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찬란한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서울 수국사

' 4월 초파일 사찰 나들이 '
<금빛 찬란한 서울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서울 구산동에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벌고개에 수국사란 절이 있다. 내가 그곳의 존재를 안
것은 중학교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서오릉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라 왕릉과 관련된 원
찰(願刹)이 아닐까 여겼으나 그 시절에는 인터넷이란 것이 없었고, 어린 나이라 정보를 수집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직접 가보는 것도 좋지만 괜한 헛걸음이 싫어서 발걸음은 하
지 않았다.그 이후 수국사의 존재는 나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고 그렇게 10여 년의 세
월이 빛을 가르며 흘러갔다.

그러다가 근래에 우연히 수국사에 오래된 보물이 제법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의 내력(
來歷)도 500년이 넘고 황금사원임을 내세우며 금으로 도배된 대웅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접하
면서 슬슬 구미가 올라온다. 그래서 접수할 날을 찾다가 4월 초파일이 코앞에 다가오자 그날
발걸음을 하기로 했다.

드디어 다가온 초파일,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친구를 이끌고 수국사를 찾았다.
서울시내버스
702번(고양 용두동↔서울역)
을 타고 벌고개를 넘기 직전인 선정중고에서 내리니 길 건너편으
로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우리를 안내한다. 이정표를 따라 주택가를 3분 정도 들어서니 황금
사원 수국사가 그 모습을 비춘다. 그럼 여기서 수국사의 내력을 간추려보도록 하자.


♠ 금으로 꾸민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조선 왕실의 원찰로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태화산 수국사(太華山 守國寺)

▲ 연등의 물결이 몰아치는 수국사 경내


태화산 자락에 둥지를 튼 수국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다. 많은 절들은 그곳을 대표하는 오
래된 문화유산을 내세우거나 상징물을 만들어 절을 속세에 널리 홍보하고자 애를 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黃金寺院)임을 자처하면서
여타 절과 크게 차별화를 두었다. 즉 금을 이용하여 절을 속세에 알리는 것이다. 이토록 속인(
俗人)들이 좋아하는 금으로 법당을 치장한 유래가 없는 절이건만 아직까진 은평구에서만 조금
알 정도로 인지도가 많이 빈약한 형편이다. 황금절, 황금사원으로도 불리는 수국사는 태화산에
있지만 산세가 미약하고 명성이 낮아서 거리가 다소 떨어진 북한산(삼각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
다.

이 절은 1459년(세조 4년) 세조(世祖)가 그의 맞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20세의 사망)의 명
복을 위해 세자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
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고 한다.
1471년(성종 2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가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며 판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
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丹靑)이 특히 아름다워 광
릉(光陵)의 원찰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4월 초파일 낙성법회(落成法會)
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바로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
찰이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면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지원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0년(1504년)에는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은 즉시 경기감사와 형조참판 등을 불
러 불을 낸 이를 국문케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3층 규모의 수국사 문화센터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의 역할도 겸한다.

▲ 1930년에 세워진 수국사 사적비(事蹟碑)


기록에는 없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
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묻힌 명릉(明陵)의 원찰로 지정되면
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그 이후 지원이 끊기면서 폐허의 지경
에 이르게 되며 속세의 뇌리 속에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러던 그곳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구파발 부근에 있는 진
관사(津寬寺)에 들렸다. 그는 대웅전 구석에 있던 아미타불(현재 수국사 대웅전 안에 있음) 앞
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에 의문을 품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진관사 승려는 대수롭지 않는 듯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에 모신 겁니다. 우리 불상도 아니니 차나 향을 공
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며 불상 앞에 예불을 올려 수국사를 중창하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
다고 한다.

1900년(광무 3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
자의 쾌차를 기원해 달라고 했다. 이에 월초가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
안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
金針)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원을 물으니 머리를 조아리며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
렸다. 그러자 황제가 물러나지 않고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5릉 부근에 수
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하옵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이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케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
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하고 1907년 황실에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했으며 진관사에서 굴욕의 시간을 보낸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1908년 4월 초파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화와 금강번(
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백을 지
원했다.

▲ 눈이 부시는 대웅전 내부

▲ 수국사 산책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
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내걸며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
成就如來佛, 승리여래불이라고도 하며 대웅전에 있다고 함>, 여름에만 있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손짓한다. 비록 고색(古色)의 내음은 녹슬었고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도 조금은 떨어진다. 또한 요즘 많은 절집들이 너도나도 외형을
지나치게 신경쓰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상당한 편인데 수국사는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금으
로 법당을 꾸몄으니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는 않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
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문화센터 등 4~5동에 건물이 있으나 대웅전을 빼면
거의 볼품이 없다. 허나 금빛이 서린 대웅전의 규모가 실로 거대하여 그 초라함을 능히 커버해
준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으며 1907년에 월초가 강재희(
姜在喜)의 시주로 황제폐하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전하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전하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전하 엄씨 보수제년(寶壽齊年), 의친왕전하 보수무강(寶壽無疆
), 의친왕비전하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전하 보소여해(寶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된 그
림 6점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이들은 현재 관람이 어렵다.

* 아미타후불화(阿彌陀後佛畵)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 괘불(掛佛) - 1907년에 제작, 대웅전에 보관 중

은평구의 지역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의 명소로 거듭나기를 기원하며, 지금부터 경내를 살펴보도
록 하자

▲ 용왕상(龍王像)의 보금자리인 연못
분수가 나른한 오후를 시원하게 깨워준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수국사 찾아가기 (2010년 7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3번 출구)에서 702번(숭례문 중앙차로 정류장), 9701번 좌석버스(숭례문 가변
정류장)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서울역 9-1번 출구)에서 702번을 타고 선정중고 하차
* 5호선 서대문역(3번 출구), 3호선 녹번역(5번 출구)에서 702번, 9701번 이용
* 선정중고 정류장에서 타고 온 버스가 가는 방향(서5릉, 고양시)으로 조금만 가면 길 건너편에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정류장에서 절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 지하철 6호선 구산역(3,4번 출구)에서 서5릉 방향으로 도보 20분
* 서울시내에서 751번(구산동~숭실대), 752번(구산동~상도동), 7022번(구산동~서울역), 7720번(
구산동~신촌)을 타고 구산동 종점 하차, 서5릉 방향으로 4분 정도 걸으면 선정중고 정류장과
수국사 이정표가 나온다.

★ 수국사 관람정보
* 승용차로 경내까지 진입이 가능하나, 주차공간이 그리 넓지 못하다.
* 범종각에 매달린 커다란 목탁에 이곳의 길조(吉鳥)로 일컬어지는 목탁새가 산다. 보통 여름에
머문다고 한다. (1년 내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314 (☎ 02-356-2001)
* 수국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수국사 문화센터, 석조미륵불 주변



▲ 수국사 초파일 음악회

수국사는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초파일 축제와 분위기로 조그만 경내가 무척 시끌벅적하다. 축
제를 구경하러 온 중생들로 그야말로 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사람과 불교, 우리 문
화의 향기가 진하게 배여나 있고 마음과 어깨가 즐거울 정도로 흥겨운 초파일 축제의 현장, 그
래서 내가 초파일을 좋아한다. 마침 지장전과 문화센터 뜨락에서 음악회가 열려 중생들의 눈과
귀를 간지럽힌다. 아이들의 율동부터 아줌마 신도의 합창, 그리고 고전무용에 이르기까지 그동
안 갈고 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펼쳐보인다.


▲ 옹골지게 꾸며진 수국사 산책로
'S'자형으로 살짝 구부러진 산책로, 승려와 신도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풀과 나무, 아름다운 꽃들이 길을 거니는 이들을 환대한다.

◀ 석조미륵불입상
2002년에 조성된 석불로 자비로운 인상이
절을 찾은 이들의 마음을 앗아간다


▲ 1년 만에 바깥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꽃으로 수려하게 치장된 관정(灌頂)의식의 현장

▲ 시원하게 관정의식을 받는 아기부처, 화사한 꽃들 사이로
그의 표정이 동자처럼 해맑기만 하다.


석조미륵불 우측에 4월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정의식의 현장이 베풀어져 있다. 준비된 바가
지에 물을 담고 그의 머리 또는 몸통에 붓는 의식으로 이른 무더위에 땀을 훔치느라 바쁜 우리
와 달리 너무 부러울 따름이다. 친구를 시켜 의식을 치르게 하면서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 바위로 소풍 나온 부처와 제자들
덩치가 유난히 큰 하얀 피부의 부처, 그 주위로 귀여움이 묻어난 조그만
동자승 15명이 빙 둘러 앉아 그의 강의를 듣는다.

▲ 중생들이 갖다놓은 온갖 불상과 동자상, 다보탑 등이
다이어리에 적힌 소중한 옛 추억처럼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수국사의 백미, 아시아 최대의 황금불당이자
금내음이 철철 흐르는 대웅전(大雄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수국사의 법당인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
단 위쪽에 높다랗게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다.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이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純金)으로
입혀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이곳을 황금사원, 황금절이라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대웅전 때
문이다. 허나 금빛에 가려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의 훼손이 없게끔 경비도 철저하다.
수국사에서 막대한 재정을 들여 애지중지 공을 들인 이곳의 상징이자 얼굴로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사람들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금으로 발려
진 기둥과 벽, 천정을 정신없이 떠 있는 밝은 색채의 연등은 중생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
분하기 때문이다. 너무 화사한 나머지 햇빛 조차도 고개를 숙일 지경이며, 그 황홀한 빛에 눈이
갑자기 머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일어난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거대
한 금동불이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그 사이로 작은 불상 4개를 배치하여 빈 공간을 채웠다.

▲ 찬란한 연등의 물결 ~ 호화스러운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불단에 모셔진 9개의 불상

▲ 4명의 큰 불상과 그 사이로 자리한 3개의 조그만 불상

▲ 좌측 구석에 자리한 불상

큰 불상은 가운데에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노사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 약사불이 자리한다. 이들은 앉은 키가 2.1m에 이르며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들 사이로 조
그만 불상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아미타불로 이들 불상에서 크게 주목해야 될 것은
유리 안에 특별히 봉안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 비로사나불과 좌우 불상 (유리 안에 봉안된 불상이 목조아미타불좌상)


▲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 - 보물 1580호

유리 안에 안치된 조그만 목조아미타불은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그래서 특별히 유
리막을 두어 그 안에 봉안했다. 철창에 갇힌 새처럼 갑갑해 보이긴 하지만 문화유산 도난이 다
반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그의 건강과 신변보호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듯 하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것으로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가 104cm, 무릎의 폭이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다고 하며, 수국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절이 망하면서 인근 진관사로 옮겨져 그곳 대웅전에
두었다고 한다. 허나 다른 절에서 온 불상이란 이유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쳐박혀 굴욕
을 당하는 것을 본 월초거연이 뚜껑이 열린 나머지 그에게 예불을 올리며 절의 중창을 다짐했다
고 한다. 그 이후 황태자(순종)의 병을 고친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 황제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
하고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왔다. 그 당시의 뼈저린 추억 때문인지 약간 인상은 써 보이지만 중
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한다.


▲ 천정에 가득 피어오른 다양한 모습의 연등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대웅전 우측에는 부처가 5명의 승려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맨다. 다들 진
지하게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法衣)를 입은 그들은 부처
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合掌)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
이라고도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된 것이라 하며, 설법 장면을
인자한 모습의 관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바라본다. 나도 저들 사이에 끼어 부처의 법을 삼가 듣
고 싶다.


♠ 수국사 지장전(地藏殿)

▲ 온후한 인상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화

한참 초파일 축제가 열리는 뜨락 뒤쪽에 '十' 모양의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원래는 종이 있던
종각(鐘閣)으로 나중에 대웅전으로 개조되었으며, 황금법당이 지어진 이후 대웅전의 자리를 내
주고 지장전으로 탈바꿈하였다. 원래는 '一'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었으나 내부가 넓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불단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변에
는 칠성신과 산신탱화, 신중탱화 등이 자리해 있다. 또한 예전에는 수국사의 또 다른 명물인 '
V'수인(手印)의 성취여래불(승리여래불)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에 있다고 한다.


▲ 금동불과 칠성탱화
1960년에 제작된 탱화이지만 거의 100년 이상 묵은 그림 같다.

▲ 산신탱화
칠성탱화와 마찬가지로 1960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중후함과 고색의 때가 우러난다.


▲ 또다른 지장보살상
지장전에 지장보살상이 있건만 부근 뜨락에 또 지장보살을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색채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평온한 눈빛으로 속세를 굽어본다.


▲ 수국사에서 먹은 파전 1장

수국사를 한바퀴 둘러보니 슬슬 시장기가 나를 희롱한다. 경내 동북쪽 그러니까 음악회가 열리
는 부근 공터에 먹거리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임시로 설치된 천막에서 파전과 오뎅, 라면, 커
피 등을 팔고 있는데 절을 찾은 중생 만큼이나 장터도 매우 혼잡하다. 먹을 것을 파는 신도 아
줌마나 그것을 사먹는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초파일 분위기에 즐거운 표정이다.

우리는 시장기를 잠재우고자 파전 1장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2천원이다. 파전의 크기는 아줌마
신도의 넉넉한 마음이 깃들인 듯, 1회용 접시를 온전히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 파와 홍당
무가 적절히 들어가 착한 맛을 자아내는 파전, 파전 옆의 종이컵은 파전을 찍어 먹는 간장이다.

파전을 끝으로 수국사 초파일 나들이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지방문
화재로 지정된 1907년에 그려진 불화 6개를 꼭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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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0년 7월 14일부터
* 최종 수정 - 2010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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