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꽃'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0.16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2. 2014.08.21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꽃무릇의 성지, 영광 불갑사 '

▲  눈과 코, 입이 달린 불갑사 굴뚝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불갑산 산길


 

상사화(相思花)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한다. <열반에 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피안화
(彼岸花)라 불리기도 함> 그들은 8~9월이 절정기로 상사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
는 영광 불갑사에서는 매년 9월 한복판에 상사화 축제를 벌인다. 비록 축제는 과거완료형
이 되었고 시간 또한 이미 10월 초를 가르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사화가 남아있을 것이
란 순진한 생각에 불갑사로 콩 볶듯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영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
았다. 자리는 널널하여 편하게 이동을 했는데 거의 3시간 40분을 내달려 영광읍내에 자리
한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남 영광(靈光)은 2006년 가을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이다.
영광터미널에서 잠시 숨 좀 돌렸다가 불갑사행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달
려 불갑사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이제 비로소 꽃무릇의 성지로 추앙받는 불갑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  불갑사 입문

▲  불갑사 주차장 느티나무 - 전남 보호수 15-18-6-8호

버스가 얌전히 바퀴를 접은 불갑사 주차장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
다. 이 나무는 2004년 12월에 보호수의 지위를 받았는데, 당시 추정 나이가 6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0여 년이 더해져 660~670년 정도 된다. (어디까지나 추정 나이임)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은 높이 25m
, 둘레 5.9m의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불갑사를 찾은 사람들의 정자나
무와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한데, 문명의 이기(利器)인 차량들도 앞다
투어 그의 포근한 그늘 속에 들어가 가을 단잠을 즐긴다.

주차장을 지나면 육중하게 생긴 일주문이 마중
을 한다. 보통 문 정면에는 절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뒷쪽에 걸어두
어 문을 꺼꾸로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중심으로 잘 꾸며진 공원이 넓게 자
리해 있는데, 이 일대를 '불갑사 관광지'라 부
른다. 이곳에는 산책로와 연못, 진달래동산,
오토캠핑장, 영광산림박물관 등이 있으며, 나
는 오로지 불갑사와 상사화만 바라보고 온 터
라 모두 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불갑사 일주문(一柱門)


▲  불갑산 호랑이상의 위엄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서면 왼쪽에 위엄 돋는 모습에 불갑산 호랑이상이 있다. 지금이야 호
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돌에 새겨진 공룡 화석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오랫동
안 이 땅을 주름잡던 무서운 맹수였다. 호환(虎患)을 제일 두려워할 정도로 옛 사람들에게 공
포의 대상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불갑산에도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어느 농부가 호랑이 1마리를 잡았다.
그때는 호랑이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냥꾼과 농사꾼이 많았던 시절로 잡은 호랑이를 어찌 처
리할까 궁리하던 중, 왜인(倭人) '하라구찌'가 찾아와 자기에게 넘기라며 200원을 주었다. 당
시 200원은 무려 논 50마지기(1만 평) 가격이었다.
호랑이를 매입한 하라구찌는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의 시마쓰 제작소에서 표본 박제를 했으며, 그것을 들고 목포로 건너와 살다가 나중에 목포 유달초교에 기증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
을 했는지, 1945년 패망으로 강제 귀국을 하게 되자 일종의 떨이로 넘긴 것인지는 모르겠음)
그 박제는 아직도 유달초교에 간직되어 있으며, 북한과 만주 등의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 표본으로 남은 것으로 호랑이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귀한 자료이다.
이후 영광군에서 '포획 100년 만에 귀향'이라는 주제로 유달초교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의 도움으로 모형을 제작해 2009년 4월 이곳에 갖다두어 불갑산의 새로운 명물로 삼았
다.

호랑이상 뒷쪽에는 호랑이굴이 재현되어 있는데, 가짜 돌로 만든 모형굴이라 허접하기가 그지
없으며, 호랑이상은 그럴싸하게 지어져 있어 어두울 때 보면 자칫 염통이 쫄깃해질 수 있다.


▲  불갑산 호랑이상과 호랑이굴(뒷쪽)

▲  산뜻하게 닦여진 불갑사 가는 길 (불갑사 관광지)

▲  푸른 잎만 남은 진달래동산

▲  불갑사 해탈교

불갑사 관광지와 불갑사의 경계를 이루는 해탈교를 건너면 꿈에 그리던 상사화 군락지가 나온
다. 상사화의 마지막 향연을 기대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것은 검게 떡이 되버린 시들시들
해진 상사화였다. 이것이 정녕 8~9월 동안 천하를 홀렸던 그 상사화가 맞단 말인가?


▲  잔치가 끝나버린 상사화 군락지

나의 계산은 틀렸다. 적어도 9월 말까지는 왔어야 상사화의 끝물이라도 볼 수 있는데 너무 늦
게 왔다. 여기서 불갑사 경내까지 죄다 뒤적거려도 멀쩡한 상사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월이 그들의 젊음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젊음이 사라진 상사화의 말로는 어떻게 저리 비참할 수가 있지? 되물을 정
도였다. 솔직히 검게 타듯 시들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꽃에 매달린 푸른 잎과 나
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상사화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보다도 못한 것 같다.
단지 그 2달을 위해 그들은 용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든 전성기가 지나면 그 이
후의 모습은 참 우울하기 그지 없지.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내년을 기약하며 잔뜩 웅크린 상사화(꽃무릇) 군락지
향연이 끝난 상사화의 쓸쓸한 말로, 허나 그것이 절대 끝은 아니다. 꽃은 비록 졌지만
그 꽃을 피우는 숙주(뿌리, 줄기)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  숲속에 묻힌 상사화 군락지

▲  상사화 군락지 산책로 - 상사화 전성기 때 한번 거닐어보고 싶다.

상사화는 서로를 애타게 생각하는 꽃이란 뜻이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사화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다고 한다. 또한 그럴싸한 전설 한 토막이 덧붙여져 전해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불갑산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어흥거리던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의 부모는 금슬 좋기로 이름난 부부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절에 들어와 100일 동안 탑돌이 불공을 올렸다.
그녀를 본 큰스님 수발승은 마음에 불이 나면서 그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승려
의 신분이고 수줍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보면서 끙끙 마음을
앓았다. 여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100일 불공을 마치자 미련 없이 속세로 돌아갔고, 승려는
더 이상 그를 못보게 되자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 결국 상사병(相思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승려의 사리가 안긴 부도 주변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났는데, 마치 그 승
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꽃 이름을 상사화라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로 그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슬프고도 혹독한 전설을 붙인 모양이다.


▲  불갑사 가는길 (상사화 군락지 옆)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면 석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승탑군(부도군)이 마중을 한다. 비석 4기
와 조그만 승탑 6기가 조촐히 승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승탑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20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4년에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 승탑은 회명당 처묵(晦明堂 處墨), 청봉당(晴峰堂), 서산(西山), 설두(雪竇), 설제(雪醍
), 각진국사의 승탑으로 이중 각진국사 자운탑은 1355년에 조성된 것이라 전한다. 비석 중에
는 '정3품 통정대부 김상기(金商基) 공덕송비(功德頌碑)'가 있는데, 영광 출신으로 정3품 벼
슬까지 지낸 김상기가 1939년 대웅전과 종루를 세우는데 시주를 하여 그를 기리고자 세웠다.
승탑군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불갑사 경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갑
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불갑사 승탑(僧塔)군

불갑산(516m)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불갑사는 상사화로도 유명하지만 자칭 백제 최
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84년, 그 시절 백제는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바다를 건너 왜
열도를 비롯해 중원대륙의 산동(山東) 등 대륙의 여러 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과시하
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위엄을 듣고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이다.

마라난타는 바다를 건너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했다고 전하는데, 그곳과 가까운 불갑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백제 최초의 절이자, 첫째 가는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관련 기록도 없고 유물도 없는 실정임)
마라난타 창건설이 신빙성이 떨어지자 따로 내세운 것이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창건설이다. 이때 행은(幸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무왕(武王) 시절인 640년에 창건되었다
는 설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불갑산 남쪽 너머에 자리한 함평 용천사는 600년에 행은이 창
건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증거가 부실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창건 이후, 8세기 중반에 행사존자(行思尊者)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
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아마도 창건 시기를 부풀리면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신라 후기나 행은이 활동했다고 전하는 7세기(무왕 시절)가 그나마 적당한 창건 시기가 아닐
까 여겨지며, 백제 후기에 살짝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이를 막으려는 신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중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가 머물면서 절을 크게 불리니 전각이 100여 칸,
요사(寮舍) 400칸, 부속 암자가 31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승려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
다. 또한 누각의 기둥 높이는 90척, 사전(寺田)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했다. <각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 16국사의 하나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전일암(錢日庵)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법릉(法
稜)이 전일암을 터전으로 삼아 급한데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1634년 해릉이 중
창했으나 사세가 점점 어려워져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1802년 득성(得成)이 중창을 했고, 1869년 설두대사(雪竇大師)가 크게 중창을 벌이면서 그동
안 잃어버린 토지를 많이 회복하였다. 1879년에 중창을 했으며, 1938년 설제가 중수를 했고,
1984년에 다시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만세루, 일광당, 설선당,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팔상전, 천왕문, 백운당, 향로전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왕년에는 부속암자
가 31개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일암, 해불암(海佛庵), 불영대(佛影臺), 수도암(修道庵),
무각선원(無覺禪院) 등 5개만 남아 있다. 특히 전일암은 정유재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로 법릉이 이곳에 머물며 불갑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열도로 끌려가 고생
을 무지했던 강항(姜沆)이 종종 찾아와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불복장전적 등 국가 보물 3점과 천연기념
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사천왕상과 대웅전 삼세불회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지장
시왕도, 동종(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11호), 고적급위시답병록(전남 지방문화재자료 205호).
만세루 등 지방문화재 여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일광당과 명부전, 괘불지주, 팔상전,
각진국사자운탑비, 업경대, 대법고, 승탑군 등 수많은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수다라 성보박
물관을 경내에 지어 절의 오랜 보물을 담아두었다.

불갑사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와 더불어 상사화(꽃무릇)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절 주변에 상사화를 가득 심어 8~9월에는 상사화의 향기가 경내를 뒤덮으며, 9월에는
상사화축제가 열려 절의 존재감을 천하에 널리 드러낸다.
영광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고 영광의 주요 명승지라 답사/나들이 수요가 적지 않으며, 불갑
산이란 명산(名山)까지 끼고 있어 산꾼 수요도 대단하다. 깊은 산골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으며, 문화유산도 풍부해 고색의 진한 내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게
다가 상사화와 참식나무 등 진귀한 꽃과 나무도 절을 수식해 자연의 내음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기왕 불갑사를 찾는다면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8~9월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때도 상관없
다. 절에서 불갑산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며, 남쪽에 자리한 모악산(母岳山, 348m)을 넘
어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도 된다.

* 불갑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산로450 ☎ 061-352-8097)
* 불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갑사 경내 모형도 (수다라 성보박물관)


 

♠  불갑사의 보물 창고, 수다라(修多羅) 성보박물관

▲  불갑사 금강문(金剛門)

경내 앞에 이르니 맞배지붕 금강문이 마중을 한다. 보통 문 이름이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걸
기 마련이나 특이하게 '불갑사' 현판을 앞에 내밀고 금강문 현판을 문 안쪽에 수줍은 듯 걸어
두었다. 문 좌우에는 돌담을 둘러 경내를 가렸으며, 계단을 오르면 금강문의 주인인 금강역사
(金剛力士)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생을 검문한다.
문을 들어서 계단을 1단계 더 오르면 정면에 천왕문이 계단을 늘어뜨리고 있고, 왼쪽에는 명
경당(明鏡堂), 오른쪽에는 수다라성보박물관이 손짓을 한다. 박물관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여기서 잠시 불갑사를 잊고 보랏빛처럼 다가선 성보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  수다라 성보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비석을 잃어버린 연꽃무늬 비좌(碑座)가 누워있다.


21세기 이후 많은 고찰(古刹)들이 성보박물관이란 자체 박물관을 지어 절의 보물을 보관/전시
하고 있다. 불갑사 역시 그 유행에 흔쾌히 합류하여 'ㄱ'자 구조의 성보박물관을 하나 장만해
세상에 내놓았다.
불갑사의 오랜 보물을 머금은 보물 창고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서 내부를
둘러보면 되며 관람시간은 9시~17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무슨 박물관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사진에 담고 하느라 30분 정도 인적이 없는 박물관 내부를 신나게 누
볐다.

▲  다양한 모습을 지닌 16나한상과 인왕상(仁王像)

석가불3존좌상과 그들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인왕상. 제석(帝釋), 범
천(梵天) 등은 지금은 없어진 나한전(羅漢殿)
에 있었다.
그 나한전이 퇴락하자 그것을 부시고 팔상전으
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이렇게 성보박물
관에 안착했다.
이들은 1706년 도인 옥잠의 발원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인 색난과 그의
제자 초변, 영선 등 10명의 화승과 함께 만들
었으며, 석가불3존좌상의 얼굴이 둥글고 넓적
하여 포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  16나한을 거느린 석가불3존좌상
(석가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팔상전 영산회상도(아랫 그림)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7호

팔상전(八相殿) 후불탱화였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
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편히 뉘어져 있는데, 1777년 영광 지역에서
유명했던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金魚)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  두 눈이 인상적인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불갑사의 왕년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무려 용의 얼굴을 지닌 보
탑을 달았다. 현재는 용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머리 위에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과 4각 지붕을 두었고, 다시 그 위에 둥근 머리 장식을
두었다.
이 보탑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것으로 그 피부에 '甲申 五月','盡○手 陟敏(척민)'이란 명문
이 새겨져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만든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렇게
용머리 보탑을 용마루에 둔 것은 대웅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지붕에 보
탑 등의 장엄물을 두는 것은 주로 동남아와 중원대륙 남쪽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유물이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8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지장보살 좌우와 밑에 도명
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범천, 제석천, 사천왕을 두고 그 밑부분에 판관
(判官) 등을 배치했으며, 윗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보살 6명을 집합시켰다.
보통 지장시왕도에는 다른 보살까지 무더기로 그려진 예는 거의 없는데, 그림의 색채가 밝고
선명하여 그저 어둡고 무서울 것만 같은 저승 식구들에 대한 이미지를 화사하게 비추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필법과 안정적인 화면 구성 등을 보이고 있으며, 밑부분이 조금 헝클어진 것
외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1777년에 비현,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그들은 순천 선암사(仙巖
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화(佛畵)를 남겼다.


▲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6호

삼세불회도(삼세불탱)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삼세불(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담
은 그림으로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불갑사의 대표적인 불화로 꼽히고 있는 그림으로 1762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비단 바탕에 아주 현란하게 채색되어 꽤 밝은 색채를 보인다.
그림 윗쪽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석가여래를 비롯해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해 삼세불을 이루었으며, 3세불 좌우와 밑부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8명의 보살을 배치했다. 그리고 네 모
서리에 사천왕을 하나씩 넣었고, 3세불 윗쪽에 분신불(分身佛) 2명과 10대 제자, 천중(天衆)
2구를 넣어 그림을 고루고루 채웠다.


▲  칠성탱(七星幀)

칠성탱은 1892년에 영광읍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탱화이다. 두광과 넓직한 신광
을 두룬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림 윗쪽에 조그만 동자를, 중간에는 칠여래(七如來), 밑에
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으며, 색채가 화사하여 선명한 기운을 전해준다.


▲  검은 피부의 조그만 철불좌상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귀여운 동자승을
모델로 한 듯 덩치는 매우 작지만 고졸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

▲  오래된 법고(法鼓)
법고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1885년에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있었으며,
길이 85cm, 직경 75cm 규모로 이제 겨우 130살로 한참 북소리를 낼 나이지만
일찌감치 새 법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  귀여움이 묻어난 6명의 동자상

곱게 색이 입혀진 동자상은 조선 후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불갑사 동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하나 같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원래는 명부전 시왕상 옆에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이
들 6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에 걸친 옷과 손에 든 물건, 얼굴, 머리 스타일, 덩치, 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
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줄기 웃
음을 머금게 한다.


▲  푸른 피부의 목어(木魚)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앞서 법고와 더불어 사물의 일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은 박물관 유물로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  가마(연) 같은 모습의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하고자 만든 것으로 가로 83cm, 세로 61cm, 높이 88cm이다.
다른 불감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으며,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후기 유물)

▲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사람이 죽어서 저승(명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나쁜 짓이 모두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보
기가 좀 겁이 난다.
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아주 순한 표정을 지은 사자 암수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자
대좌 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업경과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화염무
늬를 두어 나쁜 짓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시켰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으로 간다는 식으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춘 업경대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불갑사가 내
세우는 휼륭한 보물로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불갑사를 거쳐갔던 옛 승려들의 진영(眞影)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진영(영정) 5점이 남아있다.
(누구의 진영인지는 모르겠음)

▲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불연(佛輦)

불연은 불상과 보살상, 영가의 초상화나 위패를 운반하는 가마이다. 보통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대상물을 싣고 다시 절로 가져왔으며, 4명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했
다. 불연의 모습이 제왕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와 많이 비슷해 그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소통(疏筒)과 가사함(袈裟函)

소통(왼쪽)은 법회나 여러 불교 의식 때 신도들이 소망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종이를 말아
넣어두던 통이다. 가로 23cm, 세로 16cm, 높이 88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통 밑에는
난간을 두룬 수미단(須彌壇) 모양의 대좌를 두어 소통의 품격을 드높였다.

가사함(오른쪽)은 승려의 가사(袈裟)를 보관하던 목함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별
도의 가사함을 둔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조선 후기에 제
작됨)


▲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臟典籍) - 보물 1470호

불갑사에는 사천왕상과 석가불3존상 및 16나한상, 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몸 속에서 나온
오래된 서적들, 이른바 복장 전적(典籍)이 매우 많다. 자그마치 193종 259책의 분량으로 불갑
사의 장대한 내력을 더욱 꾸며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불갑사 불복장전적'
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판본 33종 46책, 낙장본(落張本) 16종 20책 등, 총 49종 66책
으로 완주 화암사(花巖寺)에서 발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1441년)','지장보살본원경(1453년
)'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석가불3존상과 16나한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76종 84책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8년)','선종영가집(1381년)','천노금강경(1387)','묘벙연화경언해(1463년)' 등 고려 후기
와 조선 초기 판본이 많이 나왔다. 이들 역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 뱃속에서 나온 것은 68종 97책이다. 고려 후기 판본인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1464)' 등 조선 초기 서적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묘법연화경 - 1382년 작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1382년 작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 1464년 작

▲  법집별행녹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
要幷入私記) - 14세기 후반

▲ 지국천왕(持國天王) 탱화

↖  증장천왕(增長天王) 탱화

◀  다문천왕(多聞天王) 탱화


불갑사는 사천왕상을 배려하여 그들의 후불탱
까지 남겼다. 아마도 사천왕의 수호력이 길이
길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
이 아닐까 싶은데, 1904년에 조성하여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상 뒷쪽에 배치했다. 허나 지금
은 성보박물관으로 탱화를 모두 옮겼으며, 사
천왕상만 천왕문에 남아있다.


 

♠  불갑사 경내 둘러보기

▲  천왕문(天王門)

성보박물관에서 계단 하나를 오르면 천왕문이다.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키는 사천왕의 보금
자리로 이들 사천왕은 원래 고창 흥덕에 있던 연기사(烟起寺)터에서 가져온 것이다.

때는 1870년 어느 날, 불갑사에 머물던 설두대사 봉기(奉琪)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그들
은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붕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들을 소수
문해보니 이미 망해버린 고창 연기사터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배 4척을 끌고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니 영광 사람들의 환호가 대단했다고 하며 경내
에 사천왕의 집(천왕문)을 지어주자 그들의 가호 덕분인지 여러 번 화재를 모면했다고 한다.
허나 굳이 사천왕의 현몽이 아니더라도 설두는 연기사터 사천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
다. 아직 불갑사는 사천왕도 갖추지 못했고, 연기사터 사천왕이 잘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버려진 그들을 구제도 할 겸, 데리고 와 불갑사의 사천왕으로 삼
은 것이다.
또한 불갑사에서는 이들 사천왕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뱃속에 오래된 귀중한 서
적(49종 66책)을 복장 유물로 넣어두기도 했고, 1904년에는 사천왕후불탱까지 제작하여 그들
뒷쪽에 걸어두었다. 보통 복장유물은 불상이나 보살상 뱃속에 넣어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대웅전을 가리고 앉은 만세루(萬歲樓)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66호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정면을 가리며 우뚝 자리해 있다. 그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층 부분 높이를 낮게 해서 건물 옆구리로 돌아가 법당을 친견토록 했다. 이는
경내를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게끔 하려는 조선 후기 사찰의 특징이다.
만세루는 강당(講堂) 및 행사 공간으로 왕년에는 정면 7칸, 기둥 높이는 무려 90척에 이르렀
다고 한다. 90척이면 1척에 23cm로 계산해도 20.7m라는 소리인데, 그만큼 불갑사가 잘나갔다
는 뜻이다. 허나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고, 수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아담하
게 굳어졌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현판이 앞이 아닌 뒷쪽에 걸려 있다.
불갑사는 은근 뒷쪽을 좋아하는 듯~~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일광당(一光堂)
1620년에 중건된 건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설선당 - 거의 'ㅁ' 구조의 건물로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쓰임)

▲  불갑사의 목구멍, 세심정(洗心亭)

산사에는 늘 목을 축여주는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불갑사 역시 불갑산이 베푼 옥계수를 끌어
와 샘터(약수터)를 갖추었는데, 샘터 위에 기와 지붕을 얹히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세심정
'이라 이름 지었다. 샘터를 뜻하는 정(井) 대신 정(亭)을 칭한 점이 이채로운데, 네모난 석조
에는 불갑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늘 물이 가득해 가뭄에도 별 끄떡이 없다고 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갈증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 작업을 하
니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해진다. 그렇게 2~3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이
떼어졌다. 물 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불갑사의 인심도 그런데로 괜찮은 모양이다.

▲  갈증을 씻겨주는 세심정 샘터

▲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무량수전 옆구리에 자리한 5층석탑

불갑사의 유일한 석탑이지만 대웅전 앞에 두지 않고 경내 외곽인 무량수전 옆에 마치 숨바꼭
질 하듯 숨겨두었다. 그의 모습이 백제(百濟) 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석탑을
닮았는데, 옛 백제 땅의 중심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백제 멸망 이후, 정림사 탑을 닮은 석탑
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정림사 탑의 후예는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모
양이다. 하긴 백제는 정말 그리워할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식민 사관 쓰레기들과 잘못된 역
사 지식을 가진 작자들에 의해 형편없이 왜곡되고 저평가되서 그렇지, 천하 제일의 해양 대국
으로 왜열도를 비롯한 동북아를 호령했었고 700년 동안 꾸려온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후세에
넘겼던 팔방미인의 나라였다. (반면 조선과 왜정은 정말로 잊고 싶음)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등 저승(명부) 식구들의 보금자리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바로 좌측에 있었으나 1936년 승려 만암이 지금 자리로
약간 후퇴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1654년에 조성된 시왕상이 자리해
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꽤 느긋해 보인다. 그들 모두 시왕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
고 있지만 다른 옷과 얼굴, 포즈를 지니고 있어 각자 개성이 넘치며, 시왕상과 지장보살3존상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68종 97책이 쏟아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담아두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

▲  칠성각(七星閣, 왼쪽)과 팔상전(八相殿, 오른쪽)

대웅전 뒷쪽에는 조사전(祖師殿)과 칠성각, 팔상전이 쌍둥이꼴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를 지키
고 있다.
조사전은 불갑사를 거쳐간 주요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래 숙성된 진영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성각은 칠성 식구를 담은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山神) 식
구가 담긴 산신탱, 독성(獨聖)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은 1822년에
중건된 것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 1702년에 그려진 팔상도(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8개의 그림
)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팔상전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76
종 84책이 쏟아져 나와 불갑사의 고색의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주었다.


 

♠  불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830호

▲  불갑사의 중심,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18세기 이전
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기와에서 '건륭(乾隆) 29년'이란 글씨가 발견되어 1764년에 수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9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지붕 용마루에는 도깨비 얼굴의 보주를 얹혔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용마루 보탑이 바
로 이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로 건물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으며, 문짝에는 연꽃과 국화 무늬 꽃창살을 달
아놓아 꽃창살의 상징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흑백 꽃창살과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건물 내부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두었고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학과 까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건물은 비록 작지만 안과 밖이 화려하기 그지 없으며, 시
대적인 특성과 용마루에 보탑 등의 장식을 다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
성을 보여준 점이 참작되어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법당 수호용으로 걸어둔 신중탱


▲  대웅전의 낮고도 아름다운 하늘, 우물천정

▲  학과 잠자는 까치, 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대웅전 내부에는 여러 벽화가 전하고 있다. 너무 불교 일색으로 도배하기가 뭐했는지 선비들
과 절의 주요 고객인 여자 신도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수묵담채화를 벽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하다.
이들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어느 화승(畵僧)이 그림 작업을 하면서 절대로 훔쳐
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하면 오금이 저리는 법, 어느
성미 급한 승려가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승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며, 그 피
가 까치가 되어 날라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전설을 가진 절이 강진 무위사(無爲寺), 부안 내소사(來蘇寺), 무주 안국사(安國
寺) 등에 전하는데, 그림을 그린 승려가 모두 파랑새로 변해 사라진데 반해 여기서는 죽어서
까치가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 잘 그려진 그림이라 절에서 그럴싸한 전설을 덧
붙여 그림 수식용으로 삼은 것이다.


▲  출입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닫집

▲  가까이서 본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377호

대웅전 불단에는 쌍둥이처럼 생긴 목조석가여래삼불이 대좌(臺座)를 갖추며 앉아있다. 건물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불과 불단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 서로 따로 노는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과 대전 고산사(高山寺) 등이 있는데, 고려~조선
불교 건축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구조로 주목을 끈다. 허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건물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가 1869년 지금처럼 방향을 틀었다고 전하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이들 삼세불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불상인 석가불
이 단연 덩치가 크다. 좌우 협시불은 석가불의 ¾ 정도 크기로 다들 듬직하게 생긴 신체에 무
릎도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고, 얼굴은 살이
좀 붙어있어 네모난 모습이며, 작은 입에는 나름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
져 있고, 눈은 살며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귀는 중생의 민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
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에 걸친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가슴 윗쪽을
드러내고 있다. 옷주름은 다리 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
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석가불만 다른 수인을 취함)

이들은 1635년 무염(無染)을 비롯한 승일, 도우, 성수 등 10명의 화승이 만든 것으로 불상 뱃
속에서 관련 조성기가 나와 조성 시기와 만든 사람을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다. 무염은 호남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활약한 승려로 이들 3세불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그래서
무염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주어 보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만약 조성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성기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몸값과 등급이 크게 달라진다.


▲  현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의 하늘
(우물천정, 공포, 용머리 장식, 불상 그림과 연꽃무늬 등)

▲  장대한 세월 앞에 형편없이 쪼그라든
각진국사자운탑비(覺眞國師 紫雲塔碑)


대웅전 옆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제대로 털린 비석이 하나 있다. 그는 불갑사를 크
게 일으킨 각진국사의 행장(行狀)이 적힌 자운탑비로 그의 명성의 반비례로 비석 상태는 참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귀부(龜趺)의 용머리는 절반 이상 날라간 상태이고, 발가락 또한 죄다
뜯겨져 나갔으며, 행장이 적혔을 빗돌은 죄다 날라가 겨우 일부만 남았다.
불갑사가 절의 큰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탑비를 일부러 푸대접할리는 없을터, 그만큼 불
갑사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이 비석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각진국사 복구(復丘, 1270~1355)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0살에 천영(天英)에게 출가를 했다. 천영이 죽자, 도영(道英)의 제자가 되었으며, 21살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충주 정토사(淨
土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에 머물렀다. 1320년 조계사 13세 사주(社主)가 되어 선풍을 날렸
으며,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크게 중창하고, 말년에는 불갑사에 머물며 절을 크게 불렀다.
1350년과 1352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1355년 입적하자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남쪽 산자락에는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왜열
도, 중원대륙, 대만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자생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
장 북쪽 자생지(自生地)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음편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북단이 이
곳이다.

참식나무 자생지 안내문은 경내 바로 뒷쪽(남쪽)에 있지만 그들의 보금자리는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온다. 나는 시간을 이유로 거기까진 가지 않았는데, 이 나무에도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하나 전해온다. 아마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창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갑사에서 지었을
것이다.

백제 때 불갑사 승려인 정운이 머나먼 인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던 중,
인도 공주와 친해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인도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승려를 추방시켰다. 정운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공주는 너무 슬퍼하며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에 자라던 나무의 열매를 따서 일종의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승려는 그것을 가져와 불갑사
뒷쪽에 심으니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림 같은 호수 불갑사제

불갑사에서 3분 정도 오르면 불갑산 계곡물을 모아서 만든 불갑사제가 나온다. 절 바로 윗쪽
으로 불갑산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불갑산
산줄기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들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묻힌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불갑사제 호수 산책로

▲  녹음이 짙은 불갑산 산길 (불갑산 정상 방면)

호수 주변 숲에도 상사화가 넓게 자리를 닦고 있었다. 허나 이곳 역시 검게 떡이 된 상태. 정
상인 상사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상사화 구경은 완전 틀렸구나~~! 가는 날이 완전 문
닫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  불갑산 산길 (불갑사제 주변)
해불암입구 갈림길까지만 조금 올라갔다가 불갑사로 쿨하게 철수했다.

▲  불갑사 관광지에 자리한 연지(蓮池)와 정자

기분 같아서는 해불암과 불갑산 정상, 그리고 함평 용천사까지 싹 인연을 짓고 싶지만, 시간
도 넉넉치 못하고 오늘 너무 무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
로 쿨하게 넘겼다. (용천사는 나중에 인연을 지었음)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언젠가 또 인연을 짓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사화라는 아름다운 무
기도 있으니 10년 안에 꼭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나의 제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하여 영광 불갑사 나들이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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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9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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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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