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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 국립 서울현충원, 동작충효길 산책 '

▲  국립현충원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거의 본능적으로 국립현충원(國立顯忠園, 국립 서울현충원)을 찾
는다. 그곳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국심이 대단한 것도 아
니다. 다만 석가탄신일에는 그날 본능에 따라 절을 찾듯이 현충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현충원
을 찾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이들을 기리며 현충일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현충원이 나라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보니 나들이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저 무덤
밖에 없는 재미없고 딱딱한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생 시절 소풍
으로 간 것이 고작인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그곳에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
'현충원에 나들이를 가자고? 거기 뭐 볼 거 있어?'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나들이로 가기에는
왠지 부담이 가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지 둘은 모
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남산(南山) 등과 더
불어 서울의 대기를 정화시키는 커다란 허파로 숲이 짙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게다가 현충원을 외곽으로 둘러싼 산책로는 어디에 던져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로
상도동과 사당동, 흑석동 후문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의 갑(甲)을 이루며, 매년 4월에는 이곳
의 명물인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조촐하게 벚꽃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창빈안씨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묘역, 호국지장사 등 문화유적과 오래된 절까지 소리소문 없이 품고 있
어 오래된 볼거리까지 넉넉히 선사한다. 현충원은 3척 동자도 다 아는 곳이지만 그곳의 숨겨
진 속살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은 것이다.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전국에 흩어진 6.25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에는
지명을 따 '동작동국립묘지(銅雀洞國立墓地)'라 불렀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
름을 갈았다. (국립현충원이라 많이 부르며,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
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지형이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
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지세라 하여 장군대좌형(將軍對
座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
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쪽인 우백호(右白
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서달산)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마땅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하건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시원치 못하다.

본글에서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 현충원내부순례길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호국지장사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겠음)


♠  국립현충원의 오랜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의 배꼽 부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묘역이 있다. 그 서쪽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현충원의 숨겨진 오랜 속살인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
이 조선왕실의 오래된 무덤이 박혀있으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
니 말이다.
허나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묘역은 이곳에 오랜 주인으로 이 일대가 대부분 그
의 묘역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1954년 이곳에 국립묘지를 만들면서 묘역은 크게 축소되기 시작
했고 1965년 이승만의 묘역을 창빈묘역 북쪽에 쓰면서 묘역의 동쪽이 떨어져나갔다. 상황이 이
러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그야말로 잉여로운 존재가 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을 바로 남쪽에
쓰면서 남쪽 부분까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런 점은 2011년 이후 묘역 북쪽에 그의 묘
역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음)
그래서 '이 무덤은 뭐지?' 호기심 삼아 찾는 이의 발걸음이 조금 늘었다.

묘역의 주인인 창빈안씨(1499~1549)는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집
안이 어려워 1507년 궁녀(宮女)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고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德望)이 높
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어
미의 후원에 힘입어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얼마 뒤 숙용<淑容, 내명
부 종3품>으로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
(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명종 4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처음에는 양주땅 장흥(현 양주시 장
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에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로 하
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호강을 하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권과는 거리
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쪼잔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높
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공을 들인다. 1577년에는 할
머니에게 창빈(昌嬪)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대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서 동작릉(銅雀陵)이라 했
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은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덕릉(德陵)으로 높였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선조는 그릇이 작고 생각이 좁았던 군주로 마땅한 업적은 없다. 임진왜란도 잘 대처했으면 일찍
종료를 시키거나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안일한 생각과 간신배들과 어우러진 무능한 대처로 국
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한참 손녀뻘되는 왕비<인
목대비(仁穆大妃)>와 재미를 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으로 창빈의 아름다운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숙종 9년) 왕명에 따라 묘역 남쪽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
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
府知事)를 지낸 왕족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중종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
다. 심지어 어린 애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은 오늘날 고위 공직자 등의 권력층과 돈에 치여 사는 상
류층들이 배워야 될 인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
尉)가 전부이다. 그의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우측 문인석(文人石)

▲  좌측 문인석


▲  무덤의 주인이 쓰인 묘표(墓表)
묘표의 이수에는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어 속인들의 눈길을 끈다.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의 묘역은 그녀의 청렴함처럼 조촐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후궁의 무덤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
는 현란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조그만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
우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서 있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 1
쌍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홀을 들며 무덤을 지킨다.

  ◀▲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사진 3장>
이 비석은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3m이
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다른 신도
비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곧
게 솟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
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
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있다.


♠  국립현충원에 꽁꽁 숨겨진 오래된 속살, 부안군 이석수 묘역
(扶安君 李碩壽 墓域)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9호

▲  정면에서 본 이석수 묘역
(뒷쪽에 자리한 무덤이 이석수의 손자인 이선룡 내외의 무덤)


▲  뒷쪽에서 본 이석수 묘역

국립현충원 서쪽에는 6.25시절에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경찰들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경찰충혼
탑이 있다. 충혼탑 바로 북쪽(현충원 정문 방면)에는 3거리가 있는데, 3거리에서 서쪽 산자락을
살펴보면 숲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산길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산길을 20초 정도 오르면
창빈안씨묘역과 더불어 현충원의 숨겨진 속살의 하나로 지금까지 꽁꽁 숨어지내던 숨바꼭질의
달인 부안군 이석수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석수 묘역을 알게된 것은 2010년이다. 우연히 나의 머리에 입력된 그 묘역은 현충원 안
에 있다고 하는데, 현충원 안내도와 홈페이지에는 그 묘역의 위치를 알리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
다. 게다가 다녀간 이들도 전혀 없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 위치에 대한 정보가 걸려들지 않았
다. 그래서 열심히 조사를 벌이다가 그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다.
현충원은 참 많이도 갔지만 창빈안씨묘역은 2007년에나 발걸음을 했고, 호국지장사도 2006년에
나 처음 갔다. 이제 현충원의 숨겨진 오래된 속살은 다봤구나 싶었는데, 이석수 묘역까지 교묘
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묘역을 찾아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현충원의 터줏대감인 창빈안씨묘역도 처음에는 안내도에 나와있지 않다가 이제는 아주 작게나마
표시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 예전보다 찾기는 쉬워졌다. 허나
이석수 묘역은 아직까지 그 흔한 안내판도 없고 현충원 안내도에서 나와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
주 극소수만 찾는 현충원의 꼭꼭 숨겨진 속살인 것이다.
내가 갔을 당시에도 충혼탑 주변과 3거리에는 사람들이 좀 있었으나 산길과 묘역에는 인적은 커
녕 움직이는 어떤 것도 없었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가니 3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엥 저
기에 뭐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  홀을 쥐어들며 묵묵히 묘역을 수호하는 문인석(文人石)들

서달산 북쪽 자락에 자리한 이석수 묘역은 조선 성종(成宗)의 손자인 부안군 이석수(1524~1598)
와 그의 2번째 부인인 평강 채씨(平康 蔡氏)의 무덤이다. 호석(護石)도 없이 봉분만 두툼하게
부풀어져있고, 그 앞에 묘표와 상석(床石), 혼유석을 두었으며, 문인석 1쌍을 배열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은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작은 규모이다.

이석수는 성종과 명빈김씨(明嬪金氏)의 소생인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아들로 처음에 창
선대부 부안정(彰善大夫 扶安正)에 봉해지고, 나중에 명선대부 도정(明善大夫 都正)을 제수받았
으며, 임진왜란 때는 손자가 되는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선무종훈(宣武從勳)이 되었다. (선조의
할아버지인 중종과 이석수는 이복형제임)
1598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자 선조는 정의대부 부안군(正義大夫 扶安君)이란 시호를 내리고
창빈안씨묘역 서쪽 산자락을 주어 무덤을 쓰게 했는데, 선조가 그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
院君)묘역과 더불어 성역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있던 창빈묘역의 서쪽 땅을 떼어 무덤을 쓰게 할
정도면 그의 신임이 제법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이석수 무덤 뒷쪽에는 그의 손자인 순안군 이선룡(順安君 李善龍) 내외의 무덤이 야트막하게 솟
아있는데, 왼쪽 봉분에는 그와 전처(前妻)인 남원윤씨가, 오른쪽에는 나중에 받아들인 여흥민씨
가 묻혀있다. 이들 무덤은 봉분만 조촐하게 솟아있으며, 일체의 석물은 하나도 없어 일반 백성
들의 무덤처럼 수수하게 보인다.


▲  부안군 묘표

부안군 묘표는 지붕돌과 비신,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을 꽂은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 같
은 것이 섬세하게 묘역의 초라함을 조금이나마 커버해준다. 상태가 양호한 비신(碑身)에는 부안
군의 5대손인 이태제(李泰齊)가 1727년(영조 3년)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부터 해서 부안군의 전
처인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맏아들의 묘역이 양주 장흥에 있다는 것이 쓰여 있으며, 뒷쪽에는
비석의 조성시기가 쓰여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살짝 들려져 선의 미를 선사한다.


▲  약간 측면에서 바라본 이석수 묘역

▲  이석수 묘역 남쪽에 자리한 경찰충혼탑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부안군 이석수묘역)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5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동절기 토요일과 휴일에 한해 사진/유품전시관은 휴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과 이어지는 정문과 동문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
  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부안군 이석수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1-2


♠  국립현충원 외곽 ~ 현충원내부순례길, 동작충효길(현충원길)

▲  호국지장사와 상도동 후문을 이어주는 현충원내부순례길

호국지장사에서 상도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은 현충원의 남쪽 산책로인 현
충원 내부순례길로 상도동 후문에서 지장사를 거쳐 사당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길을
둘러싼 숲이 매우 삼삼하여 도심 속의 공간이라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해주며, 나무들이 베푼 산
내음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길 양쪽에는 서울의 주요 허파인 현충원의 숲을 지키고자 녹색 철
책이 빙 둘러져 있어 숲으로의 접근을 막는다.

이 숲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어느 정도 오르면 길은 평탄해지고 이윽고 현충원과 속세(俗世
)의 경계를 가르는 높다란 녹색 철책이 나타나 이 세상의 끝에 온 기분과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  녹음에 묻힌 현충원내부순례길

▲  현충원 철책을 만나기 직전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상도동 후문(상도 출입문)

지장사에서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속세로 이어지는 상도동 후문이 나온다. 후문이라고
하지만 개인집 대문이나 휴전선, 통제구역 철책 사이에 난 조그만 철문이며, 문 안쪽에 초소가
있어 혹시 방향을 잃어 들어올지도 모르는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상도동 후문에서 동작구의 둘레길인 동작충효길과 만나게 된다. 동작충효길은 동작구(銅雀區)의
야심작으로 2010년부터 2년 동안 갈고 닦은 길이다. 구내(區內)에 국립현충원이 있는 것을 착안
해 이름도 그럴싸한 동작충효길이라 명명된 이 길은 총 6코스로 산과 녹지대, 한강변을 따라 펼
쳐져 있으며,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부족해 동네 명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나 조금씩 존
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조만간 서울 굴지의 도보길로 격하게 추앙받을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도보길이기 때문이다.


▲  동작충효길 안내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참조)

현충원 상도동 후문에서는 동작충효길 1코스인 고구동산길(노들역 배수지공원~상도동 후문)과 2
코스인 현충원길(상도동 후문~동작역), 6코스인 동작마루길(상도동 후문~국사봉,빙수골마을공원
), 7코스인 까치산길(상도동 후문~사당역)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여기서 4개의 충효길이 시작되
고 끝을 맺는 충효길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동작충효길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터라 생각치도 못한 존재 앞에 약간 멍을 때렸다. 원래
는 숭실대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동작구의 새로운 꿀단지, 충효길
에 등장으로 코스를 수정해야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그냥 지나치면 정말 섭하다.
여기서 노량진으로 갈까? 아니면 사당역? 아니면 동작역? 3개의 갈림길을 두고 궁리하다가 현충
원 경계를 따라 이어진 현충원길에 호감이 더 가서 그 길을 택했다.
현충원길은 현충원의 녹색 철책을 따라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길로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
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성스러운 현충원이요. 내가 걷고 있는 바깥은 속세로 현충
원을 많이 들락거렸지만 경계선과 주변 산책로는 처음 간다. 정말 현충원은 뜨면 뜰수록 계속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이나 물건이 마구 나오는 마술 상자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  현충원 철책과 나란히 이어진 현충원길 - 상도동 후문 북쪽

▲  현충원길 학수약수터 부근

▲  현충원길 사당동 후문 북쪽 오르막길

현충원길은 현충원 남쪽과 동쪽 산줄기에 닦은 산길로 이미 두툼하게 솟은 곳이라 길의 북쪽 종
점인 동작역이나 이수폭포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솟거나 내려앉는 구간은 없다. 다만 이 길이 은
근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사당2동이나 사당3동, 정금마을 등에서 오를 때는 길이 좀 각박하다.

길 중간에는 사당3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남묘(南廟), 사당동 후문, 정금마을과 갯마을, 이수폭
포 등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10개 정도 된다. 이중 남묘는 동묘(東廟)와 더불어 1599년 명나라
에서 금 4,000냥을 보내 지으라고 했던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원래는 서울역 동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에 사당3동 산동네로 떨려났고 지금은 거의 개인 절로 쓰
이고 있는데, 현충원길에서 남묘의 두꺼운 지붕들이 보인다. 그곳도 잠시 들릴까 하다가 귀찮아
서 그냥 지나쳤다. (내부 관람이 어려운 곳임)


▲  정금마을, 동작초교 갈림길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정금마을 갈림길 부근)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이렇게 생긴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을 추모하
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
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은 어렵게 영
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데, 굳이 영
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면 안되는거니
?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숭상은 실로 역겹기 그지 없다.


▲  현충원길의 거의 북쪽 끝인 이수갈림길에서 이수폭포로 가는 소나무길

▲  이수폭포 위에 세워진 단촐한 모습의 동작정(銅雀亭)

현충원길의 북쪽 마지막 갈림길이 이수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작역과 국립현
충원 동문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이수폭포와 동작대로로 연결된다. 나는 여기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와 보다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이수폭포로 방향을 잡았다.

이수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속세로 나가려는 나의 마음을 마지막으
로 사로잡는다. 길의 경사는 꽤 각박하여 오르기가 힘들며, 내려갈 때는 미끄러질 위험이 크게
도사린다. 게다가 길 왼쪽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거의 8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동작대로
와 지하철 4호선 터널이 보일락말락한다.
그 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니 동작정이라 불리는 작고 단아한 정자가 나타난다. 이제 다 내려온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동작정 안에는 어느 속인이 벌러덩 누워 책을 보고 있
었는데, 무척 그늘진 곳이라 피서지로는 딱 그만이다. 정자 앞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조그만 개
울이 있는데, 정자 서남쪽에서 발원해 이수폭포로 떨어진다. 이 물은 자연수가 아닌 수돗물이다.

▲  동작정 앞에 놓인 나무다리

▲  이수폭포 윗쪽


▲  여름의 제국을 긴장시키는 이수폭포의 위엄

동작정에서 1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동작대로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수폭포가 여름의 제국을 무척 똥줄타게 만든다. 이 폭포는 자연산이 아닌 인공폭포로 동작충효
길을 닦으면서 조성한 것인데, 폭포는 2개로 이루어져 서로 아름다움과 위엄을 뽐낸다. 성난 물
줄기가 쏟아져 하얀 비단이 아래로 드리운 듯 하며, 우렁찬 소리가 바위와 주변을 뒤흔들어 현
충원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과 여름의 제국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다.

폭포 주변 암벽에는 소나무와 여러 수풀을 심어 폭포의 운치를 돕고 있으며, 폭포 앞에는 조촐
하게 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 앉아 폭포를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정말 삼척(三陟) 미인폭포 전
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며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현충원과 동작충효길(현충원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수폭포(동작정), 현충원길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3번 출구를 나오면 현충원길이 나오며, 동작대로를 따라 6분 정도 가
  면 이수폭포가 나온다. 여기서 동작정을 거쳐 각박한 길을 오르면 현충원길과 만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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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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