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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02 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2. 2017.06.29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국립서울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일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창빈안씨 신도비 호국지장사 팔상도

▲  창빈안씨 신도비

▲  호국지장사 팔상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안
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
가 중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나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
작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안
장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아주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
운 말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
고 서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
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가 시원치가 못하다. (친일매국노와 자격 미달자가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지
장사)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인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
장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의 옛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에 발을 들여 제일 먼저 현충원의 배꼽 부분인 창빈안씨묘역을 찾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남쪽에 있음)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이 조선 왕족
의 늙은 무덤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저건 뭐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원이 들어서
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 묘역은 이곳의 오랜 주인으로 현충원 일대를 거느렸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 국립묘지가 닦이면서 묘역에 딸린 토지 대부분이 호국신의 공간이 되었
으며, 1965년 묘역 북쪽에 이승만 묘역을, 2009년에는 바로 남쪽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이
닦이면서 묘역은 더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10년 이전에는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도, 안내문도 전혀 없었다. 외진 곳도 아
니고 현충원 한복판에 있음에도 어떠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그 앞을 지나쳐도 전혀 모른 것이
다. 다행히 2010년 이후, 묘역 북쪽에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고 현충원 안내도에도
그의 묘역이 표시되어 뒤늦게나마 약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잉여로운 신세로 고통받고 있는 창빈묘
역, 그렇다면 묘역의 주인공, 창빈안씨는 누구인가?

창빈(1499~1549)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1507년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사랑을 받아 22세에 상궁(尙宮)
으로 승급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했으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
도로 덕망이 높았다. 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총애를 받
았으며, 시어미의 후원으로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이어서 숙용<淑
容, 내명부 종3품>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낳았는
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
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양주 땅 장흥(현 양주시 장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5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우측 문인석

▲  눈을 가늘게 뜬 좌측 문인석(文人石)


조선의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호강을 받게 된다. 하성군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는 행운이었으나 조선과 이 땅에게는 불행이었음)
허나 선조는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여 자신
의 권위를 높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높이는데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 하여 1577년 할머니에게 창빈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
을 현충원 일대로 확장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 동작
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 또한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잠
시나마 덕릉(德陵)으로 높이는데 성공했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그릇도 작고 꽤나 쪼잔했던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
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뿐이다.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 왕명에 따라 묘역 북쪽에 신도비를 세웠
는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
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출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왕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이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
품을 알만하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
府尉)가 전부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창빈안씨 묘표(墓表)

▲  구름과 용이 뒤엉킨 고품격 조각의 묘표 이수(螭首)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저기에 적당히 색만 입히면 3D영화처럼 실감이 클 것이다.


못난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묘역은 조촐하기 그지 없다. 전형적인 후
궁의 무덤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는 수려
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우로 조그만
망주석(望柱石) 1쌍, 그 앞쪽에는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 1쌍이 무덤을 지킨다. 봉분 뒤쪽에
는 기와를 지닌 곡장이 둘러져 있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소나무숲에는 창빈안씨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는 3m
이며,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춘 다른 신도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에 하얀 피부의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날씬한 몸매의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소소하게
경쾌감을 선사한다.

* 창빈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
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
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석가여래삼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
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현충
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
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 지역과 남산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다소 급하다. 그 길을 오르
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베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연못에는 여러 물고기들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그곳으
로 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
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조약사여래불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를 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무
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
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현재 능인보전 주변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
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
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
속에서 나온 옷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심초록 주 겹저고리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여
문화재위원의 점검과 자문을 구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존처리와 보관을 의뢰했다.
1630~1650년 사이에 지어진 옷으로 여겨지는데, 색상이 보존된 몇 안되는 옷으로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펼친 상태로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을 했으며,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을 맡기고 그 모조품을 극락전에 두었다. 가짜란 말에 설레던 마음이 90%는 날라가 버렸
으나 그래도 이번에 새로 인연을 지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
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지장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10여 점의
지방문화재 중 가장 최근(2018년 8월)에 지정된 것으로 2006년에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과 저
고리 등이 나왔다.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
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해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수풀 속에 묻힌 지장사 석조 안내문 (1972년 6월 작)

이 석조 안내문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 보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지장사(화장사) 스스로가 실토
하고 있다. 그러니 도선대사 창건설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선대사
창건설까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기 연도(年度)를 쓰기가 참으로 싫었을까? 20세
기 한복판에 640여 년 전이라니, 게다가 강희 2년이니 동치(同治) 원년이니 하는 구닥다리 표
현까지 쓰고 있어 다시 한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寮舍)와 선방
(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앞에는 공양간으로 쓰이는 햐얀 피부의 건물이 있는데, 현충
일과 석가탄신일 공양은 여기서 섭취하면 된다. 

이번 나들이에서 현왕도(現王圖)와 괘불을 놓쳤는데, 현왕도는 공양간 건물에 종종 출현하니
그 건물을 살펴보면 된다. 단 괘불은 친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존재라 어지간하면 마음을 비
우기 바란다. 석가탄신일 등 일부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친견하
지 못했음)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와 국립현충원을 뒤로하며 (상도출입문 방면 숲길)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서울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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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6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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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 6월 맞이 산사 나들이,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지장사) '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이 땅의 영원한 성역(聖域)이다. 그러다보니 재미
없고 딱딱하며 어려운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창시
절 소풍이나 백일장으로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곳으로 나들이를 가자
고 하면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많다. 아무래도 나들이나 산책 등으
로 가기에는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은 무겁고 조심스러운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
산(백악산),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듬직한 허파로 숲이 울창해 다
양한 동식물이 의지하고 있다. (현충원 외곽으로 숲이 짙게 둘러져 있음~) 게다가 현충
원 산책로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이며, 창빈안씨(昌嬪安氏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등의 문화유산, 호국지장사 같은 오래
된 절까지 품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풍부하다.
현충원은 분명 3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곳이지만 그곳의 매력과 속살을 제대로 알고 즐
기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그러니 너무 딱딱한 쪽으로 현충원을 대하지 말고 숨겨진 매
력까지 모두 살피기 바란다. <매년 4월에는 현충원의 백미인 수양벚꽃축제가 열림>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
에는 지명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銅雀洞 國立墓地)'라 했으나 2006년에 '국립서울현
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이른바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으로 통
하기도 한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
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
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그들의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자격 미달의 작자들도 여럿 섞여있어서 그럴까? 아직까진 그 효과
가 시원치 못하다. <친일파들의 무덤은 꼭 뽑아버려야 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에 걸린 6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14시, 동작역(4,9호선)에서 일행
들을 만나 현충원으로 향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장사 등 현
충원에 깃든 오래된 명소를 둘러보고 서달산 동작대(銅雀臺)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현
충원 뒤쪽에 자리한 호국지장사(화장사)만 다루도록 하겠으며,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호국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에 묻힌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
임을 깨닫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에 도
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서로 시기가 안맞음~)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
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자리인지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고 있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
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
기도 하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藏庵)이
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다. 이곳의 조선 초기 이전의 역사를 속시원히 밝혀줄
역사 기록과 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쓸데없이 말만 무성한 것이다.

절의 내력이 그나마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때 창
빈안씨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宣祖)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
릉(銅雀陵)으로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
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에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
을 개금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 칠성각을 새로 지
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
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으며 1936년에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
보살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
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에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심우당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
은 서북향) 경내 남쪽에는 약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
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좌상
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
이 1기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
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
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지만 현충원과 한강, 한강 너머 지역(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
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
가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
이다. (그의 무덤은 창빈안씨묘역 북쪽에 있음)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을 것이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8번 출구에서 현충원 정문을 거쳐 도보 20~25분
* 국립현충원(동작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350번, 360번, 362번, 462번, 640번, 752번, 5524
  번, 6411번, 9408번(광역)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호국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다. 그 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
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
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오래된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약합을 쥐어
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를 보이고 있고 그의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기분을 약간 깨게 한다. 하지만 물은 무료이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

이곳은 물을 뜨는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
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들여진 모양
이다. <현재 약수터는 남쪽으로 50m 정도 옮겨졌으며, 기존 자리에는 동그란 석조와 아기부처
상이 세워짐>

▲  신이 난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열이 난듯한 좌측 사천왕상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석상(石像)으로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들은 비파 연주에
흥이 난 표정이고,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이
난 표정 같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지장사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단촐한 모습
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
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야 되는 건물이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경내에서 3층석
탑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철불(鐵佛)은 이름 그대로 철로 다진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
려 초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
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가 그물을 치니 녹
슨 채로 버려진 불상이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를 수습하여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심성이 삐딱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또한 어부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로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
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
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불약사불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
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
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각자의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철불좌상 주변을 가득 메운 원불의 금빛 물결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
중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
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능인보전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능인보전 우측 벽에 걸린 아미타불도는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
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 식구
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
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
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는데, 현충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호국범종이라 불린다.


▲  하얀 피부의 승탑(僧塔, 부도)과 검은 피부의 비석들

능인보전과 범종각 뒷쪽에는 때깔이 고운 승탑 2기와 비석 여러 기가 숨겨져 있다. 이중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승탑은 부처의 사리가 담겨진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양시 대자동 봉
덕사(奉德寺)에 있었다. 그는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선 딱히 알
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승탑 앞에는 사리를 봉안한 기념으로 세운 봉안비(奉安碑)와 봉안공덕비(功德碑)가 있
는데 모두 봉덕사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 우측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 4기는 1938년부터 1949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크게 시주를
한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  조그만 불교미술관 호국지장사 대웅전(大雄殿)

▲  지장사 대웅전

지장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크다. 상당히 너른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
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박물관을 이룬다,
그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해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이 담겼는지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3층석탑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다. 그는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
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하는데,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
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한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가져와
보수를 했으며 지금은 대웅전 옆구리에 두었다.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거의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상륜부(相輪部)와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
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범종각 옆으로 옮겨졌으며 그 자리에는 물을 머금은 동그란 석조가 들어섰음>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목각후불탱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
분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세
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스카웃된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
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
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
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  능인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주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종무소(宗務所), 오른쪽이 심우당>

▲  대웅전 옆구리에 지어진 새 요사

대웅전과 종무소 뒤쪽에는 청심당 등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으로 쓰이는 건물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대웅전 바로 옆구리에 자리한 건물(윗 사진)은 201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곳은
원래 공터였다.
건물의 모습이 기와집이 아닌 요즘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 모습이라 다소 이색적인데,
그 옆에는 2016년에 새로 지어진 'ㄷ'자 모습의 청심당이 있다.

요사(寮舍)나 선방(禪房)은 공양간이나 교육이나 법회, 접대용으로 쓰이는 공간을 제외하면 절
의 사사로운 공간이라 거의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잘 들어가지는 않는 편인데, 예전
대웅전에 있었다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를 반드시 잡아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 집념이 활활 불
타오르면서 요사 주변을 기웃거렸다. 요사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종무소 옆에 있는 공양간을 먼저 살폈는데 마침 문이 열러 있어서 그 사이로 시선
을 넣었으나 그림 같은 건 없었다, 하여 대웅전 옆에 있는 건물로 가서 창문 안으로 시선을 쓱
넣으니 글쎄 오래된 그림 2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보니 극락9품도와 현왕도
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옮겨짐)
그들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쳤으나 주변에 아줌마 신도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는 못했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진에 담기도 그래서 창문을 살짝 열고 새가슴처럼 대충 사진에
담았다. 물론 신도와 승려에게 허가를 받고 마음 편히 사진에 담는 것이 좋겠지만 생활공간인
요사이다보니 협조를 안해줄 듯 싶었다.


▲  요사 안에 담긴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왼쪽 그림)와
현왕도(現王圖, 오른쪽 그림)


극락9품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 산선관(散線觀)
인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錦湖
若效)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의 극락구품도
와 함께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
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현왕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로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
왕이란 염라대왕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은 장면을 담았다. 화면은
둥근 구조 안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묘사에서 비교
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
로 처리해 19세기 후반 불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구품도와 현왕도를 찾아냄으로써 그들과의 부질없는 숨바꼭질은 끝이 났으며 이곳에 있는
지정문화재는 괘불도를 빼고 모두 인연을 짓게 되었다. 괘불이야 평상시에는 친견이 불가능한
아주 비싼 존재이니 석가탄신일이 아닌 이상은 아예 체념한 상태이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극락전, 삼성각, 지장전)

▲  지장보살입상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화

▲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불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
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끈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
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
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석가불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
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
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바
로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때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
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
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랑살랑거
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를 보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
던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
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
좌(예전에는 2,500좌를 칭했음)에 달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꽤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
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
성각, 대웅전에 서린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
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
통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만
들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자리한 늘씬한 5층석탑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자리해 있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
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거의 걸려들지를 않
아서 꽤 애를 태우게 한다. 탑의 형식을 봤을 때는 왜정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지장보살상(지장전)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冥府, 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깃든 호국신들이 하
나의 낙오자도 없이<단 친일파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없는 작자들은 싹 무관지옥이나 떨어져
라~!>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간만에 벌인 호국지장사 나들이를 마무리 짓는다. (그 외의 장소
는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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