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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1.14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2. 2020.01.24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3. 2019.05.31 중랑구의 북쪽 지붕이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둘러보기 ~~ (숙선옹주묘, 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도당, 충익공 신경진묘역)
  4.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 2017.04.21 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 용마산~아차산~망우산 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용마산1보루, 용마산5보루, 망우산1보루>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용마산1보루와 서울시내
▲  용마산1보루 봉우리와 서울 시내
 



 

용마산은 아차산(峨嵯山, 295m)의 일원으로 한강에서 중랑구 북쪽까지 이어진 아차산 산
줄기의 중간을 맡고 있다. (북쪽은 망우산이 맡고 있음)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하며,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
)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 그리고 중랑구와 구리시(九里市)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
울 동부와 동북부, 동남부 지역과 구리, 남양주, 하남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
적 요충지로 고구려(고구리)와 신라(新羅)가 보루를 주렁주렁 달며 애지중지 했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長城)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
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
를 죽였다. 그러자 용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
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어 무인(武人)을 차별했던 고려 중기나 조선 때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
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조선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 말목장이 있었
는데, 용마급 말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
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용마산은 아차산과 더불어 나의 진심 어린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200번 넘게
그의 품을 찾았다. 그렇게 오지게 안겼음에도 질리기는커녕 매년 꾸준히 나의 마음을 비
추고 있는데,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 첫 무렵에 용마산의 여러 보루를 복습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했다.


▲  긴고랑공원



 

♠  용마산1보루와 2보루(堡壘)

▲  용마산 남쪽 능선길

이번 용마산 나들이는 중곡4동 긴고랑에서 시작했다. 긴고랑은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에 자리
한 골짜기로 골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리다가 긴고랑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아차산과 용
마산이 베푼 물이 긴고랑계곡을 이루며 중랑천과 한강으로 흘러간다.
아차산 일원(아차~용마~망우산)에서 가장 크고 상태도 좋은 계곡으로 물도 많고 바위와 너른
반석이 즐비하며, 풍경도 괜찮아서 도심 속 피서의 성지(聖地)이자 쉼터로 바쁘게 살고 있다.
(계곡 상류~중류에 괜찮은 곳이 많음)

계곡 하류에 닦여진 긴고랑공원 서쪽에 용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남쪽 능선길이 있다. 바로
그 길로 가야 용마산1/2보루를 만날 수 있는데, 간만에 긴고랑에 왔지만 마음은 이미 보루에
가 올라가 있어 바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용마산 남쪽 능선길은 시작부터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가 펼쳐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흥분한 경사를 순화시키고자 계단길을 적지 않게 깔았으나 그래도 힘든 것은 마찬가
지이다. 이런 길은 그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오르면 경사가 조금씩 순해지며 닿지 않을 것 같던 용마산1보루터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아차산의
부드러운 산줄기

▲  용마산 남쪽 능선(용마산1보루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광진구 중곡동과 중랑구 남부 지역을 비롯해 동대문구와 성북구,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터 남쪽 외곽

▲  용마산1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는 용마산 남쪽 능선 183m 봉우리에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 보루 중 가장 남
쪽으로 돌로 다진 석축 부분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 않으나 30~40cm 정도의 할석이 곳곳에 튀
어나와 햇살을 받고 있다. 비교적 평탄한 석축 안쪽에는 흙이 쌓여있는데, 그 남쪽 부분 퇴적
토(堆積土)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1보루의 규모는 직경 5m, 길이 16m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그만 군사시설이나 초소로 한
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하여 바로 위에 있는 2/3보루
를 보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흔적 일부가 수풀과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뒤
늦게 발견되어 대륙을 꿈꾸는 우리로 하여금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용마산1보루

이 보루가 용마산1보루, 즉 넘버원 보루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물론 고구려가 만
든 그 자체로도 아주 특별한 존재이나 이곳이 1보루가 된 것은 용마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보루이기 때문이다. 6개의 보루가 나온 아차산도 발견된 순서대로 1보루~6보루로 매겼고, 망
우산도 그렇다. (망우산은 3보루까지 확인됨)

현재 용마산에는 보루터 7곳이 있으나 그게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숨바꼭질을 하
고 있는 보루터가 더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차산과 망우산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곳을 비롯한 용마산 보루 7형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용마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긴고랑과 중곡동, 구의동(九宜洞)을 비롯해 송파구, 강동구,
강남 지역,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용마산1보루~2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세상을 향해 고개를 쳐든 정면 봉우리에 용마산1보루가 있다. 그 너머로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우면산, 관악산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  용마산2보루 남쪽 오르막길

▲  용마산2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1보루에서 북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해발 225~230m 능선에 용마산2보루터가 있다. 면
적 약 379㎡, 둘레 약 60~79m, 폭 8m로 1보루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윗 부분이 평탄하게 닦
여졌고 그 주위로 석축이 둘러져 있다. 보루 동쪽 중간 경사진 곳에 무덤 1기가 있고 무덤 옆
에는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기서 흑갈색과 황갈색 피부의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발견
되어 고구려가 다졌음을 살짝 귀띔해 준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에서 용마산 정상, 아차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밑으로 1보루를 관리하고
위로는 3보루를 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1보루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우수하
며 여기서 천하를 굽어봤을 2보루의 모습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은 없으나 강화도에 널려있는
조그만 돈대(墩臺)를 생각하면 될 듯 싶다.


▲  용마산2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왼쪽은 아차산이고,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로 움푹 들어간 곳이 긴고랑이다.

▲  용마산2보루 북쪽에서 바라본 천하
용마산 서쪽 능선과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 명품소나무 제1호

용마산2보루에서 남쪽 능선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용마산전망대에 이른
다. 그 전망대 남쪽에 좌우로 넉넉하게 퍼진 소나무가 있는데, 그가 용마산 명품소나무 1호이
다.
광진구(廣津區)는 용마산 능선부에서 잘생긴 소나무를 선별해 2009년에 명품소나무의 지위를
주었는데, 처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넉넉하게 퍼져 상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용마산전망대

천하를 향해 고개를 쳐든 용마산전망대는 용마산 정상 서남쪽에 닦여져 있다. 서/남/북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용마산 구역에서 가장 조망 맛이 좋은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
가 높은 서울 시내가 저 밑에 납작하게 펼쳐져 마치 천하가 내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모락모
락 피어오른다. 산을 오르는 재미가 바로 이런 맛 때문이지.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동북부(도봉구, 강북구), 동남부(송파구, 강동구), 강남권(강남구, 서
초구), 서울 도심부(중구, 종로구),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 남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두껍게 다가오는 아차산 산줄기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남한산, 대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긴고랑과 용마산1보루,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

▲  용마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와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서울 도심부,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등



 

♠  용마산3보루, 4보루, 망우산

▲  용마산 정상(348m)

용마산 정상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남쪽과 동쪽, 서쪽은 조금 가파르고 북
쪽은 약간 완만하다. 아차산 주능선과 망우산, 긴고랑에서 접근했을 때는 정상 동남쪽 체육시
설에서 계단길로 정상으로 올라가면 되며, 용마폭포공원 주변에서 올랐을 때는 북쪽 계단길을
통해 정상으로 들어서게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용마산 정상부에는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살짝 둥근 얼굴의 용마산
표석과 삼각점(三角點, 대삼각본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게양대가 있으며, 인공이 가해진 듯
한 돌들의 무리가 정상부와 정상 남쪽 경사면, 정상 북쪽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그들은 용마
산3보루의 흔적들이다.

이곳 보루는 정상부에 씌워진 것으로 3보루터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핏 보면 봉우리
전체가 인공으로 다진 언덕처럼 보이나 봉우리는 순수 자연산이 맞다. 정상부에 헬기장(지금
은 없음)을 닦으면서 보루 상당수가 파괴되고 헝클어졌는데, 평탄하게 깎여진 부분과 산길 주
변에서 흑회색과 황갈색, 홍갈색 피부의 토기를 중심으로 다량의 토기 파편들이 햇살을 보았
다.
이들은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라 고구려가 다진 보루임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데, 신라가 만
들었다는 의견도 있어 고구려가 먼저 3보루를 닦고 신라가 수리해서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옛 헬기장 서쪽 부분에 적갈색의 소토층이 있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7동, 광진구 중곡4동


▲  정상 인증 모델로 인기가 높은 용마산 정상 표석의 위엄
평일 오후라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주말과 휴일, 평일 저녁에는
정상 인증을 하려는 사람들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①

▲  용마산 동쪽 능선(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 ②


▲  용마산 동쪽 능선길(용마산 정상~아차산 주능선)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용마산 동쪽 능선길은 쑥 내려갔다가 바위가 펼쳐진
중간에서 다시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구조이다. 오르락 내리락을 2번을 해서 그렇지 대
체로 완만한 능선길로 남쪽으로 아차산 주능선과 광진구, 송파구, 한강 등이 바라보이며, 북
쪽으로 중랑구와 망우산 등이 늘 시야에 따라붙어 두 눈을 즐겁게 한다.


▲  용마산4보루터 - 사적 455호

용마산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가다 보면 아차산 주능선을 만나기 직전에 'H'마크가 새겨진 헬
기장이 있다. 바로 그곳에 고구려가 심은 조그만 점 용마산4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용마산4보루는 용마산3보루와 아차산 주능선 보루를 연결하는 곳으로 보루 둘레는 약 228m이
다.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 연질토기와 대형 항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나왔고, 북서쪽
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는데, 보루터 동쪽 지상에서는 석축 구조물이 일부 노출되
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중간 지점 저지대는 집수(集水)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에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에 서울
시에서 다시 조사를 벌여 하나의 보루임을 확인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받지 못했으
나 하루 속히 주변을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 보따리가 싹 풀렸으면 좋겠다.


▲  동쪽에서 바라본 용마산4보루터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

용마산4보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과 만난다. 이 능선은 아차산생태
공원에서 아차산성, 아차산 정상, 아차산4보루, 용마산5보루을 거쳐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
선길로 대자연이 내린 서울의 거대한 동쪽 벽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일부 구간에서 조금 각박한 경사를 보이나 거의 완만한 편이며, 동/서/남/북
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환상적인 지붕길을 보여준다. 또한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추앙을 받
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아차산 코스)도 이 주능선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으로 들어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헬기장이 나오면서 용마산5보루터를 알
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아차~용마~망우산 보루 식
구 중 용마산3보루 다음으로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성벽 둘레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대자연에 제대로 녹아들어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
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가 닦은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차산3보루와 4보루처럼 헬기장이 닦이면서 상당수가 파괴되
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
를 했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했다. 허나 이곳도 완전한 발굴 조사를 받지 않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이곳은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동북부 지역이, 동쪽으로
는 한강과 구리시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여기에 보루를 닦아
아차산과 용마산에서 망우산, 봉화산, 수락산을 잇는 요충지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처럼 아차~용마~망우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은 것은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인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고 한강 유역을 수비하고자 함이다.
이후 신라가 서울 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가 다진 보루 일부를 손질해 요새로 삼았고 신라
말 이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보루들이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용마산5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산1-2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길 (용마산 동북쪽 능선길)

▲  아차산~망우산 주능선(용마산 동북쪽 능선길)에서 바라본
한강과 구리시, 강동구, 하남시 지역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여기
서 바로 내려갈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망우산을 조금 복습하
기로 했다.


▲  망우산(忘憂山)

아차산과 용마산 북쪽에 넓게 솟은 망우산(忘憂山, 281m)은 아차산 식구의 일원으로 그 유명
한 망우리공동묘지를 품고 있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세탁되었는
데, 고구려가 심은 보루 유적 3곳이 발견되어 망우산1보루와 2보루, 3보루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완전 중환자 이상의 상태이다. 그래서 1
보루만 아차산일대 보루군 식구로 들어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어둠에 잠긴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를 오르면 망우산 남쪽 봉우리(해발 280.3m)에 깃든 망우산
1보루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
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
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곳까지 가고 싶었으나 아직 여유
가 있을 것 같던 땅꺼미가 그새 짙어지면서 그곳을 향한 내 마음을 완전히 접고 철수했다. 산
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야간 등산으로 많이 올랐지
만 정작 망우산은 야간 경험이 없음)

이렇게 하여 용마산,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일몰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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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나들이 '

▲  망우산, 용마산 산줄기

▲  아차산4보루

▲  망우산1보루


 

여름 제국이 저물고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9월의 한복판에 나의 즐겨찾기 산의 하나
인 아차산을 찾았다.
아차산은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이자 해돋이와 일몰 명소로 유명하여 오랫동안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야무진 산이다. (나들이와 산행, 답사, 야간 등산 팬들이 많음) 산세
가 완만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으며, 산 좌우가 죄다 평지
다보니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거룩한 넋이 깃든 보루가 20개 가까이 펼쳐져 있고, 아차산성과 아차산3
층석탑, 온달샘석탑, 석실고분 등의 문화유산과 영화사(永華寺)와 범굴사 등의 오래된 절,
긴고랑계곡, 관룡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해 눈이 마음이 심심치가 않다.
아차산 북쪽에는 용마산, 그 북쪽에는 망우산이 자리해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아
차산 식구들이며, 조선 때는 아차산의 영역이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이르렀다.
(본글은 편의상 아차산4보루부터 시작하겠음)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 (사진 가운데가 4보루)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용마산 ,망우산 제외)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성터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꽤 남다른데,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서 발견된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루는 터만 간신히 남은 것에 비하면 상태가 다소 나았던 것이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않았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 (2개의 치로 이루어진 부분)

구리시(九里市)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
움을 받으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5~6세기에 쌓은 보루임이 명백해졌
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구리시(4보루가 구리시 땅임)에서 2008년부터 복원
을 적극 추진하여 2년 동안 공을 들여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달려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
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
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했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
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남쪽에는 이중치를 두었는데, 두 성벽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어 보루 출입구로 여겨
지며, 고구려 축성 양식의 하나인 들여쌓기 형식이 잘 깃들여져 있다.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치가 눈길을 끈다. 전체 길이 13.2m로 나무로 목
책(木柵)이 둘러진 중간에 2.5m의 뚫린 공간이 있어 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
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아마도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에 이슬처럼
사라진 구의동(九宜洞)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보루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며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이 쏟아져 나와 인근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대 병참
기지로 추정된다.

▲  4보루 서남쪽 치

▲  4보루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남쪽 계단을 통해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
님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앙상하게 터만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
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 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
는 숙제이다.

건물터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호 건물터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기서는 온
돌유구 2기와 주춧돌,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 투구 등이 나와 높은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호 건물터 밑에서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
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를 통해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지었던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4보루 1호 건물터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는 2개의 저수시설이 나왔다. 이들은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이들의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
'670x610x깊이 350cm'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앞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4보루는 아차산 능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북쪽을 제외하고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서
울 광진구와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속시원히 시
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새해 해돋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아차
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능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하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강동구, 송파구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용마산(龍馬山)

▲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4보루에서 북쪽 능선길을 10여 분 정도 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은 용
마산, 북쪽은 망우산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용마산 정상을 찍고 망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자리한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
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아차산보다 50m 이상 키가 크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 동부와 구리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고구려와 신라가 능선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지금까
지 발견된 보루는 7개로 1,2,4,5보루는 고구려, 3,6,7보루는 신라(新羅)가 세운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
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였다. 그러자 용
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
나 전설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해오고 있어 아마도 무인(武人)을 차
별하던 고려 중기나 조선시대에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말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급 말
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듯 싶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면목7동


▲  헬기장이 되버린 용마산4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능선 갈림길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헬기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 고구
려가 심어놓은 조그만 점, 4보루가 있었다.
용마산4보루는 성벽 둘레 약 228m로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灰黑色) 연질토기와 대형 항
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다. 동쪽 능선에 보루를
이루던 석축터가 일부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 서울시에
서 다시금 조사한 결과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하루 속히 주변을 싹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으면 좋겠
다.


▲  용마산4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왼쪽 산)과 용마산 사이 움푹 들어간 골짜기는 긴고랑이다.
그 너머로 광진, 성동, 송파, 강남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  시내를 향하고 있는 용마산 조망대

용마산4보루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서쪽 길로 내려가면 서
울을 향해 고개를 쳐든 조망대가 있으니 꼭 가보기 바란다. 그곳의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조망대는 정면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마치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기분인데, 산
으로 막힌 동쪽을 제외하고 북쪽, 서쪽, 남서쪽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눈 밑으로 천하 최
대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 시내가 납작하게 바라보인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 중랑
, 동대문, 성북, 도봉, 중구, 송파, 강남, 서초, 동작, 용산구 지역과 남산, 도봉산, 북한산(
삼각산), 북악산(백악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
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마산 서남쪽 산줄기와 긴고랑을 비롯해 광진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강남구, 한강, 중랑천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북한산, 도봉산 등이 바라보인다.

▲  밋밋하게 솟은 용마산 돌탑 (아차산~망우산 주능선)
아차/용마산을 꾸미면서 새로 심은 돌탑으로 딱히 의미는 없다.

▲  용마산 돌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 동쪽 자락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하남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마산 조망대에서 다시 아차산~망우산 능선길로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헬기장을 지나 부
드럽게 이어진 능선길을 고집하면 돌탑 하나가 넉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그를 지나치면
얼마 안가 헬기장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고구려가 뿌린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마산5보루
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
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지역이, 동쪽으로는 한강과 구리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보루를 세워 아차~용마~망우산 주변을 지켰던 것이
다.
성벽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의 조그만 보루로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
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헬기장이 들어앉으면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했
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하였다. 허나 이곳 역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  헬기장에 짓눌린 보루의 현실 - 용마산5보루
산 밑을 바라보며 위엄을 부렸던 보루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말 세월무상 그 자체로다.

▲  용마산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동쪽 천하
구리시 아천동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 산줄기 북쪽에 자리한 망우산(忘憂山)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망우산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어 통행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서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
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우리는 망우산을 조금 둘러보고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망우산은 해발 281m로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위치
상 망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북쪽은 망우리고개까지 이어진다. 서울 시민들의 사후 안식처
로 그 유명한 망우리시립묘지(망우리 공동묘지)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리공원으로 세탁되었다.

망우산에는 고구려가 심어놓은 보루 유적이 3곳 발견되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흔적만 남
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환자 상태이다. 하여 1보루만 아차산보루군의 일원으로 사적 455
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다행히 그곳은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  망우산 산길 (1보루 방면)

망우산에는 망우리시립묘지가 넓게 누워있다. 이곳이 졸지에 서울 시민들의 사후(死後) 공간
이 된 것은 왜정(倭政) 시절로 이태원(梨泰院)에 있던 공동묘지를 서울 시가지 확장을 위해
1933년 이곳으로 모두 옮겼다.
공동묘지를 옮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굳이 망우산을 고른 이유
가 있었다. 바로 인근에 자리한 조선 최대의 왕릉(王陵) 밀집 구역 동구릉(東九陵)을 엿먹이
기 위함이었다. 동9릉은 망우산 동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동9릉과 한줄기로 이어진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써서 동9릉의 기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왜정이 산마다 천박하게 말뚝을 박으며,
이 땅을 모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무덤이 많이 조성되어 최대 3만 기 넘게 들어찼으나 이후 이장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학가, 정치인들도 적지 않
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오세창(吳世昌), 안창호(安昌浩), 종두법으
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 꽤 있다. 안창호 선생 등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도 많은 20세기 초~중반 역사 인물들이 묻혀 있어 그들 무
덤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립묘지를 1바퀴 돌던 5.2km의 순환도로는 손질하여 1998년 5월에 '사색의 길'이란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는데, 숲이 짙고 기운이 맑아 산책 명소로도 아주 좋으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
름답다.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색의 길은 완전 동화 속의 풍경, 선경(仙境) 그 자체이
다.


▲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해 있다.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
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
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싹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온다. 허나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 문화재청에서도 현
재 손을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갈아 엎어야 된다. 그래야 망우산 보루에 대한 진실이 나오기 때문이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1보루 옆구리를 지나는 탐방로
보루 보존을 위해 보루 아랫쪽과 윗쪽 옆구리에 탐방로를 냈다.

▲  망우산1보루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
후손들의 손길이 그쳤는지 무덤이 잡초에 완전 뒤덮여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들도
없었다면 이 무덤은 자연 속에 완전히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망우산1보루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저녁 시장기가 한참 피어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아차산역에서 시작된 아차산 답사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배도 고프다. 게
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 임박으로 여기서 곱게 길을 접고 용마산 북쪽 갈림길로 돌아왔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사가정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중간에 용마제일약수터가 있는데, 아직은
적합 수준이라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털어낸다. 산에서 약수터나
샘터만큼 반가운 존재가 없다.


▲  용마제일약수터

▲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는 계곡길

용마제일약수터에서 계곡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망우산 서남쪽에 자리를 닦은 사가정
공원에 이른다. 공원을 지나면 시내의 모습이 더욱 짙게 다가오고 공원 입구인 용마한신아파
트 교차로에서 아차~용마~망우산 나들이의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배인 현장, 아차~용마~망우산 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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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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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의 북쪽 지붕이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둘러보기 ~~ (숙선옹주묘, 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도당, 충익공 신경진묘역)

 


' 서울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봄 나들이 '


▲  봉화산 아차산봉수대


 

봄이 보름달처럼 차오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중랑구(中浪區) 봉화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높이 걸린 오후 2시, 태릉입구역(6,7호선)에서 그를 만나 금강산도 식후경(食
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부근 식당에서 감자탕으로 늦은 점심을 들고 봉화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  조선 태종의 후궁으로 조용히 살다 간 여인 ~
숙선옹주 안씨묘역(淑善翁主 安氏墓域)

봉화산 북서쪽 끝으머리에는 숙선옹주 안씨묘역(선빈안씨묘역)이 작게 둥지를 틀고 있다. 너
무 없는 듯 자리하여 아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묘역을 알리는 어떠한 이정표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다만 근래 닦여진 묘역 북쪽 도로가 '숙선옹주로'를 칭하면서 조금
은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숙선옹주로 덕분에 묘역의 존재를 눈치챘음)
묘역은 4차선 숙선옹주로 길가에 자리한 소강회관 뒷쪽 산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
는데, 도시와 자연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이 묘역을 경계로 앞쪽은 인간들의 진
흙탕 세상, 뒷쪽은 대자연의 싱그러운 공간이다.

묘역의 주인공인 숙선옹주(?~1468) 안씨는 태종(太宗)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로 검교한성윤(
檢校漢城尹) 안의(安義)의 딸이다. 1422년에 태종의 8번째 아들인 익령군(益寧君, 1422~1464)
을 낳았고, 태종의 8번째 서녀(庶女)인 소숙옹주(昭淑翁主, ?~1456)와 태종의 10번째 서녀인
경신옹주(敬愼翁主, ?~?), 애기 때 요절한 옹주 1명 등 모두 1남 3녀를 두었다.
옹주들의 탄생 시기를 알 수 있다면 숙선옹주의 나이와 후궁이 된 시기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겠으나 아쉽게도 단서가 부족하다. 다만 태종이 1422년에 55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므로 3명
의 옹주는 익령군보다 먼저 태어났음이 100% 확실하다. 1년에 1명씩 생산한다고 하면 태종이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넘기고 뒤로 물러앉은 1418년 이후에 후궁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크
다. 그런 케이스로 연산군묘(燕山君墓) 밑에 잠든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가 있다.

1421년 세종은 안씨를 숙선옹주로 책봉, 그의 아비인 안의에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제
수했으며, 궁궐 뒷전에서 조용히 살다가 1468년에 약 6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400
여 년이 흐른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선빈(善嬪)안씨로 추증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옹주(翁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옹주하면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일컫는다. 허나 고려 때는 왕자의 부인을 지칭했으며, 제왕
의 공주와 후궁은 보통 궁주(宮主)라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비 소생을 공주,
후궁 소생을 옹주로 구분했다. 그리고 후궁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
원(淑媛, 종4품)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숙선옹주도 그렇고 그의 아들 익령군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비
록 가늘게 이름은 남겼어도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으니 역사는 그들의 대한 기록에 매우 인
색했다. 하여 그들의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숙선옹주 묘역

▲  옆에서 본 숙선옹주묘 봉분

숙선옹주묘역은 옹주가 잠든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2기,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문인석(文人石) 2기, 장명등(長明燈) 2기, 양석(羊石) 2기, 망주석(望柱石) 2기 등 정
말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왠만한 사대부(士大夫)의 묘역과 비슷한 크기로 원래는 지금보
다 약간 북쪽에 누워있었는데, 산자락을 밀고 신작로(숙선옹주로)를 내면서 그 라인에 있던
묘역은 개발의 칼질에 현 자리로 밀려났다.
그때 후손들(숙선옹주 소생인 익령군의 후손)이 묘역을 이전/정비하면서 묘비와 장명등, 문인
석 등 기존 석물 외에 망주석과 양석, 장명등, 비석, 상석, 향로석을 새로 달고 봉분 밑에 무
려 12지신상을 갖춘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원래 호석은 없었음) 그리고 묘역 밑의 익령군
의 시호인 소강(昭鋼)을 딴 소강회관을 만들어 묘역을 옆구리에 두고 관리한다.

후손들의 지극정성도 좋지만 오래된 무덤에 하얀 피부의 반질반질한 석물을 잔뜩 심어 옛것과
새것이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되었고, 봉분까지 깔끔하게 손질하면서 장장 500년이 넘은 무덤을
졸지에 50년 된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  묘역 우측 석물

▲  묘역 좌측 석물

묘역을 이루는 석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文人石) 1쌍과 조그만
장명등, 묘비 정도이다. 숙선옹주가 1468년에 세상을 떴으니 무덤과 석물은 적어도 1469년까
지는 닦여졌을 것이다. 그 장대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입혀져 다들 월남에서 돌아온 시커먼
김상병처럼 까무잡잡한 피부를 자랑한다.

▲  고색의 기운이 가득한 묘비

▲  근래에 새로 닦은 묘비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는 무려 2기가 있는데, 이상하게 봉분 바로 앞에 두지를 않고 모두
봉분 좌우에 우두커니 세워 두었다. 묘를 이장하면서 새 묘비를 만들고자 기존 묘비를 옆으로
옮긴 것 같은데, 새 묘비 역시 봉분 앞에 두지 않고 좌측에 비켜 있다.
우측 묘비는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 위에 비석을 얹힌 단출한 모습이며, 고색의
기운이 역력하고 세월이 달아준 주름이 많다. 그에 비해 젊은 나이의 좌측 묘비는 꽤 말쑥한
모습이다.


▲  묘역 구석에 자리한 오래된 장명등 (지금은 묘역 앞 제자리에 있음)

묘역 구석에는 고색이 매우 짙은 키 작은 장명등(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은 원래 무덤 앞에
있었으나 새 장명등을 달면서 한참이나 후배인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 한가로
운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후배를 밀어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장명등의 역할
을 수행하고 있다.

조선 초기 왕족과 귀족묘의 장명등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는 높이가 1m도 남짓으로 지
금까지 보아온 장명등 가운데 가장 작다.
비록 새옷을 많이 입어 묵은 티가 줄긴 했지만 무덤 초창기에 조성된 석등과 문인석, 묘비 등
이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어 15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무덤은 그렇더라
도 석등 정도는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보인다. 참고로 이곳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
왕후(新德王后) 강씨의 정릉(貞陵)과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연산군묘 밑에 자리한 의정궁
주묘 다음으로 오래된 왕족 묘역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1동 120-3 (공릉로2라길 48)


▲  뒷쪽에서 바라본 숙선옹주묘역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소강회관)


 

♠  봉화산 둘러보기

▲  봉화산 산길 (묵동다목적체육관 옆)

숙선옹주묘역에서 숙선옹주로를 따라 신내동(新內洞) 방면으로 조금 가면 묵동다목적 체육관
이 나온다. 체육관 동쪽에는 봉화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푸른 산길이 나있는데, 산 전체가 근
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산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게다가 산 허리에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
까지 걸쳐놓아 봉화산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봉화산(烽火山)은 중랑구 북부 한복판에 홀로 솟은 야트막한 뫼로 키는 160,1m이다. 묵동(墨
洞)과 중화동(中花洞), 상봉동(上鳳洞), 신내동에 넓게 걸쳐있으며, 동남쪽의 망우리고개와
아차산(峨嵯山) 산줄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주변에 마땅한 언덕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 있
다. 하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꽤 일품이며, 북쪽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도봉산(道峯山),
서쪽은 북한산(삼각산)과 서울 도심, 남쪽은 광진구와 강남 지역, 동쪽은 아차산 산줄기와 중
랑구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그러다보니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어 고구려(高句麗)는
정상 남쪽에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주변을 살폈다. 이 보루는 고구려가 사패산에서 수락산을
거쳐 아차산 남쪽까지 보루를 줄줄이 달아놓은 보루 라인의 중간 경유지로 도봉산과 아차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들 보루(약 20여 개가 발견됨)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보루 둘레 약 268m, 내부 둘레 약 4,190㎡, 정상 남쪽에 일부 남아있으나 확인하기 어려움)

조선 때는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했는데, 함경도(咸鏡道)에서 오는 봉화(烽火)를 한이
산(汗伊山,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받아 남산(南山)으로 넘겼다. 산의 이름인 봉화도 바로 이
봉화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칭으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봉수대 이름은 아차산봉수대)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도당(都堂)이 있으며, 매년 음력 삼짓날에 도당제를 지낸다. 정상
남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묵동과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에서 정상
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어디서 출발하던 정상까지는 길어봐야 20~30
분 정도면 닿으며, 정상을 찍고 다른 쪽으로 내려가도 길게 잡아봐야 1시간 이내이다. 게다가
경사도 거의 느긋하여 산의 품이 꽤 포근하다.
산은 작지만 봉화산이 내린 약수터가 즐비해 도처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고, 소나무가 많아 솔
내음이 그윽하다. 게다가 중랑구의 오랜 특산물인 먹골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나무 농장들
이 북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중랑구청 뒷쪽에는 '봉화산 신내근린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으며, 산 북동쪽에는 근래 옹기테
마공원이 닦여져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묵동 봉화산 성황당(城隍堂)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묵동 봉화산 성황당'이라 불리는 돌탑과 제단이 나온다. 이곳은
묵동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성황제(城隍祭)를 올리는 곳으로 거의 동그랗게 석
단(石壇)을 쌓고 서쪽에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을 두었으며, 석단 중앙에는 성황당의 역할
을 하는 돌탑이 두툼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그리고 돌탑 남쪽에는 2005년에 세운 검은 피
부의 '묵동 봉화산 성황당' 비석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동네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여전한지 성황당 주변은 정비가 잘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황제
를 지내 마을의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아직까지
동제(洞祭)와 성황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성황제나 산신제 등 마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음) 서울이 20세기부터 사람이 산 것도 아니고 구석
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 살던 터전이라 그런 민간신앙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봉화산 주변도 원래 농사를 짓거나 먹골배를 재배하던 시골로 그들 모두 동제를 지내는 공간
을 갖추고 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거쳐가면서 시골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전통 풍
습도 사라지거나 토박이 주민들만 조용히 지내는 정도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
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울창한 숲을 가르며 정상까지 이어진 산길

▲  중간에서 만난 숲속 쉼터 (비봉각 직전)

▲  비봉각(飛鳳閣) - 봉화산도당굿 보존위원회

느긋하게 펼쳐진 산길을 계속 오르면 정상 북쪽에 경쾌한 처마선을 드러낸 3칸짜리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이 기와집은 '비봉각'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경사를 이용한 2층 건물이다.
그는 2009년 2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한옥으로 '봉화산 도당굿 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하
고 있으며, 2층은 도당굿 보존위원회 사무실과 도당굿을 준비하거나 가르치는 방, 그리고 마
루가 있다. 1층에는 창고와 식당이 있으며, 파전과 동동주, 라면, 간식류를 팔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비봉각

▲  봉화산 도당(都堂)과 대문

비봉각 옆에는 봉화산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도당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아차산봉수
대 곁에 도당이 자리해 있지만 도당 주변을 누런색 담장으로 꽁꽁 두르면서 봉수대에서는 뻔
히 바라보임에도 접근할 수가 없다. 봉수대와 도당 서로를 완전 차단한 것이다. (도당이 봉수
대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봉화산 도당은 봉화산 정상에 자리해 있는데, 봉화산 산신할머니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할머
니 외에도 산할머니, 불사할머니, 미륵할머니로도 불리며 보통은 산신으로 통한다. 이렇게 산
신을 봉안하고 있다면 그냥 속편하게 산신각(山神閣)을 칭하면 되겠지만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조정의 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다른 명칭, 도당(都堂)을 칭하고 있다. (한자도 같음)
도당은 부군당(府君堂)과 더불어 서울 지역의 오래된 당집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당에
서 지내는 제사를 도당제(都堂祭), '도당굿'이라 부르며, 이곳 도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봉화
산 도당굿이라 부른다. 산신을 봉안한 공간이다보니 도당굿 외에도 산신제도 같이 지낸다.

봉화산 도당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 29년(1446년) 3월 4일 부분에 '봉
수대 상단에 가옥을 만들고 병기(兵器)와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건물이 도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당은 그 시대에 맞는 건물 스타일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는데, 구
한말 이후로 아차산봉수대가 은근슬쩍 사라지면서 봉수대의 빈터까지 적지 않게 차지하고 있
다. 그러다가 1992년 여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새로 지었다. 

이 도당은 400~500년 동안 봉화산 주변 주민들(묵동, 상봉동, 중화동, 신내동)이 마을의 안녕
과 풍년을 기원하던 오랜 성지로 이곳을 통해 서로의 결속과 대동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주변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을 구심점으로 뭉쳤던 것이다.
도당굿은 매년 음력 3월 3일(삼짓날)에 지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들 동네에서 번갈아 지냈
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묵동이 손을 때자, 나머지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에서 30여 년 간
번갈아 가면서 제를 지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봉화산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서 토
박이들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도당굿이 나날이 퇴색해가자 2000년부터 중랑문화원에서 '봉화
산 도당제 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직접 도당굿을 챙기고 있다. 그러다가 2005년 1월 '봉화산
도당굿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34호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봉화산 도당

도당굿은 비록 때가 맞지 않아 구경하진 못했지만 오랜 내력에 걸맞게 평소에도 도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아낙네들이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이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어서 도당까지 접근
할 수가 있었는데, 도당에는 아줌마 신도 2명이 있었다. 그중 1명은 기도를 하고 있었고, 다
른 1명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살짝 살펴본 도당 중앙에는 조그만 산신할매상이 빨간 방석에 앉아있었다. 옷은 순 하얀색의
장삼으로 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어 마치 승무(僧舞)를 벌이는 승려 같다. 그의 얼굴은 뽀송뽀
송한 하얀 피부로 산신에 걸맞지 않게 귀여움이 적지 않게 묻어나 있고, 그 옆에는 산신의 비
서격인 작은 동자상이 있다. 뒷쪽에는 산신과 관련된 산과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는
데, 그림 아래쪽은 산신상과 방석에 가려져 있으나 아마도 산신과 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산신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산신상이 앳된 것을 보면 근래에 다시 만든 듯 싶다. 초창기 산신상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건 정말 국가 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옛것은 진
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산신상을 막 사진에 담으려고 하니 청소하던 아줌마가 이제 문을 닫을 것이니 나가라고 그런
다. 그래서 군소리 내지 않고 대문을 나가니 바로 대문을 굳게 봉해버렸다.


▲  봉화산 도당의 주인장, 산신할머니상

봉화산 도당굿은 굿 하루 전날에 당주가 찾아와 직접 도당굿에 필요한 제물을 점검하며, 바로
다음날(삼짓날) 도당과 아래 공터에 마련된 제단에 제물이 차려진다.
굿 진행 순서는 '거리부정'을 시작으로 주당물림, 앉은 부정, 불사할머니거리, 가망청배, 진
적, 본향, 상산, 별상, 신장, 대감, 산제석, 창부, 군웅, 용신, 대잡이 등이며, 2005년 도당
굿에서는 진적에 앞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녀(巫女)는 도당 안에 들어가 앉아 부
정을 친 후, 봉화산 할머니를 모시는 불사굿을 한다. 당 안에서 청배한 후, 마당에 놓인 물동
이를 타고 공수를 주며, 불사굿이 끝나면 나머지 굿은 도당 밑 비봉각 앞에 차려진 가설 굿청
에서 한다.
군웅굿에서는 소머리 사실을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는 방향을 주시하는데, 특정 마을 방향으로
쓰러지면 그해 좋지 않다고 믿었다. 대는 참나무를 사용하여 굿청을 1바퀴 돌고 서낭당에 놓
는다.
온갖 잡귀를 풀어 먹이는 뒷전을 끝으로 도당굿을 마무리하며, 보통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하
루 종일 펼쳐진다. 또한 예전에는 음력 6월 초하룻날도 소를 잡아서 치성을 올렸으나 이제는
도당굿만 지낸다.
도당굿 지정 무당은 신위행(1939년생 여자), 지정 악사는 김광수(1945년생 남자)로 이들은 봉
화산 도당굿 기능보유자이며, 굿은 신들린 무당을 불러서 하고 악사(樂士)는 피리, 대금, 해
금을 담당한다.


▲  아차산 봉수대터 - 서울 지방기념물 15호

도당 바로 옆에는 복원된 아차산봉수대가 자리해 있다. 도당과 더불어 봉화산의 정상을 누리
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봉수대 이름이 봉화산도 아니고 '아차산봉수대'를 칭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이 봉수대는 두만강(豆滿江)에 있는 함경도 경흥(慶興)에서 시작하여 서울 남산까지 이어지는
조선 봉수로의 1번 노선으로 그 노선의 끝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직전 남양주 한이산(汗伊山
)에서 봉수를 받아 조선 봉수대의 중심인 남산 봉수대로 넘겼으며, 아차산봉수대로 인하여 이
산은 봉화산 또는 봉우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활발하게 봉화를 피우던 이곳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철저하
게 버려졌다.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과 사람들의 괴롭힘으로 봉수대는 어느 세
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고, 봉화산 도당이 그의 빈 자리를 둥지로 삼았다.
아차산 봉수대가 얼마나 완벽하게 잊혀졌던지 그 위치마저 잃어버렸다. 해방 이후 아차산 봉
수대 자리를 그 이름에 따라 광장동 아차산 능선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정작 아차산에서는
봉수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에 봉화산을 아차산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비로소 아차산 봉수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
고 그로 인해 아차산의 영역이 봉화산까지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11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고자 완전히 쓰러진 아차산 봉수대를 그럴싸하
게 복원했는데 애초 5개의 봉수가 있었으나 1개만 재현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티는 아예 여
물지도 않았고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너무 반질반질하다. 그래서 문화재청 지정명칭
도 아차산봉수대가 아닌 '아차산봉수대터'이다. 끝에 '터'를 붙여 '터'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차산봉수대가 있는 봉화산은 동남쪽 아차산 산줄기를 제외하면 주변이 죄다 평지라 봉수대
위치로는 아주 좋다. 여기서 봉수를 피면 약 10km 떨어진 남산 봉수대에서 쉽게 확인이 가능
했으며,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남산으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  북쪽 밑에서 바라본 아차산봉수대

▲  봉수대의 뒷통수


▲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
이제는 봉화를 피울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은퇴자 신세이다.
허나 그의 쓸쓸한 체면도 살려줄 겸, 봉화 체험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1994년에 복원된 봉수대이니 그리 손해는 없을 것이다.

▲  봉수대 창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봉화를 피웠다. 봉화 연기는 봉수 꼭대기로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늘을 긴장시키고 남산 봉수대를 바쁘게 만든다. 특히 두만강
너머 애들이 난을 일으키면 더욱 그렇다.

▲  아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정상 남쪽

봉수대 남쪽에는 쉼터와 조망대가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조망대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망
우동과 상봉동, 면목동 지역을 비롯해 아차산 산줄기, 동대문구 동부, 광진구, 성동구, 멀리
강남을 품은 대모산(大母山)과 구룡산(九龍山), 우면산(牛眠山)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비친
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봉화산 정상 조망대

▲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중랑구와 광진구, 성동구 지역)
멀리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봉화산 정상에서 상봉동으로 내려가는 소나무 산길

정상이란 자리는 꿀이긴 해도 한편으로는 독성도 적지 않아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이다. 하여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렇게 정상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상봉동 보현정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소나무가 무
성하여 그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후각이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며, 산길 주변
에는 조그만 바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오로지 흙길로 이루어진 묵동다목적체육관 기점 산길
보다 덜 차분한 모습이다.


▲  내려가면서 바라본 중랑구 지역
아파트로 거의 도배가 된 신내동(신내택지지구), 그 너머로 망우동과
면목동,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상봉동 보현정사 입구

정상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니 보현정사(普賢精舍)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이 절은 20세기 중
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역사가 매우 짧고 소장 문화유산이 없는 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항아리 겉돌 듯 짧막하게 둘러보고 나왔다. 여기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중랑구청 서
쪽에 자리한 신내12단지이다.

* 봉화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 아차산봉수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9


 

♠  신립의 아들로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무인, 충익공 신경진 묘역
(忠翼公 申景禛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5호

봉화산을 둘러보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넘쳐서 여기서 멀지 않은 망우동 용마공원으로 이
동했다. 용마공원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공원으로 그 서쪽에 충익공
신경진을 비롯한 그의 평산신씨 묘역이 숨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신경진 묘역과 신도비는 그
묘역의 갑(甲)이자 상징과 같은 존재로 따로 지방문화재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신경진 묘역은 묘와 신도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호랑이가 담배를 물고 나타나도 이
상할 것이 없는 깊은 산자락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이 나날이 팽창하면서 면목동과 망우동 지
역이 개발되어 묘역 서쪽과 북쪽, 남쪽까지 주거지가 들어찼고, 동쪽으로 가늘게 용마산 산줄
기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 동쪽 마저 도로를 내고 주차장을 닦으면서 도로 속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묘역의 주인공인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은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집안으로 임진왜란 초기 충주 탄금대(단월역) 전투를 거하게 말아먹고 사망한 신립(
申砬, 1546~1592)의 아들이다. 자는 군수(君受)로 서울 출신이며, 전사한 아비의 후광으로 선
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다.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으며, 태안군수와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진 첨사(僉使)가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그들
이 보낸 사신을 접대하지 않고 내쫓았는데, 그 일로 체임(녹봉을 당분간 받지 못함)이 되기도
했으며, 이후 함경도 갑산(甲山)부사가 되었고, 함경남도 병마우후(咸鏡南道 兵馬虞候)를 지
내던 중,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를 지내 함경도 변방을 관리
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올라 여진족의 후금(後金)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
책을 펼치자 이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고 관직을 접고 쉬다가 1620년 광해군에게 반감을 품은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반란을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얼떨떨한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위에 세우기로 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반
란 준비를 꾀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면서 이듬해 자행된
인조반정(1623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정 이후 인조의 명으로 공조참의(工曹參判).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
兵曹參判)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 호위청(扈衛廳). 포도청(捕盜廳) 대장을 겸해 왕실을
호위했다. 또한 반정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이면서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운 공로로 이
름도 허벌나게 긴 '분충찬모입 기명륜정사 일등공신(奮忠贊模立 紀明倫靖社 一等功臣)'에 녹
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뚜껑이 뒤집혀 난을 일으키자 인조와 서인 패거
리들은 충남 공주(公州)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신경진은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했고, 난
이 평정되자 이괄이 추대했던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멋대로 쳐죽여 대간의 탄
핵을 받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평성
부원군(坪城府院君)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던 신경진은 자신의 공과 지위를 과시하며 남의 집터 수천 칸을 빼앗
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동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 목릉(穆陵)
과 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이 되었으나 능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다시 복직
되어 형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했다. 그리고 이듬해 1636년에는 병조판서까지 겸하게 되었으
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급하게 줄행랑을 친 인조를 받들며
청나라군에 대항했다. 허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 채, 소규모의 도발만 벌이며 조선군의 식량
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인조는 결국 배겨나지 못하고 45일만에 문을 열고 항복했다.

1637년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
했는데 이때 호란 이후 민심수습책을 논의하고 지방 수령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했다.
1638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좌의정이 되었으며, 최명길과 의논해 승려 독보(獨步)
를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
선의 명나라를 향한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641년에 다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인질로 잡혀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했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서 병으로 사퇴했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0일도 안되어 병사했다.

신경진은 그의 아비를 닮아 무예가 뛰어났다. 그래서 훈련도감, 호위청 등의 친병(親兵) 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왕의 호위를 맡았다. 또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 시절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까지 꿰고 찬
것이다.
그는 외교 활동에도 소질이 있어 청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가면서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
섭을 줄이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분열되어 훈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자신이 무신임을 내세워 간여하기를 꺼렸다. 또한 송시
열 등의 사림을 천거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1651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은혜를 받았던 송시열이
직접 찬한 내용이 신경진 신도비에 전하고 있다.


▲  신경진 신도비(神道碑)

▲  옆에서 본 신도비

▲  신도비의 뒷모습

신경진 묘역의 백미는 바로 신도비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묘역이 아닌 신도비만 지방문화재
로 지정될 만큼 아주 괜찮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서쪽
에 비석을 두었다. 아마도 신경준묘의 신도는 서쪽이었던 모양이다. 비석 높이는 3.68m로 특
히 귀부(龜趺)의 몸집이 상당해 더욱 장대하게 다가온다.
땅바닥에는 바닥돌과 기단석을 차례대로 깔고, 그 위에 거북 모양의 귀부를 두었다. 그의 얼
굴을 보면 마치 성이 난 듯, 무엇인가를 뿜어낼 듯한 기세 같으며, 입에는 동그란 무언가를
물고 있으니 아마도 여의주가 아닐까 싶다. 앞다리는 바짝 웅크려 앉아있는 모습이며 등짝에
는 세월의 검은 때가 가득 입혀진 거북 등껍질이 새겨져 있다. 뒷쪽에는 뒷다리와 두꺼운 꼬
랑지가 서쪽으로 말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생동적이고 귀여워 진짜 거북의 꼬랑지 같다.

귀부 위에는 빗돌을 세워 신경진의 생애를 다루었고, 꼭대기에 정교하게 처리된 용머리 장식
인 이수(螭首)를 두었다.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비석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덕에 '거북비'라 불리웠는데, 귀부가 지나
치게 커서 전체적인 비례는 좀 떨어진다. 허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 조선 중기
신도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건강을 위해 비석 주위로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도비 주변이 황당하게도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라 차들이 자칫 바퀴를 잘못 굴릴 경우 비석의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  신경진 묘역

신도비 동쪽 언덕에는 신경진 묘역이 자리를 닦았다. 묘역과 신도비 사이에는 주차장이 닦여
져 있는데, 묘역 주변은 철책을 둘러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허나 철책 바깥에서
도 보일 것은 다 보이니 굳이 개구멍을 찾거나 철책을 넘어갈 필요는 없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신경진 묘역은 호석을 두른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으로 이루어진 이 땅
에 흔한 사대부(士大夫) 묘역 스타일로 주변이 나무로 무성하다. 특히 동자상을 상석 주변에
깔고 있어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묘역 동쪽 산자락에는 신경준의 선조와 후손들 무덤 3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신경준묘역을 비
롯한 이들 묘역을 덩어리로 묶어 평산신씨 묘역이라 부르는데, 신말평(申末平, 1452~1509)과
그의 아들인 신상(申鏛, 1480~1530), 신경준의 손자 신여철(申汝哲, 1634~1701) 등이 묻혀있
으며, 그중 신상은 신도비도 갖추고 있다.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묘역으로 조선 초/중/후기 무덤 양식을 고루고루 살펴볼 수 있
으며, 묘역 보호를 위해 철책을 꽁꽁 두른 탓에 접근하지는 못했다. 어딘가 숨겨진 개구멍이
있을 듯 싶지만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신경준묘와 신도비
만 염두에 두었고,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미련없이 선을 긋고 자리를 정리했다.

신경진 묘역을 끝으로 5월 초, 봉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익공 신경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69-1 (망우로70길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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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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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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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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