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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2. 2014.03.23 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순국기념관)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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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순국기념관)

 


' 화성 제암리(堤岩里) 삼일절 나들이 '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삼일절(三一節)의 아침이 창 밖을 두드린다. 천
하의 주요 국경일인 3.1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그날에 맞는 3.1절 유적지
를 찾기로 했다.
3.1절에 3.1절 명소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실행한 적은 없다.
석가탄신일에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하루 종일 오래된 고찰(古刹)들
을 찾아 댕기면서 왜 3.1절에는 그에 어울리는 곳을 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자신에게 질
문을 던지니 그날은 썩 유쾌한 날이 아니라는 답이 마음에서 강하게 메아리를 쳤다. 그렇다.
3.1절은 6.25처럼 그리 기분 좋은 날은 아니다. 이 땅의 한이 단단히 서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좋겠는가? 그 오욕의 과거는 잊을 수는 있어도 완전 지울 수는 없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짊어지고 가야되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이름난 3.1절 명소로는 서울 탑골공원과 천안(天安)의 독립기념관과 유관순(柳寬順)
누님이 활약했던 병천 아우내, 그리고 화성(華城) 제암리 등이 있다. 이 4곳은 3.1절 명소의
성지(聖地)로 이중에서 제암리는 아직 가지 못했다. 그래서 제암리로 길머리를 잡았다.
우리집에서 화성 제암리까지는 정말 머나먼 길이다.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역까
지 쭉 내려가 발안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발안주공아파트에서 걸어가거나 발안에서 조암
방면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된다. 물론 천안보다는 가깝지만 체감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
이번 제암리 나들이는 후배와 같이 갔는데, 서울역에서 만나 같이 내려갔다. 따스한 봄이 코
앞에 다가왔는지 날씨도 따스해 잠바가 거추장스러울 정도이다.

수원역에서 화성시내버스 33번(수원역↔발안)을 타고 발안으로 갔는데, 발안(發安)이 초행길
이라 정류장을 잘못 내려서 조금 헤맸다. 이렇게 향남읍(鄕南邑) 발안 땅에 대한 혹독한 신
고식을 치르고 버스에서 내린 지 30분 만에 제암리 유적지에 입성했다.


▲  북쪽에서 본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  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殉國遺蹟)
사적 299호

▲  제암리 사건 현장에 세워진 3.1운동 순국기념탑

◆ 1919년 3.1운동의 시작
화성시 서남쪽 발안(향남)에 자리한 제암리는 3.1운동의 굵직한 성지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서
울 탑골공원이나 천안 아우내(병천)처럼 독립만세를 외친 현장은 아니다. 왜정(倭政)이 격렬했
던 화성 지역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잔악한 학살의 현장으로 이곳의 사연을 접
한 이 땅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치가 떨리는 강인한 복수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3.1절 같은 날에 이곳을 찾은 왜인(倭人)이 있었다면 제암리 현장을 보고 격분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밟혀 묵사발이 되거나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해외로 반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 심정도 당장 왜인 하나 아작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이곳은 우
리에게는 통한과 오욕의 현장이다. 그리고 제3자인 외국 사람들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eld)처럼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냐며 놀라 넘어질 정도이니 잔인함의 종결지라 할 만 하다.

1910년 8월 동아시아의 오랜 약소국이자 태생부터 비리비리했던 조선이 왜국에 의해 강제로 막
을 고하면서 고난의 왜정(倭政) 시대가 시작되었다. 왜열도는 그 옛날 천하 최대의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와 철로 먹고 살던 가야(伽倻)의 지배를 받던 그들의 별채로 백제가 망한
이후 한반도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공간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지역을 통치한 경험이 없어 초기에는 강경책이 중심이 된 무단통치(武斷統
治)로 이 땅을 다스렸다. 그래도 하나의 나라가 되었으면 조선 사람도 본토 백성처럼 잘 보살펴
주고 평등하게 대해주어야 마땅하건만 오랫동안 조선에 대한 컴플렉스가 강했고 자국 백성에게
도 제대로 된 선정(善政)을 펼친 적이 없으며,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칼질만 일삼는 무식한 개
념의 사무라이의 세상이라 그럴 그릇이 되질 못했다. 왜인 우선의 차별정책을 펼치고 가혹한 수
탈은 물론 토지까지 편법으로 막대하게 뜯어갔으며, 조선에 정착한 왜인들도 꼴에 지배층이라고
횡포와 오만을 부려 조선인들의 원성과 울분은 전 은하계를 뒤덮었다.

그렇게 피지배층으로 살던 조선 사람들은 1918년 미국(米國)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민
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意, National Self-determination)를 듣고 암흑에서 만난 등대불처럼 커
다란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란 쉽게 말하면 '각 민족은 각자 알아서 해라.
어느 민족이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민족자결주의를 전해들은 한용운(韓龍雲)과 손병희(孫秉熙) 등의 조선 지식인 및 종교지도자 33
명은 거국적인 독립만세를 계획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던 태화관<太華館, 명월관(明月館) 소속의
요리집>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했다. 그런 다음 2월 28일 조계사 뒤쪽에 있던 천도
교(天道敎) 소속 보성사(普成社)에서 4시간 동안 비밀리에 21,000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뿌렸으
며, 바로 다음날 탑골공원과 종로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숨죽여 지내던 조선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그동안 왜정과 친일파에 쌓인 격분과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며<거기에 고종(高宗) 황제의 붕어(崩御, 제왕의 사망)도 한몫함> 너도 나도 태극
기를 쥐어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만세를 부르니 왜정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단세포
인 왜정은 회유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몽둥이와 칼, 총을 들고 진압에 나섰다. 이렇게
조선 민중과 왜군/왜경(倭警, 친일 조선 경찰 포함)은 이리저리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고, 뚜껑
이 뒤집힌 왜군/왜경은 잔인하게 진압을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었다.


▲  독립만세를 부르는 화성 사람들 (순국기념관 기록화)

◆ 화성 지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처절한 몸부림
화성 지역에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서울보다 4주가 늦은 3월 하순이다. 제암리 사람인 안정
옥(安政玉)과 안종린(安鍾麟)은 3월 10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檄文)를 입수하고 고향으
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3월 26일 화성시 서부인 사강, 서신 지역 주민 1,000여명과 만
세 운동을 벌였다. 이때 왜경과 충돌하면서 왜인 순사부장 노꾸찌 등을 몽둥이와 돌로 죽여버렸
다.

한편 안정옥과 백낙열, 이정근 등은 발안 5일장이 서는 3월 30일에 다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
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을 시작으로 시위를 전개했으며, 순
식간에 800명(또는 1,000명)이 호응하여 발안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독립만세의 물결에 왜경은
총을 발포해 진입을 막았으며, 군중은 돌을 던져 저항을 했다.
그들이 주재소 코앞에 이르자 염통이 쫄깃해진 왜경은 칼을 휘둘러 이정근과 김경태 등 3명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 장면을 본 민중들은 더욱 성난 파도라 들이쳐 경찰주재소와 우체국, 왜
인 소학교(小學校)를 불태우고, 왜인 가옥에 돌을 던지니 왜인 43명이 목을 붙잡고 청북면 삼계
리로 줄행랑을 쳤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위자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또한 4월 1
일과 2일에는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인근 진례산, 천덕산, 당제봉, 쌍봉산, 보금산에서 봉화 시
위를 벌였다.

화성 일대의 시위가 생각 외로 격렬하게 이어지자 수원, 화성 지역 관리들은 총독부에 살려달라
고 징징거렸다. 그러자 경기도 경무부(警務部)에서 헌병과 보병 수십 명을 파견하여 4월 2일부
터 화성 지역을 돌면서 시위 주모자와 가담자를 잡아들이니 안그래도 성난 민중을 더욱 들쑤신
꼴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4월 3일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읍(조암) 주민 2,0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안/우정면사무소 건
물을 불지르거나 파괴하고 화수리 경찰주재소를 공격했다. 왜경이 총을 발포하면서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했는데, 이에 격분한 군중은 총을 쏘던 왜인 순사 가와바다 등을 돌과 몽둥이, 농기
구로 때려죽였다.

시위대의 성난 파도에 잔뜩 발작한 왜경은 치졸한 복수전을 다짐하고 4월 4일 왜군 30명으로 만
세운동의 진원지인 화수리를 공격해 1명을 죽이고, 가옥 수십 채를 모두 불태웠다. 또한, 4월 5
일 새벽 3시에는 진원지의 하나인 수촌리를 공격해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을 비롯해 민
가 38호를 불태우고 마을 주민 8명을 다치게 했다. 이에 발끈한 민중은 그날 오전에 발안장터에
서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왜경이 그들을 진압하고 70여 명을 잡아 고문을 했다. 그리고 4월 7일
에도 시위군중 130여 명을 잡아 고문했으며, 정순영 등 13명은 2~10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  제암리 사건 때 숨진 23인이 묻힌 거룩한 무덤

◆ 왜정의 잔인한 뒷끝 (제암리, 수촌리 사건)
4월 13일 발안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중위 아리타도시오(有田俊夫)가 보병 79연대 왜군 11명을
데리고 발안에 내려왔다. 그는 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와 이화리 주모자를 모두 죽
이기로 작정하고 바로 그날 사사까(佐板)의 안내를 받아 우정면 이화리(일월동)를 공격해 김태
경 선생과 하인을 죽이고, 그의 집을 불질렀다. 그리고 20여 명을 잡아갔다.
그리고 4월 15일, 군인 11명과 사사까, 그리고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길잡이로 삼아 제암리를
찾았다. 사사까는 3월 30일 발안 장터 만세시위 때 군중의 공격으로 목을 붙잡고 도망친 왜인으
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군중들에게 보기 좋게 털린 것을 보니 지역 사람들에게 꽤나 진
상을 부렸던 모양이라 그는 그날의 앙갚음을 위해 길잡이를 자처했다.

제암리에 이른 왜군은 조희창과 사사까를 통해 훈시할 내용이 있다면서 40세가 넘는 마을 남자
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고, 다른 마을에서는 바로 총질하고
불지르고 하더니만 여기서는 교회로 모이라고 하니 그들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싶
다. 그래도 몇몇은 의심이 들어 나오지 않자, 일일이 집을 찾아다니며 15세 이상은 모두 나오라
고 했다. 사람들이 교회 앞에 모이자 사람들의 키를 재어 총길이보다 작은 아이는 돌려보내고
큰 사람만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 모두 앉게 했다.
아리타가 교단 앞에 서며 훈계를 가장한 헛소리를 좀 하더니 뜬금없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
인가를 물었다. 이에 안씨(안종후로 추정됨)가 일어나 '성서는 인간 상호간에 친밀하게 지낼 것
과 신을 경건하게 섬기고 받드는 것, 그리고 신은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
답을 했다.

답을 들은 아리타는 뭐라 씨부렁거리면서 교회를 나갔고, 바로 날카로운 구령을 외치자 왜군은
교회를 봉쇄하고 창문을 통해 총질을 가하면서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교회에 갇힌 사람들
은 우왕좌왕하며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총에 맞아 쓰러지고, 홍순진을 비롯한 3~4명이 교회를 탈
출했으나 홍순진은 도망치다가 사살되고, 안상용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집으로 피했다가 들켜서
살해되었다. 겨우 노경태만 필사의 각오로 산을 넘어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또한 바람이 세게 불면서 교회 밑에 있는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왜군이 일일이 불을
질렀다.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는 왜군에게 참살되었고, 홍원식
의 부인은 총을 맞고 죽었다. 이 사건이 바로 왜정의 잔악무도함을 천하에 알린 제암리 학살사
건으로 하나하나 체포하고 처리하기가 귀찮은지 교회에 몰아넣고 한꺼번에 몰살을 시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울부짖는 여인들까지 죽이면서 마을 사람 태반을 학살했다. 오로지 교회에서 유
일하게 탈출한 노경태와 전동례만 살아남았으며, 마을 주민 23명이 죽고, 마을 가옥 33채가 잿
더미가 되었다. 이때 불의의 죽음을 당한 23명은 다음과 같다.

안정옥(安政玉), 안종린(安鍾麟), 안종악(安鍾樂), 안종환(安鍾煥), 안종후(安鍾厚), 안경순(安
慶淳), 안무순(安武淳), 안진순(安珍淳), 안봉순(安鳳淳), 안유순(安有淳), 안종엽(安鍾燁)·안
필순(安弼淳), 안명순(安明淳), 안관순(安官淳), 안상용(安相鎔), 조경칠(趙敬七), 홍순진(洪淳
晋), 김정헌(金正憲), 김덕용(金德用), 강태성의 부인 김씨·홍원식의 부인 김씨 등 23인


▲  고주리 사건을 재현한 디오라마

제암리에서 잔인하게 일을 처리한 왜군은 가까운 고주리로 쳐들어가 만세운동에 가담한 김흥열
과 그의 가족 6명(모두 남자임)을 모두 뒷간으로 끌고가 칼로 잔인하게 죽이고, 노적가리에 시
신을 얹혀 태워버렸다. 김흥열의 9살짜리 아들인 김덕기는 그 광경을 보고 분연히 뛰쳐나와 '나
만 살면 뭐하나. 나도 죽여라' 왜군에게 달려들었다.
왜군 하나가 구두발로 차면서 울타리 밑 도량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다시 일어나 덤비는 것을 김
흥열의 형수가 급히 나와 그를 치마 폭에 감추어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을 고주리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제암리 사태와 같은 날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암리 사건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화성시
에서는 이 둘을 묶어 제암리/고주리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주리 사건에 격분한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왜정에 항의를 하는 한편 김흥열
일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4월, 1달 동안 화성 일대에서 왜정이 벌인 무자비한 진압에 가옥 329채가 화재를 입었고, 46명
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 그리고 442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
약을 받고 1,202명을 방면했다.


◆ 제암리 사건 이후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테일러가 4월 5일에 일어난 수촌리 사건을 조사하고자 자동차를 타
고 가던 중, 우연히 제암리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가 제암리 사건 다
음 날인 4월 16일이었다.
거기에 제암리 교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경태가 서울에 올라가 증언을 하면서 4월 18일 스
코필드(F.W Scofield) 선교사가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찾아 현장을 조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 발걸음을 해 현장 뒷수습을 하며 부상자를 도왔다. 그리고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으로 왜국의 만행을 천하에 알렸다.
또한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監理師)였던 노블(M.W Noble)은 미국영사관에 왜정의 만행을 조사
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그의 아내는 제암리로 내려가 복구 작업을 도왔다.

하지만 그들 선교사는 조선의 독립만세운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왜정의 기독교인 탄압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단순히 제암리 기독교인의 만세운동에 대한 왜정의 만행이라고만 알려졌다.
허나 제암리에서 죽은 23명 가운데, 천도교인이 11명, 기독교인이 10명이며, 고주리는 6명이 천
도교 지도자 가족이다. 그러니 한쪽 종교로 치우친 것이 아닌 두 종교가 서로 연대한 것으로 봐
야 되며, 통역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내용도 조금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왜정은 제암리와 수촌리 사건에 대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일축했다.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왜인과 왜경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왜경과
왜군이 크게 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제암리 사건은 그냥 생각 없이 벌인 것이 아닌 계획된
것이다. 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집합시킨 것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의 명단도 이
미 파악하고 있었으며(사람들이 다 안오자 가가호호 찾아가 불렀음) 사건을 지휘한 아리타 중령
은 그들을 교회에 몰아넣어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머리통 속에 이미 계산을 한 상태였다. 또한
교회를 빠져나온 3~4명도 철저히 잡아 죽였으니, 퇴로까지 미리 계산을 한 모양이다.


▲  현재 이전의 제암리교회의 모습 (2001년 3월 1일 철거됨)

◆ 제암리교회의 역사와 23인의 피를 바탕으로 태어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제암리교회는 1905년 사랑방 예배를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초가로 바뀌었으며, 1919년 제
암리 사건 때 불탄 것을 1938년에 다시 지었다. 1965년 제암리 사건을 들은 왜국 목사 오야마
레이지는 대학생을 이끌고 제암리를 찾아 참배했으며, 당시의 만행을 대신 사죄했다. 그리고 귀
국하여 모금을 벌여 제암리교회에 보냈는데, 애당초 모금 목표액은 1,000만엔이었으나 그 금액
을 채우지 못했다. 어쨌든 왜인이 보낸 돈으로 1970년 위의 사진으로 중수를 했는데, 교회 건물
은 3을, 중앙에 뾰족 솟은 아치탑은 1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온몸으로 3.1운동을
상징한다.

허나 왜인들의 성금으로 만든 탓에 부정을 탔는지 나중에 부실공사로 판정되어 2001년 3월 1일
에 때려부셨고, 그 자리에 정부 지원금 36억원을 들여 지금의 교회와 기념관을 만들었다. 제암
리 사건 당시 교회는 순국기념관 앞에 자리한 순국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으로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발굴하여 23위의 유해를 발견
했으며, 그들의 조끼 단추와 당시 왜군이 지닌 것으로 보이는 동전과 병 등이 출토되었다. 유해
가 다시 빛을 본 자리에는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해 그들의 넋을 위로했으며, 서쪽
산자락에 무덤(23인 순국묘지)을 마련해 그곳에 모두 봉안했다.
또한 발굴이 이루어진 그해에 제암리 현장을 사적 299호로 지정해 3.1운동의 성역으로 삼으면서
순국기념탑과 무덤을 비롯해 23인 상징조형물, 순국기념관, 3.1정신교육관을 갖추었고, 유적 주
변을 공원으로 꾸며 3.1정신을 되새기며 잠시 발걸음을 멈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  당시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제암리 사건 현장 출토 유물들
마을 사람들의 유물은 물론 왜군이 지닌 동전과 병도 여럿 나왔다.


◆ 3.1운동의 의의와 결과
약 2달에 걸쳐 벌어진 3.1만세운동은 200만이 동참한 천하 최대급의 시위였다. 비폭력적으로 진
행된 한계로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왜정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솔직히
'대한독립만세! 왜는 물러가라!' 함성을 목이 터지라 외친다고 왜국이 이에 쫄거나 감동해 순순
히 물러날 리는 더군다나 없다. 1875년부터 어떻게 공을 들여 먹은 땅인데, 그렇게 시위만 한다
고 스스로 물러가겠는가. 그렇다고 시위군중이 무장을 하여 폭력적으로 나섰으면 어땠을까? 그
럼 조선 전토는 거대한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간도(間島)와 중원대륙에서 독립군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도 그 수는 적다. 조선에서도 왜정에 대항할 비밀 군대나 의병도 거의 없
으며,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만하다. 게다가 시위에 참여한 인파에 학생, 어린이
, 노인, 여인들도 많으니 효과적인 전투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비폭력으로 전개해 조선 민중의 뜻을 천하에 알린 것이다. 물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발
생해 왜경이나 왜인, 친일 경찰/지주 등이 다량으로 맞아죽었으며, 화성 발안이나 조암처럼 경
찰주재소와 우체국, 학교를 공격해 불지르는 상황도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3,1운동으로 단단히 홍역을 치룬 왜국은 조선 민중의 저력에 크게 겁을 먹었다. 왜인들은 강자
가 협박하면 무조건 엎드려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지만 조선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단
순했던 왜는 조선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리고 그런 시위와 항쟁이 계속 일어나면 왜국도 하
등 좋을 것이 없다. 아무리 총칼로 밀어버려도 전력(戰力)을 비롯한 국력 손실이 적지 않게 발
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회유책과 조선인 대우를 내건 문화통치(文化統治)로 통치 노선을
변경했다.
또한 3.1운동은 중원대륙 민중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어 5.4운동이 일어났으며, 인도의 간디도
3.1운동을 모델로 삼아 영국을 향해 비폭력항쟁을 전개했다.

중원대륙의 허접 고대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공명 제갈량(孔明 諸葛亮)의 남만
(南蠻)정벌 이야기가 나온다. 제갈량은 유비(劉備)가 세운 촉(蜀)나라의 승상(丞相)으로 남만이
군사를 일으켜 후방을 위협하자 손수 군사를 이끌고 남만을 정벌했다.
그는 우수한 전술과 군사력으로 남만군을 격파하고 남만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7번 잡아 7번 풀
어준 이른바 칠종칠금(七縱七擒)을 벌이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남만 백성과 지배층을 위로하
고 그들을 다독거린다. 결국 맹획을 비롯한 남만 지배층과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갈량에게
진심으로 항복하면서 잠시나마 촉나라의 믿음직한 속국(屬國)이 된다. 물론 삼국지정사에는 225
년 제갈량이 남만을 치고 가을에 돌아왔다는 내용 뿐이고, 연의에서 나오는 부분은 나관중(羅貫
中)을 비롯한 할일 없는 문인들이 지어낸 것이지만 침략전쟁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점령한 나
라들에게 적지 않게 귀감이 되는 내용이다. 제갈량이 저렇게 공을 들여 자기네 편으로 만들었지
만 남만은 얼마 안가 촉에 반기를 들고 말았으니, 왜국과 같은 무단통치는 어련하겠는가?

끝으로 한심하게도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뉴라이트를 비롯한 뇌에 주름잡힌 꼴통 집단
들이 3.1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대단하다. 물론 왜국의 입장에서 보면 폭동이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권리를 되찾고자 벌인 정당한 시위이다. 왜정이 제갈량처럼 했으면 모를
까? 제갈량의 발톱의 낀 때만도 못한 것들이 크게 잘못을 했으니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러니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발 입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하늘도 저런 것들에게 벼락
을 내려야지 그렇게 벼락을 아껴서 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찾아가기 (2014년 3월 기준)
① 수원역 경유 제암리까지
* 지하철 1호선, 분당선 수원역(6번 출구, AK플라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2줄로 이루어진
  수원역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발안으로 가는 32, 33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림아파트에서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보이는 제암4거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제암리 유적 입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6~7분 가면 제암리 유적이다. <또는 발안3거리(바다마
  트)에서 내려서 길 건너편에서 33-1번 시내버스를 타면 제암리(제암리유적입구)까지 가지만
  대신 향남지구로 빙 돌아서 감>
* 수원역(9번과 10번 출구 중간)에서 조암행 직행버스를 타고 제암리 하차, 도보 5분
② 직행버스 이용
* 수원터미널과 서수원터미널에서 조암행 직행버스를 타고 제암리 하차
* 서울 사당역(4번 출구)에서 조암행 직행버스(20~30분 간격)를 타고 발안마을주공아파트 하차,
  버스가 간 방향으로 4분 정도 가면 제암4거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③ 승용차 이용
* 서해안고속도로 → 발안나들목을 나와서 발안 방면 좌회전 → 제암리 유적
* 수원 → 발안 방면 43번 국도 → 제암4거리 → 제암리 유적

★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관람정보 (2014년 3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 없음
* 관람시간(순국기념관) : 9시 ~ 18시 (입장은 17시까지) 순국기념관 외에 23인 순국묘지와 야
  외에 있는 조형물은 시간에 관계없이 관람 가능
* 순국기념관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 설날과 추석, 1월 1일
*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 (제암길 50, ☎ 031-369-1663)
* 화성 제암리 순국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3인 상징 조형물


♠  제암리 유적 둘러보기

▲  의연하게 서 있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우리가 제암리에 도착한 시간은 16시였다. 그날 11시부터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행사는
진작에 끝났고 야외에 깔아놓은 행사 무대를 한참 철거하고 있었다. 오늘이 그래도 3.1절인데
그것을 무색할 정도로 관람객도 별로 없었고, 주차장도 썰렁했다. 나중에 들으니 오전과 오후 3
시 이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래뵈도 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3.1절 성지인데
사람들이 안오면 어디 쓰겠는가?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는 주차장 서쪽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서 있어 나그네의 마음
을 숙연하게 한다. 1982년 제암리사건 발굴 현장에 심은 탑으로 탑 뒤쪽에는 약간 동그랗게 병
풍석을 둘러 뒤쪽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은 물론 탑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  23인 상징 조형물

3.1운동 순국기념탑에서 순국기념관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높은 곳에 서로 키가 다른 파란 피부
의 조형물이 눈짓을 보낸다. 이들은 제암리 사건 때 숨진 23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들 중에 독
보적으로 큰 형상 하나가 나머지 22기를 이끌고 있는데, 그 모습이 청동기시대 청동검(靑銅劍)
을 연상케 한다. 꼭대기에는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이 석상은 3.1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  제암교회 사택
순국기념관 맞은편에 자리한 건물로 2001년에 지은 것이다.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3.1운동 순국기념관은 2001년 3월 1일에 개관된 건물로 바로 옆에 제암교회가 자리해 있다. 2개
의 전시실과 시청각실을 갖추고 있는데, 본 기념관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전시관에는 제암
리를 비롯한 화성 지역의 만세운동과 전개 과정, 그리고 왜정의 탄압과 학살을 여러가지 전시물
과 사진, 스크랩한 신문 자료나 선교사들의 기록문, 고주리 사건을 재현한 디오라마 등으로 설
명하고 있다. 허나 대부분이 스크랩된 자료와 사진들이고, 제암리와 화성 지역에서 나온 유물은
1982년에 출토된 단추와 동전, 병을 비롯하여 천도교에서 작성한 제암리 사건 기록문, 당시 천
도교에서 쓴 깃발이 전부이다.
제2전시관은 1905년 이후부터 1920년까지에 역사적 내용과 3.1운동에 대한 자료를 다루고 있다.
화성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에서 벌어진 3.1운동과 해외에서 진행된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가 있으나 국사 관련 교과서나 여타 3.1관련 기념관에서 접할 수 있는 흔
한 내용들이 주류이다.
 
시청각실은 제암리 사건을 증언을 통해 제작된 프로그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상영시간은 17분이
다. 관람 순서는 시청각실을 시작으로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 순이며 보면 되며, 제일 먼저 시
청각실에 앉아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전시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그러니 시청각 자료로 예습
을 하고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복습을 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순국기념관에 있는 여러 내용 가운데,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란 어록이 무척 마음에 와닿
는다. 허나 용서는 하되, 나중에 반드시 그 몇 배로 응징은 해줘야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저항하는 왜인들과 구한말과 왜정 때 이 땅을 심히 괴롭힌 왜인의 후손들을 왜국에 널리고 널린
신사(神社)나 왜왕 떨거지가 사는 동경 코쿄에 싹 몰아넣고 제암리처럼 똑같이 처리해주기를 바
란다. 왜열도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넘어간 이들이 정착한 곳이라 우리와 거의 같은 민족
이지만 계산할 것은 확실히 해야 되지 않겠는가?


▲  화성 지역 만세운동 당시 천도교에서 쓴 깃발과 당시의 일을 기록한
서적들 (제1전시관)

▲  왜정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쓴 고문기구와 족쇄 (재현물)
보기만 해도 은근히 소름이 끼친다. (제2전시관)

▲  순국기념관 앞에 선 또다른 3.1운동 순국기념탑

▲  제암리 사건을 깨알같이 담은 순국기념탑의 옆 모습

1919년 제암리 사건이 벌어진 교회는 바로 순국기념관 동쪽에 있는 순국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탑 정상부에 새겨진 옛 모습의 태극기는 기념관에서 불타오른 나그네의 복수심과 분노, 그리고
애국의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주며, 탑 밑에는 순국한 23인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앞에 조그만
상석(床石) 같은 것이 놓여져 있다.


▲  순국묘지로 가는 계단
계단 양쪽에 천하의 국기인 태극기가 5쌍씩 심어져 계단을 오르는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엄숙하게 손질해준다.

▲  23인 순국묘지(殉國墓地)

태극기 계단 끝에는 제암리 사건 23인이 잠든 무덤이 있다. 여기서는 23인 순국묘지라고 부른다.
1982년 시신을 수습해 모신 제법 큰 무덤으로 봉분(封墳) 밑에는 간단하게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 앞에는 무덤의 기본 요소인 상석과 비석을 두었다.
무덤 앞에 3.1절을 맞이하여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화성 지역 국회의원과 주요 인사들이 바친 헌
화(獻花) 9개가 놓여져 있는데, 썩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 괜히 무덤만 가리고 있고, 저들이 진
정 그들을 기리고자 놓은 것인지 의심도 간다. 주요 인사 가운데 친일파 후손도 분명 있을텐데,
그들은 저런 형식적인 꽃 대신 자신의 재산을 바치며 조상의 업보를 사죄해야 마땅하다.


▲  가까이서 본 23인 순국묘지

▲  옆에서 본 23인 순국묘지

상석에는 일반 민중들이 바친 국화들이 수북히 쌓여 상석 다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민중들이 바
친 조그만 국화가 앞에 놓인 덩치만 무식하게 큰 9개의 헌화보다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
까?~~ 이 땅에 제대로 개념이 박힌 권력층과 상류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늘 민중들과 뜻 있는 지식인들이 나섰지, 태반의 권력/상류층들은 그냥 손가락만 얹히거나 욕심
만 부려 배를 채웠을 뿐이다. 순국묘지에 묻힌 23명도 모두 일반 백성들이다.


▲  3.1정신 교육관
제암리로 견학 온 학생/일반 단체에게 3.1정신을 심어주는 공간이다.

▲  공원화된 제암리 3.1유적지 북쪽

제암리 유적을 이렇게 둘러보니 어느덧 5시가 넘었다. 3월이라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저녁이 다
가옴에 따라 찬바람이 날카롭게 불어 우리를 때린다. 혹독한 겨울의 제국에 모든 걸 털려 벌거
숭이가 된 나무들이 가지를 높이 치켜 세운 모습이 마치 독립만세를 외치는 듯 하다. 1919년에
는 이 땅의 백성과 산천초목(山川草木)들은 왜국에 대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지금 나무들
은 겨울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어엿하게 읍(향남읍)으로 성장해 덩치가 커진 발안 시내로 나와 수원시내버스 32번을 타고 수원
으로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3.1절 제암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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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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