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과 가까운 아늑한 산사 ~ 관악산 관음사 (남현동의 여러 명소들)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 남현동 명소 둘러보기 '
관음사 관음보살상
▲ 관음사 관음보살상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관음사 절경'



겨울의 제국이 봄의 등쌀에 못이겨 서서히 움츠려들던 3월 초 일요일, 속세의 먼지를 잠시
떨구고자 오랜 친구와 관악산 관음사로 짧은 길을 떠났다.
사당역에서 그를 만나 김밥과 음료수 등의 간단한 요기거리를 사들고 절로 향했다. 남현동
(南峴洞) 주택가를 10분 정도 들어서니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관악산 숲이 나타난다. 산
에서 내려온 등산객과 절을 찾은 사람들, 산책 나온 이들로 조금은 분주한 관음사 가는 길
은 수레 1대 다닐 정도의 조그만 길로 절까지 이어져 있으며, 길도 거의 평탄하다.


▲ 겨울에 잠긴 관음사(절골) 계곡
가뭄의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듯 계곡의 물줄기가 무지 답답해 보인다.
간신히 형체만 갖추어 흘러가는 계곡물에 나뭇잎을 조각배 삼아 거추장스런
번뇌를 훌쩍 띄워 보내고 싶건만 수량이 적으니 제대로 떠내려갈지 걱정부터 앞선다.

▲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가히 맞아주는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의 늘씬한 뒷모습

속세를 벗어나 6분 정도 오르면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일주문이 나온
다. 문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 매우 장엄하게 다가오며, 웅장한 문의 기세에 주눅이 들 지경
이다. 이 문은 200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문을 들어서면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수
레가 머무는 주차장이 나오고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길이 펼쳐진다. 오르막길은 양쪽
으로 새하얀 석등(石燈)이 절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런 석등 사이로 특이하게도 관음대장군
과 관음여장군을 칭한 장승 1쌍이 이를 시원스레 드러내어 해맑은 표정으로 길을 오르는 중
생들을 응원한다. 그 언덕길을 오르면 관음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여장군 장승
지하대장군/여장군을 칭한 장승은 많이 보았지만 관음을 칭한 장승은 처음이다.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는 곳이라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이름을 지닌 모양이다.


♠ 관악산 동북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오래된 관음도량
관악산 관음사(冠岳山 觀音寺)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포근히 기댄 관음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관악산 정상에 둥지를 튼
연주암(戀主庵)과 더불어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유서가 깊은 절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
골 관음사'로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도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이 절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던 895년(진성여왕 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
)를 막기 위한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증명할 유물과 사료(史料)는
전혀 없으며, 다만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 할 내력은 전해오지 않으나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해오고 있
어 조선 초기에도 꾸준히 법등(法燈)을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
'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짧막하게 소개되어 있고 1977년 극
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숙종42년) 4월21일 극락전을 개
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절 밑에 승방벌(승방뜰)이란 마을이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상당
했음을 가늠케 해준다.

1863년(철종 14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비했으며, 1883년(고종 20년) 봉은사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거처 범종각(梵鍾閣)

▲ 대웅전으로 통하는 협문(夾門)


1924년 승려 석주(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여러 신도의 시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년 요
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을, 1930년에 산신각을 짓고 1932년
에 용화전을 세웠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하였다.

허나 1950년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太古宗)간의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여 년 간 지루한 송사
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사세는 크게 기울고, 건물은 거의 황폐화에 이르는 등, 위기를
겪다가 대법원이 조계종에 손을 들어주면서 1973년 진산당 박종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
임하여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하지만 절의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
지, 사유지가 뒤섞여 소유권 분쟁이 계속 불사의 발목을 붙잡았고, 개발제한구역과 여러가지 규
제들이 태클을 걸면서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다행히 불굴의 의지로 1977년 대웅전을 짓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올리고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으며, 1992년 대웅전 아래 지하에 대강당을 만들고 1천불을 모셨다. 그후 1997년 명
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새로 짓고, 2001년 요사채를 신축,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
脈)을 찾아 석조를 만들어 수각(水閣)으로 삼았다. 2002년 미타전과 관음보살입상을 만들어 관
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 일주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힘겨운 중창불사는 기
분 좋게 마무리 되었다. 그외에 재단법인 불교방송이 발원한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을 조성하
여 절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 특이하게 용왕을 모신 용왕각(龍王閣)

▲ 대웅전 좌측에 'ㄷ' 모양으로
자리한 요사


절의 깃들여진 오랜 역사에 비해 정작 고색의 내음은 맡기가 어렵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파도
로 거의 다 휩쓸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삼성각 칠성탱화
앞에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보살이 절의 가장 오랜 보물로 전해온다. 절집의 규모는 30
여 년의 불사로 어느 정도 갖추긴 했지만 그래도 조촐하고 아늑하며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
롯하여 명부전, 용왕각, 삼성각, 요사 등 9동의 건물이 경내를 이룬다.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사당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에 닿을 만큼 교통이 편리하
고 접근성도 착하다. 시내와 지척이지만 중간에 관악산 숲이 경계 역할을 하면서 속세와도 약간
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힘겨운 일상이나 복잡한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 무작정 찾아
와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 관악산 관음사 찾아가기 (2011년 4월 기준)
* 지하철 2,4호선 사당역(4,5번 출구)에서 과천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관음사를 알리는 이
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15분 정도 들어가면 관음사이다. (찾기는 쉬움)
* 서울 시내(시청, 서울역, 용산, 고속터미널, 천호동, 삼성역, 잠실, 건대입구, 신사역, 반포)
에서 남태령, 과천(果川) 방면으로 넘어가는 502, 540, 4212, 4318, 4319, 4425번 시내버스
를 타고 사당역 하차, 과천 방면으로 2분 걸으면 관음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승용차 이용시 (주차장은 일주문 부근과 경내 아래쪽 2곳 있음)
→ 사당역4거리에서 과천방면으로 가면서 최대한 가변차로로 붙어 관음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으로 꺾어서 들어간다.

★ 관음사 관람정보
* 관음사에서 관악산 연주대까지 2시간 정도 걸리며, 서울대와 과천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 02-582-8609)

* 관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누른다.


▲ 명부전 뒤쪽 대나무 언덕에 자리를 편 석불들


♠ 관음사 둘러보기

▲ 동쪽을 바라보는 관음사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
구들이 모셔진 명부전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
이다. 바로 우측 옆구리로 요사 1채를 끼고 있으며, 건물 뒤에는 얇게 대나무밭이 있는데, 중간
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다.

관음사9층석탑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
명부전 좌측에는 하얀 맵시의 거대한 9층석탑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서 있다. 그를 보는 순간
말 못할 압도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 탑
은 1997년 불교방송국 기념대탑으로 세운 것으
로 높이는 거의 20m에 달한다.


▲ 관음사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 등 3
명의 성스러운 존재를 모신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9년 승려 태선이 칠성각으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삼성각으로 개축하여 관음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손꼽히며 1988년에 만들어진 칠성탱화 앞에 조선 후기 석조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 용왕각(龍王閣)과 수각(水閣)이라 불리는 둥그런 석조(石槽)

삼성각 뒤쪽으로 숲과 가까이에 자리한 용왕각은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규모이다. 이 건물은 용왕(龍王)을 모시고 있는데,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산사에서 전혀
연관도 없을 것 같은 용왕을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독특할 따름이다. 이 건물은 1930년에
승려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다.


▲ 용왕각에 봉안된 목각용왕탱(木刻龍王幀)
보주(寶珠)를
손에 든 용왕 우측으로 누런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고, 좌우로
용왕의 주요 신하들이 자리를 지킨다. 이 탱화는 1989년에 조성된 것으로
내벽에는 비천상(飛天像) 1쌍이 있다.


▲ 심각한 겨울가뭄에 밑바닥만 드러낸 수각 (연화석조)

용왕각 밑에 자리한 석조는 관악산이 중생들에게 베푼 옥계수가 놀던 곳이다. 절을 찾은 중생의
목을 축여주던 물이 풍부히 고여있던 석조를 이곳에서는 수각(水閣)이라 부르는데, 하늘을 향해
어여쁜 잎을 펼친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석조로 진짜 꽃을 보듯 아름답다. 석조 위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동자승이 두 손으로 거북이를 들고 있는데, 거북이는 입으로 관악산의 약수를 석조로 뿜
어낸다. 허나 계속되는 겨울가뭄으로 계곡이 타들어가면서 석조 역시 메말라 버렸으며, 거북이
역시 토해낼 물이 없이 멀뚱멀뚱 입만 벌려 물을 내뱉을 날만을 고대한다.


▲ 아름답고 인자한 관음보살상(觀音普薩像)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은 고운 자태를 드러내 보이며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
병(政柄)을 들고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취했다. 관음보살 누님은 중생들의 인기가 상당하여 관음
신앙(觀音信仰)까지 생겨났다. 머리에 씌어진 보관(寶冠)은 하얀 돌이지만 보석이 박힌 금관처
럼 눈을 부시게 하며 그의 눈빛과 유연한 몸매,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蓮花臺座)까지 좀처
럼 눈과 마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 석불은 2002년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거의 10m에 이른다. 그 주
변으로 기도를 드리는 장소와 주변을 두른 돌난간, 그리고 석등 2기가 자리한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음사의 법당인 대웅전 자리에는 원래 1942년에 지어진 극락전이 있었다. 1977년 극락전을 철
거하고 지금의 대웅전을 지어 올렸는데, 그때 1716년 극락전을 개축했다는 내용의 상량문이 나
온 바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관음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
불이 봉안되어 있다. 3존불 뒤로 1990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탱화가 걸려 있는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건물 좌측 영단(靈壇)에는 1974
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범종이 자리해 있다.


▲ 꿈나라 투어로 정신이 없는 견공(犬公)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ㄷ'자 모양의 요사채는 선방과 공양간까지 갖추고 있다. 그 안쪽 뜰에는
관세음보살상처럼 새하얀 견공(犬公)이 팔자 좋게 늘어지며 늦겨울 낮잠을 즐긴다. 잠에서 제대
로 깨어나지 못한 몽롱한 눈으로 사진기를 들이미는 나를 흐리멍텅하게 바라볼 뿐, 좀처럼 움직
이질 못한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졸린 상태에서 몸은 안움직이니 그냥 자포자기한
모양이다. 잠결에 본 나를 과연 기억이나 해줄련지는 모르지만 세상근심 없이 편안히 잠든 그의
모습(물론 그도 걱정거리가 있을 것이다)은 속세의 찌들어 사는 인간들에게 그저 부러움의 대상
이다.


▲ 관음사에서 만난 추억의 덤블링
관음사는 어린이유치원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바로 요사채 밑에 지하를 파서 그곳에
강당과 유치원을 두었다. 유치원 뜰에는 어린 시절 많이 봐왔던 정겨운 덤블링이
빛바랜 다이어리처럼 놓여져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향수로 인도한다.


이렇게 조촐한 관음사 경내를 둘러보고 대웅전에 들어가 석가불에게 인사 겸 예불을 드린다. 나
름대로의 소망을 슬쩍 들이밀며 관음사와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근처에 숨은 다음 장소로 발길
을 옮긴다.

관음사를 등 뒤에 두고 일주문을 벗어나 속세의 집들이 보일 때쯤에 왼쪽으로 산길이 손짓한다.
그 길로 방향을 틀어서 얕은 능선을 하나 넘으면 말라버린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건너면 연
주대(관악산 정상)와 사당초교, 한일유앤아이아파트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철책과 붉은 담장에 둘러싸인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의 다음 목적지인 이경직(李景稷)의 전주이씨 묘역이 둥지를 텄다.


♠ 조선 중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지닌, 효민공 이경직 묘역(孝敏公 李景稷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 철책너머로 바라본 이경직의 전주이씨 묘역

▲ 묘역 한쪽에 자리한 이경직 신도비(神道碑)
1668년에 세워진 것으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간단히 마무리를 지었다. 김류(金瑬)가 비문을 짓고, 이경직의 3째 아들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썼다.


관음사 북쪽 산자락에 동쪽을 향해 누운 이경직 일가의 전주이씨 묘역(이하 이경직 묘역)은 조
선 중기에 활약했던 이유간(李惟侃), 이경직, 이장영(李長英) 3대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들
은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덕천군은 조선 2대 군주인 정종의 아들) 함풍군(咸豊君)의 후
손으로 가까운 흑석동(黑石洞)과 사당동에도 그들 일가의 묘역이 있다.

이경직 묘역은 무덤과 신도비를 지키기 위해 딱딱한 철책과 붉은 담장을 높게 둘렀으며, 묘역으
로 들어가는 녹색 철문은 굳게 입을 봉하여 안으로 들어서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묘역에 제사를
지내거나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은 들어갈 방법도 막막하다. 그렇다고 묘역을 지키는 관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들의 연락처를 안다면 몇 일 말미를 두고 관람 허가를
얻는 방법도 있지만, 그들의 연락처도 모르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봄을 부르는 잔잔
한 바람만이 스치고 지나가는 묘역에 어떻게든 들어가고자 주변을 1바퀴 돌며 개구멍이나 넘어
갈만한 곳을 물색해 보았지만 워낙 철통같은 담장과 철책 앞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물론
무리를 해가며 넘어갈 순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피해가 너무 클 것이다. 그냥 얌전하게 철책 너
머로 바라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며, 비록 묘역과 신도비는 바로 앞에서 세세히 살펴보진
못하지만 철책 너머로도 그들의 존재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이경직 신도비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08년 그의 묘역까지 보호구역을 확장하여
문화재 명칭을 '효민공 이경직 묘역'으로 수정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고위직 관료의 무덤
에만 쓸 수 있는 특별한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의 동남쪽에 세운다.


▲ 철책 속에 몸을 숨긴 이경직 묘역
마치 휴전선 너머의 만질 수 없는 땅을 보는 듯 하다.

▲ 담장 너머로 최대한 가까이서 바라본 이경직 묘역


묘역 가장 위쪽에는 이유간(李惟侃, 1550~1634)의 유택(幽宅)이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의 무덤
을 굽어본다. 이유간은 자(字)가 강중(剛仲)으로 덕천군의 5세손이자, 이수광(李秀光)의 아들이
다. 159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절친했던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사산
현감(四山縣監)과 돈녕부도정(敦寧府 都正)을 지냈으며, 1634년 벼슬을 그만두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부인과 같이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무덤 앞에 묘표(墓表, 묘비)와
상석, 혼유석(魂遊石)이 놓여져 있고,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望柱石) 1쌍이 무덤을 지킨
다. 묘표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적혀있으나 뒷면은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다.

이유간의 무덤보다 한 단계 아래로 이경직(1577~1640)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이경직은 이유간
의 아들로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이다. 이항복과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부하여
1601년 사마시에 붙고, 1606년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 4등급)로 급제했다. 1617년 회답사
(回答使)의 종사관으로 왜국(倭國)에 갔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절도사
(全羅道節度使)로 반란군을 진압,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수원부사가 되었다. 정
묘호란(1627년) 때는 청나라(후금)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和議)를 이루어냈으며, 병자호란(1636
년) 때는 인조(仁祖)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1640년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다가 63세
에 병으로 사망했다. 조정은 그에게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했으며, 시호는 효민공(孝敏公)이다.
무덤은 쌍분(雙墳)으로 부인인 보성오씨와 같이 묻혀있으며, 옆의 봉분은 뒤에 맞아들인 고성이
씨의 무덤이다.

이경직의 무덤 아래쪽에는 그의 아들인 이장영의 유택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대한 내용은 생략
하며, 묘역 북동쪽 구석에 창고로 쓰이는 가건물이 자리해 있다.

※ 이경직 묘역 찾아가기 (2011년 4월 기준)
* 지하철 2,4호선 사당역(5번 출구)에서 과천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관음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8분 정도 가면 주택가가 끝나고 숲이 펼쳐지면서 바
로 오른쪽에 산길이 있다. 그 길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나
온다. 사당역에서 걸어서 대략 15분 거리이다.
* 사당역 6번 출구에서 4분 정도 직진하면 사당초교로 가는 골목이 나온다. 그 길로 12분 정도
들어서면 흥화브라운빌과 한일유앤아이아파트가 나오면서 왼쪽으로 산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이경직 묘역이 보인다.
* 묘역 내부 관람은 어려우나 철책 밖에서 훤히 보인다. 애써 담을 넘으려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57-10


▲ 늦겨울에 푹 잠겨있는 이경직 묘역 앞 숲길
관악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이 일대에서 고려청자와 고려백자의 깨진 파편이
발견되어 고려/조선시대의 주거, 생활지가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남현동에서 만난 2개의 옛 흔적들

▲ 경작지가 되버린 사당동 백제요지(百濟窯址) - 사적 247호

이경직 묘역을 둘러보고 사당역으로 나오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관악등기소에서 오른
쪽으로 길을 튼다. 그 길의 끝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서울 유
일의 백제시대 가마(그릇과 도자기를 만들고 굽던 곳) 유적이 있다.

관악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지맥(地脈)의 끝으머리로 백제요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면적은 약 1,000㎡에 이른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공원 앞부분은 속인(俗人)들이 일군 밭이 펼쳐
져 있고, 집 1채가 언덕 구석에 자리하여 백제요지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다면 그냥 그런 언덕
으로 지나치기 쉽다. 공원 산책로는 언덕 능선에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공원 뒷부분은 승방
길과 이어진다.


▲ 공원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사당동 백제요지

이곳은 질그릇을 굽던 곳으로 백제의 그릇 파편이 불에 탄 흙과 재에 섞여 발견되었다. 파편들
은 사선(斜線)을 어긋나게 그은 격자문(格字紋)을 지닌 것이 많이 발견되어 백제 중/후기 가마
터로 여겨진다. 허나 이 지역은 475년 위례성(慰禮城) 함락 이후, 백제에서 떠난 곳이므로 백제
후기보다는 중기가 적당할 듯 싶다. <혹은 신라 후기 가마터로 보기도 함>

1973년 4월 인근의 신라시대 가마터(사당초교 주변에 있었음)와 함께 발견되어 한강(漢江) 유역
에서 발견된 최초의 삼국시대 생활유적지로 관심을 끌었다. 허나 신라 가마터는 1976년 3월부터
6월까지 대충 발굴조사를 벌이고는 바로 주택가로 밀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으며 백제요지는
간신히 살아남아 197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일대 토질은 적색의 점토로 그릇을 만들기 좋은 곳이다. 비록 가마의 흔적은 땅 속에 녹아
없어지고 경작지와 나무, 민가가 그 위를 차지해 앉았지만 다양한 토기 파편이 계속 나오고 있
어 백제시대 질그릇의 생산을 밝힐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이곳의 보존과 묻혀진 역사를 밝히
기 위해서라도 보호구역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유지를 매입하고 좀더 세밀한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

참고로 서울에는 북한산(北漢山)과 수락산(水落山), 관악산 자락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다. 허
나 모두 파괴되어 확인 조차도 힘들며. 사당동 백제요지만 간신히 문화유적으로 대접을 받고 있
을 뿐이다.

끝으로 이곳은 원래 관악구 사당1동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관악구의 북부가 동작구(銅雀區)로
분리되면서, 사당1동을 제외한 사당동의 대부분이 동작구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홀로 남은
사당1동은 사당동의 일원을 포기하고 별도의 동이 되어 남태령(南泰嶺)의 이름을 딴 남현동(南
峴洞, 남쪽 고개 동네)이 된 것이다. 사당동 백제요지 역시 행정동명 변경으로 남현동 백제요지
로 고쳐야 되나 여전히 시정은 되지 않고 있다.


※ 사당동 백제요지 찾아가기 (2011년 4월 기준)
* 지하철 2,4호선 사당역 5번 출구에서 바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관악등기소가 나온다.
등기소를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면 길 끝에 나무가 우거진 녹지대가 나오는데, 바로 거기가
사당동 백제요지 근린공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38-1


▲ 구(舊) 벨기에영사관 - 사적 254호

사당동 백제요지를 둘러보고 관악등기소를 거쳐 사당역으로 가면 남부순환로변에 담쟁이덩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고색이 창연한 2층 벽돌집 옛 벨기에영사관(領事館)이 눈길을 잡는다.

대한제국은 1901년 벨기에<Belgie, 가차자 표현은 백이의(白耳義)>가 한백수호조약(韓白修好條
約)을 맺으면서 남산3호터널 부근인 회현동2가 78~79번지에 영사관 부지를 제공하였다. 1902년
벨기에 전권위원인 레온 방카르(Lion Vincart)가 영사관을 건축을 추진했으며, 본격적인 공사는
1903년 7월에 시작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왜인(倭人) 고다마(小玉)가 맡고 시공은 왜국의 배륙
토목공사(北陸土木公社)가 맡아서 1905년 완공을 보았다.

1919년 충무로1가 18번지로 이전되어 왜국 횡빈생명보험회사(橫濱生命保險會社) 건물로 쓰였고,
왜국해군성(海軍省) 무관부 관저로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해군헌병대로 쓰이다가 1970년
상업은행에 넘어갔으며, 해당부지에 건물 신축이 이루어지면서 1982년 8월 지금의 자리로 쫓겨
났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의 남서울분관으로 사용되어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지하1층과 지상2층으로 면적은 3,468.9㎡이다. 붉은 벽돌에 화강암을 적절히 섞
어서 지었으며, 현관의 가운데 복도 좌우로 방과 응접실, 객실 등을 배치하였다. 현관의 기둥과
1층 로지아의 기둥은 투스칸오더(Tuscan order)식이고, 2층 로지아 기둥은 이오닉오더(Ionic or
der)로 처리했다. 정면의 외벽면은 적벽돌로 처리했고, 적벽돌 사이로 3조의 화강암을 띠모양으
로 둘러 벽돌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강하고 외벽면의 변화를 준다. 창문틀은 모두 수평아치로 하
였다. 고풍스런 고전주의(古典主義) 양식이 여실히 드러난 근대 건축물로 그에 어울리게 서울시
립미술관 분관으로 쓰이고 있어 건물로서의 기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 구 벨기에영사관(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찾아가기 (2011년 4월 기준)
* 지하철 2,4호선 사당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옛 벨기에영사관이다.
* 주차는 관악등기소 부근 공영주차장을 사용하면 되나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관람정보 (2011년 4월 기준)
* 관람시간 : 평일 10시 ~ 20시 / 주말과 휴일 10시 ~ 18시 (입장은 폐장 1시간 전까지)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빗장을 닫아걸고 쉰다.
* 관람료는 없다.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095-13 (☎ 02-598-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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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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