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승방'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2.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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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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