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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12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2. 2018.01.23 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3. 2016.08.22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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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사 3층석탑
◀ 풍산심씨 심사손 묘
▶ 약사사 석불입상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천하를 한참 삼키던 6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서구의 상큼한
뒷동산인 개화산을 찾았다.
개화산은 서울 서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북쪽 끝으머리에 매달린 우리집(도봉동)에
서 꽤 먼 곳이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서로가 끝과 끝이라 거리도 거의 40
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은 걸려 그곳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그
러다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발이 잘안가게 된다.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
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매우 무성하여 풍경도 아
름답다. 산 동북쪽에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
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때 주룡(駐龍)이란 도인(道人
)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
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
도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
(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
주산(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서
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
(獅象之形)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알찬 개화산에는 괘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오래된 석
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
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터, 봉수대, 상사
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 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 둘레길 3.35km)이 닦으면서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를 설치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본글에서는 능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약사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  옛 능말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16-3호)와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16-6호)

개화산에 안기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오래 숙성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형제로 삼정초교 남쪽에 작게 터를 닦은 느티어린이공원(이
하 느티공원)에 자리해 있는데 나는 약사사와 미타사, 풍산심씨 심정공파 묘역, 강서둘레길에
만 눈이 어두웠지 그들 고목(古木)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나들이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인 이들 나무는 공원 남쪽에 삼삼하게 우거져 공원 전체
에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를 제대로 긴장 타게 한다. 그들 가운데
몸통이 큰 동쪽 나무 2그
루가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서쪽 나무 2그루는 그들의 후손임)
가장 둘레가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높이 11m, 둘레가 4.44m에 이른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는 1972년 10월 12일로 그때 추정 나이가 435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강제
로 얹혀져 지금은 480년 정도 된다. 그 옆의 느티나무는 여기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로
높이 17m, 둘레 3.86m이다. 1974년 4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480년
이라 지금은 520년 정도 되었다.

이들은 솔직히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말
단 보호수에 머물러 있다. 우리집과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아무 손
색이 없거늘, 오랫동안 보호수로 있다가 2013년 봄에서야 겨우 지방기념물로 승진된 바 있고,
반면 가치는 좀 떨어져 보이는데 외람되게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적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의문을 내던지게 한다.
허나 이들이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잣대에 관심이나 있을까? 보호수이든 천연기념물이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올해도 무탈히 잎을 피우고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로
서의 소소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무는 신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심정(沈貞)이 심은 것으
로 전해진다. 중종(中宗) 시절에 심정 일가가 이곳에 정착해 자연마을을 이루었는데, 심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심씨마을<또는 심울(沈蔚)이라 했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곡리, 긴동
리와 함께 옛 방화동을 이루던 마을로 인조 시절에 왕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 1632년
인조에 의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의 능을 양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려다가 터가 좁아서 김포
풍무동으로 옮겼는데 그 연유로
능(陵)이 들어가는 능말(또는 능골, 능리)로 불리게 되었다.

1992년 능말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가해지면서 마을은 강제로 사라졌고, 주민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는 방화택지지구가 들어서 성냥갑 아파트와 건물이 잔뜩 심어
지면서 전원(田園) 분위기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다행히 이들 나무는 개발의 칼질도 쏙 피해가
면서 제자리를 지켜 옛 능말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게 해준다. 만약 보호수 등급이 아니었다
면 아무리 몇백 년 묵은 나무라고 해도 진작에 아작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의 현실이다.


▲  느티공원 놀이터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엄

능말의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였던 이들 나무 형제는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방화지구의 정자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4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지만 주변이 싹
낯설게 변해 나무 자신도 가끔 놀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옛 능말의 유일한 흔적인 것이다.
개발의 칼질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능우회(陵友會)란 모임을 결성했는데, 1992년 10월 17일에
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애향(愛鄕) 능말 옛터' 비석을 나무 그늘에 세워 추억 속
으로 사라진 옛 고향을 그리워한다.

* 느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799


▲  개화산약수터

티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숲내음이 진동하는 개화산이다. 여기서 북쪽 길로 가면 문
정공파 묘역의 시조(始祖)인 심정 묘역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산길을 3분 정도 오
르면 개화산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화역을 나올 때 마신 커피음료가 목구멍에서 채 마르기도 전이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
냥 못지나치듯 샘터를 보면 꼭 물을 한모금 마셔야 발길이 떨어진다. 그래서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마시니 확실히 자연산이 더 좋은 것인지 앞서 마신 음료보다 더 시
원하고 달달하다. 아직 수질은 적합 판정을 받고 있지만 약사사 약수터를 비롯해 개화산에 적
지 않은 약수터가 개발의 칼질에 목이 달아난 상태라 이곳의 미래도 나처럼 장담하기가 어렵
다 부디 다음에 올 때도 이곳의 물을 꼭 마셔야 되는데,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산길 옆에는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계곡 양쪽에 시멘트을 발
라 둑처럼 만들면서 아주 심하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그래도 엄연한 산골인데 돌에 걸
터앉아 발을 담굴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계곡이 아닐까 싶다.


▲  개화산약수터 주변 오솔길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심정(沈貞) 묘역

개화산 동쪽 자락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하 문정공파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들 묘역은 심정을 시작으로 그 자손들 50~60여 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2곳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로 방원중교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금낭화로17
길 주변과 삼정초교 서쪽 산자락에 있음)
이들 무덤 중 심정과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沈守慶) 묘역과 그에 딸린 석물, 신도비가 지방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아님) 개화산을 주산(主山)으로 한 명당자리로 명
성이 자자하다.


정공파 묘역의 시조는 심정이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묻혔기 때문이다. 허나 먼저 묻힌 이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손
이다. (심정은 1532년, 심
사손은 1528년에 사망)
심정의 묘역은 문정공파 묘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삼정초교 바로 뒤쪽(서쪽)이다.
이곳에 가려면 느티공원에서 개화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언덕 길로 가면 되는데 심정 쉼터
를 지나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샛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심정과 심사순의 묘역이 모
습을 드러낸다.

심정(1471~1531)은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던 심응(沈膺)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502년 별과(別科)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03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
안(成希顔) 등에게 붙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귀국하여 남
곤(南袞), 김극성(金克成) 등과 짜고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를 제거하고자 옥사(獄
事)를 벌이지만 실패했다.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지냈고, 151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
)의 태클에 물러나고 만다. 151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후보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를 중
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공격을 받아 소인(小人)으로 찍혔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瑭)의
거부까지 겹쳐 결국 떨려나고 만다.

이후 심정은 집과 가까운 가양동(加陽洞) 한강변에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
래다가 아들 심사손까지 사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사림패거리에 대한 원망이 아주 머리 끝
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머리가
좋고 꾀를 잘 내어 주변으로부터 지혜주머니라 불렸는데, 이때부터 그 주머니가 복수의 칼날
을 위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1519년 조광조가 왕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偉勳) 삭제를 청하면서 훈구파(勳舊派)를 건
드렸다. 이때 심정도 정국공신 자격을 삭탈당했는데 훈구파는 물론 왕의 후궁들까지 조광조에
게 치를 떨게 된다. 바로 이때다 싶어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짜고 조씨전국<趙
氏專國 :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이란 말을 궁중에 퍼트려 왕을 홀리게 했다.
조광조와 조금 거리를 두던 중종은 그 말에 넘어가고,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남곤, 홍경주(洪
景舟)와 연합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패거리를 죄다 아작을 내버렸다. 사림의 핵
심인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쓰디쓴 사약을 먹여 영원히 보냄으로써 피맺힌 원한을 아주 속시
원하게 푼 것이다.

이후 남곤과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그와 사이좋게 국정을 장악했으며, 1527년 남곤이
죽자 좌의정(左議政) 및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 김극핍(金克愊)을 수하
에 두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세자<나중에 인종(仁宗)>의 인척 관계자이자 라이벌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경빈박씨의 동궁(세자)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
서 심정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안로는 이때다 싶어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
예(權輗)를 구워삶아 심정을 탄핵했으며, 중종의 명으로 평안도 강서군(江西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심정의 부하인 이항과 김극핍까지 엮어
신묘삼간(辛卯三奸, 1531년)으로 내몰면서 끝내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딱
60이었다.

심정의 시신은 그의 일가 뒷쪽 개화산에 묻혔으며, 1534년 부인이 합장되었다. 이후 김안로가
죽자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받으니, 그 연유로 그의 묘역이 문정공파 묘역이 된 것이다.
시호는 받았지만 명종(明宗) 이후 권력의 핵심에 서서 훈구파 못지 않게 파행을 일삼은 사림
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를 제대로 절단낸 경력 때문이다. 그들은 남
곤과 심정을 한데 엮어 곤정(袞貞)이라 부르며 소인배의 대명사로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지금
까지 전해져 심정하면 개혁을 꿈꾸던 사림을 아작낸 기묘사화의 원흉, 지나친 권력의 화신 등
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도 그렇음)

심정은 권력욕이 대단하고 자신의 지혜를 과신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으며, 끝내 그 무리수로
스스로를 말아먹게 된다. 허나 다행히도 그와 아들 심사순 정도만 권력싸움에 패해 불명예스
럽게 퇴장했을 뿐, 그의 자손들까지 화는 미치지 않았으며, 아들 심사손과 손자 심수경은 많
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의가 대단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
지 살펴주었으며, 형제와 가족을 잘 챙겨주었다.

심정의 묘역은 부인(하양허씨)과 합장된 봉분(封墳) 1기와 묘비<묘갈(墓碣)>, 상석(床石), 문
인석 2기가 전부인 조촐한 모습으로 신도비는 없으며,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손
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  심정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  심정묘를 지키는 문인석(文人石) 2쌍
500년 가까운 고된 세월의 무게를 입고 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다. 저들이 멀쩡히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심정묘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됨)


▲  심사순(沈思順)과 부인 덕수이씨 묘

심정 묘 밑에는 심사순의 묘가 자리해 있다. 심사순(1496~1531)은 심정의 아들로 자는 의중(
宜中), 호는 묵재(默齋)이다. 심정의 맏형인 심원(沈元)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후사로 들어갔
으며, 시를 잘짓고 문장에 아주 뛰어나 17세에 초시(初試)에 장원해 사림패거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붙었고, 151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
文院)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리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0년 산릉(山陵)에 대한 지문(誌文)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1531년 그 지문의 글이 문
제가 되어 필적을 대조받기도 했다. 그때 심정 일가를 아작내려는 김안로가 이름을 숨기고 글
을 썼다는 이유를 내세워 옥에 가두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결국 거
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조그만 봉분과 묘비(묘갈), 상석, 문인석 1쌍이 전부로 바로 정면이
낭떠러지이다. 그 너머(동쪽)로 삼정초교와 방화1단지 아파트가 보이며, 예전에는 경사진 곳
이었지만 방화지구 개발로 인해 각박한 낭떠러지가 싹둑 잘리게 된 것이다.


▲  심정묘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  심일취(沈日就)와 부인 광산김씨 묘

방원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 중간에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모르고 빼먹었다. 하여 본글에서는 다루지 않
는다. (어차피 예전에 다 봤음)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직전에 문정공파 묘역을 알리는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그 동쪽 산자락에 무덤이 여럿 있는데, 윗쪽에 심일취의 묘가, 밑에는 심사손 묘와 신
도비가 자리한다.

심일취는 심수경의 2번째 아들로 자는 중진(仲進)이다.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식년시(式年
試)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으나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장을 잘 지어 심정과 심사손의 묘갈(墓碣)을 직접 썼으
며, 죽은 이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상석과 묘갈(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심사손의 묘가 나온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沈思遜, 또는 沈士遜>과 부인 전의이씨 묘

심사손(1493~1528)은 자가 양경(讓卿)으로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517년 대과(
大科)에 급제했고,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필(史筆)을 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군무(軍務)를 익혀 그런데로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1525년 의정부(議政府)에 배치되어 사인(舍人)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
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던 중, 압록강(鴨綠江) 너머의 여진족이 저항할 조짐을 보이자 중
종은 그의 품계를 높여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했다. 만포는 평안북도 강
계(江界) 서쪽에 자리한 변방이다.
심사손은 덕과 무력으로 여진족(女眞族)을 달래고 정벌하면서 변경을 안정시키니 군사와 여진
족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복종했으며, 1528년 1월 진중에 땔감이 부족하자 군사를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에서 나무를 벌채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불만을 품고 습격을
하는 통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명줄이 다되었는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소식을 접한 중종은 명신(名臣)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했고, 며칠 동안이나 제때 수라를
들지 못했다고 하니 그만큼 왕의 신망이 대단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신은 그해 3월 11일
개화산에 묻혔으며, 문정공파 묘역의 첫 무덤이 되었다.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자 기절하여 간신히 소생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그는 1578년 86세의 나이로 뒤늦게 남편을 따랐다.

심사손의 묘는 봉분 2기, 묘갈(묘비),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
정과 심사순도 갖추지 못한 신도비를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정과 심사순은 권력싸움에
밀려 곱지 않게 죽은 탓에 간신히 문인석 1쌍만 갖추고 끝났지만 심사손은 나름 공적도 크고
왕과 아버지의 후광(後光)도 대단해 신도비까지 두게 된 것이다. 만약 1531년까지 살아있었다
면 그도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묘라고 꼭 무탈한 것은 아니다. 2009년 가을에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정공파
묘역은 정말 도굴은 모르고 살았건만, 도굴범의 마수가 이곳까지 미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이때 무엇이 도굴당했는지 파악된 것은 없다. 무덤 부장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도
아직 잡히지 못해 더욱 분노를 치밀게 만든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 묘갈

▲  부인 전의이씨 묘갈


          ◀
  심사손 신도비(神道碑)
심사손묘 동남쪽에 자리한 이 신도비는 1580년
에 세워졌다. 신도비는 고위 관리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보통 신
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비석 높이는 311cm, 폭 120cm로 비문(碑文)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 송인(宋寅)
이 썼으며, 행온성도호부사 한준(韓準)이 두전
을 썼다.
네모난 비좌(碑座)에 오랜 세월의 때가 멋지게
낀 비문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를 두었는데,
이수 조각이 꽤 섬세하고 생동적이다.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약사사로 통하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들어가면 심
  수경, 심일취, 심사손의 묘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직진하면 개화산이다. 여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가면 심정묘와 이어지고, 직진(서쪽)하면 약사사길(금낭화로17길)과 만난다.
* 방화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651, 654, 672, 6629, 6648, 6712, 강서구 마을버스 07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일대


 

♠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
(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
(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
(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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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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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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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
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숨죽여 품고 있다.

양천 지역은 신라 중기까지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공
암(孔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후기에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가락국 김수로왕
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가 되는 허선문(許宣文)이 구암
공원 서쪽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고자 군
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을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의 지
위를 얻었다. 이후 태조는 그의 공을 더욱 치하하고자 장경공(莊景公)의 작위(爵位)와 함
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양천허씨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된다.

공암은 1301년 양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을 관청이 잠시나마 신정동 연의골로 옮겨
지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양동 궁산 남쪽이 쭉 양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조선8도
를 23부로 개편했을 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13도제를
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허나 1914년 김포군에 강제 통합되면서 오랫동안 독립적
인 고을을 유지했던 양천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63년 옛 양천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강서구(江西區)에서 남쪽 일대
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하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현재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
촌읍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의 일부로 너른 평야가 고을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
을 북쪽에는 한강이 흘러 수많은 선박들이 오갔다. 허가바위 부근에는 서울과 행주나루를
잇는 공암나루가 있었고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 등 한강을 옆구리에 낀 멋드
러진 명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으로 부임
하여 양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그림에 담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
許浚)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의 일원이 된 이후, 오랫동안 김포평야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시골 마을로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개발이 가양동 일대를 칼질하면서 전원 풍경이 퇴색되고 그 화려했던 명소
들마저 적지 않게 희생되거나 궁색한 처지가 되었다.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닦이면서 허가바위와 궁산 북쪽까지 넝실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가양택지 개발로 광주바위는 옛날의 명성을 잃고 구암공원 한쪽 구
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 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
대로 나눠볼 수 있다. 구암공원에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허준
과 이 땅의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宮山)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오래된 성터인 양천고성터, 근래에 복원된 소악루, 양천관아터, 겸재정선미술
관, 궁산 산책로 등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거리도 가까워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옛 양천현아(陽川縣衙)터

양천향교 남쪽에는 양천 고을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 양천현아는 중앙에 고을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종해헌(宗海軒)>이 있었고,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이,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읍치(邑治)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 땅의
옛 고을 중 동헌과 객사, 향교 등의 읍치가 50m 반경 내에 싹 몰려있는 곳이 이곳 양천뿐
이라는 것이다. (양천은 읍치와 고을을 지킬 읍성도 갖추지 못했음)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이 있었고, 향청(鄕廳) 동쪽에는 장교청(將校廳
)이, 그 좌우로 창고가 있었으며, 종해헌 부근까지 한강수가 넝실거렸다고 한다. 허나 왜
정(倭政)에 의해 이들은 고약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겨우 향교만 살아남았다.
현재 동헌 자리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찼고 객사 자리에는 홍원사란 절이 둥지를 틀었
다. 그 외에 사직단(社稷壇), 성황사 등이 향교 주변에 있었으나 겨우 성황사만 남아있다.


 

♠  옛 양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서울 유일의 향교로 주목을 끄는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 지방기념물 8호

▲  양천향교 홍살문

향교(鄕校)는 조선 정부가 서울을 제외한 각 고을에 세운 유교식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
학교와 비슷하다. 양천향교는 양천고을의 유교식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서울 유일의 향교란
점이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은 서울의 일부로 조용히 묻혀있지만 1914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
도에 속한 별도의 고을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향교는 1411년에 창건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되고 제
사기능만 남으면서 슬슬 황폐화된 것을 1945년 명륜전을 중수했으며, 1965년 대성전과 외삼문
을 보수했으나 많이 부실했다. 하여 1977년 복원 계획을 수립, 1980년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1981년 1차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으며, 1986년 2차 보수를, 1994년에 3차, 2007년에 4차 보수,
그리고 2008년에 전면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90년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양천향교'가 아닌 '양천향교
터'이다. 아마도 1980년 이후 기존 건물을 싹 갈아서 그렇게 이름을 정한 모양으로 근래에 복
원된 탓에 고색의 무게는 크게 내려앉아 다소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문이 닫힌 여타 향교
와 달리 속세에 늘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뾰족한 홍살문이 아주 차갑게 나그네를 맞이한
다. 홍살문 서쪽에는 유예당(遊藝堂)과 전통놀이마당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로 들어
서는 외삼문과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서쪽에는 가양동 일대에서 수습된 비석 9기가 똘똘 뭉
쳐 있는데, 이들은 양천현감이나 이곳에 들린 경기도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
비(不忘碑)이다.

좌측만 열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조그만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향교 학생들의 숙식공간이다. 그런 동/서재를 바라보고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교육 공간으로
지금의 교실이나 강의실과 같다. 향교에서 2번째로 중요한 건물이라 규모가 우람하며 현역에
서 은퇴한 신세지만 여전히 위엄이 넘친다.
명륜당 옆구리를 지나면 높다란 계단 끝에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향교의 중심인 대
성전(大成殿)에 이른다. 허나 내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외에는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어 굳이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리자에게 요청하기 바란다. 허나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
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이 향교에는 서울 유일의 홀기(笏記)인 양천현 홀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양천고을 현감이 참
여하는 행사와 의식 절차를 적은 것으로 홀기 11종,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3종 등, 14종의
문건을 하나의 서첩(書帖)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객사에서 지내는 망궐례(望闕禮)를 비롯
하여 사직대제(社稷大祭), 성황제(城隍祭), 려제(癘祭), 알성례(謁聖禮)와 국상시(國喪時) 곡
반례(哭班禮) 등으로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4호이다.

◀  양천현 홀기 (문화재청 사진)
이 문서는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외삼문(外三門)
보통은 좌측문(동쪽문)만 열려있고 가운데 문은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  외삼문 우측에 옹기종기 모인 비석들

외삼문 우측에 심어진 비석 9기는 양천 고을의 오랜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유물로 양천현감과
경기도관찰사의 선정비 및 불망비이다. 저들 중 진정으로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는 몇이
나 될까? 태반은 형식적인 비석이거나 세금 착취를 위해 만든 비석일 것이다.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고색의 무게가 크게 깃들여져 중후함이 느껴지며, 앞줄 가운데 비석은
특별하게도 기와 모양의 지붕돌을 지녔다.

▲  서재(西齋)
일반 백성 자재들의 숙소로 그 모습은
동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재(東齋)
양반이나 관리 자재들의 숙소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  공자왈 맹자왈이 들릴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교육 공간으로 교궁(校宮)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 학생 30~50명이 수업을 받았으
며, 교수(敎授) 1명과 직원 1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비록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과 초/중/고생을 위한 한문과 서예 등의 교양 강좌가 열리고 있어 명
륜당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  글씨에 힘을 불어넣은 듯한 명륜당
현판의 위엄

▲  대성전을 품은 채, 입을 봉한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자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5성(공
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과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
현(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등)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위치가 높은 건물이라
보통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둔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내삼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담장 너머로 보려고 해도 가파른 곳에 높게 울타리를 친 터
라 대성전의 얼굴 조차 보기 힘들며, 문틈으로 보이는 범위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개 대성전
의 얼굴이 그렇게 비쌌단 말인가? 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272호)이나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212호)도 저렇게 비싸게 놀지는 않는데 말이다.


▲ 대성전 우측에 자리한 전사청(典祀廳)
대성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측에 자리한 맞배지붕의 전사청만 온전하게 보인다.
전사청은 제례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  명륜당 뒤쪽 굴뚝
흙과 기와로 닦여진 그 모습도 정겨운 굴뚝
2개가 명륜당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양천향교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강서농협이 있다. 농협
  앞 골목길(양천로49길)을 따라서 7분 정도 쭉 들어가면 양천향교가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6630,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양천향교역(휴먼빌
  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에 있는 강서농협으로 건너가서 양천로49길 골목길로 진입하여 쭉
  들어가면 된다.


★ 양천향교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정(丁)이 들어가는 1번째 날>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양천향교역 내부에 향교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어 향교 홍보물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외삼
  문에 방명록과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이 땅에 많은 향교가 있지만 이렇게 홍보물과 홈페
  이지까지 갖춘 향교는 거의 없다.
* 단체관람을 원할 경우 미리 연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성년례와 혼례, 상례와 제례 등의 가정의례와 한문, 예절, 충효 등의 교양강좌를 운영한다.
  자세한건 전화 문의 또는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양천로47나길 53 ☎ 02-2659-0076)
* 양천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가양동의 든든한 뒷동산, 궁산(宮山) 둘러보기

▲  녹음이 짙은 궁산 산책로

양천향교 뒤쪽에는 가양동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궁산(74.3m)이 야트막하게 누워있다.
한강변에 솟은 조촐한 뫼로 가양동에는 궁산 외에 탑산도 있었으나 개발의 난도질을 당해 겨
우 허가바위 주변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궁산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지인 가양동에서 유독 하늘 높이 솟은 궁산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
鎭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한강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 자락에는 희미하게나마 백제나 신라 때 지어진 옛 성터가 있으며,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와서(1740~1744년까지) 궁산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현장
이 바로 소악루이다. 또한 6.25시절에는 국군이 주둔하며 북한군을 격퇴했다.

궁산에는 양천고성터와 복원된 소악루, 관산성황당, 양천향교 등의 오래된 명소가 있으며, 조
망이 일품이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주변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강서구에서는 궁산을 근린공
원(면적 약 133,700㎡)으로 삼아 산책로와 운동시설, 조망터 등을 만들었으며, 양천향교 서쪽
과 겸재정선미술관, 마곡금호어울림아파트 쪽에 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산이 워낙 작아
서 빨리 둘러보면 30분 정도, 아주 여유롭게 둘러보면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소악루
와 궁산 정상은 한강을 낀 야경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  궁산의 작은 꽃, 소악루(小岳樓)

한강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궁산 북쪽 절벽에 단아하고 조촐한 맵시의 소악루가 있다. 이 누
각은 조선 영조 때 동복(同福, 화순군 동복면) 현감을 지낸 이유(李糅)가 궁산 강변 악양루(
岳陽樓)터에 재건한 것으로 중원대륙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에 버금간
다하여 소악루라 하였다. 즉 작은 악양루인 셈이다. (이유는 동정호의 악양루를 가본 적도 없
음)

소악루에 오르면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등 서울 도심을 둘러싸
고 있는 산과 멀리 관악산(冠岳山),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까이로 탑산과 선유
봉(仙遊峰), 한강 줄기가 이어져 예로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겸재 정선도 소악루에 올
라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당시의 경관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소악루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위치는 가양동 산6-4번지 세숫
대바위 근처로 여겨지는데, 이미 아파트들이 첩첩하게 들어선 상태라 제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각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지은 아담한 정자 같다. 게
다가 흙이 아닌 보도블록 바닥에 뿌리를 내린 탓에 정취와 옛 명성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복
원을 하더라도 소악루와 주변 풍경을 배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 역시 대충대충 탁상행정이
빚어낸 폐해이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1)
한강을 벗삼아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도로와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
그 너머로 쓰레기를 발판 삼아 어엿한 산맥이 된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한강 건너편은 고양시 덕은동과 현천동 지역,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의
힘찬 줄기가 살짝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루에는 겸재가 궁산에서 그렸다는 진경산수화 복사본과 해당 그림의 해설판이 있다. 그러
니 그림에 담겨진 풍경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보며 주변 풍경을 대해보기 바란다. 억겁의 세월
이 한강수처럼 흐르는 동안 그림에 담긴 모습과 현재 모습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산줄기만
큼은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이다.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1740년 궁산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그림이다. 높이 솟은 두 줄기의
산은 북한산(삼각산)이며, 그 아래 야트막하게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솟아있다. 그 주변에
노고산과 와우산, 만리동고개, 애오개 등의 윤곽이 보이며, 지금은 하늘공원에 가려 만리동고
개와 애오개는 보이지 않는다.


▲  안현석봉(鞍峴夕熢)

안현(鞍峴, 갈마재)은 연세대 뒷산인 안산(鞍山)이다. 겸재가 안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를 그림에 담은 것으로 가까이에 탑산과 광주바
위(그림 오른쪽 아래)를 그림 앞쪽에 끌어낸 것을 보면 궁산에서 탑산과 안산을 바라본 풍경
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그림 왼쪽에 소악루가 있고, 그 부근에 조그만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소악루를 세운 이
유의 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는 탑산, 선유봉 등이 있고, 멀리 남산과 와우산이 보름
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밑에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양천고성터(陽川古城址) - 사적 372호

소악루 서쪽 산자락에 아련히 남아있는 양천고성터는 궁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길이 220m
, 면적은 29,370㎡인 조그만 산성(山城)이다, 백제 또는 신라 중기(6~7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성 이름은 딱히 전해오는 것이 없어 고을 이름인 양천을 따서 양천의 옛 성이란 뜻
의 양천고성이라 불린다. 한강과 접한 북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느긋하다.

성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
지(大東地志)' 등에 전하며 성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적심석(積心石)과 성돌이
몇몇 남아있고, 높이 2~3m 정도의 성곽 윤곽이 일부 남아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전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권율(權慄) 장군이 오산 독산성(禿山城, 세마대)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곳
에 잠시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일구어냈으며,
행주산성과 오두산성(파주 통일전망대에 있음) 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던 요새였다.


▲ 양천고성의 흔적
한강을 지키던 산성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무와
수풀만이 가득하다. 역시나 인간이 만든 것은 대자연 앞에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  민간신앙이 깃들여진 관산성황당(關山成隍堂)

궁산 정상부 남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관산성황당은 가양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을 당집이다.
여기서 관산은 궁산의 옛 이름으로 보통 성황당의 한자는 '城隍堂'인데 반해 이곳은 '城' 대
신 '成'을 쓰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당집은 '도당(都堂)할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도당할매는 서울 지역 당집에서 많이 봉안하
는 존재이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成隍祠)가 성산(궁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00년 이상 묵었음을 보여준다.

성황당의 도당할매는 백성들의 번영과 행복을 도와주고 악귀를 몰아내주며,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벌인다. 당집은 퇴
락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했는데 덕분에 오래된 당집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당집이라기 보다는 그냥 창고 같은 분위기다.

조선 후기에 황진(黃瞋)이란 사람이 이곳과 관련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양천고성)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을 본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한다.


▲  누런 풀밭의 궁산 정상

궁산은 거의 야트막한 뒷동산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땅한 산이 없어 그 존재가 무척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산이든 위치를 정말 잘 잡아야 된다.
정상 서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은 물론 행주산성, 서울 서부 지역이 거
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휼륭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6,7,8일대


▲ 궁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강에 다리를 담군 다리는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역까지 달리는 공항전철
다리이다. 그 너머로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방화대교가 있으며, 사진 가운데에
자리한 산이 행주대첩의 현장,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  궁산 서쪽 산책로

▲  공항칼국수에서 먹은 버섯칼국수의 위엄

이렇게 가양동 나들이를 마치고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공항칼국수집을
찾았다. 가양동이나 등촌동에서 먹어도 되지만 문득 공항칼국수 생각이 간절하여 송정역까지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그 집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입구교차로에 둥지를 튼 공항칼국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30여 년 묵은 집이다. 그
곳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저녁 시간 이전(18시 이전)임에도 사람들이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버섯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끓여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 국수사리
와 버섯, 채소가 한몸이 된 검은 피부의 냄비가 나와서 마련된 버너에 몸을 푹 끓인다. 그렇
게 5분 이상을 두면 버섯칼국수가 보글보글 자신을 끓이면서 진국이 된다. 반찬은 고작 김치
하나가 전부, 허전한 반찬을 보며 그래도 2가지는 나와야 덜 허전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버섯
과 어우러진 칼국수와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쏙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치도 적당히 숙성이 되서 입맛에 그런데로 맞았는데 어느 정도 먹기가 무섭게 식당 아줌마
가 알아서 김치를 갖다주어 김치 수급문제는 없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칼국수는 젓가락이나 국자로 각자의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인데 너무 시
장한 나머지 국수와 버섯이 귀해지자 국수사리 하나를 시켰고, 국물에 밥 2개를 볶아서 말끔
히 냄비를 비운다. 국물과 하나가 된 볶음밥 역시 맛이 괜찮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가양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칼국수 국물에 밥까지 싹 비벼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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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이자 옛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

▲  인왕산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기린교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 만물을 핍박하던 7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들과 인왕산 수성
동계곡을 찾았다.

오전 11시,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그들을 만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악산 백
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을 제일 먼저 찾았다. 속세에
찌든 꼬질꼬질한 두 발을 계곡에 담구며 막걸리 1잔 걸치다가 도심 속의 두멧골, 능금마
을(뒷골마을)을 거쳐 부암동(付岩洞) 산복도로를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관련글 보러가기)에 자리한 서시정(序詩亭)에
서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다가 인왕산(仁王山) 동쪽 허리를 가르는 인왕산길을 따
라 남쪽으로 넘어갔다.
인왕산길은 사직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산악도로로 북악산길과 서로 이어져 있다.
4발 수레를 위한 2차선 도로와 뚜벅이를 위한 도보길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눈치 없이
거닐기 좋으며 주변 풍경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인왕산길에
단단히 홀린 듯 정신없이 따라가니 어느덧 석굴암(石窟庵)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석굴암 약수를 마시고자 잠시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반대 여론이 거세 인연을 짓지 못하고 동쪽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수성동계곡
으로 내려갔다.
이 산길은 석굴암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과 나란히 속세로 내려가는데, 그 계곡은 수성동
계곡의 상류가 된다.


 

♠  수성동계곡 상류

▲  숲속에 묻힌 수성동계곡 상류

인왕산에서 수성동계곡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돌들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숨을 죽이며 흘러간다. 계곡 옆에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산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냥 흙길이었으면 매우 좋았을 것을 시멘트길이라 촉감이 그리 착하지가 않다.
계곡 일대는 숲이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 제국의 햇살도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해가며 계곡
상류 산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수성동계곡 공원이다.


▲  계곡 산길과 조그만 나무 다리 (석굴암 입구 방향)

▲  계곡 상류에서 만난 조그만 폭포

이 계곡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로 수질이 양호하여 도룡뇽과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조용
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좁은 계곡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곡에서 괜히 물놀이를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들이 사
라지면 그 다음 차례는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우리 인간이 될 지
도 모른다.


▲  수성동계곡 상류의 아랫부분 (수성동계곡 공원의 제일 서쪽)

▲  수성동계곡 공원 가장 윗쪽에 닦여진 황토색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았을 것을
길을 현대식으로 밀어버린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숲속에 숨겨진 가느다란 폭포를 타고 수성동계곡으로 살짝 숟가락을 내민다.
폭포 주변에는 수풀을 걸친 벼랑과 흙과 돌이 섞인 자갈밭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어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로 석굴암에서 내려온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
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에게
서 인왕산의 맑은 물을 공급받고 서울 도심으로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손을 내밀며 수성동에 아낌없이 물을 보태고 있
는데 이 물줄기는 거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와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
이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여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지만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계곡 서남쪽 산책로


 

♠  옛 한양도성의 오랜 경승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으나 2012년
복원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에 흔치 않은 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기린교

▲  사모정 북쪽 산책로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몇년 전만 해도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
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라 계곡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어린이와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계곡 주변을 서성이며 발을 담
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수성동의 풍경을 한껏 수식해주는 구수한 양념 -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달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정자, 사모정이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
정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의 존재는 나오지 않음)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미소와 풍경이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정자 안에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놀고 있었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
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사모정 동쪽 계곡
계곡과 돌을 대충 배치한 듯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다.

▲  사모정과 사모정 북쪽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인왕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공원 북쪽 산책로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옛 옥인아파트의 초췌한 흔적이 나온다.

▲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바위글씨
동그라미 안에 중(中) 또는 신(申)으로 보이는 글씨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조금은 오래된 티가 풍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수성동에 바위글씨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음)

▲  공원 북쪽에 자리한 옛 옥인아파트의 잔재 ▼

수성동계곡 북동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
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
도질의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鄕愁
)와 추억도 조금은 배려하였다.
흔적을 모두 없앤다고 이곳에 40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옥인아파트의 존재와 수성동의 그늘
이 완전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
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등의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
게 될 수도 있다.

계곡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흉한 창조물은 그 자리를 계곡과 자연에게 다시 내주었고 이제는
그들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역시나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
인다. 그렇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의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주름진 바위들로 가득한 수성동계곡 (사모정과 기린교 사이)

▲  기린교 서쪽에서 바라본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  한굽이 쉬어가며 조그만 폭포를 빚은 수성동계곡


 

♠  수성동계곡의 오랜 상징 ~ 기린교(麒麟橋)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포근한 반
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우리네 인생처럼이나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그 다
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달랑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
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
성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계곡을 찾은 귀족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된 듯
싶은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는 누가 뭐
래도 광통교(廣通橋, 광교)이다. 그외에 수표
교(水標橋)와 창경궁(昌慶宮) 옥천교(玉川橋)
도 2위, 3위에 들어간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엉터리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인왕산이 빚은 제일 가는 경승지인 수성동계곡
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어찌보
면 기린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곡
이 아무리 잘났어도 딱히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계곡은 복원되
었을 망정, 지방문화재까지 지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기린교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멋드러진 반석이 잔뜩 널린 기린교 주변
대자연이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나오기도 힘들다.

▲  기린교 동쪽에 마련된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잘다져진 평평한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겨지는 곳에 넓게 터를 다진 것으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계곡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흔쾌히 바라보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반대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둔 것이 특징
이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을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간 밑
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다고
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쪽을 거쳐 청
계천으로 흘러간다.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곳
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싹 밀어야 되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긴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도
그렇고 기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도 근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수성동계곡 동북쪽 산책로

인왕산길에서 수성동 상류로 내려와 계곡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
러가버렸다. 보통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장소를 뭐 그리 세세히 보겠다고 두 다리를 바쁘게
부렸는지 3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래도 혹 빠진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2년 복원 이후, 시작부터 싹수를 보이며 도심의 인기 명소들을 긴장시켰다. 서촌의 인기와
인왕산의 인기, 그리고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계곡이란 타이틀로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이제
는 도심의 주요 경승지이자 서촌 나들이 때 필수로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촌 지역의 꿀단지
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성동계곡을 겯드린 도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서울은 내가 서
식하고 있는 곳이라 지방과 달리 달랑 1번이 아니라 계속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를 빼고
는 지겹도록 찾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성동계곡의 가을과 봄 풍경을 담아 소소하게 글로 남
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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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8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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