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09.24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2. 2016.05.15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나들이 (우이암 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
<우이암(관음봉), 도봉산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도봉산
▲  도봉산의 위엄

우이암(관음봉)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  우이암(관음봉)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39m)
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그의 그늘에 머문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아차산, 호암산 못지 않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히 비추고 있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린 12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
과 간식 등을 사들고 무수천(無愁川)을 따라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산골, 무수골의 논두렁과 밭두렁, 울창한 숲길을 주마등처럼 지나 자현암
(慈賢庵)에 이르니 본격적인 산길이 펼쳐진다.

무수골의 최상류이자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인 원통사계곡을 오르다가 지독한 시장기를
잠재우고자 계곡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김밥과 만두, 과자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하
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으니 모든 것이 정말 꿀맛 같은데, 대자연이 우리 몰래 음식에 꿀
을 바른 모양이다. 거기에 입가심용으로 막걸리까지 몇 잔 들이키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
로 없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본능에 충실하며 계곡을 올라가면 우이
암 밑 400m 고지에 들어앉은 원통사(圓通寺)가 마중을 한다. 우이암(관음봉)을 내세우며
관음도량을 칭하는 이곳은 규모는 작지만 조망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라 서울 장안에 있는
산사 중,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다음급으로 최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원통사에서 잠시 일품 조망을 누리다가 다시 출발, 이전보다 더욱 각박해진 산길을 땀을
거하게 쏟아내며 10분 정도 오르니 비로소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도착했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우이암 정상이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서쪽 봉우리이며,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관음봉)이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이 빚은 걸출한 작품,
암벽 등반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걸작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
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그것이 지
금의 도봉산이 되었다.
하여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는데, 자운봉과 선
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巖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
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격하
게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히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그리고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
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봉우리 자체가 완전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또한 내려가는 것
도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
벽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
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
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처럼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굴(현
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서 머물던 승려가 발견하여 관음성지로 격하게 추켜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
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어 관음도량을 칭한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허나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
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
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
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지만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
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지역(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과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만경대, 영봉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도봉1,2동,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
리는 속세의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
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다는 것.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동을 당
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적
당히 거리를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막걸리 1병이 남아있어 남은 행동
식과 함께 몇 잔 들이켰는데 이렇게 산 정상부에서 곡차를 걸치니 마치 구름 위에서 마시는
기분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산바람이 땀과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두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관음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른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듬히 기대
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
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개소리
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의 눈이 정상
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이암의 원래 이름을 속히 찾아주고, 우이암능선의 이름도 관음봉능선
으로 바꿔야됨)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

▲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된다.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 불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전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
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보문능선 갈림길이다. 원래는 여기서 동쪽(문
사동계곡)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인연 지은 도봉산 지붕길이라 욕심이 무럭무럭 솟
아났다. 하여 도봉산의 깊이를 간만에 더 누릴 겸, 지붕길(주능선)을 따라 자운봉까지 가기로
했다. 이번에 내려가면 비록 집이 코앞이라고 해도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거닐기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산 주능선은 우이암능선 북쪽 보문능선갈림길에서 칼바위를 거쳐 도봉산 정상까지 이어지
는 도봉산의 진정한 지붕길이다. 서울의 최북단 지붕길이기도 하며,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양
주시(楊州市)의 경계선 역할도 겸하고 있다.
오르락내리락이 다소 있고 바위 암릉도 적지 않으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으
며, 북쪽으로 갈수록 하늘과 점점 가까워진다. 길 좌우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두 눈이 호강을
하며, 하늘의 속살도 보일 정도로 나의 위치도 높아진다.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이암(관음봉) 서쪽 봉우리에서 곡차를 마셨다. 허나
어느새 우이암과 저만큼이나 떨어졌으니 정말 저기서 곡차를 마셨나 싶은
착각 마저 든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  한층 더 멀어진 우이암 (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도봉산 주능선(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북쪽 산줄기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이 우이령이다.

▲  칼처럼 솟은 도봉산 칼바위
칼바위는 해발 700m의 바위 봉우리로 그 접근이 험해 옆구리에 우회길을 두었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도봉산 정상을 향한 불굴의 집념을 품으며 주능선을 더듬으니 어느덧 칼바위 남쪽 갈림길(640
m 고지)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오봉능선과 오봉(오봉산)으로, 직진하면 칼바위와
자운봉, 동쪽은 마당바위와 문사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직진을 해야겠지만 일행 중 1명
이 심히 안좋은 상태를 보여 직진이 어렵게 되었다.
아무래도 산보다 사람이 우선이니 아쉽지만 자운봉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쿨하게 미루고 주능
선을 버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면 도봉산 종점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냥 내려가기
에는 너무나 아쉬워 일행들의 동의를 받아 조금은 돌아가지만 마당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을 택
했다. 이 코스는 각박한 경사지에 가늘게 길이 이어져 있는데, 동쪽은 거의 벼랑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위도 여러 번 넘어야 됨)
허나 벼랑길이라 능선길처럼 일품 조망은 여전히 옆에서 따라 댕긴다. 바로 그 재미로 이 길
을 거닐면 되겠다. 하지만 그리 알려진 길은 아니라서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
가 이 길을 전세를 내며 거닌 것이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북한산(백운대, 영봉)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도봉산 남쪽 자락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관음암(觀音庵)의 자랑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인적이 거의 없는 마당바위 방면 산길을 10분 정도 가니 숲과 큰 바위에 묻힌 관음암이란 비
구니 암자가 살며시 마중을 한다. '어머나 도봉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미지의 장소로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준 관음암, 그 절은 법당인 극락보
전과 삼성각 등의 목조 건물 2동과 돌로 지은 요사 등 3~4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이다.

숲에 완전히 감싸여있고 서쪽에는 큰 바위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
는 곳으로 이렇게 없는 듯 자리해 있으니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암자이다. 이런 곳이
기도 올리기에도 딱 좋겠지. 비록 너무 궁벽한 곳이고 접근성 또한 좋지 못하지만 작지만 반
듯한 건물과 오백나한상까지 바위 밑에 주렁주렁 조성했으니 이런 첩첩한 산골에 어찌 이렇게
지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한다. 그가 기도를
하던 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미륵불(彌勒佛)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에 크게
놀란 무학이 태조에게 그 말을 전하니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
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기도처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것
으로 여겨진다.
현재 관음암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커다란 바위 밑에 만든 오백나한상이 아주 장관으로 비록 건물이 아닌 바위
밑 노천 공간이지만 오백나한전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또한 마당바위와 칼바위를 잇는
산길이 경내를 관통해서 지나기 때문에 절은 꼭 거쳐가야 된다.

▲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암 삼성각(三聖閣)

▲  관음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음암은 해발 560m 고지에 자리해 있지만 워낙 숲의 위엄이 대단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사(寮舍)에서는 보살 아줌마와 비구니의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와 '이 첩첩한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산속에 별천지처럼 숨겨진 관음암, 정말 세상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의 신세를 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관음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31 (도봉산길 92-6 ☎ 02-955-4246)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관음암을 벗어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하얀 피부를 지닌 너른 모습의 마당바위가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도봉산역과 도봉산 종점에서 도봉산 정상을 향해 오를 경
우 거의 반드시 거쳐야 되는 길목이자 관음암, 문사동계곡 방면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며 천하를 굽어보다가 동쪽 밑에 자리한 천축사로 길을 향했
다. 천축사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마애사리탑의 존재도
확인할 겸 다시 인연을 잡았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둘러보기

▲  천축사 대웅전과 만장봉(萬丈峯)

천축사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
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여래상,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
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원
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인데,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인다.

청동불/보살군상에서 1굽이를 돌면 북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
내 뒷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 되어준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아담한 석조(石槽)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란 물
을 담아두는 돌통으로 높은 산중이라 물을 아끼기 위해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시려
면 졸고 있는 수도꼭지를 반드시 움직여야 된다. (가뭄과 수질 문제로 물 섭취가 어려울 수도
있음)

▲  청동불/보살군상의 위엄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로 자욱한 승탑(부도)이 옥개석(屋蓋石) 등 일부만 남은 채 측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땅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연꽃잎을 비롯하여 사
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는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옆에는 오래된 승탑의 옥개석이 덩그러니 놓여져 동병상
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천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겨우 뚜껑(옥개석)만 남은 승탑
그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연등으로 머리를 가린 독성각(獨聖閣)
2002년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만장봉 동쪽 자락에 안긴 천축사는 도봉산 서울 구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이다. 이 절은 의
상대사(義湘大師)가 673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도를 닦다
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제자를 시켜 물이 나오는 곳에 암자를 짓게 하니 맑은 샘물이 나
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했다고 하며,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의상은 문무왕(文武王)의 허가를 받아 부석
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서라벌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화엄종(華嚴宗) 보급에 힘
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
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
태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뚜껑이 열려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
에게 던져주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라 직접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했는데, 고려 후기
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
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을 하였고,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다.
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
량을 희사했으며,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
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과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했으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했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
泰)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
로 그 시절에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이 지어졌다. 1959년에는 주
지 용태가 불사를 벌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
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의 주요 비구니 사찰이자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수행공간
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도가 아주 최상급이
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 및 복장유물,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293호
), 목조석가삼존불, 마애사리탑 등 지방문화재 4점과 늙은 승탑, 천축사 편액 등
이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이
있는데, 지금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있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닦았으며, 주어진 공
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경내 확장도 여의치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치고는 그
런데로 넓은 편이다.
일요일에는 산꾼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평소에는 대웅전 1층 앞 쉼터에서 따뜻한 차와
티백차, 물을 제공한다. (차와 티백차는 알아서 마시면 됨) 그리고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에는 아침~점심 공양밥 외에 떡과 염주 등도 제공하여 석가탄신일 인심도 넉넉하다.

* 천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도봉산길 92-2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1979년에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원통전(圓通殿)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관세음보살과 198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음탱(千手天眼觀音幀)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
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
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우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을 두었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
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
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
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매
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
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
어서 결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인지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
을 그냥 두기도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로 쓰이고,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
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
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 뱃속에서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
원문(發願文)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
~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
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
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
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
고 형식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늙은 불상이나 보살상, 불화 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
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다. (발원문 하나에 국가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
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
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
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
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慧
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
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
(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
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천축사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5호

천축사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면서 주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2016년 2월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마애사리탑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말고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도 있으나 괘불(掛
佛)은 석가탄신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
하다.

경내 주변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애사리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인근 불암산(佛巖山)
의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절 밑에 있을 듯 싶어서 절을 나와 동쪽으로 내
려가면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계속 살펴보던 중, 일주문 직전의 북쪽 바위 높은 곳에 수상
한 것이 눈에 아른거린다. 바로 마애사리탑이다. 천축사를 여러 번 찾았지만 마애사리탑은 이
번에 처음 인연을 짓는다.

견고한 바위 피부에 살짝 깃든 마애사리탑은 모두 2기이다. 아쉽게도 나는 1기만 확인을 했는
데, 바위 남쪽에 있는 사리탑은 사리를 넣었던 감실(龕室) 위에 '청신녀정월 영주봉안탑 정축
사월일(淸信女淨月 靈珠奉安塔 丁丑四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정월(淨月)의 것으로 정축년(
1817년 또는 1877년) 4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탑은 '신녀○영
영주탑 임오팔월(信女○英靈珠塔 壬午八月)'이라 쓰여 있어 임오년(1822년 또는 1882년) 8월
에 조성된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중 내가 만난 것은 남쪽 탑이다.

마애사리탑은 19~20세기에 잠시 등장하는 아주 간편한 사리탑 양식으로 부도탑을 세우기 어려
운 산사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바위에 감실을 파서 사리함을 봉안하고 주변에 관련
글씨를 새기는데, 학도암 마애사리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곳 천축사와
안양 염불사(念佛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있고,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국사봉 사자암(
상도동)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있다.


▲  최근에 지어진 천축사 일주문(一柱門)

마애사리탑을 만나기가 무섭게 천축사 일주문이 뒷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그
새 새로 장만하여 이곳에 심어두었다. 문의 위치가 경사진 산길에 자리해 있는데 문 정면에는
'도봉산 천축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하얗게 쓰인 글씨는 마치 날라갈 것
같은 기세라 명필임이 분명해 보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시간은 17시 반, 여기서부터 열심히 내려가다가 금강암(金剛庵) 부근 계곡
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신발에 오랫동안 갇힌 꼬질꼬질한 두 발을 해방시켜 계곡에 담구었다.
계곡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에 발을 넣으니 그동안의 피로감이 싹 가시는 듯
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에 깃든 냄새도 다소 가셨다.

그렇게 발을 정화시키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18시 반, 도봉산 종점에 이르렀다. 12시에 시작
된 도봉산 산행은 무수골과 원통사, 우이암(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를 거쳐 도봉산
종점까지 거의 6시간 반 동안 파란만장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정상은 가지 못해 아쉽지
만 우리에게는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때를 기약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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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 도봉산 봄나들이 (천축사, 마당바위, 포대능선) '

▲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막바지 전성기를 누리던 5월 첫 무렵에 이웃 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우
리 동네 뒷산이자 서울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40m)을 찾았다.
도봉산은 집에서도 잘 보이는 꽤나 가까운 존재임에도 북한산<北漢山, 삼각산(三角山)>에
오랫동안 마음이 기울면서 많이도 소홀했던 곳이다. 하여 도봉산에 안긴 천축사와 미답지
여러 곳을 지울 겸, 도봉산의 섭섭한 마음도 풀어줄 겸해서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고 불
과 네 정거장 거리인 도봉산 종점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후배와 파도처럼
몰려드는 등산객 인파 속으로 들어가 푸르름이 가득한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천축사로 도봉산 종점에서 1시간 올라가야 된다. 광륜사
와 지금은 황량한 터로 변해버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지나면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
데, 여기서 직진하여 20분 정도 가면 도봉산장(도봉산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산장을 끼고
북쪽 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만월암이고, 서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는 가파른 길로 15분 정
도 가면 천축사이다.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과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나
올 것 같지 않던 천축사가 금세 돌기둥 정문을 꺼내 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  조촐한 천축사 정문
절이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조촐하게 정문을 만들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천축사 입문

▲  불단을 가득 메운 불상<청동보살군상(靑銅菩薩群像)>의 대파노라마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상들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으로
이루어진 불단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일종의
원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천축사에 새로운 명물로 그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이는데, 100기가 넘는 불상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니 이건 관객들 앞에 서 있는 연극배우처럼 무안이 들 정도이다. 하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옆으로 피했다.


▲  슬슬 모습을 비춘 천축사 경내 (대웅전)

청동보살입상에서 1굽이를 돌면 서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내 뒷
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
광(後光)이 되어준다.
굽이친 곳에서 경내까지는 약 100m 거리로 산길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
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石槽)
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옥계수(玉溪水)로 가득한데 맑고 깨끗한 약수로 속
세에 이름이 나있다. 여기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물을 담아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조그만 돌통에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늘 가득하다.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부도(浮屠)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부도가 완전한 모습이 아닌 옥개석(屋蓋石)과 중대석(中臺
石), 하대석(下臺石) 등 일부가 수습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연꽃잎을 비
롯하여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모르겠으나 조선시대 부도로 보이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축사의 무관심 앞에 형편없이 깨지고 씻겨내려간 고된 모습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
고 있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의 내력
도봉산 만장봉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축사는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를 하다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해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고
맑은 샘물이 나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이름 지으니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허나 당시 도봉산은 좁아터진 신라의 서북쪽 변방 지역으로 당나라와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한
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다.
왕경(王京, 경주)에서도 멀고 전쟁으로 시끄러운 변경에 원효(元曉)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1인
자인 의상이 굳이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무왕의 허가를 받아
그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왕경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불교 발전에 힘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
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 조선 태
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뿔이 나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에
게 던져버리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
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
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케 했는데, 고려 후
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
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王
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적당한
자국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절이 망한 듯 싶으며,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
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으며, 1862년
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
사했다.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
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신중탱, 지장
탱을 조성했다. 허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
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한
때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無門關)을 이 시기에 만들었다. 1959년에
는 주지 용태가 불사를 벌이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과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예전 천축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에 몇 안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참선 수행공간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
도가 아주 최상급이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3호),
목조석가3존불,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 마애사리탑(서울지방문화재자료 65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고, 오래된 부도와 천축사 편액 등이 전한다. 화류목조용상이라 불리는
목조불단은 문정왕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건물은 모
두 새로 지은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둥지를 틀었으며, 이미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사세 확장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골의 산사치고는 그런데로
넓은 편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은 숲이 무성하며, 속세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중 사찰이라 제아
무리 번뇌라 해도 감히 추격하지 못한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깝고, 1시간 정도의 등산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잠시 속세에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
이다. 산바람도 솔솔 부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시원한 샘물이 1년 내내 흘러나와 한모금 마시
면 정말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것 같다.
또한 산신각이나 대웅전 앞에서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 등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
로 괜찮다. 

※ 도봉산 천축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시간 30분 (도봉산역 1번 출구 → 도봉산 141번
  종점 → 광륜사 → 도봉서원 → 도봉산장 → 천축사)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정도 줄일 수 있다.
* 천축사 정기 법회가 있는 날에는 도봉산 주차장에서 도봉서원까지 셔틀차량이 운행된다. 여름
  에는 6시 30분부터 10시까지(겨울에는 7시부터) 운행되며, 도봉서원부터 걸어가야 된다. 깊은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량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 누구든 점심공양이 가능하다. 대웅전 남쪽에 있는 공양간에서 공양에 임하면 된다. (겨울에는
  안주는 경우도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천축사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  연등의 붉은 물결 앞에 윗도리가 사라진 독성각(獨聖閣)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산한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천
축사는 대웅전 구역과 북쪽 무문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웅전 구역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 원통전, 석굴이 있다.

대웅전 남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으로 윗도리가 보이질 않는다. 마
치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처럼 말이다. 윗도리를 보려면 산신각으로 오르
는 계단에서 봐야 된다.
이 건물은 달랑 1칸짜리의 조촐한 팔작지붕 건물로 현공(玄公)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2002년
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색채가 무지 고운 독성탱(獨聖幀)과 석고독성상
독성탱은 주지 선응이 화주가 되어 금어(金魚) 권성준이 제작했다.

▲  연등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 옆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산신각을 두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건물
로 독성각과 마찬가지로 달랑 1칸짜리이다. 단 지붕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2003년에 현
공이 보수했다.
산신각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 산신탱
호랑이가 2마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두 눈에는 광채가 초롱초롱 빛나
어두운 밤에 본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다. 호랑이 사이로 지긋한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가 앉아있는데, 앉아 있는 폼이 다른 산신탱과는
다르다. 그외에 동자 3명을 배치했으며, 소나무와 산도 묘사되어 있어
산신탱에 있어야 될 요소들은 모두 갖추었다.

▲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위쪽에 자리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그나
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어여쁜 누님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화로는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탱과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했는데,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과 금어 조정우가 만든 것이며,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제작한 것이다.


▲  원통전 불단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후불탱화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천축사 대웅전 주변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장대한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 밑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시
원한 석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이 여기서 용솟
음치고 있는데, 불공 때 공양하는 용도로만(천축사 승려들도 이 물을 마실 듯)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석굴 내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여 일종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조그
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었다. 속설(俗說)에는 태
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 전설을 통해 천축사를 거쳐갔던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오래된 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약사불을 안치하고 내부를 손질한 건 근래이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입술이 유난히 붉은 약사여래좌상이 약합(藥盒)을 쥐어들고 속세를 걱정한다.
약사여래의 머리 뒤쪽에는 3줄의 두광(頭光)을 그어 그를 빛나게 수식하며
그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 오른쪽에 붉은 바가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옥천이다.

▲  약사여래좌상 좌우 암벽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조그만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저 두 보살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대웅전 북쪽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과 원초적 생리
를 해결하는 해우소가 있다. 그리고 굳게 닫힌 기와문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는데, 그 문 너머
로 절집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신식 건물이 눈을 심히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건물이 천
축사의 상징물인 무문관이다.

무문관은 수행을 위한 건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지었다. 건물의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
음을 얻는 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苦行)을 본받아 4년 또는 6
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매우 적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
우 4명만 통과한 것이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가뭄에 콩나듯 하여 시민선원
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도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그냥 놀려두기도 그래서 속세에 개방해 시민선방
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화
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 목조불단)과 천축사 편액이 있다.


▲  대웅전(大雄殿) 목조석가3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
어졌다고 하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 요사채로 쓰이며,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
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
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3존불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근래 석가불 뱃속에서는 이른바 복장(
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들을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으며, 1730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
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3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 불상 양
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불상이나 불화 조
성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발원문 하나에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
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대웅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

▲  2004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  천축사 비로자나3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목조석가3존불 좌측에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불화는 비로자나삼신불도이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
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그림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오른쪽에는 석가불이 자리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
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
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
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
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
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
으며, 각기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지만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
(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하였다.


▲  꽃창살과 용머리 장식으로 무척 현란한
천축사 대웅전 앞부분

경선당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
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
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玉體恒
安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尙宮
)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
성황후)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성수만세 하기
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귀뜀해 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당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
천축사가 속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축사와 작별을 고하다 ~~ (대웅전)

금지된 곳인 무문관을 제외한 경내 곳곳을 40분 정도 둘러본 것 같다. 2개의 10년 전인 초등학
교 6학년 시절,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래봐야 지금까지 2번 가봤음) 그때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보리수(菩提樹)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
월의 고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천축사를 뒤로 하고 포대능선으로 가고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도봉산의
주능선과 자운봉, 만장봉도 같이 보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갔지만 그 길은 파란만장했다.


 

♠  도봉산의 지붕 거닐기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천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하얀 피부를 드러낸다. 그 바위가 마당바위
로 바위에 올라서면 도봉산 산줄기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이 두 눈에 훤히 달려와 조망이 가히
천하 일품이다.
이곳은 길이 3갈래로 갈리는 요충지로 만장봉과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길, 관음암(觀音庵)과 오
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눠진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대능선이
므로 제일 힘든 만장봉 길을 택했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봉산 남쪽 줄기와 우이암(관음바위)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는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북부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 이런 소중한 허파가 있다는 것은 대자연이 내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고두고 잘 아껴야 하건만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마당바위에서 각박한 산길을 20분 정도 개미처럼 오르면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주변에 도
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니 여기서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장봉의 위엄

▲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740m)은 도봉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그 역시 금지된 봉우리로 묶여있는데, 역시나 통행금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은 오르지 않고 (남북통일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되니까) 자운봉고개에
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양이다.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의 위엄으로 Y처럼 생겼다고 하여 속칭 와이계곡이라 불리며 왼쪽 길은 와이계곡 우회길이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와이계곡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에 박힌 철
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 의지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완전 손
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다락능선 입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 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이다.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북부 지역
(우리 동네 도봉동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와 포대(砲臺) 등 추억이 되버린 군사 시설이 여럿 남아있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바로 능선에 있던 포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와이계곡을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
고 상처받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포대능선 716m 봉우리(다락능선 입구)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산중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다.
중간에 자운봉 동쪽 밑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만월암(滿月庵)에 들려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석
불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을 친견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도봉산 종점으
로 내려왔다. (만월암과 그 이후에 둘러본 곳은 생략) 그런 다음 순두부와 파전, 동동주로 간단
히 저녁 뒷풀이를 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봉산이 내 제자리와 매우 가까우니 그것 하나는 너무 좋다. 금방 돌아와서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5월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내가 도봉산 곁에 계속 머무는 동안
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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