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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09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2. 2016.07.06 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2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 오산 독산성(세마대) 봄나들이 '

▲  오산 독산성(독성산성)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평화로운 어린이날에 다 큰 일행들과 오산 독산성(독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떠있던 12시에 병점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화성시마을버스 56번을
타고 독산 북쪽인 한신대학교로 이동했다. (병점역에서 한신대까지는 버스 10분 거리)

한신대 종점에서 완만한 산길을 타고 10여 분 정도 오르니 독산성 산림욕장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은 오산시(烏山市)에서 1999년에 닦은 숲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윽한 솔내음
을 불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간식과 음식을 섭취하며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를 잔뜩 불리고 다시 10여 분 오
르니 보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독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독산성과 보적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오색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며 중생을 맞이한다.

▲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화성시 병점 지역

▲  보적사로 인도하는 구부러진 오르막길 (보적사 주차장)

오산 북부에 자리한 독산은 해발 208m의 조촐한 산으로 독성산(禿城山), 세마산(洗馬山)
. 석대산, 향노봉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바로 독산성과 세
마대 덕분으로 면적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볼거리도 빈약한 오산시에서 매우 애지중지하
는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  보적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하
경기도 제일의 도시, 수원(水原)과 그를 남쪽으로 둘러싼 화성시 병점, 동탄 지역


 

♠  독산성에 감싸인 조촐한 산사, 보적사(寶積寺)
- 오산시 향토유적 8호

▲  보적사 해탈문(解脫門)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산성 동문

하늘을 향해 야트막하게 솟은 독산 정상 북쪽에 오산 지역 유일의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34호)
독산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자리해 있어 성곽을 담장으로, 동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데, 동문
에 '해탈의 문'이란 간판을 내걸어 일종의 해탈문으로 삼았다.

독산성 품에 안긴 보적사는 인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무려 401년에 백제(百
濟) 왕실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를 밝
혀줄 유물과 증거가 없는 실정이며, 오래된 전설 외에는 그리 오래된 유물도 없고, 절의 원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의 절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 창건 시기를 추정하
기가 어렵다.
하여 아마도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고려 때나, 독산성이 다소 밥값을 하던 조선시대에 승병
들의 주둔지로 조촐하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20년에 주대식이 약사전(藥師殿)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 했다. 이
는 절에 전해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옛날 어느 춘궁기(春窮期) 때
먹을 것이 쌀 1되 밖에 남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미련 없이 절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 그
리고 집에 돌아오니 희안하게도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부처가 몇 배로 되돌려준 모양이다. 이에 무한 감동을 먹은 그들은 계속 열심히 공양
을 하였고 여기서 보물을 쌓았다는 뜻에 '보적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허나 전설에서는
보물 대신 쌀이 쌓인 것이니 미적사(米積寺)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1986년 주지 도광(道光)이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갈았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로 변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1986년에 중수된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
으며, 성문 밑까지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경내 접근이 가능하다.

* 보적사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0 (독산성로 269번길 144, ☎ 031-372-3433)


▲  보적사의 담장이 되버린 독산성 북쪽 성곽
옛날처럼 군사 기지로 쓰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절을 지키는 담장이 되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고 있다.

▲  보적사 3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  배가 시커먼 똥배 포대화상의 위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상


▲  보적사에서 바라본 푸른 천하 (화성시 북부 지역)

보적사 경내 남쪽에 독산성 성곽길이 펼쳐져 있다. 성곽 방어물인 여장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그냥 성곽만 남아있는데, 성곽 높이가 3~5m에 이르니 자칫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보적사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수원 남부와 화성 병점, 동탄 지역)
보이는 범위는 앞서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독산 북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독산성 북동쪽 성곽 (세마대 동쪽)


 

♠  권율장군의 세마(洗馬) 설화가 깃든 오래된 산성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洗馬臺)터 - 사적 140호


▲  독산성 동문 주변

독산 산정에 자리한 독산성<독성산성(禿城山城)>은 백제 때 닦여진 매우 늙은 성이다. 신라와
고려도 이 성을 손질해 사용했으며, 조선도 서울 남부를 지키는 요충지로 썼다.

이곳이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임진왜란 시절이다.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
사(巡邊使)인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모아 서울로 향하다가 바로 이곳에 진
을 치고 주변에 있던 왜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
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권율이 2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쳤다. 그들을 두려워한 왜군은 성을 포위해 공
격을 가했는데,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자 뿔이 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첩자를
보내 성의 결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 결과 성에 물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게임이 끝나는 법, 왜군은 성 밑에 큰 웅덩이를 파 성 내
부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하수를 차단하니 얼마 안가서 조선군은 물로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왜장은 물 1지게를 보내 조롱하며 조선군의 분열을 조장하려고 했다. 허나 권
율이 누구던가?
그는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해내고 다음 날 아침, 왜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백마를 데리
고 와서 흰쌀을 말에게 끼얹어 목욕시키는 연극을 보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말을 목
욕 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권율은 그들을
추격하여 수천의 왜군을 잘 다져진 고기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상이 독산성의 세마대 설화이다. 쌀로 말을 씻겼다고 해서 장대(將臺) 이름을 세마대라 했
을 정도이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설화는 구미 천생산성(天生山城)에도 전해오고
있는데, 해가 막 뜰 때쯤 저리 연극을 한다면 정말 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93년 9월, 3일 동안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을 수축했으며, 1595년 포루(砲樓) 시설이 설치되
었다. 1597년 2월에는 조총을 방어하고자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 아래로 향
한 창문을 설치해 석차와 포차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현하
지는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의 빛나는 전승지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성의 중요성도 커져 1602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했으며, 1796년 수원 화성(華城) 축조로 그 남쪽을 지키는 용
도로 개축되었다. 이때 독산의 이름이 잠시 향로봉으로 갈렸는데, 앞서 말했듯이 늘 물이 부
족한 곳이라 그 이후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다.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도 물이 없
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1,800보(3,240m)로 현재는 그 1/3정도만 남아있으며,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성
벽 바깥은 장방형 또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고, 약간의 기울기를 주어 매우 단단하게 쌓았
다. 성 내부에는 보적사와 세마대가 있으며, 옛 건물터가 조금 남아있다.
오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탐방로와 숲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숲이 무성하고 조망도 일품이라
교외 나들이 및 소풍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속세에서 독산성으로 가려면 세마역(1호선)에서
보적사입구를 거쳐 가거나 한신대에서 산림욕장을 거쳐가는 것이 좋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오
르기도 쉽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외


▲  독산성의 얼굴, 세마대

독산 정상에는 독산성의 얼굴이자 장대인 세마대가 의연하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으며, 왜정(倭政) 때 세마대 이야기에 크게 발
작한 왜인들이 부셔버렸다. 이때 성 안에 살던 300호 정도의 민가도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으로 흩어져야 했다.
1957년 세마대가 복원되었으며,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가 세마대 현판을 남겼다. 건
물 중앙에는 툇마루 같은 것이 있어 앉아갈 수 있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솔내음을 누리게 된다.


▲  이승만이 남긴 세마대 현판의 위엄

▲  독산성 동쪽 치 (독산성에서 가장 동쪽 부분)
이곳에 서면 세교지구와 오산시내, 운암지구, 동탄신도시가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부드럽게 펼쳐진 독산성 성곽 (동남쪽 성곽길)

▲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독산성 남쪽 치

이곳은 독산성의 남쪽 끝으로 오산시내와 화성시 정남면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권율
이 쌀로 말을 씻기는 연극을 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시야도 좋고 산 밑
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  봄이 활짝 나래를 펼치는 독산성 남쪽 성곽

▲  독산성 남쪽 성곽

독산성을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완전히 1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일행들의 권유로(나는 힘
이 없었음) 절반만 돌다 철수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인연을 지어 나머지를 모두 둘러보라
는 독산성의 숨겨진 뜻인가 보다. 어쨌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  독산성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 서북부(세마동) 지역
정면에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바로 오산 시내이다.

▲  수풀 속에 잠든 의문의 주춧돌

동문터 주변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오래된 돌이 누워있다.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돌임을 눈치챌 수 있는데, 고려 때 이용된 건물터 주춧돌이나 석등 초석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독산성에는 세마대 외에는 성곽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건물 주춧돌이라면 장대
나 군창(軍倉), 군사 숙소를 받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석등 초석이라면 오래된 유물이
없어 애태우는 보적사의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것이 달랑 돌 하나 뿐이니 그 이상의
상상은 어렵다.


▲  문 천정이 사라진 동문

독산성 동문은 동그란 천정인 홍예도 없이 문의 흔적만 남아있다. 잘 쌓여진 성돌을 보니 이
곳이 정말 크고 단단한 성임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을 나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적사 일주
문이 나온다.


▲  보적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
높이가 상당한 일주문 현판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山門)'이라 쓰여 있다.
즉 보적사를 뜻한다.


보적사입구로 나온 우리는 물향기수목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코스가 그랬음)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애매하여 도보로 가기로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독산과 오산시내
사이에 자리한 여계산을 넘어 세교지구로 넘어갔다.
이 구간은 경기도와 오산시가 닦아놓은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로 세마교에서 독산성
과 여계산. 고인돌공원을 거쳐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는 7.2km의 길이다. 여계산은 독산보
다 낮은 산이나 숲이 삼삼하여 오솔길처럼 걷기 좋으며, 그 산을 넘어 세교지구에 이르니 왠
돌덩이들이 땅에 바짝 누워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고인돌(지석묘)로 산을 내
려오니 너른 공원이 나타나는데, 그 공원에도 고인돌이 잔뜩 널려있다. 바로 금암동 고인돌공
원이다.


 

♠  오래된 고인돌을 후광으로 삼은 금암동 고인돌공원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2호'

▲  금암리 5호 고인돌

오산 세교지구(세교신도시) 남부에 고인돌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이곳은 큰 바위가 많은 마을
이라 하여 '묘바위', '검바위', '금암'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이 지역의 이름인 '금암동(錦岩
洞)'이 되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고인돌 11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신원이 확실한 9기가 경기도 지방기념물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10,11호)는 신원이 확실치 않은 존재> 11기 중 4기는 공
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공원 안내문을 참조하여 숨바꼭질을 하기 바란다. (7기는 공원
에 있음)
이들 고인돌은 덮개돌(뚜껑돌)이 모두 땅에 누워있어 내부 구조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나 아
마도 무덤방이 땅 속에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달랑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로 보인다. 덮개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길이는 1.96m에서 최대 6m까지, 너비 1.2~3m, 두께 0.3~1.1m이다. 2호
고인돌에는 알구멍이라 불리는 성혈(聖穴)의 흔적이 있으며, 청동시시대 유물로 이곳을 다스
렸던 세력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 시대면 한참 옛 조선(朝鮮, 고조선)이 동아시아
와 중원대륙의 적지 않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이니 아마도 옛 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았을 것이
다.

고인돌 주변에 세교지구가 들어서자 오산시는 여계산 동쪽 자락과 묶어 고인돌공원을 닦아 시
민들에게 선사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흔치 않은 고인돌공원으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
이며, 공원 한복판에는 잔디를 넓게 닦아 탁 트인 모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오산의 새로
운 명소로 인근에 독산성, 여계산, 물향기수목원과 같이 연계해서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여로
(旅路)가 될 것이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520일대 (수목원로 449)


▲  금암리 4호 고인돌

▲  재현된 움집

여기서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청동시시대까지 무작정 선사시대(先史
時代)로 몰고 있는 경향이 커 그에 걸맞게 움집을 재현한 모양이다. 그래도 청동기시대는 돌
만 다르던 석기시대보다 더 진보된 사회인데, 사람들이 다 움집에만 살았을까? 게다가 옛 조
선(고조선)과 동이족의 수준 높은 문화가 천하 곳곳을 어루만지던 시절이고 그들이 만든 한자
(漢字)까지 있거늘...


▲  고대(古代)의 비밀을 품으며 오후 햇살을 누리고 있는 1,2호 고인돌

▲  멀리서 바라본 1,2호 고인돌의 위엄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문헌근린공원을 넘어 물향기수목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5월 5일 오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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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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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 서울에서 즐기는 선사시대로의 여행, 암사동 선사유적지 '

▲  암사동 유적 움집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인 5월이 저물고 여름의 초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6월이 밝았다.
이제 6월 한복판임에도 여름 제국은 벌써부터 철통같은 무더위를 드러내며 천하의 숨통을
조인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부터 꽤 당차게 나와도 즐길 것은 즐기고 살아야 된다. 특히 여행이나
나들이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간단하게 어디로 갈까? 눈동자를 굴
리다가 서울 지역 선사 유적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
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유년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2번 정도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사시대가 썩 재
미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구석기(舊石器)와 중석기(中石器), 신석기, 청동기 관련 유
적은 덜 가는 편이다. 가봐야 하품만 나오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났
는지 그곳 생각이 간절하여 20여 년 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5,8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3411번으로 환승, 선사4거리 남쪽인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정류장
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4거리를 건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북쪽(서원마을)으로 8분 정도 가면 암사
동 유적 정문이 나온다. 정문 동북쪽에는 썩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있어 사람들의 호주머
니를 간절하게 바라보는데 입장료가 무려 500원이나 한다. (옛날에는 무료였는데 ㅠㅠ)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는 애당초 없는지라 입장권을 구입하고 단촐하게 생겨먹
은 정문을 들어서니 여름 녹음에 잠긴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정문은 2개의 나무
기둥을 양쪽에 두고 그 위에 길쭉한 목재를 얹혀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 마을의 정문처
럼 꾸몄는데 이곳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은 모두
나무로 목책 비슷하게 둘렀다. 


▲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로 인도하는 타임머신, 암사동 유적 정문

▲  신석기시대의 상징,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확대되어 재현된 빗살무늬토기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음)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의 성지, 움집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유적) -
사적 267호

▲  나무가 무성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

서울 동쪽 암사동 한강변에 자리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 암사동 유적)는 신
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사회/국사책과 국사 관련 교양서적, 공무원 수
험서에 눈과 귀가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신석기 이전인 구석기시대 하면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동굴, 웅기 굴포리가 대표적이고 신석기시대 하면 암사동
이 딱 떠올릴 정도로 신석기 유적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억겁의 세월 동안 땅 속에 강제로 묻혀있다가 1925년 그 악명 높은 을축년(乙丑年) 대
홍수로 한강 주변이 죄다 떠내려갔을 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수천 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흥분한 왜정(倭政)은 학자 요꼬야마(橫山將三朗)와 후지타
등을 보내 땅을 뒤집게 했는데,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천하를 놀라게 했으며,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발굴 범위가 좁았고 그 이후 별다른 조
사를 벌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다시 경작지가 되고 만다.

논밭이 되버린 암사동 유적을 다시 깨운 것은 1957년으로 경희대가 조사팀을 보내 조촐히 발굴
을 벌였고, 1967년 서울대와 경희대 등이 대학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합동발굴을 하였다. 그러
다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서 주변을 모두 뒤집기 시작했고,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가세하여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1979년 7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받게 되엇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1981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유적을 정화하고 이곳
의 명물인 움집을 복원하여 1988년 8월 30일 속세에 개방했다.

1997년 1월 20일에는 '97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했고, 1998년에는
제2전시관을 만들고자 주변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건져냈다. 2000년 1월 제2전시관이 완공되
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적지 일대를 정비하여 나무를 심었으며, 2010년 9월 선사체험마을
을 조성하여 살아있는 선사시대 체험의 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2011년 7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암사동 유적'으로 변경됨)

▲  복원된 움집

▲  재현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모습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에 흔하게 널린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큰 마을 단위 유적으로 그 이
름과 가치를 크게 드높였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측정 결과 약 6,400년부터 3,500년 전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드러나 멀리 잡아도 약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귀
띔해준다.
이곳 땅 속에서는 3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상징물인 빗살무늬토기
가 발견된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와 청동촉 등이 나온
청동기 문화층, 그리고 백제(百濟) 초기 이음식 독널무덤과 승석문(繩席紋)목단지, 쇠토끼 등
이 나온 백제 문화층도 조금이나마 나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 중기(한성백제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크게 나무가 울창한 남쪽 구역과 움집과 제1,2전시관이 있는 중앙 구역, 그리고 체험마
을과 체험교실이 있는 북쪽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남쪽 구역은 숲이 삼삼하여
돗자리를 피고 간식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보내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으며, 전시관과 움
집이 있는 중앙 구역은 이곳의 핵심이다. 북쪽 구역은 짜투리 땅을 닦아서 만든 선사체험마을
로 딱딱하고 재미가 떨어지는 선사시대 나들이에 약간의 감칠맛을 더한다.

▲  선사박물관 전시관

▲  선사체험마을 움집군락

암사동 유적의 명칭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로 많이 불리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암사동 유적'이다. 허나 명칭이 무슨 대수랴,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선사유적지로 비록
복원하고 재현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文明)시대 이전의 향기가 담겨져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
하게 목숨을 건진 선사유적지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암사동 외에도 면목동(面牧洞) 구석기유적, 도곡동(道谷洞) 청동기 유적, 고
덕동(高德洞) 고인돌, 원지동(院趾洞) 고인돌, 우면동(牛眠洞)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있으나
제대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암사동이 유일하다. (원지동과 우면동, 고덕동 고인돌은 살아있긴
하나 상태가 고르지 못함)

그럼 지금부터 암사동에 서린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흔쾌히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
가 생기기 이전 시대를 일컫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덧무늬토기들

▲  암사동 선사유적지 산책로

※ 암사동 선사유적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1번 출구)에서 강동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암사동 유적 하차
* 지하철 8호선 암사역(2번 출구)이나 5,8호선 천호역(3번 출구)에서 340, 3318, 3411번 시내버
  스를 타고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하차, 도보 10분

★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500원 (30인 이상 단체 4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300원 (단체 200원)
* 7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무료
* 관람시간 : 9:30~18:00 (입장은 17:30분까지 /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 동네 주민들을 위한 아침 운동시간 무료개방시간 : 5:30~9시까지 (10~3월은 6시부터임)
* 주차비 : 경차 1,000원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이용시간 9:30~18시)
* 매년 10월 상반기에 금,토,일 3일 일정으로 선사문화축제가 열린다. 원시생활 체험과 소망등
  달기와 강동 락페스티벌과 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 강동구 지역의 오랜 민속놀이인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0호), 원시퍼포먼스, 그림 그리기 대회, 직거래 장터
  등이 열린다.
* 초등학생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러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움집만들기, 토기만들기, 선
  사인의 겨울나기, 수렵체험, 원시인 여름 즐기기, 채집체험, 어로체험, 어린이발굴체험 등이
  있으며, 운영기간은 프로그램마다 모두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 (올림픽로 875) <☎ 02-3425-6520)
*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의 위엄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 주변

▲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3거리와 함께 짙게 우거진 수목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숲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움집과 전시관, 선사체험마을로 이어진다.

▲  신석기시대에 신석기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았던 동물들의 모형

노루와 맷돼지, 말 등 지금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허나 몇몇 사람들은 왜 공룡이 없지?
의아해한다. 선사시대하면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공룡과 신석기 원시인의 공존, 허나 공룡은
여기에 없다. 왜냐? 그들은 공존하지 않아 서로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공룡은 빙하기로 죄다 씨가 말랐다.


▲  움집터 입구

▲  움집터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소와
선사시대 어린이의 귀여운 모형

▲  태풍으로 날라간 남쪽 움집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들

움집터 일대에서는 30기의 집터와 돌무지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동그란 모양과 네 모서
리를 약간 줄인 구조<어려운 말로 말각방형(抹角方形)>로 모래땅에서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그 위에 짚 등을 엮어서 거의 길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형태이다. 집터 중앙에는 강돌을 둘
러 만든 화덕시설이 있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주로 남쪽에 두었다.
기둥 구멍은 한 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 기둥과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
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집터 밖에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음식을 저장하던 저장구덩이, 돌무지시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의 기운을 받은 흔적이 역력
하다. 그리고 돌무지 밑에는 불에 탄 흙과 부식토와 함께 목탄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많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토기를 굽던 가마터 또는 마을 공동의 화덕시설로 보
인다.

토기는 바닥이 뽀족한 것과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 그리고 무늬가 있는 것들이 주
류를 이루며 나왔다. 그리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의 석기류도 같이 나왔는데, 뗀석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석기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 등이 있으며, 갈돌과 갈판, 괭이, 보습, 돌낫 등
도 있다. 그외에 새뼈와 도토리 등이 조금 출토되었다.

집터에는 고증하여 복원했다는 움집 10기가 있는데, 이들은 기존 집터에서 2m 정도 흙을 엎고
그 위에 만든 것이다. 동쪽에 있는 체험용 움집을 빼고는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  움집들도 비가 마구 새는지 땜질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  더운 여름에 하루나 이틀 정도 원시인이 되어 머물고 싶은 움집
원시인처럼 옷은 중요한 곳만 걸치고 움집에서 며칠 지내보면 어떨까? 물론 취사는
현대식 도구로 해우소나 간단한 세면은 정문이나 전시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말이다. 아무리 선사체험이라고 해도 현대의 이기에 단단히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한 원시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  수수한 모습의 움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 단위로 살았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집을 짓는 기술과 집의 모습이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대부분 저런 집을
짓고 수수하게 살던 평등한 사회였다. (물론 가족간의 서열은 있었다)

그랬던 사회가 이른바 청동시기대에 접어들면서 돌로 모든 것을 때우던 시기는 그 막을 내렸으
며, 청동을 비롯한 광물의 등장으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일부 이루
어지던 농경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자연히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들은 점차 신분제
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유일하게 공개된 동쪽 움집 (움집 생활 체험장)

암사동 10기의 움집 가운데 유일하게 속살이 공개된 동쪽 움집은 기존 움집 규격의 1.5배 정도
를 더해서 만든 것으로 움집 높이 4.5m, 가로 8.5m, 세로 12m에 이른다. 내부에는 4명의 원시
인 가족을 배치했고, 석기 등의 생활용품은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약간
이나마 이해를 돕게 만들었으니 한번 둘러보자.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동쪽 움집 대문

▲  동쪽 움집에 재현된 원시인 가족 4인

동물 가죽 옷을 입은 원시인 가족들이 화덕 주위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각자 일에 여념들이 없
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선 이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아버지로 사냥을 할 창을 손
질하고 있고 그 옆에 아줌마 자세로 앉은 사람은 어머니로 돌판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다.
아들은 물고기를 굽고 있으며, (어머니나 아들이나 겉모습이 비슷하게 생김) 제일 덩치가 작은
꼬마는 막내딸로 어미와 오라비가 해준 음식을 한참 섭취하고 있다.
움집 중앙에 자리한 화덕은 불을 피우던 공간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때워 안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능을 했다. 또한 화덕의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천정에
구멍을 냈다.

재현된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내부를 살폈다.


 

♠  암사동 유적 전시관

▲  제1,2전시관 (왼쪽 현관이 1전시관, 오른쪽이 2전시관)

암사동 유적 전시관은 모두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1988년에 문을 열었
는데, 유적 발굴터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문화, 유물 등
을 머금고 있다.
제2전시관은 기존 전시관을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어 1999년에 그 옆에 이어서 만든 것으로 기
존 전시관의 내용을 바탕으로 암사동 유적의 발굴과 선사시대 개관, 서울과 경기도 지역 신석
기 유적 및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었다. 그리고 2곳의 체험코너와 정보검색코너, 영상실
을 갖추어 전시관의 유물과 신석기시대의 이해를 최대한 돕게 했다.

유물들이 모두 선사시대 것이다 보니 화려함과는 극히 거리가 멀어 식상할 수도 있다. 죄다 토
기와 석기 투성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
)가 싹틀 수 있었고, 인간은 너무 쓸데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의 옛 원초적인 모습도 한번 살펴줘야 된다. 그 토기와 석기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소장 유물은 408개로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복제품(169점)이거나 다른 데서 빌려온 것(167
점)이며, 순수 암사동 산은 고작 72점에 지나지 않는다. 태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이곳 발굴
에 나선 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복제품은 그만 치우고 그곳에 있는 유물을 건네 받아
암사동 유물과 서울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로 꽉 채웠으면 좋겠다.


▲  움집터 발굴 현장 - 움집터 8기와 저장공간 1기를 그대로 경화처리하여
보존한 것으로 이곳 전시관의 백미라 할 만하다.

▲  가지무늬토기와 붉은 그릇, 민무늬토기들

▲  빗살무늬토기와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아마도 학창시절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
이다. 이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과실, 채소를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구
덩이를 파고 500~600도의 온도에서 따끈하게 구워서 붉은 색이나 누런 색을 띄게 되었다. 토기
피부에는 빗살무늬(빗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를 내기 위해 생선과 동물 뼈를 주로 사
용했으며, 이들 토기를 어려운 말로는 즐문토기라고 한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토기이지만 원시 수준의 인간이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기
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돌살촉

▲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과 마제석촉 - 이들은 부여 송국리와
화순 대곡리, 창원대에서 빌려온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비로소 광물을 다루게 되었다.

▲  전국 곳곳에서 집합시킨 빗살무늬토기와 온갖 토기들

▲  물고기 잡이에 쓰던 어망추와 낚시추바늘

겉으로 보면 주위에 흔한 자연석처럼 보여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저런 돌 하나하
나에 원시인들의 사연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판별하기 어려운 저들을 밝히는데 많은 역사,고고학 교수/학자들의 노고가 참 컸다.


▲  타제석기(打製石器)들

▲  돌망치로 쓰인 돌맹이들

▲  제2전시관 한복판에 재현된 움집

▲  세월의 태클에 조각이 나버린 빗살무늬토기 파편들

▲  불에 탄 도토리(가운데)와 갈판과 갈돌, 석기들
탄화된 곡식과 과실 등은 절대로 분해자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도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먹는데,
신석기 사람들도 도토리를 채취해서 양식으로 썼던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의 무덤

신석기 사람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이야 평균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 기껏 길어봐야 40~50 정도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라 불리는 돌무덤들
이 많이 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적당한 무덤 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근래에 남해안 지역에서
조개더미유적과 함께 무덤이 발견되어 조금씩 정답을 풀어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키 정도 길이로 얕게 땅을 파고 관곽(棺槨)도 없이 시신을 안치
했다. 시신은 대부분 곧게 안치했으나 쭈그린 상태로 묻힌 경우도 일부 발견되었다. 시신 위에
는 작은 돌을 덮어 봉분으로 삼았으며 아주 드물게 동굴이나 바위 틈의 구덩이를 파고 묻은 경
우도 있었다. 죽은 이는 목걸이와 팔찌 등의 꾸미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디 저
세상에 가서 쓰라며 토기와 석기,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두어 사후세계 관념을 가지
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추앙받는 암사동에서는 아직 그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못해 약간은 허전
한 감을 준다. 무덤도 발견되면 아주 완벽한 성지감이 되는데 말이다.


▲  돌살촉과 석기들

▲  암사동 주거지 모형도


 

♠  암사동 유적 마무리 ~~ 선사체험마을

▲  선사체험마을 정문과 시간의 집

선사유적지 전시관 북쪽에는 2010년 9월에 조성된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선사체험마을을 알리
는 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조그만 또랑을 건너면 선사체험마을 구역인데, 시간의 집을 시작으
로 기억의 물길과 어로체험장, 움집마을, 수렵체험장, 발굴체험장, 선사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발굴체험장과 백제주거지 표석이 있다.
다른 선사유적지나 박물관과 달리 선사시대 체험장을 매우 넓게 닦아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여흥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굳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당시를 재현한 여러 볼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과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언덕, 여름 제국
의 기운을 약화시켜주는 개울까지 갖추고 잇어 전시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쥐가 난 머리
를 잠시 식히기에는 아주 좋다. 단 그늘이 시간의 집과 개울 건너편 외에는 별로 없어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강렬한 햇빛으로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  시간의 집

시간의 집은 동굴 형태로 구성된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마치 길고 굵직한 뱀처럼 보인다. 이곳
은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곳곳에 설치
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동굴의 길이는 약 60~70m 정도 된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바로 움집군락으로 이어진다.


▲  시간의 집과 그 옆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개울(기억의 물길)

▲  움집군락에 재현된 움집들 - 이제는 움집도 지겨워진다.
그만큼 암사동 유적에서 차지하는 움집의 비율이 크다는 소리다.

▲  맷돼지 통구이 현장 - 저기서 불만
붙이면 바로 100% 통구이 재현이다.

▲  돌무더기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모형 -
집으로 가져와서 그릇으로 쓰면 안될까..?

▲  바쁘게 살아가는 신석기 사람들

▲  신석기 사람들의 취락 모습


▲  기억의 물길이라 불리는 서쪽 개울
장대하지만 무심하기도 한 세월이 물처럼 꾸준히 흐른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기억의 물길로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움집군락 서쪽 산책로

▲  수렵체험장 - 맷돼지와 사슴 모형이 체험을 준비한다.

▲  사슴 1마리 월척하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는 원시인의 위엄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일 사슴이 좀 가련해 보인다.
나의 전생이 혹 저 사슴은 아니었을까..?

▲  발굴체험장

어린이 2명이 한참 흙을 파헤치며 오래된 보물을 꿈꾼다. 하지만 저기서 나오는 것은 흙 밖에
없으니 괜한 헛된 망상은 버리도록~~ 정식 발굴체험을 하는 경우 저 안에 토기와 석기 모형을
여럿 묻는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정말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기분이 정
말 환희(歡喜) 그 자체일 것이다.


▲  발굴체험장 동쪽에 있는 백제주거지터 표석

2003년과 2008년 11월에 6각형 모양의 백제 집터 1기와 여러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이곳이 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까지 주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 강동/송파구로 여겨지는 도읍(위례성) 북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이 살았다. 귀족들은 이곳과 명일동, 고덕동 일대에 큰 농장을
소유하여 굴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와 관련된 유적(창고나 귀족 저택)일 가능성도 크다.


▲  백제주거터 인근에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개망초의 위엄

▲  선사체험교실

▲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는 체험마당

▲  선사의 숲 사이로 난 산책로 - 선사의 숲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  전시관 맞은 편에 마련된 농촌 체험 현장

답사 본능에 충실하며 1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선사시대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옛날의 암사동 유적만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처럼 많이도
변해있어 조금은 놀랬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명소나 관광지나 적당히 변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속세의 생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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