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압사'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09.30 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2. 2019.12.29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3. 2017.01.07 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4. 2013.12.13 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호암산 호압사, 호암산 정상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정상 주변)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압사 석불좌상

호암산 남쪽 봉우리

▲  호압사 석불좌상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나의 즐겨찾
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을 찾았다.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
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다. 서울 금천구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
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
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 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함께 오랫
동안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冠岳山)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
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세웠다는 호압사를 비롯하여 한우물, 석
구상, 호암산성터, 제2한우물터, 약수사, 불영암,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조망 또한 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삼
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잘생긴 바위들이 잔뜩 포진해 있고, 산 정상부와 능선부로 오
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러운 주능선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밖에 시흥계곡과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호암
산폭포 등의 명소가 있고,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남북으로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
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호압사(虎壓寺) 입문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벽산아파트1단지) 정류장 동쪽에는 호압사 일주문이 팔작지붕을 펄럭이며 중생을
맞이한다.
이 문은 절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2000년에 금천구(衿川區)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
구가 서울시 25개 자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 구로 선정되어 시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관내에서 호압사의 입구이자 호암
산의 대표 관문인 이곳에 세운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에 안긴 절,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이 없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원이 자
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펼쳐져 시작부터 숨을 헐떡이게 한다. 절까
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경사의 패기가 대단하여 아
무리 4발 차량이라 한들 바퀴를 조심스럽게 굴려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조금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
지며,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솟아나듯 보이기 시작한다.


▲  콘크리트 석축 위에 모습을 드러낸 호압사

호압사는 돌로 다진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 밑부분은 콘크리트로 높게 기단을 만들고
주차장과 해우소 등을 두었는데, 돌이 아닌 콘크리트라 다소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돌과 흙
으로 2단이나 3단의 계단식 기단(基壇)을 다졌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저 콘크리트 공간을 지나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호압사 심장부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둥지를 튼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로 자비를 강
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
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
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매서운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
로 세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태종
(太宗)이 호압(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
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
했으며, 1935년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다. 그리고 2008
년에 9층석탑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
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백성들을 동원해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짓던 1394년, 궁궐 건
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현상이 일어나자 태조는 뚜껑
이 폭발하여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이제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모두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펴주십시요!!'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정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
다'

하여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
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야되나?'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호출하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
를 누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랬더니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
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것이 호압사의
유래로 크게 여겨진다.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약사전을 비롯해 삼성각, 심검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준다.
호압사는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
불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둘러보기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늦가을 사진)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다. 이들은 약사전에 있
는 석불좌상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존재들로 서쪽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7m, 허리둘레 4.2m이다. 그리고 계단 동쪽 나무는 키 11m, 허리둘레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늦가을 사진)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크고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리고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도 건물로 심검(
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있는 8각9
층석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걸렸는지 통 크게 9층석탑을 세우고, 기증 받
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사리를 직접 친견할 수 있도록 1층 탑신에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겠으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좌측 구석에
세웠으며,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녀 가을 햇살에 한층 빛나 보인
다.

그리고 석탑 북쪽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인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에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
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에 봉안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호압사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칠성 식구들이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독성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

▲  삼성각 뒤쪽에 있는 관세음보살상
(2012년 작)


▲  호압사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
었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하
여 법당 불단(佛壇)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이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석조약사여래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석약사불
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불)'임>이 협시보살을 넉넉히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여래상이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
菩薩)을 좌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운 아기부처 2기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여래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
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가운데)과 일광/월광보살상

15세기(늦어도 16세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돌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으로 불두(佛頭)
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간의 양
감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약합
(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각기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
를 지킨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
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약사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  약사전 뒤쪽 굴뚝과 지장보살상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과 목어, 법고, 운판을 머금은 사물(四物)의 공간인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
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
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미어터질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매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한다면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나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
지만 사라진 지 오래, 그래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거기서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베
푼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
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  호압사 샘터


▲  호암산 정상을 목전에 둔 호압사 분기점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서울둘레길5코스)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그리고 북쪽으로 난 평
평한 길은 독산동(禿山洞)과 목골산으로, 서쪽은 호압사와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으로 이어지
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호암산 정상(385m)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처음에는 방심하기 좋을 정도로 얌전한 수준이나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잔뜩 흥분하여 속인들의 혼을 다 빼놓는다.

 

호암산 정상을 보다 빨리 오르고 싶다면 호압사에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 바로 뒤에 병
풍처럼 둘러진 뫼가 바로 정상이고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해발 140m(호압사입구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상까지는 해발 250m만 오르면 된다.
허나 그만큼 산길의 경사는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
다.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로 오르는 길도 그렇고, 호압사 분기점에서 정상 입구로 오르는 길
도 제법 야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중간인 호압사에서 잠시 경내를 둘러보며 쉬다가 정상
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구인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
암산 꼭대기이다.
호암산은 대체로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잣나무 산림욕장에
서 서남쪽 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
르면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능선길이 펼쳐진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을 비롯한 금천구, 광명시를 비롯하여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광명시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서북부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저 봉우리에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정상 입구에 이르면 흥분된 산길은 급히 진정을 되찾으며, 여기서부터
조금은 느긋한 산길(바위길 위주)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85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견고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
의 머리에 해당된다.
이곳은 서울에 이름난 조망터이자 야경(夜景) 명소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
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
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려보낼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
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이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을 다스리고 소유한 군주가 된 듯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등 서울의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강남구, 서울 도심과 남산,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큰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강동구, 성동구, 광진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긴 산줄기들은 수락산과
불암산, 용마산~아차산이다.

▲  호암산 정상과 깃대봉 사이에 자리한 헬기 착륙장

▲  태극기가 펄럭이는 깃대봉(민주동산)

호암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4~5분 정도 가면 태극기가 있는 깃대봉(민주동산)이 나온다. 두꺼
운 바위에 우리의 영원한 국기인 태극기가 심어져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국기(國
旗)가 걸린 깃대가 있다고 해서 깃대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가 바로 나오며, 남쪽으로 가면 장군봉
과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쪽으로, 동쪽은 신우초교와 약수사, 서울대 쪽으로 이어진다.


▲  늦가을이 알록달록 타오른 삼성산 돌산 능선
대자연이 지른 늦가을 불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망막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서울을 굽어보는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

깃대봉 북쪽 벼랑에 터를 다진 깃대봉 조망대는 호암산 정상 만큼이나 호화로운 조망을 자랑
한다. 서울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 북한산(삼각산)과 수락산 등 서울을 둘러싼 온갖 산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보이는 범위는 정상과 비슷함)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서남부(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와 강서구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북부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봉천동, 관악구, 동작구, 강남구, 용산구, 남산, 도심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신림동과 서울대,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서울 동남부, 동북부 지역


깃대봉 조망대에서 하늘 아래 세상을 마음껏 굽어보고 호암산 남쪽 능선으로 움직였다. 호암
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능선까지 오르면 평지만큼이나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여 종종 찾아오는 것도 바로 그
매력 때문이다. 또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성터 등 오래 숙성된 맛좋은 양념도 가
득하니 정말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깃대봉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
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남쪽 능선이나 길은 매우 부드럽다.

본글은 내용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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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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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서남부)

▲  호압사 8각9층석탑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울 시흥동과 독산동,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석수동)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
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
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옛 금천(衿川) 고을(현재 서울 금천구)의 주산
(主山)이라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
성)에서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글쎄 한강 남쪽
에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나란히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
이다.
하여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호압사를 세우
고, 관악산 정상 밑에 연주암(戀主庵)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
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세운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
래된 옛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성, 흔적만 남
은 제2한우물터,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기도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
(己亥迫害) 때 처단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
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절의 흔적들이 존재하여 이곳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
워준다. 게다가 조망 또한 알품으로 서울의 절반 정도와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
(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며, 호압사 남쪽에는 넓게 잣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으로 꾸몄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2012년 8월에 닦여진 호암산폭포가 있으며, 호암산 서남쪽 끝자락에는 시흥계곡이 펼쳐져
있는 등, 볼거리도 풍년이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대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벽산5단지, 시흥계곡, 석수
역 등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까지 이어진다. 또한 사당역
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
(13km)이 닦여져 있다.

호암산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1년에 여러 번씩 찾아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나
들이는 호압사입구에서 시작하여 호압사, 호암산 정상, 한우물(불영암)을 거쳐 벽산5단지
에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수십 번 인연을 지은 곳이라 호압사만 보고 빠지려고 했으나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여기까지 온 거 더블로 싹 둘러보았다.


▲  호압사 뒤쪽에서 바라본 호암산
늦가을이 지른 단풍불로 산이 매우 화사하다.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는 절, 호압사(虎壓寺)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호압사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면 바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팔작
지붕 머리를 한 그는 2000년에 금천구청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구가 서울시 25개 자
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구로 선정돼 시상금을 받자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호압사에 만들어준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 사찰,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이 뻥 뚫려있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
원이 자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중생의 마음을 잔뜩 주눅들게 만든다. 절까
지 걸어서 10분 거리로 차량들이 편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콘크리트 길이 닦여져 있는데, 경사
의 패기가 짙어 아무리 차량이라 한들 조심스레 바퀴를 굴린다. 특히 눈이 쌓인 날은 울면서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좀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진
다. 주차장을 지나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마치 솟아나듯 보이기 시
작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단풍나무 (경내 바로 밑부분)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
으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곳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는 개경을 버리고 현재 서울을 도읍으
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
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
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하여 풍수지리적
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1394년에 태조가 무학대사에게 명해 호암산 밑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호압사
라 했다고 한다. 과연 태조와 무학대사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호암산의 기운을 잡
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에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고,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웠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을 싹 소
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
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
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
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
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
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
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山寺)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
는데 아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또한 절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
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
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중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을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인다. 또한 매주 일요일 점심시간에 국수 공양을 제공하며, 12월
31일 밤에는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
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약사전에 있는 약사불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산
증인들로 늦가을도 호압사가 좋은지 나무에 오래도록 머물며 알록달록 작품을 빚었다.
계단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키가 7m, 허리둘레가 4.2m이다. 반면 계
단 동쪽 나무는 비슷한 나이에 키 11m, 허리둘레는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은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500년 묵은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9층석탑이 조촐하게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
도 건물로 건물 이름인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8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
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허전함이 달래고자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약사전)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
게도 좌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탑 뒤쪽이자 약사전 옆구리의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
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삼성각 산신탱(山神幀)

▲  삼성각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
단에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자 상징인 석불좌상이 협시보살을 주렁주렁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우에 붙여주어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
는 귀여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해 보이는 약사불은 연꽃 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15세기에 조성된 그는
얼핏 보면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
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
습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
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의 일광/월광보살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고 있
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이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
료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피부의 원
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범종각과 쉼터

범종각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4가지의 물건,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
판(雲版)이 담겨져 있다. 그 옆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쉼터가 닦여져 있어 누구든 다리를 접고
쉬어갈 수 있다.


▲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
은 호압사에서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독서
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
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
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
리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또한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호암산 정상과 석구상 주변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석수역과 서울대 방면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길(서울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 능선길은 난곡(蘭谷)과 목골산으로 연결되며,
서쪽은 호압사와 벽산아파트, 석수역(서울둘레길)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나는 호암산 정상으로 길을 잡았는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뛰어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그런 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
구이며, 거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정상이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리에 해당된다.
서울의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
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서북부와 도심부, 동북
부, 강남,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
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
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와 동작구, 여의도를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강북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 중앙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부천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도덕산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부천 지역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과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
다가 고색의 명소들도 호암산의 매력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수리산(修理山, 489m)과
그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안양(安養)시내

▲  청정한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과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
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
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으
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이 0.9m, 높이가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
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  석구상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니다. 긴 꼬랑지의 고양
이나 호랑이의 그것과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
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
들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잔뜩 굳은 표정에서 웃음이
넘쳐나게 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식지않는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호암산성(虎巖山城)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남쪽 능선길로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된 채 현역에서 물러난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
적을 만날 수 있다. 석구상 북쪽에서 호암산성의 북문터로 여겨지는 성터 흔적이 있는데, 능
선길 산성터는 성돌과 흙이 섞인 1~3m 높이의 각도가 다소 진 성의 윤곽이 전부로 산길에 이
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고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다져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
이는 약 1,547m, 산성 면적은 약 133,790㎡에 이른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
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1990년 봄, 한우물과 호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
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기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
련 기록을 통해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672년에 신라
가 당나라군을 막고자 세운 요새라는 설도 있음>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
런데로 구실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
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慄) 장군
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
(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이곳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
울 수복 작전을 전개했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수백 년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져 뭉개져 갔
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어 버
린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성곽이나 건물을 지어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
난감에 불과하다.


▲  호암산성 건물터

석구상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
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오른쪽(동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왼쪽(서쪽)에는 호암산
성 건물터가누워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터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고,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하게 덮어주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암산
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등의 시설,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힌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터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가 2m에 이르
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
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우제, 기타 여러 의식들이 거행된 곳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
으며, 우물터 곳곳에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귀신도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
우물이 있으니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  호암산 마무리 (한우물과 칼바위)

▲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
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인데 천
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이곳은
물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지 늘 물이 넉넉히
고여 있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며, 신라 중기인 7~8세기 경에 축조되었다
고 한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
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구축했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
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
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
國輿地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 (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에 따라 서울의 화재를 막으
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무늬만 우물로 그의 보존을 위해 그 주위
로 돌난간과 철제 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벼랑에 조망대가 터를 닦고 있어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천하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
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5단지와 시흥동, 독산동, 광명시, 구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구로구, 관악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호암산 북부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용산구,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  불영암 대웅전(佛影庵 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그만 기도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호압사 승려가 늘 머물며 기도를 올린 모양이다. 보통 100
여 년 이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50년대 이후 기도처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
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
러니 한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바탕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
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
2한우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잠시 돌탑 앞에 두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내에 있음)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시내를 넓은 뜨락
으로 삼아 절의 규모는 눈송이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
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火田
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인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한 나그네를 대상으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도 팔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그래서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저들의 보관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處士)가 발견한 것들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저들의 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늘어져 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에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듯 하다.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호암로 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한우물에서 불영암을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
쳐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
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
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
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
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
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왜장이 시흥 장사와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겠다고 제
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왜군 장사는 99번을 하고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졌고, 그
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결국 시흥 장사가 이기자 왜군은 약속대로 후퇴를 하였고,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
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한다.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에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아파트와 시흥동,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과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이렇게 하여 늦가을 호암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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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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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  호암산 (사진 밑부분에 보이는 기와집이 호압사)


 

천하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변해가던 11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
인 호암산을 찾았다. 호암산에 안길 때는 시흥2동 호압사입구에서 보통 출발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삼성산성지에서 첫발을 떼었다.

신림역(2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화계사↔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를 가로질
러 삼성산성지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호암산의 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성당과 삼성산
청소년수련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오른쪽 산중턱에 천주교 성
지인 삼성산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성산성지 동쪽 삼호약수터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의 무덤 (유해 일부가 묻힘)

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1970년에 지어진 삼성산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 형상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겨울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 남쪽)

▲  삼성산성지에서 호압사로 이어지는 산길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호암산 서쪽에 자리한 호압사로 길을 옮긴다. 지도로 보면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바로 호압사의 뒷통수인 호압
사 분기점에 이른다.


▲  호압사 채소밭에서 바라본 호암산(虎巖山)의 위엄
알록달록 익어가는 늦가을 단풍이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서울을 위협하는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어진 오래된 산사 - 호암산 호압사(虎壓寺)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호압사 경내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
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
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
하니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여 두 산의 기운을 잡고자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세웠으며, 호암산에 호압
사를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대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
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
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빚은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
을 싹 소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
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殿下),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
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
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
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른
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
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함>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일주문

▲  호압사 범종각과 원두막 쉼터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는데 아
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호압사입구에서 도보 10분이면 끝) 절
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
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원두막 쉼터를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1년에 2~3번 정도 방문함)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
인다. 특히 중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등을 마련하는 등
호압사의 배려가 돋보인다. 범종각 우측 쉼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으며, 종무소에서 물과 음료
수, 염주 등의 불교용품을 판매한다.

호압사는 내가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불
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호압사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삼성산성지
  에서 내려서 25분 정도 올라가도 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5517번(서울대↔중앙대), 6515번(양
  천차고지↔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 매주 일요일 12~13시에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안주는 경우도 있음)
* 매년 12월 31일 밤 10시 이후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있다.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
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 겸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
용도 건물로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심검당 옆에 솟아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  쉼터 옆에 자리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심검당과 범종각 옆에는 500년 숙성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하는 산증인들로 오랫동안 뜨락에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들이
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떠나가려는 늦가을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늦가을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겨울 제국의 이빨이 커지면서 뜨락에는 벌써부터 맥없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낙엽이란 꼬리표를 달며 산바람과 사람들의 빗자루질, 발질에 이
리저리 흩날려 속절없는 삶을 정리한다.

심검당 옆에 자리하며 천하를 굽어보는 느티나무는 키가 7m, 가슴둘레 4.2m이며, 범종각 옆에서
나란히 천하를 바라보는 느티나무는 키 11m, 가슴둘레 3.6m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성장했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절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유난히도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
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 안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
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게도 좌
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약사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
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995
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치성광여래(칠성)가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山神幀)

▲  푸른 두광(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불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단에
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
이자 상징인 석조약사불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석약사불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
불)'>이 협시보살을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
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
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
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
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과 일광, 월광보살좌상

15~16세기 조성된 이 불상은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
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에는 새로운 식구인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를 지킨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
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료시킨다.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훤하게 만든다.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
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
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리
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벌러덩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

▲  새롭게 마련된 호압사 샘터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지만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지
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물을 제공했다. 그
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제공한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호암산 정상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까지는 해발 160m 정도만 오르면 끝난다. (절 바로 윗봉우리가 정상임)
허나 그 길이 다소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다행
히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입구 갈림길
이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꼭대기(393m, 또는 385m)에 이른다.

호암산은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산림욕장에서 남쪽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른다면 구름 위를 거닐
듯 편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93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다
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
리에 해당된다.
서울에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
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光明)과 안양(安養),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
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적지않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1)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2)
서울 금천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단지, 광명, 도덕산, 소래산 등이 보인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구름처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
이다. 하여 능선을 따라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
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
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부와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
가 오래된 명소들도 풍부하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우리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 가지 않고 호암산산림욕장을 거쳐 시흥동(始興洞) 시내로 내려
왔다. 넓게 퍼진 벽산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바로 시흥2,5동 시내인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걷던 중, 솔향기란 식당이 진하게 손짓을 한다. 날씨도 쌀쌀하여 다들 뜨끈한 해물칼
국수를 먹자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  시흥동 솔향기에서 먹은 돌솥비빔밥과 조개 국물의 위엄

솔향기는 해물칼국수와 돌솥비빔밥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다. 다들 칼국수를 몇 그릇씩 먹을 기
세로 들어왔지만 정작 시킨 것은 돌솥비빔밥이었다. 갖은 나물과 고추장, 그리고 돌솥에 바짝
익혀진 밥이 잘 버무려져 그런대로 섭취할 만 했고, 밑반찬으로 깔린 김치도 잘익어 맛이 좋았
다. 특히 하얀 조개 국물이 일품이라 비록 비빔밥의 부속물로 나왔지만 오히려 주물로 봐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빔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듯 싶어 손만두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니 조그만 만두 10개(1인
분)가 각 테이블에 수줍은 듯 차려져 나온다. 만두를 집어먹으니 뱃속은 말끔히 채워졌고, 그
렇게 저녁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근데 이 집은 특이하게도 소주나 맥주 등의 곡차(穀茶)
를 팔지 않는 이 땅에 흔치 않은 무알콜 식당이었다. 산행도 했으니 곡차 1잔 걸쳐야 마땅하지
만 술이 없으니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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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虎巖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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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

▲  호암산성터


서울 시흥동과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85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
고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다음의 사연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피니 한강 남쪽에 호랑
이를 닮은 호암산과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사이 좋게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서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처럼 화살을 잘쏘며 무인(武人)으로써 크게
위엄을 날렸던 이성계, 허나 대자연이 빚은 호암산과 관악산의 패기에 그만 염통이 쫄깃
해지면서 서울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
산과 관악산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지은 호압사(虎壓寺)를 비롯하여 서울에
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
성터, 흔적만 아련히 남은 제2한우물터와 건물 유적, 호암산의 기운을 잠재우고자 기도를
올린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삼성
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옛 흔적들이 서려있어 이곳
의 중요성을 새삼 가늠케 한다. 
게다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仁川)은 물론 북
한산(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
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근래에는 호압사 남쪽에 넓게 소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을 닦았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호암산폭포가 조성
되어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해 벽산5단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서울대, 석수역, 시흥3동에
서 안길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사당역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산림욕장, 호암산폭포, 시흥계곡
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관악산둘레길(13km)이 뚫리면서 북한산둘레길에 감히 도전
장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호암산 정상 밑에 자리한 호압사에서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는 소나무 산림욕장
을 거쳐가는 것과 호압사 뒤쪽에서 정상 입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각 길마다 장단점이 있겠
지만 좀 쉽게 가고자 한다면 산림욕장 길이 좋다.

호압사 남쪽에 넓게 터를 닦은 소나무 산림욕장은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는 소나무 숲 사
이로 산책로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와 운동시설이 심어져 속인들의 편의를 제
공한다. 그리고 숲 남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호암산이 베푸는 약수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1가
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 주변을 흐르는 계곡을 자연 그대로 냅두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둑과 물
길을 낸 것이다. 얼마나 보기가 흉하던지 애써 가꿔온 송림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지경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2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하여 금천구와 광명시 지역이 눈 아래 펼쳐진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반면 호압사 뒤쪽은 시작부터 꽤나 각박하여 힘겨운 산길을 올라야 되지만 그 거리는 10분 내외
로 짧다. 잠깐의 고통을 딛고 길을 올라서면 금세 호암산 정상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
쪽 봉우리까지는 아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
는 조망을 두 눈에 주어 담으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바로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
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정상과 능선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
렇게 꿀 빠는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명소도 풍부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흐린 하늘 아래로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지역이 보인다.
호암산 능선에는 훤칠한 소나무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까지 다양한 모습의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호암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수식한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2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두툼하게 솟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

▲  솔내음이 춤을 추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과 호암산성터 주변

호압사와 정상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
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
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南
七里, 시흥동)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
으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랑지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구상

▲  석구상 뒷부분의 위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
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비슷해 보이
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니,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
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리와 비슷하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
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은 웃음을 선사하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  숲속 오솔길에 묻힌 호암산성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바로 남쪽 능선길을 조금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만
날 수 있다. 흔적이라고 해봐야 성돌과 흙이 뒤섞인 1~2m 높이의 성터 윤곽이 전부로 이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며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둘러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이
는 약 1.250m로 지금은 300m 정도만 간신히 살아있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축성 시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90년 봄, 한우물과 호
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
기와 갖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련 기록을 통해 신라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1년)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요새
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와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런
데로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로 이때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
慄) 장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선
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호암산
은 서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
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
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서서히 녹아내려갔
고, 등산객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아무
리 인간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건축물을 세워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오르막을 타는 호암산성터

▲  호암산성 능선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곡선의 삼성산 줄기
삼성산 줄기 너머로 관악산 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  호암산성 능선에서 만난 바위
바위 밑은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요망~

▲  제2한우물터 북쪽에 뿌리를 내린
옛 사람의 무덤


석구상에서 제2한우물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무덤 1기가 뿌리를 내렸다. 삼성산이 있는 동쪽
을 바라보는 이 무덤은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다른 무덤과 달리 산의 기맥이 이어
져 있지 않고 그냥 봉분(封墳)만 올린 조촐한 형태로 그 뒤쪽에는 바위가 누워있다.

무덤 앞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없어 무덤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며, 별다른 장식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보아 인근에 살던 백성의 무덤으로 보인다. 비석과 상석(床石) 대신
돌을 두툼하게 깔아 예를 올리는 공간을 마련했고, 봉분은 자연석으로 네모나게 호석(護石)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가 서로 맞물린 듯 불규칙해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유적

호암산성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서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동쪽에는 건물유적이 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유적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히 덮어주며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 때 호암산성을 관
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혀 분간이 쉽지 않은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이 18.5m, 동서 10m, 깊이 2m에 이르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실
감이 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하늘에
제를 지내거나 기우제 등 여러 의식이 거행된 곳처럼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
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말
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으
며,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우물이 있으니 제2한우물은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산 정상부에 둥지를 튼 거대한 옛 우물, 호암산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기며, 이곳에 물
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늘 물로 풍부
하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하며,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덧씌웠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아
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
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
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
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
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로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의 건강을 위해 그 주위로 돌난간과 철제난간을 2중
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속세가 한눈에 바라보
이는 벼랑에 한우물조망대가 터를 닦아놓아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간식에 막걸리 1잔 걸치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승진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시흥 벽산아파트와 시흥동과 독산동,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벽산1/2단지와 호암산 서북쪽 줄기가 보이고, 그 산줄기 너머로
관악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지역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사진 오른쪽 부분에는 호암산의 감시초소인 호압사가 바라보인다.


♠  한우물과 명품급 조망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 호암산 불영암(佛影庵)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단
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
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촐하게 기도처가 있었던 모양으로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아마도 호압사 승려의 수행처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보통
100년 이상 묵은 절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으로 봐서는 1950년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
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
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
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
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예
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물
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오래된 볼거리를 추가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
'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은 천하 일품이라 절의 규모는 눈송이
같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
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
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
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을 파는데, 커피는 500원, 국수와 부침개는 3,000원선이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과 순찰중인 견공(犬公)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
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
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불상에 예를 올리는 듯 하다.


▲  불영암 돌탑거리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가 발견한 유물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영
암에 알렸다. 그래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아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호암산 북쪽 줄기, 그 중간에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이자 호암산의 또 다른 명물 ~ 칼바위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에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불영암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
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긴장을 한다.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당시 시흥(금천)의 중심지는 시흥동>까지 쳐들어
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왜장은 장사
가 이기면 무조건 물러가겠다는 조건을 달며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래서 장사
와 왜군 대표 병사와 손에 땀을 쥐는 턱걸이 승부를 벌였는데, 왜군이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때 바위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내기에서 진 왜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
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 벽산5단지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 시흥동,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그리고 일몰

※ 호암산 찾아가기 (2013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단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
  단지(6515번만 해당)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 마을버스 01번 청색 차량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올라가는 코스
① 호압사 → 소나무 산림욕장 → 약수터에서 왼쪽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35분)
② 호압사 → 호암산 정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40~45분)
③ 벽산5단지 → 칼바위 → 한우물 → 석구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45분)
* 한우물에서 내려가는 경우
① 한우물 → 칼바위 → 벽산5단지 또는 시흥5동
② 한우물 → 제2한우물터 → 남서울약수 → 석수역
③ 한우물 → 호암1터널 → 관악산둘레길 경유(시흥계곡) → 석수역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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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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