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이성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2. 2016.05.15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 도봉산 봄나들이 (천축사, 마당바위, 포대능선) '

▲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막바지 전성기를 누리던 5월 첫 무렵에 이웃 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우
리 동네 뒷산이자 서울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40m)을 찾았다.
도봉산은 집에서도 잘 보이는 꽤나 가까운 존재임에도 북한산<北漢山, 삼각산(三角山)>에
오랫동안 마음이 기울면서 많이도 소홀했던 곳이다. 하여 도봉산에 안긴 천축사와 미답지
여러 곳을 지울 겸, 도봉산의 섭섭한 마음도 풀어줄 겸해서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고 불
과 네 정거장 거리인 도봉산 종점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후배와 파도처럼
몰려드는 등산객 인파 속으로 들어가 푸르름이 가득한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천축사로 도봉산 종점에서 1시간 올라가야 된다. 광륜사
와 지금은 황량한 터로 변해버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지나면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
데, 여기서 직진하여 20분 정도 가면 도봉산장(도봉산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산장을 끼고
북쪽 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만월암이고, 서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는 가파른 길로 15분 정
도 가면 천축사이다.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과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나
올 것 같지 않던 천축사가 금세 돌기둥 정문을 꺼내 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  조촐한 천축사 정문
절이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조촐하게 정문을 만들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천축사 입문

▲  불단을 가득 메운 불상<청동보살군상(靑銅菩薩群像)>의 대파노라마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상들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으로
이루어진 불단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일종의
원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천축사에 새로운 명물로 그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이는데, 100기가 넘는 불상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니 이건 관객들 앞에 서 있는 연극배우처럼 무안이 들 정도이다. 하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옆으로 피했다.


▲  슬슬 모습을 비춘 천축사 경내 (대웅전)

청동보살입상에서 1굽이를 돌면 서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내 뒷
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
광(後光)이 되어준다.
굽이친 곳에서 경내까지는 약 100m 거리로 산길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
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石槽)
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옥계수(玉溪水)로 가득한데 맑고 깨끗한 약수로 속
세에 이름이 나있다. 여기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물을 담아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조그만 돌통에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늘 가득하다.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부도(浮屠)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부도가 완전한 모습이 아닌 옥개석(屋蓋石)과 중대석(中臺
石), 하대석(下臺石) 등 일부가 수습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연꽃잎을 비
롯하여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모르겠으나 조선시대 부도로 보이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축사의 무관심 앞에 형편없이 깨지고 씻겨내려간 고된 모습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
고 있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의 내력
도봉산 만장봉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축사는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를 하다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해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고
맑은 샘물이 나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이름 지으니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허나 당시 도봉산은 좁아터진 신라의 서북쪽 변방 지역으로 당나라와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한
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다.
왕경(王京, 경주)에서도 멀고 전쟁으로 시끄러운 변경에 원효(元曉)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1인
자인 의상이 굳이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무왕의 허가를 받아
그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왕경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불교 발전에 힘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
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 조선 태
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뿔이 나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에
게 던져버리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
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
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케 했는데, 고려 후
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
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王
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적당한
자국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절이 망한 듯 싶으며,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
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으며, 1862년
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
사했다.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
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신중탱, 지장
탱을 조성했다. 허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
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한
때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無門關)을 이 시기에 만들었다. 1959년에
는 주지 용태가 불사를 벌이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과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예전 천축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에 몇 안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참선 수행공간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
도가 아주 최상급이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3호),
목조석가3존불,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 마애사리탑(서울지방문화재자료 65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고, 오래된 부도와 천축사 편액 등이 전한다. 화류목조용상이라 불리는
목조불단은 문정왕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건물은 모
두 새로 지은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둥지를 틀었으며, 이미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사세 확장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골의 산사치고는 그런데로
넓은 편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은 숲이 무성하며, 속세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중 사찰이라 제아
무리 번뇌라 해도 감히 추격하지 못한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깝고, 1시간 정도의 등산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잠시 속세에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
이다. 산바람도 솔솔 부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시원한 샘물이 1년 내내 흘러나와 한모금 마시
면 정말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것 같다.
또한 산신각이나 대웅전 앞에서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 등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
로 괜찮다. 

※ 도봉산 천축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시간 30분 (도봉산역 1번 출구 → 도봉산 141번
  종점 → 광륜사 → 도봉서원 → 도봉산장 → 천축사)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정도 줄일 수 있다.
* 천축사 정기 법회가 있는 날에는 도봉산 주차장에서 도봉서원까지 셔틀차량이 운행된다. 여름
  에는 6시 30분부터 10시까지(겨울에는 7시부터) 운행되며, 도봉서원부터 걸어가야 된다. 깊은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량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 누구든 점심공양이 가능하다. 대웅전 남쪽에 있는 공양간에서 공양에 임하면 된다. (겨울에는
  안주는 경우도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천축사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  연등의 붉은 물결 앞에 윗도리가 사라진 독성각(獨聖閣)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산한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천
축사는 대웅전 구역과 북쪽 무문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웅전 구역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 원통전, 석굴이 있다.

대웅전 남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으로 윗도리가 보이질 않는다. 마
치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처럼 말이다. 윗도리를 보려면 산신각으로 오르
는 계단에서 봐야 된다.
이 건물은 달랑 1칸짜리의 조촐한 팔작지붕 건물로 현공(玄公)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2002년
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색채가 무지 고운 독성탱(獨聖幀)과 석고독성상
독성탱은 주지 선응이 화주가 되어 금어(金魚) 권성준이 제작했다.

▲  연등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 옆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산신각을 두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건물
로 독성각과 마찬가지로 달랑 1칸짜리이다. 단 지붕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2003년에 현
공이 보수했다.
산신각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 산신탱
호랑이가 2마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두 눈에는 광채가 초롱초롱 빛나
어두운 밤에 본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다. 호랑이 사이로 지긋한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가 앉아있는데, 앉아 있는 폼이 다른 산신탱과는
다르다. 그외에 동자 3명을 배치했으며, 소나무와 산도 묘사되어 있어
산신탱에 있어야 될 요소들은 모두 갖추었다.

▲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위쪽에 자리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그나
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어여쁜 누님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화로는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탱과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했는데,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과 금어 조정우가 만든 것이며,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제작한 것이다.


▲  원통전 불단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후불탱화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천축사 대웅전 주변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장대한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 밑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시
원한 석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이 여기서 용솟
음치고 있는데, 불공 때 공양하는 용도로만(천축사 승려들도 이 물을 마실 듯)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석굴 내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여 일종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조그
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었다. 속설(俗說)에는 태
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 전설을 통해 천축사를 거쳐갔던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오래된 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약사불을 안치하고 내부를 손질한 건 근래이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입술이 유난히 붉은 약사여래좌상이 약합(藥盒)을 쥐어들고 속세를 걱정한다.
약사여래의 머리 뒤쪽에는 3줄의 두광(頭光)을 그어 그를 빛나게 수식하며
그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 오른쪽에 붉은 바가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옥천이다.

▲  약사여래좌상 좌우 암벽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조그만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저 두 보살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대웅전 북쪽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과 원초적 생리
를 해결하는 해우소가 있다. 그리고 굳게 닫힌 기와문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는데, 그 문 너머
로 절집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신식 건물이 눈을 심히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건물이 천
축사의 상징물인 무문관이다.

무문관은 수행을 위한 건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지었다. 건물의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
음을 얻는 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苦行)을 본받아 4년 또는 6
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매우 적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
우 4명만 통과한 것이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가뭄에 콩나듯 하여 시민선원
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도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그냥 놀려두기도 그래서 속세에 개방해 시민선방
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화
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 목조불단)과 천축사 편액이 있다.


▲  대웅전(大雄殿) 목조석가3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
어졌다고 하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 요사채로 쓰이며,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
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
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3존불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근래 석가불 뱃속에서는 이른바 복장(
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들을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으며, 1730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
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3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 불상 양
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불상이나 불화 조
성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발원문 하나에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
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대웅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

▲  2004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  천축사 비로자나3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목조석가3존불 좌측에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불화는 비로자나삼신불도이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
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그림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오른쪽에는 석가불이 자리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
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
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
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
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
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
으며, 각기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지만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
(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하였다.


▲  꽃창살과 용머리 장식으로 무척 현란한
천축사 대웅전 앞부분

경선당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
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
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玉體恒
安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尙宮
)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
성황후)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성수만세 하기
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귀뜀해 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당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
천축사가 속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축사와 작별을 고하다 ~~ (대웅전)

금지된 곳인 무문관을 제외한 경내 곳곳을 40분 정도 둘러본 것 같다. 2개의 10년 전인 초등학
교 6학년 시절,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래봐야 지금까지 2번 가봤음) 그때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보리수(菩提樹)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
월의 고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천축사를 뒤로 하고 포대능선으로 가고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도봉산의
주능선과 자운봉, 만장봉도 같이 보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갔지만 그 길은 파란만장했다.


 

♠  도봉산의 지붕 거닐기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천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하얀 피부를 드러낸다. 그 바위가 마당바위
로 바위에 올라서면 도봉산 산줄기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이 두 눈에 훤히 달려와 조망이 가히
천하 일품이다.
이곳은 길이 3갈래로 갈리는 요충지로 만장봉과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길, 관음암(觀音庵)과 오
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눠진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대능선이
므로 제일 힘든 만장봉 길을 택했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봉산 남쪽 줄기와 우이암(관음바위)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는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북부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 이런 소중한 허파가 있다는 것은 대자연이 내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고두고 잘 아껴야 하건만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마당바위에서 각박한 산길을 20분 정도 개미처럼 오르면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주변에 도
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니 여기서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장봉의 위엄

▲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740m)은 도봉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그 역시 금지된 봉우리로 묶여있는데, 역시나 통행금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은 오르지 않고 (남북통일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되니까) 자운봉고개에
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양이다.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의 위엄으로 Y처럼 생겼다고 하여 속칭 와이계곡이라 불리며 왼쪽 길은 와이계곡 우회길이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와이계곡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에 박힌 철
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 의지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완전 손
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다락능선 입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 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이다.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북부 지역
(우리 동네 도봉동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와 포대(砲臺) 등 추억이 되버린 군사 시설이 여럿 남아있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바로 능선에 있던 포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와이계곡을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
고 상처받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포대능선 716m 봉우리(다락능선 입구)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산중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다.
중간에 자운봉 동쪽 밑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만월암(滿月庵)에 들려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석
불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을 친견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도봉산 종점으
로 내려왔다. (만월암과 그 이후에 둘러본 곳은 생략) 그런 다음 순두부와 파전, 동동주로 간단
히 저녁 뒷풀이를 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봉산이 내 제자리와 매우 가까우니 그것 하나는 너무 좋다. 금방 돌아와서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5월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내가 도봉산 곁에 계속 머무는 동안
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닿을 것이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