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05.29 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2. 2016.05.15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백련산 백련사 '
백련사 약사전
▲  연분홍 연등이 하늘을 훔친 백련사 약사전 앞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석가탄신일 앓이가 좀 심한 편이라 그날에 대한 기대감이 큰 편이다.
하여 심쿵(심장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적당한 절을 물색했으
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의 고찰(古刹)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이미 인연을
지었던 절 중에 아직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영화사(永華寺)와 백련사 등 여러 절
을 그날의 메뉴로 정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전 11시, 기분 좋게 집을 나서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영화
사(☞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비빔밥 스타일의 공양밥을 배불리 섭취한 다음, 홍은동
(弘恩洞) 백련사로 넘어갔다.
영화사에서 백련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홍제역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0번(백련사↔홍제역)으로 환승하여 백련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정토도량 백련사(白蓮寺) 입문

▲  백련사 일주문(一柱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에서 2분 정도 가면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1999년에 짓
기 시작해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본 것으로 일주문의 규모는 서울 사찰 가운데 거의 3위 안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현판에는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 쓰여 있어 이곳의 정체를 널리 알리고 있
는데, 엄연히 백련산(白蓮山) 자락에 있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칭하
고 있다. 허나 북한산 탕춘대(蕩春大) 능선에서 갈라진 서남쪽 산줄기가 바로 백련산이라 삼
각산을 칭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넓게 따지면 이곳도 북한산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음)
그리고 정토는 백련사의 옛 이름이자 이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정토도량을 뜻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석가탄신일 특수를 노리며 절에서 깔아놓은 커피와 아이스크림 판매 천막
이 지갑 좀 펼쳐보이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이제 갓 5월이건만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에 냉커
피 1잔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무려 3,000원대나 한다. 판매를 맡은 이들은 청소년들로 아마 백
련사 승려의 자녀거나 신도로 여겨진다.
참고로 백련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절 주변에 승려 가
족들이 사는 집이 잔뜩 깔려있다. 태고종의 중심 사찰인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러가기)
처럼 말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백련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淨土道場)을 내세우는 백련산 백련사
백련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는 747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의 정토사상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이 절을 세웠다고 하며 절 이름도 그에 걸맞게 정토
사(淨土寺)라 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임을 아주 강하게 내세운다.
허나 아쉽게도 진표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심히 회의감을 들
게 한다. 게다가 창건 이후 14세기 말까지 이렇다할 기록도 없다. 다만 1399년 무학대사(無學
大師)의 지시로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때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1413년 태종(太宗)의 형인 정종(定宗)이 요양차 이곳에 머물렀으며, 세조(世祖)의 장녀인 의
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에 잠겨있던 중, 백련사에서 해동
묵(음나무)를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무덤이 근처에 마련되자 그
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백련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전한다. <의숙공주의 묘는 현재 경기도 의
왕시에 있음>
또한 경복궁(景福宮)에서 봤을 때 절이 서쪽에 있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뜻하는 '서방정(西
方淨)','정토사'라 불렸는데 어느 여름, 연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중건했으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려들이 모두 도
망치고 건물은 거의 퇴락했다. 1659년에 3년에 걸쳐 중창을 벌여 1662년 법당을 다시 지었으
며, 1701년 절이 소실되자 1702년에 중건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낙창군 이탱(洛昌君 李樘, 선조의 증손자)이 돈을 내어 1774년 크게 중창
했으며, 1891년 경운(慶雲)이 법당과 여러 전각을 다시 짓고 1911년 명부전을 중수했다. 그리
고 서옹이 1914년 삼성전을 중건하고 1917년 사무실을 신축했다.
예로부터 서백련(서쪽의 백련사)이라 하여 동쪽의 청련사<靑蓮寺, 왕십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양주시 장흥으로 자리를 옮김>,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 관련글 보기), 북쪽의 북한
산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와 함께 한양도성의 4대 비보사찰로 꼽히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 등 10여 동
의 건물이 있으며, 그 주위로 승려 가족들이 사는 집이 무더기로 몰려있다. 지정문화재는 아
직 없는 실정이나 1569년에 만들어진 '융경(隆慶) 9년명 동종'이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19세
기에 조성된 괘불과 여러 탱화들이 전한다. 그리고 500년 묵은 음나무가 있었으나 세월의 고
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년 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백련사는 예로부터 약수 맛이 좋았다. (10대 시절에 마셔봤음) 허나 그 착했던 물도 앞
서 음나무처럼 옛말이 되버린 상태이다. 하긴 서울에 이름난 약수들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의 마수(魔手) 앞에 상당수 고통을 받으며 명이 끊겼으니 백련사 약수라고 예외일 수
는 없을 것이다.

* 백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산11-155 (백련사길 170-72, ☎ 02-302-0288)
* 백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석가탄신일 산사음악회

백련사의 중심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뜨락에는 산사음악회가 신명나게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석가탄신일의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아 음악회를 여는 절이 많은데 보통은 저녁이나 오후 늦
게 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대낮으로 시간을 잡았다.
공연장 앞에는 하얀 연등과 연분홍 연등을 적절히 조합하여 하늘을 대신하게 했고 그 밑에 넓
게 방석을 깔아 방청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공연장 뒤쪽에 나를 흥분하게 만든 괘불이 높다랗
게 걸려 시끌벅적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것이다.

천하에 300곳 이상의 절을 들락거렸지만 괘불을 본 것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만큼 보기가 힘
든 비싼 존재로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만날 확률이 좀 크다. (내가 만난 괘불의 대부분이 석가
탄신일에 본 것임)
나를 흥분시킨 백련사 괘불은 1892년(또는 1868년)에 조성된 것이다. 높이는 약 6m 정도로 따
사로운 5월 햇살에 비춰 더욱 윤기가 흘러 보인다.


▲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백련사 괘불(掛佛)의 위엄

▲  백련사 괘불과 그 앞에 펼쳐진 산사음악회 현장

▲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백련사는 이곳
외에도 칠성각 옆에도 관세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을 두었으며 명부전 옆에는 따로 석조관세
음보살입상까지 지어놓아 관세음보살상만 무려 3기나 갖추고 있다. 이곳처럼 관음전(원통전)
계열의 건물을 2개나 지닌 절은 처음 보는데, 정토도량 외에 관음도량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
다.


▲  원통전 내부
늘씬한 몸매의 금동관세음보살상과 백의관음(白衣觀音) 후불탱, 신
중탱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  백련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서방정토의 주인장,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ㄱ'모습의 팔작지붕 2층 집
으로 1층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으로 쓰이며 2층이 바로 무량수전으로 실내가 연병장만
큼이나 넓다. 또한 이곳말고도 동쪽에 극락전이라고 아미타불의 거처를 또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곳이 정토도량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의 별칭이 바로 극락전임)



 

♠  백련사 마무리

▲  백련사 약사전(藥師殿)

원통전 옆구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인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집으로 내부에 1569년에 조성된 '융경(隆慶) 9년명 동종(銅鍾)'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가 백련사
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불단에 자리한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은 19세기 것이다.


▲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
하얀 피부를 지닌 밝은 표정의 약사여래좌상이 좌우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거느리며 약사3존상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는
19세기에 그려진 약사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다.

▲  약사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탱화들 (극락구품도, 신중탱, 현왕탱 등)

▲  석조관세음보살상과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저승(명부)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017년 5월에 장만한 석조관세음보살상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
끄러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자리해 있다.


▲  19세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道明尊者)

▲  명부전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루고 있는 관음전,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3칸짜리 맞배지붕 집이 있다. 이미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있음에도 이곳에도 1칸을 떼어나 그의 공간을
추가했으며 가운데 칸은 칠성, 오른쪽 칸은 산신의 공간이다.

▲  극락전과 칠성각 사이를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의 고운 물결
연등에 의해 하늘이 푹 낮아진 기분이다.

▲  극락전(極樂殿)의 옆구리

극락전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무량수전 다음으로
큰 집으로 백련사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토도량임을 강조하고자 그의 공간을 2개씩이나
두고 규모도 크게 다졌다. (극락전 계열의 집이 2동이나 있는 절은 처음 봄)


▲  극락전 내부

극락전을 끝으로 백련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의 석가탄신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
양밥 1그릇 들고 갈까 했으나 영화사에서 먹은 것이 다 소화되지 않았고, 아무리 둘러봐도 공
양밥을 주는 곳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공양시간은 끝난 듯 싶었다. (백련사 공양밥이 맛있
다고 함)
두 다리도 잠시 쉴 겸, 잠시 신명나는 산사음악회를 구경하다가 보조 메뉴로 급히 정한 다른
절로 길을 잡았다. 이후에 간 고찰들은 자주 복습했던 곳이라 사진에 따로 담지 않아 본글에
서는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나들이는 보다 흥겨운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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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 도봉산 봄나들이 (천축사, 마당바위, 포대능선) '

▲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막바지 전성기를 누리던 5월 첫 무렵에 이웃 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우
리 동네 뒷산이자 서울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40m)을 찾았다.
도봉산은 집에서도 잘 보이는 꽤나 가까운 존재임에도 북한산<北漢山, 삼각산(三角山)>에
오랫동안 마음이 기울면서 많이도 소홀했던 곳이다. 하여 도봉산에 안긴 천축사와 미답지
여러 곳을 지울 겸, 도봉산의 섭섭한 마음도 풀어줄 겸해서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고 불
과 네 정거장 거리인 도봉산 종점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후배와 파도처럼
몰려드는 등산객 인파 속으로 들어가 푸르름이 가득한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천축사로 도봉산 종점에서 1시간 올라가야 된다. 광륜사
와 지금은 황량한 터로 변해버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지나면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
데, 여기서 직진하여 20분 정도 가면 도봉산장(도봉산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산장을 끼고
북쪽 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만월암이고, 서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는 가파른 길로 15분 정
도 가면 천축사이다.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과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나
올 것 같지 않던 천축사가 금세 돌기둥 정문을 꺼내 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  조촐한 천축사 정문
절이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조촐하게 정문을 만들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천축사 입문

▲  불단을 가득 메운 불상<청동보살군상(靑銅菩薩群像)>의 대파노라마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상들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으로
이루어진 불단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일종의
원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천축사에 새로운 명물로 그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이는데, 100기가 넘는 불상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니 이건 관객들 앞에 서 있는 연극배우처럼 무안이 들 정도이다. 하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옆으로 피했다.


▲  슬슬 모습을 비춘 천축사 경내 (대웅전)

청동보살입상에서 1굽이를 돌면 서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내 뒷
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
광(後光)이 되어준다.
굽이친 곳에서 경내까지는 약 100m 거리로 산길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
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石槽)
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옥계수(玉溪水)로 가득한데 맑고 깨끗한 약수로 속
세에 이름이 나있다. 여기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물을 담아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조그만 돌통에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늘 가득하다.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부도(浮屠)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부도가 완전한 모습이 아닌 옥개석(屋蓋石)과 중대석(中臺
石), 하대석(下臺石) 등 일부가 수습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연꽃잎을 비
롯하여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모르겠으나 조선시대 부도로 보이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축사의 무관심 앞에 형편없이 깨지고 씻겨내려간 고된 모습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
고 있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의 내력
도봉산 만장봉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축사는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를 하다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해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고
맑은 샘물이 나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이름 지으니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허나 당시 도봉산은 좁아터진 신라의 서북쪽 변방 지역으로 당나라와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한
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다.
왕경(王京, 경주)에서도 멀고 전쟁으로 시끄러운 변경에 원효(元曉)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1인
자인 의상이 굳이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무왕의 허가를 받아
그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왕경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불교 발전에 힘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
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 조선 태
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뿔이 나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에
게 던져버리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
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
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케 했는데, 고려 후
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
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王
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적당한
자국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절이 망한 듯 싶으며,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
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으며, 1862년
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
사했다.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
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신중탱, 지장
탱을 조성했다. 허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
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한
때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無門關)을 이 시기에 만들었다. 1959년에
는 주지 용태가 불사를 벌이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과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예전 천축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에 몇 안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참선 수행공간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
도가 아주 최상급이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3호),
목조석가3존불,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 마애사리탑(서울지방문화재자료 65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고, 오래된 부도와 천축사 편액 등이 전한다. 화류목조용상이라 불리는
목조불단은 문정왕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건물은 모
두 새로 지은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둥지를 틀었으며, 이미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사세 확장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골의 산사치고는 그런데로
넓은 편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은 숲이 무성하며, 속세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중 사찰이라 제아
무리 번뇌라 해도 감히 추격하지 못한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깝고, 1시간 정도의 등산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잠시 속세에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
이다. 산바람도 솔솔 부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시원한 샘물이 1년 내내 흘러나와 한모금 마시
면 정말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것 같다.
또한 산신각이나 대웅전 앞에서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 등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
로 괜찮다. 

※ 도봉산 천축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시간 30분 (도봉산역 1번 출구 → 도봉산 141번
  종점 → 광륜사 → 도봉서원 → 도봉산장 → 천축사)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정도 줄일 수 있다.
* 천축사 정기 법회가 있는 날에는 도봉산 주차장에서 도봉서원까지 셔틀차량이 운행된다. 여름
  에는 6시 30분부터 10시까지(겨울에는 7시부터) 운행되며, 도봉서원부터 걸어가야 된다. 깊은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량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 누구든 점심공양이 가능하다. 대웅전 남쪽에 있는 공양간에서 공양에 임하면 된다. (겨울에는
  안주는 경우도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천축사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  연등의 붉은 물결 앞에 윗도리가 사라진 독성각(獨聖閣)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산한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천
축사는 대웅전 구역과 북쪽 무문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웅전 구역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 원통전, 석굴이 있다.

대웅전 남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으로 윗도리가 보이질 않는다. 마
치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처럼 말이다. 윗도리를 보려면 산신각으로 오르
는 계단에서 봐야 된다.
이 건물은 달랑 1칸짜리의 조촐한 팔작지붕 건물로 현공(玄公)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2002년
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색채가 무지 고운 독성탱(獨聖幀)과 석고독성상
독성탱은 주지 선응이 화주가 되어 금어(金魚) 권성준이 제작했다.

▲  연등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 옆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산신각을 두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건물
로 독성각과 마찬가지로 달랑 1칸짜리이다. 단 지붕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2003년에 현
공이 보수했다.
산신각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 산신탱
호랑이가 2마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두 눈에는 광채가 초롱초롱 빛나
어두운 밤에 본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다. 호랑이 사이로 지긋한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가 앉아있는데, 앉아 있는 폼이 다른 산신탱과는
다르다. 그외에 동자 3명을 배치했으며, 소나무와 산도 묘사되어 있어
산신탱에 있어야 될 요소들은 모두 갖추었다.

▲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위쪽에 자리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그나
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어여쁜 누님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화로는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탱과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했는데,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과 금어 조정우가 만든 것이며,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제작한 것이다.


▲  원통전 불단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후불탱화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천축사 대웅전 주변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장대한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 밑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시
원한 석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이 여기서 용솟
음치고 있는데, 불공 때 공양하는 용도로만(천축사 승려들도 이 물을 마실 듯)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석굴 내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여 일종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조그
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었다. 속설(俗說)에는 태
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 전설을 통해 천축사를 거쳐갔던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오래된 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약사불을 안치하고 내부를 손질한 건 근래이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입술이 유난히 붉은 약사여래좌상이 약합(藥盒)을 쥐어들고 속세를 걱정한다.
약사여래의 머리 뒤쪽에는 3줄의 두광(頭光)을 그어 그를 빛나게 수식하며
그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 오른쪽에 붉은 바가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옥천이다.

▲  약사여래좌상 좌우 암벽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조그만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저 두 보살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대웅전 북쪽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과 원초적 생리
를 해결하는 해우소가 있다. 그리고 굳게 닫힌 기와문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는데, 그 문 너머
로 절집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신식 건물이 눈을 심히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건물이 천
축사의 상징물인 무문관이다.

무문관은 수행을 위한 건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지었다. 건물의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
음을 얻는 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苦行)을 본받아 4년 또는 6
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매우 적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
우 4명만 통과한 것이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가뭄에 콩나듯 하여 시민선원
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도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그냥 놀려두기도 그래서 속세에 개방해 시민선방
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화
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 목조불단)과 천축사 편액이 있다.


▲  대웅전(大雄殿) 목조석가3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
어졌다고 하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 요사채로 쓰이며,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
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
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3존불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근래 석가불 뱃속에서는 이른바 복장(
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들을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으며, 1730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
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3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 불상 양
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불상이나 불화 조
성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발원문 하나에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
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대웅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

▲  2004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  천축사 비로자나3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목조석가3존불 좌측에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불화는 비로자나삼신불도이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
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그림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오른쪽에는 석가불이 자리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
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
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
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
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
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
으며, 각기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지만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
(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하였다.


▲  꽃창살과 용머리 장식으로 무척 현란한
천축사 대웅전 앞부분

경선당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
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
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玉體恒
安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尙宮
)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
성황후)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성수만세 하기
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귀뜀해 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당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
천축사가 속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축사와 작별을 고하다 ~~ (대웅전)

금지된 곳인 무문관을 제외한 경내 곳곳을 40분 정도 둘러본 것 같다. 2개의 10년 전인 초등학
교 6학년 시절,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래봐야 지금까지 2번 가봤음) 그때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보리수(菩提樹)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
월의 고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천축사를 뒤로 하고 포대능선으로 가고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도봉산의
주능선과 자운봉, 만장봉도 같이 보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갔지만 그 길은 파란만장했다.


 

♠  도봉산의 지붕 거닐기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천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하얀 피부를 드러낸다. 그 바위가 마당바위
로 바위에 올라서면 도봉산 산줄기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이 두 눈에 훤히 달려와 조망이 가히
천하 일품이다.
이곳은 길이 3갈래로 갈리는 요충지로 만장봉과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길, 관음암(觀音庵)과 오
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눠진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대능선이
므로 제일 힘든 만장봉 길을 택했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봉산 남쪽 줄기와 우이암(관음바위)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는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북부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 이런 소중한 허파가 있다는 것은 대자연이 내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고두고 잘 아껴야 하건만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마당바위에서 각박한 산길을 20분 정도 개미처럼 오르면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주변에 도
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니 여기서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장봉의 위엄

▲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740m)은 도봉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그 역시 금지된 봉우리로 묶여있는데, 역시나 통행금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은 오르지 않고 (남북통일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되니까) 자운봉고개에
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양이다.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의 위엄으로 Y처럼 생겼다고 하여 속칭 와이계곡이라 불리며 왼쪽 길은 와이계곡 우회길이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와이계곡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에 박힌 철
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 의지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완전 손
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다락능선 입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 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이다.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북부 지역
(우리 동네 도봉동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와 포대(砲臺) 등 추억이 되버린 군사 시설이 여럿 남아있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바로 능선에 있던 포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와이계곡을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
고 상처받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포대능선 716m 봉우리(다락능선 입구)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산중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다.
중간에 자운봉 동쪽 밑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만월암(滿月庵)에 들려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석
불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을 친견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도봉산 종점으
로 내려왔다. (만월암과 그 이후에 둘러본 곳은 생략) 그런 다음 순두부와 파전, 동동주로 간단
히 저녁 뒷풀이를 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봉산이 내 제자리와 매우 가까우니 그것 하나는 너무 좋다. 금방 돌아와서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5월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내가 도봉산 곁에 계속 머무는 동안
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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