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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7 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2. 2013.01.21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 북촌 겨울 나들이 '

▲  기기국 번사창


 


겨울 제국이 차디찬 위엄으로 천하를 꽁꽁 얼리던 연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을 찾았
다.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였지만 옷만 두둑히 챙겨 입으면 낮에는 햇님의 보우에 힘입어 그
런데로 다닐만하다. 날씨가 춥다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못하지. 당당하게
겨울 제국에 대항하며 바깥 바람을 많이 쐬야 건강에도 좋고 추위에도 잘 적응이 된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북촌(북촌한옥마을)은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
각산),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매년 적어도 10번 이상 발걸음
을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그곳에 나만의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북촌한옥마을 자
체가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나만의 꿀단지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다
만 북촌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꿀단지의 질도 틀려지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꿀단지
라도 빈 단지가 되고 만다.
북촌 답사의 갑(甲)은 본인이 늘 강조하지만,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북촌8경이나 정독도서
관, 삼청동길 등의 유명 장소와 맛집, 까페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골목 곳곳에 숨겨진 한
옥과 박물관, 공방, 문화유산, 그리고 북촌을 거쳐간 옛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의 삶과 향기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과 삶터를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뒤집지는 말자. 적당하게
선을 지키며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북촌은 껍데기만 남은 민속마을이 아닌 사람들이 살
며 삶을 꾸리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
원서동 고희동 가옥(高羲東 家屋) - 등록문화재 84호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고희동 가옥 외경

창덕궁길이 2갈래로 갈리는 원서동 빨래터 정류장에 붉은 피부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곳이 바로 2012년 11월에 개방된 고희동 가옥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희동, 그는 누구일까?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 수표동(水標洞)에서
구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9년 한성법어학교(
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다. 바로 그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서양화
를 처음 접했고,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04년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등
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主事)가 되었고, 전주 조경단(肇慶壇) 공사를 담
당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6년 궁내부주사 판임관(判任官) 4등으로 승서되었고,
1907년에는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자 그 시절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
진(趙錫晉)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허나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일색이었다. 그런 동양화에 금세 진절머리가 난 고희동은 서양화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장례원(掌禮院) 예식관 주임관 4등을 지내던 1909년에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왜열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이 땅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서양화를 배웠다.
당시로는 생소한 서양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그림 수업을 마치고 귀국해 신미
술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자매','정자관을 쓴 자화상(현재
동경예술대학에 있음)'을 출품했고, 이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그를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면서 이 땅 최초의 서양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가야금
을 타는 미인'을 출품했고,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중동고보, 휘문고보 등 서울 장안에서 꽤 잘
나가던 중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켰다.

1918년에는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과 서화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바로 그해에 지금의 집을
설계하여 만들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 있던 왜인 화가와 연합해 고려화회(高麗畵會)를 발족하
여 고문이 되었고, 1921년에는 중앙고보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해 자신의 서양화를 천하
에 선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뜰에서'란 그림으로 입선했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
람회 유채수채화 부문에서 4등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조선화단 칼럼과 제15회 협
전(協展)을 기고했으며, 1940년 중원대륙 북경(北京)에서 조선미술관이 개최한 '십대가산수풍경
화전'에 출품해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이 되자 조선문화
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 회장
도 겸했다.

1946년 10월에는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출품했고, 동
화화랑에서 조선미술협회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했다. 1947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으로 천거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1바퀴 둘러보고 왔다.
1948년에는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해 정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했는데,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및 초
대작가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이 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54년에 예술원의 종
신회원 겸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는 민주당의 고문이 되었고, 1956년 국립박물관 국보
전 선정위원이 되었는데, 고희동 외에도 그의 열성제자로 간송미술관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澗
松 全鎣弼)과 서양화가로 유명한 배렴이 그 위원에 선정되었다.
1957년 홍익대 명예교수가 되어 중앙공보관에서 '화필 50년 기념전'을 가졌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부인 조씨가 별세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천주
교에 귀의했고, 1965년 10월 22일,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붓을 놓고 만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새로운 조형 방법을 가르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다. 화단
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해 서양화적 수법을 동양화
에 가미했다. 또한 휘문고보 재직시 제자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해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그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명성에 비해
그만의 그림 화법을 이루지 못했고, 많은 그림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생생히 기억은 하지만 정작 그의 그림을 별로 모르는 실정이다.
 
* 고희동 가옥
1918년에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것으로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 기와집이다. 서양과 왜열도 주거문화의 장점을 반영하여 지었으며 이후에 사랑
채 겸 화실(畵室)을 추가로 증축했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여러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벗들이 안주 1
그릇씩 가져오면 주량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일기회(一器會)를 1주에 1번씩 열었다고 하며,
종종 흥취에 젖으면 즉석에서 벗들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시(漢詩)에도 관심을 가져
한시 창작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의 집을 들락거리던 그의 벗으로는 1907년 같이 그림 공부를 했던 이도영(李道榮), 1918년 서
화협회를 함께 조직했으며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그리고 노수현(盧壽鉉)과 이용우(李
用雨),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 등 이름만 들어도 거진 알 것 같은 현대화가들이 주류
를 이룬다. 그 시절 문학가의 모임 장소가 성북동(城北洞)에 있는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었다면, 미술가의 모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속세의 계속되는 무관심으로 폐가처럼 변해갔고, 2002년에는 한샘이
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무실과 연구소를 두면서 주차장을 만든다며 이 집을 매입해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했다. 그 회사의 부질없는 야욕 앞에 현대미술의 산실이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
가온 것이다. 다행히도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나서면서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
게 좌절되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가루가 되는 꼴은 면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집을 보수해 비공개로 두다가 2012년 11월 비로소 속
세에 개방했으며, 그 기념으로 2013년 1월 중순까지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란 테마로 오픈
기념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북촌의 새로운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성지(聖地)로 북촌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들 정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면 북촌의 주요 성지가 될 것으
로 기대된다.

※ 고희동 가옥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린다. 허나 거리
  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4분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0분
* 관람시간 : 10시~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
  에 무료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활짝 열린 고희동 가옥 대문


▲  고희동 가옥

복원된 고희동 가옥은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이지만 왜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의 일종이
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이 나타나는데, 가옥 내
부에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사랑채와 화실,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옥 북쪽 부분은
통제구역이다.
왜식으로 이루어진 현관에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
면 된다.


▲  뜨락 서쪽에 자리한 대나무의 위엄
겨울 제국의 압제로 푸른 기운을 찾기 힘든 시절이지만 대나무밭만큼은
겨울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제국에 저항하며 독야청청을
유지하는 대나무의 위엄 앞에 잠시 엄동설한을 잊어본다.

▲  뜨락에 놓인 동그란 나무 의자와
길쭉한 돌덩이

▲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둔 돌확으로
고희동 일가와는 관련이 없다.

▲  화실 방향 복도 (중간 문이 사무실)

▲  전시실 방향 복도


▲  예술 문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
왜정 때 미술가의 모임 장소로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으로 고희동이 쓰던
물품과 가옥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갖다둔 물품이 섞여 있다.

▲  문방사우가 갖춰진 탁자에 걸쭉하게 그려진 난초 수묵화
저들은 고희동과는 관련이 없다. 사랑방의 분위기와 고희동의 문향(文香)을
더해주고자 복원 이후에 갖다둔 장식품이다.

▲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저고리 - 옷의 때깔이 무지 깨끗해 고희동의
체취가 담긴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장식용~~

             ▲  고희동 가옥 화실
사랑방과 이웃한 화실은 고희동의 여러 그림이
앞다투어 눈을 뜬 곳이다. 하지만 그의 화실과
관련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그가 활동했던 왜
정 때와 1950~60년대 화실 스타일을 참조해 어
림짐작으로 재현했다.

 


◀  사랑채와 화실 복도


▲  전시실에 진열된 고희동 관련 문서들

가옥 서쪽 부분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좌측에 자리한 전시실은 고희동과 관련된 문서와 사
진, 신문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문서 중에는 복제품이 여럿 있다. 그리고 우측 전시실은 고희
동과 그의 벗들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진품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처럼 섞여있지만, 어느 것이 진품인지 설명문에 표시가 없어 관계자도 아리송할 정도
이다.


▲  위에 있는 문서는 1905년 고희동을 9품 종사랑(從仕郞)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이다. (복제품)
밑에 있는 것은 그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장(1915년 졸업)이다. (복제품)

▲  고희동의 빛바랜 사진과 1901년 한성법어학교 재학 시절에
학업 우수로 받은 상장 (이것도 역시 복제품)

▲  고희동과 그의 가족 사진들
윗줄 가장 왼쪽 사진은 그의 부모 사진이며, 중간줄 왼쪽은 왕년의 그의 사진이다.
그 오른쪽은 간송 전형필 집에서 찍은 것으로 부채를 든 이가 간송이다.
오른쪽 그림들은 고희동이 그린 그림이다.

▲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란 이름으로 실린 고희동 (미술 1964년 6월호)
밑에는 왜정 때 이 땅의 화가들이 조직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발간한 서화협회회보

▲  고희동 관련 신문기사와 사진들

윗줄 왼쪽은 춘곡의 개인전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기사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고희동의 화필생애50년을 기념하는 작품전시회 목록(복사본). 그 오른쪽은 1940년에
서울부민관에서 찍은 개인전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상허 이태준도 있음)
아랫줄 왼쪽은 1957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곡의 변(辯)이란 신문기사로 '춘곡'이란 호
는 이름 희동에서 동(東)을 의미하는 춘(春)과 양곡(暘谷)이란 고문자에서 곡을 따서 지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양화 수입의 선구자라며 고희동을 소개한 1940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  왼쪽부터 한국인물화전 팜플렛과 고희동을 소개한 한국현대미술사
서적(동양편 1976년, 서양편 1977년), 오른쪽은 '현대미술 100년
춘곡 고희동'이란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 한국일보 신문기사

▲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고희동의 그림들 (복제품)

◀  고희동 가옥의 뒷모습
붉은 벽돌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있다.


▲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난 어느 갤러리

북촌에는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전시관, 공방이 있어 북촌 나들이의 꿀맛을 더해주는데, 공예
품이나 장식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갤러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만난 갤러
리(윗 사진)도 그 중 하나로 한국금융연수원 남쪽 언덕배기에 있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갖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이 좀 야박하다. 굳이 구매가 아니더라도 북촌이나 인사동
에 이런 공간이 즐비하므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갤러리에서 만난 이쁜 공예품들


 

♠  구한말에 지어진 무기 창고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1호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나온다. 이곳은
북촌 명소가 아닌 한국은행 소속의 연수원이라 많은 나들이객들은 '삼청동에 왠 연수원?' 고개
를 갸우뚱하며 지나갈 뿐이다. 허나 그 안에 조선 후기 무기 공장 겸 창고인 기기국 번사창(이
하 번사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뚱맞은 한국금융연수원이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번사창은 연수원 내부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연수원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허가를 받아
야 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18시(겨울에는 17시) 이후가 아니면 거의 통과시켜주니 관람에
는 별 문제는 없다. 상황에 따라 번사창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수원 북쪽에
벽돌로 꼼꼼하게 무장된 번사창 건물이 듬직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건물 주위에는 공원용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져 있으며, 번사창 바로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번사창 남쪽 연수원 건물 바깥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커피가 공짜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음)
이곳에 들어온 연수생이나 직원, 기타 업무로 찾은 이들을 위해 공짜로 한 것인데, 시중 자판기
보다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뽑아 마시며, 추위를 녹였지. 근데 상황에 따라 커피를
뽑지 못하도록 매정하게 잠궈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 번사창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격동의 시절인 구한말, 근대식 무기를 만들고자 세운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무기 공장
겸 창고이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6월에 준공된 것으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를 벌일
때 이응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나와 건물의 탄생 시기와 성격을 알려주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 칼과 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
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건물 이름인 번사(飜沙)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한 용기에 화약을 넣고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
는 뜻이다. 근대식 무기가 화약
무기 중심이니 딱 그에 걸맞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창(廠)은 공장을 뜻한다.

1876년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단단히 털린 조선 조정은 신식 무기를 만들고자
기기국이란 관청을 세웠으나 정작 무기 공장은 1884년에야 만들었다. 부국강병을 향한 조선의
꿈이 대단했는지, 기기국과 번사창의 위치를 삼청동 명당(明堂)에 세웠음을 상량문에서 밝혔다.
허나 조선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부 시절을 제외하면 늘 약소국을 면치 면했던 나라라 부국강병
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이후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1910년을 끝으로 기기국
의 역할은 강제로 마감되고 만다.

번사창은 장대석(長臺石)과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다지고 바로 그 위에 검은색과 회색 벽
돌로 사방을 꽁꽁 둘렀는데, 이는 청나라 건축과 서양 건축을 적당히 섞어서 지은 청나라 양식
의 기와집이다. 이렇게 지어진 것은 1881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조선 조정에서 파견
한 영선사(領選使) 출신이 공사를 지휘,감독했기 때문이다.
1883년 번사창을 지을 때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청나라 장인
4명을 잡아와 5월부터 건물 공사에 들어갔는데,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하여 박정
양(朴定陽), 윤태준(尹泰駿) 등이 감독을 했고, 김명균이 상해 험취소(驗取所)에서 무기 제조
기기를 구입해서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건물 준공이 늦어지자 인부들을 독려했으며, 이때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철모자 만드는 곳, 고방(庫房) 등을 만들
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띄고 있으며, 기존 조선의 건물과는 다른 청나라식 건물이라 조금은 이국적
이다. 허나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무기고(武器庫)이다 보니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저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건물의 길이는 33m, 폭 8.5m, 연면적은 217.58㎡에 이른다.

건물 정면 중앙에는 홍예 다리처럼 아치를 튼 붉은색 문을 내었고, 우측 부분에 조그만 문을 두
고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었다. 내부 환기를 위해 5개의 창을 냈는데, 창문은 녹색이다. 측면에
는 문을 1개, 창문을 2개 냈으며, 지붕에는 무기 제조 및 수리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고
자 조그만 창틀을 냈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 지었다.

번사창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저히 군사용으로 쓰인 곳으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별창(別
倉)이 있었다. 군기시 관청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창(北倉)이라 불렸으며, 화약무기를 제조했기
때문에 화약고(火藥庫) 터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에 기기국에 통합되어 이
일대는 기기국 소속이 되었으며, 500여 년 이상 군사용으로 쓰인 이곳의 전통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에 끊기고 만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기국 관청은 왜정에 의해 죄다 사라지고 겨우 번사창 하나만 목숨을 건졌는
데, 왜정은 조선의 관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거나 어정쩡하게 1~2개만 남겨 망국(亡國)을 철저
하게 우롱하였다. 그 이후 기기국 자리에 엉뚱하게 한국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번사창은 그 뜨
락의 장식물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북촌의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생각이지만 한국금융연수원을 외곽으로 쿨하게 옮기고 북촌과 삼청동을 위한
문화/쉼터 공간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던 국군수도병원도 이전
되어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왔는데, 은행 연수원이 북촌 핵심에 굳이 있을 필요는 없
다. 청와대나 국무총리공관, 주변 군사시설 등 국가에 예민한 시설은 어쩔 수 없지만 연수원만
큼은 꼭 옮겨 북촌과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연수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이런 곳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딱 제격이다.

※ 기기국 번사창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2번 출구),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금융연수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국금융연수원 정문이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4번 출구)에서 광화문과 삼청동길을 따라 도보 25분
* 공개시간 : 9시 이후부터 18시 이전(겨울은 그보다 일찍), 연수원 사정으로 개방이 안되는 경
  우도 종종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1 (삼청로 118)

▲  우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좌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북막골

겨울 제국에 저항하며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햇님은 커텐을 치고 사라졌고, 달님이 검
게 탄 천하를 갸날프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꽤나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6시인 걸.
제아무리 태양계에서 제일 크다는 햇님이라 할 지라도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모양이다.
본글에 언급한 명소 외에도 여러 곳을 덧붙여 둘러봤지만 상당수는 이미 지겹게 가본 곳이라 제
대로 사진을 남긴 고희동 가옥과 번사창만 다루었다. 본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고희동가옥이
며, 번사창은 조연, 나머지는 엑스트라로 보면 된다.

세상이 검게 타들어가니 햇님의 눈치에 잠시 움츠려들던 추위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게다가 모락
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라 시장기도 추위와 앞다투어 나를 괴롭힌다. 삼청동을 비롯한 북
촌 일대에는 북촌의 오랜 전통만큼이나 괜찮은 식당이 꽤 많은데, 이번에는 안가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악골도 아닌 북막골, 삼청동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자
리한 식당으로 입구에 식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요란하게 서 있다.
북막골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발을 감싼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
어가서 방에서 식사를 해야 된다. 보온을 따스하게 했는지 방이 매우 따스하며, 천정에는 대들
보를 비롯해 한옥의 선이 우아하게 빛나 있고, 방에는 여러가지 전통 장식물이 달려있어 밥이
나올 때까지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 달래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은 바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방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떡국, 전골, 보쌈, 막국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격은 시중보다
조금 얹혀진 편. (삼청동과 인사동은 괜찮은 식당은 많지만 가격이 좀 있음) 떡국 가운데 겨울
별미라는 굴떡국(한시적 메뉴임)이 있길래 그것을 함 먹어보기로 했지. 어렸을 때는 굴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냥 퍼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잠시 뒤 밑반찬이 차려지고 떡국이 나오는데, 국물도 제법 숙성이 되어있었고 굴과 떡, 김, 파
가 어우러져 괜찮은 떡국을 자아내고 있었다. 밑반찬 가운데는 물김치(나박김치)가 있는데, 맛
이 시원해서 좋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니 방의 온기와 배부른 뒤에 찾아오는 식곤증이 나를 희롱한다. 추운 곳에
서 오래 있다가 따스한 곳에 들어앉아 뜨끈한 것을 먹으니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겠다.


▲  북막골에서 먹은 굴떡국의 위엄

▲  북막골 툇마루에 있는 달덩이 같은 하얀 백자

▲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에서 먹은 십전대보탕과 팥죽

저녁을 배불리 먹었으니 후식으로 차 1잔의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 더군다나 북촌에 왔으니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청동에는 맛집도 많지만 닭의 털처럼 찻집/까페도 많이 있다. 허나 북촌의 성격을 망각한 장
사치와 행정당국의 그릇된 생각으로 한옥 찻집이 줄어들고, 서구 스타일의 거의 획일적인 까페
와 양식당,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적당히 있으면 상관은 없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참 좋
은데, 그 바람은 북촌 곳곳을 들쑤시고 있으며, 삼청동길은 북촌인지 서구의 어느 구석인지 햇
갈릴 정도로 변해버려 뜻 있는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한다.
일반 대중들이야 삼청동길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던 이런 모습도 좋다고 찬양을 하겠지만 상술로
인해 지나치게 상업/서구화 되어 북촌의 성격과 개성에 크게 도전하는 것은 썩 좋지가 않다.

삼청동길이 서울 도심 이상이나 요란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지닌 찻집이 하나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찻집인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다. 찻집 이름치고는 너무나 긴 편
인데, 첫째로 잘하는 집도 아닌 둘째를 칭한 것이 참 이채롭다. 그렇다면 첫째로 잘하는 집도
있어야 되는데, 그 집은 아직 없는거 같다.
첫째를 칭하지 않고 둘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좀 겸손해 보이기도 하고, 1등을 향해 열심히 장
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이며, 자칭 서울 2위라는 우월의식과 자부심도 느껴지기도 한다. 어
쨌든 이름부터가 확 눈에 띄는 이 집은 현란한 분위기의 까페와 달리 1960~70년대 빵집이나 다
방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찻집 내부도 그렇고, 의자와 탁자도 그렇지. 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찻집으로 20대는 물론 중장년층도 많이 찾는다. 삼청동의 다른 까페/찻집은 거의
20~30대 위주인데 반해 여기는 전 연령층을 소화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집에 걸맞게 손님도 많아 평일과 휴일 저녁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찻집 관
계자도 알아서 손님들이 와서 매출을 올려주니 조금은 배부른 모습이고, 내부를 조금 늘렸다고
는 해도 좁은 것은 마찬가지. 삼청동을 숱하게 들락거린 나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다. 이곳을 몰
라서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별로라서 그리 내키지가 않았고 늘 사람들로 가득하니 들
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지(冬至)도 코앞에 다가오고 해서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어서 덥썩 물었다.

이 집은 십전대보탕과 녹각대보탕, 팥죽이 유명한데, 슬슬 건강을 생각할 때라 나는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을, 여인네는 팥죽을 먹었다. 둘다 가격은 6~7천원선, 십전대보탕은 밤과 죽을 비
롯해 온갖 한약제가 뒤섞여 있는데, 차가 아닌 거의 한약이다. 찻집에서 먹는 한약, 이거 먹고
몸 좀 좋아졌으려나 모르겠네. 팥죽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너무 달콤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하여 북촌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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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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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현재와 과거가 나란히 공존하는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北村)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북촌6경 골목길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이다.
이곳에 서린 한옥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살던 안국동 윤
보선가이며, 그외에 한옥들은 대부분 일반 여염집 규모로 작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마당
을 둘러싼 'ㄷ','ㅁ' 구조이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사람들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이
존재한다. 특히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박물관과 공방(工房),
예술/문화공간, 찻집과 음식점,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만 흔쾌히 개방을 하고 있으며, 북촌
문화센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분 개방이나 조건개방(숙박업소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는 전시공간)이 많고 그런 집들도 전체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며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조선이 망하고 왜인들이 남산 주변과 명동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 남쪽에 대거 말뚝을 박으며
시내를 개발하면서 서울의 중심으로 번화했으나, 서울 토박이와 조선 백성들이 주로 살던 청
계천 이북은 근대 건축물(중앙중고 건물, 천도교중앙대교당, 화신백화점 등.)이 몇개 지어진
것 외에는 개발이 별로 없어 남촌에 비해 낙후되었다.
게다가 왜정 이후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북촌 구석구석에 조그만 한옥을 수없이 깔
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배층과 부자들의 동네에서 점차 서민들의 동
네로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옥이 왜정과 해방 이후에 지어짐)
해방 이후 북촌은 도심 한복판에 있음에도 그 뒷전으로 밀려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90년
대까지 마땅한 개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날이 쇠퇴해갔다.

그러던 북촌은 2000년 이후 서울시의 홍보와 뜻있는 이들의 노력,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도
심 속의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줄어만 가던 한옥의 개체수가 다시 늘어가기 시작했다.
북촌이 다시 서울의 꿀단지로 떠오르자 북촌 주민들도 자신의 한옥을 개량하거나 손질하였고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도 다시 한옥으로 고치는 등 북촌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갖은 힘을 아끼
지 않았다. 거기에 종로구청과 서울시청도 북촌 가꾸기 사업을 벌여 흔쾌히 도와주고 있으니
나날이 관광객들이 폭주해 평일에도 국내/해외 관광객들로 북촌 골목길은 시장통을 이룬다.
특히나 북촌8경을 비롯한 북촌의 주요 명소들은 항시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게다가 북악산을
등지고 앞에 청계천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이고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졸부들과 공장(工匠)과 예술가 등이 앞다투어 들어오면서 누워있던 북
촌 땅값이 끝없이 치솟고 있다.

한옥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것은 북촌의 제일 가는 운치로 꼽힌다.
허나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문화/전시/체험공간, 문화유산들 거기에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북촌에 둥지를 튼 박물관은 약 10여 곳 정도로 대부분 규모가 작은 사립박물관이다. 그
러다보니 입장료는 시중보다 상당히 얄미운 수준이다.(성인 기준으로 2,000~6,000원선, 입장
료는 2~3년 간격으로 계속 오르고 있으니 해당 홈페이지나 전화로 문의 요망)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있어 헤매기가 딱 좋으며, 박물관과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이 대부분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북촌8경이라 불리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을 가르는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
길, 북촌길 일대에만 새까맣게 몰려있는데 북촌의 매력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큰 골목길과
작은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돌며 숨겨진 명소를 숨바꼭질하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
며 술래에서 벗어난 그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들락거렸
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구나~' 말을 꺼내지만 여태까
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거의 대부분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고 숙박시설로도 쓰이
므로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
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
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20~21세기 한옥 양식이라 하여 건축사나 미술사
에서 한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  조선 후기 한옥을 개량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거듭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 때 민씨 세도가(勢道家)
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때 '계동마님
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祠堂)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
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
으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문화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수선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舍廊房)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가지 자료로
다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
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는데, 서울 도
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
을 짐작케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茶
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북촌한옥센터 찾아가기 (2013년 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 못미쳐 골목길로 좌회전하면 된다. 안국역
  에서 도보 3분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은 9시 ~ 18시 (토,일은 17시까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 02-3707-8388, 8270)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안채 서쪽 (한옥문화과 사무실)

▲  안채 동쪽 (안방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 규모의 정자
원래 사당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강좌는 보통 3개월 과정으로 진행되며, 여기 외에도 안채와 사랑방에서도 강좌가 열림)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북촌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주변

▲  현대사옥 그늘에 가려진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사적 296호

안국역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다보면 하늘 높이 솟은 육중한 건물, 현대사옥을 만나게 된다. 그
앞에는 현대사옥에 짓눌려 초췌해 보이는 고색의 때가 낀 석조 건축물이 자리해 있다. 바로 조
선시대에 천문(天門)과 기상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상
을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바
로 이곳 관천대로 세종(世宗) 때 조성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관천대의
원로인 이곳을 관상감 관천대라 부른다.

이 관천대는 1434년(세종 16년) 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대사옥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가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
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기기를 올려 하늘의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애칭도 가지고 있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옛 천문시설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사라졌으며, 현대사옥 자리에 휘문고보
(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겼다. 이후 1978년 학교가 강남으로 건너감에 따라
1983년 지금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1984년 지금의 자리에 해체 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렸으며, 석축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허나 그래봐야 고작 3
층 높이 밖에는 되지 않으며, 바로 뒤에 현대사옥이 버티고 서 있으니 마치 해와 달의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 힘들다면 차라리 원서공원이나 고층 빌딩의 눈치가 적은 곳으
로 옮기면 좋으련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천문시설의 잊혀진 원로로 현대사옥의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
게 왔다갔다하며 천문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
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참고로 현대사옥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
(綏嬪朴氏)의 사당>이 사옥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궁<桂洞宮,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
載元)의 집>이 있었으며, 경우궁과 계동궁은 갑신정변 때 개화당 패거리가 고종과 왕족을 호위
하며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206-2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분)


▲  큼직한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 관천대, 돌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굳게 입을 봉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고택

사업가이자 교육가, 언론인으로 우리나라 2대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살던 집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을 위해 독립지사들이 왜정의 감시를 피해 모인 장소이자, 민주
화운동을 위해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진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촌기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택 내부를 꼭 보고 싶다면 억지로 대문을 열거나 월담을 하지 말고 바로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동세무고등학교로 달려가 서쪽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기 바란다.

◀  공방 겸 찻집을 겸한 봉산재(奉山齋, 봉산아
트센터)
북촌문화센터에서 중앙고교로 이어진 계동길 중
간에 자리한 봉산재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열었
다. 나성숙 교수가 옻칠, 황칠을 하는 공방(工
房)으로 전시실과 찻집도 겸하고 있어 전통차 1
잔의 여유를 누 수 있다. 차의 가격은 5~6천원
선, 봉산재 홈페이지는 옆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3-6 (개방시간 10시~18시
/ 매주 월요일, 명절 휴관 / ☎ 02-766-6649)


▲  북촌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한 계동 배렴(裵濂) 가옥 - 등록문화재 85호

봉산재 뒤에는 북촌한옥체험관(북촌게스트하우스)이 있는데, 동양화의 거목으로 명성을 날린 배
렴(裵濂, 1911~1968)이 살던 기와집이다.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3동의 건물이 'ㅁ'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배렴이 사라진 이후 SH공사가
인수하여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체험을 겯드린 숙박업소로 변신했다. 북촌게스트
하우스 관련 정보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2 (☎ 02-743-8531)


▲  이가(李家) 문화체험원
다도(茶道)와 예절을 비롯하여 전통 음식을 만드는 문화체험공간이다.
이곳은 왜인(倭人)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그들의 한국문화체험과
학습을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 서울 종로구 계동 50-1 (☎ 02-762-4900)
* 개방시간 10시 30분 ~ 20시 (1,3째주 일요일은 쉼)

▲  지금은 죽어버린 석정보름우물터

이가문화체험관 부근에 '석정보름우물'이라 불리는 동그란 우물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근래
에 만든 것처럼 보이고 안내문도 하나 없어 사연을 모르는 속인들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지만
오래 전부터 계동 지역의 식수를 담당하던 동네 우물이자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우물로 가치
가 높다.

이 우물은 보름마다 물이 차올라 15일 동안을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는 뜻에서 석정보름우
물이라 불리며, 예전에는 우물 위에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으나 도심이라
물이 마르고 오염되어 결국 우물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이후 1987년 돌과 시멘트로 우물을 복
원하면서 지금은 '석정보름우물터'라 불린다. 이제는 물도 나오지 않는 그저 형색만 갖춘 죽은
우물이지만 북촌의 소중한 옛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天主敎)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계동에 숨어살
면서 영업(?)을 했을 때, 이 우물에서 퍼온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전
한다.

◀  석정보름우물터와 나란히 있는 유심사
(惟心社)터 표석
유심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중앙학교
(중앙중고교) 학생들에게 3.1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일깨워주던 곳이다.


▲  고풍스런 분위기의 락고재(樂古齋) 한옥체험관 정문

재동초등학교 뒤쪽에 락고재라 불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한옥이 있다. 이곳의 이름인 '락고(樂
古)'는 '옛것을 누리는 맑고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옛 선비의 풍류를 즐긴다'는 풍류적
인 뜻이 담겨져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130년 묵은 오래된 집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翁)이 개조하여 전통체험 및 숙박을 할 수 있는 한옥체험
관으로 거듭났으며,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은 방마다 화장실
이 따로 설치되어 편의를 도모했고, 전통 음식과 국악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은 물론 천기토로
만든 장작 찜질방까지 갖추고 있다. (단 숙박비가 비쌈 20~25만원선) 특히 집을 에워싼 담장은
전통 토담으로 정겹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내 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고 싶은 충동
을 절로 일으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218 (☎ 02-742-3410)
* 락고재 홈페이지는 위와 밑에 있는 락고재 사진을 클릭한다.

▲  락고재 뒤쪽

▲  옻칠공방 칠원(漆院, 한국옻칠연구소)

칠원은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호 칠장(漆匠)의 기능보유자인 신중현씨가 운영하고 있다. 옻칠이
란 목기(木器)의 수명을 늘리고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액을 목기(木器)에
칠하는 것으로 이런 목기를 칠기(漆器)라고 한다. 옻칠에는 고무질이 있어 방수에 효과가 있으
며, 잘 썩지 않는다. 또한 옻칠은 오래될 수록 단단해지고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칠원은 오래된 한옥을 매입하여 목조를 개보수했으며, 옻칠 작품이 앞뜨락과 툇마루, 공방 곳곳
에 전시되어 있다. 옻칠과 관련된 유물 300여 점과, 국내 작가들의 옻칠 공예품 200여 점, 옻칠
화 3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옻칠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25 (☎ 02-764-5775)
* 개방시간 : 10시 ~ 18시 (월요일 휴관) / 칠원 홈페이지는 아래 칠원 내부 사진을 클릭한다.

▲  옻칠공방 칠원 내부

▲  옻칠공방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품
묘공(猫公)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가 방망이처럼
유난히 길고 굵직하다.

▲  골목 구석에 자리한 심화숙 한지공방

▲  심화숙 한지공방 내부

심화숙 한지공방은 우리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지화 공예와 색색의 종이를 붙여 그림을 만드는 한지 회화, 종이실로 직물을 짜
는 한지 섬유 공예, 종이를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잘라 기물에 붙이는 전지 공예 등 다양한 공예
가 적용된 가구와 옷, 모자, 항아리, 생활용품을 전시/판매하며, 공방 체험도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32-10 (☎ 02-394-6534)
* 개방시간 : 10시 ~ 17시 (월요일 휴관)


▲  중앙중고 동남쪽의 작은 골목길 ▼
북촌의 조그만 골목길을 거니는 것은 북촌의 백미와 보석을 캐는 것과 같다.
큰길이나 사람들이 많은 길만 다니지 말고 반드시 작은 골목길도
둘러보기 바란다.


♠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쪽 끝, 원서동과 창덕궁길 주변

▲  북촌 주택가와 창덕궁의 경계선인 창덕궁 돌담길 (창덕궁길)

▲  시골 읍내 같은 원서동과 창덕궁길

창덕궁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원서동으로 이어지는 북
촌의 주요 간선로이자 북촌의 동쪽 경계선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속세를 구분짓는 높다란 돌담
과 나란히 이어진 길로 동쪽은 궁궐 돌담, 서쪽은 백성들의 주거지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다. 그래서 덕수궁(德壽宮)이나 경복궁, 창경궁 돌담길보다는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돌담길은
요금문을 지나서부터 집들로 인해 돌담과 조금 멀어지게 되며 빨래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거
기서 길은 끝나버린다.

북촌의 동쪽 변두리이자 창덕궁길이 지나는 원서동(苑西洞)은 창덕궁 후원(後苑)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때는 원동<苑洞, 원동(園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왜정 때 창
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그 서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돈화문에서 창덕궁돌담길을 따라 원서동 쪽으로 들어가면 창덕궁과 바깥을 이어주는 조그만 궁
문(宮門), 요금문이 모습을 비춘다. 문 앞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속인들의 집이 있고 쓰레기봉지
도 가까이에 널려있어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돌담길 일부 구간은 이렇게 민가들이 돌담과 무책
임하게 붙어 있는데, 돌담길 주변 정화가 무척 절실해 보인다.

요금문은 창덕궁 서쪽에 뚫린 3개의 문의 하나로 후원과 매우 가깝다. 이 문은 궁녀와 내관, 상
궁(尙宮) 등이 드나들던 통로로 상궁과 내관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
창덕궁이 지어진 태종(太宗)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
다가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에게 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서거정이 '요금문'
이란 이름을 올리면서 그것이 문의 이름이 되었다.

그저 평범해 보여 지나치기 쉬운 이 문에는 2개의 옛 이야기가 서려 있다.
1623년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갈고 반란을 일으킨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이 된 얼떨떨
하고 통이 작은 인조(仁祖),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보기 좋게 당
한 이후, 그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살았는데, 그 후유증을 달래고자 창덕궁 후원에 경치 좋
은 곳을 골라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
허나 신하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하자 몰래 공사를 진행시켰다. 매년 12월에는 요금문을 통해 얼
음을 궁내(宮內)로 운반했는데, 그 문이 마침 후원과 가깝고 숲이 무성해 인적이 드물었다. 그
래서 내관에게 몰래 일러 문을 닫는 시기를 늦추게 하면서 공사에 쓰일 나무와 돌을 몰래 궁으
로 들여와 정자를 지었다. 이를 발견한 신하들은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중단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유념하여 채택해 사용하겠다'고만 할 뿐, 끝내는 정자를 완성시켰으니, 과연 부국강병(
富國强兵)에는 관심은 없고 허울뿐인 대의명분에 휩싸여 나라를 망친 임금다웠다.

또 하나는 숙종 때에 일이다. 조선을 통틀어 민중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사랑을 받
았던 인현왕후(仁顯王后), 그녀가 숙종(肅宗)에게 폐위되었을 때, 흰 옥교(玉轎)에 실려 이 문
을 통해 추방되었다. 이때 많은 관료들과 선비, 백성들이 옥교를 따라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킬 때 이 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현재 요금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창덕궁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고 무조건 돈화문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  요금문 현판의 위엄
요금문은 입장료, 요금을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빛나다와 일월(日月), 오성(五星)을
뜻한다고 한다.


▲  수레 1대 다닐 정도로 좁은 원서동 골목길

▲  궁중음식연구원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38호)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곳으로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궁중음식으로 유명한 황혜성, 한복려 선생 모녀가 운영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34 (☎ 02-3673-1122~3)
*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창덕궁 후원 물이 졸졸 흐르는 빨래터

창덕궁돌담과 이어진 원서동 북쪽 끝에 창덕궁 후원 물이 속세로 나오는 공간이 있다. 담장 밑
에 수구(水口)를 뚫어 후원(後苑)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도심 속 청정지대인 후원에서 나온
물이라 제법 차고 깨끗하다. 수구 앞에는 발을 들일 수 있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빨
래터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던 공간이다.

담장 안쪽은 태조(太祖)와 제왕들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던 신선원전(新璿源殿)이 있다. 창덕궁
가장 서쪽 구석에 자리한 신선원전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비공개구역으로 남아있는데, 중앙
중고교 운동장에서 철조망 너머로 그곳을 굽어볼 수 있다. 운동장 축대 바로 밑이 바로 신선원
전이기 때문이다. 그곳 주변을 흐르는 계곡이 바로 빨래터로 흐르는 것이다.

이곳이 빨래터가 된 것은 옛날 궁녀들이 이 물에 세수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를 많이 사
용했는데, 그것을 쓰면 물이 뿌연 색을 띄었다.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하여
장안 아낙들이 몰려와 빨래를 하면서 빨래터가 된 것이다. 궁궐 내를 흐르는 계곡이나 금천(禁
川)이 바깥으로 흘러가는 통로는 여럿 있지만 이곳은 숲이 우거진 후미진 곳이고, 담장 너머로
바로 민가들이 있기 때문에 여염집 처자들이 빨래를 하기에는 제격이다. 게다가 궁궐에서 나온
물이니 그 물로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는 긍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통해 세상 구경을 나온 계곡은 창덕궁길을 따라 청계천으로 흐르는데, 도시화란 이유로
죄다 콘크리트로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의 속살을 속시원히 드러내면 좋으련만 정녕 어둠의 경
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일까?


▲  강제로 어둠의 경로로 흘러야 되는 빨래터 물의 비애

▲  굳게 닫힌 창덕궁 신선원전 외삼문(外三門)

▲  원서동 백홍범(白鴻範)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3호

빨래터를 지나 돌담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면 높다란 담장과 굳게 닫힌 문으로 일관하는 한옥이
있다. 그 집이 바로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백홍범 가옥이다. 이 집은 원래 안채의 별채로 '
ㄱ'자 모양을 띄고 있는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있으며, 동남쪽에 작은 방 1채가
있다.
191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선 황실(皇室)에서 은퇴한 상궁들이 주로 기거했으
며,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지만 여기서 더 이상 길은 열리지 않아 왔던 길로 다시 되
돌아나가야 된다. 창덕궁에 단단히 막히고 길도 좁은 빨래터 일대는 도심 속의 외로운 벽지 같
은 곳이다.

* 백홍범 가옥, 빨래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9-5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2분 거리
*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고희동 가옥)에서 내리면 된다. 허
  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걸어가기를 권한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7분 거리이다.


▲  고희동(高羲東) 가옥 - 등록문화재 84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 왜국 유학을 마치고 1918년에 돌아와 직접 설
계하여 만든 한옥이다.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집으로
서양 주거문화와 왜열도 주거 문화의 장점을 취해 한옥에 적용했는데, 그는 이곳에 41년을 살면
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휘문고보 미술 스승
으로 그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하며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2002년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한샘'이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
무실과 연구소를 만들면서 주차장을 만들고자 이 집을 매입하여 싹 밀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발벗고 나서자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낡은 집을 보수했으며, 2012년 11월부터 속세에 개방되어 2013년 1월
15일까지 오픈 기념 특별전(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을 조촐하게 열었다.


* 관람시간 : 10시 ~ 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비원손칼국수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북촌에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먹을거리와 맛집도 풍부하다. 특히 삼청동에는 청와대나 국무
총리공관 등의 고위 관료들이 단골로 찾는 식당들이 많다보니 다른 곳보다 맛의 질과 가격이 높
은 편이다. 거기에 찻집과 까페도 즐비하니, 구경 잘하고, 거기에 1끼 잘 먹고, 차 1잔의 여유
까지 누릴 수 있다.

현대사옥 뒤쪽 북촌1경 부근에 자리한 비원손칼국수는 칼국수 전문 식당이다. 잘 우려낸 국물에
국수사리와 파 등을 넣은 것으로 국수도 괜찮지만 국물 맛이 단연 일품이다. 반찬은 부추와 김
치 2종류로 칼국수의 찬으로는 적당하나 별도 메뉴인 만두는 높은 가격에 비해 양도 적고 맛도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맛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원(秘苑)이란 말도 왜정이 창덕
궁 후원을 깎아내리고자 쓴 말인데 그걸 식당 이름으로 쓰고 있으니 이 또한 함정이면 함정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름을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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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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