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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15 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나들이 '

▲  회룡사 동자상

회룡사 극락보전

▲  회룡사 극락보전

▲  석굴암 석굴



봄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5월 첫 무렵에 20년 이상 숙성된 오랜 친구와 도봉산 회룡사를 찾았

다.

집(도봉동)에서 의정부로 가는 서울시내버스 106번(의정부 가능동↔종로5가)을 타고 북쪽으로
15분 정도를 달려 회룡역에서 두 발을 내린다. 우선 회룡역 인근 편의점에서 조촐하게 삼각김
밥, 음료수를 사들고 아파트단지를 지나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회룡역 서쪽 동네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시골이나 다름 없었는데, 이제는 인구 40만을 지닌 의정부(議政府)시내의
일부가 되어 건물과 주택, 아파트가 즐비하다.

호원동 주거지를 어느 정도 지나면 도봉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회룡골(회룡사 계곡)이 모
습을 드러내는데, 그는 여기서 회룡천(回龍川)으로 간판을 바꾸고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하늘을 향해 치솟던 키다리 아파트와 빌라 대신 조그만 시골집들이 조촐히 마을을 이루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의정부 보호수 제1호로 지정된 450여 년 묵은 회화나무가
아직도 겨울 제국(帝國)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20년)

이 나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450여 년 전 회룡골을 지나던 도인(道人)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심은 나무라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애지
중지 살핀다. 만약 나무를 괴롭히거나 보살핌이 소홀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그
런다. 그들은 매년 3월과 9월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부정이 없는 사람을 제관(祭官)으로 추대
해 제를 지내며 마을의 전통 풍속과 결속을 지키고 있다.


▲  회룡골 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회화나무 - 의정부 보호수 1호
400여 년 묵은 나무로 높이 25m, 둘레 4.6m에 이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참 봄의
절정임에도 그 혼자서만 잎 하나 피우지 못한 채, 벌거숭이로 방황하고 있다.
하긴 우리네 인생도 저 방황하는 회화나무와 다를 것이 없겠지..


회룡탐방지원센터(옛 매표소)를 지나면 속인들의 집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완연한 자연의 공
간이 펼쳐진다. 한때 등산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던 옛 매표소를 지나 10분 정도 오르
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석굴암이고 직
진하면 회룡사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회룡사로 간다.


♠  회룡사를 끼고 흐르는 회룡골(회룡사계곡)

▲  회룡골 중류 (석굴암입구 주변)

도봉산(사패산 포함)에는 여러 계곡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회룡골이 단연 일품이 아닐까 싶다.
회룡골 하류는 다른 계곡과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 수록 그의 숨겨진 매
력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런 회룡골의 백미(白眉)는 석굴암입구 갈림길에서 회룡사 사이의 계곡
으로 그곳에 회룡폭포가 숨겨져 있으며, 멋드러진 바위들이 계곡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계곡을
따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속인(俗人)들의 번뇌를 흩날리기에 충분하고 온갖 잡념에 오염
된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곳의 진한 옥의 티가 있다면 계곡 옆에 회룡사로 오
르는 길을 시멘트로 높게 발라버려 회룡골에 대한 감동을 크게 반감시킨 점이다.


▲  회룡골의 찬란한 꽃, 회룡폭포

▲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멋드러진 반석들 (회룡폭포 위쪽)

▲  바위를 따라 내려오는 회룡골, 그 곁에 회룡사 접근을 이유로 시멘트를
높이 발라 어울리지도 않는 옥의 티를 선사해버렸다.

▲  회룡사로 오르는 길
길은 힘들지만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연등의 안내를 따라
묵묵히 오르다보면 금세 회룡사 산문이 마중을 한다.

▲  드디어 도착한 회룡사 정문
회룡사는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며, 이곳이 그 역할을 대신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회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도봉산 굴지의 오랜 산사(山寺),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도봉산 회룡사(回龍寺)
도봉산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사패산(賜牌山, 552m) 동쪽 자락 회룡골에 비구니 사찰, 회룡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사패산은 조선 선조(宣祖)의 6번 째 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가 유정량(
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회룡사는 681년(신라 신문왕 원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했다고 한
다. 930년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고, 1070년(고려 문종 24년)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
을 했으며, 1384년(우왕 10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년)에 회룡사로 이
름을 갈았다고 한다.
허나 무학대사 이전은 이를 입증할 자료와 흔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권상로(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하권 회룡사 부분에는 무학대사가 1384년 또는 1395년에 창건했
다고 나와있으며, 1881년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는 1384년 무학이 지은 것
으로 나와 무학대사 창건설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사실 의상대사의 창건설은 이 땅의 많
은 오래된 절들이 창건주로 팔아먹는 유명한 승려를 그를 절 창건주로 내세워 내력을 윤색시키
고자 함이다. 정작 그가 창건한 절은 부석사(浮石寺) 외에 몇 개 되지도 않는다.

'회룡사중창기'에는 1384년 창건설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384년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가 도봉산에서 같이 창업 성취 기도를 올렸는데, 이성계는 회
룡사 뒤쪽 석굴암에서, 무학대사는 무학굴(지금의 회룡사)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1388년
이성계는 최영(崔瑩) 장군과 우왕(禑王)의 명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정벌하러
가자 무학은 작은 절(회룡사)을 짓고, 손수 만든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봉안하여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요동을 코앞에 둔 위화도(威化島)에서 딴 뜻을 품고 군사를 돌려 고려 조정을 뒤엎은 이성계는
이후 왕위에 오른 뒤 무학을 찾아가 회룡사란 절 이름을 내렷다고 한다. 회룡(回龍)은 용이 돌
아왔다는 뜻이니 즉 용으로 상징되는 제왕, 이성계가 돌아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회룡사중창기'에는 '회룡'의 연유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1403년(어떤 기록
에는 1398년) 2차례나 일어난 아들들의 권력 싸움, 왕자의 난에 뚜껑이 폭발한 태조(太祖) 이성
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갔다가 서울로 환궁할 때 회룡사에 있던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태조
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며 그와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무학은 그의 환궁을 크게 기뻐했는데, 태
조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자신이 환궁했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연
스레 1384년(또는 그 이후)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정답일 듯 싶으며, 15세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이 있어 이를 더욱 입증해준다.

▲  회룡사 5층석탑

▲  회룡사 석조

무학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1630년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된
듯 싶다. (이때 비구니 절로 전환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 1878년 혜봉 최성(慧峯 最性)이 상궁(尙宮) 박씨의 지원으로 절을 크게 중수했고, 1881
년 경해당 원삼(慶海堂 圓三)이 잘나가는 장인들을 모아 당우와 요사를 새로 지었다. 이때 채사
(彩師)들을 초빙하여 지장탱과 신중탱, 현왕탱, 무학대사의 진영을 조성했는데, 시주자는 상궁
하씨와 조씨 등이었다. 비록 왕실의 지원은 아니지만 왕실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상궁들의 지원
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사라진 이후, 1938년 순악(順岳)이 요사를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절은 잿더미가 되었
다. 전쟁이 끝나자 도준(道準)이 1954년부터 중창불사를 벌여 승당(僧堂)과 대웅전, 약사전, 선
실, 요사 등을 다시 지었으며, 197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87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
으며, 1988년에 범종각을, 1996년에는 극락보전과 삼성각, 노전채를 새로 지었다. 거기서 멈추
지 않고 2000년에는 선원인 취선당(聚禪堂)을 개축하고, 2001년에는 성견(性見)이 삼성각을 증
축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삼성각, 설화당, 취선당, 범종각 등 8~9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조선 초기 석탑인 5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조와 신중도 등 지방문화
재 3점을 품고 있다. 건물들은 죄다 6.25이후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씻겨 내려갔
지만 3점의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도봉산을 아우른 북한산(北漢山)국립공원 일대의 대표적인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
하며, 석조관음보살상을 통해 나름대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고 있다. 멋드러진 회룡골을
옆에 품고 있고,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로 고즈넉한 산사의 멋
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끈질긴 번뇌라 한들 회룡골과 도봉산의 청정한 기운 앞에 꼬랑
지를 내리고 도망을 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절을 구경하고 회룡폭포나 회룡골에서 발을 담구며, 피서를 즐기
는 것도 괜찮다. 게다가 회룡사 바로 뒤에는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석굴암이란 조그만 암자
가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다만 석굴암은 바로 질러가지 못하
고 석굴암입구 갈림길로 내려와서 다시 10분 정도를 올라가야 된다.

※ 도봉산 회룡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5분. 회룡탐방지원센터까지는 수레가 들어갈 수 있
  도록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후는 수레 1대 다닐 정도의 산길이다. 회룡폭포를 지나서 경
  사가 좀 급해질 뿐,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수레로 회룡사까지 접근 가능)
* 서울 종로5가, 동대문, 혜화역, 돈암동, 미아4거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06, 108번을 타고 회룡
  역 하차, 회룡역 밑을 지나 도보 40분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전좌로 155번길 262 ☎ 031-873-3391)
* 회룡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회룡골재 정상이다. 여기서 서쪽은 송추, 북쪽은 사패산
  정상과 안골로 이어지며, 남쪽 능선을 타고 망월사나 포대능선, 자운봉으로 넘어가도 된다.


▲  삼성각에서 굽어본 회룡사 경내


♠  회룡사 둘러보기 (1) 석조, 설화당 주변

▲  회룡사 취선당(聚禪堂)

회룡사 정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작고 조촐한 회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회룡사의 역사를 머금은
안내문과 푸른 옷을 걸친 부채꼴 모양의 나무가 제일 먼저 마중을 하며, 그 주변은 주차장이다.
주차장 뒤쪽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취선당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선원(禪院)
으로 쓰이고 있다.

▲  회룡사 설화당(說話堂)

▲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네모난 연못

취선당을 지나면 설화당이라 불리는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설화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
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승려와 신도의 생활공간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회룡사 범종각(梵鍾閣)

설화당 맞은 편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아리가 담긴 4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
각이 자리해 있다. 대웅전과 더불어 청기와를 입혀 단연 돋보이는 범종각은 1989년에 지어진 것
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규모이다. 범종각의 알맹이인 4물은 2층에 담겨져 있으며, 1층
에는 회룡사의 오랜 보물 중 하나인 석조가 옥계수를 뿜으며 누워 있다.


▲  회룡사 석조(石槽)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7호

범종각 1층 그늘진 곳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3개가 있는데, 제일 위쪽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존
재가 바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이다.
이 석조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오래된 유물로 높이가 90cm, 가로 폭이 1.53m,
세로는 2.44m의 화강암 수통이다. 석조 한쪽에는 홈통을 두어 물이 가득 차면 아래로 흘러가게
끔 하여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걸 경계했다.

산사에 왔으면 물은 한 모금 마셔줘야 되겠지? 그래서 석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파란 바
가지로 물을 떠서 마시니 이른 더위에 갈증을 호소하던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

범종각 옆에는 짜투리 공간을 닦아서 만든 관음보살의 보금자리가 있다. 1987년 등산객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8각의 기단(基壇) 위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된 2단의 연화대좌(蓮花臺
座)를 자리로 삼아 정병(政柄)을 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어여쁜 표정과 수려한 외모로
경내를 굽어보는 관음보살 누님 주변에는 석등 2기와 동자상 등의 여러 석물을 두어 그를 수식
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돌난간을 둘렀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범종각


♠  회룡사 둘러보기 (2) 대웅전, 극락보전 주변

▲  회룡사 대웅전(大雄殿)

범종각에서 한단계 오르면 5층석탑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웅전이, 북쪽에는 극락보전이 자리해
있다. 바로 회룡사의 중심 부분으로 석탑 주변에는 깔끔하게 돌을 깔아 터를 닦았다. 탑 주변에
는 돌난간을 둘러 탑을 보호하며, 대웅전과 극락보전이 탑이 있는 뜨락을 굽어본다. 가람배치는
탑 하나의 법당이 하나인 1금당(金堂) 1탑 형식이다.

회룡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71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모습의 팔작지
붕 건물이다.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봉안하고 있으며,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를 간직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금빛 찬란한 닫집
온후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이한다.


▲  회룡사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8호

대웅전 서쪽 벽에 걸린 신중도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1883년에 조성된 것이다. 조금
의 여백도 없이 가득 그려져 있어 다소 번잡해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그림 윗부분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배치하고 아래쪽에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권
속(眷屬)들을 배치한 2단 구성을 하고 있으며, 범천과 제석, 천룡을 역삼각형 구도로 배치하여
이들이 그름의 중심임을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은 화승(畵僧) 배출지로 유명한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그림을
그린 이는 응석(應碩)이며, 시주자는 상궁 신씨와 그의 부모이다.


▲  5층석탑 인근에 자리한 괘불석주(掛佛石柱)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을 거는 받침대이다. 지금처럼 한가한 때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조그만 동자상과 돌하르방, 불상의 보금자리가 된다.

▲  회룡사 5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6호

대웅전, 극락보전 뜨락 한가운데에 자리한 5층석탑은 15세기에 조성된 조선 초기 석탑으로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높이 약 4m의 조그만 탑으로 기단부(基壇部)는 높직한 1매석의 바
닥돌 위에 괴임대를 돌출시키고 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괴임대에 5구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
다. 기단은 1층으로 괴임대와 기단면석이 같은 돌로 되어 있는데, 괴임대에는 4구의 안상이 있
으며, 위쪽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1층에서 3층까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별개의 석재로 했고, 4층 이
상은 탑신과 옥개석을 같은 돌로 만들었다. 2층과 3층 탑신은 유독 피부가 하얀데 이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낀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하며, 5층 옥개석은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가 진하
게 남아 안타까움을 전한다.

탑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탑이고 무학대사가 창건한 마당에 이는 말이 되질 않는다. 현재 의상대사의 부도탑은 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  대웅전 방향으로 바라본 5층석탑

▲  5층석탑 좌우에 자리한 노주(露柱)들 - 연화대 위에 신장상이 놓여 있다.

5층석탑 좌우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는 돌(혹은 연화대의 일부)과 조그만 연화대(蓮花臺),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두터운 돌이 하나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은 원래 이곳에 있
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회룡사의 유물인지 아니면 주변(마땅한 절터는 없음)에서 가져온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석탑이나 어느 석물의 일부를 이루던 일부분으로 이곳으로 수습해 왔다.
신장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신장상은 칼을 들고 서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알 수 없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과 극락보전 뒤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1955
년 대웅전으로 건립되었다가 나중에 지금의 대웅전을 만들면서 삼성각으로 변경되었으며, 1996
년에 새로 짓고 2002년에 증축했다. 삼성(三聖) 즉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들이 그려진 칠성탱과 산신탱은 1954년, 독성탱은
1956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 내부 - 제일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  회룡사 극락보전(極樂寶殿)

3줄로 된 계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궁궐의 정전(正殿)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극락보전은 서방
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한 건물이다. 1996년에 조성된 것으로 아미
타불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을 봉안했으며, 1,000상의 조그만 금동불을 좌우
로 빼곡히 배치하여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후불탱화
후불탱화는 극락전 벽화로 그 유명한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아미타3존벽화를 모사했다고 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좌우를 화려하게 받쳐주는 천불(千佛)

극락보전 불단 좌우에는 1,000기의 금동불을 빼곡하게 배치했다. 과연 천불이 맞는지는 모르겠
지만 오백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여 아마도 천불이 맞을 것이다. 조그만 금동불이 마치 단
체 사진을 찍듯 정신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 두 눈을 그야말로 놀라게 만든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20년 만에 문을 두드린 회룡사는 나처럼 많이도 변해 있었다. 1시간 정도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회룡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속세로 나가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는지 계곡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아쉬운 마
음을 살짝 띄워 날려 보낸다.

회룡폭포로 내려와 속세에서 사들고 온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먹으며, 잠시 허기진 뱃속을 진정
시킨다. 하늘과 조금은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맛이 매우 좋다. 작지만 수량이 풍부한 폭
포의 시원한 물줄기 앞에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는 나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이렇게 배를 채우
고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으로 길을 잡았다. 회룡사 바로 뒤에 석굴암이 있지만 일반인은 못가
게 한다. 그래서 천상 석굴암입구로 나와서 힘겨운 산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석굴암 가는 길은 토함산(吐含山)의 석굴암처럼 무지 가파르다. 회룡사는 회룡골이라도 옆에 품
고 있어 시원하기라도 하지 여기는 그냥 경사가 급한 산길과 산림이 전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회룡사로 갈 뿐, 석굴암은 인적이 거의 없다. 회룡폭포이 위엄에 줄행랑을 친 더위가 다시 찾아
와 우리는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급한 길을 오르니 어느덧 회룡사 뒤쪽이다. 회룡사에서 바로
가면 1분이면 될 것을 20분이나 걸릴 정도로 돌아가야 하니 참 딱할 따름이다. 허나 인내력을
가지며 계속 발을 재촉하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석굴암이 돌문을 시작으로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석굴암 가는 길

▲  석굴암 돌문(불이문)


♠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조그만 산중암자,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도봉산 석굴암(石窟庵)

▲  돌문(불이문)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천하, 석굴암

석굴암하면 속인들은 보통 경주에 있는 석굴암을 떠올린다.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佛國寺)는 3
살짜리 애도 다 알고 있는 이 땅의 대중적인 명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의 이름으로는 그만
한 좋은 이름이 없다. 석굴암은 말그대로 바위에 굴을 판 암자나 석굴사원을 뜻하며, 불국사는
불국토(佛國土)를 상징한다. 이렇게 좋은 이름을 경주의 그곳만 누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겠지?
불국사 같은 경우 서울 대모산(大母山, 대모산 불국사글 ☞ 보러가기)을 비롯해 여러 곳이 있으
며, 석굴암은 도봉산 일대에만 2곳이 있다. 하나는 우이령 고개에 자리한 양주시 교현리의 석굴
암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회룡사 뒤에 자리한 이곳 석굴암이다.

사패산 범골능선 밑인 회룡사 북서쪽 높다란 곳에 둥지를 튼 석굴암은 회룡사의 부속 암자로 법
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석굴과 산신각,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작고 아늑한 산중암자이다.
1384년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도봉산에 들어왔는데, 이성계는 지금의 석굴암 자리에서 기도를 올
렸다고 한다. 그가 나라를 갈아치운 이후, 무학대사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처음부터 석굴
암은 아닌 듯 싶으며, 그 이후 구체적인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절을 이루는 건물도 모두 1960
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고, 석굴도 비슷한 시기에 새로 단장을 하여 딱히 고색의 기운은 없다.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절의 하나로 절 이름만 경주 석굴암 덕분에 낯이 좀 익을 뿐, 마땅한 매
력거리가 없을 듯 싶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흔적이
서린 암자이기 때문이다.

김구는 중원대륙 상해(上海)로 망명하기 전, 왜경(倭警)을 피해 이곳에 잠시 은신했는데, 해방
이후 그 당시를 회상하며 종종 들렸다고 한다. 1948년 남상도를 비롯한 언론인 7명에게 '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 김구(石窟庵 佛戊子 仲秋 遊此 金九)'란 친필을 써주었는데, 이에 감명 받
은 그들은 1949년 3월 그의 친필을 이곳에 가져와 석굴 바위에 3개월 동안 새겼다. 그 바위글씨
'김구선생필적 암각문(巖刻文)'이란 이름으로 의정부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김구가 새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현실은 다른 사람이 그의 친필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49년 6월 백범이 안두희에게 불의의 암살을 당하자 의정부 사람들은 크게 애통해하며 그와 인
연이 깊던 석굴암에 사당을 지어 매년 봄, 가을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해발 210m 고지에 자리한 석굴암에 이르면 2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두툼한 성곽 같은 모습으
로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들은 자연스레 석굴암과 속세의 경계선 역할을 하며, 번뇌와 악의
기운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는데, 가운데 머리 부분이 서로 맞물려 있고. 그 밑에 삼
각형 모양으로 돌문이 뚫려 있어 경내로 인도하는 정문의 역할을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신묘하
고 특이하여 두고두고 잊혀지질 않는다. 석굴암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돌문에
는 딱히 인위적인 부분이 보이질 않아 자연이 빚은 문인 듯 싶으며, 사실상 속세에서 유일하게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 양쪽에 시멘트로 기둥을 만들고 한글로 된 절의 현판을 가로로
달았다.
그리고 돌문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문짝까지 달았는데, 석굴암이 속세에 미련이 없다고 문짝
을 닫아버리면 꼼짝없이 그 바위를 넘어야 된다. 석굴암에서는 이문을 불이문(不二門)이라 부르
며, 문 앞에는 수레들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돌문(불이문) 위쪽에 새겨진 바위글씨들

▲  돌문(불이문)에서 바라본 석굴암 경내 (정면에 극락전이 보임)

돌문(불이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석굴암 경내가 펼쳐진다. 연등이 대롱대롱 허공을 메운 요사(
寮舍) 앞뜰을 기준으로 정면에 극락전과 산신각, 오른쪽에 석굴이 자리해 있는데, 그것이 석굴
암의 전부이다.

▲  돌문(불이문)의 뒷모습
두툼한 문짝까지 달려 있다.

▲  석굴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


▲  석굴암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극락전 앞에 놓인 오래된 부도(浮屠)

극락전 앞에는 높이 1m 정도의 정말 조그만 부도가 놓여져 있다. 이 부도는 석굴암에서 가장 오
래된 유물로 바닥돌과 기단부, 탑신, 지붕 부분이 죄다 8각형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짐작될 뿐,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어쨌든 석굴암의 오랜 역사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로 지붕과 꼭대기 부분에는 장대한 세
월이 입혀준 때가 가득하여 작지만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단촐한 건물로 산신의 보금자리이다.

▲  산신할배와 동자, 호랑이 등이 그려진 산신각 산신탱
꼬랑지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산신 곁에 앉은 호랑이는 용맹함은 온데간데 없고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도봉산 줄기

▲  석굴(石窟)과 김구선생필적 암각문(의정부 향토유적 8호)

석굴암 석굴은 이곳의 백미이자 든든한 밥줄이다.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석굴로 겉
으로 보면 3개의 돌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의 같은 바위이다. 아랫쪽 두 바위의
틈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고, 석굴로 들어가는 문을 내었으며, 바위의 머리 부분이 자연히 석굴
의 지붕 역할을 하는데, 머리가 아래보다 지나치게 비대해 다소 어색해 보인다.
왼쪽 바위 피부에는 한자로 김구(金九)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있는데, 1949년 백범의 친
필을 받은 남상도 등이 3개월 동안 새긴 것이다. 문 위쪽 바위에는 석굴암이란 바위글씨가 새겨
져 있으니 이는 나중에 새겨진 것이다.

바위 사이로 난 석굴은 자연 동굴을 개조한 것으로 근래에 손질을 가해 불단과 불상을 두었으며,
내부는 밖과 달리 시원하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유래된 것이다.


▲  조촐한 모습의 석굴 불단(佛壇)
불단에는 석가불이 홀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촛불들이 자신을 밝히며 석굴에서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조명시설이 없음에도
석굴 내부는 그런데로 밝다.

▲  그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나오다.

석굴 석가불에 예를 올리면서 슬쩍 소망을 들이밀고 회룡사와 더불어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석
굴암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석굴암은 의정부시내와 무척이나 가깝지만 번뇌가 따라오다 졸도
할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박힌 산중암자로 복잡한 마음과 머리를 가다듬기에는 그런데로 괜찮은
곳이다. 게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절이니 친일파에
단단히 더럽혀진 이 땅의 참담한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 석굴암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2번 출구에서 도봉산을 향해 도보 40분. 절까지 수레 접근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89 (☎ 031-873-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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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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