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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31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1
  2.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자현암)



~~~~~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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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방학동사지

▲  도봉산 방학동사지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무수골 숲길

▲  귀록계산 바위글씨

▲  윗무수골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20m)은 내가 서식하는 도봉구(道峰區)의 듬직한 뒷
동산이다. 그의 그늘에 묻혀 산지가 어언 20년 남짓,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의
품을 찾곤 한다. 도봉산을 거의 손바닥 보듯 돌아다니는 본인이지만 그것을 깨는 신선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 나를 놀래키니 그런 것을 보면 도봉산이 내 손바닥이 아니라 오히
려 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다.

도봉동 집과 가까운 도봉산 방학동(放鶴洞) 구역에 늙은 바위글씨와 절터 유적이 있음을
근래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아직도 그런 미답처(未踏處)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내심 놀
랐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여름 제국(帝國)
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늦여름에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집과도 가까우니 슬슬 걸어가면 된다. 신도봉4거리에서 우이동(牛耳洞) 방면으로 이어지
는 시루봉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신방학중학교이다. 여기서 '방학동 전형필(全鎣
弼) 가옥' 옆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택시 회사가 있는데, 그 옆에 방학동계곡을 낀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도봉산의 품이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숲길이다. 방학
동 주민의 소중한 산책 코스로 왕래가 빈번해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해 경관도 괜찮은데,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과
낙서가 거의 있기 마련이다.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해야 된다.
다행히 숨바꼭질의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
다.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 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암반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방학동계곡
바위 피부에 푸른 이끼들이 가득해 이곳이 속세의 때를 덜 탄
청정한 곳임을 알려준다.

▲  바위글씨가 서린 조그만 폭포 주변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에 네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
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
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가 급히 지
원을 애걸했다. 하여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營大將)
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또 파직을 당했
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
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 1
수가 전하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300년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렀건만 글씨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다.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뒷
쪽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해 별서(別墅)
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 어딘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
고, 귀록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
又贈可憐)','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
으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계곡 주변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
서 후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
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장수주말농장 옆 산길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너른 밭두렁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케 하는데, 그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푸르게 익어가는 밭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나마 봄이 된 기분이랄까? 수많은 사람과 회
색빛 빌딩숲,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에서 이렇게 밭두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서울 변두리란 소리이다.


 

♠  도봉산에 숨겨진 옛 절터, 방학동사지(放鶴洞寺址)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묻힌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약수터 주변에 운동시설을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에 널린 운동시설과 공원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
는 돌도 꽤 고색이 깊어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살짝 속삭인다.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과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이 없어 안타
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지 여전히 입
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어 지역 이름을 따서 편의상 '방학
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 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하게 내
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건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절이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중기나 후기에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  절터 2단 석축 (석축 서편은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의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
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육시설
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관리의 손
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좀 있다면
금세 이곳이 절터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돌들이 헝클어진 절터 1단 석축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허나 그 가
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그 외에 북한산(삼
각산) 향림사지(香林寺址), 화곡동(禾谷洞)사지, 대모산(大母山) 절터 등이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  절터에 남은 약수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사람들의 식수로 절과 승려는 온데간데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물은 쏟아져 나와 대자연의 넒은 마음을 보여준다.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어처구니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 모습
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삼성각(三聖閣)이나 명부전(冥府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름도 전하
지 않는 옛 절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싹 뒤집어 조사
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도봉사 영국사(寧國寺)터로 여겨지는 도봉서원터처럼 이곳
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1단 석축

▲  맷돌 주변 절터 석축과 주춧돌


▲  절터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체격도 늠름하고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
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월에 마련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자체적으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
로운데, 그들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손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복원하고 불
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불상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
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명상에
임한다.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  1단 석축 윗쪽에 쌓여진 석축들
절터에서 나온 온갖 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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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계곡에 서린 바위글씨와 절터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방학동길을 타고 무수골
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북한산둘레길19구간)은 무수골에서 정의공주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
의 산길이다. 짙은 숲속을 거니는 그림 같은 숲길로 오르락 내리락이 다소 있을 뿐, 살방한
코스이며, 경사도 그리 각박하지 않다. 북한산둘레길의 서울 구간 상당수는 주택가와 산림 사
이를 오가지만 이 코스는 남쪽 구간 일부를 제외하면 시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은 깊은
산길이며, 북쪽인 무수골에서 도봉옛길(북한산둘레길18구간)로 간판을 바꾸고, 정의공주묘역
에서는 왕실묘역길(북한산둘레길20구간)로 간판을 갈고 우이동으로 흘러간다.

방학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연산군묘 북쪽에 자리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안맹담(
安孟聃) 묘역, 무수골, 둘레길을 닦으면서 만든 쌍둥이전망대가 있으며, 둘레길과 좀 거리는
있지만 방학동사지와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가 있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해(樹海)와 속삭임 ~ 방학동길

▲  쌍둥이전망대

방학동길이 흐르는 무수골 남쪽 언덕에 똑같이 생긴 쇳덩어리 구조 2개로 이루어진 쌍둥이전
망대가 있다. 둘레길을 닦으면서 심어놓은 것으로 회전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 윗쪽에 이르는
데, 이곳에 서면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이 그런데로 시야에 박힌다.


▲  하늘과 보다 가까이, 쌍둥이전망대 윗쪽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그저 그런 하늘 아래 전망대더라..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방학동 구역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노원구, 수락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안개가 극성이었다.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산줄기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  무수골 직전, 야트막한 고갯길 (방학동길)


 

♠  서울 속의 별천지, 도봉산 무수골 (윗무수골)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서울 속의 산골마을이자 도봉산의 숨겨진 비경이며 도봉산의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는 무
수골은 근심이 없는 계곡이란 뜻이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
도 있으며,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
'이라 불렸는데, 그 무쇠골이 영해군(寧海君)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세기에 세종 9번째 아들인 영해군이 무수골 명당자리에 묻힌 이후, 그의 후손(전주이씨)들
이 터를 닦았고, 이후 안동김씨와 함열남궁씨, 진주류씨, 개성이씨 등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인
연으로 들어와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골짜기에 영해군파묘역과 함열남
궁씨묘역, 진주류씨묘역,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과 그의 부
인인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 ?~1466) 묘역 등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방학동길 북쪽 종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속살이 나온다. 그 전에 성신여대 난향
원 돌담길을 지나야 되는데, 길 좌우로 돌담이 둘러져있어 비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
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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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게 익은 윗무수골 논

난향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온
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삼삼한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너른 편이다. 마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다.
이들 논두렁이 무수골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
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
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윗무수골 숲길

논두렁을 지나면 2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느티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었다는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내외의 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식당을 가로 질러 숲속으로 들어서면 무수골의 오랜 주인인
영해군 묘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반면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현암, 원통사, 우이암(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
다운 숲길 100선은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인데,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
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을 타고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한여름 피서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자현암입구 갈림길 (무수골공원 지킴터)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윗무수골 가장 안쪽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자현암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첩첩한 산주
름 속에 제대로 묻힌 산사(山寺)로 1943년에 승려 김혜향(金慧香)이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
에 세웠다.
혜향은 자현(慈賢)의 3대 제자의 하나로 스승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삼았는데, 1991년 요사채
를 새로 짓고 2011년에 범종각을 갖추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범종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이 피어나
지 못한 상태라 문화유산은 없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바깥에 석불과 보살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요사채 옆에 노천 부뚜막을 설치해 나무장작으로 밥과 국을 만든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부뚜막을 갖추고 있으니 밥맛 하나는 좋을 것 같다.

* 자현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6-2 (도봉로169길 500 ☎ 02-954-2578)

▲  솥뚜껑도 갖춘 부뚜막

▲  대웅전(大雄殿)과 7층석탑

▲  석불과 김혜향 공로비(오른쪽 비석)

▲  칠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된 삼성각


▲  정헌대부(正憲大夫) 남궁숙 신도비(神道碑, 왼쪽에 보이는 비석)와
후손들이 사는 집과 재실


자현암 못미쳐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남쪽 길로 조금 가면 마치 먼 지방의 깊은 산골에 들어
선 듯, 숲에 감싸인 조촐한 공간이 나온다. 그야말로 숲과 하늘만 보이는 이런 두메산골에 2
채의 집과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한쪽에 근래에 지어진 남궁숙(南宮淑, 1491~1553) 신
도비가 있다.
신도비 뒷쪽 숲에는 남궁숙과 그의 자손들이 묻힌 함열남궁씨 제1묘역이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이후에 조성된 묘역으로 그 입구에 철책과 철문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도 아니고, 묘역도 다소 젊어져서 철문을 뚫으면서까지 살필 생각은 없
다. 그냥 여기서 길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신도비 주위로 후손이 사는 집과 재실(齋室)
이 있으며, 주변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과 도봉동 토박이의 일원으로 그들의 묘역은 이곳 외에 무수골 하류인 도
봉초교 뒷쪽(함열남궁씨 제2묘역)에도 있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에 벌인 도봉산 동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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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3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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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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