색하여
폭탄을 제조한 청년들을 검거했고, 1930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원 수십 명을 체포했으
며, 경성농업전문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1930년에 여기서 철기단(鐵騎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대(서울대) 학생들의 연구회 조직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1938년 연희전문(연세대) 동지회 흥업구락부가 자주 집회를 가졌다.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며, 1939년 8월 29일(음력 7월 1일)에 그의 회갑
연이 여기서 열렸는데, 이광(李珖),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안종
원(安鍾元) 등 2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참여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면서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
의 의지를 다졌다. 불교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
판은 그의 글씨이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절을 손질했으며, 1988년 전통사찰 5-2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
은 연화사보다 넓은 편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크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보전, 무량수전, 동별당, 칠성각, 관음전 등 10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경내를 크게 대웅전 구역과 동별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정문화재는
아직 없는 실정이나 1871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그 외에 1938년
에 조성된 후불탱과 신중탱, 칠성탱 등을 지니고 있다.

청량리의 이름이 바로 청량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현장을 이제서야 가본다. 절의 인지도가
낮아서 연화사보다 찾는 이는 좀 적으나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이자 애국지사들의 활동터로
바쁘게 살았던 현장이라 다시 왕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청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제기로31길 10-3, ☎ 02-962-7390)


▲  대웅전 앞에 닦여진 관불의식의 현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1938년에 그려진 후불탱과 신중탱 등 여러 탱화가 들어있으며, 건물 앞에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아기부처가 곱게 꽃단장이 된 연화대에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 뜨락에는 쉼터를 닦아 절을 찾은 이들에게 커피와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고 연
등 만들기 등의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커피 1잔을 받아 쉼터 의자에서 목구멍에
깃든 갈증을 단죄하며 5분 정도 쉬었다.


▲  곱게 연등 옷을 걸친 대웅전 앞 소나무

약 70~80년 정도 묵은 잘생긴 소나무에 오색 연등을 달아놓았다.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
다가 햇님이 칼퇴근을 하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등
야경을 드러낸다.


▲  늠름하게 생긴 대웅전 석가여래상과 뒷쪽에 걸린 후불탱(1938년 작)

▲  대웅전 독성탱과 산신탱

▲  1938년에 제작된 대웅전 신중탱


▲  천장산 청량사 대법전 건립탑(大法殿 建立塔)
1996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특이하게 8각형 부도탑(승탑)
스타일로 지어졌다.

▲  극락보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보통 석가탄신일 관불의식의 현장은 경내에 1곳 또는 2곳을 두기 마련이나 청량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앞, 무량수전 옆구리 등 무려 3곳이나 닦아 놓았다. 하여 사람들 눈치 없이 정말 여
유롭게 아기부처에게 냉수욕을 시켜주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대웅전과 무량수전 사이에 자리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조그만 덩치의 아미타불이 훤칠한 외모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쪽에 걸린 후불탱도 제법
고색이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극락보전 신중도(신중탱)

이곳 신중탱은 청량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무려 1871년에 조성되었다. 지방문화재감으로 전
혀 손색이 없어 보이나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절에서 문화재 신청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  한 지붕 두 가족,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각각
산신탱과 칠성탱 간판을 내걸고 있으나 원래 이름은 칠성각이다.

▲  칠성각 산신탱과 칠성탱(오른쪽)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탱은 1938년에 그려졌다.

▲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無量壽殿)

동별전 구역 북쪽 높은 곳에 들어앉은 무량수전은 앞서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이
미 극락전이 있어 그를 봉안했음에도 뜻도 비슷한 별도의 무량수전까지 두어 그의 공간을 또
마련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미타도량를 칭하고자 미리 밑밥을 닦아놓는 모양이다.


▲  무량수전 옆 3층석탑과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피부의 키 작은 3층석탑 앞에도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여기는 조금 구석이라 썰렁했다.

▲  무량수전 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  동별당(東別堂)


▲  관음전에서 바라본 동별당 방향
기와집이 첩첩히 둘러진 동별당은 청량사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닦여진
공간으로 요사, 선방, 공양간 등을 지니고 있다.

▲  관음전
2층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건물 외벽을 돌로 견고하게 장식했다.
관음전 공간은 2층이며, 1층은 요사(寮舍) 등으로 쓰인다.

▲  관음전 내부

청량사 경내를 30분 정도 말끔하게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연화사에서 배
부르게 공양밥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하여 이곳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밥 섭취를
문의하니 동별당 지하층으로 가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대웅전 주변에 있는 줄 알았음)
하여 그곳으로 내려가니 공양시간은 20분 전에 끝났다고 그런다. (그때가 14시 20분) 허탈해
하며 발을 돌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은 백설기를 1개 건네준다. 하여 그것으로 이곳의 인
심을 조금 느끼고, 관음전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청량사와의 짧은 첫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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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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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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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5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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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산사, 북한산 본원정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목 보살좌상)


매년 5월마다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
키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 밑에서 안길만한 절집을 물색해 보았다. 나는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정문화유산을 품은 100년 이상 묵은 절집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조건에 맞는 고찰 태반을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지배층이 서민을 쥐어짜듯 없는 거 열심히 쥐어짜고 흔들어보니 집에서 가까운 수유리
의 본원정사가 걸려든다. 이 절은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발걸음은 아직이다. 역사는 짧지
만 지방문화재인 지장보살상도 있고 집에서도 가깝고 해서 그곳을 찾기로 했지. 그래서 순례(
巡禮)를 가장한 이번 초파일 나들이는 본원정사를 시작으로 정릉에 있는 경국사(慶國寺)와 우
이동 도선사(道詵寺)를 돌기로 하고 12시 반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본원정사까지는 10리 미만의 거리이고 무척이나 가까워 보이지만 바로 가는 차편이 없
어 체감거리는 길다. 우리 동네에서 1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동아아파트에서 1161번 버스로
환승하여 우이동에서 다시 151번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에서 내린다. 소요시간은 기다리
는 시간을 포함해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여기서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삼각산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초파일 분위기로 한참 들떠있는 본원정사가 자리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는 국립재활원
과 영어 사대주의의 아주 몹쓸 현장인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가 있으며 우리나라 도보 여행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도 잠시 마주친다.


▲  본원정사로 가는 길 (자비정사 부근)
고운 빛깔의 연등이 물결을 이루며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러 온 중생들을 인도한다.

▲  삼각산로 끝에 자리한 본원정사
본원정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해 정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지장보살상을 후광으로 삼아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는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연등의 물결이 출렁이는 대적광전 뜨락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냉골에 둥지를 튼 본원정사는 화계사(華溪寺)와 4.19국립묘지 중간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저 조그만 절인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었다. 속인(俗人)들의 주거지와 북한산의 푸른 숲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해 있
지만 숲이 절의 상당수를 둘러싸고 있어 산사(山寺)의 멋은 그런데로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왜정(倭政) 초기에 손덕선(孫德善)이 창건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청암(淸庵)을 스승으로 받들며 수행을 했다고 하며,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절을 지
었다. 처음 이름은 도성암(道成庵)이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말부터 도성암이란 암
자가 있었다고 하며, 왕년에는 도선사보다 신도가 더 많았다고 전한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도성암을 손덕선이 중창을 한 셈이 되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
어 확인은 어렵다. 아마도 100년도 안되는 짧은 법등(法燈)을 좀 만회하고자 지어낸 것이 아닐
까 싶다.

손덕선은 여기서 50여 년을 머물다가 1973년에 입적했다. 6.25전쟁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
에 있던 태고사(太古寺)가 잿더미가 되자 그곳의 지장보살상(목보살좌상)을 업어와 중심 불상으
로 삼고 열심히 절을 꾸렸다. 허나 인근의 도선사와 화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상황은 좋지
못했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거의 문닫기 직전까지 흐르다가 1980년대 초반 원성이 주지가 되면
서 절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법당에 봉안된 지장보살의 본원(本願)을 따르고자 본원정사로 절의 이름을 갈아 이미지 변
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을 건립했는데, 그만
1996년 5월 22일 불의의 방화사건으로 애써 지은 대웅전과 나한전이 그만 전소되고 말았다. 이
때 가까운 삼성암(三聖庵)과 화계사에도 연쇄방화사건이 터져 나란히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에
모두 불을 지른 한심한 자는 기독교 광신도였다.
이후 1999년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2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워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약사
전과 나한전, 삼성각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적당한 크기의 경내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삼성각, 약사전, 나한전 등 7~8동의 건물
이 있으며, 대적광전 1층은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쓰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목보살좌상이 있
는데, 이곳에 유일한 보물이다. 비록 본원정사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든든한 후광(後
光)이자 밥줄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본원정사도 없었을 것이요. 내가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
았을 것이다.
그런 목보살좌상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는 현대 사찰이지만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자
리한 산사로 시내와도 가까워 적은 발품으로도 언제든 편히 찾을 수 있다. 또한 북한산 둘레길
의 동쪽 구간이 부근을 지나므로 둘레길 탐방 때 잠시 다리를 쉬어갈 만 하다.

※ 본원정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본원정사 종점 하차, 종점
  에서 2분만 걸으면 바로 본원정사이다.
* 지하철 4호선 미아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이나 미아3거리역(3/5번 출구)에서 151번 시
  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서울영어마을수유캠프)입구에서 하차 삼각산로를 따라 도보 12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인수동) 산125 (☎ 02-902-7337)


▲  본원정사 삼성각(三聖閣)

본원정사에 들어서니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무지 많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그에 비해 이곳 후
속으로 간 고려 후기 고찰, 경국사는 한산해 크게 대조를 보였지.
사람들은 대적광전과 명부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었는데, 그 혼잡함을 피하고자 제일 윗쪽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경내 변두리라
인적은 별로 없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9년 이후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토속신으
로 불교의 일원이 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창건주인 손
덕선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다.


▲  경내에서 삼성각으로 가는 길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이 요즘 장사가 안되서 며칠 밥을 안준 것일까? 호랑이의 인상이 꽤나 날카롭다.
너무 인상을 써서 주름선이 강하게 생겼을 정도. 그에 비해 산신의 표정은 여유롭다.
중생들이 초파일이라고 상다리 아작날 정도로 제물을 올렸으니 그 제물로
호랑이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

▲  독성(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  칠성이 그려진 칠성탱

   ◀  삼성각 우측에 자리한 조그만 공간
중생들이 놓고간 조그만 불상과 동자상, 나한상
등이 그들만의 조촐한 법당을 이루고 있다. 다
들 동전과 지폐를 하나씩 쥐어들며 초파일 고수
익의 기쁨을 누린다. 너무 재물을 밝히는 것도
절집의 도리가 아닌데.. 그 돈으로 가난한 중생
이나 도왔으면 좋으련만..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농작물이 무럭무럭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비닐하우스 너머로 연등으로 장식된
대적광전 주변과 나한전의 머리가 보이고 산 너머로 강북구 수유동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속세와 비슷한 높이라 조망은 그리 좋지 않다.

▲  약사전 앞에 놓인 5층석탑과 샘물을 제공하는 문수동자상

5층석탑은 1980년대에 만든 것으로 이곳의 유일한 석탑이다. 법당인 대적광전 앞이 아닌 약사전
앞에 바닥돌도 없이 둔 것이 이상한데, 아마도 기존의 대웅전과 나한전이 몰지각한 자에 의해
불에 타면서 임시로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석탑 옆에는 하얀 피부의 문수동자상이 물병을 쥐어들고 조그만 석조(石槽)에 물을 붓고 있는데,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그 작은 병에 도대체 얼마큼의 물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렇다
고 물을 더 나오게 하려고 물병을 쑤시거나 부시진 말자, 그러면 물은 안나온다. 마치 이 땅의
흔한 쌀바위의 전설처럼 말이다.


▲  거대한 유리온실 같은 약사전(藥師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기와를 얹힌 불전(佛殿)이 아닌 유리를 씌운 건물이다. 유리
온실 불전은 거의 처음 보는 터라 기와집 불전에 익숙해진 두 눈이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건물은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
처이다. 원래는 건물도 없이 불상만 있던 야외 법당이었으나 날씨와 온갖 외부 위협으로부터 불
상을 보호하고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해 건물을 구상했는데, 기와집으로 짓기에는 불상이 허벌나
게 크고 소요 예산도 적지 않아 생각 끝에 유리 건물로 짓게 되었다.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의 위엄
서울에서 가장 큰 약사여래불로 지장보살상과 더불어 이 절을 먹여살리는 밥줄이다.
길고 가늘게 뜬 눈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의 눈초리와 좀 비슷해 보인다.


♠  본원정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주변

▲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대신하는 오리연중(五里蓮中)의 현장인가?
연등 속에 몸을 가린 대적광전이 안개에 가려진 산봉우리 같다.

본원정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종무소(宗
務所)와 요사(寮舍), 공양간으로 쓰이고, 2층만 대적광전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자리에는 원래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허나 1996년 5월 22일 기독교 광신도의 불장난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주지 원성이 신도들의 시주에 힘입어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일대를 한데 묶어 지금의
대적광전을 지었는데, 옛 대웅전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2층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삼았으며, 건물 북/서/동쪽 벽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팔상도(八相圖), 신선도(神仙圖) 등을 그려 벽의 공백을 메웠다.


▲  대적광전 앞에 준비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적광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
灌頂臺)에 우뚝 서며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 바가지에 물을 담고 그에 머리
에 물을 껴얹는 관불의식<관정(灌頂)의식>을 행하는데, 때를 모르고 찾아온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이 무성한 날이라 그의 피서 현장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권하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번 해봐
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래서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그를 강제로 냉수마찰을 시켜준다. 물
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오늘이 지나면 그는 어두컴컴
한 창고에 들어가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
喜悅)이 대단할 수 밖에..


▲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적광전 내부

연병장처럼 넓은 대적광전 안에는 덩치가 큰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 석
가불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을 입상(立像)으로 배치해 불단(佛壇)을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니까 3불과 4보살상이
불단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 대신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한가득 두어
중생의 시주로 안치한 작은 관음보살을 원불(願佛)로 봉안했는데, 죄다 금동불(金銅佛)이라 일
제히 금빛을 쏟아내니 가히 두 눈이 흔들릴 지경이다.


▲  마애3존상

대적광전과 약사전으로 오르는 계단 서쪽에는 마애3존상이 자리해 있다. 이 마애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磨崖佛)이자 마애불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충남 서산 마애3존불을 그대로 본
떠서 만든 것으로 '山'처럼 솟은 돌에 돋음새김으로 조성했다.
이들은 1999년 이후에 만든 것으로 그들의 안식처인 돌은 흐린 때가 많이 끼어있는데 반해 본존
불(本尊佛)은 얼굴을 제외하면 죄다 피부가 깨끗해 대조를 보인다. 아직은 파릇파릇한 새 불상
이지만 100년 정도 지나면 저들도 지정문화재의 명예직을 받을 것이다.


▲  연등 구름에 지붕이 가려진 나한전(羅漢殿)

대적광전 맞은편에 자리한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적광전
자리에 있었으나 1996년 5월 방화사건으로 대웅전과 함께 쓰러지는 비운을 겪는다.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대적광전이 완성되자 그 맞은편에 지금의 나한전을 지어 옛
나한전의 뒤를 이었으며, 석가3존불을 중심에 두고, 제일 앞줄에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을
그 뒤로 500나한(羅漢)을 빼곡히 봉안했다.


▲  나한전 중앙에 봉안된 석가3존불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  나한전을 가득 메운 16나한과 500나한의 위엄
우리나라 4,800만 인구만큼이나 얼굴과 머리 스타일, 옷차림,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다.
특히 다른 곳의 나한과 달리 조금씩 색을 달리하고 있어 색채가 매우 컬러풀
(colorful)한데 이들은 주지 원성이 직접 색을 입힌 것이다.

▲  16나한 할배들 - 그들의 조촐한 경로당 같다.

▲  대적광전 뜨락
흑백 연등과 칼라 연등이 거대한 구름으로 피어올라 파란 하늘을 지운다.
그들은 또다른 하늘과 땅을 이루며(연등 아래는 땅, 위는 하늘)
초파일의 분위기를 진하게 수식한다.


♠  본원정사의 보물이 봉안된 명부전

▲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 뜨락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특별하게 푸른 기와를 입혔으며,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6.25시절 산 너머 태고사에서 업어온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그 덕분에 어
엿하게 지정문화재를 하나 보유하게 되어 전통사찰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품게 되었다.

1996년 5월 방화사건 때 명부전에도 화마(火魔)의 손길이 갔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면했다. 그
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지장보살상까지 유린을 당할 뻔했던 아찔한 현장으로 건물 왼쪽 합각
부분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조금 남아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명부전 앞에는 넓게 마루를 두어 중생들에게 조촐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건물 옆에는 의자
와 음료수 자판기를 두었다.


▲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이 봉안된 불단과 닫집)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목 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36호

명부전 불단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유물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앉아있다. 나
를 여기로 소환한 장본인으로 그가 없었다면 이곳에 굳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불상은 원래 북한산성 안에 있는 태고사(太古寺)에 있었다고 한다. 그 절은 고려 후기 고승
(高僧)인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세운 유서 깊은 곳으로 그의 승탑(僧塔)과 탑비가 굵직하
게 남아있는데, 그의 일대기가 적힌 원증국사탑비는 보물 611호, 그의 사리가 담긴 원증국사탑
보물 749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고사의 내력이나 관련 자료에는 본원정사로 넘어온 지장보살상에 대한 언
급이 전혀 없고 단지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본원정사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정말 거기서 넘어
온 것인지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다른 절집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 북한산 태고사 글 보러가기)

▲  지장보살 좌우로 색채가 고운 저승의 10왕과 그들을 담은 시왕탱(十王幀)이
명부전 내부를 마치 저승의 심판 현장처럼 장엄하게 수식한다.


나무로 만들어 금빛 도금을 입힌 지장보살상은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 후기 불상
이다. 머리는 지장보살답게 푸른 색의 승려 머리를 취하고 있고 이마는 무척 넓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길고 가늘게 뜬 눈초리가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의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이며, 코와 입 사이에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얼굴이 좀 넓고 표정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극락에 못간 중생들의 민원에 귀를
기울인다. 몸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가슴 가운데 부분을 노출시켰으며, 옷주름은 자
연스러운 모습으로 온몸을 감싸 아래로 흐른다. 특히 오른쪽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팔
에 걸쳐져 있다가 밑에 입은 옷 속으로 끼워져 있으며, 두 손은 불에 타서 망가진 것을 다시 만
든 것이다. 아마도 6.25때 상처를 입은 듯 하다.

불상의 형태와 옷자락의 표현, 양감표현, 목조 재질이나 다듬은 수법, 복장(腹臟)유물을 넣었던
구멍을 막은 기법에서 1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
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본원정사 목보살좌상'임>

불상 좌우에는 조그만 모습의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고, 그들 뒤에
는 지장시왕탱이 약간은 빛바랜 모습으로 있는데, 이들은 근래에 그려진 것으로 이곳에서는 목
보살좌상을 빼면 고색의 때는 전혀 없다.


▲  본원정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에 절에 왔으니 흔쾌히 절밥을 먹어야 되겠지. 그것이 바로 초파일 절 나들이의 주요 즐
거움이다. 공양은 대적광전 1층 공양간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방이 꽤 넓다. 그 방에는
공양에 임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본원정사에 있는 사람의 절반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공양밥을 주는 장소로 가니 여러 나물이 담겨진 큰 그릇을 준다. 그 그릇에 자기가 먹을 분량의
밥과 고추장을 담고 미역냉국과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하얀 피부의 떡을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절 공양밥이 다 그렇듯이 여기도 비빔밥이다. 콩나물과 시금치, 무채 등의 나물과 밥, 고추장을
잘 비벼 먹으면 되는데, 시장기가 너무 강하다보니 밥을 다른 사람의 2배 이상 담아가지고 왔다.
허나 그에 비해 고추장을 적게 가져와 완벽한 비빔밥을 구가하지 못하고 대충 있는 데로 비벼
먹었다. 허나 밥을 많이 가져와서 그런지 아무리 숟가락질을 해도 밥이 줄지 않는다. 이거 무슨
마법의 밥그릇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섭취를 하니 그릇은 이내 맨바닥을 드러낸다. 미역냉국은 맛이 시원하여 1그릇을
더 먹었고, 커 보이던 하얀 떡도 주섬주섬 먹고 보니 이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외에 커
피나 음료수는 연등 접수 장소에서 따로 돈을 주고 마셔야 되는데 종이컵 커피를 무려 2,000원
씩이나 받는다. 차라리 길다방 커피나 마트/편의점의 캔커피를 사마시는 것이 속편하겠다.

작지만 그런데로 볼거리가 있는 본원정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절집이 조촐하고 역사도 짧
아서 10분이면 다 보고 나올 분량이지만 목보살좌상을 비롯해 경내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공양까
지 겸하니 많은 시간이 금세 흘러간 것이다.

이렇게 잠시나마 정들었던 본원정사를 뒤로하며, 도심 속의 조그만 산사, 본원정사 답사를 마무
리하고 정릉동에 있는 경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내용은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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